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를 사하는 권세를 사람에게 맡기심
훈화자: 이 준 성 형제 (2013. 2. 10)
성경낭독: 요한복음 20:21-23 마태복음 5:23-26
[요 20:21-23] (21)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22)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23)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마 5:23-26] (23)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24)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25)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그 고발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 주고 재판관이 옥리에게 내어 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26)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한 푼이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성경낭독: 요한복음 20:23
(23)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주안에서 사랑하는 형제자매들이여!
사람들은 죄 용서를 얻기 위해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기도하기 위해 조용한 골방을 찾습니다. 하나님께 용서를 위해 기도하고 나옵니다. 사랑하는 이들이여! 용서를 얻었을까요? 용서를 얻었다면 무엇으로 그 사실을 알 수 있습니까? 저는 우리가 용서를 얻기 위해서는 하늘이 아니라 땅에 있는 하나님의 보좌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은 ...
죄를 사하는 권세를 사람에게 맡기심
죄를 용서하는 권세가 땅에 있음
그리스도인들은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 하나님의 보좌로 나아간다. 예배당을 찾거나 은밀한 골방에서 하나님께 죄를 고백한다. 죄를 용서하는 권세가 하나님께만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이렇게 죄를 용서받게 된다면 그는 자신이 용서받은 것을 확신할 수가 없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가 개인주의화되어 사회적인 면이 세상에 드러나지 못하게 된다.
죄를 용서받기 위해 신자는 이 땅에 베풀어진 보좌로 나아가야 한다. 그 보좌에는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와 동일한 연약한 형제가 앉아 있다. 우리가 형제에게 죄를 지었다면 직접 하나님의 보좌로 나아가기 전에 자신의 형제에게 먼저 가서 그의 용서를 청해야 한다. 그의 용서를 얻지 못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용서도 얻지 못한다.
요한복음 20:23절은 우리에게 익숙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요 20:23] (23)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지은 죄를 용서하는 권세를 땅에 있는 사람들에게 맡기셨다. 이 권세는 오직 하나님의 것이지만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으로 다시 창조하여 주셨기 때문에 독생자의 권세에 참여하게 되었다.
형제가 형제에게 지은 죄를 용서받기 위해 직접 하나님의 보좌로 나아가려고 해서는 안 된다. 형제에게 가서 그의 용서를 구해야 한다. 비록 자신보다 나은 것이 없어 보일지라도 그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권세는 동등하다. 우리에게 죄를 용서하는 권세를 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서로 용서를 구하고 용서를 베풀 때에 이 땅에서 하나님의 용서를 경험하고 맛본다.
우리가 형제에게 용서를 청할 때에 우리는 우리에게 회복된 하나님의 형상을 서로 인정하는 것이다. 우리가 형제에게 죄 용서를 청할 때에 하나님의 나라의 보좌가 이 땅에 베풀어졌다고 실제로 고백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바로 그곳에 임한다. 반대로 소자를 업신여기고 그에게 용서를 청하지 않을 때에 그를 택하신 하나님을 대적하는 죄를 범하는 것이다. 이것은 기독교의 인권의 기초이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참으로 소중하다.
하늘의 권세가 이 땅에 임했다는 것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참으로 놀라움과 감격이 있다. 우리는 형제가 나의 허물을 용서하는 말을 했을 때에 진실로 하나님의 용서를 경험할 수 있다. 이보다 더 놀랍고 위대한 일은 없다.
땅에 있는 보좌를 통해 하늘의 보이지 않는 용서를 확신함
우리는 전에 세례라는 예식을 통해서 성령님을 우리에게 부어주셨다는 주님의 말씀을 들었다. 성령님을 느끼고 만질 수는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보이지 않는 성령님이 부어지셨음을 믿게 하려고 세례라는 표시를 주셨다. 동시에 보이는 세례를 통해서 죄를 사하는 권세도 받았다.
[요 20:22-23] (22)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23)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성령님께서 임하신 결과 우리에게는 죄를 사하는 권세가 맡겨졌다. 하나님의 권세가 땅에 맡겨진 것이다. 하나님의 용서가 땅에서 베풀어진다. 이 권세를 주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사람이 맡은 죄 사함의 권세를 무시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경멸하는 행위가 된다. 형제에게 죄를 지은 사람이 형제와 화목하기도 전에 하나님께 직접 용서를 청한다면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파괴하는 행위이다. 자기 형제에게 자기 잘못을 겸손히 고백하지 않고 하나님께 직접 용서받는 길은 없다.
[마 5:23-24] (23)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24)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맡기신 죄를 사하는 권세를 무시하는 자들을 미워하시며 당신의 나라로 영접하지 아니하신다. 비록 구약의 성도들이 제물을 들고 성전에 나아가 자기 죄를 고백하고 제물을 드렸을지라도 자기 형제의 용서를 얻지 못했다면 하나님께서는 그 제물을 외면하셨다.
