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극
절대 평등과 원융(圓融)의 조화
태극이 불교가 아니라 성리학에 뿌리를 두었다는 것은 누구나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런데 사찰 돌계단의 소맷돌이나 건물 서까래의 마구리, 문의 궁창 등에도 태극문양이 장식되어 있고, 때로는 사찰 경내에 있는 사당의 대문이나 벽체에도 나타난다. 성리학에 바탕을 두는 태극 도형이 이렇듯 사찰의 장식문양으로 수용된 까닭은 무엇일까?
태극이라는 용어는 『주역』(周易)1) 「계사」(繫辭) 상(上)에 나오는 말이다. 태극 도형은 중국 송나라의 주돈이(周敦頤, 1017~1073)가 도상화한 것이며, 원상 속에 양과 음이 위아래로 상대하고 있는 형태이다. 양을 위에 두고 음을 아래에 둔 이유는 천(天)·양(陽)·상(上), 지(地)·음(陰)·하(下)의 본래 위치에 따른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주돈이가 태극 도형을 만들기 이전부터 태극이 장식문양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사찰 건물에 장식된 태극문양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는 경주 감은사터 석재의 태극문양이 있다. 감은사는 신라 682년(신문왕 1)에 창건된 절이므로 주돈이의 태극 도형보다 약 400년 앞선 시기의 것이다. 창건 당시 축대의 일부였을 것으로 여겨지는 장대석 표면에 태극문양이 새겨져 있으며, 양의(陽儀)와 음의(陰儀)가 서로 머리를 맞대고 회전하는 바람개비 형태이다. 또한 고려시대의 불교 유적에서도 태극문양이 발견되는데, 충숙왕(1313~1329) 때 창건된 양주 회암사터에는 두 곳에 석조계단이 남아 있는데 그 소맷돌 양쪽에 각각 이태극과 삼태극의 문양이 음각되어 있다. 감은사터의 것과 달리 양의와 음의가 여백이 없이 맞물려 돌아가는 형태이며 좌우로 서로 상대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회암사터 계단의 태극문양
이런 사실은 중국에서 태극 도형과 이념 등이 전래되기 이전부터 우리나라에서 그 도형이나 관련 사상을 일찍부터 이해하고 활용해왔음을 말해준다. 이 전통이 조선시대로 이어져 사찰 곳곳에 태극문양이 시문되었다. 몇 가지 예를 들면 양산 통도사 관음전에서는 법당 문의 궁창에, 의성 고운사 우화루에서는 모든 서까래의 끝에 태극문양이 그려져 있다. 해남 대흥사 경내에 있는 표충사의 대문에도 태극문양이 크게 시문되어 있다.
사찰에 장식된 태극은 그 형식으로 볼 때 이태극(二太極)과 삼태극(三太極)의 형식이 혼재되어 있다. 양의와 음의가 원상 속에서 서로 의지하며 맞물려 돌아가는 형태인 이태극은 본시 음과 양이 개별성과 의존성을 동시에 지니면서 상호 융합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한편 삼태극은 천·지·인 삼재(三才)를 상징하는 것으로, 각각 홍색·청색·황색으로 표현된다. 하늘의 도를 이루는 것은 음과 양이고, 땅의 도를 이루는 것은 유(柔)와 강(剛)이고, 사람의 도를 세우는 것은 인(仁)과 의(義)임을 세 개의 의(儀)로 드러낸 것이다. 삼태극도 이태극의 원리와 마찬가지로 삼재가 각기 개별성을 지니고 있으나 서로 의존하고 융합하는 성질을 지니고 있음을 상징한다.
성리학에서 태극은 우주 만상의 근원이며 인간 생명의 원천으로서의 진리를 표현한 것으로, 사멸(死滅)이 없는 구원(久遠)의 상(相)으로 이해된다. 한편 불교에서 불성(佛性)이란 심오하고 참된 법으로, 불생 불멸하는 만물의 실체(實體)를 말한다. 이렇게 본다면 태극과 불성은 모두 우주와 인간의 본성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서로 통하고 있다.
한편 조선의 유학자 이황(李滉, 1501~1570)은 유교적 입장에서 태극을 말하였는데, “그것은 지극히 존귀한 것으로 만물을 명령하는 자리이며, 어떠한 것에도 명령을 받지 않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태극의 원리를 내포하고 있으나, 그 원리는 인간 주체로부터 인식되는 것이므로, 인도(人道)의 극치가 곧 태극이며, 태극이 다름 아닌 인극(人極)이라는 뜻이다.
또한 석가모니가 탄생할 당시 사방으로 일곱 걸음씩 걸으면서 한 손으로는 하늘을, 다른 한 손으로 땅을 가리키며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存)이라 외쳤다 한다. ‘나’는 하늘 위, 하늘 아래 홀로 높고 가장 존귀한 위치에 있음을 설파한 것이다. 여기서 ‘나’라는 존재는 ‘참된 나’로서 불성을 가리킨다. 불성을 깨달아 만물을 명령하는 높고 존귀한 경지에 이르러 있는 것이 ‘유아독존’이며, 그것은 성리학에서 말하는 인극의 경지와 통한다. 따라서 태극의 극치인 인극의 경지는 곧 불교에서 말하는 해탈의 경지를 뜻한다.
천상의 달이 천강(千江)에 비칠 때 강마다 둥근 달이 있는 것처럼, 천지로 말하면 천지가 태극이라 할 수 있으며, 만물로 말하면 만물 하나하나가 모두 태극의 원만성을 구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불교에서 우주의 모든 존재들은 하나하나가 모두 평등하며, 아무리 작은 것이라 해도 무한한 불성을 가지고 있다. 불성은 모든 것을 통섭하는 진리이고, 또한 우주의 실상(實相)인 것이다. 이 또한 태극의 원리와 통한다.
태극 도형이 사찰의 장식문양으로 사용될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이유는 태극이 지닌 상반(相反)·융합의 원리와 사상이 절대 평등과 원융(圓融)을 추구하는 불교의 교의와 상통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뜻이 아무리 서로 통한다고 해도 수용의 자세가 되어 있지 않으면 태극문양 자체를 사찰의 장식문양으로 채택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돌이켜보면 불교 신앙 체계의 한 축을 이루는 산신각의 산신은 불교가 포용한 불교 밖의 무속신(巫俗神)이다. 또 양의 수(기수)를 적용한 탑의 층수나 불전의 칸수 등도 불교와 직접 관련이 없는 음양오행사상(陰陽五行思想)이 적용된 것이다. 이처럼 불교는 특유의 포용력으로 불교 외적인 요소들을 폭넓게 수용해왔다. 성리학에 뿌리를 둔 태극 도형이 사찰 장식문양의 한 요소로 정착된 것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각주
- 1 주역: 고대 중국의 철학서. 만상(萬象)을 음양이원으로 설명하여 그 으뜸을 태극이라 하였고, 거기서 다시 64괘를 만들었으며, 이에 맞추어 철학과 윤리, 정치상의 해석을 덧붙였다. 주나라 때 크게 완성되었기 때문에 『주역』이라 하고 『역경』(易經)이라고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