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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현스님의 글법문

씨앗과 열매 / 덕현스님

작성자맑음|작성시간15.04.30|조회수1,690 목록 댓글 0

 




어떤 분이 얼마 전에 이런 편지를 보내오셨대요. 한번 읽어볼게요.

<편지 전문>

제가 답답한 마음에 이렇게 염치없는 부탁을 드립니다. 이 글을 덕현스님께 보여드리고 답장을 받았으면 합니다. 따로 연락이 되지 않아서요.

제 딸과의 문제는 잘 해결되어서 얘가 자신의 올해 목표는 효도하고 하면서 너무 잘하고 있어요. 그래서 새해부터는 정말 잘 살아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날벼락 같은 소식이 왔어요.


제 언니 딸이 제 딸과 나이도 비슷하고, 결혼도 비슷한 시기에 해서 아이를 낳고 이제 50일이 되었는데, 그만 쇼크사를 했어요. 아기 이름만 부르다 절명했습니다. 언니에게 보낸 카톡 때문에 생긴 게 아닌가 하는 생각 때문이에요.


지난 번 서울에 갔을 때, 저희 돌아가신 부모님 위패를 용화사에 모셔놓고 몇 번 못가본 것이 마음에 걸려서 한번 들렀었습니다. 제가 예전에 축서사에서 공양주를 한 적이 있었는데, 용화사 앞에서, 당시 제 뒤를 이어 공양간에서 일을 했던 보살님을 만났습니다.


반갑게 만나서 우리집에도 다녀가곤 했는데, 그 보살님이 얼마 전에 중국에 있던 저에게 카톡을 보냈어요. 왜 그런 글 있잖아요. 이 글을 읽고 같은 글을 20명에게 보내면 축복이 오고 안 보내면 안 좋은 일이 생긴다는 글이요.


별 생각 없이, 아니 솔직히 안 좋은 일이 생길까 조금은 염려스러운 마음에, 그 글을 언니와 조카에게도 보냈는데 며칠 뒤에 이런 일이 일어나고 만 거예요.


너무 놀라고 속상한데 언니에게 뭐라고 위로의 말을 해야 될지 모르겠어요. 카톡으로 무슨 말을 보내고 나면 그게 오히려 언니의 마음을 후벼 파는 일이 될 것 같고, 언니는 명이 다해서 갔다고는 하지만, 제 마음이 전혀 편치가 않아요. 언니는 교회를 다니는데 천사 같이 맑고 마음도 바르고 능력 있는 사람인데 지금 너무 힘들어해서 제가 어떻게 언니를 위로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그 글을 보면 그 보살님이 원망스럽기도 하고, 그래서 제가 그런 사정을 이야기했더니, 재미로 보낸 걸 가지고 무슨 소란이냐며 오히려 화를 내서, 제가 잘못했다고 했어요. 그러면서 옛날 축서사에 온 신도에게 스님께서 기도를 하라고 하셨는데 안 하더니 그 아들이 죽었다는 얘기를 해요.


아무튼 가장 중요한 건, 저에게 지혜가 없어 이 모든 일이 일어난 것 같은데, 도대체 언니에게 어떤 위로를 할 수 있을까요? 그 죽은 조카는 제가 가장 좋아하던 아이였지요. 제가 언니 입장이라도 제가 아주 원망스러울 것 같아요. 그 편지의 저주를 제가 조카와 언니에게 보낸 격이 되어버렸어요. 무슨 말로 위로해야할지. 한국에 가지도 못하고 있으니 말이에요. 그리고 종교도 다르니 제가 불자로서 교인인 언니에게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먼저, 이분하고 따님하고의 이야기를 제가 아는 범위에서 잠깐 해드릴게요. 이분은 어느 절에서 공양주를 하신 적이 있다고 했는데, 저하고는 그때 알게 된 인연이에요. 나중에 법화도량 생기면서 우리 절에서 공양주를 잠깐 해 주신 적도 있는데 음식 솜씨도 솜씨지만 손길이 얼마나 매섭고 부지런하신지, 떠나시기 전에 틈틈이 일궈서 갈아놓으신 채소 등속을 그해 내내 대중이 얼마나 잘 먹고 지냈는지 몰라요. 그분 따님도 가끔 엄마 찾아 절에 들르곤 해서 매우 좋은 인상으로 기억하고 있던 사람이었죠. 두 사람 사이도 어느 모녀 이상으로 매우 살갑고 좋아보였어요. 근년에는 따님이 결혼해서 좋은 사위를 맞았고, 아이 둘이 생겨서 이 보살님은 손자 손녀 보는 할머니 역할을 즐거이 자임했죠. 그런데 그렇게 착하고 총명하던 딸이 어느 때부턴가 마치 다른 사람처럼 변해서 이런저런 투정만 해대고, 살면서 마음이 안 드는 일이 있거나 짜증스러운 일이 있으면 마구 엄마한테 화풀이 하듯이 쏟아 붓곤 한다는 거예요. 엄마 입장에서는 손자 손녀 봐주면서 딸을 돕고 지낸다고 생각하는데, 줄곧 딸이 자신에게 신경질만 부린다며 너무 힘들어했어요. 여기까지 얘기는 일방적으로 엄마 쪽에서만 들은 얘기이긴 하지만요. 그러다 어떤 무당한테 들으니까 천도재를 지내야 한다고, 딸한테 뭐가 붙어 있는 것 같다고 했대요. 고민하시다가, 연락을 해오셨어요. 결론적으로는 무당한테 천도재를 지낼 바엔 법화도량에서 하는 편이 낫겠다고 하셔서, 실제로 작년 하안거 해제일에 합동 천도재 할 때 함께 했지요. 그래서인지 어쩐지 몰라도, 다행히 두 분 사이는 지금은 굉장히 편안해져서 아무 문제가 없어졌다고 했는데, 얼마 전 이런 뜻밖의 일이 생긴 거군요.

 

여러분도 이런 편지 받으신 적 있으세요? 저는 그런 편지가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직접 받아본 적이 없어서, 제가 아까 보각스님에게 물었더니 보라고 하나 보내주셨어요. 최근에 받으신 건가 봐요. 이것도 한번 읽어볼게요.

(문자 내용)

숙제 하나 보내오니 4일 이내에 풀고 복 많이 받으세요. 진짜로 좋은 일이 일어나네요. 저도 숙제중이에요.

 

돈으로 집은 살 수 있어도 가정은 살 수 없다. 돈으로 시계는 살 수 있어도 시간은 살 수 없다. 돈으로 침대는 살 수 있어도 잠은 살 수 없다. 돈으로 책은 살 수 있어도 지식은 살 수 없다. 돈으로 의사는 살 수 있어도 건강은 살 수 없다. 돈으로 지위는 살 수 있어도 존경은 살 수 없다. 돈으로 피는 살 수 있어도 생명은 살 수 없다. 돈으로 관계는 살 수 있어도 사랑은 살 수 없다.

 

이 속담은 행운을 가져다주며 네덜란드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이 속담은 지구를 열 바퀴 돌았으며 이제 당신이 받았으니 당신이 행운을 가질 차례입니다. 이 메시지는 유머가 아닙니다. 이 메시지를 정말 행운이 필요한 사람에게 4일 안에 보내세요. 콘스탄틴은 1953년도에 처음 이 메시지를 받고 그의 비서에게 이 메시지 20통을 사람들에게 보내라고 지시했어요. 9시간 후에 그는 9900만 달러 복권에 당첨되었어요. 카를로스는 같은 메시지를 받았으나 메시지 20통을 보내지 않았어요. 직장을 잃었습니다. 그 후에 마음을 바꾸고 메시지 20통을 보내지 않았어요. 직장을 잃었습니다. 그 후에 마음을 바꾸고 메시지 20통을 보낸 뒤에 부자가 되었어요. 1967년에 브루노는 이 메시지를 받았으나 단지 웃어버렸어요. 며칠이 지난 뒤에 그의 아들이 매우 아팠습니다. 그래서 그는 속는 셈 치고 이 메시지를 20통 만들어서 보냈어요. 9일 후에 그의 아들이 건강해졌습니다. 메이는 이 메시지를 받고 즉시 20통을 보냈어요. 메이는 다음 날 시험이었는데 모두 찍었는데도 불구하고 평균 94점이 나왔어요. 이 메시지는 행운을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당신은 4일 이내에 이 메시지 20통을 보내야 합니다. 만약 이 메시지를 가족이나 친구, 또는 아는 사람에게 보내면 당신은 4일 안에 놀라운 소식을 듣게 될 것입니다. 이 메시지를 보내고 좋은 소식이 오기를 기대하세요. 주의사항 : 수정하지 말고 그대로 복사해서 보내세요. 멀리 아프리카 말라위 김대식 신부님께서 보내주셨대요. 귀찮더라도 이행하세요.

 

 

제가 생각해도, 난데없이 이런 우편물이나 전자메일 등을 받으면 처음엔 기분이 좀 묘하고 별로 안 좋을 것 같네요. 그런데 시간이 얼마쯤 지나면, 마치 최면에 걸린 것처럼 내용의 서신을 다른 데 전하라는 지령이 자꾸 맘에 걸리고, 기한이 임박해오면, 찾아온다는 행운에 대한 기대보다는 혹시 하라는 대로 하지 않았을 때 신상에, 혹은 주변 사람에게 닥칠지 모르는 액운을 걱정해서라도 여기저기 생각나는 대로 보내는 분이 있을 수도 있겠다 싶어요. 물론 저로서는, 한번 짜증 섞인 코웃음이나 치고 말지, 전혀 그럴 것 같진 않지만요. 제가 순진하지 못해서일까요?

