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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 드 팝 친 구 들

The White Rose of Athens/Nana Mouskouri

작성자기라성|작성시간23.06.23|조회수128 목록 댓글 2
((( Nana Mouskouri / The White Rose of Athen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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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na Mouskouri는 출생(1934년 10월 13일 ~ )하였고, 1958년에 데뷔, 2008년에 은퇴하였다.

그리스의 가수. 전 세계에서 아테네의 흰 장미, 천상의 목소리
등의 수식어와 함께 극찬을 받았다. 재즈, 샹송, 종교음악 등 넓은 스펙트럼을 가졌다.

1934년, 그리스 크레타에서 태어났으며 3살 때 가족과 함께 
아테네로 이주했다. 어렸을 때부터 음악적 재능을 보였고 프랭크 시나트라, 
에디트 피아프 등 당대 유명 가수들의 노래를 들으며 자랐다.
16살 때 아테네의 음악학교에 입학해 오페라 성악을 전공했으나 가난한 집안 사정 때문에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재즈에 흥미를 가졌던 무스쿠리는 생계를 위해 재즈 클럽에서 노래를 하면서 대중가수의 길로 접어들었다.
그러던 와중 작곡가 마노스 하지다키스(Μάνος Χατζιδάκις)의 눈에 띄게 되어 1958년 렘베티카를 부르며 음악계에 데뷔했다.

1959년 그리스 음악제에서 대상을 수상했고, 곧 '지중해 음악제'에서도 대상을 받으면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나나 무스쿠리의 명성은 1960년대부터 그리스를 넘어 유럽 여러 나라들과 미국까지 널리 퍼졌다.
1962년 퀸시 존스의 추천으로 미국에서 성공적으로 음반을 냈고, 1964년에 카네기 홀에서 공연을 가지며 수많은 팬들이 생겼다.

1960년대 후반, 그리스의 혼란한 정치적 상황 때문에 프랑스 파리로 이주한 후, 20년 가까이 해외에서 거주했는데,
60년대 후반 발표한 음반들이 영국과 독일 등지에서 히트를 1971년에는 당해 최고의 가수로 선정되기도 했다.
20년간 그리스를 떠나 있었으나 1984년 그리스로 귀국한 후 1994년부터 1999년까지 신민주당 소속으로 유럽의회 
의원직을 재임하기도 했다.

1958년에 데뷔한 후 2008년 은퇴를 선언하기 전까지 50년간 4억장에 가까운 음반을 판매한 기록을 세웠다.

다만 2011년부터는 예전까지는 아니더라도 투어를 재개한 상태다.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에도 참가했는데 1963년 대회에 뜬금없이 룩셈부르크 대표로 나왔다. 

한국에서도 7080세대를 중심으로 잘 알려진 가수이기 때문에 한국인 팬들도 많으며, 
패티김, 송창식 등이 무스쿠리의 노래를 번안해 부르기도 했다.
한 때 12~13세 연하의 한국인 남성과 연인 관계였다는 소문이 있으나, 언론에 보도될 정도로 확인된 사실은 없다. 

1988년 88 MBC 서울국제가요제 공연을 위해 내한, 
2005년에도 내한 공연을 가졌고 2008년 은퇴를 선언한 후 은퇴 투어 공연 중에도 한국을 방문해 고별 공연을 가졌다.
태안 기름 유출 사고때 피해를 입은 어민들을 위해 공연 수익 1만 달러를 기부했다.

은퇴 선언 후 성사된 내한 공연 당시 측근의 설명에 따르면, 나나 무스쿠리가 한국에 대한 애정이 각별하다고 한다.
한국에서 자신의 노래가 인기를 끈 비결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는, 노래에 반영된 정서가 한국민의 그것과 통하는 바가
있기 때문 아니겠느냐는 답변을 하였다.

2010년에는 그리스 경제위기로 어려움에 처한 조국을 위해 연금을 반납하기로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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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ana Mouskouri - 대표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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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손수건(Me T'Aspro Mou Mantili)
어메이징 그레이스(Amazing Grace)
되풀이 하여(Over And Over)
사랑의 기쁨(Plaisir d'amour)
내게 말했어요(Μίλησε μου)
Only Love
Love story
Why Worry

검은색 뿔테안경과 단발 생머리는 나나 무스쿠리의 상징이다.

나이 80을 넘긴 지금에 와서는 무색한 말이지만 과거에는 대단한 동안이기도 했다.

의외지만 한국 드라마와도 나름 인연이 깊다. SBS의 형제의 강과  야인시대의 시라소니 린치사건과,
복수전 끝부분에 Gloria Eterna가 OST로 쓰인 적이 있고, 드라마 하늘이시여에도 'Lascia Ch'io Pianga(울게 하소서)'가
OST로 쓰였다.

2005년 그랜저 광고에서는 'Try to Remember'가 배경음악으로 활용되었다.

그리스가 2차 세계대전 후 지중해 관광의 중심이 된 데는
1960년에 개봉된 ‘일요일은 참으세요(Never on Sunday)’가 대성공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아테네의 항구 피레우스 부근이 ‘영업장’인 창녀 일리아의 매력에 빠진 미국인 작가 호머가 일리아를
문화와 교양을 지닌 숙녀로 변신시키려다가 실패하는, 엎치락뒤치락하는 과정을 그린 이 영화는 1961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여우주연상 후보작으로 오르고 주제가인 ‘피레우스의 아이들’은 주제가상을 받았습니다.

