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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와 사회

회의주의(Skepticism)란 무엇인가?

작성자지발돈쫌|작성시간09.10.13|조회수263 목록 댓글 0

회의주의(Skepticism)란 무엇인가? (정리 - 몰러)

 

참고 : "프랑스 고교 철학", "서양철학사"(B. W. Russell), "서양철학 입문"(R. Osbourne)

 

 

 

○ 회의주의 개요

 

회의주의는 피론의 절대회의설(Absolute Skepticism, Pyrrhonism)에서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아무 것도 믿을 만한 것은 없다는 이 "염세적인" 회의주의는 섹스토스 엠피리코스에 의해 조금 더 정교하고 체계적으로 다듬어졌는데, '저 붉은 사과를 내가 보고 있지만, 그 붉은색에 대한 지각이나 사과의 모양이 내 의식 바깥에서 정말로 존재하는 "붉은 사과"에 의한 것인지, 내가 그렇게 느끼고 생각하는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내 마음'과는 상관없이 존재하는 사물에 의해서 생긴 지각인지, 내가 그냥 그렇게 여기는 것인지에 대한 증거가 충분하지 않다는 관점은 이후에 나오는 회의주의의 뼈대이다.

 

우리가 잘 아는 장자의 호접몽(장자지몽)은 회의주의의 범주에 들어가기는 하지만 엠피리코스의 회의주의와 다소 다른 양상을 띤다. 장자가 낮잠을 자다가 나비가 된 꿈을 꾸었는데, 장자나비는 날아가던 도중 낮잠을 자던 장자를 목격했다. 여기서 장자는 나비가 본 장자가 진짜인지, 나비 꿈을 꾸고 있는 장자가 진짜인지, 나비가 진짜인지를 알 수 없었다.

 

 

☞ 두가지 회의주의를 그림으로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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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mpiricos(175~225) "네가 본 것이 진짜로 존재하는 것인지 니 착각인지 어케 알아?"

 

last scene of "Total Recall"

     "나 방금 끔찍한 생각을 했는디 말여, 이게 죄다 꿈이면 어떡하지?"

     "그럼 꿈깨기 전에 뽀뽀해줘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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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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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uangtzu(B.C. 365~190) "이게 진짜 세상인가? 저게 진짜 세상인가?"

                                     나비의 논평 : 장자 얌마~ 잠깨~~~

 

 

Matrix, Neo meet Morpius 

           "니오, 아주 생생하고 진짜 같은 꿈을 꾸어봤나? 자네가 그 꿈에서 깨어나지 못하면

           어떻게 되나? 꿈의 세계와 진짜 세계의 차이를 어떻게 알아보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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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나 엠피리코스 모두 '나의 지각'이 나에게 전달해주는 정보가 정확하다는 확신을 주지 못한다고 말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회의주의가 '정보가 정확하지 못하다'거나 '그런 정보 또는 그런 정보의 원천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식으로 부정하는 것은 아님을 알아야 한다. 회의주의는 그 정보가 정확한 것인지, 그런 정보의 원천이 존재하기나 하는 것인지를 "의심"하는 것이다. ‘우리의 의식과는 상관없이 존재하는 세계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 것은 ‘그런 세계가 존재한다’고 믿는 것과 마찬가지로 아무런 근거가 없다.

 

 

(영화 Matrix는 니오가 빨간 알약을 선택하는 것으로 외부세계를 보여주는 타협을 했다)

 

 

철학자들은 데카르트를 두고 '근대철학의 아버지'라고 일컫는다. 그리스 시대에 다양하게 제시된 갖가지 철학사조들은 로마시대에 이르러 일부는 더 정교하게 다듬어졌지만, 상당수는 무시되거나 배척당했다. 로마말기부터 주도권을 잡은 기독교로 인해 신을 논증하는 중차대한 임무 외에는 철학이 할 일은 거의 없게 되었고 심지어 다른 일을 하는 것은 용납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엠피리코스의 저작이 재발간되고 또 한 세대가 지난 뒤 데카르트가 회의주의를 본격적으로 탐구하면서 비로소 근ㆍ현대 철학이 시작된 것이다.

