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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서울 산천풍물

제주목사 조정철(趙貞喆)의 숨결을 찾아서

작성자鷗浦|작성시간12.11.27|조회수820 목록 댓글 1

 

 

 

▲ 한라산 정상인 백록담에 남아 있는 조정철 목사의 마애각 ⓒ신용만 사진작가

 

趙貞喆 牧使의 숨결을 찾아서

 

 

*글 詩人 김순이 <문화재청 문화재감정관>  (제주도 통권 109호)

 

조선왕조 오백 년 동안에 제주에 목민관으로 왔던 인물은 약 320여 명이 된다. 그들 중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인물을 꼽는다면 정헌(靜軒) 조정철(趙貞喆)을 선정하는데 주저할 사람은 아마 드물 것이다. 그는 자신의 생애를 최악의 상황에서 최상의 상황으로 역전시킨 인물이었다. 대역죄인의 몸으로 제주에 귀양 와서 27년, 그리고 육지에서의 2년, 총 29년의 유배생활을 견뎌내고 기어코 살아남아 그 후 다시 제주목사 겸 전라도방어사로 제수 되어 왔으니, 참으로 기구하고도 파란만장한 한 사나이의 생애였다.

 

▲ 사진집 '제주백년'에 실린 제주성 남문의 모습으로 한말의 풍경이다.

 

제주목사 재임기간은 일년에 불과했으나 누구보다도 제주를 잘 알았던 그였기에 우선 왜구(倭寇)의 침입을 방어하는 제주성을 보수증축(補修增築) 하였다. 또한 관아가 관리하는 감귤과원을 12군데나 설치하고 15종의 귤 품종에 대한 특징을 일일이 파악하여 글로 남기는 한편 일반에게도 재배를 장려하였다. 당시 제주에는 영호남의 수해로 인하여 몰려든 이재민들이 부랑(浮浪)하거나 노비가 되어 연명하고 있었다. 조정철 목사는 이들의 딱한 사정을 살펴 조사한 후 비용을 모두 관에서 지급, 귀향시켜 본래의 생업으로 돌아가도록 조치하였다.

 

유배생활 내내 그는 백성들 곁에서 그들의 애환을 몸으로 겪었던 사람이었다. 그랬기에 부당한 세금과 과중한 부역, 고을 아전들의 권력을 빙자한 재물착취를 시정하는데 온힘을 기울였다. 조정철 목사는 후일, 한양의 집으로 제주사람이 찾아오면 먹이고 재워주는 건 기본이고 문제도 해결해주었던 진정으로 제주를 사랑한 인물이었다.

 

▲ 조선시대 탐라제주의 생활모습

 

명문거족의 27살 귀공자가 하루아침에 흰 무명옷의 죄인이 되어 제주에서 보냈던 핍박과 고립의 그 고단한 세월, 그 갈피에는 제주여인 홍윤애(洪允愛)와의 사랑과 죽음의 이중주가 피울음의 곡조로 흐르고 있으니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 누군들 가슴에 시린 성에꽃이 피어나지 않으랴!

 

조정철 목사의 후손인 양주조씨대종회(楊州趙氏大宗會) 조원환(趙源煥) 회장을 만난 것은 서울 예술의 전당 로비에서였다. 김포비행장에서 마중하겠다는 것을 굳이 사양하고 만남의 장소를 「밀레와 바르비종파 거장전」, 그리고 사진예술의 「찰나의 거장,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전이 열리고 있는 예술의 전당으로 잡은 것은 나름대로 문화에 대한 갈증 때문이기도 했다.

 

서로 간단한 인사를 나누고서는 서둘러 미로와 같은 서울의 도심을 통과하여 강북구 번2동에 있는 양주조씨대종회의 빌딩으로 향했다. 왜냐하면 점심때가 훨씬 넘어있었기 때문이었다. 점심식사로 들어가기 전, 다시 한번 서로 인사를 나누었다. 대종회의 조원석(趙源奭) 부회장을 비롯해서 남양주문화원 조원근(趙源根) 원장, 부회장 조상호(趙商鎬) 씨, 조세호(趙世鎬) 씨 등 회장단이 총출동한데다 특별하게도 동강(東江) 조수호(趙守鎬) 선생이 80 노구에도 불구하고 참석해 주셔서 거의 감격적인 분위기였다. 동강 선생은 현재 우리나라 최고의 서예가로 그 이름이 우뚝하거니와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며 한국국제서법연맹회장을 맡고 있는데 작품 하느라 바빠서 오늘 대종회에 나타난 것이 정말 얼마만의 일인지 모른다고 하였다.

 

점심을 먹으면서 자연스레 조정철이 제주 유배시절, 그를 죽이러 왔던 김시구 목사의 간계(奸計)를 갈파하고 연약한 몸을 던져 사랑하는 사람의 목숨을 구한 의녀(義女) 홍윤애에 대한 이야기가 주화제로 떠올랐다.

 

정조 1년(1777) 8월, 정조 임금을 시해하고 은전군(恩全君) 이찬을 추대하려는 역모사건이 발각되자 조정은 발칵 뒤집혔고, 주동자와 연루자들이 줄줄이 잡혀들었다. 조정철은 그때 27세의 장래가 촉망되던 준수한 청년 선비로 아버지는 이조참판(吏曹參判) 조영순(趙榮順), 할아버지는 통덕랑(通德郞) 조겸빈(趙謙彬), 증조할아버지는 노론(老論) 사대신(四大臣)으로 유명한 우의정(右議政) 조태채(趙泰采)였으니, 당시 조선의 유서 깊은 명문가의 자손으로서 남부러울 것이 전혀 없는 그런 존재였다. 게다가 그는 대과에 급제하여 순조롭게 관직에 나아가기 시작하였고 장인(丈人)은 노론 시파의 거두 형조판서 홍지해(洪趾海)였다.

 

온갖 행운은 그의 것이었고 세상의 모든 길은 그를 향하여 뻗어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역모사건이 들통 나고 주동자 중의 한 사람이 장인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난 그 순간부터 그의 목숨은 이미 지상에서 사라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임금의 목숨을 노리고 왕위를 찬탈하려는 모반의 죄는 어떤 왕조에서도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죄였다. 조선왕조는 역적에게는 부계(父系)는 물론 모계(母系)인 외가(外家)와 처계(妻系)까지 삼족을 멸하는 가혹한 형벌을 시행하고 있었다. 중죄 중의 중죄요, 용서받을 수 없는 그런 죄가 반역죄였다. 달리 일컬어 대역죄라 했다.

 

▲ 1890년대 제주시 산지포구. 포구에서 산지천쪽을 향해 바라본 전경 사진

 

그러나 조정철은 일단 살아남아서 절해고도 원악도(遠嶽島)인 제주 귀양길에 오른다. 사약(賜藥)을 받아 마땅한 죄인이었으나 증조부 조태채의 국가에 대한 막강한 공헌도가 참작되어 구사일생으로 구명이 된 것이었다. 제주에서의 적소(謫所)는 고을 아전 신호의 집으로 정해졌다. 부친의 삼년상을 다 마치지도 못하고 대역죄에 연루되어 온 조정철은 그야말로 철저히 두문불출하였다. 변소에 출입하는 것 이외에는 집밖은커녕, 한여름 푹푹 찌는 무더위에도 마루에 나와서 바람 좀 쐬라는 소리도 못들은 체하였다. 그렇듯 그의 행동은 신중하고 조심스러웠다.

