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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미술의 계보1(19세기 후반) 象徵主義, Symbolisme 프랑스 시단(詩檀)에서 일어난 상징주의 운동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1885년 부터 나타난 화가․조각들의 태도 혹은 다소 느슨하게 조직된 운동의 한 경향. 상징주의는 인상주의에 대한 반작용으로 나타났으며, 쿠르베에 의해 공식화 된 '사실주의의 원리'에 반발하였다. 쿠르베가 세운 원칙은 그의 말 - "회화는 본질적으로 구체적인 예술이다. 그것은 추상적 대상은 회화의 영역에 속하지 않는다"- 에 잘 나타나 있는데 이러한 회화 이념에 대한 반발로 시인 장 모레 아스는 《피가로》지 1886년 9월 18일자에 '상징주의 선언문'을 발표했다. 그는 예술의 본질적 원리는 '사상에 감각적 형태를 씌우는 것'이라고 선언했다. 상징주의의 목적은 물질셰계와 정신세계 사이의 갈등을 해소하는 것이었다. 상징주의의 목적은 물질세계와 정신세계 상이의 강증을 해소하는 것이었다. 상징주의 시인들은 시적 언어를 내면생활의 상징적 표현으로 여겼으므로 화 가들에게도 신비와 마술 등을 시각적으로 표현해 줄 것을 요구했다. 상징주의의 이론적 기반은 고갱 후원자 모임의 열광적인 회원이었던 평론가 알베르 오리에에 의해 1891년 3월《메르퀴르 드 프랑스》지에 발표된 논문 회화에 있어서 상징주의에 의해 기초되었다. 그는 이 논문에서 예술 작품을 ① 사상이 있어야 한다. ② 예술은 사상을 형식으로 표현하는 것이므로 상징적이어야 한다. ③ 예술은 일반적인 이해를 위한 양식으로 여러 형태와 기호를 제세하므로 종합적이어야 한다. ④ 예술이 묘사하는 대상은 객관적인 것이 아니라, 주관에 의해 인지된 사상의 표지이므로 주관적이어야 한다. ⑤ 그러므로 예술은 결과적으로 장식적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장식적인 그림이란 동시에 주관적․ 종합적․ 상징적 사상적인 표현에 다름아니기 때문이라고 썼다. '종합적'이란 말은 종종 회화의 상징주의 운동과 시의 상징주의 운동을 구별 하기 위해 사용된다. 그리고 적어도 어느 부분은 상징주의 운동과 밀접한 관 련을 갖고 있는 나비파 화가들의 작품에도 사용되는 단어이다. 나비파는 《상 징주의로서의 세잔느》(1907)를 쓴 이론가 모리스 드니에 의해 상징주의자들로 간주되었었다. 그는 상징주의에 대해 "본래 신비적이거나 이상주의적인 운동 은 아니다. 이것은 풍경화가와 정물화가들에 의해 시작된 것이지 영혼을 그리 고자 하는 화가들에 의해 시작된 것은 역시 아니다. 표현된 주체가 우리의 정신 상태를 일깨우는 것이 아니라 작품 그 자체가 최초의 감각을 전달하고 감정을 영속시킨다. 모든 예술작품은 어떤 경험된 감각의 혹은 더 빈번하게는 심리적 사실의 전위, 열정적인 등가물, 희화이다."라고 말했다. 상징주의와 상징주의자들의 예술에 대한 개관은 여러 간행물을 통해 출판되 었다. 《데카당》,《보규》,《상징주의자》가 1886년,《메루퀴르 드 프랑스》가 1891년에 출판되었다. 상징주의적 태도를 명백하게 드러냈던 화가로는 다음과 잩은 사람들을 들 수 있다. 샤반느는 '명료한 사상 각각에는 그것을 번역하게 하는 시각적 사고가 각각 따른다' 고 믿었다. 르동은 모리스 드니에 의해 '회 화의 말라르메' 라고 불리었는에 자신의 목적을 '인간의 감성을 아라베스크한 것으로 변형시키는 것'이라고 천명했다. 화가 모로는 마티스, 루오, 다른 야수 파 작가들의 스승이었다. 카리에르는 몽환적․ 문학적 내용을 무채색조로 그린 화가였다. 상징주의자 들은 새로운 회화 양식을 창조하지는 못했다. 그들은 예술적 형긱보다는 시적 사상의 표현, 마술(신비), 혹은 종교애호주의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인 절충주 의 혹은 개인주의자들이었다.