여러분이 이런 메시지를 받으면 하라는 대로 주변에 전해 보낼 것 같아요. 안 보낼 것 같아요?  누구, 보낼 것 같은 분 손들어 보세요. 누가 자기 경험을 좀 얘기해보실래요?

아, 직접 써서 보내신 적 있다고요? 우체통에 넣다가 손 긁혀 가면서? 옛날엔 SNS나 문자 메시지 같은 게 없었으니까 더 부담스런 일이었겠네요.

그리고 나서 좋은 일 있으셨어요?

기대도 안했지만, 아무 일도 없었다고요?

사람들에게 무작위로 꼭 전해야 할 진짜 중요하 메시지가 있으면 이런 방법을 써봐야겠다는 유혹이 드네요. (웃음)

자, 당하고만 살 일이 아닌지도 모르죠. 보다 적극적으로 자기가 뭐, 이를테면 이런 문자 메시지를 보내 보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나의 이 문자를 받은 당신에게 이제 곧 큰 행운이 다가올 것이다. 일생일대의 행운을 위해 당신이 해야 할 일은 매우 간단하다. 이 문자를 받은 뒤 4일 이내에, ○○○○○계좌로 1,000원을 송금하라. 그리고 이 문자의 내용을 한 글자도 바꾸지 말고 당신 주변의 행운이 필요한 사람 100명에게 전달하라. 단, 그 100명은 아직 이 문자를 받아본 적이 없는 새로운 사람이어야 한다.

이 메시지는 고대 그리스의 신탁에서 유래했으며 지구를 이미 수백 바퀴 돌았다. 소크라테스는 자기 철학을 믿고 이를 무시했다가 며칠 인가 독살 당해 죽었으며, 디오게네스는 단돈 천 원을 송금하고 제자들에게도 똑같이 시킴으로써 평생 일 안하고도 잘 빌어먹고 살았다. 어쩌고 저쩌고…….”

 

사람들이 충분히 순진해서 이 사람 저 사람에게 겹치지 않게 충실히 전달할 경우, 처음 100명이 각각 100명에게 전하면 만 명이 되고, 그 다음 단계인 백만 명이고, 그 다음엔 1억 명이고 그 다음엔 100억 명인데, 지금 지구상의 인구가 75억 정도 된다고 보면, 다섯 단계 만에 지구상이 모든 사람이 당신의 문자를 받아보게 될 거예요. 또 조금 머리가 모자라거나 너무 순진해서 겁이 많은 사람이 열 명 중 한 명만 된다 해도, 그 사람들이 제각각 내 통장으로 별 부담 없이 단돈 천 원씩 보낸다 치면, 나는 20일 안에 현금 7천 5백억을 가진 갑부가 될 거구요.

 

만일 여러분이 조금 더 영리하다면 사람들에게 터무니없이 천원을 부치라고 할 것이 아니라, 원가가 천원인 물건을 2천 원 남짓에 팔아넘기면서 그렇게 하면 됩니다. 내친 김에 더 교활해지기로 하면, 번 돈 7천 5백억 중에서 눈 딱 감고 10분의 1만 떼어 그 중의 또 10분의 1은 여러분 말을 신실하게 받아들이고 충실히 이행하여 단돈 천원으로 일거에 1억을 번 사례를 한 100개쯤 만들어 두고, 나머지 6백5십억은 사회복지단체 등에 기부해서 대단한 독지가의 명성을 쌓아둘 수 있다면 아주 좋을 거예요. 만에 하나, 여러분이 사기 등의 혐의로 감옥에 가게 된다 해도, 그쯤 되면 여러분 덕을 본 수많은 수혜자들이 아마 발 벗고 나서서 구명운동을 벌여줄지도 모르니까요.

 

 

여기까지 얘길 듣는 도중, 아마 여러분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소위 '다단계판매'라는 것을 생각했을지 모르겠어요. 주위에 심심치 않게 그런 사람 보셨겠죠. 다단계판매 때문에 애꿎게 몇 십만 원, 몇 백만 원을 홀랑 날린 사람, 친구나 가족 간에 크게 의를 상하게 된 사람, 거기 걸려들어서 주위로부터 온갖 비웃음이나 욕을 먹어가면서도, 생기는 소홀치 않은 수익 때문에 미적거리며 발을 못 빼고 있는 사람…….

 

혹 듣기가 거북하신 분이 있을지 모르지만, 다단계판매 걸려드는 사람은 제가 보기엔 반드시 둘 중 하나예요. 첫 번째, 머리가 너무 안 돌아가는 사람. 두 번째, 머리가 너무 잘 돌아가는 대신 도덕성이 심하게 결여된 사람. 왜 그럴까요?

다단계판매의 내막이 무엇인지 훤히 속이 보이도록 좀 단순화해 볼게요.

여러분, 100만 원 투자해서 단박에 1억 원 버는 법이 있는데, 알려 드릴까요?

이 비법을 알려드리려면 1인당 100만 원은 받아야 하는데……. 그리고 좀 멍청하면서도 목돈이 좀 생겼으면 하고 간절히 바라는 사람 100명이 꼭 필요해요.

 

그 놀라운 비법이란 다름이 아니고, 그렇게 걸려 모여든 100명한테 일단 100만 원씩 걷는 거예요. 그리고 이렇게 말하면 끝이죠.

“자, 보세요. 지금 제가 번 돈이, 백만 원, 이백만 원, 삼백만 원……. 합계 1억 원 이네요. 아셨죠? 여러분도 제가 시범 보여드린 대로 똑같이 하시면 돼요. 이렇게, 100만 원 가지고 1억원 버는 법을 알려주겠다고 광고한 다음, 걸려든 사람 100명에게서 100만 원씩 받고 나서, ‘여러분도 저처럼 하세요.’ 하면 된다구요.”

지금 제가 한 얘기를 듣고 머리가 좋은 사람들은 즉시 더 치밀하고 짜임새 있게 응용할 수 있을 거예요. 그래야 사기나 강매 같은 범법행위가 되지 않고 법망을 피할 수 있을 테니까요. 예를 들면, 그냥 100만 원을 걷는 게 아니라 100만 원짜리 물건을 200만 원에 파는 형태를 취하는 거죠. 물론 그것도 공정거래법 등에 걸릴 소지가 있으면 단가를 적정선까지 팍 낮추면 돼요. 욕심을 조금만 줄여도 얼마가 되든가만 앉아서 돈 버는 건 시간문제죠. 일단 1단계에서 자기한테 걸려든 사람들이 또 돈 벌 욕심으로 주위 친지들한테 기를 쓰고 물건을 갖다 팔 테고, 그 이익금 일부는 이 놀라운 비법을 전수해준 대가로 당신한테 가져오도록 계약하면 되니까요. 이것을 다른 말로 피라미드 판매라고도 하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이 판매구조는 즉시 2단계 3단계로 벌어져 가면서 먹이사슬의 꼭대기에 올라앉은 당신에게 엄청난 불로소득을 안겨줄 거예요.

이 비법의 함정은 알기 어려운데 숨어있지는 않아요. 아까 예에서 뻔히 보이듯이​, '다단계'라는 말이 무색하게도, 이 꺼림칙한 판매법은 아무리 피라미드의 하부에 속한 세일즈맨들이 뛰고 날아도 몇 단계 못 가서 더 이상 살 사람이 없어진다는 거예요. 대여섯 단계 지나면, 전 국민이 다 사고, 세계 사람이 다 산다 해도 더 이상 물건을 사 줄 사람이 없게 되죠. 당연히 다단계의 하부에 속한 사람들은 구조적으로, 손해만 보고 울면서 나가떨어지게 되어 있는 거예요. 이 파리미드 구조에서 떼돈 버는 사람들은 당연히 제 스스로 1단계나 최상부에 있는 놈들뿐이에요. 다단계多段階라는 말부터가 거짓말인 거예요. 절대 소단계少段階에서 끝나지, 다단계를 거치면서 물건을 팔수가 없는 구조예요. 다단계판매로 돈을 벌려면 매물을 바꿔가며 자기가 피라미드의 최상부에 앉아 시작하고 얼른 치고 빠져야지, 몇 단계 뒤에 끌려들어가서는 자기 돈만 날리고 말지 결코 돈을 벌수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아까 제가, 이 함정을 모르고 금방 떼돈을 번다니까 달려드는 사람들은 조금 머리가 안 좋은 바보들이고, 이것을 알고도 상부구조에서 그런 짓을 하는 놈들은 교활하고 사기꾼들이라고 한 거예요.

 

그런데 법조인들이나 소비자단체 등에서 사회정의를 위해 선의를 가지고 애쓰는 사람들은 이 다단계판매를 사기혐의로 고소하거나 처벌하기가 매우 어려운가 봐요. 우선 법적으로 문제를 삼기가 대단히 어려울 정도로 교묘한데다, 사람들이 다단계판매라는 것의 농간을 알아채면서 조금씩 꺼려하기 시작하니까, 차츰 매물 자체도 질적으로 전혀 하자가 없고 매우 우수하기까지 한 것들을 선정해서 팔기 때문이죠. 다단계를 통해 샀다고 해도 산 사람이 전혀 손해 보거나 속았다는 느낌이 들지 않도록 하는 거예요. 다시 말하면, 매매 자체는 처음부터 끝까지 법적으로 전혀 하자가 없고, 단지 판매 방법만 다단계구조를 가지고 있는 거예요. 그것도 그런 판매구조에 사람들이 들어온 것이 전혀 강제적인 데가 없고 자발적으로 들어온 것이라면 어떻게 문제시할 수 있겠어요?

 

이 피라미드 판매술을 맨 처음 생각해낸 사람은 미국의 어느 유대인이라고 들었는데, 진짜 나쁜 놈이죠. 그런데 놀라지 마세요. 우리나라에도 조선조 말에 그와 유사한 천재 사기꾼이 있었으니 바로, 그 이름도 유명한 봉이 김선달이었습니다. 대동강 물을 팔아먹은 사람이죠.

