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초에 보름간 이집트를 함께 여행하며 친해진 일행 중 한 부부가 이번에 우리를 함양으로 초청했다. 지리산 기슭에 자리한 그들의 집은 푸른 잔디 위에 그림처럼 서 있었고, 부부는 유유자적하며 마치 신선놀음 같은 삶을 살고 있었다. 함께 밥을 지어 먹고 근처 상림공원을 산책하며 여유로운 하루를 보냈다. 서울에서 살던 이들 부부가 은퇴 후 이곳에 귀촌한 지는 벌써 7년이 되었다고 했다. 소음도, 인공의 불빛도 없는 고요한 밤하늘에는 은하수가 강물처럼 흐르고 있었다.
밤사이 비가 내린 덕분에 아침 공기가 무척 상큼했다. 우리는 남원의 지리산 뱀사골로 향했다. 지리적으로 함양과 남원은 경계를 맞대고 있어 사실상 같은 생활권이다. 푸른 숲과 맑은 계곡은 TV 화면에서 보던 아름다운 모습 그대로였다. 싱그러운 초록 잎을 씻어낸 옥수(玉水) 같은 맑은 물이 바위에 부딪혀 하얗게 부서졌고, 울창한 숲은 햇빛을 가려주어 한없이 시원했다. 그렇게 먹고, 즐기고, 대화를 나누다 보니 어느덧 만 하루가 지나 떠날 시간이 되었다.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도 예약되어 있는 법. 함양에서의 일정을 마치고 우리는 뿔뿔이 흩어졌다. 나는 이틀 뒤에 있을 신안 섬 여행을 앞두고 먼저 여수로 향했다. KTX는 우리를 편안하게 여수까지 데려다주었다. 여수의 대표적 명소인 향일암을 찾았는데, 낯선 도시라 길을 헤매기 일쑤였다. 향일암을 둘러본 뒤 해상케이블카를 타며 하루를 마무리했다. 생각했던 것보다 도시 규모가 크지 않아 의외였지만, 과연 ‘여수 밤바다’가 왜 아름답다고 하는지 눈으로 확인한 저녁이었다.
큰맘 먹고 내려가긴 했지만, 막상 가보니 갈 곳이 마땅치 않아 다음 날에는 금오도를 찾았다. 절벽 길인 ‘비렁길’로 유명해진 섬이다. 본래 주민들이 염소를 키우며 다니던 벼랑길을 이어 만든 탐방로인데, 지금은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는 명소가 되었다. 절벽에 부딪혀 부서지는 파도는 쪽빛 바다를 만들어냈고, 징검다리처럼 올망졸망하게 떠 있는 섬들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이어지며 정겨운 풍경을 연출했다. 아무리 빼어난 경치라도 몸이 힘들면 감흥이 반감되는 법이기에, 무리하지 않으려고 코스의 절반만 걸었다.
하지만 되돌아오는 길은 만만치 않았다. 부두에 도착해 버스편을 알아보니 자주 다닌다는 말과 달리 실제로는 한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결국 숙소로 돌아오는 데만 반나절이 걸렸다. 몸은 지쳤지만, 밤바다에 은은하게 비친 여수의 야경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여수 일정을 마치고 이번에는 광주로 향했다. 이번 여행팀의 집결지가 광주송정역이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진짜 목적지는 신안 앞바다의 섬들이었다. 맨 처음 도착한 곳은 증도와 지도였다. 무안군과 다리로 연결되어 있어 섬인 듯 섬 같지 않은 곳이었다. 날이 너무 더워 도저히 걸어 다닐 수가 없을 정도였다. 내리쬐는 햇빛이 바다에 반사되어 더위가 배로 더해지는 듯했다. 결국 수박 겉 핥기 식으로 대충 둘러본 뒤 서둘러 배에 올랐다.
햇볕이 이글거리는 병풍도에 내리니, 이 섬의 주제는 온통 ‘맨드라미’였다. 규모가 큰 맨드라미 공원이 조성되어 있었고 동네 지붕들도 전부 분홍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특히 이 지역이 독특한 것은 병풍도, 대기점도, 소기점도, 소악도가 ‘노두길(섬과 섬을 잇는 돌 징검다리 길)’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다. 밀물 때는 제각각 독립된 섬이지만, 썰물이 되면 네 개의 섬이 하나로 이어진다.
