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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에서의 저주의 기도(페일스목사)

작성자이준성|작성시간09.09.29|조회수990 목록 댓글 1

* 오래전 강변교회에서 강의했던 것을 타이핑 해두었던 것인데

아까워서 여기 올립니다.

이미 책으로 나왔지만 혹시 필요하신 분이 계실까 해서요.

첫시간 강의는 녹음 실패로 못했습니다.

 

첨부파일 하나님의보복과저주(페일스).hwp

 

 

 

두 번째 시간: 구약에서의 저주의 기도

2002년 9월 26일

강의자: 페일스 목사(Apeldoorn 신학교, 구약학)

통 역: 김헌수 목사

1. 저주의 기도: 거침돌

 

1) 몇몇 예들

2) 대립적인 해석

3) 심리학적인 해석

2. 주변적인 현상이 아님

1) 시편에 전반적임. 문예적인 형식들

2) 구약의 다른 예들

3. 저주의 기도의 배경

1) 고대 근동의 전통들

2) 이스라엘에서의 저주

3) 합법적인 것과 비합법적인 것

4. 복수의 기도의 문맥

1) 주체와 객체

2) 언약

3) 축복과 저주

5. 복수의 기도의 의도

1) 공의의 보존

2) 하나님의 영예의 보존

3) 하나님의 나라가 이제 약진함

6. 복수의 기도가 신약에서는 폐지되었는가?

1) 거짓된 대비는 안 됨

2) 구약에서의 사랑

3) 신약에서의 진노

7. 신약에서의 복수의 기도의 초점

1) 구원의 역사에서의 진보

2) 하나님 나라의 ‘여기와 이제’

3) 하나님 나라의 ‘아직 아니’

1. 저주의 기도: 걸림돌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저녁에 다시 만나서 매우 기쁩니다. 특히 대전에서 올라오신 분과 다시 만나니까 매우 반갑습니다. 대전에서 오신 분들하고는 이미 지난주에 만났습니다. 오늘 성경의 두 번째 주제를 저녁에 다시 공부하겠습니다. 미리 경고하는 것으로 말씀드리겠는데 이것은 결코 쉬운 주제가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저주를 내리도록 하는 저주의 기도에 관한 것입니다. 많은 사람에게 있어서 구약에 나오는 저주의 기도는 거침돌이 되고 있습니다. 시편137편 같은 구절을 읽을 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무리는 아니겠다 생각할 수 있습니다. “네 어린 것들을 반석에 내려치는 자는 유복하다” 이러한 말로 137편은 끝납니다. 시편58편 10절에서는 “의인은 악인의 보복 당함을 보고 기뻐함이여 그 발을 악인의 피에 씻으리로다” 말합니다. 처음 볼 때는 이것처럼 무시무시한 것이 성경에 있을까 얼마나 무시무시한가 생각합니다. 어떻게 시편에 이러한 저주의 기도가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 하는 이 기도와 어떻게 조화될 수 있겠습니까? 바울사도는 로마서 12장 14절에서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이렇게 분명히 가르치지 않았습니까? 그러기 때문에 구약 시편에 관한 많은 주석가들은 이러한 시편은 성신에 의해 감동된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물론 거기에 대한 다른 의견도 있습니다만 문제는 우리가 이런 시편은 어떻게 다룰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한때 주후 2세기 경에 아주 악명 높은 이단자인 말시온을 생각해 봅시다. 말시온의 전공이 하나있는데, 구약과 신약 사이에 있는 긴장이나 대립(Antitheses) 이모든 구절을 찾아내는 것이 그의 전공입니다. 그래서 그 결과 그는 구약을 무시했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신약의 하나님은 구약과 완전히 다른 이질적인 분이다 그렇게 주장했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구약의 하나님은 창조의 하나님이고 전쟁의 하나님이고 공의와 보복의 하나님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주장하기를 신약의 하나님은 전적으로 다른데 어느 정도로 다르냐하면 구약의 냉혹한 하나님으로부터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낼 정도로 완전히 다르다고 주장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교회 역사상 처음으로 악명 높은 이단과 만납니다. 그는 구약과 신약을 나누고 구분했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구약은 정의나 공의 보복에 속하고 신약은 사랑과 자비, 선, 이런 것들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말시온의 영향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생생합니다. 많은 주석가들은 시편의 이런 저주의 시들은 구약의 열등한 영적생활의 표현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구약은 신약보다 더 낮은 단계에 있습니다. 구약의 저주시를 다루는 이러한 입장을 저는 대립적 입장이라 표현하고 싶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심리학을 이용해서 이런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으려 합니다. 그들은 저주의 기도에 대해서 그럴듯한 설명을 붙이려고 노력합니다. 물론 그들을 근본적으로 잘 이해할 수 없지만 그 저주의 그 시를 그 시의 역사적 배경에서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들에 따르면 그 배경에 놓고 보면 그 성경의 기자는 성인이 아니었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시편의 저주 시들에서 광야에서 나오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열정 같은 것, 타는듯한 그런 열정을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두 가지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저주 시에 대한 이 두 가지 입장을 다 거부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 저주의 시들을 성경의 분문이나 맥락에서 이해하려고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어제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는 또한 성경에 주의를 기울여야하는데 그럴 때에는 성경이 우리가 읽기를 바라는 방식으로 접근해야 되겠습니다. 즉 성경 안에서부터 성경을 이해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2.주변적인 현상이 아님

