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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수 ㅣ 글 올림

‘이해(理解)하라는 말’의 이해

작성자은하수|작성시간23.08.16|조회수61 목록 댓글 2

이해(理解)하라는 말의 이해

 

불법(佛法)을 듣다보면 혼동이 오는 단어가 하나 있습니다.

바로 현대적 강독에서 강조되는 ‘이해’(理解)란 단어가 그것입니다.

우리는 이해를 중시하지만, 대부분의 다른 분들의 설법에서 이해 한다는 말은

“아직 엉뚱한 길로 가고 있다는 뜻”으로 통하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저 역시 이것 때문에  혼동이 온 적이 있습니다.

세간(世間)의 일에서 이해가 중요하다는 말에는 누구나 수긍을 합니다.

그러나 출세간(出世間)의 마음 문제를 다루는데 있어서 이해라는 말은

마치 자아의 분별은 나쁜거니, 분별을 버려라 하는 말과 비슷한 뉴앙스였습니다.

 

진실을 알아 가는데 왜 “이해(理解)를 하면 그르친다”는 설법들이 많은 것인지

때때로 생각해 보았습니다.

 

나름대로 이유가 있음을 알았습니다.

현대적 강독에서 밥통 스피커님이 이해를 강조하시고, 원효의 대승기신론 등에도

이해를 강조하는 일은, 이미 단일의식(일심)의 관점이라는 정견(正見)을 충분히 납득함으로서

오는 정견을 바탕으로 이해를 하라는 것이기에 잘못 될 일이 하나도 없다싶습니다.

오히려 깊은 이해는 바로 깊은 믿음으로 연결되기에

이해란 정견을 공고히 해가는 과정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

신해행증(信解行證)이라는 말 속에서도 해(解)가 이해를 뜻하는 말이죠.

 

그런데 왜 일반적인 다른 분들의 설법을 우연히 듣다보면 “이해하면 그르친다”는 식의 설법을

접하게 됩니다. 이해란 마치 잘못된 알음알이를 궁글린다는 인상을 짙게 받았습니다.

지금도 일반 설법에서 많이 접할 수 있죠.

 

알고보니 그럴 수 밖에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정견이라는 말은 제법 오르내리면서도 정견에 직접적으로 맞닥뜨리는 말인

單一意識, 佛性, 眞如, 自性, 法身, 一心 이런 것에 대해서는

깊은 공감을 담은 내용을 전달하지 못하다 보니,

관념적이고 피상적 이해에 그쳐 있는 불자들에게 이해하라는 이야기는

결국 불자 각자들이 제 각각 가지고 있는 앎의 수준에 따라

이렇게 저렇게 자기 중심적 해석하는 것을 자신의 이해로 삼으라는 말과 같기에

 

이것은 결국 정견하고는 거리가 멀어지는,

그야 말고 자기 식의 알음알이가 되어버릴 가능성이 커지기에,

이해 한다는 일이 오히려 진실과 멀어질 수 있다 보니 그 사실이 조심스러워,

차라리 “이해하면 그르친다”고 가르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우리 現代的 講讀에서도 만일 우리가 단일의식(本覺)에 대한 깊은 이해 없이

시각과 불각에 대해서 알고 있다면 제대로 된 정견은 어려울 것이기에

그 경우라면 이해하라는 말이 오히려 본의 아니게   엉뚱한 길로의 가리킴을

유도하는 우를 범할 수도 있겠다 싶었습니다.

 

 

진여니 본각이니 참나니 불이(不二)니 중도(中道)하는 여러 말들이 항간에 많이 쓰이지만,

현대적 강독에서 처럼 단일의식의 위치, 갯수, 영혼, 윤회의 진실, 대리인, 주객없음,

의식의 변성작용(變性作用), 깨달음 체험의 허구, 심지어는 맥거핀, 올가미까지

세세하고 명쾌하기 다루며 單一意識의 觀點이 무엇인지 다양하면서도 깊이있는 가리킴을 주는 곳은

사실상 거의 찾아 보기 힘든 현상황 아닙니까?

 

이 모든 것이 정견을 위한 이해라고 볼 수 있는데

다른 유명하시다는 분들의 설법을 들어보아도 그런 문제들을 다루기는 하지만

애매모호하고 옛 것을 답습하는 정도인데다가 부분적인 이해에 도움을 줄 뿐이어서

대부분은 마음 속 깊이 와 닿지는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러니 이런 상태에서는 이해를 강조한다는 것이 무리가 될 수 있는 것이지요.

가뜩이나 중생의 마음이란 자기 편리한 식으로 자기합리화 하며 생각하고 이해하는 데는

다들 귀재에 가까우니 말입니다.

