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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와 사회

개신교회 권위주의의 폐혜

작성자창경원|작성시간13.03.02|조회수73 목록 댓글 1

목회자의 리더십 (목사 장로의 권위주의의 폐해)

☞ 리더쉽( 성경적인 목회자 리더쉽에 관련한 처신과 자세 ) ☜

순종 : 진심으로 우러난 태도로 다정스럽고 친절하게 따른다.

복종 : 명령 한대로 자기 의지가 없이 분별없이 맹목적으로 따른다.

지도자 : 조직의 목적을 향해 그 구성원들을 인도하는 일을 하는 자.

지배자 : 권세와 힘으로 군림하여 지배하는 폭군 또는 압 제 자.

섬기다 : 상대를 모시어 받들다. 남을 힘써 거들어 주다.

권위 : 일정한 분야에서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고 영향을 키칠 수 있는 능력이나 위신.

 

권위자 : 그 방면의 탁월한 전문가.

권위주의 : 권력이나 위력으로 남을 억누르거나 권위에 맹목적으로 복종하려고 하는 사고방식이나 행동 양식.

권력 : 남을 지배하고 복종 시키는 힘.

권력의지 : 남을 정복 동화 하여 더 한층 강대하게 되려는 의욕 (인간의 보편적 폐악적 심리)

독단주의 : 잘못을 검토하지 않고 일방적 주관적 편견으로 판단 추진을 함.

교조주의 : 무 비판적 무조건적으로 추종 함.

 

교회 안에서 목회자를 향한 순종 강요와 특별권위 남용은 수 십년간 참으로 한심하고 위태롭습니다. 예수님이 주신 신약성경상 진짜 권위는 목사님들과 장로님들 스스로가 여러 행태로 무너뜨려 놓고, 엉뚱하게도 자신들이 아닌 타인들에 으해 권위를 무너트려젔다고 성도들 남의 탓을 일삼으며 목회자 자신들은 아무 문제가 없다하며, 권위가 무너저 리더 하기가 어렵다고 누어서 스스로의 얼굴에 침을 벧고 있으니 한심한 일입니다. 신약성경에 (마23장, 막10:45) 밑 바닦형 섬김으로 (엡6:6-눈가리고 아웅치 말고 하나님을 섬기듯 성도를 섬기라~ 마20:11) 인한 존경 받음의 영적권위는 있을지언정 인본 세상적 목사님의 군림하는 제왕적 특정권위주의는 구약시대의 구시대적 폐물입니다. “섬긴다는 것은 상대를 받들어 모셔 무엇이든 거들어 도와 주는 것입니다” 목사 장로님들이 섬김을 받는 것은 보았어도, 진짜로 실제로 성도들 밑구녁에 들어가 성도들을 받들어 모셔 도와주는 것을 목격 한 바 없습니다. 목사님들 스스로가 섬김의 방법으로 리더하며 본이 되는 삶을 삶으로써 존경으로 비롯 된 리더쉽이 발휘되는 그러한 권위가 세워져야 합니다. 믿음과 사랑과 오직 예수를 향한 정절에 본이 됨으로 제도적 권력이 아니어도 그 누구도 교회의 지도자들을 업신여기지 못할 만큼 거룩성으로 인한 존경 받음으로 인한 리더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이후의 시대를 우리는 “새 언약”의 “신약”의 시대라고 알고 그리 살아가고 있습니다.

 

(신 약) 교회 안에 이 권력계급주의가 현대교회를 폐망으로 이끌어 가고 있습니다. 직함 직분으로는 하나님 앞에 더 희생 헌신의 직분 일 뿐이다 라고 우리는 말은 잘도 합니다. 허나 목사님 먼저 목사라는 그 직함에 외곡된 인본적 권위를 세워야 한다하며 계급을 형성합니다. 잘 알면서도 100여년 전 개신교 선교사들이 우리나라 교회에 목사에 대하여 어찌 가르치고 인식을 시켰는지, 처음부터 그러했는지? 우리는 이 계급주의 때문에 독단 독제 권위주의로 흘러 우리들의 교회가 한심해저 21세기 현제 2005년에 이르렀습니다. 예수님☞ 목사님☞ 장로님☞ 전도사님☞ 안수집사님☞ 권사님☞ 집사님☞ 성도님 등 등 계급적 위계관계 권위주의 이러한 계급은 성도들의 영혼 또한 달콤하게 마비시키고 평신도들도 덩달아서 자기들 끼리 좀더 권위를 갖으려고 이러한 자존감 자기만족형 자기과시 우쭐댐 때문에 십자가 없이도 순교하고도 남음이 있는 남보다 내가 더 우월하다는 잘났다는 인간심리가 녹아있는 교회안의 권력만족형 인간심리 자기만족식의 권위적 신앙생활은 우리들의 신앙의 본질마저도 의심스럽게합니다? 전통이 아닌 진짜 “영적권위”는 무엇일까요?? “엡6:12-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신약의 예수님은 목사님을 세워 영적권위를 주셨습니다. 그 영적권위는 교회 안에서의 성도나 사람에게 향한 것이 아니라, 사단을 향한 것입니다.

 

중세의 퇴폐한 성직자들의 교회안에서의 영적권위란 즉 그 성직자로서 육적 권력이란 인본적인 것임이 분명합니다. 사람들 앞에 영적권위를 빙자하여 육적 권력을 세우려함은 그 속이야 뻔한것 아니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오직 사단을 향해 그 진짜 영적권위를 세우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나는 너와 다르다” “나는 그냥 사람이 아니다” ~~~ 하며 어영구영 사람 앞에 자신을 드높이 세우려 별짓을 다하는데, 어쩌다 이지경에 이르렇는지 모르겠으나 사람 앞에 영적권위를 빙자하여 자신의 권력을 세우는데 집착하면 집착 할수록 날이 갈수록 우리 주님의 몸된 교회는 한심해집니다. 목사가 아니더라도 인간의 본질상 권위권력의지를 펴도록 되어있습니다. 자기를 치장하고 사역의 규모를 키워야하고 그러는 동안 자기도 모르게 인본적 우월감을 세워서 자신을 성도들과 분리시킵니다. 본 보임 존경 받음 없이 엉뚱하게 교회 대장 노릇을 하는 장로님 목사님들의 한심한 작태가 부흥을 가로 막고 있음을 하루 빨리 깨달아야 진짜 성도 모두가 위 아래 없이 하나 되어 친구 관계가 될 수 없게끔 리더하는 것 말입니다. 목회자는 양이면서 예수님께서 양을 치도록 부르심을 입은 사람입니다. 구약의 레위인도 제사장도 아닌 종 놈인 것이지요. 그런데 종놈임을 잊고 목회자도 자신이 주님의 양임을 잊고 예수님께서 맡기신 양을 자신의 양인줄로 착각하고 군림하고 있다면 도대체 어찌 되겠습니까? 수도 없이 성경의 이 말씀 저 말씀 꾀 맞추어 말장난 그만 하시고 사단을 향한 영적권위나 바로 세웁시다.

 

목에 힘주고 권력 권위로 대접 받는 것, 참~ 달콤하지요. 아마도 이 대접받는 떠 받들어 줌의 달콤함이란 마약보다 더 할 것입니다. 의논 없이 모든 것을 자기 맘대로 다해버리는 것 참 자기만족의 극치 일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상 이렇게 목에 힘주고 성도들위에 군림하는 리더자로서의 목사 장로라면 영적 권위를 주신 예수님을 슬프게 하는 일이 분명합니다. 주님 주신 영적권위란 목사 자신을 들어내기 위한 것이 아니요, 오직 주님의 사랑을 십자가를 들어내기 위함일 뿐이지 목회자가 인간적 열등감을 해소하는데 사용하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 주시는 영적권위로 사단을 물리치고 다른 사람의 믿음을 신앙을 바로 세워 주는데 섬김의 방법으로 그 성도님의 밑 구녂에 업퍼저서 그들을 누추하게 섬겨 주는대에 “목사라는 영적권위”를 사용하시기를 진짜로 원합니다. “마23:1~13 ~~~ 서기관과 바리세인들이 (권력적이려)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 화있을 진저 ~ 너희는 (인본적 목에 힘줌 영적권위를 빙자한 인간적 권력으로)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목사님들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신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 옛 (1970~80) 날에는 통했습니다. 군대식 대장 방식의 상하 복종 방식 리더십을 쉽게 잘 속아주고 순종해 주니 통했었습니다. 이러한 목회방식은 목회자가 인본적 교회 권력 사슬의 맨 꼭대기에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교회에서 목회자가 가지는 권위는 설교, 당회 인도 등 공적인 영역에서 아주 제한적으로 사용되도록 시급히 신약성경만을 바탕으로 제도를 마련해야합니다. 이는 비단 교회 뿐만 아니라, 모든 집단에서 위계질서를 타고 기동하는 권위 및 권력이 지켜야 할 금도이고 절도입니다. 그러나 이 권위, 권력을 사유화해 자신의 사적인 이해관계를 채우는 일이 한국사회에서는 매우 빈번히 발생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렇듯 권위가 스스로의 합법적 영역을 이탈하여 모종의 강제력 내지는 영향력을 끼치는 것을 나뿐 권위주의라고 정의할 수 있지요. 특히 한국은 일제시대의 잔재를 고스란히 이어받은 군부정권의 국가 병영화 전략으로 인해 사회 전반에 군사문화적 권위주의가 깊게 스며있지요.

 

교수가 학생에게 자신의 사적인 심부름을 시키는 것, 술자리에서 직장상사가 술을 강권하는 것 등도 공적 영역에 국한되어야 할 권위를 사적 영역에 침투시켜 부당하게 이용하는 권위주의의 사례입니다. 이렇듯 권위주의에 기반한 노동(심부름)과 정서적 쾌감(음주)에의 착취는 성적인 착취(성추행, 성폭행)로 까지 발전하게 됩니다. 인간 존재의 가장 내밀한 부분마저도 짓밟는 것이 권위주의의 인간 심리적 폐악이지요. 결국 "세속"과 "교회" 간의 무차별성이 권위주의를 통해 드러나는 것은 우리 문화의 악습과 짬뽐됨이 교회에도 그대로 반영 되었다는 것입니다. 한국 개신교회는 한국 문화의 죄성인 권위주의를 극복하지 못했으며 극복할 생각조차도 없이 그것을 더욱더 악용한 것입니다. 악한 권위주의 문화에 포획되어 조종당하는 것이 한국 교회 목회자 장로 문화의 현주소임을 자각해야 우리는 승리할수 있습니다. 이로 인해 다수의 한국교회는 한국역사를 선도해나갈 신약성경적 혁신 에너지를 상실한지 오래이어서 성도 모두가 왕같은 제사장으로서 모두가 주님의 종으로서, 그리고 온누리 만인이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존중받고 자신의 주체성과 의견을 발화, 만개해나가는 샬롬의 교회, 샬롬의 세상을 만드는 방향성과 동력 모두를 잃었다는 말입니다.

 

1980년 즈음 민주화 시대가 열리면서 권위주의 청산이라는 말이 등장했지요. "권위주의"라는 말은 진정한 진짜의미의 존경어린 권위가 상실했기 때문에 생긴 말입니다. 참다운 권위를 잃어버리면 본질적 권위가 아닌 인간적 권력을 행사하려고 합니다. 여기에서 멍멍이 같은 권위주의가 나오는 것이지요. 권위주의는 청산해야 하지만 올바른 진짜 영적인 아름다운 권위는 세워져야 하겠지요. 권위주의 청산을 앞세워 아름다운 참된 권위를 허물어뜨리는 것은 옳지 않다고 이를 비판 분석하는 저도 동의합니다. 우리들의 교회는 지금 권력만 난무하지 참된 권위의 부재속에 살고 있습니다. 목회자의 성경적 참 영적권위도 목회자 스스로 때문에 한심하게 실추되었습니다. 이런 때에 참된 권위를 세우는 힘은 어디서 나오는 것입니까? 본문에 보면 예수님과 서기관이 비교가 됩니다. 예수님이 어느 날 안식일에 회당에서 가르치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예수님의 교훈에 놀랐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이 서기관들과 같지 않고 권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서기관들은 권위가 없었습니다. 권위를 상실한 사람들 이었습니다. "서기관" 이란 율법 해석자, 율법을 가르치는 교사입니다. 이들은 남을 가르치는 자들이기 때문에 말을 잘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가르치기는 잘 하는데 자신들은 율법을 좇아 살지 아니했습니다. 말과 행실이 달랐습니다. 그러다 보니 참된 권위는 없고 권력 권위주의만 남게 되었습니다.

 

왜 우리 이 시대에 참 권위가 점점 소멸되고 있습니까? 예수그리스도의 정신은 말로만 설교로만 읍조리고 삶으로 보여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정직 진실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목사 장로가 앞장서 바르게 살지 못해서입니다. 왜 교회가 권위를 상실해 가고 있습니까? 여기저기 개척교회가 많아서 입니까? 교회당 건물이 초라해서 입니까? 성도들이 생활로 보여주지 못해서입니다. 말은 잘 하는데 말 한대로 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참된 권위를 회복해야 합니다. 그러면 어떤 권위를 회복해야 합니까? 첫째. 말의 권위를 회복해야 하겠지요. 예수님이 회당에서 말씀하실 때 듣는 이들이 놀라움을 금치 못했습니다. 22절의 "놀라니" 라는 말은 순간적으로 놀라고 그쳤다는 것이 아닙니다. 한 동안 놀라움에 싸여 있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그때당시의 세속적 육적 외관적 권력자 대통령 왕이 아님에도 예수님의 말씀에 “영적권위”가 (인본적 권력이 아닌)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무엇보다 신약성경사 진짜 말의 영적권위를 회복해야 할 때입니다. 그러면 말의 권위를 어떻게 회복 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 말씀의 권위의 능력은 어디서 나왔습니까? 예수님의 인격과 삶에 있었습니다. 서기관들과 비교해 볼 때 에수님의 삶 자체가 달랐습니다. 당시 청중들은 여기서 예수님의 권위를 발견했습니다. 말의 권위는 말을 얼마나 유창하게 유식하게 잘 할 수 있느냐에 달려있지 않습니다. 웅변력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영적 삶으로 보여줘야 합니다. 여기에서 힘이 생성되고 세상과 사탄을 향한 영적권위가 있는 것입니다.

