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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

2) (2012년 10월 28)알고 지은 죄, 모르고 지은 죄(딤전 1:13)

작성자이준성|작성시간12.11.20|조회수2,853 목록 댓글 0

알고 지은 죄, 모르고 지은 죄

부제) 알고 죄 지은 자녀에게 더 큰 심판이 있다.

훈화자: 이 준 성 형제 (2012. 10. 28)

성경낭독: 누가복음 12:42-48

[12:42-48] (42)주께서 이르시되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종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줄 자가 누구냐 (43)주인이 이를 때에 그 종이 그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은 복이 있으리로다 (44)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그 모든 소유를 그에게 맡기리라 (45)만일 그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남녀 종들을 때리며 먹고 마시고 취하게 되면 (46)생각하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각에 그 종의 주인이 이르러 엄히 때리고 신실하지 아니한 자의 받는 벌에 처하리니 (47)주인의 뜻을 알고도 준비하지 아니하고 그 뜻대로 행하지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요 (48)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요구할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

성경낭독: 디모데전서 1:13

[딤전 1:13] (13)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주안에서 사랑하는 형제자매들이여!

지난 시간에 드러난 죄는 개인 신앙문제가 아니라, 사회적인 문제라는 점에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드러난 죄는 죄인 당사자만 아니라 그가 속한 사회의 모든 구성원을 일깨워 회개하게 하는 은혜로운 수단이라는 말씀을 주로 생각했습니다. 공개된 죄가 심판을 받을 때 드러난 죄인만 보지 말고 죄가 드러나지 않은 자신의 양심을 살펴야 합니다.

교회가 당회에 보고된 공적인 죄를 공정하게 잘 다룰 때에 거룩한 나라로서의 면모를 세상에 드러낼 수 있습니다. 동시에 드러난 죄의 판결을 통해 모든 회중이 자기 양심의 죄를 스스로 뉘우치고 하나님의 심판의 날을 준비하게 됩니다. 큰 죄와 작은 죄는 따로 없고 드러난 죄와 숨은 죄가 있다는 점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모든 죄가 동일할지라도 죄의 책임까지 동일한 것은 아닙니다. 같은 죄라도 그 책임은 다릅니다. 죄를 지은 사람이 누구이며 그의 양심의 상태에 따라서 죄의 책임이 달라집니다. 양심이 죄를 알고 있다면 그 죄는 고의성이 있어서 훨씬 책임이 크다는 점을 성경은 가르칩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은 알고 지은 죄, 모르고 지은 죄입니다.

 

알고 짓는 죄의 개념

큰 죄와 작은 죄의 구분은 없습니다. 하지만 오늘 상고하려는 말씀에는 더 매를 많이 맞는 잘못도 있고 더 적게 매를 맞는 잘못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비유로 하신 말씀은 이렇습니다.

주인이 돌아와 문을 두드리면 곧 열어주려고 기다리는 사람과 같이 되라는 말씀을 하시면서, 항상 준비하고 있으라고 하셨습니다.(12:35-40) 그러자 베드로는 이 비유를 누구에게 하시는 것인지 물었습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진실한 청지기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42)주께서 이르시되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종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줄 자가 누구냐

모두가 다 그 집의 종들이지만 종들 가운데 식구들을 책임지고 보살피는 책임을 맡은 청지기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다 같은 종들이지만 책임이 더 있는 사람이 있고 책임이 더 적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책임이 더 있는 사람은 주인이 올 때까지 주인의 종들을 보살펴야 합니다.

그런데 어떤 종은 책임을 권력으로 생각하고 다른 같은 종들 위에 군림하여 남용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같은 종들이지만 형제들을 때리며 취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더 많은 책임을 맡았고 주인의 뜻을 알면서도 주인의 뜻대로 행하지 않는 종들입니다. 이들은 엄한 벌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45)만일 그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남녀 종들을 때리며 먹고 마시고 취하게 되면

하지만 겸손히 잘 섬긴 종은 복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종들이 다 동일한 상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잘못한 종들의 벌도 같지 않습니다.

(47)주인의 뜻을 알고도 준비하지 아니하고 그 뜻대로 행하지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요 (48)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요구할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

본문에서 내려진 결론에 의하면 많은 종들 가운데 책임을 맡은 종들은 훨씬 주의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심판에서 하나님의 뜻을 알고 있었는지 여부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알고 죄를 지었다는 말은 거기에 고의성이 있다는 말입니다. 고의로 지은 죄에 대해서는 많이 매를 맞습니다. 많은 책임을 맡은 자도 있고 적은 책임을 맡은 자도 있는데, 하나님의 요구도 저마다 다릅니다.

