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계장터
- 신경림 -
하늘은 날더러 구름이 되라 하고
땅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네.
청룡 흑룡 흩어져 비개인 나루
잡초나 일깨우는 잔바람이 되라네
뱃길이라 서울 사흘 목계 나루에
아흐레 나흘 찾아 박가분 파는
가을볕도 서러운 방물장수 되라네
산은 날더러 들꽂이 되라 하고
강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산서리 맵차거든 풀속에 얼굴 묻고
물여울 모질거든 바위 뒤에 붙으라네.
민물 새우 끓어 넘는 토방 툇마루
석삼년에 한 이레쯤 천치로 변해
짐 부리고 앉아 쉬는 떠돌이가 되라네.
하늘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고
산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농무 / 1973>
<내가 처음 목계 구경을 한 것은 소학교 3학년 때였다. 그 속으로 소풍을 간 것이다.
열 살밖에 안된 아이들한테 20리 길은 짧은 길이 아니어서 목계에 이를 즈음
우리는 거의 기진맥진이되어 있었지만 목계를 보는 순간 피로는 씻은 듯 사라지는 것 같았다.
새파란 강물, 강가의 하얀 모래 밭, 모래밭 뒤의 수백 그루로 보이는 곧고 큰 소나무들,
강위에 떠있는 수 없이 많은 나룻배와 고깃배들.
정작 트럭도 함께 타는 배를 타고 강을 건너 목계에 이르렀을 때
내 감동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길을 향해 양옆으로 나란히 서 있는 가겟방들, 언덕에 멀찍이 물러앉은 도가집들,
밭머리에 아무렇게나 버려진 조각배,
집집이 벽이나 담에 걸 린 그물이며 촉고 따위 고기잡이 연장들,
여기저기서 들리는 귀에 선 노래들‥‥‥
그 뒤로 나는 여러번 목계를 가게 되었는데,
그 때마다 나는 새로운 감동에 휩싸이곤 했다.>
-목계나루터ㅡ
신라와 고구려를 지난 남한강 물줄기는 장미산성을 크게 휘돌아 흐르며 목계나루로 이어진다. 목계나루는 강물이 말라붙은 갈수기에도 언제나 배가 드나들 수 있는 남한강 수운의 가항종점(可航終点)이었다. 조선 시대에 재정 확보를 위해 거둔 쌀과 베 따위를 보관하는 창고인 가흥창(可興倉)도 이 곳에 있었다.
일제 시대까지만 해도 목계나루엔 인천항에서 소금, 건어물, 젖갈류, 생활 필수품 등을 싣고 온 황포돛배가 수십 척씩 붐볐다. 이런 물건들은 내륙 지방인 충청도와 강원도, 그리고 백두대간 너머 경상도의 문경과 상주 각지로 팔려 나갔다. 당시 뱃일하는 인부만도 500여 명이나 되었다 하니, 나루와 이어진 목계장터는 언제나 시끌벅적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젠 모두 옛 일에 불과하다. 위용을 자랑하던 조창은 모두 허물어졌고, 주변엔 주춧돌 몇 개와 깨진 기왓장만이 뒹굴고 있을 뿐이다. 강나루의 흔적마저도 모래를 퍼내고 강 언덕에 축대를 쌓으면서 형편없이 변했다. 또 늘상 인파로 북적거렸을 목계장터는 지금은 골동품 가게와 수석 가게들만이 을씨년스러운 풍경화를 연출할 뿐이다.
목계나루에서 20리쯤 떨어진 노은면 연하리에 태를 묻은 신경림 시인에게 목계나루는 소중한 추억의 장소다. 시인은 광복 이듬해인 초등학교 4학년 때 목계나루 솔밭으로 소풍을 갔다가 목계장터를 보곤 강렬한 인상을 받게 된다. 당시까지만 해도 목계나루는 제법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는 시인의 기억 속에 오랫동안 이어지다가 마침내 ‘목계장터’라는 명시로 열매를 맺는다.
신경림 申庚林 (1936. 4. 6 - )
1936년 4월 6일 충청북도 중원에서 태어났다. 1960년 동국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하였다.
목계(牧溪)는 충주에서 원주로 통하는 길목의 작은 마을이다.
거리는 충주 중심가에서 불과 십 리 남짓 정도의 가까운 거리.
행정구역으로는 충주시 엄정면 목계리.
면에서는 가장 번성한 곳이지만 면사무소를 이웃마을로
빼앗기고 보니 면소재지로 부르기도 그렇다.
충주댐 하류의 남한강이 고즈넉이 흐르는 강마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