 

둘째, 영적 권위를 회복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회당에서 말씀하실 때에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이 소리를 질렀습니다. 귀신이 정체를 드러낸 것입니다. 과연 요즘 목사님들에게서 이러한 영적 능력이 있는지 검증해봅시다. 서기관들이 가르칠 때는 가만히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나타나시자 귀신이 두려워하며 소리를 질렀습니다. 예수님이 꾸짖어 나가라고 명할 때 경련을 일으키며 소리를 지르고 나갔습니다. 예수님의 영적인 권위가 이런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교회는 무엇보다도 영적인 권위가 있어야 합니다. 씨잘때기 없이 수 많은 폐악적인 장로들 처럼 개인적으로는 찌질이 인생을 살면서 교회만 나오면 왼갖 대장 노릇을 즐겨하며 사람위에 군림하려는 권력이나 파먹지 말고 말이지요.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런 권위가 있어야 합니다. 물론 귀신을 쫓아내기만 하면 영적인 권위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참된 영적 권위란 무엇입니까? 말의 능력입니다. 귀신도 순종하는 말의 능력입니다. 사람의 영혼을 흔들어 놓는 영적인 권세입니다. 어찌하여 왜? 영적권위를 핑계삼아 전혀 문관해야 할 권력과 연관지어 목사 장로가 권력자가 되어 더러워질까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영적 권위를 회복 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이 갈릴리에서 사역을 하시기 전에 광야에서 40일 금식하시며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사역 중에도 끊임없이 기도 하십니다. 목사의 끊임없는 기도 생활 회복 없이 영적인 권위를 회복할 수 없습니다. 그놈에 설교 준비 공부 그만좀 하시고 제발 기도좀 하세요. 그리고 또 교회의 권위가 회복될 때 어떤 결과를 기대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의 앞뒤 가리지 않는 무차별적 사랑 실천이 예수님의 권위에 대한 소문이 갈릴리 사방에 퍼졌습니다. 그로 인해 예수님이 가시는 곳마다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교회는 참된 귄위가 회복 될 때 좋은 소문이 퍼져나갑니다. 권력 권위는 목에 힘주는 더러움은 없고 따스한 사랑의 섬김이 가득하다는 좋은 소문이 퍼져야 사람들이 오고 싶은 교회가 되는겁니다.

 

그래야 영혼을 살릴 수 있는 사역을 감당합니다. 인간에게 권위란 어쩔 수 없이 남이 인정해 주는 데서 세워집니다. 주님께서 영적권위를 목사 장로에게 주었을 진 모르나 육적 권력을 준 것이 절대 아닙니다. 권력 권위주의란 전통이나 제도로 또는 억지로 자진하여 목사 자기의 권위를 목사 스스로 만들어 강압하여 권위를 세우려는 것은 잘못 되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걷보기에는 허름하여 목사 장로인지 몰라볼 정도이나 하는 짓거리 그의 향기를 보니 저 사람은 틀림 없이 목사 이거나 장로 일 것이다, 날이면 날마다 한결 같이 주의 일에 이웃을 위해 열심하는 것을 보면 권위주의 째내지 않아도 주변인들은 결국엔 존경하여 따르고 따르지요. 남이 인정해주는 참된 권위가 우리나라 모든 교회에게 회복되기를 바랍니다. 교회 안에서 연륜이 쌓인 목사가 젊은 목사들이 의욕을 갖고 일을 추진하는 것을 바라보면 권위주의적이고 자기도취적이며 자신만만해 하며 리더하는 모습은 심히 염려스럽게 보입니다. 관습에의해 이어 받은 그 권위권력적 태도들은 현 시대에 곧 충돌과 분열과 배척의 파란을 초래할 위험요소가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아니더라도 요즘 시대는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권위주의를 경멸하는 시대라고 합니다. 어느 연구 보고서를 보면 60년대 청소년들은 부모의 강압적인 권위에 반발한 반면, 80년대의 청소년들은 부모의 권위가 결여된 데 반발했다고 합니다. 이 연구 보고서가 맞다면 문제는 권위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정당하지 못한 권위를 악용한 권력에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권위의 문제는 이 시대의 대한민국 교회에서도 심각한 문제 중 가장 으뜸입니다. 교회의 지도자, 특히 목사 장로에게는 교인들을 구속할 만한 신약성경상 아무런 근거도 없습니다.

 

목사가 교인들에게 돈을 주는 것도 아니고, 사회적인 특권을 부여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잘못한 사람들을 권징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어차피 권징하면 다른 곳으로 가니까 심히 하지도 못합니다. 그리고 한심하게도 그렇게 온 사람들을 다른 교회는 더 환대해 주니까 말입니다. 하나의 단체로서 교회가 자리를 잡고 성장을 하려면 지도자의 권위가 필요하고 이 권위에 절대성을 부여할수록 교회는 단합된 모습을 보일 수 있다고 이기적으로 생각해서일까요, 아니면 성경을 그렇게 이기적으로 이해하여 외시켜 적용하기 때문일까요? 하지만 구약을 구속사적인 시각으로 볼 때, 목사가 축복권을 가졌다는 주장이 도대체 어떻게 신약성경적으로 가능한 것인지 궁금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그렇니까 소위 하나님의 종 혹은 사자라고 불리우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영권이란 결국 다름 아닌 축복권과 저주권이라는 말이 아닌가 싶은데. 구약을 악용한 여기에서 교회 지도자들의 횡포가 시작된다고 봅니다. 그들을 대적하거나 반대하면 사업이 망하든지 아니면 자식이 잘못되고, 그에게 순종하면 하는 일마다 잘된다. 사업을 시작해도 목사가 기도해 주지 않으면 말할 수 없이 찜찜하고, 그렇게 기도해 준 목사에게 교통비라도 드리지 않으면 망할 것 같다 라고 성도들이 이상한 교주성 잡신 미신성에 사로잡히게끔 쇠뇌를 한 것입니다. 이게 영권? 하지만, 정말 그럴까요? 바울이 디모데에게 전한 권면의 말을 한번 생각해 봅시다.

 

바울이 2차 전도여행 중 디모데를 만났고 그가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인 디모데전서가 그의 생애 말년에 쓴 것이라면, 바울이 디모데전서를 기록할 당시 디모데는 삼십은 넘은 나이였을 것이라고 추정됩니다. 사람들의 평균수명이 그리 길지 않았고 사역을 위한 준비기간이 요즘처럼 길지 않았던 당시에 나이 삼십을 넘었다면 그리 어린 것도 아니었으리라 - 바울도 그때쯤 사역을 시작하지 않았을까 십습니다! 그런 디모데에게 바울은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라"(딤전4:12)고 명합니다. 젊다고 함부로 대하지 못하도록 하라는 말인데 바울은 디모데에게 그렇게 할 수 있는 방법을 소개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네가 하나님의 사자인 것을 교인들에게 가르쳐서 너에게 복종하게 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즉 신약의 하나님은 "목사란 하나님이 세우신 종이니 그 직분의 권위에 도전하지 못하게 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바울은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대하여 믿는 자에게 본이 되라"고 말을 수 없이합니다. 간단하게 말하면 바울은 목회자의 권위란 목회자라는 직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자질에 있음을 강조하고 있을 뿐입니다.

 

물론 인격적 자질도 수 없이 거론 하였으므로 평신도 보다도 월등히 인격 또한 훌륭해야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권위란 강요해서 취하는 것이 아니라, 그 리더자의 행위를 보고 그 향기로 인하여 우러나와서 존경함으로 주어지는 것이 분명한 사실입니다. 구약을 적용하면 않되는 줄 알지만 설령 구약의 선지자라고 다 권위가 있었던 것이 아니고 선지자가 한 말이라고 다 하나님의 말씀이었던 것은 아님을 우리는 압니다.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에만 그 선지자의 말에 권위가 있었던 것이지 권력적이거나 인간 위에 대장노릇을 했던 것이 아닙니다. 교회의 개혁을 위해서는 교회의 지도자들이 신약적 영적권위를 회복해야 합니다. 지도자들의 말에는 분명코 힘이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 권위를 회복하겠다는 명분으로 더 이상은 직분을 강조하며 육적권위 계급과 세속적 권력자로서의 리더쉽을 발휘하지 말아야 합니다. 구약적인 의미의 "그래도 내가 목사인데" “감히”라는 말이 옛 날에는 평신도들이 무식해서 없는 사실을 속아 주었으나 이제는 성경적 사실이 들통나 더 이상은 용납되지 않는 시대임을 하루 빨리 깨달아야합니다. 오히려 목사 장로 스스로가 더 비참하게 낮아저야 신약성경적이며 본이 되는 삶을 삶으로써 인간적 존경 받음을 동반하여 그 권위가 세워져야만 합니다.

 

믿음과 사랑과 믿음의 정절에 본이 됨으로, 사회적으로 존경 받음으로 인하여 그 누구도 교회의 지도자들을 업신여기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 영적인 권위에 관하여 바울이 디모데에게 권한 말은 여기 저기서 권위의 문제로 병을 앓고 있는 한국 교회에 더할 수 없이 소중한 처방입니다. 구약 시대에 이스라엘 풍속에 의하면, 제사장을 세울 때나 왕을 세울 때 그 머리 위에 기름을 부었습니다. 즉, 머리에 기름을 붓는다는 것은 제사장이나 왕으로 세움을 받는다는 표식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신 뒤로는 초대 교회와 신약에서는 이러한 의식은 전혀 찾아 볼수가 없고, 성경이나 역사적으로 그러한 내용이 전혀 나오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지금은 기독교인들이 기도할 때나 무슨 말을 할 때, 목사에게 기름을 붓고 장로에게 기름을 붓고 대체 어쩌려고 툭 하면 교호당 예배당을 성~전 건축 서~엉~전 하는 것과 기름을 붓는다는 말을 터무니 없이 남용을 합니다. 왜 그리도 기름부음에 집착을 하는지, 이는 성경 말씀도 제대로 모르고 제대로 배우지 못한 무식한 신자들이 하는 말로써, 신약성경적으로 볼 때 대단히 잘못된 것입니다. (잘못된 신학 교육과 목사 권위권력주의 쇠뇌 탓) 지금 이 시대에는 이 땅에 특정한 제사장이나 왕으로 세움받는 사람이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이시고 왕이십니다.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르는 믿음의 사람들은 목사와 동일 동등하게 모두 왕의 백성들이고,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한 성령 안에서 목사와 전혀 차등이 없는 동등한 제사장이 되어 하나님께 예배해야 마땅합니다.

 

세상과 다를 바 없는 경쟁 중심의 분위기 등 많은 잘못된 개교회 목사님들의 권력적 리더법에서 비롯된 문제점들이 방대하게 우리에게 실존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권위주의가 교회 부흥에 희망적인 영향을 주지도 못하며, 성도들이 목회자를 신뢰하고 존경하는 것도 아니며, 날이 갈수록 믿는자들의 자기 목사 장로 흉보기는 점점 더 해가고 있고 요상한 찌질이 장로의 권력 횡포에 환멸을 표하고 있습니다. 목회자든 평신도든 자신이 존경할 만한 영적 지도자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교회가 권위주의ㆍ 형식주의ㆍ 관료주의를 버리고 교회와 교회 밖의 사람들을 이해하고 용납하는 관용을 베풀어 어두운 세상을 리더하는 참된 교회의 모습을 회복해야 하는 논제를 다루면 역시 목사님들의 잘못된 권위권력주의 리더법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성경과 예수와 멀어지고 세속주의와 번영신학에 기대어 이기적으로 자기를 증식하고 있는 희한한 변종 목사 장로가 교회가 되어버린 대한민국 개신교회 어디에도 신약성경 본래를 향해 개혁하려 앞장서는 목사가 없다는 것 또한 희한한 현상 중 하나입니다.

 

오히려 글 쓰는 저처럼 구호성 외침은 효과적인 의미가 없음도 사실은 진작에 알았답니다. 일개 집사인 저는 부끄럽고 한 없이 쪽팔림을 무릅쓰고 더 큰 용기와 진지하고 솔직함이 절실한 지금입니다. 예전부터 해왔던 관행 습관이란 정말 무서운 것입니다. 신약성경에 나와 있지도 않는데 우리들 편의대로 몇 번 그렇게하면 아무렇지 않게 교회 안의 그 처신은 법이 성경 말씀이 되어 버립니다. 교회안에 목사 장로들의 권위주의는 우리 모두를 하나님 말씀에서 멀어지게 하며, 목사님의 권위주의 리더법으로 부터 연계되어 성도들 끼리도 끝도 없이 교회 안에 뜻 없는 서로가 서로 속에서 더 우쭐대려는 우위에 오르려는 경쟁과 시기 질투를 유발하며 분쟁과 갈등만을 야기 시킵니다. 군대 같은 수직적 강압형 리더법은 어느 한계적 인본적 성과는 볼 수 있을진 모르지만 진정심을 끌어내기는 어렵고 사도행전 2:44절~ 말씀과 같은 수평적 더불어 사는 아름다운 공동체에 도달 하기는 불가능합니다. 수직적 위계 계급형 리더법은 결국 우리 모두를 지옥으로 떨어지게 할 것입니다. 어쩌면 천국에 다녀온 분들 증언중에 천국엔 목사님들이 대부분 오지 못했더라 하는 이유 중 으뜸은 희생과 헌신과 섬김과 십자가와는 무관하게 목에 힘주는 권력만을 만끽하며 “감히 담임 목사니~임에게” 하며 독단과 권위주의로 권력만 파먹다가 천국에 오지 못한 것일 겁니다. 21세기 현세대를 분석해보면 우리 대한민국 수준으로 보아선 이러한 민주적 상호존중형 소통이 없는 권위 권력은 사회가 용인하지 않습니다.

 

이 시대엔 독단과 권위주의는 교회 부흥을 일구어 낼 수 없는 것이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적인 우러나는 자연 발생 존경심과 신앙의 숭고함에서 우러나는 존경심 없이 저만 잘났다고 목에 힘주는 리더자가 리더하는 공동체가 얼마나 오래 가겠습니까? 아니꼽고 더러워서 라는 말이 있지요. 서로가 위대하며 내가 더 잘났다하니 아니꼬아서 교회 안나오면 그만이라는 그 꼴 보기 싫어 나는 교회 않나간다는 심리가 유발된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말세 지말 이라서 부흥이 않되는 것이 아니라 잘못된 권력 권위주의 때문에 교회 안의 그러한 성경과 반대되는 분위기들 제도들 때문에 사람들이 교회를 경멸 하므로 전도 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수직관계란 서로 진심으로 섬기는 방식을 진정으로 유발 시키지 못합니다. 목사나 장로나 집사나 하나님 아래 모두가 수평상태로 평등함에 섭섭해 하지 않는 환경과 우리의 신앙심이 필요합니다. 동역하자 말은 해놓곤 명령 지시에 의해서 동등히 동역이 될거라 생각하는지, 그건 동역이 아니라 복종이지 동역이란 모두의 의견이 협력되어 독단 없이의 동역이지, 혼자 대장 노릇하며 동역하자 함은 말 장난에 불과합니다.

