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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성전과 백화점 사이, 후기자본주의 시대의 미술관 - 윤난지 (월간미술 2002. 04)

작성자미러유(미류)|작성시간03.09.18|조회수784 목록 댓글 0
미술관은 과연 종말하고 있는가? 미술관이 우리 곁을 찾아온 18세기 말 이래 지금 세계 곳곳에 산재한 미술관은 전통적 개념의 미술관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기에는 너무나 다양한 양태를 띠고 있다. 이 글에서 필자는 1970년대 이후의 미술관을 중심으로, 미술관이 드러내는 여러가지 성격을 진단하며, 초월적 이상과 세속적 현실이 공존하는 미술관의 새로운 아이덴티티를 찾고 있다. 후기 자본주의 사회라는 역사적 배경 속에서 변화한 미술관의 정체성을 찾는 이 노력은 미술관이 등장한 근대 이후의 서구 역사를 주도한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와 그 예술적 소산인 모더니즘의 역사를 추적하는 일일 것이다.



Ⅰ. 머리글




한스 홀라인이 설계한 프랑크푸르트 현대미술관(1991)
‘미술관의 시대’1)로 일컬어진 20세기가 채 끝나기도 전인 몇 년 전부터 ‘미술관의 종말’2)을 말하는 목소리들이 들려 오고 있다. 미술관이 탄생한 18세기 말 이후 200년 남짓 된 시기에 그 존속이 의문시되는 것이다. 세계 곳곳에 산재해 있는 미술관들은 ‘미술관’이라는 하나의 용어 아래 수렴할 수 없을 만큼 서로 다른 면모들을 지니게 되었으며 때로는 전통적인 미술관 개념을 벗어나거나 그것과 상반되는 상황을 연출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술관의 아이덴티티에 위기가 온 것인데, 그러면 미술관이라는 것이 더 이상 존재할 필요가 없는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또는 여러 겹의 아이덴티티를 가진 미술관이 번성할 것인가?

최근의 미술관이 드러내는 여러 다른 성격을 진단하는 일은 그런 미래를 가늠해 보는 첫걸음이 될 것이다. 나는 특히 급속하게 증가하고 변모한 1970년대 이후의 미술관을 대상으로, 초월적인 이상과 세속적인 현실이 공존, 충돌하거나 화해하는 면모를 주시하고자 한다. 이렇게 미술관을 성과 속이 교차하

는 현장으로 보게 된 것은 모든 제도적 소산들이 결국 사회·역사적 맥락의 재현물이라는 시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따라서 나는 최근 20∼30년간 미술관에서 더 첨예하게 드러나는 둘 사이의 딜레마를 이 시대를 특징짓는 후기 자본주의 사회라는 맥락을 통해 바라볼 것인데, 그것은 또한 미술관이 등장한 근대 이후의 서구 역사를 주도한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와 그 예술적 소산인 모더니즘의 역사를 추적하는 일을 포함하게 될 것이다.

“오늘날 미술관은 코모디티(commodity)와 코뮤니온(communion) 사이에서 양극화되어 있다”3)는 혹자의 말처럼 성과 속의 대비는 최근의 미술관에서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 증후이지만, 그것은 중세 성당이나 고대의 신전 또는 구석기시대 동굴벽화까지도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미술관의 원형으로부터 예견되어 왔다.
미술작품은 제의적 장소에 놓인 경배의 대상으로 태어났는데, 제의가 일상의 일부였듯이 미술작품도 성물이자 세속의 사물이었다. 미술작품은 애초부터 성과 속 사이의 애매한 위치에 거처해 온 셈인데, 그 위치가 구체적 장소로 드러난 것은 미술작품만을 위한 ‘미술관’이라는 공간이 마련되면서부터다.

미술관은 근대 시민사회의 소산인 ‘공중(the public)’이라는 개념과 함께 탄생했다. 이 시기에는 ‘공중에게 보여 주기’라는 의미의 ‘전시(exhibition)’라는 관행이 시작되었는데, 미술관은 미술작품을 ‘전시’하기 위한, 즉 그것을 공중에게 보여 주기 위한 공간으로 태어났다.4)

1793년에 문을 연 루브르 미술관은 그 효시로서 문화의 고른 분배라는 근대국가의 이상을 위하여 루브르궁을 전시장으로 만든 것이다. 그 후 유럽 열강들은 앞다투어 국립미술관을 세우는데, 그것은 구체제의 붕괴와 시민사회의 창출을 의미하는 것이었다.5) 성당에서 궁궐로 그리고 대중의 공간으로의 이동은 미술작품이 세속화되는 과정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런 과정에 ‘미술을 위한 미술’이라는 모더니즘의 성역이 만들어지고 그것을 수호하는 미술관이 20세기 초 이후 범람하는 현상은 근대 이후의 미술관이 성전의 또 다른 버전임을 확인하게 한다. 한편 이를 또다시 뒤집어 보면, 대부분의 현대미술관을 부호들이 세웠듯이, 그것은 결국 잉여자본 위에 서서 그것을 지키고 증식시키는, 그리고 경제적 여유와 여가 시간을 전제로 한 부르주아의 취미를 수호하는 성전이다.

포스트모던 미술관이라고 불리는 최근의 미술관이 달라진 것은 모던 미술관들이 애써 외면하였던 이런 세속적 맥락을 직시하고 나아가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이용한다는 점이다.6) 미술관 건물은 관광 포인트가 되어 카페와 뮤지엄 숍이 붐비고, 블록버스터전이나 심지어 패션쇼 같은 상품성 전시가 성행하고, 나아가 몇몇 미술관은 곳곳의 브랜치를 통해 성장해 가는 프랜차이저가 되어 가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백화점이나 쇼핑몰에 날로 가까워지는 최근의 미술관에서도 한편으로는 흰 벽을 배경으로 조명을 받는 작품과 그것을 대하는 관람자의 눈빛에서 미술의 성전을 지키는 제의가 사라지지 않았음을 감지한다. 오늘날의 미술관을 ‘세속의 성전(secular cathedral)’이라고 한 찰스 젱크스의 묘사처럼7) 포스트모던 미술관은 세속화되었다기보다 성과 속이 어느 때보다 첨예하게 부딪치는 현장이라는 편이 옳을 것이다.

Ⅱ. ‘화이트 큐브 안에서’


“하나의 이미지가 흰색의 이상 공간으로 마음에 떠오른다. 그것은 어떤 단일한 그림보다 20세기 미술의 원형적 이미지일 것이다.”8)

미술관에 가 본 사람은 누구나 모더니즘 미술이 ‘화이트 큐브 안에서(inside the white cube)’전개되어 왔음을 최초로 환기시킨 브라이언 오도허티의 이 말에 공감할 것이다. 얼룩 하나 없는 흰 벽과 정결한 마루 또는 부드러운 회색 카펫, 넓게 간격을 띄어 한 줄로 배열된 또는 벽 전체를 차지한 그림들, 세심하게 조정된 스포트라이트, 온·습도 조절기와 보안장치로 이루어진 그 공간은 미술을 외부세계로부터 소독해 내는 무균실 같다.9) 그 공간은 그것이 담고 있는 것이 ‘예술’이라는 사실을 방해하는 모든 단서를 제거할 뿐 아니라 심지어 거기 있는 모든 것을 미학화한다. 여기서 예술은 ‘그 자체의 삶을 살게’되는 것이다.10) 오도허티가 그림을 담는 그릇으로서 주시한 ‘화이트 큐브’는 미술을 바라보던 동어 반복적 시각을 그 프레임으로 옮기게 하였다. 모더니즘을 미술관이라는 제도적 맥락에 위치 지음으로써 그것의 자족성이 실은 맥락의 산물이자 그 계기임을 깨닫게 하는 실마리를 준 것 이다.

‘미술을 위한 미술’이라는 모더니즘의 구호와 미술관이라는 프레임은 어떤 것이 먼저랄 것 없이 동전의 양면처럼 구축되어 왔다. 뮤지엄의 어원이 ‘뮤즈들의 장소’인 것처럼, 미술관은 애초부터 순수한 영감으로서의 미술 개념과 긴밀히 관련된 것이었다. 이러한 관계는 20세기 미술관의 로고인 화이트 큐브가 모더니즘의 궁극인 추상미술과 만나는 것으로 귀결되는데, 그것은 추상성이 미술관의 본질 속에 내재해 있음을 상기시킨다. 삶의 구체적인 국면들이 제거된 보편적 관조의 공간으로 구축된 미술관은 애초부터 추상을 지향한 공간이었다. 추상미술은 미술관 미술의 표본인 셈이고 미술관의 흰 벽은 미술의 추상화를 위한 효과적인 장치인 셈이다.11) 따라서 대부분의 추상미술이 흰 벽에 전시될 뿐 아니라 흰 벽을 염두에 두고 제작되고, 어떤 경우는 그 벽이 작품의 한 요소인 것은 당연하다. 화이트 큐브는 추상미술의 디코럼일 뿐 아니라 출처이자 그 자체인 것이다.

