CAFE

[탐방 공지] 2019.10.22(화) 오전 11시, 1/6호선 "동묘앞"역 9번 출구[외부] --->단종비와 배정자의 자취를 찾아

작성자서울사람|작성시간19.09.30|조회수1,230 목록 댓글 35


 아름다운 5060 <역사 탐방 동호회> 
 2019.10. 22(화), 단종비와 배정자의 자취를 찾아

역사 탐방 장소

 단종비와 배정자의 자취를 찾아(서울  종로구  창신동~숭인동) 


*항상 우산, 또는 우비 지참(우천 불구)


*서울 종로구 창신동 소재의 사찰인 안양암을 찾아 배정자의 자취를 확인하고,숭인동 일대에 남아 있는 조선 제 6대 임금 단종의 왕비였던 정순 왕후 송씨의 자취가 남아 있는 관련유적을 돌아 본 후, 회원사이의 유(交遊)를 위해, 근처 식당에서 함께 식사를 한다.


 역사 탐방 일자

2019.10.22(화요일)

 모이는 시간

2019.10.22(화) 오전 11시까지


※ 안내는  당일 오전 10:40 경까지  현장 도착 예정임

 모이는 장소

 (서울 지하철) 1/6호선 <동묘앞>역 9번 출구 [외부=돌의자에서]

※ [사진 1] 참조바람 


 역사 탐방할 코스

오전 11:00, 지하철 <동묘앞>역 9번 출구 외부 집결[사진 1] --->

인원 파악및 간단한 자기 소개 --> 도보 8분 --> 안양암(사찰) -->

도보로 내려 와서(도보 6분) ---><동묘앞>역 10번 출구앞:마을 버스

(종로 03번)탑승 ---> 종점:낙산 공원 하차 ---> 비우당--> 청룡사

--> 정업원 터 --> 동망봉/동망정  --> 묘각사(사찰) --> 풍물거리 시장

--> 영도교(다리) -->식당:장흥 한식 부페

--> 지하철 <동묘앞>역 4번 출구 --> 해산,귀가(오후 3시경)

 역사 탐방할 거리

    도보 걷는 시간: 약 2시간 

가벼운  복장(모자,신발 등 포함) 착용바람 

 역사 탐방할 시간

 오전 11시  ~  오후 2시 경

*식사 시작 시간: 오후 2시 (종료:오후 3시경)

 난이도

 난이도는 <하> 

*오르막길은 마을 버스 탑승으로 해결;내리막 길이 약간 있음.

 준비 할 사항

 식수, 모자(양산), 간식,  마스크(미세 먼지 대비),

 미끄러지지   않는 신발, 카페 명찰, 기타 필요한 물품

*항상 우산, 또는 우비 지참 [폭우,폭설 등 제외하고, 우천 불구]

 회비및 기타

 사항

           


1.식당명및 전화:<장흥 한식 부페>, (02)2233-8117


2.메뉴:한식 부페


3.식사비(주류 포함): 8천원  <-- 잔돈 준비 부탁

(정확한 식사 인원을 확인하기 위해, 석 확인시 식사비를 받을 예정임)


*주류는 4인  1병을  기준으로 하고, 초과시는 개인이 구매함.

*주류 판매 가격:맥주,소주:각 4천원/막걸리:3천원  


*사정상, 또는 위 메뉴가 적합하지 않아, 뒷풀이(식사) 불참 회원은

참석 꼬리말에 의사 표시 부탁드림

 ※ 본 <아름다운 5060: 역사 탐방 동호회>는 비영리 단체이므로, 탐방 중 발생하는 어떠한 안전사고에

 대해서도 카페나, 카페지기, 방장 및  진행자는 민, 형사상의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

※ 개인의 안전은 각자에게 있음을 인지하시고, 이에 동의하시는 분들만 참가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참가 신청을 한 분들은  이에 동의하는 것으로 간주하겠습니다.  