첫째로 이야기하는 것은 이 구약에 있어서의 저주의 시는 주변적인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시편의 100편 이상이 어떤 종류로든 저주의 문구를 담고 있습니다. 이것은 여러 가지 형식으로 나타나기도 하는데 어떤 때에는 실제 기도로 나타나기도 하고 어떤 때에는 소원을 표시하는 것으로 표현되기도 합니다. 먼저 첫 번째 예인 기도로 표현되는 것을 보겠는데 시편 94편 1-2절입니다. “여호와여 보수하시는 하나님이여, 보수하시는 하나님이여 빛을 비추소서. 세계를 판단하시는 주여 일어나사 교만한 자에게 상당한 형벌을 주소서”(시94:1-2). 그리고 소원을 표시하는 저주의 시를 보자면 시편 35편 4-5절인데 앞부분만 낭독하면 “내 생명을 찾는 자로 부끄러워 수치를 당케 하시며” 우리는 시편 37편에서는 세 번째 형태 즉 기대나 약속의 형태로 저주의 기도를 하는 것을 봅니다. 거기에서 악인에게 이야기하는데 그 칼은 자기의 마음을 찌르고 그 활을 부러지리로다. 생각해보십시요. 시편의 3분의 2 이상이 저주의 기도를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시편은 지금 세계에 있는 개혁교회에서 부르고 있는 찬송의 책이기도 합니다. 물론 시편뿐 아니고 구약의 다른 구절에서도 저주의 시들을 봅니다. 분명한 예로 사무엘하 3장을 인용하겠습니다. 요압이 아브넬을 죽였을 때 다윗을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다윗이 사무엘하3:28-29절에서 “넬의 아들 아브넬의 피에 대하여 나와 내 나라는 여호와 앞에 영원히 무죄하니 그 죄가 요압의 머리와 그 아비의 온 집으로 돌아갈지어다. 또 요압의 집에서 백탁병자나 문둥병자나 지팡이를 의지하는 자나 칼에 죽는 자나 양식이 핍절한 자가 끊어지지 아니할지로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것은 영원히 사랑을 받은 다윗의 이야기입니다. (29:17)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저주의 기도는 구약에서 예외적이고 개인적이고 부도덕하고 구약의 문맥에서 고립되어 있는 예외적인 현상이 아니라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에 대한 구조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의 범주로 이해해서는 안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어제 저녁에 우리가 기도한 것처럼 시편기자들이 그 맥락에서 성경적인 맥락에서 무엇을 의미했는지 이것을 함께 살펴봐야겠습니다.

3. 저주의 기도의 배경

1. 보복의 기도를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세 가지를 고려해야 되겠는데 첫 번째는 그 배경이고 두 번째는 그 맥락이고 세 번째는 그 의도 이 세 가지를 살펴봐야겠습니다. ....... 구약성경에 관해서 제가 얼른 잘 이해를 못해가지고 물었는데요 구약성경에 기록된 것은 그리스도 오시기 전12세기부터 약 3세기까지 그동안을 천년이라고 합니다. 그 천년동안에 사람들은 저주라는 말을 어떻게 이해했겠습니까? 그 시대 사람들은 저주라는 말로 오늘날의 사람들과는 달리 이해했습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말이라는 것은 단지 말일 뿐입니다. 고대근동사람에게 있어서 말이라는 것은 실체였고 뭔가 활동하는 실체였습니다.

