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현포대[論峴砲臺]
정의
인천광역시 남동구에 있는 개항기 에 축조된 포대. 군시설.
내용
1982년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논현동의 호구포(虎口浦)에 있다 하여 보통 호구포포대라고도 한다.강화도조약 체결 후 부산을 개항하고 두 곳을 더 개항하기 위하여 일본이 서해안에 나타나서 자주 탐사하므로 조정에서는 그들이 인천의 개항을 요구할 것에 대비하여 미리 인천 · 부평 연안에 진과 포대를 설치하기로 결정하였다. 1879년(고종 16) 조정에서 어영대장 신정희(申正熙)와 강화유수 이경하(李景夏)에게 인천의 화도진(花島鎭)과 부평의 연희진(連喜鎭) 및 여러 포대를 설치하게 하였는데, 이 포대는 화도진이 관할하던 포대 가운데 하나이다. 포좌(砲座) 입구 하단은 잡석으로 축조되고 중단 이상과 천장은 큰 돌을 쪼개어 다듬지 않은채 축조되어 있다. 원래 포좌가 몇 개였는지 모르지만 지금은 2개의 포좌가 남아 있고, 포구 맞은편에도 포대가 있었다고 하나 확인할 길이 없다.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인천광역시 남동구[仁川廣域市 南洞區]
정의
인천광역시의 동남부에 위치한 구.
개관
동쪽과 남쪽은 경기도 시흥시, 서쪽은 미추홀구 및 연수구, 북쪽은 부평구 및 경기도 부천시에 접하고 있다. 동경 126°41′~126°47′, 북위 37°22′~37°27′에 위치한다. 면적은 57.01㎢이고, 인구는 53만 1395명(2015년 현재)이다. 행정구역으로는 19개 행정동(11개 법정동)이 있으며, 구청은 인천광역시 남동구 만수동에 있다.
자연환경
북쪽과 동쪽으로 만월산, 철마산, 거마산이 부평구와 경계를 이루고 서쪽으로 바다와 접한 소래포구 및 106만 평 규모의 광활한 해양생태공원 조성지가 있다. 남동쪽으로는 수인산업도로를 경계로 경기도 시흥, 부천과 접해 있다. 녹지가 전체 구면적의 54%를 차지하고 있다. 주요 산으로는 상아산(151m), 거마산(206m), 오봉산(106m), 만수산(201m) 등이 있으며, 주요 하천으로는 승기천, 만수천, 장수천, 운연천(이상 지방 2급 하천), 기타 소하천으로 소구월천, 소곡천, 걸재천, 음실천, 구룡천이 있다.연평균 기온은 12.58℃이고, 기온의 연교차가 심하며 계절의 변화가 급속한 편이다. 연평균 강수량은 1,472.5㎜를 보이고 있다.
역사
삼국시대의 남동구는 주요 교통로로서의 기능이 강했다. 당시 지금의 수원 쪽에서 중림역(重林驛)∼대야원(大也院)~나진(羅津)을 거쳐, 부평의 경명현(景明峴)을 넘고, 다시 한강 하류를 지나 개성으로 갔다. 이때 중림역은 지금의 경기도 시흥시 지역으로 구한말까지 인천 땅이었던 소래(蘇萊)에 속해 있었고, 대야원은 소래산 아래에 있던 역이었다. 고려시대에는 도로와 역원제도가 한층 확립되어 신라시대에 있던 역과 간선도로가 많이 정비되었는데, 이중 한강 남쪽에서 수도인 송도(松都)로 가는 길에 중림역과 경신역(慶信驛)이 있었다. 경신역은 지금의 수산동 경신 마을 일대에 있던 역이었다. 이 역은 비교적 소규모의 3등 역이어서 말은 모두 6필 밖에 없었지만 역의 노비는 66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중림역과 경신역은 그 뒤 조선시대에까지 이어졌는데, 『인천부읍지』에도 “중림역은 인천부에서 동쪽으로 33리에 위치하였고 찰방(察訪) 1인이 근무하였다. 본도(本道)에 속한 역이 여섯인데 경신, 반유, 석곡, 금륜, 종생, 남산이다.”라는 기록이 있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인천에서 부평이나 한양으로 갈 경우 사람들은 대개 이곳 남동구 지역을 거쳐 다녔다. 『대동여지도』에 표시되어 있는 것처럼 인천부의 제물포나 문학산 주변에서 성현(星峴)을 넘어 부평 및 한양으로 가는 길이 그것이었다. 성현은 지금의 만수동에 있는 고개로서 비리고개, 비루고개 또는 별리현(別離峴)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렸다. 성현에서 멀지 않은 장수동에는 무네미고개라고도 불리는 수현(水峴)이 있다. 수현은 조선 중종 때의 권신인 김안로(金安老)가 삼남(三南) 지방에서 서해를 통해 올라오는 세곡(稅穀)을 한양까지 안전하게 운반하기 위한 수로(水路)를 만들기 위해 이른바 굴포 운하를 파다가 실패한 일 때문에 생긴 이름이라 전해진다.
