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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랑채 게시판

■대한민국은 남녀 평등의 나라였다.

작성자나린푸실(排假擁眞)|작성시간21.05.25|조회수424 목록 댓글 0

■서구 기독교 세계와 달리 우리 나라는 여자가 우월한적도 있었지만, 남자와 평등했다.

1. 한국은 곰토템의 모계우월사상이 내려오던 여남평등사회였다. 5백년전만 하더라도, 한국은 여와 남이 동등했다. 고려시대 그리고 그 이전은 말할것 없었고 조선 전기 까지는 유지되어 왔다.  (이집트 파라오도 그러했다)  이러한 우리의 사상을 조선후기 주자학의 맹점을 깨달은 수운 최제우는 조선전통의 민본(民本)및 여남평등의 시천주(侍天主)사상으로 귀결 시켰고,  이를 바탕으로  '사람이 곧 하늘' 이라는 손병희는 천도교의 인내천(人乃天) 사상을 정립했다.

2. 그러던 것이 선조때 임진왜란 이후,  거칠어질때로 거칠어진 산하가 망가져 빈곤해진 가운데, 그런 사회상에 노론 집권으로 그런 사회분위기를 성리학으로 잡겠다고, 조선주자학을 들먹이며  남녀차별이 시작되었다. 가난한 양반 규수는 출가외인이 되어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

3. 이전에는 자식들에게 고루 상속이 되었다, 다만 제사를 모시는 자식에게 제사비용 댓가로 조금 더 주었다. 단군신화와 같이 모계사회로 시작된 한국의 풍속은 여와 남의 가문의 지위는 동등했었다.

4. 신라여왕도 있지만, 조선의 신사임당은, 20년을 처가에 있었고 남편 유씨는 아내를 보러 강릉처가로 내려 가야만 했다. 장가를 갔다는 말이다. 셋째아들 율곡 이이는 진외가 댁에서 길러졌다. 고려시대는 조선시대보다 '우먼 파워'가 강했다. 결혼한 남성은 아이들이 클 때까지 처가에서 사는 게 관례였다. 여성이 호주(戶主)가 되는 경우도 드물지 않았다.

5. 양반 사대부는 내외가 엄격하여 남자는 바깥 사랑채에서 하루를 보내는 한편, 여자는 안주인이 되어 안채의 식솔 모두를 거느리고 경제권을 지녔고, 남편과 함께 품계를 누렸다.

1품 : 정경부인
2품 : 정부인
3품 : 숙부인 ( 당상관 정3품 )
3품 : 숙인( 당하관 정3품, 종3품 )
4품 : 여인
5품 : 공인
6품 : 의인
7품 : 안인
8품 : 단인
9품 : 유인

■경제권이 곧, 인권을 말해준다

6. 노론집권 이후로 여성은 제사에서도 빠지게 되었으며, 나라마저 일제에 넘겨주었으나 세계에서 가장 여성차별이 유난히 심한 일제의 침략으로 조선의 여성의 지위는 나락으로 떨어졌다.(위안부 공출)

7. 거기에다, 서구종교 기독교가 이 땅에 들어와 구약의 창세기 신화의 이브가 아담에게 귀속되고, 신약의 죄없이 태어난 구세주를 생산한 성모마리아의 등장으로 이전에, 지금의, 그리고 앞으로 태어날 모든 여성들까지 더러운 원죄가 있는 생산물의 근원으로 못박았다. (그래서 마녀사냥이 생겨났고  더러운 마녀라는 여성을 불에 태워 죽이는 화형을 고집했던 것이다)

8. 그런 작업을 마친 어거스틴 (Augustinus)법이 한반도에 행해지기 시작해 .. 그 기독교 전통과 결합되어 아들선호사상이 굳건히 행해지는 전통에 반발하여야만 하는 .. 이젠 한국이 세계 Top을 자랑하는 페미니스트 공화국이 되었다.

9. 이렇게 된것은, 조선후기 피폐한 사회분위속에서 나온 성리학(性理學 : 예禮와 보譜)의 변절과 일제침략으로 인한 여성비하의 게다짝사상, 그리고 서구를 지배하고 있었던 어거스틴의 기독교사상이 혼합되어 여성차별사상이 이 땅에 또아리를 틀었기 때문이다.

https://m.blog.daum.net/james_kang_2019/281?category=19994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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