 

알만한 사람이 지은 죄

베드로가 누구에게 하신 교훈인가 물었을 때에, 책임을 맡은 종들, 또는 많이 받은 자들에 대해 주목하도록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저마다에게 주시는 은사들이 다릅니다. 그러므로 죄의 경중을 따지려면 단순히 알았는지 여부 외에도 당사자가 하나님께 받은 은사가 무엇인지도 고려해야 합니다.

예컨대 말씀의 교사인 사람은 자신의 입으로 남들을 가르친 사람인만큼 죄에 대한 책임도 더 큽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같은 죄일지라도 모범을 보여야할 사람이 죄를 지었을 경우 더욱 심각한 죄로 다루었습니다.

[2:26-3:1] (26)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1)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

그래서 교회의 직분자들은 훨씬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모든 면에서 모범이 되어야 합니다. 더 큰 심판을 받는다는 말은 같은 죄에 대해 훨씬 더 심각한 책임을 물으신다는 뜻입니다. 가볍게 생각할 문제는 아닙니다. 존경을 받는 영광스러운 직분이라고 해서 너도나도 선생이 되려고 하지 말라고 진심으로 권합니다.

[딤전 3:1-4] (1)미쁘다 이 말이여, 곧 사람이 감독의 직분을 얻으려 함은 선한 일을 사모하는 것이라 함이로다 (2)그러므로 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으며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 절제하며 신중하며 단정하며 나그네를 대접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3)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오직 관용하며 다투지 아니하며 돈을 사랑하지 아니하며 (4)자기 집을 잘 다스려 자녀들로 모든 공손함으로 복종하게 하는 자라야 할지며

직분이 존경을 받기 때문에 지도자가 되겠다는 욕심을 품을 수 있습니다. 직분을 욕심내는 일은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책임이 너무도 크기 때문에 성경은 직분을 맡기기 전에 이미 훨씬 엄격한 자격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이런 기준이 엄격하게 적용이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지도자에게는 심판이 더 심각한대도 과정만 이수했다고 덜컹 안수를 주면 심판의 날에 심판을 어떻게 감당하겠습니까? 그래서 자격 기준을 엄격하게 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오늘날은 이런 경고를 가볍게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은사와 하나님의 심판

알고 지은 죄, 더구나 백성의 지도자로서 죄를 지은 경우를 다윗에게서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은 부하 장수의 아내를 보고 음욕이 일어났습니다. 음욕이 일어나는 그 자체는 육신을 가지고 있는 동안 피할 수 없습니다. 다윗이 책망을 받는 이유는 그런 음심이 일어났기 때문이 아닙니다. 부패한 자기 옛 사람의 욕심을 부인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잘못을 깨닫고 회개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다윗이 백성의 왕이기 때문에 책임을 물으셨습니다.

[삼하 12:13-14] (13)다윗이 나단에게 이르되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 하매 나단이 다윗에게 말하되 여호와께서도 당신의 죄를 사하셨나니 당신이 죽지 아니하려니와 (14)이 일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원수가 크게 비방할 거리를 얻게 하였으니 당신이 낳은 아이가 반드시 죽으리이다 하고

나단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의 저주의 말씀을 듣고 두려워하며 회개하며 하나님의 용서를 구했습니다. 즉시 나단은 하나님의 용서를 전해주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날 수 없다고 말씀합니다. 그의 죄는 왕으로서 지은 죄이므로 책임이 더 큽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용서를 선언하시면서도 백성들이 볼 수 있도록 가시적인 형벌을 내리십니다. 결국 다윗이 낳은 아들을 죽게 하셨습니다.

 

모르고 지은 죄의 예

바울의 경우에서 모르고 지은 죄의 예를 한 가지 볼 수 있습니다.

모르고 지은 죄의 경우를 바울이 사도가 되기 이전의 모습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믿기 이전 바울은 예수님의 제자들을 핍박하는 일에 열심을 다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에게 악랄했던 그가 도리어 예수님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이에 대해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딤전 1:13] (13)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이처럼 종교라는 이름으로 형제의 생명을 해치는 일을 서슴지 않고 했지만, 알지 못하고 지은 죄의 경우 하나님께서는 알고 죄를 지은 경우와 그 책임을 달리 하십니다. 죄 인줄 모르고 죄를 지은 자들에게는 긍휼이 있습니다.