만일 형제에게 용서를 구했다면 그것이 말해주는 것은 형제에게 용서 받은 자가 드리는 예물을 하나님께서 받아주신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하늘의 성소로 나아가 하나님께 용서를 청하기 전에 먼저 이 땅에 있는 자기 형제에게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해야 한다. 이렇게 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용서를 확신할 수 있다.
땅에 있는 보좌로 가는 길의 장애물
우리가 용서를 얻기 위해 직접 하나님께 나아가는 일을 더 선호한다. 하나님께로 가면 자존심 상할 일도 없고 사람에게 거절당할 두려움도 없다. 우리는 종종 자신을 남보다 낫게 생각한다. 자기보다 못한 형제에게 용서를 구하는 일은 대개 몹시 마음이 편치 못하다.
형제들 가운데는 좋아하는 사람들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일곱 번이나 반복해서 죄 짓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는 이렇게 습관적으로 잘못을 하는 사람들의 죄를 용서해주기를 싫어한다. 잘못을 반복하는 사람은 진실하지 않다고 판단하여 용서해주기를 싫어한다.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청하는 일은 기본적으로 좋아하는 일이 아니다. 힘 있는 사람이나 존경하는 사람에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은 그래도 좀 낫다. 하지만 자기보다 어린 사람에게 용서를 청하는 일은 더 어렵다. 부모가 어린 자녀에게 용서를 구하거나, 자기보다 못한 사람에게 겸손히 용서를 청하는 일도 흔하지는 않다. 허물이 많은 사람에게 용서를 청하는 일 역시도 힘들어한다.
때로는 죄 용서의 권세로 형제를 지배하는 일도 있다. 마치 용서할 권세가 자신의 고유의 권세라도 되는 양 착각을 한다. 죄를 용서해줄 수도 있고 자신이 원치 않으면 거절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용서의 권세는 우리에게 맡겨진 것이다. 죄 용서는 권리가 아니라 의무이다.
우리가 은혜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처럼 죄를 용서하는 권세도 사람의 외모를 보고 해서는 안 된다. 일흔 번씩 일곱 번이나 잘못을 반복한 사람이라도 그가 용서를 청한다면 우리는 그저 용서해야 한다. 사실 그렇게 습관적으로 잘못하고 용서를 구하는 상습범은 멀리 있지 않다. 우리가 바로 반복해서 하나님께 죄를 짓고 또 용서를 구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아시지만 용서에 인색하지 아니하신다. 죄를 용서하는 권세는 나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맡긴 것이다. 하나님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무한히 죄를 용서하는 일은 사사로운 권리가 아니라 공적인 의무이다.
아합의 사례
이런 용서의 구체적인 사례가 아합의 회개이다. 아합은 이세벨에 의해 늘 충동을 받고 악을 행하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통해서 책망하시면 돌이키기도 잘했다. 어느 날 아합이 나봇의 포도원을 탐하다 나봇을 죽음으로 내몰고, 하나님께서 나봇에게 주신 유업을 아합은 힘으로 빼앗았다. 이 죄를 하나님께서 미워하시고 책망하시자 아합은 곧 회개했다. 아합의 죄와 회개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었다. 우리는 십중팔구 아합의 회개는 진정성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합의 회개를 기뻐하시며 기꺼이 용서하셨다.
[왕상 21:27-29] (27)아합이 이 모든 말씀을 들을 때에 그의 옷을 찢고 굵은 베로 몸을 동이고 금식하고 굵은 베에 누우며 또 풀이 죽어 다니더라 (28)여호와의 말씀이 디셉 사람 엘리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29)아합이 내 앞에서 겸비함을 네가 보느냐 그가 내 앞에서 겸비하므로 내가 재앙을 저의 시대에는 내리지 아니하고 그 아들의 시대에야 그의 집에 재앙을 내리리라 하셨더라
아합이 변덕쟁이임을 하나님께서 모르실리 없다. 아니 우리는 또 얼마나 변덕쟁이인가? 그러나 하나님은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매번 진심으로 뉘우칠 때에 마치 죄라고는 전혀 없는 것처럼 우리를 의롭게 여기셨다.
우리도 변덕스런 형제가 용서를 구하면 그의 양심을 지배하려고 하지 말고 용서해야 한다. 그의 양심을 판단하실 분은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일을 판단할 권세를 받지 않았다. 하나님만이 숨은 것을 판단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용서를 청하면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야 할 의무가 있다. 아무도 하나님을 속일 수는 없다.
