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주일설교

그리스도께서 보좌 우편에 앉으심으로 고난을 참는 자들에게 영광을 보증하신다.(요한계시록 3:21)

작성자이준성|작성시간11.08.06|조회수258 목록 댓글 0

 

첨부파일 그리스도께서 보좌 우편에 앉으심으로 고난.hwp

 

그리스도께서 보좌 우편에 앉으심으로 고난을 참는 자들에게 영광을 보증하신다.

본문: 누가복음 19:12-27

요절: 요한계시록 3:21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오늘 우리는 특별한 시간을 갖습니다. 청중은 나의 가족들이며 훈화하는 사람은 그 가족의 가장입니다. 그래서 설교라는 용어 대신에 교훈이라는 용어로 지금 말씀드리는 행위를 지칭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나귀라도 사용하시고 돌들이라도 소리를 지르게 하시므로 여러분의 마음에 설교가 아닌 교훈이 하나님의 말씀에 일치하다고 믿는다면 듣고 기쁜 마음으로 미약하지만 즉각 순종을 시작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관심을 그리스도께 모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생애 전체는 그의 몸된 교회에 가장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심지어는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이후 하늘에 계시는 동안에도 교회에게는 가장 중심이 되십니다.

우리가 믿는 말씀에 따르면 그리스도는 지금 하늘 보좌 우편에 앉아계십니다. 하늘 보좌 우편에 앉으셨다는 말이 실재로 우리에게 어떤 효력이 있습니까? 보좌 우편에 앉으시기 이전과는 그리스도와 그의 몸된 교회에게 무엇이 달라졌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시고 높은 보좌에 앉으셨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통치의 양상이 달라질 것이고 그의 교회가 구약과는 대단히 다른 양상을 보일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구약은 사탄에게 괴롭힘을 받았지만 이제는 그리스도께서 보좌에서 자기 교회를 형통하게 하실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참으로 그리스도께서 하늘 보좌 우편에 앉으셨기 때문에, 그리고 사탄이 하늘에서 추방되었기 때문에, 그 이전까지는 진정한 왕이 아니셨습니까? 안타깝게도 이렇게 생각하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왕으로 보좌에 앉으셨으니 이제 악인들은 형통하지 못할 것이고 의인들은 하는 일마다 잘 되리라고 믿어도 됩니까? 그리스도께서 진정 온 세상을 심판하시는 왕이 되셨기 때문에 오늘 일어나는 모든 복과 저주는 그분의 심판의 결과로 보고 이해해야 합니까?

로마교는 기독교가 마땅히 온 세상의 모든 권세들보다 위에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신 이후에는 분명 왕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교회에게는 행복하고 성공적인 나날이 계속될 것이라고 믿어도 됩니까? 사탄은 주님의 교회를 결코 위협할 수 없습니까?

오늘 말씀의 제목은 그리스도께서 보좌 우편에 오르심으로 우리 믿음을 보증하신다.

그리스도는 언제 왕이 되셨는가?

그리스도는 세상에 오셨을 때부터 왕으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왕으로 사셨고 왕으로서 백성들을 위해 고난을 당하셨으며 십자가에서도 왕이셨습니다. 마침내 하늘 보좌에 앉으셨습니다. 우리 가운데 누구도 그리스도께서 왕이셨다는 사실에 대해 의심하지 않습니다. 처음부터 영원토록 왕으로 계십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 늘 영광을 받으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왕이시지만 때로는 가장 비참한 자리에 계셨습니다. 왕이시지만 짐승의 구유에서 탄생하셨습니다. 동일한 왕으로서 아버지의 보좌 우편에 오르신 것은 영광을 받으시는 자리에 들어가셨음을 의미합니다. 가장 비참한 자리에 계셨지만 영광의 자리로 들어가시기 위해서는 부활로 완전히 새롭게 되셔야 했습니다.

그리스도는 왕이셨고 또한 영원한 왕으로 하늘에 계십니다. 보좌 우편에 앉으셨다면 달라진 점이 무엇입니까? 그 이전에는 왕이 아니셨다가 비로소 왕이 되셨다는 말입니까?

