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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영상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졌다는 의미는 꿈을 꿀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말이다. - 빌 존슨

작성자순례자|작성시간26.06.19|조회수18 목록 댓글 0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졌다는 개념에서 가장 자연스러운 부분 중 하나가 꿈을 꿀 수 있는 능력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인 것이다. 하지만 많은 성도들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려는 시도 가운데, 그분께서 주신 바로 그 능력을 죽여 가고 있다. 그들은 이렇게 항변한다.

 

"하나님을 정말 기쁘시게 해드리려면 내 자아와 관련된 모든 것을 제거해야만 해요!"

 

  많은 사람들이 이 말을 영적인 것으로 받아들이지만, 사실 기독교보다는 불교의 영성에 가깝다. 우리가 오랫동안 이런 식의 사고를 하다 보면, 결국 중성적인 신자가 되어 버린다. 자기 절단은 육체적인 것이 아니라 해도 변태적이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허락하신 것들을 잘라내려고 할때마다 우리는 성경과 무관한 영성의 형태 속으로 들어가게 되며, 우리가 참으로 효과적인 증거를 하지 못하도록 하는 영을 돕는 것이다. 부활한 사람을 십자가에 못박고는 그것을 제자 훈련이라 부르는 것은 지혜롭지 못하다. 십자가는 새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옛 사람을 위한 것일 뿐이다(롬 6:5-9).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기도하기도 한다. “제 것은 하나도 없이 모두 주님의 것으로 만들어 주십시오.” 우리가 태어나기 전 하나님께는 아무도 존재하지 않았고, 그것을 좋아하시지 않았다. 주님께서 우리를 지으신 것은 그분의 기쁨을 위함이었다. 더 나은 기도는 이러한 것이다. “제 모든 것을 주님의 모든 것으로 덮어 주십시오!”

 

  세례 요한의 말을 살펴보라.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이 구절도 자기비하형 기독교를 뒷받침하기 위한 것으로 오용되는 경우가 흔하다. 문맥을 살펴보면, 요한이 예수께 바톤을 넘겨드리는 상황이다. 요한이 할 일은 메시아의 길을 예비하는 것이었다. 그는 이제 구약적 예언 사역을 마감하고 그 길에서 나와야 했다. 예수께서는 모든 선지자들이 공표한 것들을 성취하시고 지구에 대한 하나님의 현저한 통치권을 일으키셔야 했다. 세례 요한이 예수께 바톤을 넘겼고, 예수께서는 그 바톤을 우리에게 넘겨 주사 우리가 흥할 수 있게 하셨다.

 

  우리의 가치와 정체성에 대한 이러한 혼선은 부흥 중에 심각하게 많이 나타나는데, 성령이 부어지면 항상 우리의 죄성에 대한 자각이 커지기 때문이다. 고백과 회개를 담은 아주 위대한 찬송들이 그러한 시기에 쓰였다. 하지만 우리의 죄악과 무가치함에 대한 계시는 등식의 절반에 불과하다. 대부분의 부흥은 이 지점을 지나가지 못하고,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역사가 삶의 형태가 되기까지 지탱하지를 못한다. 부정적인 것에 튼튼한 것을 건설하기는 어렵다.

 

  등식의 나머지 절반은 우리를 위하시는 주님께서 얼마나 거룩하신가, 그리고 그분 덕분에 우리가 어떤 존재가 되었는가다. 이것을 깨달으면, 우리는 믿음을 통한 구원의 목적을 받아들이며 우리의 정체성도 변하게 된다. 어느 지점에 이르러 우리는 단순히 ‘은혜로 구원 받은 죄인들’의 상태를 뛰어넘게 된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신분을 깨닫고 살아가는 법을 배울 때, 우리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행적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교회사 대부분 가운데 사람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헌신이라는 미명 아래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들, 은사들, 갈망들을 빼앗겼다. 이처럼 박탈 당한 형태의 기독교는 성도들로부터 사역을 없애 버리고, ‘사역자들’이라 불리는 일부 특권 계층의 그리스도인들만 감당할 수 있도록 사역을 강등시킨다. 일반 신자들의 역할은 대중 사역을 하는 이들을 재정과 감정으로 후원하는 것으로 축소된다. 꿈과 갈망을 성취하지 못한 채 일하는 것은 목적 없이 타성적 일상을 높이며 그것을 고통이라 부르는 종교의 영과 손잡는 일이다. 사역을 진척시키기 위해 시간과 물질을 드리는 영예를 평가 절하해선 안 되지만, 그것에 대한 강조가 결코 각 사람이 하나님께 받은 꿈과 갈망을 실현함으로써 복음을 창조적으로 표현하는 일을 막아선 안 된다.

 

  부전자전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만물의 창조주이시며 모든 좋은 은사들을 주시는 분이시다. 주님의 자녀들은 그분을 닮아야 하는데, 그것은 곧 창조적이어야 한다는 의미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발명과 예술 표현에 있어서 주도적인 것은, 교회가 잘못된 영성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것은 왕국을 살아가는 사람의 참된 세계관, 즉 거듭난 생각이 아니다. 거듭난 생각을 가진 우리는 효과적인 증거를 위해 왕의 통치권이 사회 전반에 실현되어야 함을 이해한다.

 

  왕국적인 사고 방식을 가진 사람은 세상의 압도적인 필요를 보고 이렇게 말한다. “이 문제에 대한 해법이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주님의 신비의 영역에 대해 합법적으로 접근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제가 그 해답을 주님께 구하겠습니다!” 왕국적 관점으로 우리는 요셉과 다니엘이 그랬던 것처럼 왕들에게 해답이 될 수 있다.

 

  하나님과 더불어 꿈꾸는 자유를 얻기 위해 우리는 동역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참된 신자의 갈망은 결코 하나님과 동떨어질 수 없다. 우리의 목표는 하나님의 생각을 결정하는 방법을 찾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무엇을 넣어드려야 하는 필요가 그분께는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우리는 주님을 올바로 증거하려 해야 한다. 직관적이고 정확하게 주님의 마음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 하나님을 진실로 사랑하는 사람들의 열정이다. 주님의 마음은 모든 사람을 구속하고자 하는 것이며, 주님께서 선하심을 펼쳐 보이시기 위해 사용하시는 도구는 영광스럽도록 광대하여, 모든 사람들의 마음 깊은 필요에까지 향한다. 오직 주님의 거룩한 지혜만이 그 도전에 맞설 수 있게 한다.

 

  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꿈에 대해 배우는 것이 우리의 시작점이다. 꿈을 꾼다는 것은 값비싼 행위일 수 있다. 인류를 구속할 아버지의 꿈에 그분의 아들의 생명이라는 값이 요구되었음을 안다. 그러나 주님의 꿈 안에서 그분과 동역하면 우리에겐 그분처럼 꿈꿀 수 있는 새로운 능력이 주어질 것이다.

(빌 존슨 『하나님과 꿈꾸기』고병현 옮김. 서울: 다윗의 장막, 2013. pp. 5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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