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는 예수
이사야 53:2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본문은 예수님의 실상을 표현하는 모습입니다. 그 예수님의 모습이 인간이 흠모하기에 아름다울 것이 없는 분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기독인들은 그 예수님을 어떻게 보고 있습니까?
바로 하나님으로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분명하게 그 예수님이 흠모할만한 아름다움이 없다고 하는데 교인들은 그 예수님을 흠모하고 있다면 둘 중에 하나는 잘못되었다는 것인데 설마 성경이 잘못되었을 터는 없을 것이겠지요. 그렇다면 사람들의 예수님을 보는 관점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왜 연한 순같이 약한 예수님을 강하게 보고 우리를 구원한 구세주로 여기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왜 그 예수님을 이용해서 나의 소원과 만족을 달성시켜 주는 예수님으로 알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에덴 동산에서 하와가 선악과를 보고 보암직 먹음직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게 보는 마음의 눈이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어서 천국 가고 싶고 영생 얻고 싶어하며 이 세상에서 잘되는 것까지 포함하여서 나의 욕심을 이룰려고 예수를 믿는 것이 바로 하와가 본 선악과가 보암직 먹음직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움 바로 그것이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모든 기독교인들이 이런 예수를 믿고 있습니다. 이런 예수를 믿게 되는 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고 한 선악과를 손을 내밀어서 따먹는 인간의 행위라는 것입니다. 이런 욕심으로 천국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욕심은 에덴(기쁨의 동산, 천국)에서 쫓겨나야 할 욕심이라는 것입니다. 에덴에서 쫓겨났기에 이런 삶을 지금도 살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금령이 지켜지는 정상적인 상태라면 금단의 열매(선악과)는 보기에 아름답고 먹음직스럽게 지혜롭게 보이면 안되는 것입니다. 즉 그 예수(선악과, 말씀)는 인간의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은 기적표적을 행하는 예수를 보고 그 예수가 자신들의 임금님이 돼서 주님의 나라가 임할 때에 자기네들을 높은 자리에 앉혀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높은 권자를 원하는 마음을 갖고 있었습니다.
제자들 자신들의 눈높이에서 예수님이 그렇게 보였다는 것이지요. 바로 흠모할만한 아름다움으로 자신의 스승 예수를 보았다는 것입니다. 즉, 성경에서 말하는 참뜻과 배치되는 신앙생활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축복을 받고 이 세상에서와 내에서의 축복을 두루두루 누리는 그런 인간의 욕심이 가미된 것이 오늘날의 기독인들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러한 행태의 신앙생활을 정상적이라고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바울처럼 예수님처럼 그렇게 살 수 없을까 라는 마음으로 신앙의 선진들이 살다간 그런 사람을 동경하고 흠모하며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런데 그런 선진들의 신앙생활은 여러분들이 흠모할만큼 그 선진들의 삶이 호락호락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를 질 수 있는가요? 바울이 40에 하나 감한 매를 맞고 싶으신가요? 솔직히 마음 속으로 고민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런 신앙의 선배들이 살고 간 삶을 여러분은 살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들처럼 살고 싶다고 한다면 서로 모순되는 견해를 공유하게 되는 격입니다.
신앙생활은 내가 살고 싶다고 해서 살아지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이 가입되지 않으면 인간은 율법의 일점일획도 달성할 수가 없는 존재들입니다. 바울처럼 예수처럼 살고 싶다고 해서 살 수 없을뿐더러 구원에도 이를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하나님의 법은 인간에게 지킬 수 있는 것으로 주신 것이 아닙니다. 그 율법의 목적은 율법을 지킬 수 없는 것으로 주셨을 뿐이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지킬 수 없는 것으로 먼저 율법을 주셨을까요? 목적은 지킬 수 없다를 일차적으로 알게 하심이라는 것입니다.
로마서 3: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율법 아래 사는 모든 인간들은 그 율법(성경)을 지킴으로 구원얻을 사람이 아무도 없음을 성경은 이미 선언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6:15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하늘 아래 모든 사람들은 그 법을 지킴으로 구원얻는다고 한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법 아래에서 벗어나는 방법이 은혜인데 구체적으로 이 은혜는 어떻게 우리에게 주어질까요? 은혜를 받기 위해서는 어떤 곳으로 나아가야 함을 말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히브리서 4:16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는 말이 있지요.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는데 그 통로가 바로 보좌라는 사실입니다. 임금되신 하나님께서 보좌에 앉으셔서 말씀을 하시는데 그 보좌가 바로 예수라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시편 47:8
“하나님이 열방을 치리하시며 하나님이 그 거룩한 보좌에 앉으셨도다“
마태복음 5:3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찌니 하늘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성경은 그 하늘이 하나님의 보좌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하늘이 누구일까요? 바로 예수님이 하늘입니다.
요한계시록 18:20
“하늘과 성도들과 사도들과 선지자들아 그를 인하여 즐거워하라 하나님이 너희를 신원하시는 심판을 그에게 하셨음이라 하더라“
성도들을 하늘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율법 아래 있는 모든 자는 그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받을 존재가 없기에 구원받을 대체 수단으로 은혜를 받아야 하는데 그 은혜받을 통로가 은혜가 주어지는 통로인 보좌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 보좌로 나아간다는 것은 성도된 예수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말인 것입니다. 예수가 바로 구원자이며 기름부음받은 자, 하나님의 보내진 자(천사)인 것입니다.
예수는 이천년 전 그 예수님만을 한정하여 예수라고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라는 이름은 직분의 이름입니다. 구원자라는 직분의 이름이 예수지 이천년 그 예수님에게만 붙여주는 이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성도가 예수가 돼야 구원받은 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유는 기름부음(성령받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성령을 받지 못하고 예수가 될 수 있겠습니까? 지극히 당연한 사실입니다. 예수+그리스도는 짝이기 때문입니다. 서로 단독으로만 성립될 수 없는 이름이 예수인 것입니다. 성경은 이 시대에도 천사를 보낸다고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13:41
“인자가 그 천사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그 나라에서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내어“
이렇게 보내지는 천사가 또한 예수이며, 하나님의 보내진 자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보내지는 예수는 연약하여 인간이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움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이천년 전의 그 예수님도 그러하였고 지금 이 시대에 보내지는 천사도 역시 그러합니다. 복음은 세상에 보기에 미련하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미련하게 보이는 것이 참이라는 역설적인 사실입니다. 가짜 속에 진짜가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가짜라는 탈을 쓰고 역사하기에 세상에 볼 때에는 미련해서 믿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보화(그리스도, 하나님의 생명)는 밭에 감추어서 보이지를 않습니다. 덮여 있기 때문입니다. 덮여 있는 껍데기는 미련하고 연약하게 보이는 것이 정상입니다. 이렇게 미련하고 연약한 가운데 역사하는 보화의 힘은 강합니다. 여러분은 어떤 예수를 믿고 있습니까? 능력있는 예수, 나의 능력이 되신 그 예수를 믿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지만 그런 예수는 먹음직 보암직 지혜롭게 할 탐심으로 보는 예수, 나의 구원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예수일 뿐입니다.
출처; 네이버카페 생명의 만나 남용모 목사
유튜브 남용모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