보좌 우편에 앉으심에 대한 오해들

그러나 성경은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이후 보좌에 앉으셨다고 명시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께서 명실상부한 왕으로 즉위하셨기 때문에 지금 세상을 과거와는 다른 방식으로 친히 다스리신다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온 세상을 통치하고 계신다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그리스도의 심판의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이 좋은 일이 생겼다면 그것은 보좌에 오르신 그리스도께서 복을 주신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악한 일이 일어났다면 그리스도께서 하늘 보좌에서 그를 징벌하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에게 뭔가 미워하시는 죄가 있다는 의미가 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지금 온 세상을 통치하시는 왕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통치에서 벗어날 자는 없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가 심판 보좌에 앉아있다면 지금 세상을 심판하고 계시다는 뜻이 됩니다. 악인이 형통하게 되면 그것을 무법천지라는 뜻이며 하늘 보좌에 오르신 그리스도의 왕권이 그에게 미치지 못한다는 뜻이 됩니다. 그래서 많은 신자들은 자신에게 악한 일이 일어나고 노력한 것을 거두지 못하게 될 때에 즉시 그리스도께서 하늘 보좌 우편에 오르신 사실을 의심하고 혼란을 겪습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늘 보좌 우편에 오르셨다면 그 이전과 현저한 차이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물론 사탄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추방된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교회에 고난이 더욱 극심해졌다는 의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계시는 동안에 왕으로서 공경을 받지 못하셨고 고난을 받으셨던 것처럼 하늘에 오르신 이후에도 그리스도의 교회는 고난을 당합니다. 교회는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께서 가장 높이 되셨기 때문에 당연히 세상에서 그만한 존귀와 영광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머리이신 그리스도께서 가장 존귀한 자리에 계심에도 불구하고 그의 몸된 교회는 세상에서 고난을 당합니다.

로마교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신 일을 오해한 나머지 자신들의 권세와 영광이 세상의 왕들의 권세와 영광보다 더 크고 영광스러워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자신들을 세상의 왕들 위에 두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셔서 하늘 높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왕이시듯 우리도 그의 왕권에 참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지금 하늘 보좌 우편에 계신다고 해서 우리 자신도 세상에서 그리스도와 같은 영광을 누려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세상에서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렇다면 하늘 보좌 우편에 오르셨다는 우리의 고백은 실제 무슨 의미입니까?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존귀하게 되셨는데도 교회는 왜 여전히 고난을 당해야 합니까? 그리스도께서 높아지신 것이 실제로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으며 하늘 보좌 우편에 앉으시기 이전과 이후에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보좌에 앉으심에 대한 올바른 이해

그리스도께서 보좌에 앉으심에 대해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것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19:12-27절의 말씀은 우리에게 익숙한 비유입니다.

1) 간략한 문맥설명

먼저 이 비유는 삭개오가 예수님을 보기 위해 뽕나무에 올라간 이야기에서 시작합니다. 주님께서는 그의 집에 머무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을 기쁨으로 영접했습니다. 그러나 이를 목격한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죄인의 집에 들어가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자신의 집으로 예수님을 영접한 삭개오는 죄를 사하는 권세있는 그리스도 앞에서 지난 죄로부터 돌아섰습니다. 죄에 대한 그의 반립은 결연한 것이었습니다.

(8)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배나 갚겠나이다

그는 죄로 기울어진 자기의 본성에 대해 단호하게 부인하였습니다. 자기 옛 본성이 원하고 소망하던 것을 거절하고 그것이 더 이상 자신의 소원이 아니라고 선언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할례언약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상기했고, 그리스도의 속죄를 약속받은 새사람임을 각성했습니다. 여전히 그 속에 있는 죄된 본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더 이상 자신이 아니라고 고백했습니다.

이렇게 아브라함의 언약 안에서 하나님의 백성이었으나 자신의 옛 본성을 따라 배도의 삶을 살았던 모든 과거의 일들을 부정하고 옛 사람과 반립을 시작하는 일, 자기를 부인하는 삶의 시작했습니다. 이에 대해 그리스도께서는 다음과 같이 선언하셨습니다.