 

로마시대부터 중세 암흑기에 이르기까지 철학자(실제로는 신학자)들이 회의주의에 대해 보였던 반응은 혐오감과 경멸이었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외부세계의 존재를 인정하지도 불신하지도 않으면서 세상에 대해 초연하였던 것과는 달리, 교부철학에서 스콜라철학에 이르기까지 신의 실존을 전제하여야 하는 중세 철학자들에게 회의주의는 견딜 수 없는 재앙에 가까운 관념이었다. 이는 현대인들에게도 마찬가지다.

 

데카르트가 재편집한 회의주의는 지금도 그 원형이 유지되고 있으며, 데이빗 흄에 의해 회의주의는 좀 더 견고하고 자세하게 논증되었다. 19세기에 들어와 회의주의는 다시 한 번 철학의 관심 밖으로 밀려나간다. 그러나 제한적인 회의주의는 여전히 유효하다. 예를 들면 영화 메트릭스 속의 세계는 가짜이지만 그러한 메트릭스 자체는 존재한다는 것처럼, 이 세상의 존재는 일단 인정한다는 전제하에 그 속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에 대해서만 의심을 하는 회의주의 같은 것이 그것이다. 이러한 회의주의의 범주에 있는 '과학적 회의주의'에 대해서는 뒤에 별도로 살피기로 한다.

 

 

 

 

○ 데카르트의 회의주의 정형화

 

근대적 회의주의의 원형이 되는 것은 데카르트의 '제일철학에 관한 성찰'의 제일성찰이다. 제일성찰에서 회의주의를 정리한 데카르트는 제이성찰에서 제육성찰에 이르기까지 회의주의를 반박한다.

 

데카르트는 우선 지각들이 자신을 속인다고 가정한다. 인간을 창조하고 인간이 기만당하지 않도록 보살피는 전지전능한 신의 존재를 가정해 보지만 그는 곧 이러한 신의 존재조차도 의심한다. 사물, 풍경, 사건, 형상뿐 아니라 1+1=2, 평면에 있는 삼각형의 내각의 합은 180도라는 순수수학조차도 그는 의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어쩌면 신이 아닌 전지전능한 악마가 존재하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 악마는 1+1=2 같은 계산을 할 때도 우리를 오류에 빠지게 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물론 데카르트는 이런 악마의 존재가 전혀 근거가 없다고 생각하지만, 조금이라도 의혹이 있는 믿음은 모두 의심의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는 원칙을 위해서 전지전능한 악마를 가정하는 것이다.

(물론 신이 장난친다고 가정할 수도 있으나 이러한 의심을 품게 만드는 데에는 별도의 악마를 전제하는 것이 데카르트로서는 기분상 나았다)

 

그러나 제이성찰에서 데카르트는, 오류와 회의에 빠져 무엇이 진짜인지 알 수 없다 하더라도 그러한 것을 생각하는 자신의 존재 자체는 의심할 수 없는 것이라고 보았다. 이후 제육성찰에 이르기까지 그는 회의주의에 대해 나름대로 합리적인 반박을 한다. 물론 현대철학자 중에 데카르트의 회의주의에 대한 반박이 타당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대체로 일종의 순환논증이라고 말한다.

 

어쨌든 제일성찰에서 그가 제시한 회의주의의 원형은 누구도 부정하기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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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에 간 데카르트 선생>

 

아~ 춥다

- 음~ 난로가 참 따뜻하군

- 그런데 난로가 뜨겁다는 걸 어떻게 확신하지?

- 실은 차가운 것인데 악마가 '난로는 뜨겁다'라고 나를 혼란에 빠뜨리는 건지도 몰라

- 아니, 내 앞에 난로가 있기는 한 건가?(여기까지 회의주의)

- 난로가 뜨거운지 차가운지 확신은 못하지만, 이 난로가 있는지 없는지 모르지만

- 이 난로를 생각하는 내가 존재한다는 것은 의심할 수 없어

- 내가 고양이처럼 생겼는지, 세이렌이나 사티로스처럼 생겼는지, 아예 형체가 없는지 모르지만 하여간 그딴 것들을 생각하는 난 존재하자나

>>>>> 그려, 난 생각하고 있구, 긍께 나는 존재하구 있는겨!!! Cogito, Ergo Sum!!!