 

본 "역사 탐방 동호회"는 역사 탐방을 통해, 유사한 취미를 갖고 있는 회원간의

 교유(交遊)를 지향하므로,모임시 반드시 카페 명찰을 패용하고 (없는 분은 현장에서 1천원에 구매 가능),간략한 자기 소개와 더불어,식사 시에는 서로 잘 모르는 회원과 옆자리에 앉아 인사를

나누시기를 권장합니다.  

                    

  




 


*。 * ˚* 。* 。 ˚ 。。 。*。˚*。 * ˚* 。*
˚ 。。 * 。˚*。 * ˚* 。* 。 ˚ 。* 。˚*。 * ˚* 。 。*
_ *_♣_卨_♣†__♣_卨_♣†。_ *_♣_卨_♣†__♣
흐르는곡/♬봄이 오는 길(박인희:1946~)
 



 역사 탐방  동호회  운영진   연락처(존칭 생략)

역사방 방장

 달리도

연락처 :010-2788-8642


 

1일 안내(대장)



서울사람 

 


연락처 :010-3919-0787


  

 


         
          

                                      서울사람님.jpg                                                                                        

                       <달리도>(범띠)                      <서울사람>(양띠)




+++++++++++++++++++++++++++++++++++++++++++++++++++++++++++++++++++++

1)창신동 지역: 안양암(安養庵:사찰)


불교 종파의 하나인 "염불정토종"의 본찰로서,1889년 건립되기 시작, 종로구 창신동

130 번지에 위치한다.(종로구 원서동에 있는 한국불교미술박물관이 자매기관임)


*안양암의 창건과 내력에 대해서는 안진호(安震湖)가 편찬한 『안양암지(安養庵誌)』(1958)에 자세히 전한다.


이 기록에 따르면, 안양암(安養庵)은 1889년 청신사 이창진(李昌鎭:성월거사)이 환옹(幻翁)스님으로부터 거사계를 받고 절 이름을 칠성각이라 하고, 건물을 지은 것이 시초라고 한다. 그리고 7월에는 아미타삼존상을 봉안하고, 후불탱, 신중탱, 산신탱을 함께 봉안하였다. 1899년에는 삼존상에 개금하고 독성각을 새로 짓고, 독성탱과 산신탱을 조성하였는데 이때 절 이름을 안양암으로 바꾸었다.


1901년에는 성월 거사가 환옹스님에게 선주(善住)라는 법명을 받고 정식으로 승려가 되었다. 이로써 창건 이래 13년간 재가신도들에 의한 신앙결사로 유지되던 사찰이 변화를 하게 된다. 이후의 사찰 연혁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909년에는 절 왼쪽 절벽에 관음상을 조각하고, 대웅전에 문고산(文古山) 스님이 조성한 감로탱을 봉안하였다. 1911년에는 관음상 예배를 위한 공간인 관음전과 염불당을 건립하였다. 1914년 2월에는 대웅전 10칸을 새로 짓고, 4월에는 신중탱과 산신탱을 개조(改造)하여 봉안하였다. 1915년에는 3월에 대웅전을 단청하고, 7월에 명부전 6칸을 지었다. 1916년 5월 27일에는 성월대사(性月大師)가 주지에서 물러나고 양학(養鶴) 스님이 주지에 부임하였다. 또한 조선 사찰령에 의해 봉은사 말사로 등록되었다. 1917년 4월에는 대웅전에 팔상탱을 조성하였고, 1919년 7월에 아미타괘불탱을 조성하였다. 1922년 6월에는 명부전에 시왕탱을 조성하였고, 1924년에는 칠성탱을 조성하고 신중탱, 관음탱을 개조 봉안하였다. 또한 문고산(文古山)이 조성한 대웅전 신중탱, 명부전 지장시왕탱, 시왕상을 봉안하였다. 1926년에는 영각을 짓고 아미타삼존탱을 봉안하였고, 1930년 6월에 지장시왕괘불탱을 조성하였다. 1934년 12월에는 천오백불상 조성을 시작하였고, 1936년에는 천오백불전 건립 공사를 시작하였다. 1937년 4월에는 천오백불전을 완공하고 천오백불상과 신중탱을 봉안하였다. 1939년에는 강당 15칸을 건립하였고, 1941년에는 화경(和鏡)이 조성한 지장삼존과 판관 등 권속들을 명부전에 봉안하였다. 1942년에는 염불당 중건을 시작하여, 이듬해 8월에 완공하였다. 이로써 안양암은 오늘날과 같은 도량을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안양암(安養庵)은 정토도량(淨土道場)이다.