모더니즘 역사는 그것이 놓인 공간에 의해 틀지어지고 또한 그것을 틀지어 왔는데, 1929년에 설립되고 1939년에 건물이 지어진 뉴욕의 현대미술관(Museum of Modern Art:이후 모마로 통칭)은 추상미술로의 전환과 전시공간의 변화가 만나는 지점이다. 고전양식의 구조와 실크 벽지, 그리고 벽 전체를 사각의 패턴으로 메운 정교하게 조각된 금빛 액자들로 대변되는 19세기식 미술관에서 국제양식의 건물과 흰 벽, 그리고 눈 위치에 띄엄띄엄 걸린 단순한 프레임의 또는 프레임 없는 그림들로 이루어진 모던 미술관으로의 이동이 이루어진 것이다.

맨해튼 53가의 빅토리아 양식 건물 사이에 세워진 모마 건물은 그 형태부터 모더니티의 전초기지임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초대 관장 알프레드 바아와 건축 담당 필립 존슨이 당시 유럽 여행에서 접한 바우하우스나 데 스틸 건축을 본받은 것이지만, 또한 바아가 현대미술의 필연으로 확신한 입체주의와 추상미술을 담는 그릇으로 적합한 것이기도 하였다. 모마가 설립된 이후 입체주의 이전의 미술은 주로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으로 보내짐으로써 화이트 큐브와 추상미술의 연합은 더 긴밀해졌다. 이 둘은 외형적으로 닮았을 뿐 아니라 순수형식 바깥의 세계를 전적으로 배제한다는 의미를 공유했던 것이다.

창문도 없이 문자 그대로 외부와 차단된 채 흰색 벽으로 둘러싸인 청교도적 내부공간은 시간의 부침에 초연한 영속적 공간이다. 그것은 토머스 메케빌리의 비유처럼 공간-시간의 매트릭스가 제거된 일종의 ‘비공간(non-space)’이자 ‘초공간(ultra-space)’이다.12) 이같이 삶으로부터 분리된 초월적 공간이라는 점에서, 그것은 괴테가 말한 “예술의 성스러운 목표에 바쳐진 장소”13)라는 괴테가 말한(1768) 18세기 미술관 개념의 연장선상에 있다. 신전이나 성당과 같은 초기 미술관의 건축양식이 증거하듯이 미술관은 원래가 제의적 의미를 지닌 곳이었는데, 20세기에 이르면 순수예술이 신의 자리를 차지한 ‘미학적 채플’14)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는 것이다. 모던 미술관은 이같이 그 존재가 제의적일 뿐 아니라 그 속에서의 관행 또한 제의적이다.15) 나열된 공간과 조명, 그리고 작품은 제의의 극본이자 무대장치이고 관람자는 제의를 연기하는 신도인 셈이다.
이 시각의 성전에서 관람자는 우선 자신의 눈을 몸으로부터 분리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모던 갤러리의 이상적 상태를 보여 주는 인적 없는 전시사진이 보여 주듯이, 관람자는 망막과 그것에 직접 연결되었다고 가정되는 두뇌만 가지고 순수시각의 제의에 참여해야 한다. 만지거나 먹거나 뛰거나 큰 소리로 말하는 등 몸을 적극적으로 동원한 행위는 금지되며, 단지 눈을 그림에 고정시킬 수 있게 몸을 이동시키는 조용한 걸음만이 허용된다. 그는 살과 피를 가지지 않은 유령과 같은 존재가 되어야 한다. “그곳에 있지 않은 채 그곳에 있는”16) 데카르트적 모순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몸이 억압된, 말하자면 ‘정신적’ 눈만 가진 채 입장한 관람자는 마치 연극의 각본과 같이 선별·배열된 작품들 앞을 지나면서 의식을 수행한다. 그는 마치 성당의 벽화나 제단화를 보듯 작품 하나 하나를 통해 구체적 삶 너머의 세계를 관조함으로써 미학적 법열을 체험하도록 독려된다. 한편 그 과정을 통해 관람자는 그 세계의 내러티브를 구성하게 되는데, 성서 대신 ‘모더니즘’이라는 신화를 구성하게 된다.

모마의 영구소장품 전시가 그 내러티브의 표본으로, 바아의 현대미술 계보를 공간에 펼쳐 놓은 것이다. 국가별 또는 장르별로 구분되었던 19세기식 진열방식에서 양식별로 구분의 기준이 바뀐 이 전시에서 각 양식을 담은 각 방의 중앙은 그중 가장 중요한 작품이 차지하는데, 그 선별 기준은 모더니즘 역사에 대한 기여도이다. 관람자의 동선은 모더니즘의 발전 과정을 따르게 되어 있으며, 방에서 방으로 전환되는 지점에서는 새로운 양식의 창출에 결정적으로 공헌한 작품에 의해 역사적 반전의 계기가 환기된다.17) 순수형식을 향한 역사 외에 모든 것이 배제된 미로와 같은 공간에서 관람자는 세잔과 입체주의에서 추상표현주의에 이르는 모더니즘 역사를 구성할 뿐 아니라 미니멀리즘 이후의 미술마저 그 내러티브의 연장선에 놓게 된다.

모마의 예와 크게 다르지 않은 수많은 미술관에서 이루어지는 이런 모더니즘 제의는 순수형식을 찬미하는 의식이다. 여기서 미술은 본래의 장소와 용도를 떠나 미술관에 이식됨으로써 ‘형식’이라는 이름의 일관된 내러티브 속에 편입된다. 형식의 역사라는 ‘위대한 허구(great fiction)’18)를 만들어 낸 장본인은 미술관인 것이다. 모던 미술관은 미술관의 본래 기능인 ‘탈문맥화(decontextualization)’가 극단에 이른 지점인데, 그 탈문맥화가 사실은 문맥의 산물이라는 나아가 문맥을 은폐하기 위한 도구라는 아이러니를 목격하게 된다. 마치 투명한 매개물처럼 보이는 벽은 사실 그렇게 중성적이지 않으며, 깨끗하게 칠해진 흰색은 그 색과 같이 순수하지 않다. 성역같이 격리되어 온 화이트 큐브에는 바깥세계의 온갖 이해관계가 얽힌 그물망이 가로지르는 것이다.

여기서 구현하는 현대미술의 역사는 겉으로 보이는 바와 같이 객관적 사실도 보편적 진리도 아니며, 따라서 역사적 필연도 아니다. 미술의 본질로 내세워 온 ‘형식’은 육신이 증발한 ‘정신’이란 신기루의 수사일 뿐이고, 형식의 순수성을 향한 모더니즘 역사는 인간 정신의 승리를 증거하기 위해 만들어진 표본에 지나지 않는다. 미술관을 미래를 향해 돌진하는 포신으로 묘사한 바아의 또 다른 도해처럼, 모던 미술관은 서구 근대사회를 추진해 온 계몽의 기획의 다른 얼굴이다. 연구소나 공장 같은 외관과 실험실을 닮은 내부공간,19) 그리고 수직적 발전을 향한 진열의 구조가 시사하듯이, 그것은 합리주의 정신에 근거한 진보의 이상을 반복한 기표이다.

모던 미술관이 문명의 진보를 향한 유토피아니즘의 한 구현체라면, 그것은 또한 그러한 이상을 추진해 온 주체들, 즉 근대사회의 주역인 부르주아의 이데올로기가 재현되는 장소라고 할 수 있다. 화이트 큐브가 삶의 현장과 결별하는 것은 사회적 다양성을 검열해 버리는 것이고 순수형식을 예술적 가치로서 승인하는 것은 그것이 유래되고 통용되어 온 특수층의 감각에 보편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예술적 가치라는 이름으로 사회적 가치를 영속화하는 셈인데, 이런 의미에서 모던 미술관은 그것이 속한 사회의 스테이터스 쿠오(status quo)를 투영할 뿐 아니라 각인하고, 나아가 강화한다고 할 수 있다.20)