 

<후배들의 논평>

그래서 어쨌다구... 그건 바깥 세계가 아니라 니가 존재한다는 것만 증명된 거쥐~

그리고 말여... 여전히 그것두 의심할 수 있거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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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의주의에 반대하는 관념론 등장

 

일부 철학자들은 데카르트가 지각을 잘못 이해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주교이기도 했던 버클리는 지각에는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는 본질적인 지표가 있다고 보고, 진짜 지각은 가짜 지각에 비해 더 생생하다는 주장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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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카르트 : 이게 뜨겁다는 것을 어떻게 확신하지? 난로가 내 앞에 있기는 한 걸까?

버클리 : 이 10bird같은 넘~ 손 대보면 알거 아냐. 존재하는 것은 지각되는 것이고, 지각되는건 다 존재하는 거여(to be is to be perceived, esse est percipi)

데카르트 : 손대면 뜨겁겠지. 화상도 입을 것이고... 근데 그게 진짜 뜨겁고 화상을 입었다는 것을 어떻게 결정할 수 있지?

버클리 : 손 다치면 이 전쟁통에 칼 잡기 힘들 것이고, 그럼 넌 JOT된 거지. 적의 칼에 찔려 죽으면 생각을 하지 못하니 넌 존재하지 않게 되는거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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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클리는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는 기준을 세웠다.

 

"진짜 지각은 생생하다"

"진짜 지각은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지각된다"

"진짜 지각은 과거와 미래의 지각에 연결된다"

 

그렇지만 이것은 순전히 사람의 입장에서 느끼는 것일 뿐, 아무런 해결책도 되지 못하였다.

 

우리의 영웅 토마스 앤더슨(니오)과 메트릭스의 "가룟 유다" 싸이퍼의 반응을 통해 버클리의 기준을 검토해보자.

 

<진짜 지각은 생생하다>

연습용 메트릭스에 접속해서 소파를 만지며

니오 : 이게 진짜가 아니란 말입니까?

모피어스 : 진짜는 뭐고 가짜는 뭔지 니나 내나 우째 알끼고?

 

영화를 주의 깊게 보신 분은 알겠지만, 메트릭스(가상현실) 안에서 받은 지각들, 착각 가능성 높은 시청각뿐만 아니라 신뢰성 높다고 느끼는 후각, 촉각, 미각마저 가짜 지각이라고 판정할 기준이나 방법은 없다. 그래서 니오는 생생한 진짜 지각으로 느끼고 있었다(물론 영화에서는 빨간 알약이 판정기준이 되긴 했지만).

 

 

<진짜 지각은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지각된다>

노천 까페에서 거래중인 싸이퍼와 에이전트 스미스

싸이퍼 : 도대체 이 고기맛을 어떻게 만들어냈을까?

스미스 : 생각말구 걍 처묵해라~

 

더구나 싸이퍼가 스미스 요원과 협상하는 장면을 보면 가짜임을 알면서도 그 지각(미각)을 선호하는 식의 인간경향은 진짜와 가짜를 더 구별하기 어렵게 만들고 있음을 알 수 있다(사이비 종교, 마약이 근절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진짜 지각은 과거와 미래의 지각에 연결된다>

승용차 안에서 벌레를 꺼내며

니오 : ㅆㅍ... 그 벌레... 꿈이 아니었어?