(9)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10)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그리스도께서는 삭개오를 잃었던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본래 당신의 소유였던 자였지만 잃었다가 다시 찾았다고 말씀하십니다. 언약을 배반한 자가 다시 언약으로 돌이킨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그를 잃었을 때, 삭개오는 하나님의 백성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신의 옛 본성을 따라 살았습니다. 죄로 기울어진 자신의 옛 본성이 원하는 것을 따라 살았습니다. 성령으로 새롭게 된 자신의 속사람으로 성령을 따라 살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런 잃어버린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서 이제 한 사람을 찾았다고 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아들로 세상에 오신 것은 바로 자기 백성들 가운데서 잃어버렸던 자들을 다시 찾고자 함이었습니다. 이것은 곧 사탄과의 싸움이었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믿는 자라도 미혹하려는 사탄은 언약으로 구원을 얻은 자들을 다시 율법 아래 가두려고 했습니다. 거의 성공했습니다. 언약으로 새롭게 된 백성들에게서 믿음을 제거하고 언약을 철저하게 의심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뭔가를 해야 한다고 믿게 만들었습니다. 인간의 전적부패를 부인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이 행함으로가 아니라 은혜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기 때문에 그 믿음이 회복되도록 일하셨습니다. 삭개오는 죄를 사하는 권세를 가지신 그리스도 앞에서 자신을 위해서 오신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아브라함의 언약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즉시 그는 옛 본성을 따라 살아감으로 얻고자 했고 얻었던 것으로부터 자신을 분리시켰습니다. “사배나 갚겠나이다.” 이 말은 그가 자기 안에 여전히 있는 옛 본성에 대해 너는 그리스도 안에서 죽었고 더 이상 내가 아니다라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이제 자기 잃어버린 백성을 찾았고 또 그렇게 자기 백성을 찾아 회복시키겠다고 하시자 사람들은 즉시 하나님의 나라가 곧 임하겠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마지막 심판의 날이 곧 임할 것이라는 종말을 생각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을 다 찾으시고 그래서 선포되었던 하나님의 나라가 곧 이루어질 것이라는 생각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다루게 된 본문은 바로 이런 사건에 이어서 하신 말씀을 누가를 통해 성령님께서 기록하신 것입니다.

(11)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있을 때에 비유를 더하여 말씀하시니 이는 자기가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셨고 저희는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날 줄로 생각함이러라.

이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생각할 때에 그리스도께서 왕으로 세상에 오셨고 잃어버린 자들을 찾고 계시기 때문에 왕의 통치를 받는 백성들이 모이게 되면 곧 하나님의 나라가 회복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당신의 나라가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여기 혹은 저기에 있는 나라들과는 다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어쨌건 빌라도는 예수님을 심문한 결과 그리스도가 왕이라고 판단했고 그리스도께서도 그의 말대로 왕이심을 인정했습니다.

2) 본문 설명

이런 문맥 속에서 어떤 귀인에 대한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귀인이 왕위를 받아오려고 먼 나라로 떠났습니다. 떠나면서 종들에게는 재산을 나눠주고 일하게 했습니다. 한편 백성들은 귀인이 왕이 되는 것을 반대했습니다. 귀인이 왕위를 받아 돌아와서 종들에게는 일한대로 상급을 주었고 원수들은 죽음으로 심판을 했다는 내용입니다.

이 비유를 이해하려면 귀인이 왕위를 받아오려고 떠났다가 돌아오기까지의 결코 짧지 않은 기간에 주목해야 합니다. 이 기간이 제자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당장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 기간에 귀인이 출타중이고 그 대신 종들에게 그의 나라를 맡겼습니다. 이 긴 기간에 대한 종들의 반응이 이 비유의 첫 번째 주목할 점입니다.

종들 외에 백성들도 있습니다. 본문에서 이 백성들은 그 백성’(poli'tai aujtou')은 그 귀인의 통치 아래 있는 백성들입니다. ‘그 백성그의 백성이라고 번역했다면 좀 더 의미가 분명했을 것입니다. 귀인의 다스림을 받는 백성인데도 이들은 그 기간 동안 전혀 다른 반응을 보였습니다. 이들의 반응이 이 비유에서 두 번째로 주목할 점입니다.

긴 세월이 흐르고 귀인이 귀환했을 때에 종들은 장사를 했고 귀인의 백성들은 귀인이 자신들을 다스리지 못하도록 방해공작을 폈습니다. 그러므로 귀인이 왕위를 받아 귀환했을 때에 이 두 무리들에 대한 귀인의 판결이 어떠했는지가 우리가 주목해야할 마지막 관심입니다.

비유에서 왕위를 받아서 귀환을 기다리는 종들과 백성들에게 귀인이 왕위를 받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비유에서 귀인이 왕위를 받는다는 말은 그분이 곧 상 주실 분이라는 뜻입니다. 원수의 관점에서 본다면 그분이 심판하실 분이시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왕권이 당장 시행되는 것은 아닙니다.