 

어느 날, 어디서 굴러먹던 놈이 나타나 멀쩡하게 흘러가던 대동강 물이 자기 거라면서 사람들에게 떠서 팔기 시작해요.

처음엔 다들 뭐 저런 미친놈이 있나 하고 거들떠도 안 보는데, 놀랍게도 이 사람 저 사람, 가서 값을 물어보더니 그 강물을 사기 시작하는 거예요. 한 동이가 자그마치 천 냥이라는데. 그런데 더 놀라운 건 저만큼엔, 방금 산 강물을 다시 사주는 사람이 있는 거예요. 그것도 삼천 냥씩이나 주고, '아, 그래서 이 사람들이 이 미친 거래를 하는구나.'하고, 고개를 갸웃거리던 사람들은 갑자기 가슴이 설레기 시작하죠. 알고 보면 놈들은 물론 봉이 김선달과 그가 데리고 다니는 바람잡이 일당들인데 말이죠. 이제 곧 낚싯밥을 무는 물고기들이 생기는 거예요.

 

이 희한한 물장사 소식은 들불 같은 입소문을 타고 평양 바닥에 삽시간에 알려지죠. 그리고, 곧 돈 욕심 많고 계산이 빠른 장사치들의 마음에 불길을 당깁니다.

 

그들은 곧 큰 수레에다 동이를 있는 대로 싣고 와서 김선달에게서 물을 사요. 소위 사재기 하는 거예요. 물이 불티나게 팔리죠. 그 상인들은 이제 한 동이에 삼천 냥씩 받고 넘기기만 하면 벌릴 돈이 얼마일지 속으로 주판알을 튕기면서 마소가 끄는 수레를 몰고 가서 줄서서 기다립니다.

 

그런데 물을 잘 사주던 저쪽 사람이 그만 현금 떨어졌다면서 돈을 가서 더 싣고 오겠다고 어딘가로 합니다. 두말할 것 없이, 잠적이죠. 여러 식경을 초조하게 기다리던 사람들이 애가 타서 강 족을 보니 봉이 김선달도 이제 물 그만 팔겠다며 수레 가득 돈을 싣고 어디로 가버린 뒤네요. 상황 끝이에요.

 

상인들은 한 동이에 천 냥씩 주고 산 그 물로 무엇을 했을까요? 자기 머리 위로 들이붓지 않았을까요? 분을 못 삭여 소리소리 지르며 동이를 두드려 깬 사람들도 많았겠죠.

 

장사라는 게 뭘까요? 자기가, 혹은 다른 사람들이 생산한 재화나 용역을, 그것이 필요한 다른 사람들에게 공급해주는 대가로 원가에다 일정한 이문을 붙여 팖으로써 돈을 버는 일이죠. 이는, 사람들이 자기에게 필요한 것을 자기가 직접 생산하여 쓰는 자급자족에서  벗어나 훨씬 풍족하고 다채로운 삶을 영위케 하는, 우리 생활에 필요 불가결하고 매우 가치 있는 인간 활동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생계의 수단이나 이재의 방법이 될 수도 있지만, 거기에는 반드시 보편적인 도덕률이나 직업정신이 필요한 거죠. 사고파는 일은 기본적으로 상호간의 신의와 공정성은 물론이고, 어느 정도의 서비스 마인드까지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도 그냥 물건 팔아 돈만 버는 것이 아니라, 주변에 늘 큰 기쁨과 이익을 주고, 직업적인 자기 일을 마치 수행처럼 해 나가며 내적으로 깊이 무르익어가는 사람들을 간혹 볼 수 있지만, 제가 지금 하려고 하는 한 아름다운 이야기는 헤르만 헤세의 소설 '싯다르타'에 나오는 주인공에 관한 것입니다.

 

그 주인공 이름이 싯다르타죠. 물론 부처님의 일대기를 소설화한 것이 아니라, 불교가 지금처럼 서양사회에 널리 알려지기 전에, 헤세가 부처님의 출가 전 이름이 싯다르타를 가공의 소설 주인공한테 붙인 것이고요. 한 수행자의 구도와 깨달음이 그 줄거리이긴 합니다.

 

원래 싯다르타는 산중에서 깊은 명상과 사색만 하던 사람이었는데, 어느 시점에선 세상에 내려가 세상의 흐름에 직접 뛰어들어 도를 배워야겠다는 생각에 하산을 합니다.

그리고는, 정신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의 방탕과 소란이 들끓는 골목을 지나는데, 어느 여인을 보고 그 아름다움에 넋을 잃고 맙니다. 용기를 내어 다가가 묻죠. 당신을 사랑하고 싶은데 내 사랑을 받아줄 수 있느냐고. 그런데 그 여자는 직업적으로 몸을 파는 여자였고, 젊은 청년의 맑고 깊은 눈동자를 보며 대답합니다.

 

"돈이 있으세요?  저를 데리고 자기 위해서는, 그 누구라 해도 상당한 액수의 돈을 지불해야 하는데요."

순진한 청년은 자기가 이제 막 산에서 내려왔기 때문에 무일푼인데다 세상 물정을 잘 모르는 사람임을 솔직히 고백하며, 어디 가야 돈을 벌 수 있는지 묻죠. 여자는, 돈을 벌려면 아무래도 돈이 많은 사람에게 찾아가봐야 하지 않겠느냐며, 외국으로 무역을 다니는 큰 상인의 집을 가리켜줍니다.

경험 많은 상인은 한눈에 이 젊은이가 전혀 무슨 세상일을 해보지 않았음을 간파했는지, 돈을 벌려고 찾아왔다는 청년에게 대뜸, 무엇을 할 줄 아느냐고 묻습니다. 젊은이가 망설임 없이 그러나 퍽 진솔하게 한 대답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저는 사람의 마음을 이해할 줄 알고, 참을 줄 알고, 기다릴 줄 압니다.”

이처럼 뜬금없는 대답에, 상인은 잠시 생각하더니, 이윽고 그를 두말없이 받아들여 장사를 가르치죠. 젊은이의 순수함과 지혜로움은 곧 기대 이상으로 거부인 그 상인의 신임을 얻었고, 이듬해에는 상당한 규모의 상단을 이끌고 몸소 다른 나라로 가서 운송해간 물건을 팔고 그 지역에서 나는 물건을 싼 값에 사오라는 막중한 임무를 맡아 떠납니다.

그런데 오랜 시일이 걸려, 긴 험로를 여행한 끝에 도착한 목적지에서 일행은 크게 낙담하고 말았습니다. 그 나라의 형편은 전혀 장사를 할 수 없는 지경이었죠. 무서운 가뭄이 닥쳐, 그해 그 나라 사람들은 먹고 살아남기도 어려운 처지라, 진기하고 새로운 물건을 살 여유는커녕, 당장 생업에 필요한 물건도 구할 돈이 없었던 거예요. 같이 갔던 경험 많은 상인들조차 크게 맥 빠져 하며, 올해는 너무 운수가 좋지 않다고, 헛걸음만 했으니 당장 돌아가는 것만이 피해를 최소화하는 길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젊은 리더는 신중하게 한 동안 생각해보더니, 뜻밖의 결정을 내려 당장 시행하게 했습니다. 그것은 굶주림 속에서 아무 대책을 찾지 못하고 있는 현지인들에게, 팔려고 가지고 간 물자들을 다 풀어 무상으로 나눠주라는 것이었어요.

그리고는 투덜거리는 사람들을 데리고 다시 귀로에 올라 돌아와서 상황과 경과를 보고합니다. 듣고 있던 늙은 상인은 아무런 질책의 말도 하지 않고 그를 그 지위에서 그대로 일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다음 해 그 무렵이 되자, 똑같은 임무를 띠고 다시 그 나라로 장사를 하러 떠나보냅니다.

그런데, 그 해에는 상황이 전년과 완전 딴판이었습니다. 예년에 드문 풍년이 들어 사람들은 새 희망에 차서 지난해의 고초를 만회하려하고 있었고, 작년 그 어려울 때, 팔려고 가져온 물건들을 구호품으로 베풀어주었던 젊은 상인을 기억하고 다시 오기를 학수고대하고 있었습니다. 전년도에 돈을 지불하지 않고 거저 얻었던 물건 값까지 톡톡히 쳐 주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고, 다른 상인들에게 사려던 물건까지 다 이 젊은 상인에게서 사 가는 것이었습니다.

수행자였던 젊은이는 그렇게 그만의 소신과 깊은 마음으로 장사에도 크게 성공했고, 나중에 그 아름다운 여인과 결혼하여 행복하게 살았죠. 만년에는 비록 그녀를 잃고 사랑하던 이들도 떠나보내는 등 심적인 큰 고비를 겪지만, 거기에서 오히려 큰 깨달음을 이뤄 인생을 달관하게 되었다는 줄거리입니다.