예를 하나 더 들자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아우성 대던 유대인들을 위해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용서를 기도하셨습니다. 용서를 구하신 이유는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하는 짓이 무엇인지 잘 모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배후에는 지도자들의 잘못된 영향력이 있었습니다. 분명 백성들의 잘못과 그들을 인도하던 유대의 지도자들과는 죄는 같아도 그 책임은 다릅니다.(23:34)

[23:34] (34)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

이런 예들에서 보듯이 모든 죄는 기계적으로 큰 죄와 작은 죄로 나뉘지 않습니다. 그 죄를 짓는 사람의 고의성을 가장 중시합니다. 모르고 죄를 지은 사람들은 긍휼을 입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죄인을 대할 때에 중요한 것은 죄를 판단하기 전에 죄를 죄로 깨닫도록 도와야 합니다. 재판하는 일에 급급한 나머지 죄를 충분히 가르치지 않는다면 교회사에서 흔히 보듯이 이름은 교회라고 해도 실상은 마녀사냥을 하는 사탄의 회가 될 수 있습니다.(2:9)

[2:9] (9)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알거니와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비방도 알거니와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탄의 회당이라

 

성령님의 사역과 심판

죄는 기계적으로 적용이 되지 않습니다. 죄는 앎에서부터 시작합니다. 무지하면 죄를 자각하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이 죄를 죄로 깨닫게 하려고 율법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수 있습니다.(5:13)

[5:13] (13)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었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였느니라

하나님의 율법을 깨닫게 하시는 분이 성령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를 위해 많은 선지자들을 기름을 부어 세우시고 백성들을 가르치게 하셨습니다. 기름을 부었다는 말은 그들에게 성령님이 부어지셨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신 이후에는 모든 백성들 각인에게 성령을 부어주셨습니다.(2:17)

성령님은 진리 곧 하나님의 율법을 깨닫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성령님께서 여러 모양으로 진리를 깨닫게 하십니다. 특히 여러 가지 지식의 은사들을 형제들에게 나누어 주셔서 은사를 받은 지체들을 통해서 교회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얻습니다. 우리가 지식을 얻게 될 때에 우리의 양심의 기준도 자라게 됩니다.

그러므로 알고 지은 죄와 모르고 지은 죄는 단순한 인식문제만은 아닙니다. 성령님이 하시는 일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말합니다. 성령님은 우리를 진리로 인도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을 깊이 깨닫게 되었다면 이는 성령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양심의 기준이 됩니다. 그러니 알고 지은 죄란 성령님께서 깨닫게 하신 것을 거역하는 일입니다. 이것이 알고 지은 죄가 더 큰 심판을 받는 이유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한 가지뿐이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가진 지식을 둘로 나눌 수 있습니까? 그냥 지식적으로 아는 것과 성령님께서 깨닫게 하셔서 아는 지식이 서로 다릅니까? 다르다면 이 둘을 어떻게 구별할 수 있습니까?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지식을 구분할 수 없습니다.

성령님께서 성경과 교회의 설교를 사용하셔서 깨닫도록 인도하시지만 그 외의 여러 방편들을 사용하셔서 진리를 깨닫도록 하실 수 있습니다. 특별한 경험을 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성령님의 일이 아니고 그냥 일반 지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는 잘못입니다.

익히 알고 있는 예를 들자면, 여리고성의 사람들도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너 애굽을 떠나왔다는 소문을 듣고서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되었고 그들 중의 한 사람이 라합이었습니다. 설교가 아니라 고작 소문을 통해서지만 라합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믿음을 얻었습니다. 하지만 이 역시도 성령님의 사역이었음을 우리는 인정합니다. 우리 중 누구도 성령님의 깨닫게 하시는 일에서 자유롭지 않습니다.

성령님은 온 세상의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사람의 능력으로 된 것이 아니라 성령님의 사역입니다. 그러므로 알면서도 그 지식에 무책임하게 사는 것은 성령님을 외면하고 자기 양심을 속이는 일입니다. 지식을 가진 사람들은 그들의 양심이 스스로를 판단합니다.