 

권위권력을 동원한 직함으로의 제도적 쌩 리더 법 말고도 인간에겐 훌륭한 리더법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목회자를 포함하여 누가 더 잘났고 누가 더 위고 아래고 신약 성경 어디에 사람끼리 그러한 위계 계급주의로 리더를 펴라는 말씀이 나와 있나요.? (엡6:6 - 섬김) 신약의 율법은 “십자가 희생 헌신 섬김 사랑”입니다. 그리고 레위인이네 제사장이네 기름 부었네 이거 다 구약의 규칙이 아닌가요? 왜 구약의 그것만 골라서 따르려 애쓰는지요. 여타의 수 많은 구약은 외면 하면서... 대한민국 특유의 유아기적 대장 노릇 하고 십어하는 열등심리에서 비롯된 계급 권위를 버리고 현실적 실감나는 천한 누추한 일을 하면 목사 장로님이 하나님께 사랑 받지 못 할까요? 세상에서는 찌질이로 살면서 교회라는 조직을 이용하여 계급적 대장 노릇을 하며 우두머리 역할의 자기만족감식 리더를 하면 존경심을 얻을 수 있을까요? 상당 수의 목사님들은 청소년기에 찌질이적 주변으로부터 대접 받지 못하는 일상을 살다가 목사가 되어 떠 받들어주는 것에 기가막힌 쾌감을 맏보고 권위를 동반 시켜 악용하여 인본적 변질 권력을 발현 시켜 받들어 모셔주는 것에 열등감을 해소하려는 일반적인 인간심리라고 그 권위 권력을 만끽하며 달콤하게 살아가는 자기도취적 삶에 파묻혀 마취되어 기뿜으로 살아가버립니다.

 

뻔한 이 인본심리를 벋어 던지고, 희생과 헌신과 섬김과 십자가로 주님의 종놈으로서의 믿바닦 삶을 살아냄으로 인하여 절로 우러나는 존경으로서 유발된 영적 권위는 얼마나 아름다우며 자동으로 더 잘 따를 것인데, 신앙인격이 훌륭하지 못하여 권위롭지도 못한 목사 장로가 요상스레 구약을 들먹이며 기름부음 받았다하며 그 권위를 악용 변질 시켜 자신의 청소년기의 찌질이 열등의식을 마음 것 발산하며 권력으로 빗나간 권위로 리더십을 발휘 한다면 이러한 리더십이 얼마나 사회적으로 존중을 존경을 받을 수 있을 것이며 진실로 우러나는 존경심이 발현 될 수 있을까요? 길거리에 나가 모범으로 희생 헌신 섬김 없이 말씀이 넘치고 넘처나는 이 시대에 목양실에 들어 앉아 목사님이 설교사로서의 삶만을 살아야 하나님께 사랑 받을 까요? 말로는 육적권력이 아닌 사단을 향한 영적 권위라고 하지만 영적권위를 변질 시켜 성도 앞에 사람 앞에 권력적으로 처신하며 목에 힘주고 맘대로 다 하시면 기분이 좋으십니까? 폼 나십니까? 그 권위를 핑계 삼아 발휘되는 인간적 권력으로 리더하면 교회가 발전하고 부흥 할까요? 오히려 더욱더 친절하며 수평적 평등 서로 섬김으로 찐짜로 낮아저 정직히 진짜 인간적으로 열심함을 보고 존경을 받음으로 찐짜 신약성경적인 목회를 하면 리더가 않될까요? 미국이나 유럽 쪽 우리보다 앞선 역사를 가진 기독교국가들에서는 사회인 들이 목사님들 대접을 어떤식으로 하는지 확인해볼 생각은 없나요?

 

유럽에서도 목사 장로님들을 권력적 서열 우위에 두며 잘 대접해야 복을 받는다 하며 밥 값을 성도들이 낼까요? 목사님들이 밥값을 내어 진실로 섬길까요? 신약성경에는 어찌 나와 있나요? 교회에 나와 사사건건 대장 노릇 하라고 어는 신약성경구절에 나와 있나요?

아메리카와 유럽 대륙에서는 찿아보기 힘든 영적권위가 아닌 목에 힘주는 인본적 권위감 이거 그쪽 나라에서는 그런 생각 자체도 미친놈 소리 들을 정도로 한심한 작태로 보는데 유독 우리나라와 아시아권에서만 교주 미신이 접목된 인본적 권위 권력이 당연한 듯이 만연하니 한심한 일이 아닐수 없습니다. 이 목에 힘주는 권한 권위 권력 문제를 21세기 현제 우리나라 사회심리적으로 어찌 받아들이고 있을까요? 나소의 권위감은 사회적으로 조금은 인정해준다 하더라도 그 권위를 본질과 다르게 변질 시켜 교회 안에 독단적 절대 권력을 가지려 끝도 없이 집착하며, 장로가 단합하여 목사나 내어 쫏고, 전도사를 향하여 쫄병 다루듯 개인적 노예이다 시피 막대하며 권력을 행사하며 자기만족을 즐기며 못된 부정 부폐를 양산시키는대 쓰고 있는 것이 상당 수 장로 목사들의 개같은 짓거리들 아니가요?

 

그 권력으로 목숨 걸고 해야 할 하나님의 일은 제쳐 놓고 여행이나 가고 먹고 놀고 하나님의 돈으로 권력을 악용하여 하나님 꺼 돈이라는 두려움 없이 흥청망청 쓰고 이핑계 저핑계로 놀고먹는건 아닌가요. 어려운 이웃에게는 인색 하고, 내것 교회가 아니고 주님의 몸된 성도 모두의 교회다 해놓고는 아닌틱히 내 것 교회 내 것 교회가 되어버려 사적으로 째내고 싶어 가지고 목사 이름 내는 곳에는 누구 맘대로 하나님의 돈을 풍성하게 사용을 합니다. 인간 심리상 그러면 더 위대해보이고 잘나 보이니까 그러겠지요.

 

특히 대형 교회 목사님들은 성도들의 피 같은 돈을 하나님의 돈이 아닌 자신들의 돈 인양 물 쓰 듯이 쓰고 있지요, 바로 그 영적권위가 아닌 인본적 권력을 이용해서 “감히” 운운 하면서 말입니다. 확실하게 대형 교회 목사님들이 권력을 이용한 돈 맛을 아는 것은 틀림없다고 생각하며, 절대 그 권력적 리더쉽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세상 법정에 가는 것도 부끄럼 없이 자행하면서 까지 벼라별 더러운 핑개 대어가며 그 권력적 리더쉽을 지키려 하는 것은 목에 힘주는 인간적 제미와 돈 맛으로 인한 것일 것입니다. 물론 그분들은 저주를 받겠지요. 세상 사람들은 그런 짓거리들을 보고 얼마나 심한 욕을 하는지 진정 모르시는지? 그래놓고는 이 나라의 교회가 부흥 할까요? 왜 사탄을 말세 지말을 탓하고 정작 더러운 독제 권위주의로 리더하는 자신들 때문에 부흥이 않되는 것은 모른척 할까요? 21세기 현대인 이방인들이 믿는 자들이 그 꼴을 봐줄까요?

 

성도들을 무시하며 소통으로 민주적 방법을 활용치 않고 서열적으로 군림하는 권위적으로 교회를 운영 해야만 교회가 부흥 할까요? 권위권력체제 하에서 과연 서로 섬김이 정직히 가능 할까요? 신약의 예수님의 절대 계명으로 하라하신 “서로 섬김 사랑”은 멸시하고 순종만을 들먹이며 그것만 구약을 끌어다 순종이라 말장난 하며 영적권위라 핑계하며 권력으로 리더하면 폼나고 잔존감이 생기며 흐뭇하십니까? 정녕 그렇게 영적이라 해놓고는 실제 영적부분에 있어서의 (영적 파워) 권위는 없고 인간적인 기계적인 계급으로 특별히 대접받고 십나요? 한경직 목사님, 이동휘 목사님들은 그 대접 받음을 만끽하지 아니하고 완전히 벋어 던저 자유로운 영으로 열정의 신앙으로 풍성한 인격으로 리더하여 진심의 존경 받음으로 그분들이 무슨 말을 하든 더욱더 잘 따라주며 목사님에 대한 순종이라는 강변이 전혀 없이도 진짜 자원함으로 잘 따라주는 순종해주는 것은 왜일까요?

 

순수한 믿음에서 풍겨난 영성을 유지하여 아름다운 존경스런 영적 권위도 발산하지 못하면서, 인본적 특별 자존심을 마음속에 두고 주의 종놈이 아닌, 주의 종님 대접을 받으며 주의 종 하며 권력으로 살아가는 목사님들의 장로님들의 특권주의는 성경엔 없는 분명한 악습입니다. 하나님은 섬김과 사랑으로 리더 하라고 했지 교묘하게 영적권위를 악용하여 인간적으로 목에 힘주라고 목사로 장로로 세우지 않았습니다. 참으로 목사 장로는 그토록 계급권력적 권위의 리더쉽을 가져서는 절대 하나님나라를 성공적으로 새울 수 없습니다.? <야고보서 2장 1~13절 8-“너희가 만일 성경에 기록된 대로 네 이웃 사랑 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의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 9-만일 너희가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법자로 정죄 하리라.> 대한민국만의 전통적인 사대주의적 조선시대식 독특한 복종형 지배자로의 그저 “순종이 재사보다 낳다”는 말씀만 (순종 남용을 위해 주신 말씀이 아님) 강요하는 것 말고, 비굴한 계급주의 말고, 위계 질서니 뭐니 그런 것 말고, 감~히 담임목사님~에게 그런거 말고, 에헴 장로님한태 버르장머리 없이 그런거 말고, 진정한 순종의 미가 보충된, 인간적 세속적 순종이 아닌 진정한 예수안에서 인정이 넘치는 존경심에서 발현되는 영적 진정한 순종이 자연스레 민주적으로 아름다이 회복되어 순종하여 지시하는대로 따르지 말라해도 따를 수 있을만 해야합니다. 한국교회의 신약성경으로의 제도 개혁은 성도들의 새로운 각성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믿습니다. 아마도 이런 글이 목사 장로들에게 권장되어 진다 하여도 벼라별 핑개를 대며 권위권력적이려 안간힘을 다쓸 것인데, 이미 그 습성에 절어서 목사 장로 스스로 자신을 개혁한다는 것은 분명코 어렵습니다.

 

그분들은 어영구영 이런 말을 하기도 합니다. “교회는 민주주의가 아니다” 과연 그러한지 신약성경을 탐독해 보십시오. 그 어느 구절에 독단 독제주의 공산주의를 인정하는지 말이지요. 왜 그리도 교회 안에 민주주의는 필요 없다는 말을 함부로 하는데, 그렇다면 믿음 안에서 타인을 무시하고 독단주의 독제주의 권력주의가 21세기 현대인에게 용인 되리라고 보시는지, 진정 성도들의 의견은 무시당해 마땅 할 만큼 무식한 것인지, 그들의 의견을 무시하고 독단으로 하면 과연 그리하면 우리가 땅끝까지 부흥을 꿈꿀 수 있으리라고 보십니까? 그렇게 현실 개관성 없는 주관 개인적인 판단을 의논 없이 목사 장로 혼자서 결정하여 진행을 하면 현실 적용력이 뛰어나다고 장담 할 수 있습니까?. 오히려 현실의 세상 전쟁터에서 매일을 살아가는 성도들이 더 많은 적용력 뛰어나 영적 아이디어를 풍부하게 가지고 있다는 생각은 전혀 않 하십니까?

영적권위(영적 파워 - 살아있는 말씀, 병 고침, 귀신 내쫏음...)와 인본적 권력주의를 구분 할 줄 모르는 것인지? 이제는 그러한 말장난에 속아주는 시대가 아님을 하루 빨리 깨달아야 할 때입니다. 영적파워 문제도 그러합니다.= 아이큐가 좋아 말씀을 잘 풀어 설교를 기똥차게 잘해주면 영적 파워가 있는 것이 아니라 골수를 쪼게어 심어지는 살아 역사하는 생동력있음을 말함이지 두시간 세시간씩의 언변이 좋은 바리세인식의 설교와는 무관합니다. 일사천리로 성경구절 잘 섞어 오랜 시간 회중 기도를 잘 한다고 믿음이 좋다, 영적 수치가 높다 볼수 없으며, 오히려 진정성이 없다면 그런 기도는 분명코 “바리세인”입니다. 글 쓰는 저는 어쩌면 죽는 날까지 유창한 기도를 할 줄 모를 것입니다. 사실은 그리 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그냥 아이들 기도 하듯 짧든 길든 진정성있는 하나님 얼굴을 앞에 모시고 더듬거리며 기도하며 살아 갈 것입니다. 단 삼분을 설교해도 살아 생동하는 영적파워, 사단을 대적하여 이기는 귀신을 내어 쫏는 영적파워가 진짜 성경상 영적권위라는 것입니다. 어찌 영적권위가 인간적 권위로 변질되어야 하는지 도무지... 성경 말씀을 앞에 펴고도 도저히 납득 할 수 없습니다. 이 문제도 최대한 관범위한 토론회가 있어보았으면 좋겠습니다만....

 

“마태복음 20장 25절~28절 --> 25절-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가라사대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너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지배자. 26-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27-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지도자. 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 예수님도 그리 리더를 한 것을 목사님도 예외 이여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결국은 목사가 아닌 직분을 가진 교회 안의 평신도 스스로가 기독교의 과거 역사를 공부하고 신약성경 말씀을 찾고 찾아 신약성경 본래 목사님들의 리더쉽 방향성을 정하여 요구해야하는 상황에 우리는 직면해 있습니다.