특히 모던 미술관이 미술의 궁극으로 지향하는 추상미술은 주관성의 미학에 근거하고 있는데, 그것은 ‘개인’이라는 근대적 주체개념을 전제로 한 것이며, 그러한 개성의 자유로운 발현을 목표로 한다. “개인적 방법으로 개인적 재능을 자유롭게 구사하여 사회 전체에 공헌하는 개인의 능력에 대한 경의”21)라는 모마 후원자들의 표현처럼, 작품의 아우라를 만들어 내는 ‘독창성의 신화’는 개인주의를 사회적 미덕으로 보편화하는 근대사회의 이념과 같은 맥락에 있다. 여기서는 관람자 또한 자율적인 개인으로 취급된다. 입구의 층계와 열주가 늘어선 넓은 홀을 통해 예술적 제의를 향한 공동의 의식을 조성하였던 19세기식 미술관에서 보도와 같은 높이에서 쉽게 입장할 수 있고 밝고 개방된 로비를 가진 모던 미술관으로의 변모는, 미술관이 근대적 시민의 개념에서 시작된 개별적 주체들을 위한 공간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한 사람이 한 작품씩 천천히 보도록 눈높이로 띄엄띄엄 걸고 각각에 스포트라이트를 주는 진열방식 또한 사적인 관조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한 것이다.
이런 전시장은 조나단 크래리의 말을 빌리자면 19세기부터 시작된 ‘시각의 사유화(privati- zation of the visuality)’의 귀결이다. 관람자는 스스로 고립되어 미적 경험을 독점하는 것인데, 그것은 다른 한편으로 시각적 소비를 극대화한다.22) 모던 미술관이 전제로 하는 천재적 개인으로서의 작가와 이에 상응하는 자율적 개인으로서의 관람자 개념은 보편성을 가장한 부르주아의 자아 개념이며, 주관성의 미학이나 독창성의 컬트 또한 부르주아의 사유의 대상인 것이다. 따라서 작품과 그 아우라는 희소성의 가치에 근거한 상품이 될 운명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일찍이 이를 간파한 발터 벤야민은 미술관의 작품을 상품에 비교하면서, 이 둘은 모두 “다량으로 보여짐으로써 그 앞을 지나는 이들로 하여금 그것을 자기도 가져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23)고 하였다. 사실상 미술관은 작품을 작가로부터 분리시킴으로써 생산자와 그 생산품의 분리라는 자본주의 경제학의 첫 번째 단계를 수행하는 셈이다.

모던 미술관은 모더니즘 미술이 그런 것처럼 다른 얼굴을 가지고 있는 것인데, 그것의 흰 벽은 흰색이기 때문에 그 다른 얼굴을 더 잘 감춘다. 흰색의 벽은 맥락을 지워 버리면서도 자체는 짐짓 비가시적인 것으로 남아 있음으로 해서 은폐의 경위를 다시 은폐한다.24) 나아가 그 흰색은 순수의 레토릭이 됨으로써 표정이 지워진 얼굴을 고양시킨다. 그것은 자본주의의 이데올로기와 권력구조를 은폐할 뿐 아니라 합리화하고 강화하는 것이다. 결국 화이트 큐브 안에서 실행되는 제의는 예술의 얼굴을 빈 전성기 자본주의의 제의이다. 모던 미술관이라는 성전은 그것이 속한 세속세계의 현실이 역전되어 돌아오는 거울방인 것이다.

Ⅲ. 화이트 큐브 너머에


20세기 초에 태어난 화이트 큐브는 수십 년 동안이나 전시공간의 캐넌으로 통용되어 오면서 미술의 순수성을 시위하는 레토릭이 되어 왔다. 여기서 삶의 세계는 시야의 바깥으로 밀려남으로써 화이트 큐브의 알리바이가 되어 온 셈이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 이른바 포스트모던 미술관이 등장하면서 그 부재증명(alibi)은 자신의 존재를 증거하기 시작했다. 오도허티가 화이트 큐브 안에 전시된 색면회화를 쇼룸의 롤스로이스에 비유했듯이,25) 모던 미술관과 모더니즘 미술은 전성기 자본주의 사회로부터 세례를 받은 성전이자 성물임을 감출 수 없게 된 것이다. 맥락에 대한 이러한 인식은 미술관이 적극적으로 그 맥락을 재현하거나 그것에 동참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모던 미술관이 예술이라는 ‘성’스러운 이름으로 현실의 ‘속’된 모습을 감추고자 한 것에 비해 포스트모던 미술관은 그것을 적극적으로 노출하고 또 만들어 간다.

자유로운 곡선의 티타늄 패널으로 이루어진 구겐하임 빌바오나 잘린 케익 모양의 프랑크푸르트 현대미술관처럼 미술관은 외형상으로도 화이트 큐브를 떠나 후기 산업도시의 아이콘이 되었다. 내부 설계에 있어서도 뮤지엄 숍을 입구에 두거나 전시장의 동선을 상점으로 이어주는 등 쇼핑의 시나리오를 극대화하는 전략들이 모색되고 있다. 전시장 또한 이색적인 ‘전망(vista)’26)을 파는 일종의 테마 파크에 다름아닌 것이 되었다. 코너가 잘리거나 둥글려지고 칸막이는 트이고 오픈 발코니가 설치되고 벽이 창으로 대치되고 바닥이 여러 층을 이루는 전시장 역시 화이트 큐브를 떠났다. 여기서 관람자의 눈은 한 곳에 집중되는가 하면 동시에 다른 관계 속에 연루되면서 탈중심화를 반복한다. 포스트모던 전시장은 모든 것이 상호 교환의 가능성으로 열린 상품적 기호들의 견본시다. 전성기 부르주아 사회의 미술관을 ‘무정부적인 상품생산에 대한 메타포’27)로 본 테오도어 아도르노의 통찰이 포스트모던 미술관에 이르러 구체화된 것이다. 여기서 전시는 스펙터클이 되어 가며 그 경영은 다국적 기업의 형태를 취해 간다.


1. 스펙터클로서의 전시



근래 수십 년간 목격할 수 있는 미술관의 번성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삶이 전반적으로 이미지에 의해 영위된다는 기 드보르의 말을 증명하는 듯하다.28) 뿐만 아니라 그 속에서 이루어지는 전시는 그가 말한 ‘스펙터클’이 되어 가고 있다. 자본주의가 성숙할수록 고도의 미디어 테크놀러지에 의해 대량 생산·소비되는 볼거리들, 망막을 스쳐 지나가는 피상적 일루전들, 그러나 막대한 이윤을 창출하는 상품적 이미지들, 즉 스펙터클이 삶의 전영역에 스며드는데, 여기서 미술도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며 심지어 이미지의 예술인 미술은 ‘스펙터클의 사회’를 리드한다고도 볼 수 있다. 애초부터 사용가치가 없는 미술에는 이같이 교환가치가 사용가치를 앞설 운명이 내장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최근의 미술관에서 이루어지는 전시는 우선 시각적으로 보는 이를 압도한다. 특히 ‘설치(insta-llation)’의 방법이 성행하면서 작품들은 큰 스케일과 이색적인 형태로 공간을 장악하면서 즉시적인 감각에 호소할 뿐 아니라 관람자의 움직임에 따라 끊임없이 다른 이미지로 펼쳐진다. 관람자는 작품 하나하나를 관조하기보다 망막을 스쳐가는 이미지의 파노라마들에 즉흥적으로 반응한다. 이전과 매우 다르게 변모된 것으로 보이는 이런 전시방식은 실은 모던 미술관에서 시작된 ‘시각에의 광신(frenzy of the visual)’29)이 극에 이른 것이다. 단지 마이클 프리드의 ‘순간적 몰입(instantaneous absorption)’이 프레드릭 제임슨의 ‘파편화된 유포리아(fragmented euphoria)’로 대치되었을 뿐이다. 프리드가 진정한 예술적 체험이라고 한 모더니스트 미술의 경험이나 제임슨이 상품의 논리를 보상하기 위한 유토피안 제스처라고 한 포스트모던 전시장의 경험은 망막효과를 극대화하는 면에서는 다를 바 없다.30)

전시의 형식뿐 아니라 그 내용 또한 스펙터클에 접근한다. 관람인원을 최대로 확보하기 위해 대가들과 그 아우라를 상품화한 블록버스터 쇼가 재정유지를 위해 필요불가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면서 날로 성행하고 있다.31) 이런 전시는 그 주요 동기가 예술이 아닌 마케팅이므로, 전시가 개인사의 나열로 환원된다든가, 작품이 기념품과 호화 장정된 카탈로그의 판매를 위한 광고효과로 역전된다든가, 카탈로그에는 작품해설보다 스폰서의 서문이 앞서고, “세잔이 도시를 휩쓸다”따위의 광고성 기사가 오프닝 이전부터 범람하는 현상이 나타난다.32)

예술가의 독창성을 부각시키는 이런 대규모 개인전은 모던 미술관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다. 단지 천재로 신격화되던 미술가가 매스 미디어에 오르내리는 스타의 자리에 앉게 되고, 걸작의 성역에서 보호되었던 작품이 이윤을 창출하는 진기한 볼거리가 되었음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점이 다를 뿐이다.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의 <모네쇼>(1995)에 운집한 관람자들을 ‘동물원에서와 같은 군중’이라고 한 어떤 평자의 비유처럼,33) 평생 한 번뿐인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줄을 선 경우가 대부분인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작품에 대한 이해가 아니라 그것을 단지 보는 것이다. 그들은 그들에게 허락된 단 몇 초 동안 작품 앞에 서 있기 위해 오랜 시간을 기꺼이 기다린다. 여기서 작품은 문화적 스테이터스를 획득하기 위해 구매하는 망막적 현상일 뿐이고, 전시는 복합적인 미술사 문맥이나 해석의 다양성은 제쳐 둔 채 획일화된 정보로 작품을 포장한 대중적 이벤트일 뿐이다.