또한 이곳에는 조선 말기부터 조성된 전각, 불화, 불상, 공예품 등이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는데, 대부분이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다시 말해서 사찰 전체가 문화재인 것이다. 작은 대문을 들어서면서부터 눈에 보이는 하나하나가 조심스럽다.


안양암은 구한말 황실기도처였다고 사찰 관계자는 전한다.


궁중의 상궁 나인들이 나이가 들어 궁궐을 나올 때 거처하는 곳이 현재 창신동 롯데캐슬 아파트 부근인데 예로부터 이곳은 궁터라고 한다. 상궁나인들이 평생을 살며 안양암에서 기도를 하였는데 별세하기 전 또는 별세 후 그들이 가지고 있던 유물들을 안양암에 기증, 희사하다보니 현재 안양암이 소장하고 있는 문화재자료는 1,700여 점에 이른다고 한다.

 

서울과 근교를 통틀어 이만한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는 사찰은 가히 찾아보기 힘들 정도이다. 2005년 안양암 소장 불교미술품 700여 점으로 "안양암에 담긴 중생의 염원과 꿈"이라는 주제의 특별기획전이 한국불교미술박물관에서 개최된 바가 있다.


*이 외에 다른 사찰과 마찬가지로 사찰 입구에 공덕비가 여러 개 있는데, 그중 三和婦人會의 기념비에 "顧問 裵貞子"의 이름이 보인다.


*배정자(裵貞子:1870~1952, 다야마 사다코, 아명:裵紛男/裵紛南)

 [아래는 위키 백과에서 인용한 것임,내용의 정확성 여부는 엄밀한 고증이 필요함]

배정자(裵貞子,일본식 이름:田山貞子 다야마 사다코), 1870년 2월 23일~1952년 2월 27일)는 조선의 비구니이자, 일본 제국의 조선 정보원,외교관이다.

생부가 민씨 일파에게 처형당한 뒤,연좌법에 의해 관비가 된 어머니를 따라 여러 곳을

떠돌아 다니다가 밀양의 기생으로 팔려갔으나 탈출,1882년(고종 19년) 통도사의 여승이 되었다.

1885년 일본으로 도피하여 1887년 이토 히로부미의 양녀가 되었다는 설이 있다.


그 후 일본 정부로부터 밀정 교육을 받고 1894년 귀국하여 대한제국일제 강점기

일본의 밀정으로 활동했으나 이를 입증할 사료는 없다.

1920년 일본군의 시베리아 출병 때는 만주,시베리아를 오가며 군사 스파이로 활약했다.

그 후 간도,상하이 등지에서 독립 운동가들의 체포를 위해 암약하다가 1927년 은퇴했다.

1949년 반민족 행위 특별 위원회에 친일 반역자로 체포되었다가 풀려나서, 1952년 성북동 자택에서

사망하였다고 한다. 

본관은 김해이며, 경상남도 김해군 출신이다.본명은 배분남(裵紛男,裵紛南)이다.




2)숭인동 지역:단종비의 자취가 남아 있는 곳


선 제 6대 임금 단종(1441~1457) 의 왕비였던 정순왕후(定順王后) 송씨(宋氏:1440~1521)는 14세의 나이에 왕후로 간택되었다.


 그러나 이듬해 단종은 숙부인 세조(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노산군으로 강등,

강원도 영월로 유배가는 단종과 정순 왕후는 청계천의 다리인 "영도교"의 먼 발치에서 영원히 헤어지게 된다.


  직후 부인으로 강등된 송씨는 현재 청룡사 근처의 움막에서 시녀들과 기거하면서, 매일

단종의 안위를 위해 기도하였지만, 다섯 달 만에 사사(賜死)를 당하게 된다.