그리고 그 시대 사람들에게 있어서 저주라는 것은 일상적인 것처럼 널리 사용되었습니다. 예를 들자면 서원하는 것이 있는데 서원은 일종의 자기 저주입니다. 그리고 의를 시행하는 재판정에서 저주를 사용했는데 그것은 알지 못하는 죄를 자백하도록 하기위한 수단으로 저주를 사용했습니다. 죄를 지은 사실은 있는데 누가 그 죄를 지었는지를 모를 때 재판장은 알지 못하는 죄인들을 향해서 저주를 선언합니다. 예를 들어서 또 무덤 같은데 그런 말이 써져 있는데요, 누구든 이 무덤을 훼손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지어다, 이런 말이 비석 같은데 새겨져있습니다. 그리고 고대근동지역에 법률은 항상 그 끝에 항상 저주로 끝났습니다. 이것은 오늘날에 형벌문구하고 좀 비슷합니다. 그리고 특별히 중요한 것은 언약을 맺을 때 언약의 복과 언약의 저주가 항상 끝에 나왔습니다. 고대 근동지역에 있어서는 우리와 전혀 다른데 그것이 뭐냐하면 저주라는 것이 그들의 일상생활이었다는 점입니다.

2. 이것은 이스라엘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저주의 시를 들을 때 전혀 놀라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저주의 시라는 것이 개인적인 원한이나 복수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스라엘도 역시 고대 근동의 일부이기 때문에 고대근동에 있는 이스라엘의 저주는 경제라든지 정치의 맥락에서 저주가 유용하게 사용되었습니다.

3.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스라엘에게 있어서는 합법적인 정당한 저주와 부정당한 저주, 이 차이를 이스라엘 사람들은 아주 예민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은 이 불법적인 저주를 하면 형벌 받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시편에서 원수는 불법적인 저주를 했기 때문에 책망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시편기자가 물론 저주의 기도를 하지만 시편기자는 동일한 죄, 불법적인 저주를 하는 것에 빠지지 않았고 그는 원수를 저주하지 않았습니다. 시편 어느 곳에서도 시편기자가 원수인 악인에게 직접 저주하는 것을 볼 수 없습니다. 실제 일어난 것은 뭐냐하면, 시편기자는 일어난 모든 것을 하나님의 손에 맡긴 것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그는 정형화되고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쓰는 저주의 형식을 사용했습니다. 그렇지만 그 자신은 개인적으로 저주하는 것은 금했습니다. 이것이 첫째입니다. 고대근동의 배경에서 저주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라는 것이 우리가 첫 번째로 중요하게 생각할 점이었습니다.

4. 복수의 기도의 맥락

이제 두 번째로 그 맥락입니다.