물이 빠진 노두길을 따라 이동해 대기점도에 숙소를 잡았다. 옛집을 개량해 운영하는 정겨운 민박집이었다. 울타리 대신 화사한 접시꽃이 집을 빙 둘러싸고 있어 무척 아름다웠다. 이곳이 유명해진 것은 섬 경로를 따라 ‘12사도 예배당’ 건물을 세우고 산책길을 조성했기 때문이다. 예술가들이 정성껏 만든 조형물들이 주변 자연경관과 어우러져 멋진 명물이 되어 있었다. 이른바 ‘12사도길’이다. 본래 성지가 아닌 곳이 아름다운 성지순례길로 재탄생한 셈이다. 신앙인에게는 깊은 순례의 의미를, 일반 관광객에게는 빼어난 경치를 선사하며 사람들의 발길을 모으고 있었다.
신안군은 수많은 섬으로 이루어진 곳이다. 이곳 출신 군수가 섬 가꾸기에 나선 이후 ‘1섬 1정원’을 목표로 꾸준히 노력한 결과, 아름다운 섬이라는 입소문이 퍼지며 수많은 관광객을 끌어모으고 있다고 한다. 덕분에 주민들의 소득도 높아지고 인구도 늘어나는 활기찬 군이 되었다. 여행을 끝내고 나서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 군수는 4연임을 한 뒤 이번 선거에 다시 도전했다가 낙선했다고 한다.
12사도길 여정을 마치고 안좌도행 배에 올랐다. 이곳에는 온통 보랏빛으로 물든 ‘퍼플섬’이 있다. 섬 속의 섬인 박지도는 그야말로 보라색 천지였다. 사람들의 옷차림도, 다리도, 심지어 화장실 건물까지 온통 보라색이었다. 이 섬의 자랑인 라벤더는 섬 반대편 언덕에 있었는데, 산책로를 따라 피어난 보라색 엉겅퀴 꽃들이 우리를 안내해 주었다. 다만 라벤더 꽃이 이미 끝물이라 한창 피어났을 때의 절경을 보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움으로 남았다.
다시 배를 타고 비금도로 건너갔다. 풍차가 돌아가는 아름다운 해변이 끝없이 펼쳐졌고, 하늘을 붉게 물들인 석양은 절로 환호성을 지르게 만들었다. 이곳 바다는 섬인지 호수인지 헷갈릴 정도로 물결이 잔잔했다. 점점이 떠 있는 섬들이 저녁 안개에 싸여 있는 모습은 대단히 몽환적이었다. 파도 소리만 고요하게 들려오는 해변가 숙소에서 잠을 청했다. 비몽사몽 간에 파도 소리가 점차 잦아드는가 싶더니 어느새 날이 밝았다.
아침에는 영화 《자산어보》 촬영지를 찾아갔다. 한 폭의 풍경화 같은 언덕 위에 초가집 한 채가 외로이 서 있었다. 유배 중이던 정약전 선생이 들으면 화를 내실지도 모르겠지만, ‘이런 곳이라면 유배 생활도 꽤 낭만적이었겠구나’ 하는 실없는 생각이 스쳤다. 이어 험한 산길을 넘어 도초도 하트해변으로 향했다. 인적 하나 없는 그곳은 발자국 하나 남기는 것조차 미안할 만큼 깨끗하고 고요했다.
마지막으로 들른 수국정원에는 이제 막 수국이 꽃망울을 터뜨리며 피어나고 있었다. 라벤더는 지는 중이었고, 수국은 아직 만개하지 않았으니 둘 다 완벽한 타이밍에 보지 못한 셈이다. 하지만 이 또한 나의 욕심 때문이리라. 마지막으로 별미인 시금치 칼국수를 맛보며 섬 여행을 훈훈하게 마무리했다. 우리는 다시 광주송정역에서 기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참았던 피로감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나름대로 무리하지 않으려고 애썼지만, 이제 몸이 예전 같지 않음을 느낀다. 여행의 즐거움 뒤에 찾아오는 일상으로의 회복 속도가 점점 더뎌진다. 아무래도 이번 여행의 여독은 일주일 정도 지나야 완전히 풀릴 것 같다.
6월1일 - 6월6일
함양, 남원, 여수, 신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