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종합게시판

질그릇님께 답변...왜 우편강도라고 합니까?

작성자이준성|작성시간09.11.12|조회수1,233 목록 댓글 0

이 글은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을 정리해본 것입니다.

결코 사탄에게 조롱 당하지 아니하신 우리 주님을 생각해보았습니다.

시간에 쫓겨 산만하지만 생각을 늘어놓았습니다.

질그릇님께서 하신 질문에 성의를 보이느라....

 

 

첨부파일 왜 우편강도인가.hwp

 

 

 

왜 우편강도인가?

서울개혁교회 이준성목사

예수님의 오른편에 달렸던 강도는 회심하고 십자가에서 주님을 자신의 왕으로 고백하였습니다. 우편강도라는 낯익은 표현은 성경에 나오지 않은 표현입니다. 양편에 매달린 죄수 가운데 우편의 강도가 실제로 회심한 강도였을 수도 있다. 비록 성경에는 기록되지 않았지만 당시 목격자들이 했던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구전되어 왔을지도 모릅니다. 매우 익숙한 말이지만 실상 성경에는 그런 표현이 없습니다.

우편 강도라는 표현이 언제부터 사용되어왔는지는 그렇게 중요한 문제는 아닙니다. 아마도 기독교 작가들의 글들을 살펴본다면 어느 정도 유추해볼 수 있지만 밝혀낸다고 해도 그다지 가치가 있는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교리적인 생각을 바탕에 두고 생각해볼 때에 두 강도 가운데 우편에 있는 강도가 회심했다고 보는 것은 타당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 이유를 지금부터 설명해보겠습니다.

1. 십자가에 매달린 왕.

십자가에 매달려 사형을 당하신 그리스도는 유대인의 왕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유대인의 왕이 되신 것은 백성들이 원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원하셨던 것도 물론 아닙니다. 하나님과 그의 언약백성 사이에 체결된 언약 때문입니다. 주 하나님께서는 구세주를 약속하셨고 약속대로 아드님을 왕으로 보내셨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그 언약을 믿지 않았습니다.

비록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자기들의 왕으로 영접하지는 않았지만 하나님의 율법에 의해 예수님은 합법적인 왕으로 자기 백성들 위에 임직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합법적인 왕이십니다.

합법적인 왕이시므로 자기 백성들이 인정하지 않을지라도 상관없이 아버지께서 기름을 부어 세운 왕의 직무를 수행하셨습니다. 왕을 보내어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시겠다는 약속도 하나님의 편에서 일방적으로 약속하신 것이지만 그 약속대로 왕의 직무를 수행하실 때에도 자기 백성들에게 환영을 받지 못하시는 가운데 감당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왕으로 오셔서 왕의 직무를 홀로 수행하신 것은 하나님이 얼마나 언약에 신실하신 분이신가만을 드러내었습니다. 주님께서 택하신 백성들은 참으로 언약에 신실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왕으로 봉사하시는 동안에 유대인들은 그리스도를 미워하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들의 죄를 대속하려고 고난의 길을 걸으시는 동안에 그들은 가시면류관을 쓰는 왕보다는 자기 배를 채워줄 왕이 더 필요하다며 불평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왕으로 즉위하셨지만 그 길은 고난의 시작이었습니다. 왕에게 충성스러운 백성들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백성들은 도리어 왕을 배반하였습니다. 충성스러운 백성이 없는 왕, 이 얼마나 수치스러운 일입니까?

주님께서는 이런 언약백성들 가운데서 자기를 믿는 백성들을 찾으셨습니다. 그리스도를 자기 왕으로 영접하는 이들을 찾으셨습니다. 비록 많은 사람이 한때 예수님을 따르기도 했지만 이제 군병들에게 체포되시자 죄를 위해 가시 면류관을 쓰신 왕을 배신했습니다. 심지어 제자들까지도 자기들의 왕을 떠났습니다.

두려움 때문에 자기 왕께로 왔어야 했지만 반대로 두려움 때문에 왕을 떠나갔습니다. 예수님이 천지를 다스리시는 왕이신 것을 믿지 못했습니다. 창조주이신 것을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허락이 없이는 머리털 하나라도 떨어질 수 없다는 사실을 믿지 못했습니다.

이제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는 외롭고도 수치스러운 왕이 되셨습니다. 왕이시지만 어느 누구도 그의 편에 서있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 반석이라고 별명을 받은 베드로도 주님 곁에 남지 않았습니다.

수치와 멸시를 당하신 이 왕은 고난 당하는 자신을 동정하는 대신, 십자가에서조차도 여전히 왕의 일을 수행하셨습니다. 둘러선 모든 구경꾼들이 자기 백성들이지만 배신한 백성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들에게 저주를 쏟지 아니하시고 여전히 그들이 회개하도록 일하셨습니다.