이와 같이 고려시대는 물론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남동구는 인천부의 변두리 지역에 불과했다. 그 때문에 문헌상 그리 많은 역사적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기록으로 볼 때 현존하는 문서 가운데 남동구 지역의 방리(方里)가 기재된 가장 오래된 책은 1789년(정조 13년)에 국책 사업으로 호구 조사를 진행한 후 발간한 『호구총수(戶口總數)』이다. 이 책에 기록된 인천부의 면(面)은 모두 16개 면인데, 이중 남촌면(南村面)과 조동면(鳥東面)이 대략 오늘날의 남동구 지역에 해당한다. 이 책에 따르면 남촌면에는 1~4리가 있었고, 호수는 359호, 인구는 1,418명(남자 630명, 여자 788명)이었다고 한다. 남촌면은 대략 지금의 고잔동, 남촌동, 논현동, 도림동, 수산동 지역에 해당한다. 조동면은 1~3리가 있었으며 호수는 233호, 인구는 703명(남자 315명, 여자 388명)이었던 것으로 적혀 있는데, 지금의 만수동, 서창동, 장수동 일대에 해당한다. 1843년에 발간된 『경기지(京畿誌)』 인천 편에는 남촌면에 냉정리, 능동, 논현리, 도림리, 고잔리, 사리동, 여무실리, 경신리, 염촌, 발리동이 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또 조동면에는 상리, 수월리, 일리, 담방리, 동촌, 설래리, 상음실리, 하음실리, 연락동, 만의리 등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들 가운데 많은 지명이 오늘날까지 전하고 있다. 『인천부읍지』에도 “남촌면은 관문에서 동쪽으로 10리에 있으며 염촌(鹽村)으로는 냉정리, 능동, 논현리, 도림리 등이 있다. 오봉산에는 고잔리, 사리동, 대무실리, 발리동, 경신리 등이 있다.”는 기록이 보인다. 여기에서 관문이란 인천부 청사가 있던 관문을 지칭하므로 현재의 관교동, 문학동 일대를 말한다. 또 조동면에 대해서는 “관문으로부터 동쪽으로 15리에 있다. 노상리, 수월리, 일리, 담방리, 동촌, 설래리, 상음실리, 하음실리, 연거동, 만의리 등이 있다.”고 쓰여 있다.