비록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 귀인이 귀환하게 되는 그 날이 곧 심판이 시행되는 날입니다. 왕위를 받는다는 말이 곧 왕권이 시행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지만 심판의 날이 임박했다는 뜻입니다. 이 말은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셔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는 날에도 선언되었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왕위를 받기 이전에는 왕이 아니었다가 비로소 왕이 되었다는 지위나 신분의 변화로 보지 않아야 합니다. 그 이전에는 통치할 권세가 없었다가 비로소 통치할 권세를 받았다는 의미로도 충분하지 않습니다. 귀인은 이미 그 백성들에게 왕입니다. 비록 왕이지만 아직 그들에게 심판이 시행된 것은 아닙니다. 백성들에게 귀인이 왕권을 받아서 귀환하는 날은 심판의 날이 될 것입니다. 이 비유에서 우리가 주목해야할 점이 바로 이것입니다.

이미 귀인의 통치 아래 있는 백성들이지만 왕위를 받으신 후에는 통치의 성격이 달라집니다. 반역한 자들에게 임한 최후의 심판, 충성된 종들에게 약속한 최후의 상급을 나타내시는 통치가 드러나는 날입니다. 이 귀인에게 아직은 심판하는 권세를 허락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귀인은 이들에게 이미 왕이십니다. 그러나 아직은 귀인이 이들에게 심판을 시행할 권세를 가진 왕은 아닙니다. 이들을 향한 상급과 심판의 날은 귀인 자신에게 속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그 날과 시는 오직 하나님만이 아신다고 하심으로 예수님께서 왕이실지라도 심판의 권세는 받지 못하셨습니다.

왕위를 받는다는 말의 의미는 바로 심판이 준비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왕위를 받아서 귀환하시는 그 때가 지금 당장은 아닙니다. 하나님만이 아시는 그 때까지는 하늘이 그리스도를 받아두셔야 합니다. 그 때가 언제일지는 성부 하나님만 아시며, 속히 임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마침내 그 날이 되면 귀환하실 것이고 바로 심판이 시작될 것입니다.

이 날은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시는 그 날입니다.

구속사에서 보좌의 자리

이상의 비유를 통해서 그리스도께서는 구속역사에서 교회시대의 성격을 말씀해줍니다. 하늘 보좌 우편에 앉아계신다는 표현이 구원의 역사에서 어떤 시기를 말하는지에 대해 빛을 비추어줍니다. 하늘 보좌 우편에 앉으심은 하늘로 올라가 왕권을 받으셨음을 말해줍니다. 왕의 속성이 변했습니다. 이제는 심판권을 가진 주님이십니다. 그러나 아직 귀환하신 것은 아닙니다.

이 왕권을 받으셨기에 언제 귀환하든 우리의 관심은 왕의 포상과 심판입니다. 하지만 저는 특별한 목적을 위해서 귀환한 왕을 주목하고자 합니다. 저는 하나님 아버지의 우편에 앉아 계시며라고 친히 가르쳐주신 기도의 한 문장을 이해하기 위해서 이 본문을 참고하려고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우편에 앉아 계시며의 의미

얼마동안 앉아계시는가?

이 비유가 실제 기간에 대해 말하고 있기 때문에 하늘에 체류하시는 기간이 얼마동안인가 물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늘 보좌에 앉아계시는 기간을 이렇게 표현해볼 수 있습니다.

우편 보좌에 앉아 계시는 기간은 그리스도께서는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이후부터 재림하시는 그날까지입니다.

우편 보좌에 앉아 계시는 기간은 신약교회의 시작과 함께 시작하며 구원역사의 완성까지입니다.

우편 보좌에 앉아 계시는 기간은 교회와 사탄의 싸움의 시작에서 모든 전쟁이 끝나는 날까지입니다.

이 기간은 현재까지 2천년이 되었기 때문에 아주 긴 기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기간 동안 주님의 교회가 처한 형편을 가장 잘 묘사하고 있는 말씀이 계시록에 나오는 소아시아지역의 일곱교회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이 일곱교회에게 보낸 편지에는 사탄과의 영적인 싸움의 시작과 그 끝이 고스란히 묘사되어 있으며 그 시대의 역사는 이어지는 신약시대 전 역사를 상징하며 요약해줍니다.

이 기간 동안에 이 교회들이 바라보는 그리스도는 우편 보좌에 좌정하신 그리스도이십니다. 곧 언제든 귀환하셔서 왕국을 심판하실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내가 곧 강림할 것이라고 밝히십니다. 그리스도께서 곧 이라는 용어를 사용했지만 그 기간이 시간적으로 아주 짧은 기간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 날과 시간은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악인은 악을 행하고 의인은 계속 의를 행하는 기간입니다.