다단계판매를 생각해낸 사람이나 봉이 김선달 같은 사람이 감히 어떻게 싯다르타 같은 상인의 내면이나 정신세계를 알겠어요? 장사를 하는 것이 돈이나 세는 헛된 인생이 되지 않도록 하려면 먼저, 이해타산이나 세상의 정글에서 살아남기 위한 집요한 투지나 이기심보다 한결 소중한 것들이 우리 안에 있고, 바로 그것을 자신이 일상에서 직업적으로 하는 일에 꽃피워 내는 것이 궁극적 행복의 길이라는 것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상거래에 종사하는 일뿐만 아니라, 사람이 생계를 해결하고 사회에 긍정적으로 기여하기 위하여 일하는 거의 모든 부분의 직업에, 똑같이 인생을 꿰뚫는 철학과 건강한 정신자세가 필요할 것입니다. 공공의 가치나 사회적 영양이 큰 일들에는 특별히 정의로운 가치가 요구되죠. 어쩌면 사회의 체제나 법치法治를 논하기 앞서, 낱낱 성원들의 자질이나 인식이 먼저 갖추어지지 않으면 우리가 서로 얽혀 안전하고 신뢰할 만하고 복된 공동생활을 해나간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의 정신이나 영성의 형성과 작용에 직접적 영향을 미치는, 교육이나 종교 분야에서 일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각별히, 매우 철저하고 드높은 기준이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교육에 있어서는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 못지않게 그것을 어떤 방식으로 전수하고 어떤 그릇에 담아 전달할 것인가가 무척 중요합니다. 예를 들면, 우리 경험에 비춰볼 때, 같은 내용을 배운다 해도 어느 학교에서 어느 선생님으로부터 어떻게 배웠는가에 따라 교육의 질이 달라지고 교육의 효과나 성취도도 판이하게 달라지는 거지요.

비판적으로 말하자면, 오늘날 우리 교육은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것이 나중에 성장한 아이들이 사회생활이나 세상살이를 할 때 거의 쓸모 있는 것들이 없다는 점보다 훨씬 심각하게, 교육의 방법이 지나치게 경쟁적이고 일방적이고 획일화되어 있다는 것 때문에 문제가 많습니다. 서민의 가정마다 아이들에게 드는 교육비는 집의 기둥이 휠 정도이고, 다른 용도를 다 포기하고도 아이들의 장래를 위해 잘 가르쳐보겠다고 모든 것을 쏟아 붓는데도 불구하고, 그런 교육을 받은 자녀들이 커서 반드시 행복하게 잘 사는 것도 아니고, 부모들에게 교육시킨 보람을 안겨주는 것은 더욱 아닙니다. 투자나 장사라고 보면, 밑지는 정도가 아니라, 거의 사기당하는 꼴입니다. 뒤에 오는 결과가 너무 초라하거나 전무한 것보다 우선, 교육시키는 과정에서부터 학생도, 학부모도, 심지어는 교사도 전혀 행복하지도 않고 오히려 온갖 수고와 고초만 따르며, 생각해 보면 그것이 꼭 필요한 일인지 회의가 들 뿐입니다. 좋은 세상을 만들고 우리가 보다 의미 있는 생애를 보내고 싶다면, 처음부터 끝까지 정말 다시 검토해 보아야 할 첫 번째 것이 교육입니다.

장사를 할 때도 무엇을 거래하는가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그것을 어떻게 사고파는가이죠. 다단계판매 같은 것은 그것이 아무리 합법적이고 문제 삼기 어려운 것이라 해도, 양심과 선의가 있는 사람이라면 하지 말아야 할 짓입니다.

이제 좀 더 심각한 얘기로 넘어가 볼게요. 바로 종교에 관한 것입니다.

사실을 말하자면, 인류역사에서 가장 기만적인 방법으로 장사를 해온 것이 바로 종교입니다.

고대에 국가가 형성되고부터는 늘 있어온 것이니까 대부분 당연시하긴 하지만, 그 효용과 비효용을 따져볼 때, 과연 '정치'라는 게 필요한 것일까 회의를 해 볼 수도 있죠. 예컨대 무정부주의 같은 것도 있으니까요. 특히, 사람들의 인지가 발달하고 사회의 민주화가 진행될수록 사람들의 인식을 탈정치화하고, 직업적 정치인의 존재에 대해서는 비판적이거나 냉소적인 관점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더 이상 사람들은 많이 알려진 정치지도자나, 투표에서 다수의 득표를 하여 선출된 자기 국가의 수반 등을 존경하거나 우러러보지 않습니다. 도리어, 정치 정의롭지 못한 면과 기만성, 정치인의 부정직성을 희화화하고 풍자하는 것은 현대 코미디나 농담의 단골 메뉴입니다.

어느 지방 경찰서에 교통사고가 접수되어 경찰관이 조사차 현장에 갔습니다.

고급 승용차 한 대가 시골길을 달리다 굴러 떨어졌는데 논바닥에 거꾸로 처박혀 있었는데, 차 안에 탔던 사람은 보이지 않고 저쪽에서 농부로 보이는 사람이 땅에 뭘 묻고 있었습니다.

“혹시 여기 교통사고 있었던 거 아셨어요.”

“예. 내가 직접 목격했죠.”

“그래요? 그런데 운전자나 승객은 왜 보이지 않죠.”

“아, 한 사람, 운전하던 양반이 뒤집힌 차에서 빠져나왔는데, 아무개 국회의원이라고 하데요. 내가 지금 여기 땅속에다 묻고 있는 중이에요.”

“네?”

“내가 일하다가 사고 나는 걸 보고 달려와 차에서 끌어내 주면서, ‘당신 좀 과속했죠?’했더니, 아니래요. 내가 다 봤는데. '음주운전이네요.' 했더니, 역시 아니래요. 술 냄새가 풀풀 나는데 말이죠. 이 사람 입에서 나오는 말은 죄 거짓말이로구나 생각하면서, '당신 살아있는 거 맞소?' 했더니, 그렇대요. 그래서 지금 여기 묻은 거예요.”

 

인류의 정치사는 온통 투쟁과 기만과 착취와 전쟁의 역사죠. 인간의 본성은 원래 선한 것이고, 사람들은 우리가 잘 믿지 못해서 그렇지, 생각보다 훨씬 착합니다. '법 없이도 살 사람'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 말은 '법'이라는 것이 사람들의 권익을 보호하고 사회질서를 확립하기 위해서 가능하기보다는, 권력과 소수 기득권자들의 이익을 지키는 도구로 쓰여 왔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권력투쟁의 장에서 온갖 음모와 계략과 폭력으로 헤게모니를 장악한 자들이 자신들의 입지를 정당화하고 민중을 기만하여 착취하기 위해 상투적으로 동원하는 것이 바로 '법치法治'나 '정의', '민주', '번영' 따위의 가치나 구호이니까요.

 

그런데, 지금 하려고 하는 얘기는, 이 정치보다 훨씬 교묘하고 부도덕한 방법으로 사람들을 속여 온 것이 바로 인류역사 속의 '종교'라는 점에 대해서입니다. 특히 'Made in 중동'의 종교들이 세계시장으로 진출하면서 유별나게 그래왔어요. 이쪽에서 생긴 종교들은 유달리 팽창주의적 성향이 강합니다. 영적 구원을 내세우면서도 탈속하기보다 늘 세상의 정치, 경제, 사회를 장악하여 사람들의 생활 전반을 지배하려 들죠. 복음이나 구원의 메시지라고 하며 도그마를 퍼뜨리는 방식도 그다지 평화적이고 자연스럽지 않습니다.

 

이 지역의 종교들은 초기에는 정치권력으로부터 견제를 당하기도 했지만 곧 적대적인 관계를 청산하고 대신 공생하고 야합하며 밀월의 시간을 보내왔습니다. 실제로 이 종교들이 사람들 위에 군림하여 향유해온 권력이 어마어마한데, 공유나 나눠먹기가 본질적으로 어려운 권력의 속성상, 정치와 종교가 대체 평행선을 그으며 공존해올 수 있었던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종교는 정치권력의 힘을 이용하여 사람들의 종교에 대한 믿음이나 헌신과 희생을 종용한 거죠. 정치와 종교는 서로를 영리하게 이용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미래에 대한 희망에 순한 양들처럼 속아 넘어가 고분고분 말을 잘 듣고 절대 체제를 거역하지 않도록 했을 뿐만 아니라, 힘과 야심을 뻗쳐 다른 문명권이나 나라들을 침탈할 때는, 탈을 쓴 종교인들도 정치권력이 파견한 군대와 함께 출전하여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그 지역의 국가 권력과 미개(?) 신앙이나 가치를 함께 무너지게 했습니다. 저쪽 세력의 힘이나 저항이 막강할 때는 정치권력과 종교권력이 민중을 함께 종용하여 신의 이름이나 내세의 영광을 위하여 나가 싸우도록 했구요.

 

사실 민중들로서는 이런 정치와 종교에 이용당하고 희생되었을 뿐이지 얻은 것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가산을 털어 면죄부를 샀다고 해도 회개나 구원은 살 수 없는 것처럼, 사람들은 정치나 종교의 권력에 속아 재산과 인생과 목숨을 털어 바치기만 했지, 땅을 얻은 것도 아니고 돈을 얻은 것도 아니고, 더구나 신의 가호나 내세의 영광을 얻은 것은 더욱 아니었죠. 민중들이 뒷날 조금씩 얻게 된 인간의 존엄이나 자유나 평등과 같은 민주적 가치들조차, 정치나 종교의 발전으로부터 하사받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들과의 목숨 건 지난한 투쟁으로부터 겨우겨우 얻어낸 것들이었으니까요.

 

중세유럽에는 분명히 돈을 받고 지옥이나 연옥에 가는 대신 천국행 티켓을 파는 면죄부 판매라는 것이 있었죠. 그것을 시발로, 마르틴루터의 종교개혁이 시작되었고 결과적으로 프로테스탄티즘이 기존의 가톨릭교회로부터 분화하긴 했지만, 프로테스탄티즘은 다시 그 나름의 상업적 논리나 훨씬 교묘한 선교의 방법들을 동원하여 다른 문명권에 교세를 확장해 왔습니다.