 

곧이어 그는 부인 홍씨가 자진(自盡)하였다는 처참한 소식을 접한다. 역적 가족의 여인네들은 관아(官衙)의 비천한 노비(奴婢)로 내쳐져서 허드렛일은 물론이거니와 쌍것들의 집적거림으로 정조를 잃기가 십상이었다. 더구나 사대부집안의 여인이 그런 처지에 처하게 되면 기어코 욕을 보이고 싶어 하는 게 세상이었다. 그녀에게는 죽기보다 더한 치욕스런 삶이 기다리고 있었다. 집안은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했으며 남편은 다시 만날 수도, 언제 돌아올지도 모르는 제주로 유배를 떠난 상황에서 역적의 딸이라는 낙인이 찍힌 여자가 가야할 길은 너무나 자명했는지도 모른다. 두 살짜리 아들을 두고 죽음을 택할 수밖에 없었던 부인의 심정이 어떠했을까.

 

조정철을 제주로 유배 보낼 때, 그가 살아남아서 돌아오기를 기대한 사람은 없었다. 조선 왕조의 수많은 예에서 볼 수 있듯이 대역죄인은 일단 위기를 모면했다 해도 끝내는 죽음의 마수를 피하지 못하게 마련이었다. 집안에서의 지원이 차츰 끊기기 시작하더니 결국 양식 한 톨도 오지 않게 되고 말았다. 대역죄인에게 생활비가 지급된다면 그것은 진정한 죄인이라 할 수 없으리라. 제주에 떨어진 유배인은 자구책을 마련해야 했으며 실제로 많은 유배인들이 동네 학동들을 가르쳐서 그 보답으로 받는 좁쌀이나 보리쌀로 양식을 삼아 연명했다. 조정철 보다 먼저 유배 왔던 그의 종조부 조관빈(趙觀彬)이 대정현에서의 유배생활 동안 그러하였고 부친인 조영순(趙榮順)이 그러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유배 이유는 정치적인 당파싸움에 의한 것이었을 뿐 대역죄인은 아니었기에 어느 정도 행동의 자유를 보장받을 수 있었으며 대우 또한 매우 인격적인 것이었다.

 

조정철이 의탁하였던 집주인 신호(申好)나 김윤재(金潤才)는 심성이 고운 사람들로 그 점은 조정철에게는 참으로 대단한 행운이었다. 유배지에 도착하였을 때에는 그나마 밥값 정도는 육지에서 전해오곤 했다. 그러나 차츰 뜸해지더니 마침내는 끊기고야 말았다. 김윤재는 그에게 학동(學童)을 구해올 테니 공부를 가르치는 게 어떠냐고 말했다가 단 한마디로 거절하는 바람에 다시 말을 붙여보지도 못했다.

 

그는 20대의 젊은이답지 않게 매우 신중하고 사려 깊은 성품이었다. 또한 현명하였다. 자신의 입장이 종조부나 부친의 입장과는 사뭇 다르다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종조부나 부친의 처지는 비교적 자유로웠으나 자신은 제주목 관아의 코앞에서 목사의 감시에 철저히 노출되어 있는 형편이었다. 그의 일거수일투족은 어항 속의 금붕어처럼 빤히 드려다 보이고 있었으며 그를 기찰(譏察)하는 감시의 눈초리가 사방에 있었다.

 

학동을 가르쳐 먹을 것을 버는 일은 유배인에게 공식적으로 허용된 일이 아니었다. 다른 유배인에게는 가능할지 몰라도 조정철이 했을 경우, 즉시 임금의 명령을 어기고 방자히 굴었다며 잡혀갈 빌미를 줄 것이었다. 그는 속으로는 한없이 미안하면서도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밥을 주지 않으면 굶어죽기밖에 더하겠는가 하는 생각으로 그는 오히려 처연하였고 끝내는 담담해질 수 있었다. 김윤재의 아낙은 빠듯한 살림에 군입 하나 먹이기를 벌써 반년이 넘고 일년이 다되어 간다면서 한숨을 삼키곤 했다. 조정철의 처지는 고향에서의 하숙비 끊긴 고학생 처지에 다름 아니었다.

 

이때 이웃에 살던 스무 살 아가씨가 홍윤애(洪允愛)였다. 제주의 돌담은 낮다. 목만 돌리면 집 마당이 환히 들여다보일 만큼 낮은 까닭에 이웃 간에는 숨길 것도 없고 서로의 사정도 저절로 알게 마련이었다. 부모님은 돌아가시고 오라버니가 가장인 집에서 언니와 쌍둥이처럼 사이좋게 살아가는 홍윤애에게 서울에서 귀양 온 유배객 조정철은 그야말로 수수께끼의 인물이었다. 그러나 몇 년이 지나면서 그의 조용하고 신중한 처신과, 항상 방안에 틀어박혀 책을 읽거나 시를 짓는 선비 중의 선비라는 걸 알게 되었다. 언제부턴가 변소 출입을 하기 위해 마당에 나온 그의 파리한 얼굴과 마주치거나 여윈 뒷모습을 바라보게 되면 가슴 한 켠이 저미도록 동정이 갔다.

 

밥값을 한 푼도 못 낸 지가 이미 오래고 그의 처지가 궁지에 몰렸다는 걸 알게 된 홍윤애는 용기를 내어 김윤재의 아낙을 찾아가 자기가 그분을 돌보아드리겠다고 자청했다. 바느질 솜씨가 좋았던 그녀는 바느질삯을 알뜰히 모아 조정철의 식사와 의복을 수발하는 데 남모르는 정성을 기울였다. 홍윤애가 조정철을 위하여 마련하는 밥상은 소박하고도 조촐했다. 또한 그의 의복, 의복이래야 죄인에게 허락된 것은 흰 무명저고리바지가 고작이었으나 정성껏 지어 입혔다.

 

조정철은 시인(詩人)이었다. 서책(書冊)은 그에게 스승이며 벗이며 정신의 버팀목이기도 하였다. 또한 글을 쓴다는 것, 시를 짓는 일은 그에겐 육신의 양식인 밥보다도 더 소중한 영혼의 양식이었다. 제주에서의 유배생활 동안 가장 견디기 힘든 것이 글에 대한 갈증이었다. 어느 날, 조정철이 손가락에 물을 찍어가며 벽에 시를 쓰는 것을 목격한 홍윤애는 그만 왈칵 눈물이 솟구치며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 날로 그녀는 어머니가 생전에 마련해 주고 간, 시집갈 때 쓰라는 비단옷감을 돈으로 바꾸었다. 그 돈으로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섬에서는 구하기 어렵고 귀한 물건인 먹이며 붓, 종이는 물론 서책도 육지를 오가는 상인에게 부탁하여 구하였다. 행복의 절정에서 느닷없이 절망의 구덩이로 떨어진 신세였으나 어떤 액션도 취할 수 없는 상황이 조정철의 상황이었다. 그런데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는 온정의 손길이 고요히 다가와 그를 감싸고 보호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한 줄기 맑은 샘물과 같은 홍윤애의 마음씨는 절망적인 상황에 처한 조정철에게 따스하게 흘러들어 희망의 빛으로 자리잡아갔다.

 

이들이 서로 사랑하게 되면서 홍윤애는 행동에 조심에 조심을 더하였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채워져 있는 가혹한 운명의 족쇄를 그녀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지금의 임금님이 살아있는 동안은 결코 놓여날 수 없다고들 했다. 어느 날 조정에서 무슨 사단이 일어 사약(賜藥)을 가진 금부도사가 내려올지 모른다 했다.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으나 분명히 존재하는 막연한 불안과 공포가 짙게 드리워진 조정철의 절망, 그것은 현재진행형이었다.