독창성의 신화를 파는 블록버스터전이 모더니즘의 전제를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그것을 상품화한 것이라면, 양식과 장르의 경계를 넘어서고 공예 같은 익명의 미술사를 수용하고 연대기적 구분을 소거함으로써 모더니즘의 순수주의와 역사주의를 벗어나려는 소위 ‘탈역사전(ahistorical exhibition)’들이 포스트모던 전시의 한 형태로 이루어지고 있다. 피카소의 여인상과 15세기 의자, 그리고 요셉 보이스의 설치 등을 한 공간에 전시하여 시대를 초월한 공명을 울려 내고자 한 하랄트 제만의 <탈-역사적 울림(A-Historische Klanken)>(1988)이 그 예다.34)

일견 모더니즘의 전제를 벗어난 것 같은 이 전시장은 실은 이전의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형태상의 조화와 대비에 의해 작품이 배열된 넓은 전시장은 화이트 큐브의 연장선상에 있다. 미술의 폐쇄회로에서 순환되는 ‘형식’이라는 하나의 소리가 울려 오는 그 공간은 시간을 초월한 예술의 유토피아다. 미술가가 큐레이터로, 작품이 전시로 대치되었을 뿐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는 모더니즘의 대서사는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뿐만 아니라 전능에 가까운 힘을 행사하는 큐레이터와 그가 창출해 낸 대규모 설치작품, 그리고 세계를 누비는 국제전을 통해 그 서사는 점점 커지고 있으며 따라서 그 가격도 나날이 오르고 있다.

아직도 예술을 높은 성채에 올려 놓는 이런 전시에 대해 그것을 현실의 땅으로 끌어내리려는 예들 또한 목격된다. 미술작품을 사회·역사적 사실들을 예시하는 자료들과 함께 전시하는 경우가 빈번해졌는데, 이는 미술전이라기보다 ‘정보전(informative exhibition)’에 가깝다.35)

얼마 전 <메이드 인 캘리포니아 : 미술, 이미지, 그리고 아이덴티티, 1900∼2000전>(2000∼2001)이 열린 로스엔젤레스 카운티뮤지엄은 미술관이라기보다 역사 자료관을 방불케 하였다. 여기서 미술은 사진·광고·만화·영화·패션·가구 등과 함께 캘리포니아라는 지역의 ‘시각문화(visual culture)’를 이루는 한 부분으로 환원되었다. 미술을 문맥의 산물로 보는 최근 미술이론을 반영하는 이런 전시는 미술 주변에 성벽을 쌓아 온 모더니즘 미술전에 대한 대안이다. 여기서 미술작품은 일종의 일러스트레이션인 셈으로 다른 역사적 물증들과 동등하게 취급되며, 따라서 장르나 양식, 또는 작품 간의 질적 차이와 그에 따른 예술적 가치의 개념은 원칙적으로 배제된다.

바깥세상의 온갖 사물로 가득 차고 호기심 많은 대중으로 들끓는 이런 전시는 이제 미술관이 세속의 세계로 내려왔음을 증언한다. 그런데 그런 전시가 거처하는 세속은 여전히 특정 이데올로기의 거울에 비친 그것이다. 이 전시가 제기하는 “어떤 캘리포니아? 누구의 캘리포니아?”36)라는 물음에 대한 대답은 결국 서부 개척의 종착지가 재현하는 아메리카니즘이다. 캘리포니아의 독특한 지형과 기후, 그리고 라틴과 아시안을 포함한 민족적 다양성을 수용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1960년대 이후의 섹션들이 보여 주듯이, 그것들은 하이웨이를 달리는 컨버터블과 베벌리 힐스의 대저택으로 수렴되는 캘리포니아 드림을 꾸미는 한 수사로 남는다.

미술마저 그 환상에 노골적으로 편승하고 있다. 마이너 작가들이 많이 발굴되고 있음으나 로버트 어윈이나 에드 루셰 같은 큰 이름들이 여전히 좋은 자리에 버티고 있는데, 풍요로운 물질문명의 일부로 진열된 그들의 작품은 마치 더 풍요로운 생활을 위한 정신적 사치품 같다. “영속적이고 초월적이고 보편적인 그리고 독백으로 그치는 미적 대상 이상의 것”37)으로서의 미술에 대한 기획자의 기대는 바깥세상에 대해 말하되 한 가지 언어로만 말하는 미술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미술관의 세속화는 미술은 없어지고 상품이 그 자리를 차지한 전시를 통해 극에 이른다. 2000∼2001년에 걸쳐 뉴욕과 빌바오의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차례로 열린 <조르지오 아르마니전>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비싼 가격의 옷으로 가득 찬 쇼 윈도였다.38) 시기별이 아닌 색깔과 형태, 그리고 테마별로 분류하여 전체 공간을 작품화하는 진열방식은 그 옷을 더 값나가는 예술의 자리에 올려놓았다.39)

반투명한 스크린으로 전체를 감싼 소용돌이 모양의 램프(ramp) 뒤에서 보일 듯 말 듯 스쳐 지나가는 마네킹과 관람자의 흐름은 사치와 향락의 꿈을 좇는 유령의 드라마다. 반짝이는 인조 보석과 실크 같은 값비싼 천으로 정교하게 만들어져 좌대 위에 올려진 옷들은 그것을 살 수 있거나 없는 모든 이의 욕망의 근원이자 숭배의 대상인 패티시다. 이 전시를 돈으로 산 아르마니에게는 이 전시가 패티시다.40) 유명 디자이너 숍으로 가득 찬 근처 매디슨 가에서 팔리는 옷을 순수예술의 성전인 구겐하임 미술관에 들여놓은 이 전시는 그를 패션 아티스트의 정상에 올려놓았다.41) 자신의 위상을 보장하는 이 전시를 위해 돈을 아끼지 않은 그의 <에고마니아>42)는 호화 도판으로 가득 찬 두꺼운 카탈로그(381p)를 통해 충족되었다. 그것은 천재적 예술가로서의 그의 위치를 이론화하는 것이다. 주요 저자들이 쓴 20개에 달하는 글들은 영화배우와 부호들로 이루어진 고객의 증언마저 예술애호가의 그것으로 격상시킨다.

패션 디자이너이자 사업가를 모더니스트 영웅과 같은 자리에 앉힌 <아르마니전>은 모더니스트 전시의 키치적 버전이다. 모마의 1930년대의 디자인전에서 이런 전시의 실마리를 찾게 되듯이, 이것은 작품이 장식으로, 그리고 예술가가 디자이너로 전락할까 두려워한 모더니즘의 악몽이 현실로 나타난 것인지도 모른다.43) 그러나 다시 뒤집어 생각하면 그것은 예술과 그 독창성의 신화가 상품의 세계로까지 침투할 만큼 강력한 것임을, 또한 그러한 신화가 그것이 속한 문맥의 소산이자 원인임을 보여 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캘리포니아전> 같은 정보전과 <아르마니전> 같은 패션전 외에도 이 둘을 혼합한 형태인 부르클린 미술관의 <힙합 네이션:근원들, 운율들, 그리고 열광(Hip-Hop Nation:Roots, Rhymes and Rage)>(2000)과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재클린 케네디:백악관 시절-존 에프 케네디 도서관과 박물관 자료 중에서(Jacqueline Kennedy : The White House Years-Selections From John F. Kennedy Library and Museum>(2001)44) 등은 21세기에 접어든 미술관의 변화를 진단하게 하는 뚜렷한 견본이다. 고급문화의 벽을 허물고 대중문화를 수용한다는 이상보다 관람자의 확보와 그에 따른 이윤의 창출이라는 현실적 계기가 앞선 이런 전시를 보면 이제 미술관은 ‘미술’관이기를 그친 것 같다. 더욱이 이들이 순수 미술전을 압도하는 듯한 최근의 추세는 미술관의 정체성이 심각한 전환의 시점에 있음을 예시한다.

미술관들은 이제 예술보다 스펙터클을 보여 주는 장소가 되고 있는 것인데, 위의 경우들에서처럼 이런 과대·과잉 이미지 뒤에는 자본에 근거한 진보의 이데올로기가 직조되어 있다. 단지 그것이 매체적 효과에 의해 은폐되고 있을 뿐이다. 다양한 시각효과를 통하여 현실감을 극대화한 이런 이미지들은 실은 만들어 낸 이미지들이며, 따라서 그 현실감은 가짜인데, 이런 가짜 현실감이 진짜 현실을 가리게 된다. 망막을 스쳐가는 환상의 연속을 통해 감각적 만족을 줌으로써 그것이 가짜임을 깨닫지 못하게 하고 진짜 현실의 존재마저 믿을 수 없게 하는 것이다. 수동적인 시각의 소비행위에 이끌린 관람자는 반성(reflection)의 기회를 잃고 ‘모든 것을 보면서 아무것도 모르게 되는’45) 셈이다.