1. 시편에서 저주의 기도의 정확한 맥락은 무엇입니까? 두 사람이 관계됩니다. 하나는 말하는 주체, 그리고 그 대상, 객체입니다. 그리고 구약의 시편들을 잘 보면 기도하는 주체는 항상 가난한 자 의로운 자 비참한 자 겸손한 자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자녀들은 하나님과의 특별한 언약관계를 표시합니다. 이스라엘 모든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시편기자의 말을 잘 알고 있습니다. “여호와는 고난당하는 자를 신원하며, 궁핍한 자에게 공의를 베푸시리로다.” 저주의 시의 맥락을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구절은 출애굽기 22:22-24절입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는 건데요.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22절부터, “너는 과부나 고아를 해롭게 하지 말라 네가 만일 그들을 해롭게 함으로 그들이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반드시 그 부르짖음을 들을지라, 나의 노가 맹렬함으로 내가 칼로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 아내는 과부가 되고 너희 자녀는 고아가 되리라” 이것은 전형적인 저주의 기도입니다. 그런데 이 전형적인 저주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 고아나 과부가 내게 부르짖으면 듣겠다 했는데 그것이 바로 시편에서 일어났습니다. 시편에서 고아나 가난한 자가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가난하고 의롭고 핍박을 받는 사람, 아무 도움이 없는 사람이 하나님에게 저주의 기도를 올립니다. 누가 저주의 기도의 대상입니까? 그들은 원수나 경건치 않은 자 그리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입니다. 그런데 아주 놀랍게도 시편에 있어서는 원수의 이름이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이미지는 상은 분명합니다. 가난한 사람을 억압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하는 그 상은 분명합니다. 그 원수는 핍박을 하고 충동질을 해서 신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에게서 떼어놓으려고 시도를 합니다. 우리는 시편에 나오는 그 원수의 모습에서 그 악한 자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거기에서 궁극적인 악과 불경건함, 그러한 모습을 그 원수의 모습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시편의 원수라는 말이 여러 번 여러 번 나오는데 신비한 요소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 시편의 그러한 모습에서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을 대적하는 나라 간에 영적인 전쟁이 수행되는 것을 그 안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2. 저주의 시의 맥락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과 그의 백성과의 언약의 맥락입니다. 여기에서 특징적인 것은 시편에서 사용하는 소유대명사입니다. 시편 94편은 보수하는 하나님이여, 하고 하나님의 보복으로 시작되는데 5절에 와서 “저희가 당신의 백성을 파괴하고 당신의 기업을 곤고케 합니다.” 여기에 하나님이 관계됩니다. 동일한 내용이 14절에 나오는데 거기에서 여호와께서는 여호와의 백성을 버리지 않을 것이고 그의 기업, 여호와의 기업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했습니다. 언약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 백성에게 주신 보물인데 아주 고귀한 보물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거기에 대해서 너무나 지나친 관심을 기울여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그 고귀한 보물을 악한 자가 훼손합니다. 그들이 보복을 당하지 않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습니다. 앞에서 언약에 대해서 이야기했는데요. 이스라엘에 있어서도 언약은 축복의 말과 저주의 말로 끝납니다.

3. 예를 들어서 레위기 26장을 살펴봅시다. 우리는 여기에서 언약에 붙어있는 긴 저주의 목록들을 볼 수 있습니다. 언약이 끝났을 때 백성들은 거기에 동의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축복과 저주의 말도 그 동의에는 포함이 됩니다. 그리고 이것은 공적인 예식을 통해서 확정되었습니다. 신명기 27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과 언약을 맺고 하나씩 하나씩 말씀하셨는데, 그 저주에 대해서 백성은 하나씩 아멘, 아멘, 하면서 응답을 했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모종의 살펴본 이것이 시편기자에게서 다시 나타납니다. 그들은 어려움이 있으면 모세언약,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그 언약에 호소합니다. 저주의 기도에서 일어나는 것이 뭡니까? 그것은 개인적인 원한이나 보복, 그러한 것을 감정적으로 쏟아내는 것이 아닙니다. 시편 기자가 하는 것은 언약을 맺을 때에 마무리한 그 하나님의 말씀에 하나님께서 언약의 복과 저주로 언약을 끝맺었는데 그 언약의 말씀에 시편기자는 하소연을 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파괴하는 악한 자들이 있습니다. 그럴 때에 시편기자는 하나님께 “하나님이여 당신의 언약의 말씀을 실현시키소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안에 있는 그 악인들은 여전히 하나님의 언약에 속한 것들입니다. 그 사람들도 언약의 저주를 냈을 때 아멘 그렇게 말했던 사람입니다. 그들에게 언약이 이루어지기를 시편기자는 하나님께 호소하는 것입니다.

5. 복수를 위한 기도의 의도

1. 세 번째로 가장 중요한 것인데요, 저주의 기도의 의도는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시편기자의 불타는 복수심이 성취되는 것 그것이겠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시편기자는 첫째로 그 사회 안에서의 공의의 회복, 여기에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시편기자는 언약의 하나님께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그의 언약을 이루어주시길, 언약의 말씀대로 정당하게 행하시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사무엘상24장에서 우리는 저주의 기l도의 중요한 예를 봅니다. 다윗이 사울왕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사울왕은 죄를 짓지 않은 다윗을 핍박하고 있었습니다. 명백하게 공의가 훼손되었지만 여기에서 공의를 호소할 수 있는 인간 권위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핍박하고 있는 사울왕이 공의를 지향할 가장 높은 자이기 때문입니다. 한 가지 가능성 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호소하는 것이고 그러기 때문에 다윗은 저주의 기도를 드립니다. 사무엘상 24:12,15절을 인용하겠습니다. 12절에서 “여호와께서는 나와 왕 사이를 재판하사 나를 위하여 왕에게 보복하시려니와 내 손으로는 왕을 해하지 않겠나이다.” 이것은 다윗이 하나님에게 사울에게 보복하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윗의 개인적인 감정에서 나온 기도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정의를 회복할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15절에서 “그런즉 여호와께서 재판장이 되어 나와 왕 사이에 판결하사 왕의 사정을 살펴 신원하시고 나를 왕의 손에서 건지시기를 원하나이다.”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우리가 시편에서 만나는 것은 이러한 기도들입니다. 법적인 용어로 하나님의 의와 공의가 회복되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첫 번째 특징입니다. 공의의 회복이라는 것이 중요한 것이고 이제 두 번째를 살펴보겠습니다.