 

초기 교회시대의 중동지역교회는 장로들에 의해 다스려지는 모습으로 신약성경에 나타나 있습니다. 그 당시 장로와 감독은 같은 사람이었으며, 교회의 직분은 오직, 장로 또는 감독 그리고 집사, 이 두 가지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사도시대 이후, 2세기부터 서서히 장로와 감독이 구별되면서 장로들 중에서 한 사람을 우선하여 감독으로 내세우기 시작했지요. 그리하여 A.D.150년 이후에는 감독제도가 전 기독교계를 휩쓸면서, 감독이 교회를 지배하는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성직자와 평신도로 구분되는 성직자제도가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이리하여 2세기말에는 이러한 성직자인 감독이 교회의 우두머리가 되어 교회의 모든 예식을 집전했는데, 이 성직자들을 사제라고 불렀답니다. 그러나 이런 사제가 나타나기 전, 초기 사도시대와 속사도시대에는 모든 신자가 거룩한 제사장으로서 누구나 동일한 신분으로 영적인 제사(벧전2:5)와 찬미의 제사(히13:15) 등을 드렸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신자들 개개인이 모든 사람들을 위해 하나님께 중보의 기도를 할 수 있는 제사장으로서의 역할도 수행했던 것(딤전2:1)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성경에는 모든 신자는 ‘제사장’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종’이며, 또한 ‘그리스도의 종, 곧 주의 종’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실례로써 로마서 6장에 “이제는 너희가 죄에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롬6:22)” 여기에 나오는 ‘너희’는 ‘목사나 성직자’를 말하는 게 아니라 ‘모든 신자’를 가리킵니다. 물론 신약성경 어디에도 특별히 목사님을 지목하여 이 비슷한 말씀을 주신적도 없지요. 또한 고린도전서 7장에 “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종’이니라 너희는 값으로 산 것이니(고전7:22).” 여기서도 모든 신자를 ‘그리스도의 종’으로 분명히 나타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신자들은 하나님으로부터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요한일서에 “너희는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요일2:20)”라고 씌어 있는 것에서 알 수가 있는 것이지요. 따라서 모든 신자는 하나님의 종이며, 그리스도의 종이며, 하나님으로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약성경에서는 분명코 분명코 소위, 목사나 신부나 주교와 같은 성직자들이 주장하듯이 “자신들만 하나님의 종 또는 기름부음을 받은 주의 종”이며, 평신도들은 그렇지 않다는 말은 그야말로 ‘말장난 속임수’에 불과한 것입니다. 인간의 강압적 제도로서 군림의 방법으로 리더를 하면 별달리 본을 보이지 않아도 되며 쉽고 편리하게 제도적으로 대장이 되어 리더 할 수 있으니까 그러한 말도 않되는 자기들 끼리의 제도를 발달시키는 것이 분명합니다. 이러하니 우리는 목사님들을 무시하고 힘들게 하자는 것이 절대로 절대로 아니라 신약성경상 진짜 목사 장로가 되어 가도록 차근차근 개혁해 나가야합니다. 목에 힘주라고 목사 장로를 새웠다니 이거 말이 됩니까?

 

그리고 당시, 이러한 신자들은 대부분 일상적인 삶 속에서 직업을 가지고 교회에서 봉사했으며, 또한 교회직분을 가진 장로들이나 집사들 역시 그러했습니다. 고린도전서, 에베소서, 로마서 등에는 전부 20가지 정도의 은사들이 나오는데, 이러한 은사를 가진 사람들도 당시에 생계를 스스로 꾸려나가며 교회 모임에 참여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특별히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해 선교활동을 하는 은사를 가진 자들은 예외적인 부분도 조금은 있었습니다. 누구나 잘아는 사도바울과 바나바 등과 같은 경우인데, 그들은 하나님이 자신의 방법으로 물질적 공급을 책임지셨습니다. 그렇더라도 바울은 상황이 여의치 않을 때에는 개인적으로 배우고 익힌 천막 만드는 기술로, 밤낮으로 일하면서 복음을 전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살전2:9). 하나님 예수님을 빙자해 거두운 헌금으로 생계를 유지 하지 않았다는 것만은 그 어떤 무엇보다도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돈 문제에 있어서 조금도 더러운 짓거리는 의도적으로 하지 않은 이유는 남들이 더럽게 봄으로 복음전함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기 때문이지요. 초기 교회시대에는 오늘날과 같이 교회에서 고정 월급을 받는 목사와 같은 인물은 존재하지 않았던 것 또한 분명한 사실입니다. 신약성경상 성직이란 존재치 않으나 예를들어 그저 성직자 편의로 아마도 변질적 전통으로 물질욕을 끝 없이 21세기 까지 끊임 없이 발달 시켜온 것이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목사님들의 설교사로서 혹은 교회 행정실장으로서의 역할이 신약성경적 사실인가에 대하여 우리는 분명히 하여야 목사님들의 리더쉽의 방향성을 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교회사가 성경은 아니지만 어느 시대에나 성경의 원리에 충실한 지역교회는, 상술한 바와 같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지역교회에서 만찬예배를 드릴 때에는 모든 신자가 예배를 드리는 동일한 제사장으로서 성령의 인도에 따라 질서있게 누구나 찬송을 택해 부르고, 누구나 떡과 잔에 대해 감사기도를 하였고, 또한 기도집회시에도 누구나 동일한 제사장으로서 기도할 수 있었답니다. 단지 말씀집회에서는, 가르칠 수 있는 직분을 가진 장로나 20여 가지 은사 중 가르치는 은사를 가진 교사들 중에서 둘이나 혹은 세 사람이 설교 말씀을 전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고전14:29). 그리고 신자들은 공적으로 말씀을 전하는 것은 제사장 직무와는 별개이며 은사나 직분을 가진 자가 담당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당시 이러한 지역교회에는 두사람 이상의 장로들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이들은 디모데전서나 디도서에 나오는 대로, 도덕적으로나 영적으로 합당한 자격을 갖추어야 했습니다. 베드로전서 5장 1~4절 “나는 함께 장로된 자요, 너희도 하나님의 양무리를 치되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득을 위하여 하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만 놓고 보아도 현제 대한민국엔 이를 지키는 목사님이 몇 아니되며, 오히려 적극적으로 이와 반대 이지요.

 

아무튼 이와 같이 복수장로체제에서의 교회 장로들은 목자로서 양무리를 치며(벧전5:1), 영적인 인도자들로서(히13:7) 지역교회를 다스린다고 되어있습니다(딤전3:5) 여기서 다스린다는 뜻은 전적으로 영적인 문제이지 인간적인 대장 노릇을 말하는 것은 분명코 아닙니다. 여기서 장로의 여러 역할 가운데 ‘목자로서의 양무리를 치는 것’도 오늘날과 같은 담임목사의 역할이 아닌 성경적인 ‘장로의 역할’ 중에 하나임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오늘날 에베소서 4장에 나오는 목자(목사로 오역)의 은사는 장로의 여러 역할 가운데 일부분에 해당하는 것임을 분명하게 알아야합니다. 과거 16세기 종교개혁자인 마르틴 루터는 성경에서 ‘만인제사장’의 위대하고 확고한 진리를 발견했습니다. 당시 루터나 칼빈 등의 개혁자들은 로마 가톨릭의 성직자인 사제직의 개념을 거부했으며, 또 ‘사제’라는 호칭을 싫어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개혁자들은 가톨릭의 사제, 즉 신부를 대신하여 교회에서 “말씀과 성례”를 주관할 새로운 직책자로서 ‘목사’라는 용어를 도입하게 된것 이지요. 그리하여 나중에 개혁자들을 중심으로, 설교자 양성과 신학 연구를 위한 신학교가 생겨나면서, 거기서 학위를 취득하고 안수 받은자 들에게만 목사자격증을 수여하면서 목사제도가 생겨나게 되었다고 합니다. 개혁자들은 이렇게 생겨난 ‘목사의 직책’이 신적 능력과 권위를 가진 성직자로 외곡 오인시켜 현제 까지 끝도 없이 근거 없이 말 조작으로 변질을 거듭한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여 목사제도가 생겨났으나, 그 이후 교회에서의 성찬식과 세례 등, 교회 전반에 걸쳐 개혁자들 간에 견해가 서로 달라저 갔다고 합니다. 이 때문에 종교개혁 노선이 크게 둘로 나누어져 한 부류는 루터를 쫒아 루터교회를 형성하게 되었고, 또 한 부류는 칼빈, 쯔빙글리, 존 낙스를 쫒아 개혁 장로교회를 형성하게 되었지요. 그 후 영국에서는 루터교회와 유사한 영국국교회가 생겨났고, 나중에는 영국국교회에서 쫓겨나온 청교도들에 의해 회중교회가 형성 되었다고 합니다. 이후 18세기에는 존 웨슬리에 의해 감리교가 그리고 연이어 침례교, 오순절 교회, 구세군, 성결교 등의 교파가 생겨나 오늘날까지 뒤죽 박죽 이어지고 있습니다. 오늘날 한국의 주요 개신교파는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침례교, 순복음교 등이 있습니다. 그리고 각 교파마다 나름대로의 목사제도가 그들의 헌법에 나타나 있는데, 이러한 각 교파의 목사제도는 성경과는 거리가 먼, 비성경적인 제도로서 자기들 끼리 말 장난으로 엮어 만들어 이기적이며 편협적으로 인본적으로 쉽게 리더하고자하는 노력으로 전통을 생산하여 많은 폐단과 모순이 낮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공통적으로 나타난 최대의 폐단은, 거의 대부분의 개신교파의 목사들은 목사라는 직책을 구약적의미로의 ‘성직’이라 여기고 있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유구한 교회역사를 가진 서구나 북미의 경우에는 신자들의 만인제사장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실행으로 인해, 그 나라들의 목사들은 성직에 대한 개념이 아주 희박하여 목사님들의 권력 군림형 리더를 조금도 용납 적용해 주지 않고 있습니다. 목사님들도 스스로 돈을 벌어서 사생활을 유지하고 특별대우 그런거 아예 생각 자체를 않합니다. 기독교 역사가 짧은 한국의 경우는, 기독교가 전통적인 무속적 기복신앙과 결부되고 조선말기 일제강점기 등의 전근대적인 역사흐름이 반영된 토속신앙적 한국식 기독교라서, ‘목사는 곧 성직자다’ 라는 개념이 특히 강하다 보니 성도들도 그것이 셩경위의 성경으로 율법으로 오인하고 목사님들을 교주식으로 대접해주므로 변질되어 인간의 본성이 들어나 더러움이 가속화 되어 가고 있는 것이 현실이지요. 최근에는 일부 신자들의 ‘만인제사장에 대한 올바른 인식’으로 인해, 예전보다는 성직에 대한 개념이 조금 수그러들었지만, 그래도 우리 개신교인들은 교회 부흥에 악영향을 주는 방법을 피하여 기도와 간구로 신약성경공부로 끊임 없이 파해처 목사님들의 올바른 리더법을 발굴하여 이 땅의 목사님들이 진짜 십자가에 깔려 죽어주는 먹사가 아닌, 진짜 목사 아름다운 순교자로 만들어 드려야합니다.

목사직을 성직으로 착각하는 (실제는 성스러운 임무를 감당치 아니하고 더러운 권위주의를 만끽) 정신나간 목사님들이 한국의 기독교를 부패시키고, 자기 교인들마저 생명의 길이 아닌 사망의 길로 잘못 인도 리더해 왔던 것이 작금에 논의되는 사실입니다.

 

집사가 되가지고 말 투가 좀 지나치지요, 죄송합니다, 그렇다고 글재주가 부실하니 좀 노골적일 뿐 고상하게 이야기하면 못들은척 않들은 척 해버리니까 진솔하게 글을 썻을 뿐 사실은 점잔한 편이랍니다. 아무튼 비성경적인 목사님들이, 늘 자신의 존재를 과시하기 위해 강조하는 말이, 목사는 ‘기름부음을 받은 하나님의 종 또는 주의 종’이라고 스스로 말을 하는 것을 우리는 당연한 말인듯이 수도 없이 들으며 신앙생활을 해왔습니다. 그러나 신약성경에 “모든 신자들은 하나님의 종이며 그리스도의 종, 곧 믿는자이면 누구나 주의 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사만이 하나님의 종이니, 주의 종”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한마디로 군림하여 권력적으로 대장 노릇으로 리더해 보려는 어영구영임을 우리는 깨달아야합니다.

 

그러면 무엇 때문에 개신교 목사들은 ‘모든 신자가 주의 종’이라는 사실을 제대로 교인들에게 알려주지 않고 자기들만 주의 종이라고 자처하며 신자들을 속여 왔는지, 그 이유에 대해 살펴볼까요.

첫째, 그분들은 자신들을 일인독재자로서의 권위를 내세우기 위한 술책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서구나 북미의 목사들은 한국목사들처럼 일인독재를 하지 않는답니다. 그들은 대부분 설교에만 치중하고 일반적인 시간에는 생업에 종사하며 사생활적 돈을 벌고, 나머지 교회재정이나 심방 등은 목사가 아닌, 장로나 집사들이 전담하며 목사의 간섭을 조금도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국의 목사들은 교회내의 모든 영역에 걸쳐 전권을 행사하는 권한을 스스로 가지고 있으며, 또 이것을 헌법에 실어놓고 마치 그것이 성경말씀에 나와 있다는 듯이 강변을 하며 자기들에게 유리하게 그 권한을 보장받고 있는 것이지요. 그리하여 시시때때로 교인들에게 목사로서의 권위를 의도적으로 쇠뇌 주입시켜 그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오인시켜 왔습니다. 예컨대 “주의 종은 하나님의 소관이니 주의 종을 존귀히 여겨라, 하나님은 반드시 주의 종을 통해 역사하시며, 주의 종에게는 축복권과 저주권이 있다” 등이다. 그리하여 신약의 목사를 구약의 선지자나 제사장이나 레위인이나, 또는 신약의 사도들에 해당한다고 터무니 없는 거짓 주장을 하며 자신이 성직자임을 강조하며 교인들을 세뇌시켜 왔던 것이 지금까지의 사실입니다.

 

둘째는 목사님 자신들의 부패하고 타락한 모습이 드러났을 때 그것을 감추기 위한 수법도 대단합니다. 국내의 수많은 목사들이 돈과 권력과 불륜에 연루되어 드러난 죄악상은 부지기수 인 것을 우리 믿는자들도 잘압니다. 그리고 그런 범죄를 저지런 목사들은 당연히 사죄하고 참회하면서, 죄과를 치르고 일선에서 물러나 근신하는 것이 마땅한데, 그러나 이렇게 하는 목사들은 찾아보기 힘들고, 오히려 그들은 “주의 종은 하나님께서 직접 알아서 하니까 교인들이 가타부타 하지 말라, 주의 종을 비판하면 저주를 받는다”고 하면서 교인들에게 말도 않되는 공갈과 협박을 일삼아 왔던 것이 우리들 개신교의 목사님들 이었습니다. (뭔놈에 집사가 되가지고 안티보다 더한 폭로의 글을 쓰느냐 하며 또 어영구영 피하려고만 하지 마세요, 좀 더러운 글은 삼가려 하는 수준이 이것이며 좀더 노골적이라면 아마도 기절할 말도 무수히 많치요...)