유대 각 동네를 다니며 회개하라고 하셨지만 이제는 십자가에 박혀있어서 더 이상 유대 동네들을 방문하실 수 없습니다. 이제 십자가에서는 겨우 두 사람만 만날 수 있습니다. 두 강도가 양쪽에 매달렸습니다. 비록 강도로 매달렸지만 그들은 예수님의 언약백성이었기에 왕으로서 그들의 구원을 위해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주님은 바로 이 두 강도들에게도 왕이셨습니다. 그리고 이 둘 가운데 한 사람을 얻으셨습니다.

2. 사탄의 연출 각본

이 두 강도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성경에 의하면 이 두 사람은 예수님께 호의적이지 않았습니다. 이 두 죄인은 예수님을 자기들의 왕으로 영접하기를 결코 원치 않았던 사람들입니다.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마태복음 27:44, 마가복음 15:32)

이들은 죽음을 눈앞에 두고서도 왕을 욕했습니다. 죽음 앞에서는 종종 사람들의 마음이 유순해지고 자기 죄를 뉘우치는 법이지만 이들은 완고한 마음을 유지했습니다. 온 백성이 자기들의 왕의 죽음을 방관하고 있고 두려워 떨고 있습니다. 함께 죽게 된 두 강도들까지도 예수님을 욕하는 일에 가세했습니다.

이 십자가는 누구의 구상입니까?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사람을 상징합니다.[신 21:23] 예수님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사람이 되어 온 백성들 가운데 높이 달렸습니다. 유대인의 왕이지만 영광스러운 자리가 아니라 저주를 받은 자가 되었습니다.

누구나 연상하듯이 구주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시고 백성들 가운데 가장 높은 보좌에 올라 앉으시는 것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역사의 결과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되기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일을 훼방했던 자가 있었으니 그는 사탄입니다.

사탄은 예수님께서 영광을 얻지 못하도록 백성들을 미혹하였습니다. 사탄은 예수님을 영광의 면류관 대신에 가시 면류관을 쓰게 만들었습니다. 모든 백성들이 예수님을 그들의 왕으로 고백하지 못하도록 두려움을 일으켰습니다. 백성들에게 배신을 당한 왕, 심지어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가 된 하나님의 아들, 제자들까지도 자기 목숨을 위해 숨어버린 외로운 왕....

이 십자가의 그리스도는 바로 사탄의 작품이었습니다. 사탄은 온 인류 역사를 휘젓고 다니면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연출가입니다. 그의 연출의 목적은 “예수님은 너희가 기대하던 그 왕이 아니다”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어리석은 인생들아 보아라. 여기에 왕이 있다. 하지만 따르는 백성도 없고, 그를 호위하는 병사도 없다. 그에게 영광이라고는 가시면류관뿐이다. 그가 참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어찌 이렇게 저주의 나무에 매달리도록 구원하지 않으실 수 있겠는가?

예수님을 구경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주는 인상은 인류 역사상 가장 실패한 왕이라는 전갈이다. 이 전갈은 지옥으로부터 온 거짓 소식이다. 구경꾼들은 참 아까운 젊은이를 바라보면서 속으로 말했을 것입니다. “그렇다 저 사람이 우리가 기다리던 왕은 아니다.”

사탄은 성공했습니다. 예수님을 자기 백성들로부터 수치와 멸시를 당하게 했습니다. 로마의 군인조차도 예수님을 손대기 원치 않았지만 유대인들이 자기들의 손으로 자기들의 왕을 죽이게 만들었습니다.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요 1:11]

사탄은 가슴에 벅차오르는 만족을 얻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증오심을 거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사탄은 더욱 예수님을 조롱하기를 원했습니다. 사람들에게 그를 온 세상에 수치스러운 왕으로 각인시키기를 원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홀로 고난당하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 왕에게 두 신하를 붙여주었습니다. 모든 백성이 그리스도와 동행하기를 원하지 않았지만 이 두 강도가 강제로 그들의 왕과 동행하도록 연출을 구상했습니다. 좌우편에 함께 매달린 강도가 고난당하는 그리스도의 유일한 신하로 선택이 되었습니다.

무슨 생각이 듭니까? 전쟁에서 포로로 사로잡힌 왕을 생각해보십시오. 포로가 된 왕을 위해서 종들을 함께 사로잡아 동행하게 합니다. 패배한 왕의 시종은 자기의 왕을 위해서 시종을 듭니다. 고난당하는 왕의 편의를 위해서 충성스러운 종들이 함께 합니다.