2. 두 번째는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것인데 하나님의 영예가 이것에 관계됩니다. 왜냐하면 우리 일상적인 생활에서는 아주 곤란한 경우를 당하기 때문입니다. 악인이 번성하는데 의인은 쇄락합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겠습니까? 우리와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이 계시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겠습니까? 우리는 시편에서 공의를 회복할 하나님이 계신가? 이러한 탄식을 자주 듣습니다. 악한 자의 사악한 행동 때문에 하나님 자신이 여기에 연루가 됩니다. 그래서 시편기자가 의도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일어나셔서 보복하시고 의를 시행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저주의 기도의 시편들은 종종 이방인들도 하나님께서 참 하나님이시고 또한 그분이 세상을 다스리심을 깨닫게 되기를 바란다 이러한 말로 시편이 끝납니다. 이러한 것을 시편 58편, 59편, 83편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3. 시편 기자가 저주의 기도를 드림으로 뭘 의도했는가 이것을 종합적으로 생각해봅시다. 우리는 이 기도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 역사상에 뚫고 들어오기를 소망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왕과 재판장으로서의 하나님에 대한 바램입니다. 또 94편인데요, “여호와여 보수하시는 하나님이시여 보수하시는 하나님이시여 빛을 비추소서 세계를 판단하시는 주여 일어나서 교만한 자에게 상당한 형벌을 주소서” 여기에서 하나님을 부르면서 이 하나님은 보복하시는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자면 이것은 결코 개인적인 원한을 갚아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뚫고 들어와서 하나님의 의와 공의를 나타내 보이는 것, 그것에 대한 바람입니다. 지금까지 구약에 대한 것을 살펴보았는데 이제 신약의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6. 복수의 기도는 신약에서 폐지되었는가?

1. 말시온은 구약과 신약의 차이를 아주 강조했는데, 말시온은 완전히 틀렸습니까? 그리고 저주의 기도가 신약에서는 폐지되었습니까? 대답은 명백히 아니라는 것입니다. 제 강의 처음에 저는 틀리게 말한 것 같습니다. 강의 처음에서 저는 시편을 읽고 그것을 곧바로 신약과 연결했습니다. 그때에 저는 구약의 구절을 신약과 직접 연결했기 때문에 옳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두 구절은 성경에서 다른 수준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구약 하나님의 말씀의 모든 구절을 항상 생각해야 될 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모든 구절을 구속역사의 배경에서, 그 단계에서 이해를 해야 되는 겁니다. 그 문제에 대해서는 이제 구원의 역사에 관한 것은 뒤에서 이야기하겠지만 강조하여 말씀드리는 것은 신약 어느 곳에서도 저주의 기도를 정죄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신약의 기자들은 아무 문제없이 구약의 저주의 시들을 인용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친히 구약의 저주의 기도들을 인용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시기 전날 밤에 제자들과 함께 시편 113-118편까지를 불렀습니다. 시편 118편에서는 하나님께서 원수를 멸망시킨다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신약의 기자들을 저주의 기도를 인용하는데 아무 문제를 느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문제를 느낍니까?

2. 그리고 두 번째로 생각해야 될 것은 구약 구절들도 원수를 갚지 말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가르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십계명을 예수님께서 두 가지로 요약한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주 너의 하나님을 네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사랑하라 이것이 첫째고, 두 번째는 것이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는 구절은 레위기 19:18절의 말씀을 예수께서 인용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저주의 기도를 여러 번 드렸던 그가 사울에게 취한 행동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 경우에 다윗은 눈물을 흘리고 감동을 주는 시들을 썼습니다. 그는 이 불의가 행해지는 그 맥락에서 자신이 원수를 갚지 않고 하나님께 저주의 기도를 올렸습니다.

