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교 문헌에 ‘마음 심(心)’자가 빠져버린다면 어떻게 될까. 기독교를 비롯한 서양의 종교문헌에 ‘하나님’이라는 말이 빠져버린다면 어떻게 될까. 만일, 불교인들의 입에서 ‘마음’이라는 말이 사라진다면, 그리고 기독교도들의 입에서 ‘하나님’이라는 말이 사라진다면 어떻게 될까. 그것은 커다란 재난임에 틀림없다. 그때의 불교인은 이미 불교인이 아니고 기독교인은 기독교인이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일 그들이 계속 불교인임을 자처하고 기독교인임을 내세운다면 그것은 그들이 불교인이고 기독교인이기 때문이 아니라 딴 속셈이 있어서 그럴 뿐임을 누가 모를까.
근 20년 전의 일이다. 냉전의 검은 구름이 아직 걷히지 않았을 때, 동구권과 북경을 비롯한 중국의 여러 도시를 돌아본 적이 있었다. 거기에도 절이 있었고 교회가 있었다. 현지의 절에 주지스님을 만나보고 목사님 신부님을 다 만나 보았지만 그들은 불교인도 아니고 기독교인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 심(心)자가 빠져나간 불교인들, 하나님이라는 말이 실종한 기독교인들을 보고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한국엔 지금 종교인들의 영향력이 막강하다고 한다. 이것은 미국도 마찬가지다. 어떤 이는 이를 ‘네오 콘’(Neo-Conservatism: 부국강병을 앞세우는 극우적 신보수주의)과 ‘펀더맨탈리즘’(Fundamentalism: 성경을 글자 그대로 믿자는 종교적 근본주의)의 합작 현상이라고 분석한다. 종교와 경제와 정치가 합작하여 공동전선을 펴고 있다는 뜻이다. 모택동의 국공합작이나 해방 즉후 우리나라의 좌우합작처럼 도저히 붙을 수 없는 서로 다른 것들이 함께 붙어 모종의 공동이익을 추구하고 있다는 말이다.
이러한 합작에 앞장 선 사람들의 입에서는 하나님이란 말과 마음이란 말이 때도 없이 튀어나온다. 이들은 하루를 기도로 시작하고 기도로 끝마친다고 한다. 일을 시작할 때도 기도하고, 일하고 나서도 기도한다. 심지어는 쌈판에서 총질을 할 때도 기도부터 하고, 총질을 하다가도 기도하고, 총질을 마치고 나서도 기도한단다. 다시 말하면 사람을 죽이면서도 기도한다는 말이다. 11세기 유럽의 ‘십자군 전쟁판’을 연상케 한다.
선은 악의 은신처라는 말이 있다. 우리는 선을 가장한 악의 정체를 간파할 줄 알아야겠다. 이러한 날카로움이 없으면 사람은 십중팔구 자기도 모르게 악에 물들고 만다. 이렇게 되면 나중엔 물들고서도 물든 줄도 모르고 아무런 부끄럼도 없이 악의 앞잡이 노릇을 태연히 하게 된다. 그러므로 문제는 하나님이나 마음이란 말을 쓰고 안 쓰고에 있지 않다. 하나님이란 말이 회자되는 현장 점검이 시급하다.
종교계의 좋은 말들을 가장 많이 쓰고 있는 사람들이 과연 누구인지, 그리고 그들이 무엇을 노리고 있는지를 꿰뚫어 보아야 한다.
하나님이란 말에는 원래 ‘만인의 종’이란 뜻이 들어있다고 한다. 만인의 종, 이 얼마나 좋은 말인가. 종은 독재자가 될 수 없다. 오늘날 기도하는 사람들의 마음가짐과 행동거조를 보라. 참회를 할 때도 너무 당당하다. 저 힘이 어디서 나올까. 하나님을 독재자로 만들어 놓고 독재자의 특권을 자기들이 누리고 있는 것 같다. 불행히도 우리는 비슷한 현상을 불교계에서도 본다.
지금 불교인들은 ‘마음 심(心)’자 밑에 ‘임금 왕(王)’자 붙이기를 좋아하는 것 같다. 심왕(心王)이란 말이 군주시대엔 보기 좋았을지 모른다. 그러나 불교에서 말하는 마음의 원래 뜻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너무나 겸손하여, 언제나 어디서나 모든 구진 일을 다 도맡아 보살피면서도 보살폈다는 생각조차 없는, 정말 ‘만인의 종노릇’을 말없이 하는, 말하자면 ‘겸허’(謙虛) 그 자체가 불교의 마음이었다.
누군가가 불교의 마음을 변질시켜 버린 것 같다. 초강대국 독재자 같은 무소불위의 마음은 부처님 마음이 아니다. 우리는 되돌아가야 한다. 가장 낮은 것 보다 더 낮은 곳으로 내려가는 부처님 마음자리로 되돌아가야 한다. 그래야 부처님의 길을 일체 중생과 함께 가는 보살(菩薩: bodhisattva)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뉴욕주립대학교 불교학 교수
<2005-01-19/788호>
입력일 : 2005-01-17 09:5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