 

그랬다. 피비린내를 몰고 광풍(狂風)은 발자국을 죽이며 이미 가까이 와 있었다. 당파가 서로 달라 오랜 견원지간인 김시구가 정조 5년(1781) 3월, 제주목사로 부임해 온 것이었다. 그는 오자마자 판관 황윤채와 짜고 조정철을 제거하고자 했다. 제주목사에게는 다른 곳의 수령들에게는 없는 막강한 권한이 부여되어 있었다. 선참후계권(先斬後啓權), 모반을 획책한 대역죄인인 경우 먼저 베고, 나중에 상황을 적은 장계를 올리는 것을 허락하는 권한이었다. 제주는 육지와의 사이에 거친 바다를 두고 있어 일기가 고르지 못할 경우 상황을 보고하고 후속조치를 취하기에는 너무나 시일이 오래 걸리므로 우선 죄인부터 처단하고 수습한다는 것이었다. 정적제거에 있어 이러한 권한이야말로 하늘이 김시구에게 준 절호의 찬스였다.

 

여기 한 기록을 인용, 당시의 정황을 살펴보자.

 

고로(古老)의 말로는 5월에 제주목사 앞으로 감사(監司)로부터 밀사(密使)가 와서 조정철을 적당한 죄명아래 장살(杖殺)하라고 했다. 그는 법정에 끌려나와 심한 매를 맞고 거의 시체가 되어 법정 밖으로 운반되어 나갔다.

 

이때 홍랑(洪娘)이 달려들어 그의 몸에서 아직 온기가 있는 것을 알고 입에 오줌을 부어 놔 소생시켰다. 당시의 법은 장사(杖死)했다고 해서 버려진 죄인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있으면 또다시 죽이는 일 같은 것은 없었다. 그는 끝내 그대로 생명을 유지하고 홍랑은 중죄인으로서 교살(絞殺)되었다고 한다. (金奉鉉의 『濟州島流人傳』)

 

조정철을 죽을 만큼 몽둥이질해서 내쳐놓고 목숨이 마침내 끊어졌다는 소식을 기다리던 김시구 목사는 그가 살아났다는 소식을 듣자 그를 구명한 것이 누구인가를 탐문, 당장 잡아들이라 설쳤다. 곤장을 칠 때 분명히 여러 사람이 알아듣도록 경고를 한 바 있는데 자신의 말이 먹히지 않은 것이 참으로 해괴하고 괘씸하지 않은가.

 

“조정철은 상감께 대역을 저지른 죄인이다. 앞으로 이 자를 비호하거나 이 자에게 한 모금의 물이라도 주는 자가 있다면 내 그자를 가만 두지 않을 것이다. 이 자를 길거리에 내다버려 백성들로 하여금 대역죄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알게 하고, 끝내는 까마귀밥이 되게 하라!”

 

▲ 죽기 직전 홍윤애가 딸을 언니 품에 안겨 도피시킨 절간이 있었던 애월읍 산새미오름

 

홍윤애는 관가로 끌려가기 전, 낳아서 두 달밖에 안된 어린 딸을 언니 품에 안겨 한라산 속의 절로 떠나보냈다. 김시구 목사는 그야말로 다 된 밥에 재를 뿌린 홍윤애를 보자마자 증오심에 부들부들 몸을 떨었다. 끓어오르는 적개심으로 얼굴이 검붉게 변하여 두 발을 탕탕 구르면서 자백을 요구했다.

 

1. 조정철이 임금을 저주하더라는 자백

2. 자신을 귀양 보낸 조정 중신들을 저주하더라는 자백

3. 다른 유배인들과 서찰교환도 하고 몰래 접촉도 하더라는 자백

4. 홍윤애와의 관계

 

홍윤애는 이러한 죄목을 단 하나도 인정하지 않았다. 이미 죽음을 각오한 몸이었다. 그녀는 잡혀오기 전 조정철에게 “그대를 살리는 길은 내가 죽는 길밖에 없다(義女曰公之生在我一死 : 조정철이 쓴 洪義女 碑文)”라고 자신의 의지를 밝힌 터였다. 내가 죽되, 어떻게 죽어야 님을 살릴 수 있을 것인가. 그녀는 오로지 그것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몽둥이가 50대가 부러지고 60대가 부러져 나뒹굴었다. 홍윤애의 몸은 살이 찢어져 흩어지고 피투성이가 되어 까무러쳤다. 찬물이 끼얹어져 의식을 되찾기를 몇 번, 그때마다 목사는 원하는 답을 얻어내려 하였으나 한결같이 답은 “그런 바 없다!” 였다.

 

몽둥이 재질(材質)이 너무 약해서 잘 부러진다며 목사는 잘 부러지지 않고 매 자국이 지독하게 아픈 윤노리나무 몽둥이를 특별히 깎게 하여 쳤다. 윤노리나무 몽둥이까지 70대가 부러져 나갔다. 그녀의 처절한 비명소리는 관아의 높은 담장을 넘어서 제주성내로 퍼져나갔다. 백성들은 귀란 귀는 모두 관아를 향하여 열어놓고 이 사건을 숨죽여 지켜보고 있었다.

 

연약한 여자이기에 몇 대 맞으면 그저 “예, 예”하며 자기가 원하는 답을 얻어내리라 생각하였던 계산은 완전히 빗나가고 있었다. 저런 독한 년을 보았나.

 

“이년의 저고리를 벗겨라. 네 이년, 네가 처녀라는데 젖퉁이가 왜 이리 큰 것이냐? 젖꼭지는 왜 이리 오디처럼 검은 게냐?”

 

“네 이놈, 대명천지 밝은 날에 네가 어찌 아녀자의 옷을 벗기느냐, 하늘이 무섭지 않으냐! 내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몸이거늘 네가 어찌 크다 적다, 검다 희다 하느냐? 없는 죄를 뒤집어씌워 사람을 죽이는 것이 목사가 할 짓이더냐, 내 황천을 가더라도 네 놈을 같이 끌고 가리라!”

 

일은 점점 꼬여가고 있었다. 흥분한 목사는 서둘러 홍윤애를 동헌의 대들보에 꿩처럼 매달아 죽이고 말았다(旣不服又雉懸而殉: 조정철이 쓴 洪義女 碑文).

 

내 옆자리에 앉아서 식사를 하시던 동강 선생이 이야기를 듣다가 손수건을 꺼내더니 눈가로 가져갔다. 눈물을 닦는 모습을 들킨 것이다.

 

“내가 눈물이 났어. 홍랑이 그렇게 애처롭게 죽었구먼. 우리 조 목사에게 제주에 여자가 있었다는 말을 듣긴 했지, 그런데 그런 슬픈 사연이 있는 줄은 전혀 몰랐지. 오늘 처음 들었어.”

 

그러면서 양복 안주머니에서 부채를 하나 꺼내셨다. 서산대사(西山大師)의 시를 세필(細筆)로 쓰신 부채였다.

 

踏雪野中去    눈 덮인 벌판을 걸어갈 때는

不須胡亂行    모름지기 어지러이 걷지 말라

今日我行跡    내가 오늘 남긴 발자취가

遂作後人程    후일에 오는 사람의 이정표가 될 것이니

 

시를 한 줄 한 줄 읊으시며 해석을 해주시고는,

“오늘 아름다운 인연을 만날 것 같아 가지고 나왔는데, 주고 싶구먼.”