印象主義, Impressionisme
19세기 후반 프랑스에서 일어난 회화운동, 인상주의는 단일한 이념이나 명백 한 원리를 갖는 유파라기보다는 거의 자연 발생적으로 형성되었다. 최초의 중심 인물은 모네, 르느아르, 시슬리, 바질 등으로 이들은 마르크 글레이르의 제 자들이었으나, 1863년 마네의 전시회 이후 아카데믹한 교습에 불만을 갖고, 피 사로, 세잔느, 모리조, 기요맹과 친교를 맺고 몽마르트르의 카페 등에서 정기 적으로 모임을 가졌다. 이후 드가와 마네, 비평가 테오도르 뒤레 및 조르주 리 비에르도 합세하고, 화상 뒤랑뤼엘의 후원을 받게 된다. 1973년 살롱이 피사 로, 모네, 르느아르, 세잔느, 그리고 시슬리의 그림을 거부하자, 이것을 계기로 이듬해인 1874년 4월, 사진 작가 나다르의 작업장에서 자신들의 앵데팡당 전 시회를 개최하였는데, 이를 자칭 '무명 화가 및 조각가 판화가 예술가 협회전' 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출품작 중 모네의 <인상, 해돋이>를 인용하여, 신문기 자 루이 르로이가 《르샤리바리》지에서 이들 모두들 '인상주의자'라고 조소적 인 의미로 명명한 것이 후에 그들 자신에게도 그대로 받아들여져 일반화되기 에 이르렀다. 이들에게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기는 어려우나 대체적으로 아카 데미의 전통 교육과 낭만주의의 기본 이념에 반대하는 성향을 보이고 있었다. 그들은 예술가의 정서상태보다도 오히려 자연 혹은 삶의 편린들을 가능한한 객관적이며 과학적인 정신에 의해 기록함을 예술의 제일의 목적으로 삼는 사 실주의의 태도에 동조했다. 이 운동은 19세기 후반에 널리 보급되었던 과학적 사실주의의 한 일환으로 볼 수도 있으나, 그들의 예술관은 사회주의 리얼리즘 과는 달리, 사회의 개혁에는 관심을 드지 않았다. 그들의 주제는 매우 다양했는데, 마네는 18세기 전통적 주제들을 사실적으로 변형시켰고, 르노아르는 귀여운 여인이나 아이들, 탁부, 재봉사들을, 시슬리, 피사로, 모네는 주로 풍경에 관심을 보였다. 그들은 형태 구성을 피하고, 마치 카케라가 우연히 한 장면을 찍은 것처럼 즉각적인 시각적 인상의 효과를 전달 하려고 했다. 그렇지만 우연성의 인상응 의도적으로 계획된 것으로서 예컨대 드가는 현장에서의 스케치를 자신의 작업실에 와서야 비로소 그림으로 구성했다. 마네는 1870년 이후에야 외광파로 전환했다. 르노아르의 방향 전환은 검은 음영과 윤곽선을 배제하고 '색채 분할기법' 혹은 점묘법, '아롱다롱한 색채계' 등을 도입한 데서부터 시작된다. 풍경화는 이제 망막의 실제 이미지를 재생하 고 밝은 광선에 비친 생생한 장면의 등가물을 그림물감으로 재창조하는 행위 가 되었다. 음영은 회색이나 검정색이 아니라 대상의 보색으로 칠해지고, 윤곽 선을 배제함에 따라 대상의 입체성이 상실되며, 따라서 인상주의 회화는 빛과 대기의 회화, 지시색과 반사색의 유희로 되었다. 이러한 새로운 기법은 바르비 종파의 디아스 데 라 페냐의 영향 아래 1860년 말, 르노아르에 의해 오입되어 1870년대 초 피사로, 모네, 시슬리에 의해 채택되었던 것이다. 또한 이들의 풍 경화에서 빛과 대기를 통해 표현된 기후와 계정 등의 효과에 대한 민감성은 콘스타블과 터너에 의한 풍경화 양식에서 영향받은 바가 컸다. 그리고 전통적 인 다갈색 대신 흰색이 초벌칠 된 캔버스 위에 혼합되지 않은 그림물감을 사 용하는 필법, 검정색의 배제 등은 짖접 관찰에 기인한 것이었다. 이것은 쇠라 등 신인상주의의 화가들이 점묘법에 의해 과학적 기초를 획득하고자 한 기법 이었다. 모네는 인상주의 개념에 일관되게 충실했던 거의 유일한 화가인데 점 차 빛과 대기에 몰두, 팔레트 위에서 물감을 섞지 않는 대신 색채를 분할하여 공간을 해체하는 등 인상주의 기법의 한 전형을 개척했다. 한편, 1870년대에 인상주의 그르보가 유대를 맺었던 세잔느는 더 이상 우연 적인 장면을 재생하는데 관심을 갖지 않고, 한 장면의 영속성을 보유케 하는 형태, 연관들에 대한 그 자신의 생각을 전개했다. 르노아르 역시 1880년대에 오면 인상주의의 주된 특징을 포기하기에 이른다. 실재의 우연적 현상보다는 그 영속적 구조에 대한 관심은 쇠라와 세잔느로부터 입체파, 그리고 그 이후 에 이르기까지 전개되었다. 인상주의 이론에 의해 제기된 과학적 리얼리즘은 그 이후의 미술 운동의 흐름에서 퇴조하고 말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상 주의는 근대 예술 이론을 전개하는 출발점으로서 여전히 중요한 위치에 있다.