이 그림을 사탄이 생각했습니다. 사탄은 자기와의 싸움에서 패배한 왕 그리스도를 위해서 두 사람을 강도로 선택하여 함께 있도록 연출했습니다. 왕이신 그리스도는 이 두 종의 입에서 욕을 당합니다. 패배한 왕을 위한 마지막 자비로 사탄은 위대한 왕의 좌우에 종을 허락했습니다. 하지만 그 두 종은 강도들인데다가 자기의 왕을 비난하고 욕합니다. 자기 왕과 함께 죽음에 이르기까지 동행하도록 종들도 십자가에 달렸습니다. 강도들을 종으로 거느린 왕, 마지막으로 지명된 신하들조차도 욕하는 저 십자가의 왕을 보라. 이 신하들은 자기의 왕을 비난합니다. 함께 죽게 되었으면서도 자기의 왕에게 존경을 바치지 않고 욕합니다.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가로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눅 23:39)

이보다 비참한 처지에 내몰린 왕이 있습니까? 이런 수치를 당하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사탄은 예수님을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모독했습니다. 사탄의 희롱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왕은 자비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에까지 동행하는 이 두 신하들의 안녕을 위해 극심한 고난 속에서도 돌아보시고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그토록 고통스러운 시간에 사탄이 고용한 배우를 돌아보시고 구원을 얻게 하셨습니다. 한편에 달려있던 이 배우는 예수님을 욕하도록 사탄에게 고용이 되었지만 도리어 회개하고 자기의 왕께 자신을 의탁하였습니다.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가로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 하니하느냐.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가로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누가복음 23:40-43)

욕하도록 고용을 당한 이 사람이 그리스도를 함께 욕하다가 갑작스럽게 그리스도를 자기의 왕으로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어찌된 일입니까? 십자가의 주님은 그 고통 중에서 완고한 강도들에게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에서조차도 고통을 겪고있는 자신을 동정하거나 신세를 한탄하지 아니하시고 자기의 과업에 주목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조롱하도록 고용된 두 강도에게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3. 그리스도는 백성이 없는 왕이실 수 없다

조금도 사랑스럽지 않은 백성, 신실함이 없는 백성들이지만 언약에 신실하신 왕이십니다. 자기 백성을 하나님의 나라로 이끄시려고 여념이 없이 일하시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완악한 한 강도를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하셨습니다. 사탄이 가장 멋지게 그리스도를 조롱하려고 선별한 사람들이었지만 그리스도께서는 도리어 십자가에서 그 한편 죄인을 회심하도록 인도하셨습니다. 이제 유대인의 왕을 위해 충직한 신하를 거느리게 되었습니다. 사탄이 그리스도를 조롱하도록 고용한 강도가 연출각본에 따라 예수님을 비난했을 때에 이 회심한 신하는 자기의 주님을 힘있게 고백하였고 자기의 영혼은 자기의 왕에게 의탁하였습니다.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 나를 기억하소서”

이에 그의 왕께서는 아주 자비로운 음성으로 위로하셨습니다.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죽음 앞에서 자기 주님을 왕으로 고백하고 배신한 백성들 가운데서 자기 주님께로 돌아선 이 신하로 인해서 사탄의 완벽한 연출은 완전히 틀어지고 그리스도께서는 이 신하로 인해 영광을 얻으셨습니다.

예수님을 자기의 왕으로 고백하는 신실한 신하를 왕께서 자기의 우편에 두시는 것은 사탄의 연출을 망치는 예수님의 전쟁의 일환이었습니다. 온 백성이 배반한 외로운 왕, 강도들이 그 왕의 신하로 배정이 되어있는 사탄의 음모 속에서 복음을 전하신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충직한 신하를 자기 오른편에 세우신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자기 백성에게 영접을 받지 못한 수치스러운 왕이시지만 그들의 배신까지도 용서하시려고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인자를 거역한 죄까지도 용서하시는 십자가는 사탄의 승리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승리였습니다.

사탄은 예수 그리스도 곁에 아무도 동행하지 않게 하려고 했지만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우편에 신실한 신하를 세우심으로 그의 죽음이 위대한 왕의 고난임을 온 인류에게 증거하셨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회심한 강도가 왕의 우편에서 그리스도의 왕권을 한껏 영예롭게 했다고 보는 것은 우리의 신앙고백과 잘 어울리는 생각입니다. 주님께서 자기 우편에 강도라도 회심시키셔서 신실한 종으로 세우시고 그의 입으로 왕의 영광을 찬양하도록 하셨습니다. 모두가 그리스도를 배반했을 때에라도 주님께서는 자기 우편에 신실한 종을 일으키셨습니다. 참으로 우리의 왕은 어느 때에라도 자기를 섬기는 백성이 없으신 채로 홀로 계실 수 없으십니다.

도움이 되셨기를 바랍니다.

주안에서 이준성 올림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 북마크
  • 신고 센터로 신고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