 

지금까지 종교들이 선교되어온 방식을 보면 그다지 합리적이거나 좋은 방법으로만 이뤄졌다고 보기는 어려워요. '칼이나, 코란이냐.' 하는 말도 있지만, 대개 그렇게 원색적이지는 않아도 대신 훨씬 교묘한 방법이 사용되어 왔지요. ‘안 믿으면 지옥 간다. 심판이 곧 올 것이다. 믿기만 하면 천국 간다. 영생한다.’ 하는 식으로, 사람들 안에 있는 불안이라든지, 모든 것의 인과를 꿰뚫어 보지 못하는 무지를 이용해서 선교를 해온 것이라고요. 그리고, 별로 합리적이지 않아 조금만 생각해보면 그 허위성이 분명하고, 과학기술 등이 발전해오면서 뻔하게 거짓임이 판명된 교의 따위를 이렇게 줄기차게 믿게 하려 한 목적이 사람과 세상의 구원에 있었다기보다는, 그것으로 종교적 권력을 향유하고 생계와 축재의 수단으로 삼으려는 소수의 사람들이나 세력의 이익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바람은 사람들이 그렇게 믿고 다 진실한 구원을 얻는 데 있기보다는 교회에 나와 헌금하는 것이었죠. 인류의 구원이나 사람들 내면의 진실한 평온을 위해서보다는 다분히 상업적인 목적으로 더 큰 이익을 위해서 투자하듯이 자잘한 미끼를 던지기라도 하면, 사람들은 일시적인 위안이나 세속적인 작은 이익에 속아 더욱 순순히 끌려와 평생 교회에 돈을 바칩니다.

 

더욱 나쁜 경우에는, 종교라는 것도 구원 혹은, 현세나 내세나 복락과 같은 것을 약속하고 사람들에게 그것을 팔아먹는 다단계판매와 같이 되어버립니다. 약하고 어리석은 사람들이 그것을 쉽게 구매하고, 사이비종교일수록 교묘하고 악랄한 방법으로 사람들의 권위에 대한 두려움, 미래에 대한 불안의 심리 등을 이용하여 거의 강매나 사기에 가까운 방법으로 혹세무민하여 거짓된 구원을 팔아먹습니다. 흔히 엉터리 종교적 교의를 팔아먹거나 거기 빌붙어 살아가는 사람들이 여러 단계로 형성되며 거대하고 복잡한 경제조직이 되죠.

 

경제활동에서 사고파는 것은 재화와 용역인데, 사람들이 그것들을 대가를 지불하고 구매하는 것은 그 재화나 용역이 가치나 효용이 있기 때문이죠. 더구나 매물이나 서비스의 질이 상식이나 상도덕을 벗어난 것이서는 안 되며, 그 거래의 방법 또한 합법적이고 공정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사이비종교가 기만적인 방법으로 구원의 약속을 남발하며 사람들의 재산과 인생을 거덜내는 것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무수히 계속되어온 비리요, 사기 행각입니다. 그런 종교단체까지 파국에 이르러 실상이 노출되기 전에는 사람들이 겹겹의 장막이 둘러쳐진 그 내막을 알기도 어렵고, 순진한 사람들이 걸려들어 그 실체를 알아갈 무렵이면 자신이 이미 너무 깊이 연루되어 빠져나오기가 어려운 경우가 대부분이에요.

 

그 무엇보다, 최소한 종교는 선의의 가르침이어야지 상술이어서는 안 됩니다.

 

보다 엄밀히 말하자면, 바른 종교란 인과의 진리에 대한 가르침일 뿐, 그 이상이어도 그 이하여도 안 됩니다. 믿더라도 인과를 믿도록 하고, 알더라도 인과법을 알도록 하고, 닦는 것도 인과대로 닦도록 하고, 깨달아도 연기를 깨닫도록 해야 합니다.

 

그 존재조차 확실치 않은 절대자나 초월자, 혹은 권위적이고 진실하지 않은 교주나 종교지도자를 믿고 거기 맹목적으로 기대거나 속아 넘어가 인생과 가정과 재산을 파탄에 이르게 하는 것들은 종교가 아닙니다.

유감스럽게도 현대 사회에서 사람들이 지금 사용하는 '종교宗敎'라는 개념은 다분히 그런 뉘앙스로 쓰이고 있지만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종교란 하늘이든 다른 어떤 세상이든, 자기 밖에 따로 존재하는 절대자를 믿는 것이라고 생각하잖아요? 심지어는 흔히 무슨 무슨 '경經'이라고 부르는 오래된 책들에 나와 있는 얼토당토않은 신화神話나 지극히 불합리하고 초경험적인 교설이나 이야기들을 역사적 사실이라고 믿는 것이 종교라고 생각하기 일쑤입니다.

 

이것은 다분히 서구문명의 영향입니다. 오늘날의 과학기술문명은 서구의 르네상스나 산업혁명으로부터 시작되어 제국주의 시대를 거치며 다른 대륙의 모든 문명권에서 오래 발전해온 지역적 가치나 전통적 의식구조, 생활양식 대대적으로 유린하고 파괴해가며 서구적 근대화를 견인해 왔고, 이제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지구촌 전역이 그 획일적 흐름에서 자유로울 수 없게 되었죠.

 

학문적으로든 일상적으로든 우리가 가진 사고의 틀이나 쓰는 개념들마저 서구적 영향이 없는 것들이 거의 없습니다. 아까 말한 '경經"이라는 용어도 그렇지만, '종교'라는 말도 마찬가지인 거예요.

 

원래 종교라는 말은 불교에 있던 말입니다. 종지宗旨, 종취宗趣, 종문宗門이라는 말에서와 같이 불교에서는 본사本師이자 교조敎祖인 석가모니 부처님이나, 불교 안의 한 종파의, 근원적이고 기원이나 기준이 되는 핵심의 가르침을 의미하는 말이었던 거예요.

이것을, 서구 제국주의 열강에 대적하는 대신, 화친조약을 체결하고 서구 문물을 전격적으로 흡수하여, 동양에서는 유일하게 제국주의의 대열에 발 빠르게 나서서 주변국들을 침탈하고 식민지화하려 했던 일본이, 그 시발인 명치유신 시기에, 서양의 'religion'이라는 말을 번역하는 데 갖다 쓴 것입니다. religion은 라틴어 'religio'가 어원인데 그 문자적 의미는 '재결합하다'라고 합니다. 원죄로 하여 신으로부터 축출되었던 인간이 죄를 용서받고 신과 다시 재결합한다는 의미죠.

아주 깊이 그 의미를 새겨 주자면, 중생이 무지와 업장에 가려 본성을 등지고 있다가 깨달음으로 그것을 걷어내고 본성에 돌아간다는 의미라고 갖다 붙일 수도 있겠지만, 고대로부터 서양의 신관神觀은 매우 이원론적이었고, 신은 언제나 인간 위에 있는 '타자他者'였지, 인간 안의 본성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모든 것의 근본이고 제일원인第一原因이라 할 수 있는 '진리'에 대해서도 고대로부터 서양 철학이나 믿음은 항상 동양의 사상이나 '종교'보다 피상적이었고, 논리나 이분법적 사고의 틀을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필연적으로 서양 사람들이 생각하는 '신'은 '정신精神', '신령神靈하다'와 같은 동양적 언어에 담긴 신과는 달리, 인간 밖에 매우 고압적으로 군림하는 '제왕의 신'이 되고, 그러고 나면 인간은 그 발아래 납작 엎드려야 하는 '죄인'이나 '종'이나 '불쌍한 어린 양'이 될 수밖에 없었던 거죠.

모든 것이 인연이 갖추어지면 생겨나고 인연이 다하면 소멸한다는, 연기연멸緣起緣滅의 법은, 부처님이 깨달아 증험하신 진리, 다르마Dharma이며, 공空, 원각圓覺, 불이不二, 일심一心 등과 같이, 불교의 수많은 경전에서 각각 다른 말로 표현된 궁극의 근원, 존재의 실상實相입니다. 이 우주 안에, 그리고 정식精識을 가진 모든 유정有情의 안팎을 꿰뚫는 유일한 진리는 바로 이것뿐입니다. 인격신도 인연 따라 잠시 있는 신이요, 그 신의 '말씀'이나 신의 로고스나 의지나, 천상세계나 우주 안의 다른 어떤 외계나, 심지어는 시공간 자체도 다 인연 따라 있다 없어지는 것들일 뿐이죠. 인연 따라 생하고 멸하는 일체의 것들이 다 무상한데, 그 가운데 무상하지 않은 오직 한 가지가 있다면 그것이 바로 '인연법因緣法'인 것입니다.

아무도 이 인연법을 벗어날 수 없고, 이 인연법 위에는 '초법적超法的' 존재가, 그 무엇도, 아무도 있지 않습니다.

세속에서도 나를 지배하고 만민이 따라야 하는 규범이나 질서를 법이라 하고, 왕이든 뭐든, 만인이 그 법 앞에 평등하여, 한 체제의 수반이라 해도 초법적인 위치에 있지 않은 것을 '법치주의法治主義'라 하는데, 이 우주와 법계가 바로 '인연법의 법치'하에 있는 불국토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죠.

‘부처님의’의 존재는 무엇인가요?

석가모니 부처님은, '연기緣起를 보는 자는 나를 보고, 나를 보는 자는 연기를 본다.'고 하셨습니다. 부처님의 참 존재가 부처님이 깨달으신 진리, '연기법'과 둘이 아니고, 전혀 다르지 않다는 말씀이죠. 펼쳐 보이면 '연기'이지만, 꿰어서 말하면 '공'이라 할 수도 있고, '마음'이라 할 수도 있고, 때에 따라서는 '부처'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부처는 중생과 다른, 중생들 위에 군림하여 법을 자의적으로 집행하는 제왕과도 같은 인격신이 결코 아닙니다. 참 부처는 연기이고 공이며, 금강경에서 설하시듯, 통달무아법자通達無我法者 즉명제불卽名諸佛 즉, 무아연기無我緣起의 법에 통달한 자를 다 부처라 이름 하는 것뿐입니다.