한편 오늘날 인천을 대표하는 주요 지명 가운데 하나로서 주안(朱安)이라는 이름이 있다. 지금은 경인전철 주안역과 주안동에서 ‘주안’이라는 지명을 사용하고 있지만, 원래 주안산(朱雁山)에서 비롯된 이름으로 남동구가 그 이름의 기원이다. 주안산은 이제 없어져 쓰이지 않는 이름이지만 지금의 간석동에 있는 만월산(滿月山)을 가리킨다. 이 산은 『신증동국여지승람』과 『대동여지도』에 ‘주안산(朱岸山)’으로 표기되어 있다. 흔히 글자 그대로 ‘흙이 붉고(朱) 기러기(雁)가 내려 않은 모양’이어서 이런 이름을 갖게 되었다고 전해온다. 요컨대 주안이라는 지명의 원조는 남동구 간석동을 중심으로 그 주변의 구월동, 십정동, 가좌동 일대를 두루 가리켜 쓰였던 것 같다. 1914년 3월 일제는 부령 제111호에 따라 부천군을 새로 만들었는데 현재의 남동구는 대부분 부천군으로 편입되었다. 일제는 일천부의 일부와 부평군 전체, 남양군 일부, 강화군 일부 섬 지역을 통합해서 만든 행정구역이었다. 일제는 부천군을 만들면서 이전의 15개 면을 통폐합하였는데, 남동구 지역은 이중 다주면(多朱面)과 남동면(南洞面)에 속하였다. 다주면에는 구월동, 간석동 지역과 함께 지금의 미추홀구에 속하는 주안동, 도화동, 용현동, 숭의동 일대, 부평구의 십정동 지역까지 포함되었다. 다주면이란 이전의 인천부 다소면(多所面)과 주안면(朱安面)을 합하고, 두 곳의 첫 글자를 따서 만든 지명이다. 그 후 1921년 지금의 남동 공단이 있는 논현동과 고잔동 일대 해안에는 300정보 넓이의 남동 염전이 생겨 1980년대까지 60여 년 동안 존속하게 되었다. 이곳 염전은 우리나라 최초의 천일염전인 주안염전이 생긴 뒤 국가적 차원에서 근대적 방식의 염전을 계속 확장시킨 정책에 따라 생긴 것이다. 당시 정부는 남동염전뿐만 아니라 경기도 시흥 지역에 군자염전을 만들었다. 특히 인천 지방에 염전이 많이 만들어졌으며, 1932년에 이르면 남동염전을 비롯한 전체 1,115정보의 인천 관내 염전에서 전국 소금 생산량의 절반인 15만 톤을 생산하였다. 오늘날 인천에 남아 있는 ‘짠물’이라는 지명은 그로부터 유래하며, 1937년 개통한 수원~인천 간의 수인선 철도 역시 소금을 많이 실어 날라 흔히 ‘소금 열차’라 불리었다. 수인선은 남동염전의 남쪽 해안을 매립하고 소래에 철교를 놓아 만든 것으로 애초부터 열차는 남동, 소래, 군자염전을 경유하도록 설계되었고, 실제로 이들 지역의 소금을 운반하는 기능을 담당하였다.
한편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생긴 부천군 다주면은 1937년 인천부에 편입되면서 없어지는데, 이때 일제는 주안의 표기를 이전의 주안(朱雁) 또는 주안(朱岸)에서 지금과 같은 주안(朱安)으로 바꾼다. 그 이유는 정확하지 않으나 일설에는 ‘주(朱)’자에 ‘안대평 외산교(安垈坪 倭散橋)’의 ‘안(安)’자를 붙여 만든 것이라는 해석이 있다. 안대평은 지금의 간석동과 십정동 일대가 바다였을 때 이들 지역을 연결해주던 다리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임진왜란 때 평양성 전투에서 패한 소서행장(小西行長)의 부대 일부가 김포를 건너 부평을 점령하였는데, 당시 2만여 명에 달했다는 왜군은 부평의 옛 성을 수리해 그곳에 주둔하며 인근 마을을 노략질하다가 인천부까지 침입해 왔다. 이때 왜군들은 문학산성을 지키던 조선군을 얕잡아 보고 싸움에 임했다가 참패를 당했는데, 그 싸움터가 안대평 다리였다고 한다. 그 뒤 이 다리는 ‘왜군들이 싸움에 지고 흩어졌다[倭散]’고 해서 왜산교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으며, 『인천부읍지』에도 그 이름이 기록으로 남아 있다. 조동면에 이어 1940년에는 남동면이라는 지명 역시 부천군에서 인천부로 편입되면서 없어졌다. 1945년 광복 후 남동구 지역은 지방자치법 실시에 따라 인천시 남동출장소가 설치되면서 그 관할 구역이 되었다. 1968년 1월에는 구(區) 설치에 관한 법률에 따라 인천시가 중, 동, 남, 북구 등 4개 구를 설치해 시 전역을 나누었고, 이때 남동구 지역은 남구에 편입되었다.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소래포구가 새우젓 시장으로 점차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 시작하였다. 그 이전까지도 한산하기만 했던 소래포구는 1974년 인천항의 내항이 완공되면서 새우잡이를 하는 소형 어선들이 내항에 출입하기 어렵게 되자 그 대안으로 이곳 소래포구가 일약 새우 파시(波市)로 유명해졌다. 1980년대 초반까지도 주말마다 관광객을 포함해 1만 여 명이 넘는 사람들이 포구 안에 북적거렸던 소래포구는 여전히 남동구의 명물로 남아 있다.