 

하시며 필자에게 건네주시는 게 아닌가. 마침 이 시는 “고통스러운 상황에 처할수록 올곧게 살아라”는 서산대사의 죽비소리로 여기고, 내가 머리맡에 붙여놓고 아침마다 마음에 새기는 글이었다. 동강 선생의 묵적(墨跡)은 귀하기로 소문나 있는데…, 그야말로 나는 지난밤 꿈을 잘 꾼 게 분명했다.

 

그 유명한 포천이동갈비를 점심으로 먹은 일행은 5층에 있는 대종회 사무실로 올라갔다. 양주조씨대종회 관련 문헌 자료, 명환(名宦)들의 초상화를 비롯해서 사진자료들이 양쪽 테이블에 나뉘어 나란히 전시되고 있었다. 그리고 취재진에 대한 환영 플래카드까지!

 

필요한 자료의 복사를 부탁하고 우리는 조원근(趙源根) 남양주문화원장을 향도(嚮導)로 삼아 남양주시로 향했다. 거기 조말생 선생의 묘소가 있다고 했다. 조정철은 양주조씨 문강공(文剛公) 조말생(趙末生) 선생의 17세손(世孫)이 된다. 조말생 선생은 양주 조씨의 중시조로 태종대(代)부터 세종 대까지의 명신(名臣)으로 이름을 떨친 인물이다. 드라마 『용의 눈물』에도 등장하여 불같은 성격의 태종 이방원에게,

 

“정치를 잘 하시려면 지금 최우선으로 전하께서 하셔야할 일은 함흥에 가 있는 아버님(태조 이성계)을 모셔오는 일입니다.” 라는 직언을 날리는 대담한 인물이다.

 

화려한 그의 관직을 다 열거하자면 A4용지 두 장이 넘을 정도이다. 주요한 것만 발췌해도 승정원도승지(1416), 병조판서(1419), 집현전 보문각 대제학(1437), 삼도순찰사(충청도․전라도․경상도:1438), 판중추원사(1438), 영중추원원사(1446). 한마디로 가문의 영광을 가져온 불세출의 인물인 셈이다.

 

▲ 카페와 음식점들이 가득 들어선  옛 미음나루터 (Photo by 순둥이 2012)

 

서울을 벗어나 경기도로 들어섰다. 동쪽으로 30분쯤 달리다가 문득 들어선 길은 시골 정취가 가득하다. 왼쪽으로 강이 옷고름을 풀며 따라붙는다. 푸른 강물소리가 햇살을 따라 흘러가는 작은 마을 수석리에 닿았다. 조말생 선생의 묘소와 영모재(永慕齋)가 있는 이 마을의 예전 지명은 ‘미음나루터’였다고 한다. 한창 때는 강원도에서 오던 뗏목이 줄을 이었으며 광주분원에서 구워진 도자기들이 이 강물을 타고 한양으로 향하던 은성한 물목이었다.

 

우선 영모재에 들렀다. 이곳에는 양주 조씨 가문이 배출한 조선시대의 명환 26위가 배향 되어 있다. 이름을 쭉 읽어가다가 중종 35년(1530)에 제주목사로 왔던 조사수(趙士秀)라는 이름을 보니 반가웠다. 제주에서의 임기동안에는 도민들을 괴롭히던 여러 가지 번거로운 부담들을 덜어주었던 그는 후일 녹선 청백리(錄選 淸白吏)에 뽑힌 청렴결백한 인물이다. 『증보탐라지』에는 목민관으로서의 그에 대한 평으로 「세인(世人)이 명환(名宦)이라 칭한다.」라고 기록되어있다.

 

조말생 선생의 묘소는 나지막한 동산에 있었는데 올라가니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백만 불짜리 전망이 눈앞에 열두 폭 병풍으로 좌르륵 펼쳐진다. 풍수지리로 유명한 어느 선생이 “대한민국의 명당은 무덤과 절과 방위초소가 다 차지했다가 요즘은 그 판도가 바뀌어서 러브호텔이 끼어들었다.”는 말이 느닷없이 떠올랐다.

 

이게 바로 풍수 교과서에 나오는 배산임수(背山臨水)의 길지(吉地)인가. 묘소를 천천히 걸어서 한바퀴 돌았다. 이 무덤은 옮겨온 지 105년이 된다고 했다. 초장지(初葬地)는 경기도 양주군 금촌면 금곡리 묘적산이었으나 고종(高宗) 능인 홍릉이 들어서게 되었다. 왕실의 능이 들어서면서 묘소를 옮기라는 명령을 받고 할 수 없이 이장(移葬)은 하였으나 후손들의 입장에서는 아직도 아쉬움이 많은 부분이리라. 요즘 말로 하면 권력에 의한 상처를 받은 것이다.

 

묘비는 무덤과는 떨어진 아래쪽 길가에 서있었다. 무덤이 있는 곳으로 옮기려하나 500년의 나이를 먹은 데다 30톤의 무게를 지녀 작업 중에 금가거나 부서질까봐 옮기지 못하고 있다 하였다. 묘비는 귀부 위에 비신(碑身)을 세우고 기와지붕 모양의 가첨석을 얹은 형태인데 사뭇 당당했다. 비석을 보면 봉분의 크기와 묘역의 규모가 대개 떠오르게 마련이다. 또한 귀부와 가첨석 등의 비석 치레는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조선시대는 사례(四禮)가 매우 엄정하던 시대였다. 비석의 크기며 석물 하나일지라도 엄격한 법도와 기준에 의해서 시행되었다. 그런데 요즘 돈 좀 벌었다 싶으면 귀부에다 용틀임 얹은 비를 겁도 없이 조상묘에다 치장하는 졸부(猝富)들의 세태이고 보면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해야되나.

 

묘비는 1990년 경기도 향토유적 제8호로 지정되어 있었다. 비석의 받침대 역할을 하는 거북이 조각을 귀부(龜趺)라 하는데 그 걸작으로 손꼽히는 것이 무열왕 신도비로 신라(新羅) 조각의 우미(優美)함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그런데 이 비석의 귀부는 우선 크기도 하려니와 그 기운생동의 웅혼(雄渾)한 기상이 지금이라도 땅을 박차고 하늘로 날아오를 듯한 용을 연상시켰다. 오백 년 세월이 풍화에도 그 기세는 조금도 꺾이지 않고 살아있는 듯 했다. 하늘과 땅이 아득하게 혼합되어 풍우대작(風雨大作)하는 날 밤에는 잠시 비석을 등에서 내려놓고 저기 보이는 한강에 첨벙! 뛰어들어 도도히 헤엄치다 오곤 하는 건 아니더냐?

 

이튿날, 장마가 다가왔다는데도 날씨는 쾌청, 승용차 두 대에 나누어 타고 조정철 목사의 묘소가 있다는 수안보에 도착하니 점심때였다. 묘소가 있는 길가(지방도로 597번) 플라타너스나무 그늘에는 여러 사람이 먼저 와서 서성이고 있었다. 충주종친회 조창호씨, 청주종친회 조영희씨, 조경호씨, 조준호씨, 충주대학교 박물관장 한종구 교수, 충주시 문화관광과 학예연구사 유봉희씨. 이들과 향나무 식당에서 점심을 먹으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조정철 목사의 무덤을 이곳 수안보에서 확인한 것은 불과 3년 전이라고 했다. 6․25 한국전쟁 후, 고향인 경기도 파주시 진동면 동파리(옛 장단군) 선영에 있으리라 추정되었으나 휴전선에 인접해있어 주민출입이 제한되는 민통선 구역이라 확인할 길이 없이 반세기가 흐른 셈이었다. 그런데 1994년 충주대학교 박물관의 『문화유적 지표조사 약보고서』에 대안보에서 수안보로 넘어가는 언덕에 있는 무덤에 대한 조사와 민간전설이 보고되었다.