 

  그 이후 송씨는 매일 아침,저녁으로 동망봉에 올라, 영월을 바라보며 단종의 명복을 빌었다고 한다. 송씨는 시녀들이 동냥해 온 것으로 끼니를 잇고 염색업을 하며 어렵게 살았는데, 이를 안 세조가 집과 식량 등을 내렸으나 끝내 받지 않았다. 한편, 그녀를 가엾게 여긴 동네 아녀자들이 조정의 눈을 피해 그녀의 집으로 먹을 것을 건네주고자 시장을 조직하는 일도 있었다.


 숭인동에는 송씨가 생계를 꾸리기 위해, 옷감에 자주색 물을 들였던 장소인 "자주동샘"(<--자지동천:紫芝洞泉) 등 관련 유적이 아직도 남아 있다.


 최근 서울 종로구에서는 단종을 그리워하며 홀로 60 여년의 삶을 살아 간 정순 왕후의 애달픈 이야기를 돌아보기 위해, 2008년부터 매년 4월에 숭인동 동망봉에서 정순 왕후의 넋을 기리는 행사를 개최하고 있다.  





"역사는 승자(勝者)의 기록"이겠지만, "역사 탐방 동호인은 패자(敗者)에게 더욱 연민(憐憫:불쌍하고 가엾게 여김)이 가는 법"이 아니겠는가!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 주요 관련 사진 (극히 일부만 게시함)

  



1.집결 장소: 1/6호선, "동묘앞"역 9번 출구 [외부]

  *집결 시간: 2019.10.22(화) 오전 11시까지 <--- 시간 엄수  부탁 드림










2. 안양암 관련 사진 


 1)정문 우측 하단의 돌비석: "三角山 安養庵"





2)정문(일주문은 없음) 







편액 끝(좌측)에 “팔십옹해정당(八十翁海貞堂)”이라는 서명이 있는데, 이는 海士 金聲根(1835~1919,조선 말기의 문신,재상이며,서예가. 字:仲遠, 號:海士, 또는 海貞堂)을 가리킨다.




3)대웅전






기둥에는 『석문의범(釋門儀範)』 대장전청(大藏殿請) 나오는 내용을 해사(海士) 김성근(金聲根)이 쓴 주련(柱聯)이 걸려있는데, 그 내용과 뜻은 다음과 같다.


불신보편시방중(佛身普徧十方中)      부처님의 법신은 시방(十方:모든 방향)에 두루 하시니

삼세여래일체동(三世如來一體同)      삼세(현재,과거,미래) 여래도 모두 한결 같으시네.

광대원운항부진(廣大願雲恒不盡)      광대한 서원의 구름 항상 다함이 없으시고

왕양각해묘난궁(汪洋覺海渺難窮)      드넓은 깨달음의 바다는 아득하여 헤아리기 어려워라


정면을 제외한 3면 벽에는 돌아가면서 십우도가 그려져 있으며, 특히 오른쪽 벽면 아래쪽에 “상락아정 천우사화(常樂我淨 天雨四花)”라고 글씨를 도안화 하여 써 놓았다.



4)常樂我淨 天雨四花

 


 

 *상락아정(常樂我淨): 열반에 갖추어져 있는 네 가지 성질·특성.

영원히 변하지 않는 상(常), 괴로움이 없고 평온한 낙(), 대아(진아(眞我)의 경지로서

집착을 떠나 자유 자재하여 걸림이 없는 아(我), 번뇌의 더러움이 없는 정().




*天雨四花:부처님이 법화경을 설법할 때, 하늘에서 4가지 꽃이 비처럼 내렸다는 뜻으로,

 4가지 꽃은 연꽃 등으로, 보는 이로 하여금 악업을 떠나게 한다는 천상의 꽃이다.




안에는 아미타삼존상(유형문화재 190)이 모셔져 있으며 19세기 말~20세기 초를 대표하는 화승들이

조성한 아미타후불도(유형문화재 185), 팔상도(유형문화재 187), 감로도(유형문화재 186), 신중도(문화재자료 15), 극락왕생도(유형문화재 188) 등이 봉안되어 있다.