우리가 땅에서 형제를 용서해야 하는 이유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용서하기에 앞서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하라고 하셨다. 이것은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기 위한 조건부가 아니다. 하나님의 용서는 은혜로 받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기 전에 먼저 형제를 용서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가 서로 용서하는 일이 없다면 우리가 성전에서 제물을 드린다 한들 하나님께서는 받지 아니하시는 것이 분명하다. 우리의 눈에서 쏟아지는 눈물이나 마음에 후련한 느낌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죄용서의 신호가 아니다. 제단에서 타오르는 제물의 타는 냄새도 죄가 용서되었다는 신호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용서해주신 것을 확신할 수 있는 신호는 무엇인가?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에 의하면 우리가 서로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베풀고 받았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보좌로 나아가 용서를 간구할 수 있다. 우리가 배운 기도에 근거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실 것을 확신해도 된다. 반대로 형제에게 용서를 구하지 않고, 형제의 죄를 용서해주지 않고서 직접 하나님의 용서를 구했다면, 그의 기도는 하나님이 듣지 아니하신다고 확신해도 된다.
우리가 형제를 용서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죄 용서를 기뻐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나와 내 형제의 죄를 용서하시는 자비로우신 하나님이신데 어떻게 우리가 형제의 죄를 용서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나님께서는 나만 아니라 우리 모두를 위해 화목제물을 예비하셨다. 그렇다면 내가 형제를 용서치 않음으로 그가 하나님께 용서 받지 못하기를 바랄 수 없다. 우리가 서로를 용서하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용서를 서로 전한다. 하나님께서는 땅에 죄를 사하는 권세를 두심으로 하나님의 용서가 얼마나 무한하고 자비로운지를 세상에 알리신다.
우리가 이 땅에서 서로의 죄를 용서할 때에 세상은 하나님의 용서를 배운다. 동시에 우리는 용서를 통해서 하나님의 용서를 확신할 수 있다. 혼자 하늘 보좌로 올라가 용서를 구하는 것은 세상에 죄를 사하는 권세를 두신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지 못한 처사이다.
십자가는 형제의 용서와 서로 분리되어 있는가?
우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직접 하나님의 용서를 받았다고 말한다. 하나님께 용서를 받았다면 누군가에게 잘못을 했을지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죄 없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다. 그래서 형제에게 용서를 구하지 않아도 믿기만 하면 죄 용서를 받는다고 말한다. 이 말이 절반은 진실이다. 우리가 십자가로 말미암아 얻은 용서는 우리의 노력과 무관하게 하나님께서 자비로우신 약속을 따라 이루어주신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편에서는 이 은혜로운 하나님의 용서를 믿어야 한다.
구약의 희생제사를 통해서 하나님은 자비의 하나님이심을 보여주셨다. 하나님의 자비는 백성들이 서로를 용서하게 만든다. 어린양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셨다. 십자가가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를 모든 사람에게 보여주고 있다. 십자가는 개인이 독점할 수 있는 가치가 아니다. 십자가가 모든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용서를 보여주는 상징이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우리도 하나님께서 용서하기를 기뻐하는 모든 사람들을 기꺼이 용서하는 사람이 되라고 외친다. 하나님께서 용서하기를 기뻐하시는 우리의 형제를 우리가 용서하지 않을 권리는 없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비유에, 어떤 사람이 큰 빚을 탕감 받았다. 기쁨으로 돌아가는 중에 자기에게 작은 빚진 동료를 만나게 되었다. 자기가 입은 은혜에도 불구하고 냉정하게 빚을 갚으라며 옥에 가두어버렸다. 큰 빚을 탕감해준 왕이 이 소식을 듣고 노하여 탕감해주었던 빚을 다 갚으라고 했다.(마 18:23-35)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셔서 아들을 보내시고 아들의 죽음으로 죄 용서를 모든 사람에게 값없이 약속하셨다.(요 3:16) 이 은혜가 값없이 모든 사람에 임했기 때문에 그 덕에 나도 값없이 용서를 얻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다른 형제의 죄를 값없이 용서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아들의 죽음으로 온 세상을 용서하기를 기뻐하신다는 사실을 증거하기 위해 우리도 우리의 형제의 죄를 기꺼이 용서해야 한다. 만일 내가 누군가를 사랑하기를 거절한다면 나는 세상을 향해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값없이 용서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그러니 나도 너를 용서하기 싫다.”
회개와 천국이 함께 선포된 이유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말씀하시면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마 3:2)라고 말씀하셨다. 세례 요한도 같은 말로 예수님보다 앞서 복음을 전했다.
요한은 당시 사회적인 많은 부조리한 일들을 지적하면서 회개를 촉구했다. 하나님의 사회(유대)에서 조금 넉넉한 사람들은 가난한 이웃에게 나누어주고, 세리들은 공정한 세금만 징수하고 군인들은 백성들에게서 강탈하지 말라고 했다. 관행처럼 해오던 죄를 회개하라고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왕으로 영접하라고 가르쳤다. 죄를 회개하는 일과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일은 서로 긴밀한 관계에 있다.