1981년 7월 인천시가 직할시로 승격된 뒤 남구 지역의 인구가 급격히 증가했다. 특히 이 무렵 그 동안 남동염전이 있던 논현동과 고잔동 일대 해안에 남동공단 조성 계획이 추진되었다. 남동공단은 서울과도 가깝고 인천항을 통한 수입 물량 처리에 유리하다는 지리적 이점을 배경으로 1980년 7월 공단조성계획이 확정되면서 추진되었다. 남동공단은 공유 수면 매립에 의한 280만 9497㎡에 염전과 농지 등을 포함해 모두 956만 5536㎡를 대상으로 계획되었다. 그리하여 남동공단은 현재의 남촌, 도림, 논현, 고잔, 동춘동 등 5개 동에 걸치는 대규모 국가 공단이 되었다. 남동공단이 추진되는 사이에 인구가 늘어난 남구는 1988년 1월 대통령령 제12367호에 따라 남동구와 남구로 나뉘어졌다.
남구에서 분구된 남동구는 기존의 남동출장소 관할 지역과 구월동, 간석동, 남촌동 전 지역에 선학동, 연수동, 동춘동 일부 지역을 포함해 관할하게 되었다. 특히 1984년 구월동 1138번지 일대에는 인천광역시청 청사가 건립되면서 중구로부터 이전했다. 이는 남동구 일대가 인천의 중심 지역으로 자리 잡아가기 시작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남동구는 남구에서 분구된 뒤 5개월 만인 1988년 5월 1일 지방자치법 개정 법률 제4004호에 따라 자치구로 승격하였다. 분구 당시 13개 동이었던 남동구에는 1989년 5월 만수 4동이 신설되고, 1990년 1월에는 간석 4동이 새로 생겨 모두 15개의 행정동이 되었다. 1991년 8월에는 구월 3동, 남촌동이 잇달아 신설되었으며, 1992년 1월에는 남동공단을 관할하는 남동공단출장소가 설치되었다. 1993년 12월에는 구월 4동과 만수 4동이 신설되어 남동구는 모두 20개의 행정동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1998년 11월의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장수동과 서창동이 장수 · 서창동으로 합쳐진 것을 비롯해, 남촌동과 도림동이 남촌 · 도림동으로, 논현동과 고잔동이 논현 · 고잔동으로 각각 통합되었다. 이에 따라 남동구는 현재 통합된 이들 3개 동에 구월 1~4동, 간석 1~4동, 만수 1~6동을 합쳐 모두 17개의 행정동을 갖게 되었다. 지역적으로는 남동공단과 같은 공업 지역과 소래포구와 같은 어촌 지역, 시청과 종합문화예술회관을 중심으로 하는 신개발 상업 · 행정 · 문화 지역, 수산동과 도림동 등지의 농촌 지역 등이 다양하게 공존하고 있다.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026-06-22 작성자 명사십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