5)마애관음보살좌상(磨崖觀音普薩坐像) 

 


이 상은 안양암 대웅전 오른쪽 절벽 바위에 새긴 마애관음보살상이다.

관음보살상은 안양암의 상징물로 여겨지고 있다.

바위 절벽에 관음전(觀音殿)이라는 폭이 좁은 전실건물(前室建物)을 세우고, 이 안에 얕은 부조로 감실을 마련한 후  관음보살좌상을 새겼는데, 이는 전형적인 마애보살상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아래는 최근에 세운 안내문



6)요사채의 萬日會 편액






만일회(萬日會)는 불교 종파의 하나인 정토종(淨土宗)에서 하는  행사의 하나로, 극락세계 태어나기 원하여 천일(千日) 또는 만일(萬日) 걸쳐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이라고 염불 수행 하는 것을 가리킴.



7)1500 佛殿


불상 1,500개를 모셨는데, 각각 그 표정이 다르다고 함


8)사찰 입구의 4개 비석 




[좌로부터]

居士 李善行 丁骨 舍利碑

重建主 李泰俊 功德碑

安養庵  事蹟碑

南無阿彌陀佛  



9)三和婦人會에서 세운 紀念碑 





위 비석에는 1939년 三和婦人會 10주년과 重建을 기념하여 세우고,1943년 삼화부인회의 재설치 및 염불당 중건을 기념하여 새겼다고 적혀있다.

(공덕비 우측 하단에 "顧問 裵貞子"가 새겨져 있음) 



3. 낙산 공원 안내도 





4.낙산 공원의 한양도성 위에서 바라 본 서울(종로구 일대) 풍경 

  

한양도성이 처음 완공된 것은 약 620년 전이다. 태조 5년(1396) 음력 1월 9일부터 2월 28일까지 49일 간, 이어서 8월 6일부터 9월 24일까지 49일 간, 모두 98일 동안 전국 백성 19만 7천 4백여 명을 동원하여 쌓았다. 전체 공사구간(총 5만 9,500척)을 600척씩 97구간으로 나누고 각 구간을 천자문 순서에 따라 이름 붙인 뒤 군현(郡縣)별로 할당하였다. 태조 때 처음 축성할 당시 평지는 토성으로 산지는 석성으로 쌓았으나, 세종 때 개축하면서 흙으로 쌓은 구간도 석성으로 바꾸었다. 세월이 흐름에 따라 성벽 일부가 무너져 숙종 때 대대적으로 보수 · 개축하였으며 이후에도 여러 차례 정비하였다. 성을 쌓을 때에는 일부 성돌에 공사에 관한 기록을 남겼는데, 태조 · 세종 때에는 구간명 · 담당 군현명 등을 새겼고, 숙종 이후에는 감독관 · 책임기술자 · 날짜 등을 명기하여 책임 소재를 밝혔다.

한양도성은 근대화 과정에서 옛 모습을 상당 부분 잃어버렸다. 1899년 도성 안팎을 연결하는 전차가 개통됨에 따라 먼저 성문이 제 기능을 잃었고, 1907년 일본 왕세자 방문을 앞두고 길을 넓히기 위해 숭례문 좌우 성벽이 철거되었다. 이어 1908년에는 평지의 성벽 대부분이 헐렸다. 성문도 온전하지 못하였다. 소의문은 1914년에 헐렸으며, 돈의문은 1915년에 건축 자재로 매각되었다. 광희문의 문루는 1915년에 붕괴되었고, 혜화문은 1928년에 문루가, 1938년에 성문과 성벽 일부가 헐렸다. 일제는 1925년 남산 조선신궁과 흥인지문 옆 경성운동장을 지을 때에도 주변 성벽을 헐어버리고 성돌을 석재로 썼다. 민간에서도 성벽에 인접하여 집을 지으며 성벽을 훼손하였다. 해방 이후에도 도로 · 주택 · 공공건물 · 학교 등을 지으면서 성벽이 훼손되는 일이 되풀이되었다.