 

대안보의 박석고개 왼쪽에 치장이 잘 된 3기의 묘가 있는데, 이것이 경상감사를 지낸 조감사의 묘라고 한다. 현재 촛대석과 상석이 있으나 전혀 어떤 명문이 없어 정확한 관직이나 성함은 알 수 없고 다만 경상감사를 지낸 조씨라고만 알려져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의 연락을 받고 양주조씨대종회가 검증에 나서면서 경상감사가 아니라 순조 때 충청감사를 지낸 조정철 목사의 무덤임을 확인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쯤에서 우리는 조정철 목사에 대한 이력을 한 번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 1751년 출생 양주조씨 17세. 괴산공(槐山公) 고손자, 이우당공(二憂堂公) 조태채(趙 泰采) 증손자, 부친 조영순(趙榮順),

     형 원철(元喆)자(字)는 성경(成卿). 아호(雅號)는 정헌(靜軒). 고향 경기도 장단.

한양 경저(京邸)에서 출생․성장하였을 것으로 추정.

1775년 영조 51년 문과 급제

1777년 제주도 유배(流配)(제주목․정의현․추자도)

1803년 전라도 나주목 광양현 이배(移配), 황해도 토산현, 경기도 장단현으로 이배,

 

석방 후 통훈대부 홍문관(弘文館) 교리(校理)

1811년 통훈대부(通訓大夫) 제주목사 겸 전라도방어사

1812년 통훈대부 동래부사(東萊府使)

1813년 통정대부(通政大夫) 충청도관찰사(觀察使)

1816년 통정대부 이조참의(吏曹參議)

1822년 가선대부(嘉善大夫) 이조참판, 성균관 대사성(大司成)

1824년 자헌대부(資憲大夫) 형조판서(刑曹判書), 예조판서(禮曹判書)

1826년 자헌대부 의정부(議政府) 좌참찬(左參贊)

1827년 자헌대부 사헌부(司憲府) 대사헌(大司憲)

1828년 자헌대부 형조판서

1830년 자헌대부 사헌부 대사헌,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1831년 81세에 별세

 

- 조원환의 『양주조씨사료선집』에서 인용

 

그는 가장 아름다운 나이 27살에 대역죄인이 되어 약 30년 귀양살이 끝에 다시 27년의 순탄한 관직생활로 판서(判書)와 대사헌(大司憲)에 이르고 있다. 그의 생애는 3단계의 커다란 획을 그으며 진행하였다고 볼 수 있겠다. 아버지가 대과에 급제하던 해에 출생하여 온갖 축복과 사랑 속에 보낸 명문거족 귀공자로서의 26세까지의 삶을 완전히 뒤엎고 인생의 황금기인 가운데 토막은 구덩이에 빠져 허우적거린 세월이었다. 양극단의 삶을 그는 어떻게 극복할 수 있었을까.

 

한 모금의 웃음도 허락되지 않은 사막의 시간, 감시의 눈초리가 밤낮으로 이어지는 유폐의 시간, 우리나라에서 가장 습도가 높은 지역에서 보낸 축축한 습기와 곰팡이의 시간. 무명바지저고리, 그 헐어빠진 백의(白衣) 한 벌로 엄습하는 바람의 채찍을 견뎠던 시간. 스러져가는 가슴 속 희망의 불씨를 어떻게든 꺼뜨리지 않으려고 속울음으로 지샜던 시간. 그 시간이 자그만치 29년이었다. 말이 29년이지 언어도 풍속도 낯선 절도(絶島)에서의 유배생활은 인간을 황폐시키고도 남음이 있다. 대역죄인이라는 죄명이었기에 도움을 주고 싶어도 무슨 화를 당할지 몰라서 친척도 친구도 기피하는데 타인이야 더 말해 무엇 하랴. 그의 주변은 철저히 고립될 수밖에 없었다.

 

홍윤애의 죽음으로 인한 파장도 컸다. 김시구 목사는 이렇다 할 물증도 없이 가혹한 고문으로 홍윤애를 죽이고 나서 이 죽음을 은폐(隱蔽)호도(糊塗)하는 장계를 올린다. 제주에 유배와 있는 죄인들끼리 서로 통하며 역적모의한 낌새가 있어 그들을 징치(懲治)하였다고. 그러나 아무 죄도 없는 백성을 처참하게 살육한 이 사건은 곧 조정에 알려지고 큰 파장으로 번진다. 이에 관련된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간추려 본다.

 

○ 정조 5년 6월 15일

제주목사 김시구 파직, 의금부 압송(조사 후 귀양 감.)

제주판관 황인채, 대정현감 나윤록 체직. 전 제주목사 김영수 입건 공초

 

○ 정조 5년 6월 16일

이조참판 김하재 파직(탐라수령을 잘 가려서 추천하지 못한 때문)

 

○ 정조 5년 6월 17일

영의정 서명선이 탐라의 민심을 달래기 위한 순무어사 파견을 건의

 

○ 정조 5년 6월 20일

제주어사로 천거된 박천형을 임금이 친견. 제주의 물정과 풍요를 조사할 것을 명함

(민요 속에 임금이나 나라를 원망하는 노랫말이 들어있는가 여부)

 

○ 정조 5년 6월 26일

제주 3고을에 정조가 친히 지은 윤음(백성을 어루만지는 글)을 가지고 어사가 제주로 출발

 

○ 정조 5년 10월 9일

제주어사 박천형의 장계를 보고 죄인들에 대한 조치를 빨리 끝내고 돌아올 것을 하교(민폐 끼칠 것을 우려)

이때 조정철은 무혐의로 처리되어 감옥에서 나와 적소로 귀가

 

○ 정조 6년 1월 4일

제주어사 박천형 파직(제주 사건 조사 중에 자복(自服)도 받지 않고 죄인에게 군율을 적용한 죄)

 

○ 정조 6년 1월 14일

조정철 정의현으로 이배(移配)

 

홍윤애의 죽음은 역사성이 매우 강렬한 사건이었다. 당시의 조정을 발칵 뒤집어놓은 이 사건에는 치열한 당쟁에 의한 권력찬탈을 노린 반역, 억울하게 연루된 죄인의 유배, 절해고도에서의 목사의 권력 악용과 정적제거의 시나리오, 민심동요와 어사파견 등이 골고루 얽혀있다. 실로 이 사건에는 조선시대의 당쟁과 유배의 모든 요소가 들어있다고 볼 수 있다.

 

안핵어사(按覈御使) 박천형이 파견되어 진상조사 결과 죄가 없음이 밝혀졌으나, 조정철은 정의현(旌義縣)으로 이배(移配)를 명령받는다. 육지의 친구나 친척으로부터 연락이나 원조물품을 받을 가망성을 확실히 차단할 수 있는, 선박(船舶)의 왕래가 없는 첩첩산골 성읍리(城邑里)에서의 20년의 세월, 그래도 그는 살아남는다.