新印象主義, Neo-Impressionisme
쇠라, 시냑 등을 중심으로 행해진 점묘주의등의 이론과 수법 및 그 운동을 말한다. 인상주의가 사용한 기법을 과학적으로 더욱 발전시키면서도 동시에 인상주의의 경험주의적 사실주의에 대한 반발, 고전주의적 정신의 부활을 꾀 한다는 기치하에 쇠라가 1884년 5월 앵데팡당전에 출품한 <목욕하는 사람들> 을 보고 비평가 펠렉스 페네옹이 신인상주의 이렇게 이름을 붙였다. 당시 25 세이던 쇠라는 거기서 나중에 이 운동의 이론적 대변자 역할을 한 시냑을 만 나 함께 '앵데팡당 미술가 협회'라는 새로운 그룹을 만들었다. 당시 22세이던 젊은 비평가 페네옹은 같은 해, 이 운동을 돕기 위해 《앵데팡당》을 창간했 다. 1885년에는 시냑이 피사로를 이 운동에 참여시켰으며, 앙리-에드몽 크로 스(1856~1910), 막시밀리앙 콕스(1858~1941), 앨버트 뒤브와-필레(1846~ 1890)등이 이 운동을 뒤따랐다. 반 고호, 툴루즈 로트렉, 고갱 등도 한때 여기 서 영향을 받았다. 점묘주의 혹은 분할주의는 신인상중의가 사용하는 독창적인 테크닉의 기반을 이루는 것으로써, 캔버스에 색칠을 해 나갈 때 순색만을 사용하되 이를 일체 뒤섞지 않으면서 작은 점으로 찍어나가는 방법을 말한다. 이 경우 색조의 순 도는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보는 이의 망막 위에서 중간색이 형성되는 효과를 낳게 된다. 이 방법은 와토, 들르크루아, 터너 등이 이미 사용하였으며, 인상주 의자 중에서는 르노아르가 최초로 사용했고, 헬름홀츠와 세브레이유의 색이론 에 익숙해 있던 모네는 상당히 체계적으로 사용하였다. 점요주의하는 말이 처 음 사용된 것도 르노아르, 모네가 관련되는 한에서였으며, 쇠라 등의 신인상주 의 화가들은 이러한 기법을 보다 과학적으로 발정시킨 자신들의 기법에 '점묘 주의' 대신 '분할주의'라는 용어를 더 어울리는 것으로 생각했다. 1886년 이후 쇠라와 그의 동료들은 젊은 과학자이자 미학자인 샤를르 앙리의 견해-그는 1885년'과학적 미학 입문'이라는 표제로 《현대》에 대단히 세련된 예술 이론을 선보였다-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였으며, 1887년부터 1891년 사이 쇠라는 과학적 이론들을 표현적이고 정서적인 선과 색조로 환원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탐색해 나가면서 전통적인 아카데미 이론과의 접목을 시도하기도 한 다. 회화적인 여러 요소의 과학적 배치가 정서나 정조를 이끌어 낼 수 있다ㅡ 는 믿음은 푸생에 의해 일찍이 표명된 바 있으며, 후일 아카데미의 기본 학설 로 받아들여지면서 샤를르 르브룅, 앙드레 펠리비앙에 의해 유행되었다. 색채 분할 등 인상주의의 기법을 더욱 체계화시키는 동시에, 신인상주의자들 은 인상주의자들의 경험주의적 사실주의에 정면으로 대비되는 정신, 즉 그림 이란 신중하게 고려되고 계획될 수 있으며 과학적으로 계산된 효과가 예전․ 지향될 수 있다는 사고를 도입시켰다. 세잔느와 더불어 쇠라가 현대 회화의 혁신적 인물로 취급되는 것으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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