한양도성의 중건은 1968.1.21 사태 직후 숙정문 주변에서 시작되었고, 1974년부터 전 구간으로 확장되었다. 하지만 일단 훼손된 문화재를 완벽하게 회복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과거에는 단절된 구간을 연결하는 데에만 치중하여 오히려 주변 지형과 원 석재를 훼손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서울시는 한양도성의 역사성을 온전히 보존하여 세계인의 문화유산으로 전승하기 위해, 2012년 9월 한양도성도감을 신설하고, 2013년 10월 국제기준에 부합하는 한양도성 보존 · 관리 · 활용 계획을 수립하였다.


한양도성은 2014년 현재, 전체 구간의 70%, 총 12.8km(2014년 기준) 구간이 남아있거나 중건되었다



5.비우당(庇雨堂:비를 가리는 집)


 단종의 사후, 송씨가  생계를 꾸리기 위해, 이곳 "자주동샘"(<-자지동천:紫芝洞泉)

에서,옷감에 자주색 물을 들여,팔아서 생계를 유지하던 곳으로,후에는 실학자 이수광(1563~1628)이 살았던 곳.


5-1. 비우당(庇雨堂)을 복원해 놓은 것으로, 그  위치는 현재 이 곳이 아니며, 창신역

       근처로 추정된다.




 5-2. "자주동샘"(<-자지동천:紫芝洞泉):

단종이 폐위된 뒤 단종비 송씨가  빨래를 했던 곳으로 전해지는  곳


정순 왕후는 옷감에 자주색 물감을 들여, 팔아서 생계를 유지하였다고 한다.


 5-2-1  당시의 빨래터

 





5-2-2   "자주동샘"(<-자지동천:紫芝洞泉) 각자(刻字)






6. 청룡사(靑龍寺:비구니 사찰)

대한 불교 조계종 직할교구 본사인 조계사의 말사이다.


 [아래는 해당 사찰 안내문과 두산백과에서 주로 인용하였음]


 청룡사는 신라말  도선() 국사의 유훈을 따라, 서기 922년(고려 태조 5년) 태조 왕건()의 명으로 창건하고, 비구니 혜원()을 초대 주지로 주석하게 한 이후,재까지 한국 비구니 계의 종가로서의 위상과 전통이 수립된 사찰이다.

   또한 해당 사찰에는 고려 공민왕비 혜비,조선 태조의 따님인 경순 공주, 단종 왕비 정순 왕후 등 왕실이 지친(至親:"가까운 친족"이라는 으로, 부모 자녀 사이 또는 형과 아우 사이 이르는 )인 내명부 여인들이 청룡사로 출가,또는 주석했던 역사적 내력이 깃든 사찰이다.

  1456년(조선 세조 2년) 단종이 죽은 후, 단종의 비인 정순왕후() 송()씨가 이 절에 머무르며, 날마다 동망봉()에 올라, 단종이 귀양가서 죽은 영월 쪽을 바라보며 울었다고 전해진다.

  영조가 이곳이 정순왕후가 머물렀던 곳임을 알게 되어, 1771년(영조 47년) '정업원구기(淨業院舊基;정업원 옛 터)'라는 비석을 세워 표지로 삼도록 하였다. 


 1823년(순조 23년)에는 순원왕후()의 병세가 깊어지자, 부원군김조순()이 이 절에서 기도를 올렸는데, 왕후의 병이 나은 뒤, 김조순이 절 이름을 청룡사로 바꾸었다. (정업원은 현재 청룡사의 전신(前身)으로 추정됨:인용자)


 1853년(철종 4년) 김조순의 아들 김좌근()이 중창하였다. (청룡사 등 모든 사찰은 전쟁,화재 등의 이유로,중창 등의 과정을 겪음:인용자)




6-1. 사찰 입구


6-2. 사찰 내의 우화루(雨花樓)









단종이 강원도 영월로 유배되기 전 날, 청룡사의 우화루에서  정순 왕후와 애끓는 이별을 한 곳. 






7. 업원(淨業院) 터 (청룡사 내에 위치함)

 

  단종이 죽은 후, 송씨는 관노로 강등되었다가, 세조의 명으로 정업원으로 보내졌다.