 

 ▲ 한국학중앙연구원이 소장한 조정철의 문집 '정헌영해처감록' 표지와 속지

 

제주 유배지에서의 시문집 『영해처감록(瀛海處坎錄)』, ‘큰바다 건너 구덩이에서 보낸 세월에 대한 기록’이라고나 해석할까. 그 문집에 실린 시의 행간을 살펴보면 이때 그는 짚신을 삼고 정당벌립(댕댕이덩굴로 짠 모자)을 짜서 먹을 것을 구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성읍에서도 다시 한차례 위기를 맞는다. 정조 12년(1788) 신대년(申大年) 정의현감이 부임하면서 유배인들, 특히 조정철을 심하게 핍박, 기찰 하였다. 우선 그에게 책을 읽지 못하게 하였고, 시나 글도 짓지 못하게 하였다.

 

조정철은 가택수색을 피해 이웃집에다 시작(詩作)들을 맡겼다. 그러나 얼마 후 공교롭게도 그 집에 화재가 나서 맡겼던 한 뭉치의 작품들은 그만 재로 화하고 말았다. 애석해하기도 전, 어디서 그 정보를 얻어들은 현감이 이웃집 주인을 냉큼 잡아들였다.

 

고문을 하며 사실을 실토하라고 닦달을 했다. 집주인은 모진 매를 맞으면서도 사실무근이라 뻗대었고 증거가 없는지라 며칠 만에 방면되었다. 이 사건 이후, 조정철은 한동안 시를 짓지 않았다. 아니 짓기는 했으되, 붓으로 종이에 쓰는 게 아니라 손가락에 물을 찍어 벽에다 시를 쓰면서 시간을 죽였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글 곳곳에는 이름을 밝히지 않는 벗들이 있어 밀감을 해마다 보내주고, 보이지 않는 따스한 손으로 그를 먹이고 입히고 살렸음을 알 수 있다.

 

수안보 향나무 식당에서의 점심을 마치고 일행은 다시 조정철 목사의 묘소로 향했다. 햇볕이 너무 강해서 눈도 뜨기가 힘들 정도인 여름 한낮, 어디서 뻐꾸기 울음소리가 뻐꾹뻐꾹 들려왔다. 그래, 새들은 제 이름을 부르며 운다고 했지….

 

묘소에 참배를 하고 나서 우리는 기념촬영을 했다. 바로 아래에 자리한 묘는 외아들 진충(鎭忠)의 묘라고 했다. 어려서 일찍 어버이와 떨어져 갖은 신고를 겪으며 자란 그야말로 ‘설운아들’이었다. 죽어서라도 우리 함께 있자고, 부모 발치에 묻혔을까.

 

묘소의 석물(石物)은 모두 도난당해서 상석만 남아있을 뿐이었다. 나머지는 최근에 마련한 것으로 묘역정비사업을 하기 시작한 후 오늘 처음 제주취재팀에게 공개하는 것이라 했다. 정성껏 돌보고 있음이 금방 느껴지도록 무덤의 잔디가 초록비단이었다. 너무나 고왔다. 그래서였을까, 찔레며 억새, 엉겅퀴 등 가시풀이 유난히 많은 홍의녀의 무덤이 눈앞에 떠올랐다. 이번의 「탐라역사인물기행 조정철 목사」편을 취재하러 제주를 떠나기 이틀 전, 나는 몇 사람과 같이 그 무덤에 가서 벌초를 했던 터였다. 가시가 많이 돋은 풀들을 보면 나는 왠지 서럽다. 그리운 사연을 삼키고 삼키다가 그리움이 가시로 변한 것만 같아 못내 가슴이 저려든다.

 

세 여인이 나란히 배위(配位)로 적힌 조정철 목사의 묘비는 그의 지난(至難)했던 생애의 굴곡이 그대로 반영된 것이었다. 정부인 남양 홍씨, 의녀 남양 홍씨, 정부인 영월 신씨. 정부인은 합장되어 있고 홍의녀의 무덤은 제주 금덕리에 있으며 세 번째로 맞은 정부인 영월 신씨의 무덤은 오른쪽 건너편에 있었다. 영월 신씨 부인은 27살이나 연하였다고 한다. 홍윤애가 죽던 해에 태어났기에 그녀의 환생(還生)이라면서 조정철 목사가 더욱 아끼고 사랑하여 마지않았다고 한다. 그의 마음속에서 홍윤애는 영원한 연인이었던 것이다.

 

조선시대 사대부들은 관직에 부임할 때 가족을 데리고 다니지 않았다. 관아에 수청기생이 딸려있어 그런 대로 지내기에 불편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조정철 목사는 충청도관찰사 시절(1813년) 부인을 데리고 부임했다고 한다. 사람들이 오죽해야 애처(愛妻)가 아니라 애첩(愛妾)이라 했을까. 그러기에 수청기생들이 앵두 같은 입술을 삐죽거렸을 것이다. “우리 고을 감사 영감은 일편단심 민들레야!” 하면서 놀리는 소리가 귀에 들리는 듯하다.

 

청주종친회 여러분의 안내로 조정철 목사의 마애각이 있는 수옥(漱玉)폭포로 갔다. 수옥(漱玉), ‘옥을 씻는다’는 뜻이란다. 지금까지의 무더위와 땀을 단번에 날리는 시원한 물보라가 참으로 멋있는 폭포였다. 산이 높으면 골이 깊고, 골이 깊으면 그 깊은 골을 휘감아 돌아나가는 물의 음악이 있게 마련이다. 옥구슬 씻는 소리를 알알이 꿰차고서 청산아, 옥수야! 부르며 답하며 가는 바람의 수작이 그야말로 풍류본색(風流本色)이로다, 얼쑤우!

 

수직 절벽 오른쪽 상단에는 해서체(楷書體)로 새긴 『조정철(趙貞喆)』 세 글자가 양각으로 뚜렷했다. 세련된 각(刻) 맛을 느껴보려고 손으로 만져보는 내 머리 속으로 한라산 정상 백록담의 새까만 화산암에 음각으로 새겨진 그의 마애각의 영상이 지나간다. 골수까지 한이 맺힌 손길이 닿아서인가, 돌이끼 하나 끼지 않은 한라산정의 마애각.

 

충청도관찰사 시절, 저기 보이는 수옥정(漱玉亭)이란 조촐한 정자를 짓고 정자의 이름도 그가 작명하였다 한다. 누구보다도 감성이 풍부한 시인이었던 그다운 일 아닌가 싶었다. 어딘가에 이 폭포에 붙여 읊었던 시도 살아남아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는 자기가 만나는 모든 것에 정성을 기울이는 사람이었다. 그런 흔들리지 않는 중심이 그를 사지(死地)에서도 부활(復活)하게 한 힘이었던 건 아니었을까.

 

수옥폭포에서 나오자마자 청주종친회 분들과 아쉬운 작별을 하고, 서둘러 새재를 넘었다. 경상북도 문경시와 충청북도 괴산군 사이에 있는 높이 1,017 m의 재, 나르는 새도 쉬어서 넘어갈 만큼 힘든 고개이기에 붙은 이름이란다. 조령(鳥嶺)이라고도 하고 가장 흔히는 문경새재라 불리고 있다. 새재의 가파른 고개를 치달아, 날개를 접어 쉬는 기분으로 음료수를 한 캔씩 비우고 승용차에 올라 계속 내리막길을 내려가니 경상도 땅이었다. 한 시간 채 못 달려 경상북도 상주시 이안면 안용리에 있는 함녕재(咸寧齋)에 닿았다.