모르는 것을 죄로 알기 어렵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심판하시기 전에 먼저 죄를 깨닫도록 인도하십니다.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일은 모르는 죄가 아닙니다. 우리의 양심으로 깨달은 진리를 배반하는 죄입니다. 알고 지은 죄를 범함으로 성령님을 거역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19:13] (13)또 주의 종에게 고의로 죄를 짓지 말게 하사 그 죄가 나를 주장하지 못하게 하소서 그리하면 내가 정직하여 큰 죄과에서 벗어나겠나이다

시편 19:13절에서 고범죄를 짓지 않도록 도우심을 기도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뻔뻔하고 거만한 죄를 의미하는데 한글성경은 고의로 짓는 죄라고 번역했습니다. 알고서도 짐짓 죄를 범하는 것이야말로 건방지고 오만한 죄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자라가야 함

여기서 꼭 한 가지 당부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지식에 한계가 있습니다. 때로는 잘 몰라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모릅니다. 그래서 가끔은 믿을만한 사람의 조언을 받아서 단순하게 행동을 결정할 때도 있습니다. 자신의 지식에 확신이 없을 때에는 그럴 수 있습니다. 말과 행실이 일치하는 지도자의 조언을 따라 삶의 방향을 정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이것은 영적으로 어린아이와 같을 때에는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장성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항상 어린아이의 자리에 머물러 있어서 매사를 의존하여 살며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아가지 못하는 자가 되면 안 됩니다. 교회라는 제도에 안주하여 다수가 가는 길로 떠밀려 사는 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심판 앞에 떼 지어 서지 않을 것입니다.

말씀을 게을리 배우고 또는 배워도 도무지 순종하려고 하지는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또 계속해서 배우기만 하려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유아와 어린아이의 특징은 깨달은 지식과 행실이 따로 가는 것입니다.

[5:14] (14)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그들은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니라

많은 지식이 있어서 가르치는 선생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을 행하지 않는다면 위선자일뿐입니다. 계시록에서 빌라델비아 교회를 향해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3:8] (8)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도다

얼마나 많은 것을 가졌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많은 것을 받았으면 많은 것을 요구하시지만 적은 것을 받았다면 적게 요구하실 뿐입니다. 모르는 것을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능력이 많건 적건 가진 만큼 순종하는 것이 주님의 뜻입니다.

 

피상적인 지식은 죄에 대한 오해를 낳는다.

지식이 불완전하거나 왜곡되면 멋 모르고 의인을 정죄하는 일도 생깁니다. 예수님의 경우 유대 지도자들에게서 유죄 판결을 받았지만 실상은 무죄이셨습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유죄로 판결한 근거는 하나님의 율법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율법의 정신을 생각하지 않고 문자 그 자체에 주목했습니다.

예컨대 안식일 계명대로 안식일에 일했느냐를 가지고 따졌습니다. 그러나 안식일의 법정신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지 않고,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안식일은 일을 안 하는 날이 아니라 죄를 그치는 날, 달리 말하면 죄에서 해방되어 선을 행하는 날입니다. 더 나아가 일주일 가운데 어느 하루만 아니라 우리의 한 주간이 죄에서 해방된 것을 선언하는 날입니다. 안식일을 어떤 형식으로 지켜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말씀드린 일이 있으니 여기서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안식일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키실 것을 약속하는 날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약속대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실 때에, 안식일 계명에 담긴 해방을 성취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의 정신은 우리가 죄에서 해방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는 그 날에 죄에 속박당한 자기 백성을 해방시키시는 일을 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어겼다고 분노했습니다.

이렇게 율법을 피상적으로만 알면 율법으로 형제를 정죄하고 무죄한 사람을 유죄로 몰아가게 됩니다. 이런 일이 참 많습니다. 속으로 남을 정죄하는 일은 또 얼마나 많습니까? 나의 편협한 지식을 가지고 함부로 형제의 행실을 정죄하고 유죄로 판단하는 일이 너무 쉽게 일어납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에도 변화를 가져왔지만 동시에 성전도 폐하셨고 제사장도 없애버리셨습니다. 이런 이해가 없으면 우리는 우리가 아는 범위에서 죄가 아닌 것을 죄로 생각하고, 죄는 죄가 아니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율법을 늘 묵상해야 합니다. 유대인처럼 예수님을 유죄로 판단해 십자가에 못 박았던 것처럼 교회 역사에서도 의인을 유죄판결해서 처벌한 예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러므로 진리를 깨닫고자 성령님을 의지하여 성경을 펼쳐야 합니다. 읽고 배우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그래야 무지로 인해 의인의 피를 흘리는 죄를 피할 수 있습니다.