계시록은 그리스도께서 보좌 우편에 앉으심에서 시작하여 종들의 상급과 사탄의 심판을 주목합니다.

[5:8] (8)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

교회시대가 언제 끝이 나는 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이라도 곧 오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 기간이 반드시 짧다고 말해서도 안 됩니다.

아버지께서 정하신 때에 심판을 행하실 것이므로 언젠가 그 때가 될 때까지 하늘이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있을 것입니다.(3:20-21) 그 시간이 지체되는 것처럼도 보입니다. 더딥니다. 그러나 참고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상급을 얻도록 선한 열매를 맺기를 기다리시는 기간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의 입장에서 세월을 아껴야 합니다. 사실 젊었을 때는 잘 몰랐지만 나이 들어보니 너무도 세월이 빨리 흘러 열매를 맺을 시간이 넉넉하지 않습니다.

하늘 보좌에 앉으심으로 이전과 이후에 어떤 변화가 있는가?

비유는 왕권을 받기 이전과 이후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비유에는 두 무리가 있습니다. 종들이 한 무리이고, 백성들이 다른 한 무리입니다. 종들은 귀인이 자신들의 왕으로 충성을 약속했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은 귀인을 자신들의 왕으로 영접하기를 거절했습니다.

주님의 관심은 지금 세상을 심판하시는 왕에 대한 이들의 태도가 아닙니다. 왕위를 받으셨지만 아직 귀환하지 않으신 심판주에 대한 태도를 주목하고 심판하십니다. 이들의 태도는 둘로 나뉩니다. 귀인을 왕으로 영접하고 그를 맞이할 준비를 하는 삶과 귀인을 왕으로 영접하기를 거절하는 삶입니다. 전자는 왕의 권세에 참여할 자들이고 후자는 대항함으로 심판을 받게 됩니다.

이들의 모든 행위는 왕위를 가지고 귀환하신 왕, 지금 통치하시고 다스리시는 왕에 대한 태도가 아닙니다. 심판은 아직 미래의 일입니다. 아직 귀환하지 아니하신 왕, 심판권을 받으셨지만 심판의 권세를 시행하기 이전의 하늘 보좌 우편에 머물러 계시는 왕에 대한 오늘 지금 현재 우리의 믿음과 태도입니다.

상급을 빼앗긴 종

귀인의 종들은 귀인이 오시기까지 맡은 것으로 일해야 합니다. 이윤을 남기려면 일할 충분한 시간이 필요합니다. 귀인의 종들의 태도는 크게 둘로 나뉘는데 게으르고 악한 종은 상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행동에도 그만한 신학적인 근거가 있었습니다.

(20)또 한 사람이 와서 가로되 주여 보소서 주의 한 므나가 여기 있나이다 내가 수건으로 싸두었었나이다 (21)이는 당신이 엄한 사람인 것을 내가 무서워함이라 당신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나이다 (22)주인이 이르되 악한 종아 내가 네 말로 너를 판단하노니 너는 내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는 엄한 사람인 줄을 알았느냐 (23)그러면 어찌하여 내 은을 은행에 두지 아니하였느냐 그리하였으면 내가 와서 그 변리까지 찾았으리라 하고 (24)곁에 섰는 자들에게 이르되 그 한 므나를 빼앗아 열 므나 있는 자에게 주라 하니

이 악한 종은 자신의 주인을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는 분으로 생각했습니다. 쉽게 말해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연약한 우리가 해서 하나님께 유익을 드릴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이 생각은 일면 맞습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시므로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악한 종이 망각한 것은 주인과 맺은 언약입니다. 주인은 언약에 신실하신 분이시므로 우리는 그분의 전능하심이나 편재나 전지하심에 호소할 것이 아니라 그분과 맺은 언약에 호소해야 합니다. 전능하신 분께서 심는대로 거두게 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심어야 합니다. 구하는 자에게 주시므로 구해야 합니다. 우리의 사정을 아뢰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속사정을 모르시기 때문이 아니라 맺은 약속 때문입니다.

이 악한 종은 주인이 맡긴 므나 언약을 언약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오해들은 오늘 우리의 삶에서도 잘 등장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빙자해서 우리의 믿음을 순종으로 드러내는 일을 경시합니다. 그는 하나님이 전능하시므로 자신이 뭔가를 한다는 것이 별 의미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말씀 한마디면 되는 일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우리와 언약 안에서 교제하시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믿음과 감사의 자리를 없애버렸습니다. 경건하게 보이지만 실상은 언약을 버린 것입니다.

이런 사람에 대한 주인의 심판은 무섭습니다.