트리니티 : 너 뱃속에 기생충 뎁따 큰넘 넣구 댕기는군화~ 

 

버클리는 꿈을 꾸는 동안에는 그것이 가짜인지 모르지만 잠에서 깨어나 (꿈속의) 지각과 단절되면 예전(꿈꾸는 동안)의 지각이 가짜임을 쉽게 알 수 있는 것처럼, 과거와 미래와 연결되지 않는 지각은 가짜라고 판명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토마스 앤더슨이 요원들에 의해 뱃속에 강제로 벌레(도청장치)가 심어진 것을 침대에서 일어나 꿈이라고 여겼다가, 트리니티에 의해 끄집어내 진 벌레를 보고 놀라는 장면을 보았을 때 지각이 연결이나 단절을 가지고 진짜와 가짜 지각을 정할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 생각하는 "나"는 과연 존재하는 것일까?

 

'제일철학에 대한 성찰'에서 데카르트는 이 세상 자체, 그리고 그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의 존재나 움직임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존재하는지 존재하지 않는지 알 수가 없다 해도, 그것들에 대해 고민 중인 자아는 틀림없이 존재한다는데서 출발하여, 계속 회의주의를 연역적으로 반박해 나간다. 그러나 데카르트가 회의주의를 깨기 위한 출발점으로 삼은 "Cogito, Ergo Sum" 자체를 부정하는 이가 나왔는데 그가 바로 데이빗 흄이다. 흄은 외부세계의 존재뿐 아니라 모든 경험의 중심이 되는 자신/자아의 존재도 의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흄은 데카르트가 지각하고, 추측하고, 착각도 하고, 생각도 하는 변함이 없이 존재하는 자아를 자기 멋대로 전제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나"라는 것은 언제나 어떤 것을 지각한다. 하지만 지각이 없는 "나"를 만나지는 못한다. "나"안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지각뿐이다. 지각들은 지나가고 나타나고, 서로 섞여서 다양한 경험을 만든다. 이때 단 한순간도 통일성이나 정체성이 나타난 적은 없다. 우리가 의식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고작 흘러가는 생각, 지나가는 지각뿐이다. 자아가 존재한다는 것은 실은 생각과 지각의 덩어리일 뿐이다. 데카르트는 "나"라는 것이 없다는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았으므로, 생각과 지각이 존재한다는 것을 '나는 존재한다'로 해석하는 것은 근거 없는 비약일 뿐이다. 데카르트의 성찰은 지극히 유아론적이다.

 

이러한 흄의 관점은 결국 과학적 방법의 주요수단인 귀납법을 깨뜨려 버렸다. 뿐만 아니라 경험론, 자아에 관한 지식, 바깥 세계에 대한 논의를 망가뜨리고 말았다.

 

"철학은 서로 동의할 수 있는 오락일 뿐" - David Hume

 

 

 

 

 

○ 칸트의 반격

 

임마누엘 칸트는 한마디로 재미없는 사람이었다. 이웃의 처녀가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먼저 청혼했을 때 그가 한 일은 정말로 한심했다. 그는 결혼해야 할 이유와 결혼하지 말아야 할 이유의 목록을 각각 350가지 이상 만드는데 7년을 허비했다. 드디어 결혼해야 할 이유가 열 몇 가지 더 많다는 결론을 내린 후 처녀의 집을 방문했다. 당연한 일이었지만 처녀는 이미 이웃 마을 귀족에게 시집가고 없었다.

 

그는 무시무시할 정도로 규칙적이어서, 그가 산책을 하느라 쾨히니스베르크 다리에 나타나면 마을 사람들이 자신들의 시계를 맞출 정도였다. 그가 며칠동안 산책을 하지 않은 적이 있는데, 그때 그는 루소의 "에밀"에 푹 빠져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의 엄격한 시간 준수의 노하우란 별거 없었다. 일일이 일정에 맞춰 시간을 알려준 집사의 덕이었던 것이다)

 

회의주의로써 철학계를 아우성치게 만들었던 "휴미안들의 난동"에 경악하여 오랜 독단의 잠에서 깨어난 칸트는 3대 이성 비판서를 내놓게 된다. 이 중에서 "순수이성비판"은 회의주의를 극복하기 위한 방법을 제시한다.