 

셋째는 인간은 누구나 실수 실패를 하는 것이 당연 하므로 용서하고 감싸 줄 수 있는대도, 목사자신들이 목회를 하다가 실패했을 때를 대비해 변명이나 도피의 구실로 삼기 위한 것도 있습니다. 목사님들 중에는 교회행사나 교회건축 등을 리더해 가며, 여러 프로젝트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소통이나 민주적 회의 없이 교인들의 의사를 무시하고 독단적으로 일을 추진하다가 실패했을 경우, 솔직히 잘못을 인정하는 사람도 있지만, 오히려 정반대의 사람들도 적지 않습니다. 대다수의 목사님들은 또 흔히 요럴 때 잘 써먹는 말로 폭압을 합니다. “주의 종은 하나님남이 판단하시니 교인들이 함부로 주의 종에게 왈가왈부 하지 말고, 주의 종의 영적권위를 인정하고 입을 다물어라, 주의 종을 간섭하는 사람치고 잘된 사람 없다”고 거짓 권위와 억지를 부리며 어영구영 당면한 위기를 피해나가기 위한 수법으로 사용해 왔던 것을 우리는 수도 없이 경험해 왔습니다.

 

좀더 연구해 보아야 하겠으나 아마도 분명한 것은 신약 현 시대의 목사님들은 주님의 종 님이 아니고 저와 다를 바 없는 그냥 주에 일 열심히 해야하는 20여 가지의 은사 중 하나를 가진자임에 분명한 앞장서서 죽는 날 까지 뼈빠지게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십자가에 깔려 죽어야하는 주님의 일꾼 종놈입니다. 모세는 순종이나 존경을 강요 하거나 고압적으로 행동하지 않았습니다. (민12:6~8) 모세는 사람들의 존경을 얻기 위해 자기 권위를 내세우지 않았습니다. 주님의 목자를 친히 인증 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은 낮아저 한결같이 십자가 정신으로 헌신 희생하는 사람을 존경하지 않을 성도는 없을 것입니다. 본보임으로 섬김으로 조직을 이끌어가는 리더법은 순종 강요보다 훨씬 더 폭발력이 커 위력적이기 때문인데, 목회자라 할지라도 인간 근본 심리에서 유발되는 열등의식 서열 맨 위에서 다스리고 싶은 인간 본질 심리가 그대로 녹아있는 순종과 영적권위를 악용하여 자신의 명예나 지위를 변호 하는데 하나님의 돈을 이핑계 저 핑계로 더 집어가 풍요롭고저 애쓰며 집착하는 리더쉽은 믿음이 적다는 판단을 할 수밖에 없고, 그 권위를 권력으로 발달시켜 엉뚱한 왼갖 물질의 욕심 채우고, 그런 모습들은 편안의 인간적 욕심이 있다고 맹목적인 권위주의라고 의심 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고 유독 목사 장로들 에게만 특별한 성령이 임하여 직접 말씀 하신다는 듯한, 목사님들의 애매하고 말도 않되는 주장은, 하나님이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서 하시는 일을 크게 제한 한다는 처사입니다. 그리고 목사님에 대한 순종이 반드시 하나님께 대한 순종과 유사 동일하다는 듯 한 말 또한 사이비적 한심한 강압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과 일대일 관계를 대치하는 그 어떤 것도 허용하시지 않으심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강요형 순종으로 권위 권력을 확보한 리더십은 자칫 미신화나 이단화나 우상숭배화의 우려까지 존재함을 우리는 사이비 종교들의 교주들을 보고 깊이 있게 알아야합니다. 아마도 인간의 “권력의지” 근본 심리상 모두가 굽신거려주는 것을 만끽 하다보면 그 독단 독제 권력을 즐기며 물질적 타락도 만연해 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영적 권위 (파워)는 조금도 제대로 발휘 하지도 못하면서 그 카리스마적 육적 권위가 영적권위라는 듯이 이용하여 목사님들에게 세속적으로 잘못 얻어지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계급적 독제, 교회 재정적 특권, 장기집권, 영적 무기력, 본 섬김 부족, 서로 사랑 부족, 애뜻한 따스함 상실, 교만, 게으름, 탐욕, 세속적 부와 명예, 행정적 부정행위, 정신적 나태, 교인들의 부족한 영적 수준들이 유발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직한 부흥을 위한 합리적이고 자유로운 문화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즉 목사님의 의견도 성경의 하나님 말씀 외엔, 그냥 인간이므로 일 개인으로서의 의견일 뿐인 것에는 너무 기름 어쩌고 저쩌고 하며 왼갖 인간적인 성품을 들어내어 활보하니, 이에 아무것도 무조건 순종이란 없다는 말이지요. 구약적 말씀을 끌어다 말장난 하면 않됩니다. 이 신약 시대엔 그런 리더쉽으로 교회를 부흥 시키지 못 할 것이며 그러한 영적권위를 핑계 삼아 펼처가는 육적 권위주의는 21세기의 시작인 지금부터는 교회가 망해가는 지름 길 일 것입니다. 신약 성경말씀 이외의 어떠한 가벼운 행위도 목사님의 인간적인 임의대로 만들어낸, 즉 본인들은 시도 때도 없이 예수이름을 빙자하여 인간적인 발상이 아니라고 하지만, 그러한 조작된 지시엔 그럴사 하더라도 영적권위 운운하는 지시에는 절대 따라선 않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 주신 참 지도자는 손 발로 직접 뛰며 누추하게 진정한 십자가 정신으로 희생과 헌신과 섬김과 본으로 다른 사람의 마음을 존경으로 감동시키며 스스로 본이 되어 행동하여 실천하고 몸소 모범을 보임으로 인하여 자연스레 존경받음으로 리더를 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도 하나님의 아들이셨지만 사람이 되심으로 말도 않되게 낮아지셨고 이를 통해 참된 지도력을 우리에게 교훈해 주셨습니다. 요한복음13장:1 ~ 15절은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긴 내용인대 (본 발 씻김 사역의 또 다른 의미...) 2000년 전 그 시대엔, 예수님 제자들 모두가 아마도 구약적 율법적 유대교적 바리세인적 목에 힘주는 권위권력적 신앙 문화와 제도와 관습에 물들어 살아 왔으므로 예수님의 제자들 조차도 변화되는 것이 쉽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아마도 수도 없이 리더자로서 섬김의 자세를 희생의 자세를 사랑 행함의 자세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본을 보이며 권면하고 명령 하였을 것이나, 섬김에 대하여 제자들은 진정으로 실감나게 깨달아 실행치 못했을 것이며, 오히려 그 시대의 관습대로 난 예수님의 제자다 너희들보다 한수위다 하며 목에 힘을 주고 특별권위적인 생활을 했을 것입니다. 오죽했으면 고난 당 하시기 전 날에 예수님이 직접 섬김 실천의 모습의 예로, 그들 앞에 무릎꿀고 제자들의 발을 싯겨 본을 보여주시며 너희도 꼭 이렇게 해라 하셨겠습니까?? 예수님은 종의 의식을 가지고 섬기셨으며, 목사 장로가 인간적으로도 존경 받을 수 있는 인격의 수준을 요구 하시며 누추하게 꼬랑내나는 남의 발을 씻겨 주는 믿바닦형 남을 섬기는 자가 으뜸이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발을 씻길 수준의 섬김은 한 두 번 해가지고 돼는 것이 아니라 신앙생활 속에서 백번 천번 누추하게 목에 힘주지 말고 평생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목사도 예외 일리 없으며 먼저 앞장서 리더로서의 첫 번째 원칙으로 정하여 평생을 행해야하지요... (야고보서 2장 14~ 행함 없는 믿음은 헛것... 믿음이 좋다 있다 없다의 척도 증좌는 행함 실천의 수준...) 매일 남의 더러운 발을 씻겨주듯 하는 권력 권위 그런것 아예 없이 비참한 방법으로의 섬김의 리더법이라면 누가 그 존경 앞에 순종하지 않겠습니까? 혹시 목사님들은 구약의 끝자락에있는 1세기 그 시대의 예수님의 제자들은 아니십니까??? 성경이 제시하는 대표적인 리더십은 수직적 억지 계급성 리더법이 아닌 수평적 섬기는 리더십, 남 좋으라고 사랑 해줌, 곧 목사 장로가 남 좋으라고 진짜 종놈 노릇하는 리더십입니다. 교회 재정이나 움켜쥐고 권력을 즐기려 하지 않고, 진짜 종놈의 리더십은 자신의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에, 말씀에 순종하며, 사단 앞에 영적권위로 이를 물리치고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 기꺼이 누추하게 몸소 행하여 노력하는 자입니다. 또한 성경적인 리더십은 목자입니다. “요한복음 10장 11절 나는 선한 목자라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목자는 목양실에 들어 앉아 설교 준비나 빈둥빈둥 하라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나가서 뼈빠지게 세상 사람들과 하나님의 양때를 돌봐야 하는 사명이 있습니다. 대접 받으며 호의호식 하며 하는 것이 아니라, 또 호의호식 자가 아니더라도 왼갖 고통 속에서 살아야 한다는 말이지요. 지금 것 양들을 자신의 양 놈들인 것처럼 (우리는 목사의 양이 아니요 주님의 양~) 함부로 다루더니 정작 양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목사 장로를 예수님 말고는 저는 거의 본바가 없습니다. 목사 전도사 핍박하며 사탄의 괴수로서 권력을 만끽하는 장로는 보았어도 양들을 지키기 위해 늑대와 싸우다 죽었다는 장로는 전혀 본바가 없습니다.

 

만약에 이러한 목사 장로가 있다면 사형을 시킨다 하여도 그 장로님이 목에 힘주지 않아도 내 놓고 존경하여 따르고 또 따를 것입니다. 그리고 또 생각해볼 문제는 우리는 오히려 거꾸로 가고 있지요- 양이 양을 전도하고, 양이 양을 양육하고, 양이 양을 먹이고, 양이 양의 상처를 치료하고, 양이 양을 심방하고, 양이 양을 위로 하고? 양이 양을~~~?? 그러면 목회자 즉 목자는 뭘 하나요??? 아~ 목사님은 설교 해야지~.!!!..??? 그러면 직함을 목사라 칭 하지 말고 “설교사”라고 불러야 하지 않을 까요...?? 답답한 것은 듣는이가 목사님이 말하는 것을 모두 수용 할 거라는 기대로, 성경상 설교사의 존재성에 대한 논제, 일방적 혼자만의 설교에도 자기 즐거움 자기만의 우월적 자존감 같은 것을 즐기는 인간 심리적 속샘도 내포 할것입니다? 반론이나 질문이 없는 일방형 연설성 설교 물론 세상 모든 종교가 이 문제 부분에서는 비슷한 면이 대부분이지만 설교사 혼자만 듣는 상대가 모두 수용 할 거라 착각하며 하는 설교, 과연 이러한 설교 방식이 사람을 변화 시키는 것에 대하여 인간의 심리상 가능한 일일까? 설교사로서의 목사님 ?? 추후 따로이 연구 해 볼만한 주제라고 글 쓰는 저는 확실히 궁굼해합니다.....

 

제 작은 아버지께서 시골 고향에서 소를 30여 마리 사육 하는데 먹이도 주고, 몸을 빗질하여 몸을 닦아 주기도하고, 몸에 붙은 똥 덩이를 때어 주기도 하고, 땀 흘리며 수없는 종류의 일로 소를 조금만 살펴 보아도 어디가 아픈지, 어디가 상처가 낫는지 알아차리고 온갖 처방과 노력으로 건강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목자는 양들을 찾아 대려오고 (전도) 먹이고 보호하고 치료하고 키우고 하나님의 비전을 따라 실제로 진땀 흘려 돌보는 이 일 저 일을 실천하여 인도해야 합니다. 주에 종의 직분 중 설교 말씀은 아주 작은 일부분 이고, 목사가 남아돈다고 할 것이 아니라 대부분 목사님들의 남아돌 정도로의 교회에서 빈둥빈둥의 시간을 노회 정치 활동이내 뭐내 하며 놀지 말고 실제 눈코 뜰세 없이 바삐 뛰어 다니며 양을 치는 목자의 일을 실천적 행동으로 양들에게 하나님 뜻을 전달해야 하게 된다면 헌신의 리더자로서의 매일을 살아간다면 현제의 목사로서도 수효는 부족 할 것입니다.? 이러한 목자로서의 리더십의 대표적인 모델은 주님입니다. 예수님은 성전에 들어 앉아 성전 안에서만 복음을 전한적이 없습니다. 사방팔방 날이면 날마다 직접 돌아다니시며 위로 하고 감싸주고 응원해 주고 충고를 아끼지 않으며 교회 돈 하나님 돈이 아닌 목사 자신의 사비를 털어 진정심으로 남들에게 밥을 사주고 직접 복음을 전했다는 것입니다. 목사님들이 교회에 들어 앉아 권위 권력이나 파먹으며 목에 힘주는 제미를 만끽하며 편안한 사역을 하는 것은 예수님이 원하지 않으시며 경멸하셨습니다.

사도바울과 예수님은 목자로서 직접 자신의 생명을 버리심으로 까지 직접 행하는 목자로서의 참된 지도력의 모델을 보여주셨습니다.