일리아를 연기한 그리스의 금발 미녀배우 멜리나 메르쿨리(1920~1994)는 세계적 배우가 됐고,
그가 부른 ‘피레우스의 아이들’은 1960년대 한국 시골 어린이들도 흥얼거릴 정도로 대히트를 했습니다.
영화가 이처럼 성공하면서 영화에 비쳐진 그리스의 고대 문화유산과 민속을 구경하고,
에게 해의 풍광을 즐기려는 사람들도 늘어났습니다.

‘일요일은 참으세요’로 세계적 명성을 누리게 된 그리스 여성과 노래는 멜리나 메르쿨리와 ‘피레우스의 아이들’ 말고 또 있습니다. 나나 무스쿠리(1934~ )와 그의 출세곡인 ‘아테네의 하얀 장미’입니다. 아테네의 하얀 장미는 영어로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Till the white rose blooms again/ You must leave me, leave me lonely/ So goodbye my love till then/
Till the white rose blooms again.” “하얀 장미가 다시 피기까지 당신은 나를 떠나겠지요. 그때까지 안녕,
내 사랑 안녕, 하얀 장미가 다시 필 때까지 안녕.” 가사도 쉽고, 곡도 쉬워 따라 부르기 좋습니다.
콧노래로 흥얼대기도 좋고. 에게 해의 물결처럼 잔잔합니다.

나나는 이 노래를 1962년 독일어로 불렀는데, 일 년 만에 독일에서만 100만장이 팔렸습니다.
영국 BBC 관계자가 이걸 듣고 나나를 영국으로 초청해 프로그램을 맡겼고,
후일 마이클 잭슨을 키워낸 명 프로듀서 퀸시 존스는 나나를 당시 미국 최고 인기 가수였던
해리 벨라폰테에게 소개, 둘이 함께 미국 투어를 하도록 기획했습니다.

이후 이 노래와 나나의 인기는 계속 치솟습니다.
독일어 영어 외에 이탈리아어 스페인어 네델란드어 프랑스어 가사로도 불렸고,
그의 콘서트에서는 빠질 수 없는 곡이 됐습니다.
1957년 그리스 노래로 첫 음반을 낸 나나의 음반이 지금까지 전 세계에서 무려 3억장이나 팔리고,
그가 사상 최고의 팝가수(대중가수)로 꼽히게 된 것은 바로 이 노래, ‘아테네의 하얀 장미’ 덕이 분명합니다.

‘어메이징 그레이스’, ‘오버앤오버’, ‘사랑의 기쁨’ ‘하얀 손수건’ 등등 나나의 명곡들은
‘아테네의 하얀 장미’가 없었더라면 들을 수 없었을 겁니다.

1961년 독일(당시는 서독)의 한 영화감독이 ‘일요일은 참으세요’를 보고
그리스 관광 다큐멘터리를 촬영하러 아테네로 옵니다.
그는 그리스의 유명 작곡가 마노스 하지다키스에게 다큐멘터리에 쓸 음악을 부탁합니다.

마노스는 친구인 시인 니코스 가스토스에게 가사를 받아 다섯 곡을 작곡해 자기가 발탁한 나나에게 부르게 합니다.
그중 한 곡이 ‘아테네의 하얀 장미’입니다.이 다큐멘터리는 독일에서 대성공을 거둡니다.
베를린 영화제의 최대 영예인 은곰상을 받았습니다.

독일 사람들은 다큐멘터리에서 흐르는 나나의 순수하고 깨끗한 목소리에 반합니다.
한 레코드 회사가 나나의 노래를 음반으로 내려고 나나를 독일로 초청합니다.
2차 대전 때 그리스를 침공한 나치 독일군의 악행과 만행을 눈으로 직접 본 나나는 초청을 거절하다가
작사가인 니코스가 “독일을 용서하는 것도 독일을 이기는 것”이라고 설득하자 독일로 떠납니다.

‘아테네의 하얀 장미’를 처음 부른 지 46년이 지난 2008년 나나는 은퇴를 공식 발표했습니다.
7년 뒤인 2015년에 나온 그의 자서전 제목은 <박쥐의 딸>입니다.
나라면 여러 의미가 있는 ‘아테네의 하얀 장미’를 제목으로 했을 텐데 나나는 이 제목을 택했습니다.
아버지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영화관 영사기 기사였습니다.

가난한 사람이 벌이도 시원찮은데 노름을 좋아했습니다. 영화관 일이 끝나도 집에 안 가고 밤새 노름판을 지켰습니다.
영화관 청소부였던 아내가 애써 모은 돈도 뒤져내 노름판에 바치고 둘째인 나나가 태어나던 밤에도 아내 곁에
있지 않았습니다.
친구들은 이런 그를 박쥐라고 불렀습니다.

자서전에서 나나는 이런 아버지를 원망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가난한 가운데서도 음악공부를 시키려던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보내는 감사가 절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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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ana Mouskouri / The White Rose of Athen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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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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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레지나 1 | 작성시간 23.06.24 나나 모스쿠리
    아테네의 하얀장미
    오랫만에 들어봅니다
    그리스 여행가고 싶네요
  • 답댓글 작성자기라성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3.06.25 그러시군요 고맙습니다 댓글 첨부 이미지 이미지 확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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