(24)곁에 섰는 자들에게 이르되 그 한 므나를 빼앗아 열 므나 있는 자에게 주라

우리 하나님은 전능하십니다. 무엇이나 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뭔가를 드려서 기쁘시게 할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께서 자기 종들에게 약속을 주셨다고 믿습니다. 종들은 자기 주인이 무엇이든 다 하실 수 있다는 지식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각자에게 맡기신 므나에 대한 언약적인 책무에 힘써야 합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은 우리의 언약적인 책임을 면제해주지 않습니다. 그의 명령과 약속들은 우리가 굳게 붙잡아야 할 것들입니다.

구속주, 심판주의 차이

왕위를 받았다는 말을 그 이전까지는 왕이 아니었다는 의미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만물을 다스리는 머리가 되셨다고 해서 그 때 비로소 교회의 머리가 된 것으로 생각하는 우매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언제나 교회의 머리이셨고 교회는 그의 몸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는 언제나 자기 종들의 왕이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세상에 오셨을 때 왕으로 오셨습니다.

[2:2] (2)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하니

심지어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시는 동안에도 여전히 왕이셨습니다. 그러나 그때는 세상을 심판하실 영광의 주님이 아니셨습니다. 고난의 주님이셨습니다.

[19:19] (19)빌라도가 패를 써서 십자가 위에 붙이니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 기록되었더라

[15:2] (2)빌라도가 묻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네 말이 옳도다 하시매

그러므로 왕위를 받으러 하늘로 가셨다가 다시 오실 때에 전에 없던 신분을 취득한 것으로 오해해서 그 이전에는 왕이 아니셨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이미 왕이신 분께서 이제 심판 때가 되어 세상에 대한 심판의 권세를 아버지께 받아서 귀환하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왕이실지라도 세상에서 일하시는 동안은 죄인들을 심판하지 아니하셨고 도리어 십자가에서 그들을 용서해주시기를 기도했습니다. 그리스도는 심판의 때와 권세를 아버지께 허락받은 왕으로서가 아니라 자기 백성의 죄를 위해 죽으신 구세주로서 왕이셨습니다.

[23:34] (34)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12:47] (47)사람이 내 말을 듣고 지키지 아니할지라도 내가 저를 심판하지 아니하노라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로라

[3:17] (17)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세상을 구원하러 사람의 몸으로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의 왕권에는 한 가지 빠진 것이 있었습니다. 다만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고 승천하신 이후에야 심판하는 권세를 맡기셨습니다. 이제 때가 되면 세상을 심판하기 위해 아들을 보내실 것입니다. 새롭게 왕이 된다는 의미보다는 새로운 통치, 구원이 아니라 심판을 시작하실 것을 말합니다.

[5:22] (22)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세상을 심판하실 분이시지만 세상에 계시는 동안은 그런 권세를 받지 않으셨습니다. 잠시 동안은 자기 백성의 구원을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시는 구원과 속죄의 권세를 가진 왕이십니다. 그러나 다시 세상에 오시는 날에 받은 권세는 이와는 다릅니다. 철장으로 부숴뜨릴 것입니다.(2:)

 

그러므로 이제 오늘 신약교회가 바라보는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신 분으로만 아니라 심판주로서 그리스도를 바라봅니다. 언제라도 심판주로 오실 모든 권세를 이양 받으신 그리스도께서 하늘 보좌에 앉아 계시며 심판의 날을 기다리고 계신다는 것을 응시해야 합니다. 이 날을 준비하고 선한 열매를 맺어야 하는 언약의 요구가 오늘 성도의 삶을 움직이는 동인입니다. 행함이 있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보좌에 앉으신 심판주로부터 오는 교회의 위로

보좌에 앉은 그리스도는 심판권만 아니라 우리가 얻을 왕권의 보증이십니다. 이러한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할 자는 그리스도의 고난도 마땅히 함께 해야 합니다.(8:17) 그리스도께서 보좌의 영광을 바라보며 모든 고난을 견디셨고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셨듯이 우리도 그리스도와 함께 앉게 될 그 영광의 보좌를 바라보면서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해야 합니다. 이 시기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여 순교하기까지 믿음을 지키는 전쟁의 시대입니다.

그리스도는 심판할 권세를 이미 위임받으신 왕이십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늘 보좌에 앉으신 그리스도로부터 즉각적인 심판을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심판을 미루고 계십니다. 순교자의 피가 더 많이 흘러야 합니다. 이미 2천년이나 지났지만 그리스도께서는 보좌에 계시면서 아무것도 심판하지 않으셨습니다. 악인이 여전히 잘 살고 의인이 고난을 당합니다.

