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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쉼터

눈을 기다리는 사람들

작성자가온|작성시간23.09.30|조회수17 목록 댓글 0

눈을 기다리는 사람들(1995) / 이정림

 

그해 겨울, 나는 안국동 네거리에서 조계사 쪽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간밤에 내리던 눈은 아침에 일어나 보니 말짱하게 그쳐 있었지만, 냉랭한 날씨는 눈을 땅바닥에 꽁꽁 얼어붙게 만들었다.

 

나는 그날 아침, 매우 기분이 좋았다. 눈이 온 다음 날의 청량함, 햇살마저도 냉기를 띤 듯한 신선함, 그런 겨울 날씨는 박하사탕을 입속에서 녹일 때처럼 가슴 속까지 화한 느낌을 들게 하기 때문이다.

 

추운 겨울은 차가운 미인과도 같다. 나는 왠지 아름다움에는 차가운 맛이 배어 있어야 더욱 아름다울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그러기에 크리스털의 차가운 아름다움을 좋아하고, 대리석의 서늘한 느낌을 좋아하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기분 좋은 아침에, 몸은 따뜻한 외투에 감싸여 있지만, 가슴을 펴고 깊숙이 그 차가운 공기를 들이마셨다. 내 몸속의 뜨뜻미지근한 것들을 깨긋이 몰아내기라도 할 것처럼,

 

초겨울에 새로 옮긴 직장은 내게 일에 대한 욕구를 새롭게 불어넣어 주었다. 새 직장과 새 동료들은 언제나 새로운 흥분을 안겨주기 때문에, 나는 직장이 바뀌는 것에 전혀 두려움을 느끼지 않았다. 그것은 새로운 것에 대한 설렘과, 미지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이 내 정신을 바짝 긴장시키기 때문일 것이다.

 

그날 나는 새 직장에서 처음으로 일을 하러 나가는 길이었다. 길바닥은 차가운 햇살에 유리알처럼 빛을 뿜어대고 있어, 하이힐을 신은 내 발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땅만 내려다보며 조심조심 발걸음을 옮겨 딛다가 무심히 눈을 들어 앞을 바라보니, 저만치서 한 남자가 걸어오고 있었다.

 

며칠 전에 인사를 나누고 겨우 낯을 익힌 그 사람을 길에서 우연히 만났을 때, 나는 그 자리에 얼어붙듯 서버렸다. 그리고 갑자기 볼에 닿는 공기가 따뜻하게 느껴졌다.

 

이런 내 마음이 그에게도 전해졌던 것일까. 그는 불쑥 내 손을 잡았다. 그것은 정말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무엇이 그로 하여금 내 손을 잡게 했을까. 남자도 눈의 시정(詩情)에 약한 것일까. 그는 놀라 당황하는 나에게 틈도 주지 않고, 등을 돌려세워 앞장을 섰다.

 

그래서 우리는 갈 길이 서로 다름을 알면서도, 나란히 손을 잡고 안국동 길을 올라갔다. 사무실까지 아주 짧은 거리를, 나는 마치 영원한 길을 걷는 사람처럼 그와 하나가 되어 걸었다.

 

그 해 겨울, 그 첫눈은 갈 길이 다른 사람들을 잠시 하나의 길로 걷게 만들었다. 그러나 둘이 손을 잡고 걸어간 그 길이 그렇게 짧았던 것처럼, 우리가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은 늘 짧기만 했다.

 

눈이 아쉬운 것은 그것이 오래 남아있지 못한다는 데 있다. 눈이 온 날 만난 사람들이라 그랬을까, 우리도 그런 눈처럼 서로에게 오래 머물러 있을 수 없다는 것, 그것은 목이 타는 갈증과도 같았다. 갈증 같은 그리움은, 마셔도 마셔도 해결되지 않는 목마름처럼 그 무엇으로도 메울 수 없는 아픔이 되었다.

 

내 젊은 날은 그런 아픔과 갈등과의 끝없는 싸움이었다. 그런 싸움에 지쳐 일어날 수 없게 되면, 나는 나로부터의 영원한 탈출을 꿈꾸었다. 나로부터의 영원한 탈출 - , 그것은 죽음의 다른 이름이지 않은가. 나는 밤마다 기도했다. 내일 아침 눈을 뜨게 하지 말아 달라고. 그리고 날마다 이부자리를 펴면서, 죽음의 의식을 함께 거행했다.

 

잠들기 전에 / 가슴 위에 손을 얹고 / 나는 빕니다 / 이대로 잠들면 깨어나지 말기를!

잠들기 전에 / 이마 위에 손 놓고 / 기다립니다 / 잠들기 전에..... 잠들기 전에...,

- 閔映 : <엉겅퀴꽃>

 

시인은 왜 이런 기도를 드렸을까. 그도 나처럼 산다는 것이 괴로움이요 모순이었을까. 잠들기 전에 똑같은 기도를 올리는 사람이 어딘가에 있다는 사실이, 내겐 작은 위안이 되었다.

 

신은 정녕 존재하는 것일까, 아니면 무능한 것일까, 신은 밤마다 올리는 내 기도를 들어주지 않았다. 신이 내 기도를 들어주지 않는 대신, 세월이 내 손을 잡아 주었다. 세월은, 아픔은 물론 집착까지도 보이지 않는 손으로 잠재워 주었다.

 

그 세월 앞에, 이제 나는 잔잔한 바다처럼 조용하다. 갈등의 파도는 잠자고 고통의 폭풍은 가라앉았으니, 나는 지금 죽은 듯이 평온하다. 앞으로는 내게 그런 영혼의 떨림은 두 번 다시 찾아오지 않을는지 모른다. 그런데 이 더 없는 정복(淨福)이 왜 가끔 한가닥 서글픔이 되어 가슴을 시리게 하는 것일까.

 

겨울이 오면, 시린 가슴으로 눈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에겐 그 기다림이 곧 꿈이요 아름다움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 마음속의 겨울은 언제나 안국동 네거리에 눈을 내리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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