요한이 말하는 회개란 매우 구체적인 잘못에서 돌아서는 회개다. 자기 형제에게 지은 죄를 뉘우치고 용서를 구하는 회개이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시고 그곳에서 죄를 사하는 복음을 세상에 선포하셨다. 그리고 약속대로 왕이신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모든 죄인들의 죄를 용서하셨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다는 말은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죄인들이 죄에서 해방될 것이라는 말이며 그 결과 서로를 용서하고 용서받는 그런 나라가 임박했다는 말이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에서 해방된 사람들이 죄에서 해방된 기쁨을 무엇으로 서로 나눌 것인가? 그것은 바로 회개이다. 죄를 회개하고 회개하는 자들을 서로 기꺼이 용서하는 일들은 죄에서 해방된 은혜에 감사하는 삶이다. 죄를 용서하지 않고 앙심을 품는 마음은 죄의 노예들의 특징이다. 믿음으로 천국에 들어간다. 이 믿음의 구체적인 형태가 회개이다.
이 땅에 임한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들은 죄를 짓지 않는 의인들이 아니다. 우리는 부활의 날까지 매일 유혹과 싸운다. 탐심으로 우리는 형제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우리는 허공을 향해 죄를 짓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죄의 결과로 우리는 자주 회개해야 하고 바로 그곳에서 하나님의 용서를 발견한다. 여기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다. 그래서 예수님과 요한은 일상의 반복되는 회개와 천국을 함께 선포한다.
전쟁이 진행 중인 하나님 나라
그리스도의 은혜로 우리가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 그러나 부활의 날까지는 우리 안에 죄로 부패한 옛 사람이 남아 있다. 이것은 우리 안에서 매일 탐심을 일으킨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내면에 있는 죄와 싸우기를 계속해야 한다. 이런 죄와 오류들로 인해 서로 상처를 입고 상처를 주는 일이 있지만 십자가로 말미암아 서로 용서하는 곳에 바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천사들의 모임으로 건설되는 것이 아니다. 이 땅에 임한 하나님의 나라는 싸움이 끝난 곳이 아니다. 우리가 받은 하나님의 나라는 죄와 싸움이 있는 나라이다. 오직 부활과 심판이 있은 후에야 모든 싸움이 끝이 난다. 따라서 주님이 선포하셨던 하나님의 나라의 특징은 죄를 지은 형제를 용서하는 것이다. 죄를 짓지 아니한 의인들의 나라가 아니라 잃은 양을 찾고 돌아온 양을 영접하는 사회이다.
정확히 말해서 우리가 서로 죄를 용서하는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셨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목욕을 했으나 매일 손과 발을 씻는 것과 같다. 우리가 손과 발을 씻는 이유는 몸이 더럽기 때문이 아니다. 반대로 우리가 손과 발을 씻음으로 우리의 몸이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정결하게 된 것을 매일 고백한다.(요 13:10)
[요 13:10] (10)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하시니
죄에서 해방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부패한 본성을 매일 부인하며 산다. 형제가 우리에게 죄를 지었을지라도 놀라지 않는다. 우리는 용서함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도록 봉사해야 한다. 우리는 서로의 죄를 고백하고 용서하는 방식으로 매일 손과 발을 씻는다. 우리가 매일의 죄를 회개하고 서로의 죄를 용서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것이다.
결론
우리는 완전한 새 사람이 되었지만 부활의 날 옛 사람을 벗는다. 그동안 우리는 옛 사람으로부터 나오는 탐심과 매일 싸운다. 자기 옛 사람을 부인하지 못할 때 죄의 유혹에 넘어진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나라가 무너지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죄가 없는 나라가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진심어린 회개와 용서가 있는 나라이다. 죄를 회개하며 용서하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위대한 특징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죄를 사하는 권세를 가진 하나님의 백성들의 사회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죄를 용서하는 사회 속에서 드러나고 자라간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당장 자신의 형제가 죄를 짓고 회개할 때에 진심으로 용서함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였음을 세상에 드러내야 한다. 죄 용서의 권세가 매일 살아 움직이도록 함으로 말이다. 미약한 소자일지라도 그는 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세를 가진 하나님의 대리자다. 어떤 이유로든 용서를 구하지 않음으로 자신의 영혼을 위태롭게 하지 말자.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형제를 용서함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감사한다. 하나님께서 용서하기를 기뻐하는 형제를 용서하는 믿음 없이는 누구도 천국을 보지 못할 것이다.
이것도 기억해야 한다. 형제에게 맡기신 권세를 무시하고 직접 그에게 용서를 구하지 않는다면 그의 죄는 심판 날에 영원한 유죄판결을 받게 될 것이다. 아멘
(2013년 2월 10 훈화의 말씀, 이준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