 *정업원은 현재 청룡사의 전신(前身)으로 추정됨


정업원은 고려말부터 조선 시대까지,  도성(都城) 내에 있었던 여승방(女僧房)으로,


송씨가 궁궐에서 쫓겨 나와 평생을 기거하던 곳으로, 현재는 일부 터만 남아 있다.


 

  7-1 최근 세운 안내문






7-2  정업원구기'(淨業院舊基;정업원 옛 터) 비석


 영조가 이곳이 정순왕후가 머물렀던 곳임을 알게 되어, 1771(영조 47)

'정업원구기'(淨業院舊基;정업원 옛 터)라는 비석을 세워 표지로 삼도록 하였다.









7-3. 영조가 직접 쓴  현판


 '前峯後巖於千萬年(앞에는 봉우리, 뒤에는 바위, 오랫동안 영원하리라!)




8.동망봉과 동망정

 

 8-1. 동망봉(東望峰) 표석

정순 왕후가 지아비 단종의 안위와 명복을 빌기 위해  매일 올랐던 봉우리




 8-2 동망정(東望亭)

 정순 왕후를 기리기 위해 후인들이 지은 팔각정

 







9.묘각사(관음종 총본산 사찰)



  1942년 창건 이래 현재까지, 『법화경』을 중심으로 수행과 대중 불교운동을 지향한 법화신앙()의 중심사찰로서, 현 위치에 절을 세우면 서울이 평안하고 시민생활에 안정을 가져온다는 풍수지리설에 의하여 터를 잡았다고 한다.



10. 영도교(永渡橋)


1457년(세조 5년) 음력 6월, 단종이 영월로 유배갈 때, 먼 발치에서 정순 왕후와 헤어진 곳으로, 성종 때 이 다리를 보수하여, 영도교(永渡橋)라고 하여, "영영 이별하는 다리"라고 한다.


지금 사람들은 과거 단종비 정순 왕후의 애달픈 이야기를 알지 못하고,물건을 펼쳐 놓고 흥정하기에 바쁠 뿐......



10-1. 멀리서 본 영도교

 



 10-2.  가까이서 본 영도교






경기도 남양주시에 위치한 사릉(思陵)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사릉리에 있는 조선 제6대왕 단종비 정순왕후(定順王后) 송씨(宋氏)의 능. 


정순왕후(1440~1521)는 수양대군(首陽大君 = 뒤의  세조:1417~1468)이 왕위를 찬탈한 뒤, 단종(1441~1457)을 상왕으로 모시면서, 의덕대비(懿德大妃)가 되었고, 단종이 다시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되면서, 역시 부인(夫人)으로 강봉되었다.(후에 관노로도 강등되었으나, 세조가 정업원으로 보내, 평생을 서민으로 살았다)  


 

평생을 평범한 서민으로 보내다가 죽은 뒤, 단종의 누나 경혜공주(敬惠公主:1436~1473)의 남편인  

정씨가(鄭氏家) 묘역에 묻혔다가, 1698년(숙종 24)단종의 복위와 함께 정순왕후로 추상(追上)되고,

묘를 높여 사릉이라고 하였다.


*단종의 누나 경혜공주(1436~1474):

계유정난과 단종복위운동의 돌풍 속에서 남편 정종(鄭悰: ?~1461)과 함께 전라도 광주로 유배되었다가,1461년 순천부의 관노가 되었고, 1473년(성종 6년) 세상을 떠났다.





사릉.JPG



 11.당일 식당및 메뉴

 *식당명:장흥 한식 부페   *식사비:8천원(주류 포함)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 북마크
  • 공유하기
  • 신고하기

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바람길 | 작성시간 19.10.22 오늘 일이 생겨서 참가 못합니다.
    죄송합니다^^
  • 답댓글 작성자서울사람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9.10.22 알겠습니다
  • 작성자고천 | 작성시간 19.10.22 참석합니다~
  • 답댓글 작성자서울사람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9.10.22 감사합니다
  • 작성자서울사람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9.10.22 14명 참석,감사합니다
댓글 전체보기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