 

"우리의 바깥에 있는 사물의 존재를 그저 믿음에 따라서만 받아들이는 것, 또 그 사물의 존재를 의심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하고 그 의심을 증거를 들이밀며 극복하기를 포기하는 것 등은 철학계와 인간이성 전반에 나타난 스캔들이다."

 

우선 그는 몇 가지 새로운 용어를 만들고 정의한다.

- 분석면제 : 낱말을 명료하게 한다(미로선생은 길을 못찾는다)

- 종합명제 : 분석명제 이상의 내용을 포함한다(미로선생에게 충무로에 오라고 하면 그는 충정로에서 헤맬 것이다)

- 선험적 지식 : 경험과 독립하여 순전히 추론으로부터 나오는 것

- 후천적 지식 : 경험으로부터 나오는 것

 

칸트는 경험론과 합리론을 결합하여 지식은 경험과 종합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라 주장하였다. 감각이 없으면 대상을 알지 못하게 되고, 이해력이 없으면 대상에 대한 개념을 형성할 수 없다. 다시 말해서 지식을 얻는 과정은 지각과 상상력과 이해력을 포함하는 통일된 과정, 즉 감각능력이나 이해력이 상호작용하는 과정인 것이다.

 

이러한 바탕 하에 칸트는 기존의 철학이 취하여 왔던 탐구의 논리적 순서를 뒤집었다. 데카르트가 먼저 대상이 있음을 받아들이고, 그 다음 대상에 대한 지식을 얻는 것이 가능한가에 관심을 둔 반면, 칸트는 사람의 인식구조를 먼저 탐구하고 사람의 인식방식이 사물을 규정한다고 생각했다. 즉 칸트 이전에는 사물이 그렇게 존재하기에 사람이 인식한다고 보았지만, 칸트는 사람이 그런 방식으로 인식하는 것일 뿐 사물이 그런 방식으로 존재하는지는 확신할 수 없다고 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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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가 칸트의 성찰과 무슨 관계가 있을까? 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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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하여 칸트는 지식을 얻는 과정을 설명한다.

 

우선 시간과 공간은 '누구에게나' 순수한 선험적 직관으로 주어지며 절대적인 것이다.

현실은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고 안(사람의 머릿속)에 있다.

현실은 인간의 마음이 구성해 놓은 구성물이다.

시간과 공간도 안에서 구성되는 구성물이며 나와 경험의 세계를 만드는 다른 사물들도 "안"에 있는 것이다.

마음은 수동적인 지각자(포토샵)이다.

나의 마음이 지각의 주체이므로 우리는 사물을 정확하게 재현할 수 있다.

물론 머릿속에 재현된 사물이 사물 그 자체는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을 펼친 칸트도 다른 사람 혹은 다른 존재가 사물을 지각할 때 다른 원칙을 사용할 수 있겠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다시 말해서 다른 존재들이 인식하는 전혀 다른 원칙하에 대상을 인식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은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칸트가 회의주의를 극복한 듯 보이지만 그 대가로 극단적인 주관주의로 흐르게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칸티안들에게 지식이나 진리는 개개 지각자에 따라 상대적인 것이 되어 버린 것이다.

 

이러한 위험성을 고려하여 칸트는 '우리가 실제를 파악하는 길'의 틀을 지어주는 "사유의 범주"들을 제시하였다. 지각자는 의식을 일으키는데 몇가지 공통적인 기본지침을 따른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늘 존재하는 사물들로 구성된 세상을 보며, 그 사물들이 상호작용하는 것을 본다. 이런 정도의 지각은 타고난 것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 칸트가 제시한 "공통개념의 틀"이다.

 

하지만 칸트보다 2,100년 이전에 소피스트들은 사유의 범주화는 개념의 틀들 사이에 공통적인 것을 이끌어내지 못한다는 점을 이미 제시하였다. 소피스트들이 17세기에 나타났다면, 그들은 자신들과 동시대의 철학자인 아리스토텔레스의 필살기를 즐거이 인용하며 칸트를 조롱할 것이다.