여기서 보이지 않는 현실은 보이지 않는 방법으로 관람자를 지배한다. 모든 이들에게 보이는 스펙터클의 공간은 모든 이들을 보는 판옵티콘(panopticon)의 또 다른 얼굴이다. 토니 베네트가 스펙터클의 효시인 박람회를 파노라마와 판옵티콘이 결합된 공간으로 보았듯이46) 그것은 ‘보는 동시에 보이는’공간이다. “당신이 문 안으로 들어갔을 때는 당신도 전시의 일부임을 잊지 마시오”47)라는 어떤 박람회의 경고처럼, 모든 것을 보는 관람자는 또한 모든 곳에서 보이게 된다. 실제로도 미술관들에는(그리고 백화점에도), 전체 공간과 다른 관람자를 볼 수 있는 로툰다 같은 관망 지점이 있으며, 특히 전망을 중시하는 포스트모던 미술관에는 이런 곳이 많이 있는데, 이를 통해 관람자는 전체 공간을 규제하는 권력의 시선을 내면화한다. 스펙터클은 이렇게 자발적인 ‘자기-감시(self-surveillance)’를 이끄는, 따라서 한층 정교한 방법으로 권력이 각인되고 시행되는 지배의 테크놀러지다.48)

스펙터클로서의 전시는, 현혹하는 동시에 속이고 또한 관람자를 지배하는 일루전이자 이데올로기, 즉 ‘권력으로서의 지식(power/kno- wledge)’49)의 한 형태다. 여기서 관람자는 스펙터클의 매체적 효과에 눈이 멀고, 그것의 감시 메커니즘에 지배되어 그것에 직조된 이데올로기에 순응하는 ‘희생자로서의 관람자(viewer-victim)’50)인 셈이다.

전시는 ‘제시(presentation)의 방식인 동시에 재현(representation)의 형식’이라는 엠마 바커의 말처럼,51) 미술관에서의 모든 전시는 그것이 속한 문맥을 반영하는데, 특히 스펙터클 효과가 극대화된 최근의 전시들은 모든 것이 상품과 같이 소비되는 후기 자본주의 사회의 의미소통 방식을 공유하는 동시에, 그것에 각인된 의미내용을 통해 모든 것을 교환가치로 환원하는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를 고착시킨다. 스펙터클로서의 전시는 후기 자본주의 사회의 산물이자 그것을 유지하는 도구인 것이다.


2. 고도성장을 지향하는 문화기업



전시가 스펙터클이 되어 가고 미술관이 여가와 소비의 장소가 되어 가는 증후의 또 다른 한 쪽에는 미술관의 기업화라는 국면이 있다. 시민의 계몽을 위한 비영리기관으로 출발한 미술관이 이윤추구와 자본의 증식을 목표로 하는 기업이 되어 가고 있다. 자본주의 역사 속에서 미술관은 점차 그 체제의 일부가 되어 온 것인데, 그것은 기업가의 재원을 바탕으로 설립된 20세기 초 미국의 모던 미술관에 이르러 가시화된다. 대부분의 미술관이 국립인 유럽의 경우도 재정의 상당 부분이 미술관 자체의 재원 형성에 의존하고 있으므로 실제로는 미국에 많이 접근해 있다. 모던 미술관에서 시작된 이런 미술관의 모습은 그 성전으로서의 외관에 의해 철저하게 가려져 왔는데, 근래의 미술관은 이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또한 적극적으로 만들어 간다.

기업으로서의 미술관의 전제는 무엇보다 상품으로서의 미술작품이다. “근대(modern age)를 통합하는 것은…상품적 특성에 있다”52)고 한 아도르노의 통찰이 미술의 경우에도 예외는 아니어서 미술작품은 고부가가치의 시장을 이루어 왔고, 미술관에 축적된 미술작품의 “시장가치는 그것들을 즐겁게 바라볼 여유를 주지 않는다”53)는 그의 말처럼, 미술시장은 예술의 성역에까지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미술관의 작품마저 소유와 투자의 눈을 피할 수 없게 되었고, 오히려 그런 시선이 작품의 경험에 긴밀하게 짜이게 되었다. 미술관의 작품이 상품에 접근하게 된 것이며, 심지어 미술관이 작품의 질을 보증하는 공인기관 구실을 함으로써 그 가격을 만들어 낸다. 미술관은 예술이라는 상품을 전시하고 이를 통해 잉여가치를 창출하는 기업에 다름아닌 것이다.

상품의 견본시 같은 이런 전시장의 단초가 성역화된 모던 전시장에 있었음은 아이러니다. 미술작품은 미학적 공간에 고립됨으로써 명목상으로 신성화되는 한편, 실제로는 그러한 신성화에 의해 그것 자체에는 어떤 현실적 근거도 없는 의미와 가치들이 투사되었던 것이며, 그것이 상상을 초월하는 시장 가격으로 나타난 것이다.
더 근본적으로는 작품을 자율적 실체로 독립시킨 모더니즘 담론이 그것을 하나의 단위로 이동 가능하게 함으로써 상품이 될 계기를 제공한 셈이다. “독립적인 것으로 인식되는 실체들의 구현물로서의 문화는… 물신주의적인 것이다”라는 루디 푹스의 말처럼,54) 모더니즘 미술의 가동성(portability) 또는 방랑성(nomadity), 다시 말해 비장소성(placelessness)이55) 그것의 상품화를 가능하게 한 것이다. 이런 현상은 모더니즘 이후의 미술과 미술관에서도 예외는 아니며 오히려 더 노골화된다. 희소성의 가치에 근거한 모더니즘 미술에 도전하는 포스트모던 미술도 또 다른 양태로 상품논리를 체화한다. 복제와 차용에 근거한 포스트모던 미술은 대량생산과 소비라는 상품의 제작과 유통의 방식을 공유하고 있는 셈이며, 실제로도 사진이나 판화, 비디오 같은 자가복제 매체를 통해 활발한 미술시장을 형성하고 있다.

하나의 작품이 많은 이의 눈을 통해 재생산되는 미술관이라는 제도에는 이미 복제의 메커니즘이 내장되어 있다.56) 따라서 사진에 의해 작품이 복제되는 앙드레 말로의 ‘벽 없는 미술관’과 그것이 전자매체에 의해 더 진전된 최근의 ‘벽 없는 전자미술관’은 미술관이 탄생할 때부터 예견된 것이며, 복제에 의해 제작 유통되는 미술-상품을 노골적으로 전시하는 포스트모던 미술관은 미술관 역사의 자연스러운 귀결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 미술관들은 미술작품을 상품처럼 전시할 뿐 아니라 심지어 장사도 한다. 컬렉션을 파는 일이 성행하는 것이다. 컬렉션 판매는 더 좋은 작품을 사기 위한 것이지만, 미술관은 구매작품의 가격상승을 염두에 두고 거래하므로 결국 자산증식을 위한 투자인 셈이다. 예컨대 구겐하임 미술관은 1990년에 칸딘스키 등 20세기 초기 대가의 작품 3점을 팔아 미니멀리즘과 개념미술 211점으로 이루어진 판자 컬렉션(The Panza Collection)을 샀는데, 지금 그 가격은 상상을 초월한다. 또한 모마는 1990년에 피카소 등 7개 작품을 팔아 반 고흐의 <우체부 조셉 룰랭의 초상>(1889)을 샀는데, 미술시장에서 최고가인 이 작품이 영구소장품을 7개나 줄일 정도로 투자가치가 있었던 것이다. 이제 미술관은 문화 유산을 보존하는 공공기구라기보다 동시대 유행과 그에 따른 시장가치에 민감한 일종의 비즈니스가 되어 가고 있다.

구겐하임 미술관의 1990년 경매는 그런 면모를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소더비의 경매에서 칸딘스키의 <푸가>가 추정가격인 1000만∼1500만 달러의 두 배나 되는 2090만 달러로 낙찰되는 등 미술관은 세 작품을 판매한 5분 동안 4730만 달러를 벌었다. 구겐하임이 5주 전부터 작품 매각 사실을 알려 온 것도 이런 장사를 위한 광고였던 셈이다.57) 미술관의 소장품이 경매에 부쳐지면 미술관의 이름이 마치 유명상표같이 최고의 부가가치를 창출하며 미술관은 이를 이용하여 최대의 이윤을 챙기는 것이다. MBA를 가진 관장 토마스 크렌즈는 이 경매를 통해 그의 사업적 수완을 발휘하여 ‘새로운 미술관장의 프로토타입’58)을 제시한 셈이다.