 

양심

주안에서 사랑하는 형제자매들이여,

우리는 지식의 은사가 부분적임을 인정합니다. 남을 억울하게 비난할 위험이 늘 있습니다. 지식이 자라가면서 오늘은 잘 몰랐어도 내일은 보다 분명하게 진리를 깨닫게 됩니다. 모든 사람은 진리를 배워가는 이런 과정에 있기 때문에 형제의 죄를 다룰 때에 깨닫도록 돕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교회가 판단할 때에 사람의 양심을 억압할 수 없습니다. 교회는 양심으로 죄를 깨닫도록 도와야 합니다. 그래서 죄인이 양심으로 악을 깨닫고 회개하도록 촉구할 수 있습니다. 회개는 당사자의 양심으로 하는 것이지 권위에 의해서 강요될 수 없습니다. 양심으로 죄를 깨닫도록 돕지 않고 강제로 정죄한다면 이는 양심을 억압하는 것입니다. 죄인이라고 확신할지라도 교회는 당사자가 양심으로 죄를 깨닫고 회개하도록 해야 합니다. 양심을 억압하여 회개를 강요할 권세는 교회에 없습니다.

교회는 모든 성도들이 자신의 양심을 따라 살아가도록 격려해야 합니다. 각자의 삶의 책임은 개인에게 있습니다. 만일 자기 양심을 무시한다면 성경은 그런 사람을 양심에 화인을 맞은 사람이라고 정죄합니다. 다른 성경에는 양심이 파선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런 사람은 신앙생활이 불가능합니다.

[벧전 3:16] (16)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

만일 양심이 가책을 느끼는 일을 계속 한다면 우리의 양심은 파산하게 될 것입니다. 신앙생활이란 선한 양심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는 것이 적으면 적은대로 양심에 부끄럽지 않게 반응하는 생활의 시작이 세례입니다.

[벧전 3:21] (21)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이는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니라

신앙은 언제나 말씀을 듣고 깨닫는 사람의 양심의 발휘입니다. 이 양심을 억압하여 무조건 따르라고 강요하는 것은 가장 나쁜 행위입니다. 자기 양심에 거리낌이 있는데도 다수가 선택한 길을 따라간다면 이것은 스스로가 양심을 억압하는 것입니다. 양심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우리의 지식이 일정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선생이 될만한 지식이 있고 어떤 사람은 아직 어린아이와 같은 단계입니다. 그러므로 저마다 알고 깨달은 만큼 양심을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아는 것이 부족하고 결함이 있어도 그 자체가 문제는 아닙니다. 좀 더 깊은 깨달음을 갖게 될 때, 그때 개선해나가면 그만입니다.

우리의 지식이 얼마나 풍성한가보다 더 마음을 써야할 것은 지금 당장 우리의 양심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장로교회에서는 교회의 정치 11조에서 양심의 자유를 속박하는 모든 권력에 대해 경고합니다.

양심의 주재자는 하나님뿐이시다. 그가 신자들에게 신앙 양심의 자유를 주사 신앙과 예배에 대하여 성경을 위반하거나 이탈한 인간적 교훈이나 명령을 받지 않게 하셨으니, 그리스인의 이 자유는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종교에 관계되는 모든 사건에 대하여 속박을 받지 않는다. 그러므로 모든 신자들은 각기 양심대로 판단할 권리가 있은즉 아무도 이 권리를 침해하지 못한다.

이를 위해 하나님께서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주셨습니다. 지식이 많고 적을 수 있고, 다소 오류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깨달은 진리를 따라 양심에 거리낌 없이 하나님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요일 5:20] (20)또 아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 우리에게 지각을 주사 우리로 참된 자를 알게 하신 것과 또한 우리가 참된 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니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라

그러므로 알고 지은 죄는 자신의 양심을 거스르는 죄입니다. 양심의 주인은 나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므로 알고 지은 죄는 양심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죄의 현상은 가벼운 죄처럼 보여도 자기 양심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부인하는 무거운 죄가 됩니다. 게다가 그가 목사라면 그 문제는 더 커집니다.

무지 가운데 있어도 죄가 아닌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자기 양심을 거스르면서까지 알고 짓는 죄는 훨씬 심판이 크다는 것을 우리는 두렵게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우리도 모르는 많은 죄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대신 형벌을 감당하셨습니다. 그리고 의인의 마음을 주셨습니다. 따라서 우리 양심을 지키는 것이 그 은혜에 감사하는 삶입니다. 이 믿음이 없으면 구원 얻지 못할 것입니다.

[4:17] (17)그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면 죄니라

주님은 당신의 자녀들이 악인들과 함께 심판받기를 원치 아니하십니다. 특히 알고서도 자기 양심을 거슬러 알고 죄를 지음으로 더 큰 심판을 받지 않기를 진심으로 원하십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깨달은 진리를 따라 살아가는 것이 믿음입니다. 또한 뒤늦게 죄를 깨닫고 죄에서 돌아서는 것이 은혜에 감사하는 삶입니다.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습니다.

[고전 11:32] (32)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아멘

(20121028 훈화의 말씀, 이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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