 

함녕재는 문강공 조말생 선생과 그의 첫째 부인인 군부인(郡夫人) 함녕 김씨를 배향(配享)하여 일년에 한 번 제사하는 사당이다. 양주조씨대종회가 관리하는데 재감(齋監)은 상주시청 공보계장으로 근무하는 젊은 종친 조재호(趙在鎬) 씨가 맡고 있다. 우리가 왔다는 핸드폰을 받고 부리나케 달려왔다.

 

▲ 홍윤애가 조정철의 신주에 '十七世祖妣 義女 南陽洪氏'로 적혀 있다. '祖妣'란 돌아가신 할머니란 뜻이다.

 

함녕재에 제주여인 홍윤애가 조정철과 함께 봉안된 것은 지난 1997년 11월 9일이었다. 사당에 봉안된다는 것은 홍윤애로서는 중대한 의미를 갖는다. 비록 첫째 부인이 죽고 난 후에 조정철과 맺어져 딸까지 낳았으나 사람들 앞에서 혼례를 치룬 정식부인은 아니었기에 연인(戀人)으로서만 기억될 뿐 기록되지는 못해왔다. 여기서 기록이라 함은 족보(族譜)와 비문(碑文) 등을 의미한다. 기록에 오른다는 것과 오르지 못하는 것과의 차이는 정사(正史)와 야사(野史)의 차이에 다름 아니다.

 

조정철 목사는 생전에 홍윤애가 자신의 정식부인임을 천명한 것과 다름없는 처신과 행보를 일관되게 보여주었다. 그는 귀양살이에서 풀려나서 관직생활로 잠시 정신을 수습하고선 곧바로 제주행을 자원한다. 그 지긋지긋한 구덩이[坎]의 세월을 보낸 제주로 가야할 이유가 꼭 있노라고, 거기에 다녀오지 못하면 진정한 새 삶을 시작할 수가 없노라며 제주로 향한다.

 

홍랑(洪娘)이 죽고 17일 후인 6월 2일 새벽, 자기 때문에 아까운 일생을 무참히 마치고 장지로 떠나는 홍랑의 해로성(解露聲: 輓歌 상여가 나갈 때 부르는 노래)을 들으면서 조정철은 어떻게 이 원혼(冤魂)을 달래줄 수 있을 것인가를 몇 번이고 되씹었던 것이다. 이처럼 가슴 맺혀 떠났던 그가 다시 한번 제주도에 와보고 싶었으리라는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그는 제주에 목사로 도임하자 곧 홍랑의 무덤을 찾았다. 그리고 손수 글을 지어 비를 만들어 세웠다. 죽은 후에나마 비통하게 간 원혼을 달래주었던 것이다.

 

그가 제주에서 귀양살이하고 있는 동안 목사나 관리들로부터는 아픈 곤욕을 치렀지만 적소의 주인이나 도민들로부터는 많은 은혜를 입었다. 그 가운데는 자기 때문에 관가에 붙들려가서 혹독한 고문을 당하면서도 끝까지 자신을 두둔하여준 집주인도 있었다. 만약 이런 집주인이나 홍랑이 없었던들 결국 조정철은 그 악의에 찬 김시구 목사의 계략에 걸려 살아 돌아갈 수가 없었을 것이다.

 

- 홍순만 「비원(悲寃)을 달래려 온 목사 조정철」

 

백호(白湖) 임제(林悌)는 평양에 벼슬살러 가는 길에 송도(松都)의 황진이 무덤에 들러 술 한 잔에 시 한 수를 읊었다가 임지에 도착하기도 전에 파직 당하고 만다. 교산(蛟山) 허균은 부안의 기생 매창(梅窓)과 우정을 나누었는데 한양에서 그녀의 죽음을 전해 듣고 조시(弔詩)를 한 수 써 보냈다가 탄핵이 빗발쳐 궁지에 몰리다가 결국 벼슬자리에서 내려앉는다. 이렇듯 조선시대의 사대부들은 모친(母親)이 아닌 여인네의 무덤에서 통곡은커녕 한 방울의 눈물이라도 비치는 행동을 용납 받지 못하였다.

 

 ▲ 홍윤애의 묘

 

그런데 목사 신분인 조정철은 홍윤애의 무덤을 단장하고「홍의녀지비(洪義女之碑)」라는 비석을 세웠다. 죽음의 경위를 밝히는 글과 추모시(追慕詩)를 통곡하며 헌정(獻呈)했다. 비석 후면에 「제주목사겸전라도방어사 조정철서(全羅道防禦使兼濟州牧使 趙貞喆書)」라고 당당히 밝히고 있음도 세상을 향한 정면돌파의 의지와 각오를 표현함이었다. 그것은 세상을 향하여, “여기 이 여인이 나를 살렸소, 이 여인을 나는 사랑하였습니다!”라고 소리치는 거나 다름없는 행동이었다.

 

玉埋香奄幾年   옥 같은 그대 향기 묻힌 지 몇 해던고

誰將爾怨訴蒼天   그대 슬픈 원한 그 누가 있어 하늘에 호소하며

黃泉路邃歸何賴   황천 머나먼 길 무엇을 의지해 돌아갔을꼬

碧血藏深死亦緣   그대 푸른 혼 내 가슴에 있고 죽어도 인연은 남았어라

 

千古芳名蘅杜烈   천고에 그 이름 아름답고 향기 높으리

一門高節弟兄賢   한집안의 두 자매 모두 절개 높고 현숙하였으니

鳥頭雙關今難作   두 송이 꽃에 대한 나의 글 참으로 모자라도다

靑草應生馬鬣前   청초만이 외로운 무덤에 말갈기처럼 무성하리라

 

- 홍의녀 비의 추모시, 필자 졸역

 

▲ 홍윤애 묘비 뒷면 추모시 탁본

 

홍윤애의 묘갈명(墓碣銘)은 조선시대 사대부가 여성을 위하여 세워준 유일한 시비(詩碑)로 우리 국문학사의 한 장르인 유배문학(流配文學)의 꽃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또한 제주목사가 가졌던 선참후계의 특권이 악용된 역사적 사례를 증언하는 금석문으로서도 이 비석은 앞으로 더욱 주목받을 것이다. 권력의 횡포와 불의에 목숨을 걸고 항거한 홍윤애의 정의로운 기질은 제주여성의 아름다운 표상이 되리라.

 

▲ 홍의녀의 묘비

 

그의 시문집 『영해처감록』은 15종의 감귤에 대한 자료를 시로 읊은 것을 비롯, 제주의 풍속과 물산(物産)을 현장에서 몇 십 년 동안 보고 겪은 생생한 기록이라 할 수 있다. 그야말로 18세기 제주를 상세히 담은 자료로, 이 번역이 나오면 조정철에 대한 평가가 격상함은 물론이거니와 제주학(濟州學) 연구자들에게 큰 도움이 될 게 분명하다. 고통의 울림이 담긴 이 책은 시인의 감수성으로 비극적 상황을 통과하는 한 유배인의 생생한 기록이라는 점에서도 주목받아 마땅하다.

 

“눈에 눈물이 없으면 영혼에는 무지개가 뜨지 않는다.” 했던가. 그가 후일 복수의 화신으로서가 아니라 은혜를 간직한 사람으로서 나타날 수 있었던 그 고결한 바탕이 참으로 아름다운 바, 그는 진정한 조선의 휴머니스트였다. 이 시문집을 완독(完讀)한 제주동양문화연구소장 오문복(吳文福) 선생은 “충암 김정의 『제주풍토록』보다 한층 더 심도 깊은 자료집”이라고 말하고 있다.