미술관장은 경영자에 가까운 일을 하게 되었으며, 따라서 학예관들보다 이사회(board of trustee)와 더 긴밀한 관계를 맺게 되었다. 많은 수가 컬렉터인 이사회는 딜러의 미술관 침투를 부추기는 실세다.59) 큐레이터들은 순수 연구직이라는 명목으로 미술가-딜러-이사회의 담합 밖으로 밀려나 미술관의 콘텐츠를 결정하는 일에서 점차 소외되고 있다. 미술관의 인적 자원과 그 업무구조 또한 기업의 그것을 닮아 가는 것이다. 작품 수장이나 전시 또는 인선에 막강한 힘을 발휘해 온 이사회는 부르주아 엘리트에 의해 충원되어 왔다. 그들이 만들어 낸 고급문화의 폐쇄 회로에 의해 미술에 대한 여타의 경험은 배제되면서, 그 회로를 순환하는 그들의 특정한 ‘취향(taste)’이 마치 보편적 기준인 것처럼 통용되고 천부적인 소양인 것처럼 신화화된다. 그러나 그 취향은 보편적 기준도 천부적 능력도 아니라 ‘계층 특수적(status-specific)’인 것이다. 그것은 개인의 경제·사회·문화적 자본에 의해 계발되는 일종의 ‘아비투스(habitus)’이며,60) 따라서 그것을 가지지 않은 계층을 소외시킨다. 결국 미술관의 소장품 매각과 구매는 특정 계층의 이해관계의 소산이라는 혐의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더욱이 이런 장사가 단지 살아남기 위한 것이라기보다 다윈적 약육강식 논리에 근거한 영역 확장의 욕구에서 온 것이라는 점은 최근의 미술관에서 성행하는 건물의 증축과 브랜치 미술관의 증식이 증명한다. 세계 각처의 위성미술관을 통해 고도성장을 이루고 있는 구겐하임 미술관은 이런 미술관 기업의 전형이다. 1976년 베니스의 페기 구겐하임 컬렉션의 자동합병(페기의 유언에 따라)으로 시작된 미술관의 확장은 1990년대에 본격화되어 본건물에 새로운 윙을 증축하고(1992) 구겐하임 소호를 열었으며(1992) 구겐하임 빌바오(1997)와 구겐하임 라스베이거스의 개관(2001)으로 이어졌다. 뿐만 아니라 도이치은행 컬렉션, 생 페테르부르크의 에르미타쥬 미술관과도 전시와 소장품의 교환협정을 맺어 도이치 구겐하임 베를린을 개관하고(1996) 구겐하임-에르미타주 미술관을 라스베이거스에 두게 되었다(2001).61) 2000년 11월에는 뉴욕시장이 로어 맨해튼의 이스트 리버 연안에 거대한 규모의 뉴 구겐하임 건축계획을 공표하였으며 시 보조금까지 약속하였다.62) 브라질의 브랜치 미술관 추진건 또한 매스컴에 오르내리고 있다.63) 모마 또한 PS1을 인수했을 뿐 아니라(1999) 뉴욕 53가의 건물을 2배로 증축하고 있다(2004년 개관예정). 테이트 갤러리는 테이트 리버풀(1988), 테이트 세인트아이브스(1993)를 거쳐 테이트 모던(2000)에 이르는 브랜치들을 영국 각처에 설립하였다.

베네시안 리조트호텔 카지노의 일부로 개관한 구겐하임 라스베이거스와 영화관과 스케이트장을 갖춘 월스트리트 남단의 뉴 구겐하임 미술관 계획, 부둣가의 상가에 위치한 테이트 리버풀과 휴양지 해변에 지어진 테이트 세인트아이브스 등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브랜치 미술관은 무엇보다 ‘돈-만들기(money-making)’를 위한 레저 산업에 가깝다.64) 그것은 돈이 예술의 영토를 잠식해 가는 현상을 부추기는 것인데, 그 효과는 돈에 의한 예술의 식민화에 그치지 않는다. 세계 각처의 위성미술관을 통한 주류미술관의 자기 복제는 문화의 전지구적 식민화를 가중시킨다. 미술관은 브랜치들을 통해 이익을 챙길 뿐 아니라 그 미술관이 지지하는 주류문화를 이식시킴으로써 지역문화를 잠식하기 때문이다.

구겐하임 미술관에 의한 지역 경제의 활성화를 기대한 빌바오시는 미술관의 건축 및 경영비, 구겐하임이라는 타이틀과 컬렉션 사용료, 새 컬렉션 구입비 등 160여만 달러의 비용을 충당하면서도 전시는 모두 구겐하임 재단에서 관장한다는 조건을 수락하였는데,65) 이는 돈을 주고 구겐하임이 지지하는 뉴욕 중심의 주류문화를 수입한 셈이다. 국제적으로 유통되는 구겐하임제 전시상품이 미술관을 장악하는 ‘맥구겐하임화(McGuggenheimisation)’66)에 의해 전통 바스크 문화는 설 자리를 잃게 된 것이다.

얼마 전의 <글로벌 구겐하임(Global Gugge- nheim)전>(2001)은 그 타이틀대로 구겐하임의 글로벌한 문화제국주의를 예시하는 전시였다. 이 전시는 구겐하임 컬렉션의 주요작가들인 몬드리안-저드, 클레-로스코-반 되스부르크, 보이스-뒤뷔페 등의 조합을 통해 걸작의 신화와 형식적 유사성에 근거한 순수시각의 유토피아를 만들어 냄으로써 이 미술관을 모더니스트 미술사의 원조로서 자리매김하였다. 나아가 그 연대기적 순서만을 뒤섞은 그것의 또 다른 버전으로 모더니즘 이후의 담론에도 유연하게 대처함으로써 이 미술관이 여전히 세계미술의 리더임을 각인하였다. 뉴 구겐하임 프로젝트전과 위성미술관들을 소개하는 비디오 상영이 병행된 이 전시는 전지구적으로 유통되는 주류미술 제조자로서의 구겐하임 기업의 힘을 자랑하는 수사인 것이다.

이 전시뿐 아니라 구겐하임의 모든 전시는 ‘글로벌 구겐하임’인 셈이다. 예술의 성전으로서의 미술관 건물은 뒤집어 보면 전세계에서 수집한 고가의 미술상품들로 꾸민, 그리고 시즌마다 그 목록이 바뀌는 미국의 대저택에 다름아니다. 여기서 작품들은 고유의 맥락이 탈색된 채 ‘글로벌 구겐하임’ 미술사에 편입되며, 주류미술관의 특정한 미학적 입장일 뿐인 그것은 전시를 통해 수많은 관람자들의 눈에 반복됨으로써 보편적 진리인 양 고착된다. 미술관은 미키 볼이 문화제국주의 전략이라고 한 ‘반복(repetition)’을 실천하는 장소이며,67) 주류미술관의 입장을 직·간접적으로 반복하는 위성미술관은 이 전략을 각 지역에서 실천하는 전초기지인 셈이다. ‘미제국주의’의 문화적 무기라는 모마의 오명68)은 최근의 구겐하임에 더 적합한 이름이다.

이러한 문화제국주의에 대한 대안으로 다문화주의(multiculturalism)에 근거한 전시나 각 지역의 특수상황을 고려한 미술관 정책이 시도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들 또한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시스템을 벗어나기 어려운 면에서는 예외가 아니다. 비엔날레 등 많은 국제전에서 볼 수 있듯이, ‘글로벌리티(globality)’에 대처하기 위한 ‘로컬리티(locality)’마저 ‘차이’를 마케팅하는 미술시장의 상품적 가치가 되고 있는데, 주류미술관 또한 그것에 공모하고 있다. 심지어는 주류미술관이 각 문화의 정체성을 제조해 내는 기구가, 큐레이터는 집단적 자아의 이미지를 틀을 짓고 포장하여 파는 문화 브로커(cultural broker)가 되는 것을 목격할 수 있다.69) 19세기의 만국박람회에서 시작된 전통이 모마의 <프리미티비즘전>(1984)을 거쳐 최근의 <메이드 인 캘리포니아전>에 이르기까지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주류미술관들은 “대가들을 실질적으로 독점하고 있는…미술의 OPEC을 이루고 있다.”70) 그것들은 고도의 시장가치를 가진 상품을 발판 삼아 전세계적인 성장을 꿈꾸는, 순수 예술을 전파한다는 미명 아래 전지구적인 자본주의 체제 건설에 공모하는 다국적기업이 되어 가고 있다. 오도허티가 이미 화이트
큐브에서 그 징조를 감지한 ‘장소(place)가 아닌 영토(territory)를 구축하려는’71) 야망이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Ⅳ. 맺음글


“미술관은 카지노와 마찬가지로 결코 잃지 않는다”72)는 아도르노의 말처럼, 미술관은 근대 서구 미술사에서 주류 제도의 자리를 놓쳐 본 적이 없다. “미술관은 일종의 미술관 미술을 만들어 냈는데”73) 그것이 미술 전체를 대변하여 온 셈이므로 “미술관이 미술을 만들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는 미술관이 근대를 추진해 온 자본주의와 함께 태어나 그것과 역사를 공유해 오면서 그 주류 세력인 부르주아 엘리트의 이데올로기에 부응하고 공모해 왔음을 환기시킨다
.
19세기 미술관에서 모던 미술관으로, 그리고 포스트모던 미술관으로 변화되어 온 그 다양한 외양은 기존 체제에 적응하는 의태와 같은 것으로 각 시대가 요구하는 형태들을 취해 왔을 뿐, 그 줄기는 같은 연장선을 이룬다. 그것들은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라는 같은 맥락의 서로 다른 역사적 재현일 뿐이다. 미술관이 성전이라면 그것은 ‘돈’이라는 세속의 신을 좇는 성전임을 배제할 수 없다. 미술관은 “상상을 초월하는 ‘부’의 미스터리를 표상하는 성유물로 가득 차 있다”는 존 버거의 표현처럼,74) 미술관의 성스러움은 세속에서 기인하고 그것을 투영하고 보장하는 성스러움인 것이다.