그렇다고, 어리석은 사람들이나 사견에 사로잡힌 외도들이 오해하듯이, 무아나 공으로 돌아갔다 해서 아주 사라져 죽어버리거나 무의미하고 토목와석土木瓦石처럼 건조해져서 아무 용처도 없이 없어져버리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들이 바른 수행과 깨달음 없이 함부로 개념화한 공은 진공眞空이나 중도中道의 공이 아니라, 단멸斷滅의 공이며 무기공無記空이며 완공頑空이라고 하죠. 반대로, 부처님과 바른 불제자가 중도의 수행과 깨달음을 통해서 계합하는 공은 대해탈과 열반의 경지입니다. 그로부터 일체의 인과를 비추어 아는 반야의 광명이 발합니다. 모든 유정에게 인연 따라 무위의 자비심으로 드리워져 자타를 생사의 괴로움으로부터 영원히 건지는 것입니다.

 

연기는 참으로 공정한 것이며 인간의 내면과 자연계에 이미 있는 것입니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며, 아니 땐 굴뚝에선 연기가 날 리 없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바른 인과를 믿고 살아갈 때, 세상이 평화로우며 정의가 행해지고, 사람들은 성실하고 진실하고 시종 의미 있게 살아갑니다.

 

신이 모든 것을 마음대로 좌지우지하거나, 우연히, 혹은 아무 맥락이나 질서도 없이 세상일이 무작위로 벌어지는 것이라는 견해 위에서는 그 어떤 지속가능한 도덕기준도 세울 수 없을뿐더러, 만인이 의지하고 찾아나서 실증해 낼 진리 자체도 상정할 수 없게 됩니다. 세상에 만인이 수긍하고 따를 수 있는 보편적 규범도 존재할 수 없고, 인간의 가장 이상적 가치라 할 행복이나 대자유나 참 진리를 추구하거나 구현하는 것 또한 공허한 이상이 되어버리거나, 존재가 묘연한 절대자의 선처나, 횡재나 재수대통 같은 우연적인 것에 밖에 기댈 데가 없게 되어버린다는 말입니다. 그런 통념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사람들은 악행을 서슴지 않으며 세상의 덧없는 것 들을 찾아 부유하며 세월을 허송하게 됩니다. 온갖 사회악이 난무하고, 서로가 서로를 믿지 않고 사랑하지 않으며, 아무도 행복하지 않고, 미래는 암담해지죠.

분명하게 말하지만, 진정한 종교는 인과법을 꿰뚫어 가르치신 부처님의 가르침밖에 없습니다. 부처님과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는다는 것은 곧 인과를 믿고 선한 인행因行을 쌓으며 살아가는 일이고, 그 가운데서 다른 생명들과 더불어 편안해지고 지혜로워지며, 함께 부처님 같아져 가는 일입니다.

불교는 가르침을 전하고 중생을 교화하는 행조차 자연스럽고 선의에 차 있으며 지극히 자비로울 뿐, 사기 공갈 같은 강압적이고 무례한 방식을 절대 택하지 않습니다.​​ 악행의 결과로 중생이 자초한 고통에 처하는 것을 경계하여 계율을 말하기도 하고, 궁극적 진리를 향하여 단박에 나아갈 수 없는 사람들에게 디딤돌을 놓아주듯 방편의 가르침을 베풀기도 하지만 모두가 자비심과 선의를 여의지 않습니다. 이 모든 일들이 본래 인연 따라 그렇게 되도록 되어 있습니다.

진정한 불제자는 남, 사람을 믿기보다 인연법을 믿습니다. 사실을 그것이 모든 사람을 믿고 구경에는 나와 남을 함께 온전히 믿는 길이기도 합니다.

옛날, 박정희 정권시절에 청담스님이 불교계 대표로 청와대의 만찬에 초대되어 갔습니다.

그 자리엔 다른 종교의 고위 성직자들 역시 와 있었고 만찬이 끝나갈 무렵, 돌아가며 각자 대통령과 정부 각료들에게 조언이나 덕담을 할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가톨릭과 개신교의 순서가 끝나고 마이크가 청담스님에게 돌아왔습니다.

“현재 우리나라 국민들 중에 제일 나쁜 놈들이 누군 줄 아시오? ”

“……”

“바로 가톨릭의 신부 놈들이오.”

금방 주위가 술렁거리고 누군가의 얼굴이 빨개졌습니다. 청담스님은 아랑곳하지 않고 신부나 가톨릭성직자들의 숨겨진 비리를 나열했습니다.

“그런데, 그 신부 놈들보다 더 나쁜 놈들이 누군 줄 아시오? 바로 개신교 목사놈들이오.”

이어 스님은 잘못된 목사들의 처신과 행태를 까발려 비판했습니다. 이번엔 더욱 분위기가 살벌해져서 그곳이 청와대만 아니었다면 당장 고성이 오가 판이 깨질 지경이었으나 스님은 태연했습니다.

“그런데, 그 목사놈들보다 더 숭악하게 못된 놈들이 있소. 누구겠소?”

“……”

“바로 중놈들이오.”

스님이 바로 그 ‘중놈’들의 작태에 대해 훨씬 힘주어 얘기를 풀어나가자, 장내의 험악한 분위기는 곧 다 풀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을 겪어보며 우리는 이미 사람 함부로 믿을 게 못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예같이 순박하지 않아 아무도 잘 믿으려 들지 않기 때문에 현대사회는 차츰 탈종교화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도 깊이 들여다보면 이제 봉건적인 의식의 감옥에서 벗어난 사람들이 신이나 권위적인 것들을 맹목적으로 이정하거나 추종하지 않게 된 탓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 교의가 전혀 강압적이거나 비합리적인 데가 없는 데다, 그 실천적 검증과 체험의 방법으로 수행의 길을 열어놓고 있는 불교만은 현대의 물질문명 속에서도 문명의 선구자들이나 지식인들에게 훨씬 폭넓게 검토되고 받아들여져 실천되고 있으며, 자기 종교가 불교라고 공언하는 사람들이 가속적으로 많아지고 있으니까요.

우리가 흔히 '신이 아닌 이상, 사람이니까 실수할 수 있다'는 말을 두고 쓰는데, 그 말은 신에게는 오류나 실수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암묵적으로 전제하고 긍정하는 표현으로 보입니다. 잘못된 통념이나 세계관은 그런 식으로 우리 뇌리를 파고들어 쉽사리 자리 잡고 우리 이성까지 점거해버리죠. 그러나, 왜 신이 실수하는 일이 없습니까? ​성경을 보면, 신의 결정적 행위가 온통 실수투성이로 보이지 않습니까? 그걸 믿는다면 오히려 인류사가 다 신의 실수로 점철된 역사로 보이지 않을까요?

‘신은 실수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신이니까. 신은 절대자이고 완전하니까.’ 이런 논리는 그 자체로 오류죠. 순환논법에 빠져있는 것입니다.

성경무오류설도 마찬가지죠. ‘성경의 말씀’은 한 글자도 오류가 없다. 왜? 하나님의 말씀이니까.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인지 어떻게 아는가? 성경에 그렇게 나와 있다.' 이런 식이잖아요?

성경에도 정말 깊이 있는, 좋은 가르침들이 아주 없다는 건 아니에요. 그런데 그건 금이 금광석 안에 온갖 잡석들과 함께 섞여 있는 것과 같은 것이죠. 금을 제외한 나머지는 털어버려야 좋아요. 다 순금이라고 주장하면 곤란하고 거북해집니다.

무엇을 믿어야 할까요?​

꼭 무엇인가를 믿어야 할까요? 물론 아무것도 믿지 않는다는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데카르트도 그의 ‘코키토Cogito’를 도출하기 앞서, 그 무엇도 확신할 수 없고 단지 모든 것에 대해 회의할 수 있을 뿐이라고 생각했잖아요?

부처님 재세시在世時에 어떤 장조범지長爪梵志가 찾아와 논쟁을 겁니다.​ 

당시 사상계의 일반적 동향이었나 봐요. 그런 대론은 매우 격렬하고 심각해서, 만일 패배하면 어떤 유파의 스승을 자처하던 사람이 자신을 추종하던 제자들을 다 잃어버리기도 했습니다.

범지는 브라만 계급에 속하는 수행자를 부르는 말이고, 장조長爪는 손톱이 길다는 뜻이니, 아마 머리털이고 손발톱이고 깎지도 않고, 극단적인 자유방임주의를 표방하고 가르치는 외도였을 것입니다.

먼저 범지는, “내가 만일 이 대론에서 지면 나 스스로 목을 베어 바치겠습니다.”라고 호언했습니다.

세존께서는, “그대의 교의는 무엇으로 종지를 삼는가?”하고 물으셨죠.

“나는 어떤 법도 받아들이지 않고 모조리 부정하는 것으로 교의를 삼습니다. ” 하고 외도가 대답하자 세존께서는, “모든 것을 다 부정하고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종지 자체는 받아들이는 것인가, 그것마저 부인하는 것인가?”하고 물으셨습니다.

그 물음 끝에 장조범지는 소매를 털고 물러나 가버렸는데, 제자들과 한참을 가다가 갑자기 돌아서더니, “돌아가서 세존께 사과드리고 머리를 베어 바쳐야겠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그의 제자들은, “저희가 보기엔 스승께서 보기 좋게 이기신 것 같은데 어찌 스스로 머리를 베겠다 하십니까?” 하고 의아했습니다. 그러나 그 범지는 결연하게 말했습니다.

“나는 차라리 지혜 있는 분 앞에서 머리를 베일지언정, 지혜롭지 못한 사람을 이기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아까 나의 주장은 두 경우에 다 지게 되어 있으니, 만일 그 종지는 받아들인다고 했더라면 뻔한 모순이 생기는 것이고, 반대로 그것마저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했더라도 종지 전체를 부정하는 꼴이니 미묘하게 내가 지고 마는 것이다. 그때 벌써, 내가 진 사실을 대각 세존과 여러 보살들이 알았을 것이다.”