 

목사님 자신은 하지 않으며 남만 시켜먹으며 설교사 행정실장 교장 대장 노릇으로 영적권윔네 하고 복종과 순종만을 강요하는, 지배와 지도를 어영구영 자신들 편리하게 적당히 섞어 교묘히 악용하며, 그~ 예날 천 년 전의 정치세력적인 교황들처럼 절대 권력자가 되어 월급장이로 섬김 없이 성도들에게 반말이나 하대를 일삼기도 하며, 진정 신앙과 관계없는 일 까지도 권위와 권력 순종과 복종과 지배를 남용 하는 것은, 믿는 자 들이 무지해서입니다. 반 말 이야기가 나와서 인데 왜 왜 ?? 왜 반말을 하는 겁니까? 신약성경 어디에 성도들에게 반말하라고 나와있나요. 반말하면 목사님 자신이 우월 하다고 무소불휘 대장인 것 처럼 느껴지십니까? 참으로 반말 하시는 목사님들 불쌍합니다. 진짜 섬김의 단어를 사용해서 최대한 존대하는 말을 상대의 나이와 무관하게 존대말로 섬겨야 신약성경적인 것 아닌가요? 반말하면 목사님이 권위주의 윗 사람 같아서 기분 좋습니까? 진실로 믿는 자 들이여 !?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탐구하여 바르게 깨닿고 잘못된 전통에 얶메여 사는 우리들의 목사 장로님들을 향하여 대처해 나가야합니다???. 직접 본건 아닙니다만 순복음계통의 헌법 제36조에 “목사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장중에 있는 교회의 사자이며, 복음의 사신이며, 제사장이며, 교회를 위하여 받은 성직이다. 목사는 복음을 전파하며 예배를 인도하며 성례를 거행하며 교회를 치리하는 가장 존귀하고 영광스런 성직이다” 라고 씌어 있다고합니다. 여기에 성직이라는 단어가 두 번이나 들어있어 순복음교회가 개신교 헌법 중에서 가장 독재적 리더성의 면모가 강한 것을 엿볼 수 있다고합니다.

 

물론 이것은 천주교적 기독교의 전통에서 가저와 독선을 펴기에 편리하도록 신약성경에는 없으나 그럴사하게 지어낸 법률이지요. 하지만 목사의 권위주의와 독재를 거부하고 모든 신자가 제사장직임을 신약성경에는 명시되어 있습니다. 어쩌다가 우리는 이렇게 되었는지 하나님 말씀 때문에 힘이든 것이 아니라 우리 끼리 지어낸 전통과 교회법 때문에 이리도 말성과 변질이 많고 그로인해 부흥이 아니되니 답답합니다. 제발 신약성경 말씀을 들어 치는 방식으로 교회 제도나 전통이 새로이 만들어 저야만 이 시대에 부흥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글을 쓰는 저는 확신합니다. 그러므로 어쩌면 이 시대에 우리가 살 길은 16세기 종교 개혁보다도 더한 종교개혁을 해야만 우리의 신앙도 천국입성도 보장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또 요한계시록 2장 6절에는 ‘니골라’ 라는 이름이 나오는데, 그 뜻은 “백성을 정복하다 또는 일반신자 위에 군림하다” 라는 뜻으로, 한사람이 전권을 가지고 모든 일을 주관하는 사람인 ‘성직자’를 나타내는데, 학자들은 이 ‘니골라당’이 바로 성직자제도를 가리킨다고도 말을합니다. 인간들의 편의에 따라 고안해 낸 영적권위를 빙자하여 인간권력형 목사제도는 비성경적인 것으로서, 교회내에 일인독재체제로 제도화 되어있어, 그 리더 방식의 폐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을 지경에 이르렇습니다. 무엇보다도 담임목사의 일인체제로 제도화 되어 있음으로써, 혼자서 모든 성례를 주관하고 집행하여 만인제사장직이 수행되지 못하고 원천봉쇄되어, 신자들을 벙어리 제사장으로 만들고 말았습디다. 그러지 말고 그냥 신약성경대로 한번 해봤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진짜 꿈꾸어 본적도 있답니다. 그리고 목사 혼자서 설교를 독점하고 가르침으로써, 성도 개개인이 깨달은 성경말씀을 나눌 수 있는 길이 차단됨으로써 실제는 믿음의 성장을 저해하고 있음을 우리는 알아야합니다.

 

그 외에도 신자들 각자가 여타의 다양한 은사를 활용할 기회가 없어지면서, 대부분 주일에 설교만 듣고 오는 선데이 크리스천이 되게한 주범이 설교사로서의 목사님 제도라고 말해도 과언은 아닐듯합니다. 이 처럼 교회에 들어 앉아 하는 일인목사체제의 리더를 새우는 방식은 다시금 종교개혁을 해야 할 만큼 독재로 흘러와 전 세계 인류가 그러한 한심한 개신교회에서 날이 갈수록 등을 돌리고 있습니다. 이러한 리더법의 목사 제도는 교인들은 자기네 목사의 말만 듣고, 또 그를 맹신하는 교인이 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결국 목사가 교회의 우두머리가 되어, 교회의 주인은 주님이 아닌, 말은 아니라고 엄청나게 합니다만 담임목사가 실제주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신약성경에 나타나 있는 대로, 신약교회가 동등한 2명 이상의 복수 장로들의 지도력에 의한 민주적인 인간존중적인 소통을 통한 합리적인 교회통치체제로, 지역교회내의 권력에 대한 시험을 막게 하셨음을 모든 개신교인들이 하루 빨리 깨달아 바로잡아야만 교회가 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교회가 목사와 동등한 장로들에 의한 억제와 균형이 가장 좋은 형태라는 것을 신약성경을 통해서 알리셨음이 어면한 사실입니다.

 

영국의 역사 학자 엑톤은 “권력은 부패하는 경향이 있는데 절대적인 권력은 절대적으로 부패한다”고 말했지요. -이것은 목사가 아니어도 인간의 본성일 것입니다. 일인독재적 리더법은 절대 권력을 행사할 수 있도록 평신도들의 의견과는 하나님 뜻과는 무관하게 자기네들 끼리만의 헌법에 보장해 놓고 그것이 마치 성경 말씀인 것 처럼 주장하는 것이 우리나라 대한민국입니다. 또한, 국내 주요 교파의 헌법에는 비성경적인 목사님들이 독제적으로 리더하기 편리하게 꾸며진 교단 헌법 내용들이 대단히 많이 있습니다. 법으로 부폐를 저지를 수 있도록 해 놓은 것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닌... 이러한 것에 대해 일부 양심적인 목사들은 잘못된 자기네 헌법을 뜯어 고쳐야 한다고 최근 들어서야 쬐끔씩 말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미 권력에 마취되어 소통 없이 자기 혼자 맘대로 하는 즐거움을 만끽하고 있는 대형교회 목사님들은 “예수님이 와도 다른 것은 몰라도 교회 헌법만은 못 바꾼다”는 말이 나돌 정도로 대한민국 교회는 썩어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욱이다가는 결국엔 교회가 텅 비게 만드는 주범은 사탄도 말세지말도 아닌 그 주범은 목사님들이시니 우리는 진짜 주님의 몸 된 교회의 리더법을 믿는자 스스로 신약성경만을 바탕으로 만들어 내야만 할 것입니다.

 

21세기 세상은 너무 너무 밝아저 버려 우리가 목사님들보다도 더 쉽게 박식하게 공부해 낼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순수한 오직 예수 오직 믿음으로 신약성경 본래에 관심을 갖는 것입니다. 신약 본래의 아름다운 멋진 리더십이 무엇인지 무식 할 정도로 모르면서 군림으로 사람들을 다스리기 위하여 주님 말씀을 위반하고, 자기 뜻대로만 지배하려고 강제를 동원하여 아멘을 강요하고 쌩으로 조작으로 거짓 존경의 자리를 얻으려 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말씀 조작 금지 고전4:6 - 기록된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말라) 개신교회 간증이나 설교집 책자를 읽다보면 공통적으로 느끼는 것은 성경 말씀의 본질도 있겠으나 동일한 말씀 구절이라도 세상 그 어떠한 논리도 만들어 낼 수 있구나입니다. 신 구약 뒤섞어 이 말씀 저 말씀 짜 맞추면 못 만들어낼 논리가 없다는 것을 그 수많은 책자들은 보여주고 있지요? 목사님들은 명령으로 순종을 강요하고 하나님이 아닌 목사님 자기 자신을 위하여 영광을 누리며, 이 인간적인 영광과 권위를 유지하기 위해서 자신의 인간적인 혹은 말씀을 악용하여 쉽고 게으른 방법으로 또 또 “순종이 재사보다 낳다” (삼상15장1~ 22절) 하며 적합하지 않는 말씀을 계속 적용하며 외적인 의지와 권력으로 리더 통솔 하려 합니다. “순종 ? 목회자에게의 순종” 그 순종을 목회자 편의에 의해 계속 악용된들 이미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생각하는 이성의 인간”의 맘 속 깊은 곳에는 무슨 효용이 있겠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또 성경 어느 구절을 근거로 그렇게도 “아멘”을 강요하여 억지로 받아내듯 하는 건가요? 그렇게도 아멘을 자연스레 받아 낼만한 자신이, 미신식 복종이 아닌 존경심을 얻을 수 있는 자신이 그리도 없으신지요? 2세기 이후에 초기 초대교회 처음 성직자가 출현 하면서, 처음에는 순수하고 온전한 신앙심으로 일체의 권위감 없이 진짜 종놈 마당쇠로서 진실로 섬김의 의무로만 헌신적인 나날로 가득히 하며 출발 하였답니다. 그러다가 사회적으로 그들의 신앙이 숭고하고 아름다워 그 전혀 계급적이지 않은 성직자라는 성직이 종교적인 만족을 줄뿐만 아니라, 사회속에서 남 좋은 일로 타인을 섬기고 사랑하니 명성과 존경이 자연스레 우러나 사람들이 알아주며 잘 따라주다가 뻔한 인간 권력의지 심리에 의해 변질로 흘러 육적 권력과 영향력, 개인의 재능을 활용한데 대한 만족감등이 발생되어 사회적 우위에 자리 하다가 차츰 차츰 세속적 욕심으로 변질 발달되어 흐르면서 중세엔 정치와 종교 유착으로 악질 성직자들이 판을 첬으며, 하나의 숨겨진 악질 쓰레기 인간 이기적 집단으로 형성 외곡 변질되고 타락 개판이 되어 그래도 부실한 것이 만치만 그나마 다행스레 16세기의 종교개혁을(기독교개혁) 맞이하였고, 다시금 세월이 흐르면서 동일한 현상이 또 다른 형태로 일어나 썩고 변질 세속화 되어 오늘 날에 목사님들의 행태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목회자 이기적 군림하는 권위를 변질 악용한 권력 남용과 교회 안의 새로운 물질적 이권들은 본래의 교회의 가치로 부터 빗나가 있습니다. 세상은 엄청나게 밝아져 버렸습니다. 50세 나이의 초등학력 여성도 컴퓨터 인터넷 검색을 능숙하게 하고 지식 검색 창에 원하는 정보의 단어나 문장들을 치면 원하는 정보들과 신학적 사실들과 기독교 역사와 성직자들의 변천사들을 그 무엇이든 손 쉽게 열어 볼 수 있는 참으로 밝고 쉬운 세상이 와버렸습니다. 엉뚱한 교리와 인간적 카리스마를 앞세워 얼렁뚱땅 하려는 권위 권력적 리더십은 믿지 않는 자들과 신앙인 들에게도 참으로 점 점 더 택도 없어져 갑니다. 목사님의 권위는 자신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영적 전투에 쓰여저야하는 (사탄과의, 악과의) 영적 권위를 말하는 것입니다. 위로부터 받은 권위기 때문에 인본적으로 남용 하면 절대 아니 된다는 거지요. 요즈음 목사님들의 권위? 아니 권력? 정말 너무하십니다. 진짜 영적권위는 간데없고 인본적 권력으로 휘두르는 요술 방망이 같이 사용하고 있는 것을 알고는 사시는지요. 무조건 목사의 말은 하나님의 마씀이다 순종해야 한다고 한다는 그 권력, 이런 것은 독선적 권력가가 독선 독재는 공산당들이나 하는 짓이지요. 목회 안에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권위를 세워 가야하고 모든 것은 사랑으로 타인을 죽기 까지 섬겨나가는데 사용하는 권위이지, 자신이 교회의 주인의 권위를 가지면 아니 된다는 것이지요.

 

신약성경의 말씀만을 비추어 목사님 자신이 불리하고 피곤하고 힘든 방식일지라도 우리는 신약의 리더방법을 새로이 개발해야만합니다. 다 시 한번 말하지만 목사의 권위는 영적권위 곧 육적인 인간적인 것이 아닌 오직 “내적 영적 파워”를 뜻하는 것 아닌가요?. 영적 권위는 겸손과 온유함에서 나오는 것인데, 대장적 다스리는 권위 굴림 하는 권위는 사단의 앞잡이가 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존경받음으로 인하여 생성되는 참 권위는 자신이 먼저 낮아지고 자신이 먼저 하나님 앞에 겸손 할 때 하나님은 권위로 높여 주시는 것임을 생각해보면 누구나 이해 할 수 있을탠데 모른척하며 목에 힘주는 것만 그리도 즐기시면, 우리는 이 시대에 절대 부흥 할 수 없습니다. 목사님의 영적권위는 인정하되 권력 권위주의는 인정 되어서는 절대 아니 된다는 것이지요. 한국교회 목사님들은 권위주의에 빠져 예수님의 자리에 앉아서 에~헴~ 하고 있습니다. 어떤 목사는 자신이 보이는 하나님이라 하고, 목사는 영의 아버지라고 까지 말을 하지요. 장로님들도 이런 말을 하면서 목사님들을 부추기며 한심하게 비행기를 태우고 있습니다. 목사를 권위주의자로 만드는 것은 성도들이 그렇게 만들고 있는 부분도 있다는 것을 각성해야 교회에 예수님이 존재해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호응을 해주는 성도들에게는 기분 좋으니까 내비 두고, 그런 권력적 대접을 받아먹지 말고, 목사님이 좀 피곤해 지더라도 반드시 깨우쳐 일깨워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대장 대접은 비 성경적이니 앞으로는 특별대우 하지 마시라고 타일러 일깨워 주셔야 합니다. 꼭, 목사님의 일상이 힘겨워 지더라도 말이지요?