이러한 성과 속의 관계를 가장 잘 증거하는 것이 성전의 외양으로 감추어져 온 세속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1970년대 이후의 미술관이다. “미학적 이상주의와 상업이 완벽하게 중첩된 현장”75)으로 일컬어지는 포스트모던 미술관은 순수한 화이트 큐브가 경제적 부의 기표였으며, 작품을 각각 격리시키는 진열방식이 시각적 소비를 극대화한 스펙터클의 단초이자 상품으로서의 작품의 계기였고, 따라서 그것을 소유한 미술관은 기업이 될 운명을 내장하고 있었음을 폭로한다. 결국 미술관의 성과 속은 모두 특정 계층의 이해관계를 재현하고 지지하는 방향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미술관의 성과 속이, 또는 예술의 이상과 현실이 어느 때보다 첨예하게 부딪치는 이 시대는 예술의 사활을 벼리는 결정적 지점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같은 동전의 양면인 이 둘이 양자 택일의 대상이 될 수는 없다. 오히려 그 팽팽한 대립의 상태에서 비판의식을 일깨우고 따라서 좀더 진전된 담론을 이끌어 낼 가능성을 기대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성과 속의 날카로운 대립이 두드러지기 시작한 1970년대부터 미술 내부에서 맴돌던 담론의 방향을 그 틀로 옮긴 제도비판 담론이 회자하고 그것이 새로운 미술과 미술관의 형태를 촉구한 것이 그 예다.