3. 그리고 다른 편에서 신약은 단순히 사랑의 말씀만은 아닙니다. 우리는 신약에서도 오히려 구약보다 더 하나님의 진노와 분노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라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신약의 설교에서 영원한 멸망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영원한 저주에서 영원이라는 말은 구약에는 나오지 않는 말입니다. 우리는 신약에서도 하나님의 보복에 관한 구절들을 봅니다. 바울사도의 말에서 두 구절을 인용하겠는데, 첫째는 고린도전서 16:22절입니다.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 지어다. 주여 오시옵소서” 갈라디아서 1:8,9절에서 저주의 말들이 반복되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우리가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그래서 여러분에게 말씀드리는 것은 오래된 이단, 말시온 이단의 희생물이 되지 말자는 것입니다. 그는 신약과 구약을 아주 분명히 나누어버리는데서 잘못을 범했습니다. 이것은 그가 실수한 것은 다름이 아니라 성경을 성경이 읽기를 원하는 방식대로 즉 구속의 역사의 과정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구원의 역사에서 하나님의 구원은 연속성이 있습니다. 여기에서는 과거의 역사와의 대립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구원의 역사에 있어서도 진보는 있고 변화는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마지막 요점에 이르렀는데, 신약과 구약의 차이점을 무시하는 것, 이것도 정당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7. 신약에서 복수의 기도의 초점

1. 신약에 있어서는 구약보다 저주의 기도가 많지 않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리고 저주의 기도를 살펴보더라도 그 내용에 있어서나 그 방향에 있어서 변화가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예수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이루신 역사상의 가장 중요한 것과 관련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약에 살고 있는 우리로서는 구약과 같은 수준에서 저주의 기도를 하나님께 드릴 수는 없겠습니다. 구속의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나라가 구했다는 것을 가르칩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셨을 때 그리스도의 오심으로써 하나님의 나라가 실현되었습니다. 이것이 복음이 가르치는 한 면입니다.

2.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실현되었습니다. 우리는 구약 저주의 기도의 의도는 하나님의 나라가 오는 것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하는 것이었음을 압니다. 그리고 구약에 있어서는 그 악한 자가 승리하는 것 같았고 하나님의 영예가 위태롭게 되는 것 같았습니다. 그렇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심으로서, 그 악한 자를 완전히 멸절시켰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로 승리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의가 실현되었는데,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고 율법의 저주가 단 한사람 그의 독생자에게 율법의 저주가 임하도록 하심으로서 하나님께서는 공의를 나타내셨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가장 근본적인 방식으로 예수 그리스도에게 쏟아짐으로써 실현되었습니다. 만일 구약의 성도가 이 사실을 알았다면 그들은 그처럼 간절하게 저주의 기도를 올리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3. 그렇지만 동시에 다른 면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왔고 실현되었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우리는 그것의 완전한 실현을 지금 기다리고 있습니다. 주위를 살펴보십시요. 신자들은 여전히 죄와 싸우고 있고 악한 자에게서 계속 공격을 당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를 믿는 모든 사람을 위해 실현된 것입니다. 그렇지만 복음에 대해서 완고하게 거부하는 사람, 그들은 영원한 심판에 떨어질 것입니다. 구약의 성도들이 이 마지막에 있을 완전한 심판에 대해서, 의로운 심판에 대해서 알았다면 그렇게 많이 저주의 기도를 드리진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의 위치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그리스도안에서 실현된 하나님의 나라와 또한 마지막으로 완전히 실현될 나라 그 중간에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중간 이 중간시기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중간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해에 속하여서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복음이 전파되고 이스라엘의 국경을 넘어서 다른 민족들에게 전파되고 모든 민족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원하고 지키는) 그러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이 시기에 있어서는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알곡과 가라지가 함께 자라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에 바울사도는 믿는 우리들에게 너희를 핍박하는 자들을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하고 가르칩니다. 그렇지만 아주 위급한 상황에 있어서 우리는 그러한 저주의 기도를 올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공의와 하나님의 영예, 그리고 교회의 순수성을 보존하려는 것, 이러한 것은 구약에서와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여전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기도할 때 악한 자가 멸망하고 완전히 멸절되기를 기대하는 겁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123문에서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123문이 성경에서 저주의 기도에서 가르치는 것을 아주 높은 수준에서 잘 설명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둘째 간구는 무엇입니까?” “‘나라이 임하옵소서’로 이러한 간구입니다: 주님의 말씀과 성신으로 우리를 통치하시사, 우리가 점점 더 주님께 순종하게 하옵소서. 주님의 교회를 보존하시고 흥왕케 하옵시며, 마귀의 일들과 주님께 대항하여 스스로를 높이는 모든 세력들, 그리고 주님의 거룩한 말씀에 반대하는 모든 악한 의논들을 멸하여 주옵소서. 주님의 나라가 온전히 이루어져 주께서 만유의 주가 되실 때까지”:(참조 52문, 네델란드 신앙고백서 37조).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은 우리 개혁교회의 보물입니다.