 

그런식으로 성도 여러분이 목사님들에게 인본적 대장 대접을 하시면 목사를 교만하게 만든다고 권면하고 책망도 하여 목회자는 권력자가 아니라는 것을 목사님들이 스스로 자진해서 성도들에게 알려줘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추켜올리면 어깨와 목에 힘이 들어가게 되는 것이 인간의 보편적인 심리입니다. 목사가 목이 뻣뻣하고 어깨에 힘이 들어가고 목소리가 톤이 높아지고 내가~ 내가~ 가 나오면 영적으로는 다운이 된 거라고, 영적으로 교만해 지는 거라고, 낮아저 섬김을 행하지 않는 거라고, 더러워진 것이라고 스스로 생각 하시면 되는 것입니다. 또 하나 답답한 것은 우리나라가 특별이 남녀 구별을 유달리 하는 문화라서 그러는지? 저는 개인적으로 여자도 얼마든지 리더자가 될 수 있다고, 존경스러워 존경 받을 수도 있다고 그 존경으로 조직을 이끌 수도 있다고 생각은 하지만 어쩔수 없이 우리나라의 현실적 분위기 문화풍조는 목사의 사모가 권위 권력을 갖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보편적인 문화속에 살아가고 있으니, 목사님들의 권위주의에 기승하여 사모가 잘난체하며 나대는 권위를 또 하나에 목사인양 인정받기란 어려운게 현실입니다. 그러므로 목사의 사모는 목사가 아닌 것이 분명 하므로 그냥 평신도로서 입에 자크를 체워 말을 아껴 나서지 말고 있는 듯 없는 듯 처신을 해줘야 현실적이라고 봅니다. 왼 갖 것에 감 노아라 배 노아라 하면 그런 교회가 부흥되지 않는 것이 우리 대한민국의 문화적 현실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을 위로하는 역할의 할 일이 어마어마 하게 많으니 이 부분에 정성을 다해야합니다. 어머니의 사랑으로 따스하게 감싸주는 역할, 상처 받은 영혼 성도 부등켜 안고 펑펑 함께 울어주는 역할이 절실 하지, 사모가 또 하나의 목사인양 또 다른 대장 노릇하는 교회치고 부흥을 이룬 교회는 없음이 사실이니, 성도들이 인정해 주지도 않는데 존재감을 드높이려 목숨걸고 엉뚱한 일에 열정을 품지 말고, 목사의 아내 사모는 교회 안의 한결같은 따스함 유발자 이어야합니다. 수 천년 내려온 우리 문화를 이해한다면 입은 꽉 다물고 여성의 섬세함을 잘 살려 그 수 많은 성도들의 상처를 싸메어 주는 따스함의 역할만을 비밀리에 꼬~오~옥 해야합니다. 아무리 똑똑하고, 머리가 좋아 아는 것이 많터라도 그런 목에 힘주는 사모는 사사건건 불란만 일으킵니다. 교회 안에서 입은 꽉 다물고 따스한 여성성으로 해야 할 일이 부지기수입니다. 우리나라의 특성상 사모의 따스함이 없다면 그 교회는 결코 부흥 할 수 없다고 단정지어도 좋을 것입니다. 따스하고 포금한 사모님 때문에 교회에 나오는 성도가 대단히 많음을 안다면 나대지 못하는 것에 섭섭해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엉뚱하게 하면 않될 권면 충고하는데 열정을 쏫으면 우리나라 정서상 그러한 여성성의 섬김 없는 나대는 사모 때문에 아마도 부흥이 않되는 것도 상당량 실존합니다. 대한민국의 사모님들께 죄송 하지만 사모님의 잔소리나 잘난체나 말씀은 필요 없습니다. 말은 넘처나는 시대이니 불란만 일어납니다. 부디 사랑 따스함 유발자가 반드시 되어 주셔야합니다. 땅 끝 까지 복음을 전하라함은 교회에 들어 앉아 영적권위를 핑계삼은 권력으로 계급으로 어디 사모니~임 한테 가~암~히~ 나 외치면 아니되는 것이며 그 땅 끝 방법은 목사님들이 게으르지 말고 직접 그 땅들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칭찬과 존경과 자동적 따름이 적극적으로 발생됩니다. (고후6:16 두루 돌아 다니며 행하여...) 오히려 교회 안에 이 요상한 계급주의 꼴보기 싫어서 목사님의 권위주의 꼴보기 싫어서 21세기 현대인들은 교회에 나오지 않는 사람들도 상당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는 진실한 리더십을 발휘하여 목회자로서 성공 하려면 과거의 권위주의는 벗어 던져야만 합니다. 어린시절 친구들에게 인정 받지 못하고 존제감 없이 살아오다가 권위 권력 존대를 받다보면 그 달콤함에 절어 인간 심리상 그거 내려 놓기가 아마도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기름 부음하고는 아무 상관도 없는 것을 기름 부음 받은 자란 권력을 갖아야 한다는 듯이 구약적 말장난만 일삼지 마시고, 종 놈으로 돌아가 믿바닦에서 엎드려저 꼬랑내나는 성도들의 발을 씻어주는 섬김으로 진짜로 사람들이 눈물나게 진실로 존경 받음으로서 거기에서 유발되는 기쁨을 황홀을 맛보십시오. 그리하면 지금 무겁게 지고 있는 십자가는 거뜬히 신나게 가벼워 질 것입니다. 그 권위주의 때문에 신약엔 있지도 않는 독단주의 지키려다가 스트레스 디지게 받는 목사님들이 불쌍합니다. 그 권위주의 팽개치고 예수님 만으로 자유 하세요. 그러다 그 권위 독제 권력 지키려다가 정말 스트레스 디지게 받아 암 병 걸리십니다. 교회가 아니더라도 21세기 공동체는 그러한 권위 권력적 계급주의형 리더쉽을 세상은 경멸합니다. 요즘 청년층과 어린이들은 그러한 쇠뇌교육식 의식화에 강압적 일방적 카리스마적 리더십에 환멸을 표하고 노골적으로 등을 돌려버립니다. 비웃는 소리가 아니라 진짜로 모두가 다 잘난 세상입니다. 옳음이 정답이 참으로 많이 다양하게 쉽게 존재하는 시대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예수안에서 기가막히게 합리적이고 건강한 아이디어가 목사님이 우숩게 아는 그 집사님들에게 순수하게 너무도 많이 있습니다. 목사면 장로면 무엇이든 아는 사실들이 모두 지혜로운 내용 일 것이라 생각하며 이 시대의 그 똑똑한 많은 성도들을 무시 하지 마세요. 권위주의로 반말 하지 마세요. 모두 잘나고 똑똑한 그들은 이미 자신이 알고 있는 의견과 유사해야 자신의 의견이 조금이나마 적용되어야 어떠한 일에 동참을 해줍니다.

 

고유의 권한이내 뭐내하며 소통 없이 억지로 획일주의로 기가막힌 기획이라 하며 마치 목사 자신이 세상 모든 사항을 깊이 있게 절절히 통달한 사람처럼 착각 하시면 아니되고 우물안 개구리임을 늘 알아야합니다. 일방적으로 따르라고만 하지말고 권위 같은 것 없이 동등히 동역자로서 의논 소통해서 의논하며 손잡고 가세요. 본인 혼자 결정해가지고 와서 억지로 아멘 시키며 어섹하게 손잡고 가봐야 진정심을 끌어 내기는 불가능합니다. 강압적 독단적 리더를 해봐야 면전에선 아멘 하고 아무 말 없이 뒷걸음질 치고 나온다고 해놓곤 이핑계 저핑계로 않나와 버리면 열매 없이 혼자만 해야하는, 진심으로 동참해 주지 않으므로 그냥 냅둬버리니, 교회에는 나오나 헌신과 희생은 해봤자니까 진정으로 변화시키기는 더더욱 어렵 다는 것입니다. 카리스마로 특권권위주의로 리더해 봐야 먹혀들지 않는 시대라는 것입니다. 이젠 신학이 뽀록난 시대입니다. 글 쓰는 제가 이런 논리를 편다고 그리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그렇게 세상은 속속들이 밝아저 으멍한 속내를 들여다 보고 그런 태도에는 상종해 주지 않습니다. 진실로 그 다 잘난 의견들을 그 많은 정답들을 잘 소통 반영 한다는 것은 아마도 쉬운 일이 절대 아닙니다. 그러나 이미 변해버린 시대를, 아니라고 욱이며 잘못되었던 예전의 전통적 카리스마 독단 독제적 미신식 리더십을 발휘해봐야 무용지물입니다. 교회에 목사라는 특별권위자 지배자가 있어서는 절대 아니 될 일입니다. 목사님을 나타내는 것은 목사님의 신앙을 나타내는 것은 능숙한 설교나 학벌이나 생각이나 유창한 설교가 아니라 명석한 두뇌가 아니라, 오직 “십자가 정신 = 희생 헌신 섬김, 사단을 향한 영적권위, 한결 같은 따스한 사랑”으로의 순수한 본 실천 행동을 직접 손수 한결 같이 하는 것입니다. 신약 사도행전의 사도로서의 모든 고생스런 실천을 몸소 보여주는, 리더자로서의 본이 되는 오직 믿음을 동반한 행위로서의 삶 자체가 순수한 삶에 존경받는 모습들 자체가 진정한 리더십 입니다. 왜 ? 왜 ? 왜 ? 주변에 존경스런 목사님들이 전무한 것입니까?

 

목사님들을 진심으로 잘 따르는 권력 권위적이지 않아 남을 힘써 거들어 주어 “섬김의 존중의 리더십”을 실천하는 지도자가 있다면 우리나라 기독교회는 반드시 부흥 할 수밖에 없을 것이며 진정으로 신앙 안에서 진짜 존경을 해주는 목사라는 종놈이 생성되는 것입니다. 21세기 밝디 밝은 현 시대엔 어쩌면 설교사는 필요 없습니다. 오히려 이 말했다 저 말 했다 말 장난에 혼란스러워 죽겠습니다. 교주형 카리스마 목회 리더자인 내 것 교회주의의 주범이신 목사님? 교회 안에 모든이는 하나님 앞에 목사를 포함하여 수평적 평등 다 동일한 하나님의 자녀 똑같은 종이요 양일 뿐입니다. 기름부음 받았다 하며, 실제는 기름부음 받은자로서의 존경은 조금도 받지 못하면서, 기름부음 받은 자는 인본적 권력자이여도 된다는 듯이 쌩으로 제도로만 계급적 권위로만 존재하면 않된다고 자신들의 입으로 말들은 잘도합니다. 무거운 짐을 권력으로 성도들의 어깨에만 얹어주고 자기는 편안히 목에 힘주며 손가락하나 않 움직이는 편안한 리더법으로... 그러면서 본인스스로는 받지 말아야할 엉뚱한 권위감을 품고 있으므로 인해서 입지 말아야 할 상처를, 주지도 않는 왼갖 스트레스는 감히 목사한테 하면서 스스로 알아서 않 받아야 마땅할 누가 주지도 않은 목에 힘주는 것 때문에 목사님 스스로 스트레스 디지게 받으며 자기가 알아서 엉뚱하게 힘들어하고 열매는 없고, 그것이 엉뚱한 리더법으로 인한 스스로의 깨닳음 없음을 모르는 요즘 목회자들입니다. 그러다보니 각각의 교단들이 (지 맘대로 않되니까 찟어지고 찟어저 124개로) 제각각 타락하고 각각의 개교회가 변질되고 성도들의 신앙이 포도주의 물탄 격이 되어 가고 있는 현실임을 아닌 척 하지만 교회다니는 사람이면 다 아는 사실입니다.

 

교단은 명예와 권력을 착취 하려고 성경적이 아닌 전통적인 방법으로 리더쉽을 개발하여 펴가고, 금권으로 타락하고, 개교회는 교만과 독선과 물욕으로 변질되어 가고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세속에 빠져들고 있는 것이 훤히보입니다. 1980년대 이후에 들어서면서 우리나라 경제발전과 풍요와 더불어 목회자들이 청빈을 멀리하고 물질적 부요가 찾아와 그때부터 벌써 영적 적신호가 켜진 것이지요. 교회가 타락하면 세상을 향한 더욱더 소금이 제 역할을 않하니 이로서 한층 더 부패되어 가는 것이지요. 지금의 때가 말라기 때와 같다고 볼 수 있는데 신령해야 하는 목자들이 타락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급속도로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아닌척 하며 목사 권위주의 때문에 세상과 입을 맞추고 있습니다. 이 시간 성령님께서 지상교회 목사님들에게 경고의 말씀을 하시고 있다고 우리 믿는자는 느껴야합니다. 순교자의 피를 거룩하게 하지 않으면 반드시 심판하신다고 말씀 하신 하나님 이신대 이러다 우리는 다 지옥에 떨어질 것입니다. 목사님들의 위법한 영적권위를 빙자한 권력주의 권위주의 리더쉽을 그냥 놔두면 아니 될 것입니다.

 

제발 말로만 설교로만 외치며 리더 하지 마시고 꾸준한 순~수한 한결같은 십자가 정신의 본을 보여 주심으로 리더 하세요. 말씀이 넘처나는 이 시대에 십자가 섬김 정신의 본 없는 설교쟁이 말씀은 필요 없습니다. 교회안의 수직관계형 리더 방법? 이는 우리 모두를 하나님 말씀에서 멀어지게 하며 목사님들의 잘못된 부분을 본받아 끝도 없이 교회 안에 성도들 끼리 위에 있어 군림하면 그 대장 노릇 제미도 쏠쏠하니 계급으로 헌신과 희생은 없이 성도들 끼리도 못된것만 본받아 서로가 위내 아래내 하며 분쟁과 갈등만 야기시킵니다. “군림하는 계급적 권위주의형 리더법” 이는 목사님을 포함한 우리 모두를 죽여가고 있습니다. 성도들을 천국으로 이끄는 것이 목에 힘줌 권위주의 방식의 리더로 된다면 참 쉽겠지요. 남들이 내 앞에서 설설 기어주니 얼마나 짜릿 하겠습니까마는 이리하면 망하는 것이 눈에 훤하며 뻔합니다.

 

아래 2개 페이지는 어느 글에서 발취한 권위주의 반대편 목사님의 훌륭한 리더십 15계조를 퍼다가 소개합니다.

1.훌륭한 리더십은 학벌이나 자질이 아니라 성과의 결과를 만들어 내는 자이다.

(열매 맺는 포도나무요15:2) - 명령하고 강요하고 강권적으로 끌고 가며 장로와 성도들을 복종시키려한다.

2.훌륭한 리더십은 반대자를 끌어 앉고 가는 넓은 가슴의 폭을 가진 능력 있는 자이다.

(관용과 원수를 사랑 눅6:27.28) - 자기도 모르게 자만하여 성도들을 무시하고 자신을 과대평가하여 양보를 비굴하게 생각하고 오히려 소통을 방해하고 고집을 부리며 희생을 강요한다.