 

제주에서의 재임기간 중에 받는 봉급 전부를 그는 홍윤애와의 사이에 낳은 딸을 위해서 사용했다. 시댁(媤宅)이 있는 애월읍 곽지리에 삼 칸 짜리 초가도 지어주고 농토도 네번에 걸쳐서 사주어 기본생계 걱정을 덜어주는 등 아비로서의 정을 아낌없이 쏟았다. 또한 사위를 족보에 올려 제주에 딸이 있음을 천명했다. 그의 이런 행동은 인간에 대한 예의요, 생명의 은인에 대한 보은(報恩)이며, 사랑하는 님에 대한 단심(丹心)의 표시였다. 당시 제주도는 물론이고 조정과 사대부들 사이에 그의 이런 행보는 굉장한 화젯거리가 되었을 것이다. 또한 한번 준 마음은 죽어서도 영원히! 지니고 가는 인간 조정철에 대한 이미지를 확실하게 각인시켰을 것이다.

 

제주목사로 있는 동안 그는 제주목에 감귤 과원을 집중적으로 많이 설치했다. 오랜 유배생활에서 제주가 감귤재배 최적지라는 것을 몸소 느꼈던 것이다. “제주의 미래는 감귤에 있다.”로 요약할 수 있는 이 조치는 현재 제주의 생명산업이 감귤인 것을 감안할 때 200년 전에 이미 전망했다는 점에서 참으로 혜안(慧眼)이었다. 조정철 목사의 재직기간은 짧은 일 년이었으나 제주에 대한 사정을 너무나 빤히 잘 알아 가장 적절하고도 시급한 일들을 해결한 청렴한 목민관으로 기억되고 있다.

 

또한 지난 2004년 12월 25일에 전라남도 강진군 강진읍 서성리 영당거리에서 조정철 목사의 송덕비가 오문복 선생에 의해 확인되었다. 이 비의 앞면에는 「濟州牧使趙公貞喆萬歲不忘碑(제주목사조공정철만세불망비)」라 각이 되어있으며 건립 연대는 정축년 5월이다. 이는 조정철 목사가 제주목사를 마치고 떠난 6년 후에 해당된다. 강진(康津)은 요즘으로 말하면 제주와의 뱃길이 빈번했던 곳으로 제주로 향하는 모든 물류의 집산지였다. 비석이 뒷면은 글씨가 작고 187년 동안 풍우에 마멸이 심하여 읽어내지 못하였다고 한다. 어쨌든 조 목사가 떠난 후 세워진 이 비는 그를 영원히 잊지 않고 기억하겠다는 다짐을 하고 있는 바, 그의 제주목사 시절의 치적과 영향력이 제주만이 아니라 제주와 관련된 지역과 사람들에게도 미쳤던 것을 증명하는 자료라 하겠다.

 

▲  조정철 목사의 비문

 

양주조씨대종회 조원환(趙源煥) 회장이 찬(撰)한 조정철 목사의 비문에서 제주목사 시절의 치적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공은 목사 재임 중 제주성(濟州城)을 개축하고 왜구(倭寇) 등 국방의 대비에 힘쓰고 성 주변 12과원(果園)을 설치, 감귤재배를 권장하고 흉년 때 육지에서 들어와 노비가 된 사람들을 고향으로 돌아가게 하였으며 부당한 세비를 빙자한 재물을 착취하지 못하게 하고 또한 부역(賦役)으로 과중한 부담이 없도록 힘썼다. 한편으로는 귀양 살 때 자기 때문에 고통을 받은 집주인과 이웃들을 만나 그들의 소원을 들어주고 옛날의 신세에 대한 보답도 하였다.

 

햇살이 따가웠다. 상수리나무 그늘에 있는 평상에서 땀을 들이며 함녕재를 바라보았다. 함녕재의 제일은 매년 음력 9월 20일이라고 한다. 보통 양주조씨 문강공파 종친들이 모여 오전 10시 반부터 제를 지내고 점심을 먹고 헤어진다고 했다. 재실은 삼 칸 기와집으로 뒷산의 구불거리는 붉은 적송의 운치가 고서화 병풍 맛을 더해주고 있다. 백설이 만건곤(滿乾坤)하는 겨울엔 한 멋이 더하리라. 조원환 회장은 재실의 담장을 두르지 못한 것이 자꾸만 맘에 걸리는지 여기까지 오는 동안 아마 다섯 번은 말했을 것이다.

 

▲  조정철 목사의 묘

 

“담장을 못 둘렀어요, 글쎄-.”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뒤의 붉은소나무 숲 배경이 좋지 않습니까?”

 

봉안식은 지난 1997년 11월 9일에 있었다고 한다. 홍윤애로서는 사랑하는 님을 위해서 죽었으나 200년의 세월이 흐르고 흘러서야 비로소 정식으로 가문의 인정을 받아 부인의 위치를 찾은 행사였다. 제관은 초헌관에 조원환 양주조씨 종친회장, 아헌관에는 제주도에서 올라온 홍윤애의 외손(外孫) 박용진 씨, 종헌관에 제주문화원 홍순만 원장이 각각 맡았다고 한다. 봉안된 그녀의 위패를 보니 말할 수 없는 감회가 가슴속을 찌릿하게 그으며 지나갔다. 언젠가는 여기에 조촐한 「의녀 홍윤애봉안문(義女洪允愛奉安文)」이 있어 아름다운 사연이 영세불망(永世不忘)하기를 마음속으로 두 손 모아 기원하였다.

 

이제 나그네길을 접을 시간이 다가온 듯했다. 조정철 목사의 숨결을 찾아 떠난 이번 길은 조원환 회장님을 비롯한 문중 어른들의 보살핌이 참으로 극진하고 정중하였다. 그분들의 도움이 있었기에 조선시대의 진정한 휴머니스트 조정철 목사 관련 유적지와 역사의 현장을 보다 더 생생하게 보고 느낄 수 있었다. 특히 지난 1993년 9월, 제주대학교 장재성 교수와 홍순만 제주문화원장을 만나면서부터 마치 조정철 목사의 혼에 이끌리듯이 제주는 물론 전국 각지에서 그의 관련 유적을 열성적으로 찾아낸 조원환 회장님에 대한 감동과 고마움은 이루 다 표현할 길이 없다. 필자 또한 홍 의녀를 존모(尊慕)하며 그 현창(顯彰)이 속되지 않게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한 사람으로서 이번 조정철 목사를 찾아 떠난 역사기행은 참으로 의미 깊은 것이었다. <문화재청 문화재감정관, 시인 김순이>

 

참고문헌 및 자료

 

奎章閣本 『靜軒瀛海處坎錄』

1954 淡水契 『增補耽羅誌』

1972 김봉현 『濟州島流人傳』 國書刊行會

1994 조원환 『楊州趙氏史料選集』 보경문화사

1997 소재영 『조선조문학의 탐구』 아세아문화사

1997 제주도(101호) 「죽음보다 강한 홍윤애의 사랑」

1998 소재영 『국문학편답기』 아세아문화사

1998 홍순만 「열녀 홍윤애전」제주문화원 『제주여인상』

1999 제주도 『濟州島磨崖銘』

2002 김찬흡 『濟州史人名事典』제주문화원

2004 제주문화 『朝鮮王朝實錄中 濟州記錄(正租實錄)』

2005 조성린 『조선시대 史官이 쓴 인물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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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럭비공소크리 | 작성시간 19.03.12 눈물올리며 한삽 떠 감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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