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odstock festival( 1969 8 ):위키 백과에서 복사 해 옴( 복사 허용에 감사합니다.):2018. 1. 25
작성자우리별작성시간18.01.25조회수251 목록 댓글 3우드스탁 페스티벌
우드스탁 페스티벌(Woodstock Festival)은 1969년 8월 15일부터 3일간 미국 뉴욕 주의 베델 평원에서 개최된
축제이다. 정식 명칭은 The Woodstock music and art fair 1969이다.
우드스탁 페스티벌(Woodstock Music and Art Fair)은 1969년 8월 15일부터 3일간 뉴욕 주 북부 베델 근처
화이트 레이크의 한 농장에서 '3 Days of Peace & Music'이라는 구호 아래 음악 페스티벌이 열렸다. 입구를
부수고 들어간 사람의 수가 너무 많아서 정확한 수치는 알 수 없지만 30만명 이상의 사람들이 농장으로 몰려
갔다고 전해진다.
우드스톡은 음향 시설이 형편없었고 음식과 물과 화장실도 턱없이 부족했다. 게다가 폭우가 쏟아져 농장은
거대한 진흙뻘 같았다. 하지만 이런 열악한 상황도 우드스톡에 이르러 절정에 달한 미국의 히피문화, 즉 반문화
공동체의 열기를 누그러뜨리진 못했다.
부족한 샤워 시설과 폭우는 천진난만하게 물장구를 칠 물 웅덩이로 대체되었으며 진흙 뻘은 히피들의 낭만적인
놀이터가 되었다. 사랑과 평화의 모토를 단 그곳은 '우드스톡네이션'으로 명명되었다.
우드스탁 페스티벌은 4명의 젊은이들(존, 조엘, 아티, 마이클)이 돈을 대고 기획을 해서 드디어 1969년 8월 15일
부터 열리게 되었다.
사실 우드스톡 페스티벌은 지역 당국과 주민들의 반발로 인해 공연 자체가 무산될 위기에 처했으나 인근 지역에
살고 있던 막스 야스거라는 사람이 자신이 소유한 농장을 제공하여 무사히 공연이 개최될 수 있었다.
우드스톡 페스티벌은 모든 장르의 록음악이 총집결한 한바탕의 잔치였다.
배경
1969년은 미국 내의 여러 사회문제들이 불거질 대로 불거진 해였다. 인종차별, 베트남 전쟁 참전에 대한 반전
시위 등으로 상당히 혼돈스러웠으며 60년대 초의 젊은 계층의 저항 정신은 약화되고 2차대전 직후에 태어난
베이비붐 세대는 소위 '꽃 운동(Flower Movement)'에 동참하며 히피족이라 불리게 되었다.
그들은 반전, 사랑, 평화를 외치지만 적극적인 의미의 사회참여가 아니라 도피적이자 이상향만을 찾는 소극적인
계층이었다.
우드스톡 페스티발이 열린 사흘 동안 우드스톡은 공연을 즐기고, 마약을 마음껏 즐기고, 사랑이 넘쳐나는 그들만
의 공화국이자 해방구였다고 할 수 있다. 당시 기성세대와 정부가 이 행사를 곱게 볼리 없었고, 언론의 힘이 컸던
시대였던 만큼 여론도 좋지 않았다.
하지만 히피가 주축인 관객들은 악천후와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별다른 사고 없이 그들의 열린 세상을 즐겼다.
최근 다시 열린 우드스톡 공연의 난장판과 비교하면 당시의 참여한 관중들이 어떤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는지
짐작을 할 수 있다.
경제적인 영향
우드스탁 페스티벌은 거대한 규모의 페스티벌의 상업적 성공의 전례가 되었다. 뮤지션의 높은 개런티(후(The
Who)( Greatful Dead는 ) 달러를 요구했다)와 입구를 부수고 무임승차한 청중으로 인해 페스티벌 자체는 130
만 달러의 큰 손실을 기록했다. 하지만 개봉 첫 5주 동안만 2천 5백만 달러를 벌어들인 영화[Woodstock]의
3장짜리 사운드트랙과 비디오 출시가 이어져 결과적으로 우드스탁은 총 5천만 달러라는 엄청난 수익을 남겼다.
사회적인 영향
우드스탁에서 미국 국가 [Star Spangled the Banner]를 조롱하던 지미 헨드릭스의 호기롭던 연주는 알타
몬트(Altamont)의 사건으로 극적으로 반전되었다.
1969년 전미 투어를 마친 롤링 스톤스는 팬들을 위한 무료 콘서트를 열었는데, 공연 하루 전에 장소가 바뀌었
음에도 불구하고 약 30만명이 샌프란시스코 남동쪽 알타몬트 고속도로 변으로 몰려들었다.
그런데 롤링 스톤스의 공연 막바지에, 경비대로 고용된 오토바이족 헬스 앤젤스(Hell's Angels)가 한 흑인 청
년을 살해하는 사건이 일어났고 그 광경은 투어 필름에도 담겼다.
우드스탁에서도 사망자가 나왔지만 낭만주의적 청년 문화의 화려함에 묻혀 잊혀진 바 있다. 그러나 알타몬트의
사건은 곧 이슈화되었고, 언론과 기성 세대의 집중 포화를 맞았다. 몬터레이 이후 여러 페스티벌에서 약물과
소요에 의해 사상자가 발생해왔지만, 알타몬트의 비극은 1960년대, 히피 반문화의 끝을 보여준 너무나 상징적인
사건이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1960년대 록 이데올로기의 한 단면을 드러낸 것이었다.
몬터레이와 우드스탁은 청년들을 하나의 문화 블록으로 형성시켰고, 1960년대의 낙관주의와 청년 연대의 상징이
되었다.
우드스탁은 그들에게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이상향 혹은 향수의 대상이 되었다. 우드스탁 페스티벌이 1969년
미국, 변화에 대한 갈망으로 끓어오르던 시기의 미국에서 열린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그것은 1960년대
카운터 처와 반전운동을 상징하는, 20세기의 가장 큰 문화적 사건이었다
** 개인적으로 저는 우두스톡 축제에서 지미 헨드릭스가 연주한 미국 애국가
( The Star-Spangled Banner ) 좋아 합니다.
물론 저는 미국인이 아님니다( 미국 국적을 가지 사람이 아닙니다 ).
댓글
댓글 리스트-
작성자비온뒤 작성시간 18.01.25 우드스탁 페스티발이 단순히 젊은이들의 축제를 넘어서 미국의 사회. 문화사적으로 한획을 그은 사건으로 볼 수 있군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
작성자금오싼 작성시간 18.01.28 참 음악이란 곳곳 마다 정성이 들어요....
세계인의 공통어~~ㅋ -
작성자레젶 작성시간 18.02.13 젖은 장발머리의 한 히피가 비에젖은 모포를 뒤집어쓰고
진흙뻘에 옹기종기 모여있는 히피들을 바라보는 장면이 떠오릅니다..
경악 그자체였던 저의 느낌..지금도 잊혀지지가 안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