질의 응답

1. 어제 강의를 통해 주님께서 나사렛 회당에서 성경을 읽으신 일과(눅4:19) 불의한 재판장 비유(눅18:1-8) 그리고 제단 아래 영혼들의 부르짖음(계시록 6:10)에서 하나님의 복음이 파괴되지 않고 연기되었다는 사실이 잘 드러난다고 가르쳐주셔서 그 점을 잘 배웠습니다. 그렇다면 세례요한의 질문, 마태복음11:1-14절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로 보복이 연기되었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을까요?

응답) 어제 강의에 대해서 누군지는 잘 모르지만 잘 이해하고 적절한 질문을 해주었기 때문에 아주 반갑습니다. 아주 적절한 또 다른 성경구절을 들었습니다.

여기에 있는 저의 아내를 위해서 영어로 질문을 읽고 싶습니다. (......)

아주 적절한 구절을 물었는데요. 좀 생각을 해보지요. 세례요한의 상황을 생각해봅시다. 세례요한은 지금 옥에 갇혀있는데, 그는 여호와의 위대한 선지자입니다. 여호와의 위대한 선지자가 옥에 갇혀있다, 생각해 보십시요. 그는 위대한 왕이, 왕 중의 왕이 오신다고 가르쳤는데, 그 자신은 옥에 갇혔습니다. 결과가 무엇입니까? 그래서 세례요한이 전파한 메시지가 무엇이었는지 이걸 살펴봅시다. 그것은 마태복음 3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회개하라 하나님나라가 가까웠다” 7절에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오는 것을 보고 그들에게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계속 이야기하기를, 10절에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리라” 계속 이어서,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신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쭉정이를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겠다 전파하였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말씀 후에 세례요한은 성신께서 비둘기의 모양으로 그리스도께 임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다음에 일어난 사실은 뭡니까? 세례요한은 메시야가 오실 때 그분은 우리를 구원하실 것이고 또한 의를 시행하실 것이다. 하나의 행동으로 구원과 의의 시행을 바랐습니다.

이것은 구약적인 것입니다. 그분이 오셔서 구원하실 때 심판하시는 것, 두 가지를 하나로 이해하는 것은 구약적인 것입니다. 주님께서 오셨지만 그러나 원수들은 패배하지 않았습니다. 역사는 거꾸로 가는 것 같습니다. 세례요한은 옥에 갇혔습니다. 이것은 하나님나라가 도래할 것에 대한 우리의 기대하고는 정반대입니다. 그리고 12장에서 그는 심부름꾼을 예수님에게 보냈습니다. 옥에 갇혀있는 세례요한은 조금 의심한 것 같습니다. 사자를 통해서, 그의 제자를 통해서 이야기하기를 오실 그이가 당신이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려야 하리이까 하고 묻습니다.

이제 예수님의 대답에 아주 주의를 해서 들어보십시요. 그리스도께서는 이사야 35장을 인용하셨습니다. 마태복음11:4-5절입니다. 4절부터 보면은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 대답은 세례요한에게 아주 귀중한 것이었습니다. 어제 이사야 35장 공부하신 것 잘 기억하시지요? 이사야 35장은 하나님의 보복에 관한 장입니다. 여기에서는 구약의 메시지인데, 구약에 있어서 다시 반복하자면 두 가지가 하나입니다. 하나님께서 보복해서 악을 멸절하시는 것, 그것이 동시에 그의 백성의 구원이 됩니다.