모든 근원적 물음들이 그런 것처럼, 미술관의 성과 속 그리고 그것이 제기하는 엘리티즘과 포퓰리즘에 대해서도 궁극적인 답은 없다. 그러나 나는 서로 다른 미술관이 번성하고 그 이상들이 충돌하는 ‘브레이브 뉴 뮤지엄’76)의 시대에 헉슬리가 경고한 것과 정반대의 ‘브레이브 뉴 월드’를 꿈꾸지 않을 수 없다. ■
위 글은 미술사학연구회의 논문집 《미술사학보》 제17집에 실린 내용을 수정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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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1) Germain Bazin, The Museum Age(trans. Jane van Nuis Cahill), Universe Books, 1967, 278
2) 1995년 바르셀로나 타피에스 재단에서는 ‘미술관의 종말’이라는 주제로 전시와 심포지엄을 열고 이를 다음과 같은 책으로 엮었다: The End of the Museum, Fundaci Antoni T pies, 1996
3) Pam Meecham and Julie Sheldon, Modern Art: A Critical Introduction, Routledge, 2000, 192
4) Martha Ward, “What’s Important about the History of Modern Art Exhibitions?”, Thinking about Exhibitions(eds. Reesa Greenberg, Bruce W. Ferguson, and Sandy Nairne), Routledge, 1996, 454 참조
5) 루브르 미술관이 개관기념식을 가진 1793년 8월 10일은 군주제 함락 기념일이었다.
6) 이 논문에서는 뉴욕현대미술관을 비롯한 현대미술관들이 창립될 무렵인 1930년대 이후에서 1960년대까지의 모더니즘 시기의 미술관을 모던 미술관으로, 포스트모더니즘과 함께 새로운 개념의 현대미술관들이 등장하기 시작한 1970년대 이후의 미술관을 포스트모던 미술관으로 지칭하고자 한다.
7) Charles Jencks, 제34회 국제평론가협회(AICA) 개회 강연, 2000. 9. 13
8) Brian O’Doherty(1976, 1981, 1986), Inside the White Cube: The Ideology of the Gallery Space (expanded edition), Univ. of California Press, 1999, 14 오도허티는 이미 1972년에 《Museum in Crisis》라는 책을 엮으면서 미술관을 담론화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의 논지가 구체화된 것은 1975년 1월 로스엔젤레스 카운티 미술관에서의 ‘화이트 큐브 안에서:1855∼1974’라는 강연을 통해서다. 이것이 다음해 《아트포럼》에 세 개의 글로 실리면서 더 발전되었고 1986년에는 그해에 쓴 글이 첨가되어 책으로 묶였다.
9) 제르멩 바젱은 현대미술관을 걸작을 잘 보존하는 ‘클리닉(clinic)’이라 하였다. Bazin(1967) 265
10) O’Doherty(1976), “Notes on the Gallery Space”, Inside the White Cube, 14∼15 Bazin(1967), 265 그는 그 공간에서는 소방 호스마저 “미학적 수수께끼(aesthetic conundrum)”처럼 보인다고 하였다.
11) 추상미술과 모던미술관의 관계에 대해서는 Christoph Grunenberg, “The Modern Art Museum”, Contemporary Cultures of Display(ed. Emma Barker), Yale Univ. Press, 1999, 31 참조
12) Thomas McEvilley(1986), “Introduction”, Inside the White Cube, 8
13) 괴테는 드레스덴 미술관을 이렇게 묘사하였으며, 그곳에서의 체험을 “신의 집(House of God)에 들어갈 때의 감정”에 비유하였다(The Autobiography of Johann Wolfgang von Goethe [trans. John Oxenford], Horizon Press, 1969, 346∼347).
14) Duncan(1995), 17
15) Carol Duncan and Alan Wallach, “The Museum of Modern Art as Late Capitalist Ritual:An Iconographic Analysis”, Marxist Perspectives, Winter 1978, 28∼51
16) O’Doherty(1976), 15
17) 예컨대 입체주의 방 입구에는 피카소의 <아비뇽의 여인들>이, 추상표현주의 방 입구에는 드 쿠닝의 <여인>이 걸려 있다.
18) Rosalind Krauss(1986), “Postmodernism’s Museum without Walls”, Thinking about Exhibitions, 345
19) 앨런 왈락은 “미술관의 실내는 살균된 실험실 같은 공간으로 바뀌었다. 닫히고 고립되고 인공적으로 조명되고 명백히 중성적인 환경에서 관람자들은 고립된 표본들처럼 전시된 미술작품들을 연구한다”고 하였다: Alan Wallach, “The Museum of Modern Art:the Past’s Future”, Journal of Design History, 5:3(1992), 209(Reesa Greenberg, “The Exhibited Redistributed”, Thinking about Exhibitions, 353에서 재인용).
20) McEvilley(1986), 9 참조
21) 이는 모마 컬렉션과 그 카탈로그의 목표로 언급되었다:Masters of Modern Art, MoMA, 1958, 7
22) Jonathan Crary, “19th Century Reality Effects”, 뉴욕시립대학 대학원센터 심포지엄(‘The Great Exhibition and Its Legacy’) 강연, 2001. 5. 4
23) Walter Benjamin, “Das Passagen-Werk”, Gesammelte Schriften(ed. Rolf Tiedemann), Suhrkamp, 1989(3rd edition),v.1, 522(Christoph Grunenberg,“The Politics of Presentation:The Museum of Modern Art, New York”, Art Apart:Art Institutions and Ideology Across England and North America(ed. Marcia Pointon], Manchester Univ. Press, 1994, 201에서 재인용)
24) Grunenberg(1999), 31
25) O’Doherty(1976), 34
26) 로잘린 크라우스가 포스트모던 전시장의 특성을 이렇게 표현하였다: Krauss(1986), 347
27) 아도르노는 폴 발레리의 “Le Probl me des Mus es”, Pi ces sur l’art(1934)의 내용을 이런 식으로 해석하였다:Theodor W. Adorno(1967), “Val ry Proust Museum’ in memory of Hermann von Grab”, Prisms(trans. Samuel and Shierry Weber), The MIT Press, 1981, 177
28) Guy Debord(1967), The Society of the Spectacle(trans. Donald Nicholson-Smith), Zone Books, 1994
29) Jonathan Crary, 뉴욕시립대학 대학원센터 심포지엄 강연, 2001. 5. 4
30) Michael Fried, “Art and Objecthood”, Artforum, June 1967, 12∼23;Fredric Jameson,
“Postmodernism, or The Cultural Logic of Late Capitalism”, New Left Review, July-August 1984, 53∼93
31) 그 예로 모마의 <앙리 마티스전>과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의 <클로드 모네:1840∼1926전>의 관람인원은 거의 100만에 달했다고 한다:Emma Barker, “Exhibiting the Canon:The Blockbuster Show”, Contemporary Cultures of Display, 129
32) 앞의 글, 132
33) Jason E. Kaufman, “It takes Monet to make money”, Art Newspaper, no. 55, January 1996(앞의 글 140에서 재인용)
34) <테이트 모던:컬렉션 2000>(2000), <모마 2000>(1999∼2001), 구겐하임의 <글로벌 구겐하임〉(2001) 등 이런 종류의 전시들이 최근에 성행하고 있다.
35)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미술과 엠파이어 시티:뉴욕, 1825∼1861전>(2000∼2001)도 유사한 예다.
36) 이 전시의 브로셔 내용.
37) Stephanie Barron, “Introduction:The Making of ‘Made in California’”, Made in California: Art, Image, and Identity, 1900∼2000(exh. cat.), Los Angeles County Museum of Art, Univ. of California Press, 2000, 31. 바론은 다음과 같은 앨런 왈락의 글을 인용하여 이와 같은 기획의도를 밝히고 있다:Alan Wallach, Exhibiting Contradictions:Essays on the Art Museum in the United States, Univ. of Massachusetts Press, 1998, 6
38) 이미 1930년대에 모마에서 기획한 디자인전들이 이런 상품전의 선례이다. 최근의 예로는 <모터사이클의 예술>(1998, Guggenheim), <얼굴에서 얼굴로:시세이도와 미의 제조 1900∼2000>(2000, Grey Art Gallery, NYU), <작업공간(Workspheres)>(2001, MoMA) 등이 있다. 또한 메트로폴리탄 미술관도 디오르, 티파니, 파베르제, 카르티에, 베르사체 등의 패션전을 열었다.
39) 이 전시의 디스플레이는 설치 및 무대 미술가인 로버트 윌슨(Robert Wilson)이 맡았다.
40) 아르마니는 구겐하임 미술관에 1500만 달러를 기부했는데, 미술관은 이것이 전시와 무관하다고 주장하지만 전시와 동시에 이루어진 그 기부가 전시와 무관할 리 없다(Roberta Smith, “Memo to Art Museums:Don’t Give Up on Art”, The New York Times, 2000. 12. 3, section 2, 35)
41) 여기 전시된 450벌의 옷 중 250벌에 가까운 수가 1995년 이후의 것이고 나머지는 1990∼1994년 것이라는 점은 이 전시가 그의 회고전이라기보다 최근의 경향을 파는 패션쇼에 가깝다는 것을 예시한다.
42) Smith(2000), 35
43) Timothy J. Clark, “Jackson Pollock’s Abstraction”, Reconstructing Modernism(ed. Serge Guilbaut), The MIT Press, 1990, 178 참조
44) <힙합전>에서는 힙합 패션을 미술, 음악을 포함한 1980년대 이후의 문화사적 자료들과 함께 전시하였고 <재클린전>에서는 스타와 같은 퍼스트레이디의 패션을 당대의 사회적 상황을 증언하는 사진, 비디오 자료 등과 함께 전시하였다.
45) Peter Wollen, “Introduction”, Visual Display:Culture Beyond Appearances(eds. Lynne Cooke and Peter Wollen), The New Press, 1995, 9.
46) Tony Bennett(1988), “The Exhibitionary Complex”, Thinking about Exhibitions, 90∼91. 토니 베네트는 또한 미술관과 교도소를 권력의 야누스적 두 얼굴이라고 하였다(앞의 글, 109). 그의 말을 시사하듯 미술관과 교도소는 동시대인 18세기 말에 세워졌고 특히 밀뱅크의 테이트 갤러리는 교도소 자리에 세워졌다.
47) Neil Harris, “Museums, Merchandising and Popular Taste:the struggle for influence”, Material Culture and the Study of American Life, W.W. Norton, 1978, 14(Bennett[1988], 90에서 재인용)
48) Bennett(1988), 84∼91
49) Michel Foucault, Power/Knowledge:Selected Interviews and Other Writings, 1972∼1977(ed. Colin Gordon), Pantheon, 1980 참조
50) Wollen(1995), 9
51) Barker(1999), 13
52) Theodor Adorno, “Letters to Walter Benjamin”, Aesthetics and Politics(trans. & ed. Ronald Taylor), NLB, 1977, 114
53) Adorno(1967), 175
54) Walter Benjamin(1937), “Eduard Fuchs, Collecter and Historian”, One-Way Street and Other Writings(trans. Edmund Jephcott and Kingsley Shorter), Harcourt Brace Janovich, 1979, 360
55) Rosalind Krauss, “Sculpture in the Expanded Field”, The Originality of the Avant-Garde and Other Modernist Myths, The MIT Press, 1985, 280
56) 실제로도 근대 미술관의 효시인 루브르 미술관에서부터 컬렉션의 보존과 유통을 위한 작품의 복제가 관례가 되어 왔다. 1793년 판화가 피에르 로랑(Pierre Laurent)은 루브르 컬렉션 전체의 동판화 복제 허가를 받았으며, 사진이 발명된 후에는 미술관의 작품이 사진으로 복제되어 왔다(Sherman[1994], 137 참조).
57) Philip Weiss, “Selling the Collection”, Art in America, July 1990, 124∼131 참조
58) 앞의 글, 131
59) Lawrence Alloway, “The Great Curatorial Dim-Out”, Thinking about Exhibitions, 224 참조
오도허티는 낸시 행크스(Nancy Hanks)의 말을 빌려 이사회를 “미술관의 가장 큰 적”이라고 하였다(O‘Doherty[1986], “Afterword”, Inside the White Cube, 112).
60) 버릇, 태도(habit) 등과 유사한 의미를 갖는 ‘아비투스’는 사회적 계층에 따른 문화적 태도를 지칭하는 상대적 개념이다:Zolberg(1994), 56 참조
61) 최근에는 이런 미술관간의 상호 협조 체제가 빈번해졌는데, 휴스턴 미술관과 푸쉬킨 미술관, 모마와 테이트 갤러리, 폴 게티 미술관과 드레스덴 국립미술 컬렉션 등이 그 예다.
62) 57만평방 피트의 건물, 28만평방 피트의 조각공원으로 된 이 프로젝트의 총 9억 달러에 달하는 예산 중 뉴욕시는 3280만 달러 보조금과 3500만 달러 가치의 대지를 무료임대해 주기로 약속하였다. 이 계획이 실현되면 연간 2500만의 방문객이 예상된다(Timothy Williams, “Stilted Art”, New York Resident, December 4, 14).
63) Larry Rother, “Brazilians Dazzled(Mostly) by Prospect of a Guggenheim”, The New York Times, November 25, 2000, B9, B16;Mery Galanternick, “Guggenheim Going to Brazil”, Artnews, December 2000, 92; Bill Hinchberger, “Brazil May Get Four Guggenheims”, Artnews, June 2001, 72 리우 데 자네이루(Rio De Janeiro)가 가장 유력하며, 그 외에도 살바도르(Salvador), 레시페(Recife), 쿠리티바(Curitiva) 등도 후보 도시로 논의되고 있다.
64) 《뉴욕타임스》의 마이클 킴멀만은 이를 “money-making escapade”라 하였다: Michael Kimmelman, “As the Tate Towarded, a Great Guggenheim Got a Lift”, The New York Times, December 31, 2000
65) Galanternick(2000), 92
66) 레이먼드 라이언은 맥도날드에 비유하여 이렇게 풍자하였다:Raymund Ryan, “New Frontiers”, Tate:The Art Magazine, issue 21, 2000, 93
67) Mieke Bal, “The Discourse of the Museum”, Thinking about Exhibitions, 204∼205
68) Max Kozloff, “American Painting during the Cold War”, Artforum, May 1973, 43∼54;Eva Cockcroft, “Abstract Expression‎ism, Weapon of the Cold War”, Artforum, June 1974, 39∼41
69) Mari Carmen Ram rez, “Brokering Identities:Art Curators and the Politics of Cultural Representation”, Thinking about Exhibitions, 21∼24참조
70) Weiss(1990), 131 71) O’Doherty(1976), 27 72) Adorno(1967), 177
73) O’Doherty(1986), 112 74)John Berger, Ways of Seeing, Viking Press, 1972, 24
75) O’Doherty(1986), 113
76) 뉴 스쿨(New School)에서 열린 심포지움의 주제(2000. 10.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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