3.훌륭한 리더십은 파당을 만들지 않고 많은 사람들을 하나로 뭉쳐 굴러가게 하는 능력자이다. (하나 되게 하는 일치운동 에4:3) - 성도 위에 군림하고 채찍질하며 큰 소리치고 나 싫은 자는 떠나라고 고함친다 (그러므로 양들이 떠나든지 자기가 떠나든지 양단간 결판이 난다).

4.훌륭한 리더십은 많은 사람을 감동시켜 따라오게 하는 설득력을 가진 능력자이다.

(설교에 영력 능력자 행1:15.2:4) - 자기중심 파를 만들어 뭉치게 하고 근위대를 만들어 성을 쌓고 경호를 하게하고 반대자가 생기면 쓴 뿌리라고 하면서 소외시켜 고사시키려는 우를 범한다. 그럴 때 거기에는 필연적으로 반대그룹이 생성된다.

 

5.훌륭한 리더십은 소란한 교회를 화해와 평화의 공동체로 만들어 내는 능력자이다.

(성령의 열매 갈5:22.요14:27) - 욕심, 본능에 끌려 교회 재정을 자기마음대로 주무르려하는데서 갈등을 빚고 분열을 일으킨다(사례비를 적게 올렸다고 예산서를 내어던지는 목사도 있다고 한다).

6.훌륭한 리더십은 급변하는 환경에 카멜레온처럼 적응하는 탁월한 능력자이다.

(비천과 존귀에 처 할 줄 아는 빌4:12) - 권위주의 목사는 미운 자를 소외시키고 자기행위를 정당화하며 자신을 보호키 위해 거짓으로 하나님의 뜻이라고 감사하며 홍보한다(하나님의 뜻은 미운 자(가롯유다)까지 데리고 가는 것이다).

 

7.훌륭한 리더십은 적자 공동체를 흑자 공동체로 만들어 내는 능력자이다.

(성령이 함께하는 사람 요15:16) - 기분 나쁜 소리를 들으면 참지 못하고 얼굴을 붉히며 혈기를 내고 당회나 제직회를 하다가도 고함을 치고 삿대질을 하며 거룩한 설교는 않하고 주일날 강대상에서 반대편 자들을 난도질 하는데, 하나님의 말씀만이 선포 되어야할 주님의 날 설교 중에 개인적인 비난 불평을 일삼는 한심한 짓거리를 많은 목사들이 자행한다.

8.훌륭한 리더십은 복종 순종이 아니라 생동력을 불러일으키는 능력자이다.

(성령 충만 받고 성령의 지시대로 행동 행2:4) - 자기는 왕으로 제사장으로 선지자로 군림하고 발을 씻어주는 제자의 도, 섬김의 도는 입으로만 외친다(그것을 장로들은 면전에선 복배하고 뒤에 가서는 죽일 놈 살릴 놈 헐뜯는다).

9.훌륭한 리더십은 하나의 업에서 많은 지업을 만들어 내는 능력자이다.

(해산의 고통 자 대 기업가, 다섯 달란트) - 자기 앞에 밥그릇을 맨 먼저 놓게 하고 위 연배의 장로나 권사는 다음 차례로 받게 하는 것이 당연한 줄 안다. (어떤 권위주의 목사는 장로에게 세배를 강요하고, 나이 불문하고 반 말을 일삼는다고 한다, 이러니 세상에서 목사는 버림을 받은지 오래...).

 

10.훌륭한 리더십은 이상과 꿈을 현실로 이루어내는 능력자이다.

(우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빌1:26.) - 하나님의 돈을 추잡하게 집어다가 분수에 넘치는 사치를 하고서도 부끄러워 할 줄 모르고 자랑스럽게 축복 받았다 하며 과시한다(고급차, 가구 등등). 종교지도 자의 청빈은 거룩성과 정비례한다.

11.훌륭한 리더십은 타인보다 한수 미리 내다보는, 구 시대적 시각을 벋어 던지고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직시하는 시력을 갖고 합리적 계산을 하는 능력자이다. (높은 단수 로마인 행22:25) - 권위주의 목사의 양들은 갈등의 분위기에 소수만 기쁨이 있고 절대다수는 방황하고 불안해한다. 교회봉사에 생기를 잃고 메마르며 돈을 주고 교회 봉사 일을 시키기 시작하며 그로인해 끝도 없이 신앙질병을 앓는다. 그런고로 양들이 새끼를 낳지 못한다.

12.훌륭한 리더십은 해악의 문제는 끝까지 인내와 침묵의 묵비권 능력자이다.

(인내은사 갈5:22) - 주인 행세하는 장로들을 제쳐두고 자신을 힘들게 하는 중직자를 배제 시키며 목사가 교회 주인이라 하고 자신과 잘 맞는 평신도 집사에게 재정부장을 맡기며 자기편으로만 평신도 중심 목회에 생명을 건다.

13.훌륭한 리더십은 눈에 가시 같은 자를 눈에 눈물같이 활용하는 능력자이다.

(적을 충신으로 만드는 자 12:20) - 결국엔 목회는 기쁨이 없고 불안하며 자기 자신이 목회에 싫증을 느끼게 되고 노후가 불안하니 돈 챙기는대 온맘을 다한다.

 

14.훌륭한 리더십은 정직하고 진실하며 자기의 과오를 솔직히 인정하고 용서를 빌 수 있는 능력자이다.(진실 정직자 좁은 문 눅13:24) - 자기이상 실현을 위하여 장로 안을 거부하고 자기주장을 최선으로 하여 마구 밀어붙이고 반대자를 각각 불러 훈시 또는 책망한다(교회 건축, 사택수리, 기타 사생활적 부분들 등).

15.훌륭한 리더십은 끝 없는 사랑으로 섬김의 실천을 삶의 철학으로 삼고 겸손히 행동하는 능력자이다

(제자의 도 실천자 마20: 28.행12:9) - 사실적인 사랑 섬김 없이는 결과적으로 교회는 갈등과 암투와 분열이 생기며 소란하게 되고 무능한 목사로, 무례한 목사로, 권력주의 목사로 삯군 먹사로, 깡패 목사로, 독재 목사로 한 가지 이상 오명을 쓰고 쫓겨나게 되거나 아니면 분열하여 몇 마리 양만 몰고 배고픈 목회로 시름하다가 명예롭지 못한 ‘됫박’ 목회로 종지부를 찍는다. 그리고 교회가 얼마든지 성장·발전 할 수 있는 여건에서도 말 안 듣는 자, 미운 자를 면전복배하고 뒤에서 헐뜯는 자 등을 잘라버리거나 좇아 내어버리거나 스스로 떠나게 만들고 자기를 좋아하고 따르는 자들만 데리고 목회를 하다보니 ‘섬(石)’ 목회를 하지 못하고 ‘말(斗)’목회로 안주하고 목회를 끝낸다. 또한 카리스마 인본주의 목사는 교회를 육성·발전시켜 큰 군함목회를 하나 은퇴 후에는 면전복배하던 장로들의 반발로 갈등, 멸시, 분열하여 교회는 소란하게 되고 목사는 존경받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고 후임 목사가 정착하기가 심히 힘들게 되기도 한다.

 

상기 15가지를 우리 교회 목사님과 비교하여 살펴보자. 지해로운 자는 원망 불평 않고 취사선택 할 것이다. 미련한자는 그래도 원망 불평만 할 것이다. 여러 내용 중 눈에 띄는 것은 신앙적 위계(僞計)에서 비롯되는 우월적 지위를 이용해 성도들의 이성과 의지를 무력화시키고 온갖 죄들을 저지른다는 내용이다. 발취 끝.

 

세상 모든 인간은 목회자도 예외 없이 누구나 수많은 경험과 시행착오에 의하여 완성도가 높아지는 그저 인간인 것이지, 공부나 학습이나 설교로 성숙 되어지는 것만은 아닙니다. 이는 인간의 겸손과는 무관하게 조직이든 인간이든 믿음으로 발현된 헌신 희생 섬김으로 그러한 과정에 의해서 성숙된다는 것입니다. 믿는자가 천국가기 전 까지 이 땅에서의 성화와 중생된 노력이 하루 하루 성숙 되어저 가는 생활은 보고 배워야 하므로 목사님의 섬김의 리더법에 달려 있습니다. 앞서가는 리더자의 희생적 본 꼬랑내나는 남의 발을 매일같이 씻어주고 다니는 사랑과 섬김의 본 그런 종류의 존경스런 본... 걷보기에는 보잘 것 없어보이나 하는짓을 그의 향기를 보면 존경이 절로 되게 더 더 더 낮아저 종놈 마당쇠 처럼 누추하게 서로가 서로를 사랑으로 섬기는 수 많은 상대들을 무시하지 말고 그 어떠한 상황에서도 소통을 포기하지 않는 환경을 리더 자들이 앞장서 실천의 희생의 본을 보여주세요. 그러면 존경스러우니 목사님을 가벼이 여기지 않을 것이며 그 영적권위 영적으로만 따르고 따르지요. 육적인 인간적인 위계질서 무너뜨리세요, 그 육적권위에서 썩은 부폐가 나오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눈물나게 존경스러운데 따르며 협력하지 않을 자가 누가 있겠습니까. 그 리더에 기꺼이 따라 배우고 행하겠으며, 엄청나게 신뢰감을 가질 수 있어 진짜로 우러러 존경하며 따르게 될 것입니다. 가장 주님 주신 확실한 리더법은 영적권위라 핑계삼은 독단적인 계급적인 인위적 권위는 멀리 하고 십자가 정신으로 한결 같이 무장하여 희생 헌신으로 섬기면 (“섬긴다는 것은 상대를 받들어 모셔 무엇이든 거들어 도와 주는 것입니다”) 누가 말하지 않아도 자연스레 묻어나는 자연스레 우러나는 존경 받음으로 리더를 하면 다인 것입니다. 그러면 아마도 목숨을 버려서라도 목사님의 (육적 권력 말고) 영적권위에 순종 할 것입니다.

 

사람들 앞에 영적권위를 빙자하여 육적 권력을 세우려함은 인간적인 그 속이야 정말 뻔 한 것 아니겠습니까? 여기 대한민국의 지구상의 교회는 천상의 교회가 아니다 보니 인간은 누구나 현실의 영향 하에서 살아갑니다. 그러다보니 하나님 말씀을 현실 세계에 인용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 말씀의 본질적 순수성을 잃어서는 아니됩니다. 아닌틱히 하면서 우리는 하나님 말씀을 교묘히 조작 인용하여 목사 장로 자신들의 응큼한 인본주의 권위주의를 보호키 위해 어영구영 하는 것이 너무도 노골적입니다. 어쩌면 목사 장로도 예외 없이 아닌척 할 뿐이지 인본주의에서 완전히 벋어나기는 어렵습니다. 교회운영의 모든 것에 하나님 말씀을 들이대지만 실상은 세상에서 일반 인간이 효용하는 모든 것들 또한 말씀과 조합 인용하여 애용하는 것은 현실을 살아가는 인간이므로 어쩔 도리가 없을 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수 순결성은 지켜나가야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오직 세상을 향해 사단을 향해 인본주의와는 전혀다른 그 진짜 영적파워 영적권위를 세우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힘겹게 그 길 가다가 기진하여 지처 쓰러저 목사님 자기 스스로 자원하여 짋어진 그 자기 십자가에 깔려 죽어 주신다면 그렇게 리더해 주신다면 우리도 진정심으로 존경하며 덩달아 적극적으로 따르겠습니다. 그런 존경으로 인한 리더가 되어주세요. 정말 예수 믿는 집사인 저는 부끄럽고 쪽팔려 죽겠습니다. 교회가 세상을 걱정해야 하는데 오히려 세상이 교회를 걱정하는 판국이니 말입니다. 엉뚱한 구약의 율법을 끌어다 권위적 리더법 말고는 정말 고상한 리더법은 없는 걸까요? 신약성경 앞에 놓고 연구 하시면 아마도 하루 이틀이면 만들어 질 제도인데, 왜 그리도 권위주의, 관료주의 (보수주의, 비밀주의, 획일주의, 형식주의)에 쩔어서 하나님 말씀으로 목사의 인본주의를 포장하여 더러운 리더법을 버리지 못하나요? 그러나 목사님들은 오히려 저한테 한심한 놈이라 뭔 저따위 집사가 다있어 하며 요지부동이시면 더 이상 아니됩니다.

 

또 이핑개 저핑개로 어영구영 구약을 들먹이며 하는 것은 치유하기엔 병이 너무 깊은 탓인가요 알고는 있지만 자칫 잘못했다간 다른 목사들에게 왕따당하고 매장당할까바 그러는가요? 민주적인 방법을 소통의 방법을 적용하여 리더하면 진짜 비 성경적인 것인가요? 성도들과 사랑으로 진심으로 동등히 손을 맞잡고 진심으로 동역하겠다는 자세로 깍듯이 존대말 써가며 상호존중으로 소통하면 큰일나는 가요? 영적권위를 빙자한 인본적 독제권력적 리더법이 비 성경적인줄은 잘 알지만, 이미 권력을 움켜쥔 짭짤한 기득권자가 된 탓인가요? (디도서 1:16 =그들이 하나님을 시인 하나 행위로는 부인 하니 가증한 자요 복종 하지 아니하는 자요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니라) 인간적으로 우쭐댐을 즐기는 자(요삼 1:9~12 ~ 군중 앞에 으뜸 되기를 즐기는 자...) 교회 안에 자신의 인본을 변론키 위해 권위주의가 창궐하면 교회는 21세기 뭇 사람들에게서 거절당할 수 밖에 없는 환경임을 직시해야지요. 자기성찰, 진솔한, 정직한 내부비판 - 자신의 모습을 거울에 비추어 보세요. 틀림 없이 우리는 목사님들의 비참하게 업어저 남을 섬기는 받들어 거들어 주는 그 진짜 사랑 섬김 없이 처신하는 아닌척 하면서도 한술 더뜨는 인본주의 권위주의 권력주의적 리더쉽 때문에 주님의 몸된 교회가 망해가는 것이지, 사탄을 세상을 탓하기 전에 목사님 자신을 탓해 보고 진짜 신약성경에서 허용하는 그리고 세상 사람들이 모두가 절로 존중 존경 해 줄만한 멋진 리더쉽으로 돌아가 보시게요. 진정심으로 존경받는 리더가 되어보세요. 죄 송 하오나 부탁드리옵니다. 제~ 에~ 바~ 알~ 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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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고물장수 | 작성시간 13.03.02 필요에 의해 생겨난 제도나 직책들 의식들이 사람을 섬기지 못하고 지배하게 되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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