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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의해석]중세의 고문도구 및 고문방법

작성자▦에너지|작성시간03.03.14|조회수2,211 목록 댓글 1
@@ 아이언 메이드 : 서양 중세 때 사용된 고문도구의 일종으로 관과 흡사하게 생겼다. 그러나 내부는 사람의 몸에 꼭 맞는 홈이 만들어져 있으며, 그 뚜껑에는 날카로운 쇠못들이 박혀 있어서 안에 사람을 넣고 뚜껑을 닫으면 안에 있는 사람은 뚜껑에 박힌 쇠못에 찔려 죽게 했다.

그러한 쇠못을 급소부분, 눈이나 심장 등등에 해당되는 부분만 박는 경우도 있고, 아예 빽빽하게 쇠못을 박는 경우도 있다. 고문 방법은 이 관속에 사람을 눕혀 놓고 뚜껑을 닫을 듯 말 듯하게 올렸다 내렸다 하면서 자백을 강요했다고 한다.

@@@@ 아이언 메이드는 베르세르크 19권에서 모즈구스가 캐스커를 고문실에서 고문하려고 할때 나옵니다, 영화 "슬리피 할로우"에서도 나옵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권이 그다지 존중되지 않았던 중세에는 자백을 얻어내기 위한 고문도구나 고문법들이 발전을 했다.

가혹한 고문들은 일반적으로 반역자나 역모를 꾀했다가 실패한 자들에게 가해지는 것이 보통이었으나, 중세시대 서양은 악명 높은 종교재판이 그 고문법을 극대로 발달시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종교재판에서의 고문들은 그 자체가 비밀이었고 공개적으로 행해지지 않는 것이었으나 몇몇의 방법은 공개적으로 행해지기도 하였다.

콜린 윌슨의 "잔혹"에서는 처형의 잔혹함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처벌은 잉글랜드에서도 대륙에서도 항상 야만적이었다. 이것이 그 시대에는 사디스틱한 냄세까지 풍긴다. "교수형, 창자 드러내기, 사지찢기"의 사형 선고는 통상 정치범에 한정된다. 그러나 특유의 흉폭한 범죄자에게도 이것이 적용되었다.
죄인은 수레 뒤에 질질 끌려 처형장에 도착한다. 먼저 목을 절반 쯤 매달아 놓는다. 다음으로 배에서 창자를 끄집어 낸다. 죄인은 그대로 살아 있다. 눈 앞에서 창자를 태운다. 다음으로 몸을 네갈래로 찢는다. 여자 죄수들은 대개 산채로 태운다. 로프에 매달려서 치부를 보이는 것보다 이것이 좀 "점잖은" 방법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남녀를 불문하고 웃옷을 벗기고 매로 때리면서 거리를 끌고다닌 후 효수대(외부에서 볼 수 있게끔 목을 매다는 장치) 또는 교수대에 보내는 것이 보통이다.

@@@@ 죄인에게 창자를 끄집어 내는 고문은 멜깁슨 주연의 영화 "브레이브 하트"에서 나옵니다.

1699년의 법률도 절도죄는 한쪽 볼에 낙인을 찍어 죄상을 일반에게 주지시켰는데 도적질한 죄인은 대개 교수형에 처해지는 상황에서 아마 이적은 일종의 은전으로 베풀어진 듯 하다.

언론에 관련된 범죄 - 사이비 종교를 선전하는 - 는 효수대에 몸을 고정시키고 혓바닥에 구멍을 뚫는다. "재핏 크룩"이라는 사기꾼은 두 귀와 코를 절단당한 후 불에 달군 인두로 몸을 지지는 형을 선고 받았다.
"너털웃음의 잭 후퍼" 라는 사형 집행리는 먼저 등뒤에서 예리한 칼로 두 귀를 절단하고 높게 매달아 군중에게 공개한다. 다음에 가위로 크룩의 코를 자른다. 피가 흐르는 코 부위에 불에 달군 인두를 대면 크룩은 의자에서 심하게 몸부림 친다. 그래서 후퍼는 형의 속행을 중지시켰다고 한다.

대륙에서의 처형은 더욱 잔혹하였다. 신을 모독하는 자는 혓바닥을 뽑기 위해 불로 달군 집게를 사용하였다.
1757년 프랑스에서는 "다미앙" 이라는 미치광이가 루이 15세를 암살하려다 실패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정신이상 상태에서 저지른 범죄였다. 그는 "네 갈래로 찢겨" 죽었다. 형장으로 끌려가서는 우선 다리는 큰 망치로 부숴지고 가슴 부위는 불에 달군 집게로 찢긴 다음 거기에 아연을 부었다. 다음에 팔과 두 다리는 각각 네마리의 짐수레 말에 묶여 졌다. 말은 각기 다른 방향으로 향하고 말에 채찍을 가한다. 그러나 네 마리의 말로는 몸체가 그리 쉽게 찢어지지 않는다. 말의 수를 더 늘린다. 그리고 집행리가 뼈마디를 미리 부러뜨려 놓아서 겨우 목적을 달성하였다. "다미앙"은 한쪽 팔이 떨어져 나가기 가지는 의식이 있었다. 처형의 다음 단계에서는 그는 흥미진진한 눈으로 일의 진행을 보고 있었다. 그러나 처형중에 머리털은 순백색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 "다미앙"은 정신이상자 답게 자신의 몸이 찢기는 것을 감상한 듯 하군요.
처형이나 고문 방법을 일반에게 공개한것을 보면 저는 로마의 콜로세움이 생각납니다. 그 당시 로마는 혼란기와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불만이 많은 시민들을 달래기 위해(귀족들에게는 오락용으로) 잔혹한 장면을 보여줌으로써 그들을 불만을 달랬다 하는데요. 중세의 고문과 처형을 공개하는 것도 타인에게 고통을 가함으로써 군중들의 불만을 해소하게 하기 위함이 아니었나 합니다.
그에 비해 우리 선조들의 고문과 처형 방법은 너무나 관대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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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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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광전사(狂戰士) 베르세르크 | 작성시간 03.04.09 능지처참은 물론이거니와 울나라 선조들의 처형방법은 거의 대부분 중국의 잔혹한 처형법을 그대로 전수 받았다함.... 따라서 결코 관대하지 않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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