 

"그건 네 생각이지. 넌 고작 프로타고라스를 리바이벌 했을 뿐이야"

 

결국 칸트는 자신이 결코 원하지 않았을 "인식론적 상대주의"의 원조가 된 셈이다. 여기에서 상대주의와 회의주의는 놀랍도록 공통분모를 가진다. 굳이 차이점을 말하자면 회의주의는 "그것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느냐?"이고, 상대주의는 "너도 맞고 나도 맞다. 단지 우린 다를 뿐" 정도의 차이다.

 

모든 사람이 궁극적으로 동일한 개념의 틀을 채택하리란 보장이 있는가? 그렇지 않다. 역사학, 철학, 심리학, 인류학의 성과 중 하나는 사람들이 공통 개념의 틀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실은 단지 경향성, 보편성을 보여줄 뿐 구성원 모두가 공통 개념의 틀을 가진 것은 아니라는 점을 규명해낸 것이다.

 

데카르트가 제일성찰에서 제기한 회의주의는 데카르트 자신도, 버클리도, 칸트도 해결하지 못했다. 특정 지각이 발생하는 구체적 시간, 그 지각의 진위 여부를 결정하는 구체적인 수단을 제공하지 못한 것이다. 칸트의 방식으로 일반적인 회의주의를 극복하였을지 모르나 근원적인 것을 해결하지는 못하였으며, 게다가 모든 지식은 주관적인 것(상대적인 것)으로 만들고 말았다.

그보다 앞서서 칸트의 방식이 정당한가의 여부도 회의주의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했다고 말할 수 있다. 어쩌면 3대 이성 비판서 집필 후 칸트가 다시금 독단의 잠에 빠져든 것은 필연적이었을지도 모른다.

 

 

 

 

○ 그럼 회의주의를 어떻게 볼 것인가?

 

초입에서도 언급했지만 고대의 회의주의자들은 "사물을 본다"는 기본적인 과정도 제대로 확신할 수 없는 우리의 처지에 대해 초연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초연함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은 드물고, 아예 초연함을 가지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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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의주의를 완성(?)하고 적극적으로 옹호했던 데이빗 흄은 일상생활에서는 회의주의가 필요없다고 주장했다.

 

"회의주의를 인생관으로 삼으면 좋을 게 하나도 없다. 그런 사람은 자신의 철학이 마을이나 사회에 이로운 영향을 끼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회의주의를 끝까지 고집하는 것은 모든 인생이 거덜나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회의주의를 철저히 따르게 되면 모든 논쟁과 행동이 즉각 중지될 것이고, 무기력에 빠져서 아무런 충족도 없이 인생에 종지부를 찍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회의주의를 생활의 양식으로 권장하지 않는 흄은 왜 회의주의를 옹호하였을까?

후대의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 비트겐슈타인과 마찬가지로 흄은 회의주의가 겸손의 교훈을 줄 수 있다고 말했다. 회의주의는 "모든" 독단적 신념들에 대하여 견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 그럼 과학적 회의주의는 일반적(철학적) 회의주의와 무엇이 다른가?

 

과학적 회의주의는 현재 일어나고 보여지는 사건(event)들의 사실성을 판단할 때, 우리가 소속된 세상(시공간)의 존재를 일단 인정하고서 출발한다. 그리고 자각하는 존재, 즉 자아를 인정한다. 물론 자아의 지각은 100% 신뢰받지 못한다는 점은 여전히 유효하지만 오류수정의 가능성은 남아있다고 간주한다.

호접몽, 메트릭스와 같은 허구와 차이가 없는 그런 세상이 아니라 실존하는 세상을 가정(혹은 전제)하는 것이다. 이러한 가정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다시 말해 메트릭스 속인지 진짜 세상인지 알 수 없다는 궁극의 회의주의 하에서는 과학적 회의주의든 신비주의, 오컬트, 그리고 종교 등등 모두 다 공허하다.

 

또 다른 측면에서 보자.