범지는 세존께 돌아와 말했습니다.

“제가 아까는 깨닫지 못했지만, 그때 어떻게 대답했더라도 어떤 법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저의 교의는 모순을 피할 수 없고 제가 이미 진 것이니, 이제 세존께 참회하고 제 목을 베어 바치겠나이다.”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자비롭게 말씀하셨습니다.

“여래의 교법에는 논의에서 대패했다 하여 목을 베어 바치는 법은 없다. 그런 각오이면, 목숨을 여래께 바쳤다 생각하고 마음을 돌이켜 출가하라.”

이에 장조범지는 그의 오백 제자와 함께 부처님께 귀의하고 출가 수행하여 저마다 도과를 이루었습니다.

그 어떤 이론이나 교설이라 해도 일면의 타당성은 있을지라도 반드시 허점이 있을 것이기에 아무것도 믿지 않고 따르지 않는다는 사람들이 가끔 있죠. 그런 사람들이 대개 회의론이나  불가지론에 빠집니다. 하나의 주장으로 제법 객관적이고 독자적이고 비판적이어서 그럴 듯하지만 그런 견해에만 사로잡혀서는 진리의 길로 나아갈 수가 없죠. 아무리 논쟁하고 이론들을 깨부수며 그런 주장이 우월한 것처럼 자위할지라도 그로부터는 진리를 얻지 못하고 더구나 열반과 해탈은 성취할 수가 없습니다. 아무것도 믿지 않고 살아간다는 것도 능사는 아닌 거예요. 그 역시 자신의 소견에 집착하고 그것을 믿고 헛되이 거기 들러붙어 있는 것에 불과합니다.

자, 무엇을 믿어야 할까요?

인과를 믿어야 합니다. 인과를 믿는다는 것은 단지 그런 이론을 고수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일이며 그것을 증험해 가는 일입니다.

거기에, '정법 正法의 발원'이 뒤따라야 합니다. 값싼 믿음에 안주하지 않고 바르고 궁극적인 진리를 찾아 나서 그것을 증득하겠다는 서원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힘으로 당당하고 의연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누가 이거 안 믿으면 지옥에 떨어진다니까 말도 안 되는 것을 믿고, 이거 믿으면 재수 좋은 일 있을 거라니까 욕심에 눈이 어두워 뭘 믿는 척해서는 안 되죠.

내가 악의를 가지고 한 일이 아니면, 내가 한 일과 벌어진 일이나 상황을 무작정 연결시켜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제 정신 아닌 놈들한테 최면에 걸려, '아, 그래서 그랬나?' 하고 생각한다면, 그건 그런 짓으로 밥 벌어먹고 살아가는 교활한 사기꾼의 농간에 놀아나는 짓을 뿐입니다.

사소한 일도 요행을 바라거나, 신이나 타인의 권위가 무서워서 행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그것은 악행은 아닐지라도 어리석어, 뒷날 자신과 남에게 부끄러운 일이 되어버릴 테니까요.

인과를 다 부정하고 아주 안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죠. 우리의 일상과 주변이 온통 인과에 의해 지탱되고 있는데요. 밥을 먹으면 배고픔이 사라진다는 것, 쌀밥은 쌀로 지어야 한다는 것을 안 믿는 사람이 있겠어요? 무지한 사람도, 악인도, 외도의 삿된 소견을 가진 사람도 어느 정도는 인과를 믿고 살아갑니다. 과학을 신봉하고 그에 의지하여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 역시 과학이 철저하게 의거하는 것이 일정한 조건에서 원인이 있으면 반드시 동일한 결과가 뒤따른다는 인과율이라는 것을 모르지 않죠.

그런데, 부처님이 깨달아 가르치신 인과의 법과 사람들이 보통 믿는 인과율은 우선 그 정도에서 차이가 납니다. 사람들은 인과의 법칙이 ​인생 전체 혹은 생사를 넘어 세세생생 두고 작용하는 불변의 철리라는 것을 얼른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기억력이나 예지력의 한계를 가지고 있고, 시간을 꿰뚫어 살피지 못하기 때문에, 매우 한정된 시간 속에서 어떤 행동이 곧바로 그에 상응하는 결과를 가져오지 않는 예들을 많이 보기 때문입니다. 시절인연이 무르익어야 원인이 결실을 맺는다는 것을 철저히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것이죠. 또, 세상의 모든 단면들을 낱낱이 뜯어보기 어려울뿐더러, 매우 복잡하고 다양한 변수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빠르게 진행되는 인과관계들을 살피기에는 범인의 지혜가 너무 모자라기 때문이죠. 이것은 기상의 온갖 상황과 조건들을 다 고려하여 정확하게 일기를 예견하는 것처럼 어려운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기상의 상황과 일기의 변화는 전적으로 인과율에 따라 일어난다는 것을 누가 부정할 수 있겠어요? 사람들이 대개 자연계의 사물과 현상이 인과관계에 따라 존재하고 변화한다는 것은 쉽게 받아들이지만, 인생 자체가 혹은, 세상사 전체가 인과에 의해서 움직여간다는 부처님의 가르침은 얼른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대개 그런 이유들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태어나 성장하고 배우면서 사리事理를 분별하려고 애쓰고 이것과 저것의 상관관계를 파지하려고 끊임없이 노력합니다. 사실은 인과관계를 잘못 인식하고 잘못된 믿음에 사로잡히는 것 또한 그런 노력의 부작용이라고 볼 수 있죠.

우리가 충분히 지혜롭지 못하면 이 세상의 인과를 다 바르게 꿰뚫어 보지 못하기 때문에, 일의 앞뒤를 알 수 없고 그것이 미래에 대한 불안을 낳아요. 그러면 다른 사람의 말이나 가르침을 다분히 맹목적으로 받아들이고 거기 의지하려고 하는 성향이 강하죠. 어릴 때, 아직 철들지 않고 세상을 많이 살아보지 않아서 뭘 잘 모를 때, 부모님께서 가르쳐주시거나 친구들이 전해주는 말, 어른들이 하시는 말들을 별로 알아보려고도 하지 않고 거의 맹목적으로 받아들이던 것을 떠올려보면 쉽게 알 수 있어요.

그런데 누구든 차츰 철이 들면서, 자기 스스로 판단할 수 있게 되고, 이성에 의거해서 사유도 해보고 조사나 실험도 해봄으로써 어떤 것이 진리인지 아닌지, 즉 바른 인과관계인지 아니면, 그냥 미신적인 터부이거나 잘못된 오해인지를 가려보게 되잖아요? 사실은 그렇게 정말 진리를 향해 나아가기 위해서는 우리가 내면적으로 더욱 성숙하고 매우 이성적으로 되어야 한다고요. 그런데 사실은 많은 종교들이 사람들의 이성보다는 반이성에 호소해서 교세를 확장하고 이익을 누렸다고 할 수 있다는 말이에요.

모든 것이 인과에 의해서 이뤄진다고 해도 우리가 인과를 다 알지 못하기 때문에 어떤 일이 생겼을 때, 이것이 무엇 때문에 생긴 줄을 정확히 모르는 경우가 많죠. 그래서 엉뚱한 이유를 끌어다가, ‘이것 때문에 이 일이 벌어졌나?’ 하고 생각하게 돼요. 그러다가 그렇게 아주 잘못 단정하여 믿게도 되고, 매우 엉뚱하고 전혀 이성적이지 않은 확신으로 발전하여 나중에 진짜 원인이나 전체적으로 분명한 인과관계가 드러나도 잘 받아들이지 못하게 되죠.

예를 들어 어렸을 때, 아침에 검은 옷을 입고 간 날이면 그날따라 꼭 안 좋은 일이 생겼다고 해봐요. 친구에게 욕을 먹기도 하고 시험을 망치기도 하고, 세 번, 네 번, 다섯 번을 그랬다면 어떻게 생각하게 될까요? ‘아, 이 옷이 재수 없는 옷이구나. 이 옷만 입으면 나쁜 일이 생기는구나.’ 하죠. 합리적으로 생각하면, 검은 옷을 입은 것 하고 그날 나쁜 일이 일어난 것은 아무 인과관계가 없어요. 우연의 일치일 뿐이죠. 그런데 그게 여러 번 반복되면 우리의 분별심이고 그 사이에 어떤 인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 판단한다고요. 특히 우리가 어릴 때나 커서도 지혜가 모자라 뭔지 모르게 불안하면 한두 번만 그런 일이 있어도, ‘이 검은 옷 입고 가지 말아야지.’ 이렇게 생각하게 된다는 말이죠.

오비이락烏飛李落 아시죠? 어떤 가지에 까마귀가 앉아 있다가 날아갔는데 그 순간 배가 떨어졌어요. 그런 일이 세 번, 네 번, 다섯 번 반복되는 걸 보면 인간의 마음은 즉시, ‘아, 까마귀가 앉아 있다가 날아가면 배가 떨어지는 구나.’ 하고 어떤 이론이나 공식을 만들어내려고 들죠. 그런데 더 어리석으면 그 모습을 한 번만 봐도 '까마귀가 저렇게 앉아 있으면 저렇게 되니까 앞으로는 절대 까마귀를 앉지 못하게 해야지!'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는 거예요.

범죄를 수사하고 그 인과관계를 밝혀내서 범죄인을 처벌할 때에도 그 인과관계를 어느 선까지 적용할 것인지를 분명히 해야 해요. 복잡한 정황에서 많은 일들이 얽혀서 범죄가 발생했을 때 인과관계의 선을 긋는 것이 조금이라도 지나치면 안 되죠.