그렇다면 보좌에 앉아계시는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어떤 위로를 주고 있습니까? 장차는 심판하신다고 해도 지금 당장 그 보좌의 위엄으로부터 우리가 얻는 위로는 무엇입니까?

너무도 단순하고 너무도 분명합니다. 아이라도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처럼 세상에 계실 때 고난을 견디기 위해 우리보다 앞서 믿음으로 약속하신 영광의 보좌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리스도는 자신이 교회의 머리로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을 것을 약속으로 받았습니다. 그 약속은 그리스도께 십자가의 고난을 참는 힘과 위로가 되었습니다. 현재의 고난을 견디기 위해 장래의 영광을 바라보았습니다.

[12:2] (2)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고후 4:17] (17)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예수님은 우리의 머리시오, 모범이십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우편보좌를 바라보고 소망하기 때문에 현재의 고난을 참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영광의 보좌에 앉아 계시는 모습을 죄인이 심판 받을 것을 보장하지 않습니다. 물론 그리스도께서 보좌에 오르셨으니 이제 성도는 고난이 끝났고 행복이 시작되었다는 뜻도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도 그리스도의 뒤를 따라 함께 보좌에 앉게 될 것이므로 이 땅에서 그리스도를 마음에 주로 삼아 극한 고난 속에서라도 믿음으로 살아가도록 격려합니다.

[3:21] (21)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그리스도께서 하늘 높이 보좌에 앉으신 것은 우리도 장래 부활의 몸을 입고 그리스도와 같이 될 것을 보여주는 보증입니다. 우리도 그리스도와 같은 몸으로서 그 보좌에 함께 앉게 될 것입니다. 이런 약속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충성된 자기 종들에게 상급으로 고을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같은 권세라도 차등이 있게 하셨습니다.

[19:17] (17)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다 착한 종이여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 하고

말하자면 그의 몸된 교회에게 하늘 보좌가 주는 약속은 미래의 악인 심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보좌에 함께 앉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선물을 받듯이 뭔가를 받아 가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의 왕직에 영원토록 참여하는 것입니다. 하늘 보좌 우편에 그리스도께서 앉으셨다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만의 영광이 아니라 우리가 받을 영광을 보증합니다. 다만 어떻게 그 보좌에 앉는지를 우리와 같은 인성을 취하신 그리스도께서 앞서 보여주신대로 배우고 뒤따르게 하여 함께 앉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보좌에 앉으심으로 우리가 얻게 될 왕권의 장래의 모습을 친히 보증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 이 땅에서 우리에게는 싸움이 있고 고난이 있을 것을 암시합니다. 그리고 마땅히 그리스도처럼 죽기까지 믿음을 지키며 충성하라는 굳은 격려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장차 악인을 벌하실 때 우리가 함께 보좌에서 그 심판에 참여할 것입니다. 단순히 그리스도께서 왕이 되셨으니 오늘 자기 백성에게 어떤 형통한 환경을 제공해주실 것이라는 암시가 아닙니다. 보좌에 앉으심을 믿는 교회에게 예수님처럼 온갖 고난을 참으라고 하시고 장래 왕권을 공유할 것을 소망하라고 하십니다.

적용

그리스도께서 보좌에 앉으심으로 우리의 교회역사가 획기적으로 유리한 환경을 얻게 될 것이고 우리의 일상에는 왕이 되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예전과는 다르게 의인은 복을 누리게 될 것이라는 생각은 혼란만 줍니다. 그리스도는 보좌 이전에도 왕이셨고 그 이후로도 왕이시지만 보좌 우편에 앉으신지 2천년이 지난 이후로도 그리스도의 강력한 심판을 체감할 수 있을만큼 또렷한 차이를 발견하기는 어렵습니다. 차이라면 언제라도 심판을 시행하실 수 있게 되었다는 점 외에 악인은 형통하고 의인은 고난이 있습니다. 귀환하신 이후 악인이 심판을 받는 동시에 충성된 종들은 그리스도와 같이 보좌에 앉게 될 것입니다. 그날에는 전에 결코 보지 못했던 엄위로우신 권세를 목격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닙니다. 그리스도가 왕으로서 십자가에서 고난 당하셨던 때와 차이는 없습니다. 이것을 알아야 오늘날 교회가 여전히 고난당하는 이유나 살았다는 이름은 가졌으나 실상은 타락한 죽어있는 교회의 심각한 현상과 중세의 부패한 교회의 현실을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교회가 고난당하고 교회조차도 사탄에게 미혹을 당하는 그런 모든 일들은 그리스도께서 보좌 우편에서 앉으신 사실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교회가 고난을 당하도록 사탄의 분노를 쏟게 허용하셨습니다. 이 가운데서 교회는 보좌 주님을 바라보고 믿음을 지켜야 합니다.