이 세상이 어떤 절대적 존재(창조주, 신)가 만든 것이고, 그 존재가 모든 사건에 일일이 관여하거나 관찰하고 있는 중이라면, 과학적 회의주의자에게는 이 세상이나 메트릭스나 아무런 차이가 없다. 신이나 아키텍춰(메트릭스 대왕프로그램)나 그 능력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본질은 아무런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차라리 이 우주가 거대한 어린이들이 갖고 노는 구슬 속이라고 보는 게 더 그럴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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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이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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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은 이 세상이 진짜이든 메트릭스와 같은 곳이든 상관없이 이 세상이 굴러가는 어떤 법칙이 있다고 가정하고, 그 법칙을 벗어나는 것을 기적(초정상현상)이라 정의한다. 이때 과학적 회의주의자는 기적에 대하여 그 사실성을 의심하거나, 이 세상에 알려진 법칙으로 설명이 가능한지 검토한다. 만약 이 세상의 법칙을 벗어나는 것으로 보인다 해도, 현재의 인간이 모르는 어떤 법칙에 의한 것이라고 추정하거나,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법칙이 완전하지 않다고 하거나, 법칙에 오류가 있을 수 있다고 가정하는 것이다.

 

반면에 신비주의는 어떤 사건이 이 세상의 법칙을 벗어나는 것으로 보이면 그것을 그냥 초정상현상으로 정하거나 이상한 법칙을 만들어 제시한다. 물론 재현성이 없기 때문에 그들은 검증을 하지 않는다. 이 점에서 신비주의자는 종교인과 다를 바 없다. 한편 종교인들에게 기적이란 신이라는 존재가 자신이 정한 법칙에서 예외를 허용한 결과이다.

 

18세기 뉴터니안(결정론, 뉴튼역학 추종자)에게 '쌍둥이 패러독스'는 분명히 기적이다. 빛의 속도로 수년 동안 여행을 한 형이 지구에 돌아왔을 때 동생은 이미 환갑을 넘었다는 "사실"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이 규명해 낸 빛과 속도의 법칙은 쌍둥이 패러독스가 더 이상 패러독스가 아닌 당연하게 발생해야 할 사건이라고 알려 준다. 빛의 속도는 고정되어 있고 사물에게 적용되는 시간이 그 사물의 속도에 따라 빠르거나 느리게 흐르는 것이다. 동생의 관점, 즉 지구에 남은 우리의 관점에서 우주여행을 떠난 형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가만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형의 관점에서 동생의 시간이 빨리 흐르는 것으로 보이는 것이나, 동생의 관점에서 형의 시간이 빨리 흐르는 것은 기적이 아니라 사실이다.

 

물론 이 사고실험은 검증도 재현도 되지 않는 것이기는 하다. 하지만 빛의 속도가 관찰자의 상태나 속도에 관계없이 일정하다는 관측결과는 결국 시간흐름의 불균일함을 가정하게 만든다. 또 다른 예로, 블랙홀을 직접 측정하지 못해도, 이미 도출된 법칙들의 종합으로 그 존재가능성을 충분히 예견할 수 있다. 과학적 회의주의가 추구하고 인정하는 것은 여기까지다. 관측 자체가 사건을 변화시키는 불확정성의 원리가 나오기 전에는 직접 본 것만 사실로 인정되던 시절이 있었지만, 어쨋든 지금은 법칙들의 종합으로 설명가능한 것은 일단 받아들인다.

 

과학적 회의주의는 소속된 세상 안에서 어떤 초월적인 현상도 (언젠가는) 설명이 가능하다고 '믿으며(정확하게 말하면 기대하며 hope)', 만약 불가능해지면 능력의 한계를 인정하고 결론을 유보한다. 반면 철학적 회의주의는 아예 이 세상, 존재들, 그리고 법칙 따위들을 몽땅 의심한다.

 

과학적 회의주의는 초현상, 기적 등을 의심하며, 다소 부정하는 입장에서 원인이나 경과들을 설명하려고 시도하는데 비해, 철학적 회의주의는 초현상, 기적 뿐 아니라 일상적인 것까지 긍정도 부정도 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회의주의는 의심하거나 존재에 대해 회의하는 것이지, 부정하려는 입장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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