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r a Lender Be에서 발췌
내가 2015년에 참석했던 클린턴 재단 행사의 주제 중 하나는 ‘Not There’라는 문구였다. 의회나 강력한 기업의 고위직에 없는 여성을 언급하는 문구다. 클린턴 재단은 보그(Vogue), 글래머(Glamour), 셀프(SELF), 알뤼르(Allure)와 같은 인기 있는 잡지의 표지에서 패션 모델이 사라지는 시각 효과를 보여줌으로써 이 문제에 대한 인식을 환기했다. 이 주제를 다룬 뉴욕 타임즈의 기사에 따르면, 클린턴 인사들은 마땅히 누릴 자격이 있는 여성들이 고위직에서 실종되었다는 것을 모두가 이해할 수 있는 컨셉을 개발하기 위해 유명 광고 회사에 찾아갔다.
내가 아는 국제 여성의 날은 여성 노동자들의 노력과 파업에 참여한 여성 노동자들의 희생을 기념하기 위해 마련된 제2차 노동절이었고, 사회주의 공휴일에서 시작되었다. 그것은 기업의 임원이 되려고 하는 여성들이 경험하는 문제나 일부 초억만장자(megabillionaire) 아내의 견해에 특별한 초점을 두지 않았던 옛 페미니즘의 흔적이다.
무엇보다도 뉴욕에서 열린 그 행사에서 강조했던 것은 포춘지 선정 500대 기업의 최고경영진에서 여성이 과소대표된 것이 얼마나 부당한지였고, 암묵적으로는 미국이 여성을 대통령으로 아직 선출하지 않은 것이 얼마나 통탄스러운지에 대한 것이었다. 포춘지 선정 500개 기업의 작업장에서 일하는 여성들, 월마트나 아마존 그리고 그 외 회사들을 반짝이게 하기 위해 저임금으로 고용하는 사용자들에 대해서는 아무런 고민도 없었다. 그 고민의 양은 0이었다. 노동 계급의 미국 여성들은 전혀... 그곳에 없었다(Not there). 그 행사의 포괄적인 측면에서 확실히 여성 노동자들의 문제는 고려되지 않았고, 그들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힐러리 클린턴은 냉담하거나 거만한 여성이 아니다. 그녀는 미국에서 가장 높은 직책에 오를 만한 여성이다. 한가지 예로 그녀는 미국 정치의 중심인 워싱턴에 대한 해박한 지식이 있다. 또 다른 측면에서, 그녀에 대해 공화당이 갖는 원한은 지나치게 표독스럽고 불공정하다. 그래서 올해 11월 선거에서 나의 생각을 보여주기 위해 그녀에게 투표할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작년 한 해 동안 노동자들에 대한 자신의 공감을 보여주었고 유권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 주었다.
그러나 그녀의 기록에 따르면, 이러한 발언은 민주당 경선에서 그녀의 주요 상대인 버니 샌더스 상원 의원으로부터 받은 압력 때문이라는 것을 부정하기 힘들다. 버니 샌더스와 같은 정치적 힘이 없다면, 힐러리는 자신의 실력만큼 높이 올라가려고 하는 전문직 여성들의 싸움을 주되게 고민하는 버전의 페미니즘으로 돌아가려는 경향이 있다. 이 경향을 막는 유리천장은 없다.
나는 베스트 바이 극장에 앉아서 ‘바닥이 없다(no floors)’라는, 보다 더 큰 문제에 대해 생각했다. 그날 아침 뉴욕으로 향하는 기차에서 나는 클린턴 부부의 오랜 친구이자 복지에 관한 세계적인 전문가 중 한 명인 피터 에델만(Peter Edelman)의 책을 읽었다. 에델만의 목표는 클린턴의 복지 개혁 조치가 가난한 사람들, 특히 가난한 여성들에게 미치는 영향을 문서화하는 것이었다. 그 이유는 프로그램이 삭감되고 복지에 인색한 주정부로 바뀌기 이전에는 이들이 복지 지출의 수혜자였기 때문이다.
에델만은 1996년 이전의 복지 제도에 대한 지지자는 아니다. 이는 여성고용이나 육아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전의 시스템 하에서는 적어도 우리 사회는 가장 약하고 취약한 사람들을 위해 무엇인가를 해야 할 법적 의무가 있었다. 오늘날에는 힐러리와 그녀의 남편 덕분에 그 의무는 사라졌고, 우리 사회는 그런 일을 거의 하지 않는다. 에델만의 주장에 따르면 빌 클린턴이 1996년 복지개혁에 서명한 이래 극심한 빈곤이 증가했다.
가난한 노동계급 미국 여성들에게 바닥은 치워져서 20년 전에 쓰레기 매립지에 버려졌다. 휴대전화 비용을 지불하거나 보육비를 징수할 정부 부처는 없다. 그리고 이런 일이 생기도록 만든 사람들 중 한 명이 내가 보기에 세계의 탄압받는 여성들의 챔피언으로서 자신을 소개하는 것으로 보이는 바로 그 여성이었다.
겉 보기에 화려한 맨하탄에 앉아 나는 문닫은 공장들과 외곽 지역의 황폐화된 산업을 떠올렸다. 그런 곳에서 어떻게 민주당의 영향력이 전무할 지경으로 쇠락하고 있는지에 대해 곰곰이 생각했다. 버려지고 무력해진 그곳에 사는 사람들에게 민주당이 건내는 말은 사실상 없었다.
하지만 클린턴 재단이 있는 뉴욕에 모인 신실한 진보(liberal)파에게 그 문제는 누구에게도 중요하지 않았다. 평균적인 시민과 관련된 일에 민주당이 적자를 낸 것은 도덕적 선행에서의 막대한 흑자로 벌충되고 남았기 때문이다. 여기 극장 내부에 큰 재단과 위대한 패션 잡지가 자신들의 부정할 수 없는 선행의 행렬을 과시하고 있었고 진보적 계층은 자신의 본 고장에서 행복한 분위기를 만끽하고 있었다.
그들은 진보 운동을 구성하는 데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었고 실제로 모든 준비물이 구비됐다. 억만 장자들, 후원금 기부자와 수령자, 자신의 소셜미디어에 대해 말하는 할리우드 스타, 제3세계의 여성 기업가, 그리고 물론, 좋은 학교를 졸업한 리더 중 한 명이 무대를 가로질러 걸을 때마다 열정적으로 박수 치고 환호하는 수백 명의 청중들이었다. 이날 무대에서 본 진보주의(liberalism)의 퍼포먼스는 워낙 생생해서 마치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느껴졌다.
출처 : https://harpers.org/blog/2016/02/nor-a-lender-b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