 

일반 설법에서는 막연히 네가 아직 깨닫지 못했으니 이해를 못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깨달음이란 이해를 넘어선 것이기에 이해도 분별도 버리고 비워야 한다고만 합니다.

 

현대적 강독 같은 근원에 대한 깊이 있는 강독을 들어 본 적이 없는

대부분의 분들은 자신의 근기가 낮고 자신의 노력이 부족하고 공부가 적어 아직

모르는 것이라 자책하며 그들의 처지에서 매진 할 수 밖에 없는 환경에 처해 있는 것이지요.

 

암튼 밖의 일반 설법이 뭔가 가리키는 것은 같은데,

그 가리킴을 향해 가야하는 사람들로서는 애로사항이 있을 수 밖에 없는 것이었죠.

숲 전체를 보려고 하는데 숲은 안보이고 숲 속에 있는 몇 개의 나무들만 부분적으로

보이는 격이지요.

이렇게 하다보면 전체 숲이 보이는 날이 있겠지 하고 숲 전체 보는 일을 미래의 목표로 남겨두기 쉽상입니다.

설법 하시는 분들도 그 가운데서는 많은 분들이 따르는 제법 인기 있는 분들의 설법인데도 그러합니다.

 

사찰의 일주문에 결려 있다는 글귀,

“이 문에 들어오거든 알음알이, 갖가지 견해를 버려야 한다”는 말

[(‘입차문래(入此門來) 막존지해(莫存知解)’)의 핵심은

아직 피상적으로 불법을 알며 개인 관점 위주로 살아가는 대부분의 중생들을 위해 하는 말이지,

진리의 핵심을 꿰뚫고 그것에 의지해서 중도와 불이(不二)의 안목을 자주 떠올리는

준비 된 자들을 향해서 하는 말은 아닐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이해하지 말라, 이해하면 그르친 것이다. 이해 한다는 것은 생각을 굴린 것이니

이해는 곧 알음알이인 것이고, 결국 버려야 할 어떤 것이다”라는 식의 권유도

어떤 이들에게는 맞는 말이고 도움 되는 말이겠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쓸데없는 걱정, 아니 잘못된 지적이겠다 라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그리고 이해한다는 말이 부정적으로 받아들여 지는 또 다른 이유 중 하나는

깨달음이란 체험을 말하며 체험을 통해 알아야 하는 것을 강조하다보니

이해를 무시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이해와 체험은 엄연히 다른 것으로 보는 것이지요.

 

어떤 곳을 보니 이해도 두 가지가 있더군요,

머리로 이해해서는 안 되고, 가슴으로 이해해야 된다구요.

머리로 이해하는 것은 좌뇌로 이해하는 것이고(불각), 가슴으로 이해하는 것(시각)은

우뇌로 이해한다는 말도 같아서 이점에 대해서는 수긍이 가기도 합니다.

 

單一意識의 觀點, 個人의 觀點 그리고 그들 간의 상호관계를 확실히 正見으로 보는

우리 도반님 들은 ‘이해하면 그르친다’라는 항간의 말에 흔들림이 없으실 겁니다.

 

이제는 어떤 설법을 듣다가 “이해하면 그르치는 것“이라는 말이나 내용이 나와도

그런 말을 할 수 밖에 없는 그들의 입장을 알기에 그냥 가볍게 넘어간답니다.

 

왜 원효대사께서 그토록 대승기신론에서 이해와 믿음을 누누이 강조하셨고,

大乘起信論이라는 말 속에도 ‘起信(믿음을 일으킴)’이란 말이 들어간 것인지 이해가 갑니다.

이해가 거듭되면 믿음이 된다는 밥통스피커님의 언설이 떠오르네요.

 

결국 정견을 염두에 두고 이해라는 말에 대한 언급을 하는 것이 필요하다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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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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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ejpark | 작성시간 23.08.17 알음알이는 개념이니 버려야 한다고 해서 맹하니 바보같이 갸우뚱하던 적이 있었는데 개인자아의 관점이라는 현대적 메시지와 알음알이 분별력을 잘 사용해야한다는 기쁜소식에 너무나도 가벼워졌습니다. 사실 신기하기도 합니다. 이해한다는 자체가 어떻게 이해가 되는지...모든게 단일의식의 자각이라는 진리에 감사드립니다 _()_

  • 답댓글 작성자은하수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3.08.17 이해한다는 일도 알고 보면 신비하고 기적 같은 일입니다.
    분별한다는 일도 마찬가지구요.
    누구나 하고있고 너무 흔해 보이는 것은 무시해 버리는 경향이 크죠.
    댓글 멘트 동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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