예를 들어 어딘가에서 누가 칼로 사람을 찔러 죽이는 사건이 벌어졌다고 해보자고요. 그러면 살인을 저지른 사람이 고의를 가지고 한 사람을 죽였다는 사실은 분명하죠. 그의 칼에 찔려서 사람이 죽었으니까요. 이건 매우 명확한 인과관계가 있는 거예요. 그런데 사람을 찔러 죽이는 데 칼이 매우 직접적으로 쓰인 도구라 해서, 칼이 있었기 때문에 이 살인이 일어났다. 그럼 그 칼을 만든 사람이 칼을 만듦으로써 애초에 원인을 제공한 것이다 하고, 그 사람을 살인죄나 살인방조죄로 처벌하려 들면 될까요? 그건 맞지 않는 일이죠. 어떤 것의 인과관계를 어느 선에서 정확하게 가려서 적용하고 시비를 논해야지, 아무 것이나 끌어다가, 주변에서 동시적으로 인연이 되었다든지 혹은 옆에 있었다고 해서 함께 처벌할 수는 없는 문제라고 말이죠.

 

어떻든 우리는 많이 부족한 중생들이지만 너나없이 세상살이 속에서 일과 일 사이의 인과관계를 파악하려고 매우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내면의 지혜가 자라나게 되죠. 깨달음을 얻거나 성불한다는 것은 그 인과율을 총체적으로 꿰뚫는 대지혜의 안목이 열리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누구나 그 길로 나아가야, 이 무지를 깨뜨리고 모든 인과에 어둡지 않은 대자유인이 될 텐데, 그러기 위해서라도 가장 근본적으로 중요한 것은 이 세상 모든 것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신'과 같은 초월자나 우연이 아니라 바로 인과율이라는 것을, 어떤 경우에도 바꿀 수 없는 대전제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제 친구가 들려준 얘긴데, 요즘은 좀 격조 있는 술자리에서  ‘건배!’나 위하여!’ 따위를 외치기 전에 돌아가면서 '건배사乾杯辭’라는 걸 한다고 하데요. 어느 날 건배사로 들은 얘기라고 합니다.

“이 세상에 꼭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없는 것이 하나 있다. 바로, ‘공짜’라는 것이다. 반면, 꼭 없는 것 같지만, 분명히 있는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내 마음 속의 그대’이다.”​

공짜가 없다는 것은, 모든 것이 인과대로 되어나가며 거기에 한 치의 오차나 헛된 것이 없다는 말이다. 인因이 있으면 언젠가는 반드시 과果가 따르고, 과가 있다면 반드시 그것을 불러온 인이 선행하여 있다는 뜻이죠.

‘내 마음 속의 그대’ 있음이 ​분명하다는 것은 뭘까요? 내가 나 아닌 것이나 남과 결코 나뉘어 있지 않고 모든 것이 서로 인연의 고리로 연결되어 마음 안에 있다는 이치입니다.

건배사로 쓰기엔 너무 아까운 법문이에요. 하하.

 

서두의 편지 보내신 불자님께 말씀드립니다.

 

불자님의 조카, 돌아가신 영가께는 깊은 조의를 표합니다. 인연 다해서 떠난 길이지만 다시 다른 좋은 인연을 만나, 부디 이 죽음의 고통, 때 아닌 이별의 괴로움이 아주 다하고, 영원한 열반락을 향해 함께 나아가는 길에 서시기를 불전에 축원합니다.

 

불자님도, 일말의 악의도 없이, 다만 혹시라도 주변에 닥칠지 모르는 변고에 대한 두려움과, 인과를 다 꿰뚫어 보지 못하는 무지로 인해 보낸 메일이 혹시 조카의 죽음을 부르지 않았나 하는 터무니없는 억측에 사로잡혀 괴로워하시지 말기 바랍니다.

 

언니나 조카뿐만 아니라, 불자님 자신도 그 정신 나간 메일의 피해자 아닌가요? 비명에 간 사랑하는 조카 때문에 얼마나 당황해하고 괴로우세요? 20명에게 전달해 보냈으면 약속대로 좋은 일이 일어나야지 왜 사랑하던 사람을 잃는 불상사가 생겨요? 내 딸 아니니까 내 일 아니고, 아무 연고 없는 남에게 생긴 일이라고 할 수 있나요? 누가 남이예요? 다 내 마음 속의 그대입니다.

 

설마, 언니가 그 메일을 또 다른 20명에게 건네 보내지 않아서 생긴 일이라고 생각하시는 건 아니죠? 기독교인인 언니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 불자이기까지 한 사람이 혹시라도 그렇게 생각한다면 정말 부끄러운 일이에요. 바른 인과법에 대해 더 공부하고 수행하시기 바랍니다. 나중에라도 생을 바꿔 조카를 다시 만났을 때, 생로병사의 곤경에서 별로 도움을 주지도 못하고 또 발만 동동 구르고 가슴만 아파한다면 불자가 된 보람이 어디 있겠어요? 우리가 불자가 되는가, 기독교인이 되는가, 혹은 다른 종교인이 되는가도 다분히 인연 따라 그렇게 됩니다. 자기 지혜가 충분히 깊어, 이 가르침이 나에게 맞는가 저 가르침이 나에게 맞는가를 판단해서 어떤 종교를 선택하는 사람은 정말 많지 않아요. 예를 들어 이슬람 문화권에서 태어났다면 의문의 여지없이 이슬람교도가 되어야지, 아니면 그 사회에서 살아갈 수가 없어요. 선택의 여지가 없죠. 그 정도가 아니어도, 어려서부터 엄마가 교회에 다니는, 모태신앙으로 태어난 기독교인이라면 훗날 엄마의 뜻을 거슬러 타종교인이 되기는 참 어렵죠.

 

모든 게 지난날의 인연을 따라 벌어져 가는데 우리가 이미 정해진 인연 속에서 살아가면서 지금 자기의 지혜나 의지로 어떤 판단이나 결정을 내려 결행하기가 참 어려워요. 할 수 있을 때, 작은 것이라도 소홀히 하지 않고 부지런히 좋은 인연을 심어가고, 지금 이미 작은 진리의 인연이 있으면 그 끈을 놓치지 않고 잘 따라가고 잘 증장시켜 가야 합니다.

 

우리가 정말 깊이 마음속에서 발해야 할 원 중의 하나가 바로 정법正法의 발원이에요. 어쩌다 지금은 불법을 만나고 바른 수행을 해나가게는 되었지만, 이것도 정말 아슬아슬한 일, 확률적으로 일어나기 정말 힘들고 힘든 일이에요. 이건 그나마 내가 전생에 그만한 선근을 심었고 불가와 인연을 맺어두었기 때문이지, 우연히 재수가 좋아서 되는 일은 전혀 아닙니다. 이 생에서 지금 내가 정법의 발원을 분명히 하지 않으면, 다음 생에서 내가 정법을 만나는 일이 아주 요원해질 수도 있죠.

그리고, 다시 강조하지만 불교의 인과법을 제대로 이해해야 해요. 더러 이 인연법을 숙명론으로 오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일어나는 상황들은 모두 과거로부터 결정되어 있어서 어쩔 수 없다는 거예요. 그런 것을 믿게 되면 점쟁이들이나 찾아다니게 돼요. 미래가 이미 결정되어 있으니 점쟁이에게 물어볼 수밖에 없는 거죠. 올해 재수가 있을 것인지, 재앙이 닥칠 것인지, 나는 모르지만 점쟁이는 알겠지 하며, 돈을 들고 가서 묻는 거예요. 그런데 그런 걸 알아서 뭐하겠어요? 좋은 일이면 그 일이 실제로 벌어져도 이미 알고 있던 뻔한 일이 되어버리고, 나쁜 일이라면 어차피 닥칠 일이라 막지도 못하면서, 그 일 닥치기도 전에 온갖 초조와 불안에 시달릴 텐데. 그걸 제 인생 어떻게 살지도 모르는 점쟁이한테 돈 줘가며 물어요?

불교의 인과법은 그런 결정론이 아닙니다. 지금 여기서 벌어지고 있는 일은 모두 내가 과거에 한 일의 결과, 마음이 지난날 희탐과 집착으로 원했던 바이지만, 언제나 새롭게 마음먹고 새롭게 행동하며 새로운 씨앗을 심을 수 있는 소지는 열려 있는 인과법이에요. 또 과거의 내 행위로 인하여 닥쳐오는 어떤 일도 지금 내가 받아들이는 자세나 태도를 바꿔 얼마든지 좋은 쪽으로 돌이키고 다시 방향 잡아갈 수 있는 인연법이죠. 여기 의지하여 우리는 이 생을 아주 잘 살아가야 합니다. 그 방향타를 내가 잡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인과법이 적용되는 세계는 모두 마음 밖으로 벌어진 환영의 세계지만, 그 환영을 꿰뚫어 본질인 연기의 법을 보면 상대적인 고락을 떠나 무루無漏의 절대적 안락, 열반을 얻게 되므로, 이 환영의 세계는 우리로 하여금 열반을 찾아 나아가는 길이 됩니다.

덧없고 공한 것이지만 이 생을 살며, 우리 모두 불생불멸한 자기 마음자리로 돌아가야죠. 거기엔 이별도 없고, 잘잘못도 없고 시비분별도 없어요. 영원히 헤어짐이 없는 그곳으로 돌아가 모든 그리운 것들과 궁극의 만남을 꼭 이루시기 바랍니다. 서로 잘잘못을 따질 일도 없고, 오직 감사해하며, 함께 기쁨만을 나누는 그 나라가 바로 우리 안에 있습니다. 그곳을 먼저 찾아내고, 조카를 거기로 초대하세요.


소식지 法華법화 2014 /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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