우리는 신약에서 일시적으로 분리가 되는 것, 심판적 구원이 일시적으로 분리가 되는 것을 신약에서 발견합니다. 더 이상 심판과 구원이 하나의 행동으로 동일하게 발생하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구원의 복음이 있고 이때는 구원 받을 만한 때입니다. 예수님께서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이렇게 이야기할 때에는 예수님께서 육체적인 연약함을 고치는 자로 이야기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또 다른 면으로 심판이 있습니다. 심판으로 끝입니다. 그렇지만 아직은 아닙니다.

심판이 올 것입니다. 그런데 첫째는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에게 임할 것이고 그다음에 역사의 마지막에 심판이 있을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에게 가르치신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례요한에게 “요한아, 네가 맞다 내가 고치고 있는 이 사람들,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걷게 하는 이 구원의 일을 보아라.” 그렇지만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에게 심판에 대해서는 다음에 할 것이다 심판이 아직 아니라는 것을 다음에 알 것이지만 그러나 내 생전은 아니다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다시 한번 이야기 하자면 이사야 61장의 말입니다. 여호와의 은혜의 해가 지금 도래한 것입니다. 그리고 보복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자면 내 자신이 그 보복에 나를 희생의 제물로 드리겠고 그리고 모든 악인에 대한 보복은 마지막 날에 하겠다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첫 번째 문제에 대한인데요, 긴대답이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이것은 아주 적절하게 어제 강의를 잘 이해하고 완전한 예로 마태복음11장을 이야기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고 아직은 아닌 것을 잘 보여주는 어제 우리 강의를 아주 완벽하게 보여주는 또 다른 구절입니다.

2. 세례요한이 활동하던 때 하나님의 보복에 대한 개념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세례요한이 품고 있었던 하나님에 대한 개념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개념은 어떤 점에서 차별이 있을까요?

응답) 세례요한에 대해서 이야기 하자면 질문이 세례요한과 일반대중에 관한 것인데, 세례요한은 1세기경의 이스라엘 사람과 공동점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단 하나의 차이점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신구약사이의 중간문헌, 혹은 초기 유대문헌에서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사해 근처에 있는 유대교의 초기문헌들 이른바 쿰란문서라는 것을 생각해봅시다.

그리고 김홍전 목사님께서 쿰란 문서를 공부하고 이 사해문서에 나타난 메시야 사상에 대해서 박사논문 쓴 것을 언급하고자 합니다. 그때의 문헌들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보복을 밖으로, 이방나라에 대한 하나님의 보복, 특히 로마제국에 대한 보복을 생각했습니다. 로마사람들이 어떻게 억압했는가라는 역사를 알면 그들의 생각을 이해할 수는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기대는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입니다. 왜냐하면 이 기도에서 자기들을 빼놓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세례요한이 심판과 구원을 전할 때에는 다른 이스라엘 사람처럼 밖에만 향하고 자기는 빼놓은 것이 아니라 밖에 뿐만 아니라 안에 있는 사람들, 이스라엘 사람도 포함해서 전파했습니다. 이점이 다른 점입니다. 그러니까 주후 1세기경 이스라엘 보통사람들의 마음에 있어서는 민족주의적인 경향이 있었지만, 그러나 세례요한은 구약과 같은 맥락에서 이스라엘백성에 대한 언약의 맥락에서 생각한 점이 중요한 차이점입니다.

이것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고 좋은 질문에 대해서 매우 감사를 드립니다.

저에게 박수를 치셨지만 반대로 하고 싶습니다. 왜냐면 여러분께서 이틀 저녁동안 아주 어려운 강의를 주의를 기울여 들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저와 저의 아내는 여러분과 함께 여기 있었던 것을 아주 기쁘게 생각하고 감사하게 생각한다고 여러분에게 말씀드립니다. 그리고 저는 내일 아침 네델란드로 돌아가는데 여러분에 대한 아주 좋은 인상을 가지고 갈 것입니다. 그리고 특별히 사랑하는 주안에서 형제 된 분들의 지식과 경험 이것에 대해서 좋은 기억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에게 주님 안에서 사랑 안에서 인내를 하고 성경에서부터 지혜를 얻으시라고 싶습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는 건데 여러분의 이 회중과 독립개신교회가 화란에 있을 때 저희의 기도 가운데 기억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서로를 언급하고 하나님께 서로 기도하면서 지냅시다. 감사합니다.

(타이핑/이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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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이준성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09.09.30 네 참으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면서도 드러내기를 부끄러워하는 부분이 있었지요. 일치하는 믿음으로 이끌어주시니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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