아직 귀환하지는 아니하셨지만 하늘 보좌에 지금 앉아계시기 때문에 언제라도 오실 것을 깨어 준비해야 합니다. 교회는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께 앉아계시는 하늘의 보좌를 볼 때마다 그 보좌에 앉으시기까지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고난을 이기셨는지를 본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리고 장차 그 보좌에 함께 앉게 될 것을 굳게 믿어야 합니다. 귀환하시는 날까지, 이 기간 동안 악인은 계속 악을 행할 것이고 의인은 계속 의를 행할 것입니다.

[22:11-12] (11)불의를 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되게 하라 (12)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리라

보좌의 권세가 악인을 심판한다는 어떤 표식도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의인들의 믿음만 드러날 뿐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늘 보좌에 오르셨고 심판주가 되셨기 때문에 세상의 악인들이 형통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마치 세상은 노아시대와 같이 하늘에서 보좌에 앉으신 그리스도가 전혀 세상을 돌보시지 않는 것처럼 자신의 일상적인 생활을 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스스로 움직이는 세상을 창조하시고 관여하지 아니하신다는 이신론을 주장할만큼 그리스도의 보좌는 그 위엄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24:38-44] (38)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39)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40)그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41)두 여자가 매를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42)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43)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너희도 아는 바니 만일 집 주인이 도적이 어느 경점에 올 줄을 알았더면 깨어 있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44)이러므로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오직 그리스도께서 하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심을 믿는 사람들만 그 날을 바라봅니다. 그리스도께서 지금 자기백성에게 심판의 권세를 당장 보여주시지 않는 것을 불평하지 않습니다. 악인들이 망하지 않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늘 보좌에 앉으신 것은 당장 심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그것을 믿는 사람들을 위한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 밖에 계시는 어떤 왕이 아닙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우리는 그의 영광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지금은 믿음의 시대입니다. 지금은 그리스도와 같이 믿음으로 고난을 받으며 믿음을 지키고 이겨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고난이 있고 미혹이 있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아야 합니다. 여전히 사탄이 교회를 공격하고 교회가 미혹을 당하며 교회가 이지러지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그토록 엄위로운 하늘 보좌에 계시면서, 왜 우리에게 남다른 혜택이 없는가 하며 불평하지 않아야 합니다.

이 시대에 모든 교회는 시험을 받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보좌에 앉으신 것을 믿기 때문에 고난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고 그리스도처럼 믿음을 지키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같은 동일한 고난을 당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도움을 구할 때에 우리를 체휼하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도우셔서 믿음이 흔들리지 않게 하신다고 확신합니다. 보좌의 주님께 기도해야 하는 시대입니다. 우리의 동료 종들이 순교의 피를 흘렸던 것처럼 우리도 믿음을 부인하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다는 태도로 살기 위해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주님의 교회는 사도신경에서 보좌에 앉으신 그리스도를 고백함으로 모든 고생과 핍박이 끝났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보좌의 그리스도께서 당하셨던 고난에 참여하도록 교회는 격려를 받습니다.

나의 아내와 자녀들이여, 우리가 혼란 속에 있고 고통 속에 있을 때에 잠시라도 그리스도께서 하늘 보좌에 앉아계시는 것이 과연 사실인가? 하고 의심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우리의 형통을 보증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고난당하시고 승리하신 것은 바로 우리가 걸어야 할 길입니다. 더한 고난이 올 것입니다. 아마도 혹독한 경제적인 어려움이나 생명의 위험이 닥쳐올 수도 있습니다. 그때마다 하늘 보좌에 앉아 계시며 세상을 다스리시는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처럼 죽도록 충성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충성의 마지막을 보좌에 앉으신 그리스도의 영광으로 보장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어떤 고난이 닥쳐왔을지라도 그리스도와 연합된 몸이라는 것을 잊지 맙시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동안 그리스도와 함께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게 될 소망을 바라보고 인내하면서 오늘 믿음을 가지고 맡겨진 일에 충성을 다합시다. 아멘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 북마크
  • 신고 센터로 신고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