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철호
출 생 : 1961년 3월 3일 / 오산
전 적 : 24전 19승 2무 3패 (9KO)
스타일 : 라이트 파이터
타이틀 : KBC JR밴텀급(80년) / WBC S플라이급 (81년)
주요경기 :
배재규 4R판정 1978. 10/7 서울 (데뷔)
라파엘 오로노(베네수엘라) 9RKO(1/22) 1981. 1/24 상크리스토발 (WBC S플라이급)
와다나베 지로(일본) 15R판정 4/22 서울 (1방)
윌리 젠센(미국) 13RKO(1/20) 7/29 부산 (2방)
자칼 마루야마(일본) 9RTKO(1/12) 11/18 부산 (3방)
이시이 고키(일본) 8RKO(0/47) 1982. 2/10 대구 (4방)
라울 발데스(멕시코) 15R무승부 7/4 대전 (5방)
라파엘 오로노(베네수엘라) 6RKO패(0/38) 11/28 서울 (6방)
불꽃투혼의 사나이
김철호
1981년 1월 25일 베네수엘라의 상크리스토발에서 펼쳐진 WBC 수퍼플라이급 타이틀매치에서 거의 무명에 가깝던 김철호가 홈링의 라파엘 오로노를 KO로 무너뜨리며 세계챔피언에 올랐다는 소식이 외신을 타고 타전되자 신문사와 방송사는 그 외신이 맞는것인지에 대해 거듭 확인해야 했다. 그의 승리를 점친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승리가 운이었던 실력이었던 그는 챔피언에 올랐고 차츰 강한 챔피언으로 탈바꿈을 해가며 그가 챔피언에 오른 것이 우연이 아님을 입증시켜 나갔다. 엄청난 스테미너로 끝없이 솟아오르는 파워를 장전한 김철호의 복싱 스토리를 다시 살펴보기로 하자.
귀를 의심케 한 승전보
김철호의 출국, 그의 승리를 믿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방송국에서 조차 승산이 희박한 이 경기를 중계하지 않았다. 정초부터 한국선수가 지는 기분나쁜 장면을 굳이 보여줄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만큼 분위기는 냉랭했다.
그런 김철호가 명챔피언 라파엘 오로노를 9회 KO로 물리치고 세계챔피언에 올랐다는 외신이 들어오자 방송국은 난리법석이었다. 급하게 필름을 구해 녹화중계를 시도했다.
당시 라파엘 오로노는 췌장염 수술을 한지 얼마되지 않았다고 했다. 그 수술 부위를 맞고 나가떨어진 것이란 후일담이 들려오기도 했다
오로노는 이승훈과 타이틀 결정전을 치뤄 초대챔피언에 올랐다. 그 당시야 확실한 우세를 잡지 못했지만 홈링에서 그 정도 싸웠으니 챔피언에 오른건 어찌 보면 당연할 수도 있었다. '작은 알리'로 불리던 오로노는 이후 차츰 강해지며 3차례의 타이틀 방어에 성공하고 4차방어에서 김철호를 파트너로 맞이한 것이었다.
그 전해 한국은 세계챔피언들이 줄줄이 타이틀 벨트를 풀었다. 김성준을 시작으로 김상현, 박찬희에 김태식까지...한국은 세계타이틀 무관의 변방국으로 전락했지만 김철호가 나락에 빠진 한국 프로복싱을 구해낸 것이다. 당시 김철호의 나이 19세, 한국의 프로복싱사에 최연소 세계챔피언 등극이었다.
그는 일약 영웅이 되었다.
복싱 입문
김철호는 경기도 화성군 조산면에서 탄광업을 하는 아버지의 4형제중 세째로 태어났다. 당시 탄광업은 잘 되었고 어린 시절 김철호는 별 어려움 없이 자랄 수 있었다. 그러나 수시로 일어나던 탄광사고는 김철호의 화목하고 부유했던 집안을 덮쳤고 가계는 일순간에 기울어지고 말았다. 서울행.
아버지는 상도동에 작은 공장을 하나 차렸고 그 공장은 전과 같은 부유함은 아니었지만 어렵지 않은 어린 시절을 보내게 해주었다. 태권도를 배웠던 김철호가 영등포중 3학년 시절에 늘 지나다니던 노량진에 있던 동아체육관에 입문한다. 그는 그곳에서 김진길트레이너를 만난다. 잠시 인연을 맺었지만 부모들의 반대로 그는 잠시 발뛰기를 하다가 말았다.
그러나 고등학교 진학을 앞둔 그에게 청천벽력의 일이 닥친다. 아버지가 운영하던 공장에 화재가 발생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다시 체육관을 찾아야 했다. 이번엔 집에서 가까운 곳을 찾다보니 그곳이 대원체육관이었고 동아체육관에서 잠시 인연을 맺었던 김진길트레이너가 독립해 세운 체육관이었다.
김진길관장은 자신이 대원체육관을 운영하며 세명의 세계챔피언을 길러내는데 그 시작이 김철호였고 그 다음이 류명우 그리고 현역의 지인진이다. 이들의 공통점 하나가 바로 끈기와 스테미너를 바탕으로 전 라운드를 풀로 가동해도 후반라운드가 두렵지 않은 선수들이었다는 점이었다.
신인왕으로 출발
입문한지 1년만에 신인왕전에 모습을 드러낸다.
그때 대원체육관에서는 김철호 보다는 양일이라는 물건이 있었다. 양일은 예선전을 치르며 당장 메인이벤트로 뛰어도 될만한 자질을 가진 선수로 방송이며 신문에 도배를 하다시피했다. 그러다 보니 상대적으로 김철호에겐 시선이 돌아갈리 없었다. 그리고 당시의 김철호는 아직 별 뚜렷한 이미지를 남기고 자시고 할만한 뭔가가 보이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었다.
1978년 10월 프로데뷔전을 치른 김철호는 그해 신인왕전에 출전 첫상대로 배석철을 만나는데 둘 다 나중에 한국의 유명한 복서가 되리라고는 보이지 않았다. 결승까지 진출했고 결국 우승, 주니어밴텀급 신인왕이 되지만 김철호에게 달라지는건 아무것도 없었다. 온통 시선은 최우수신인왕 양일에게 쏠려 있었다.
양일과 김철호, 이 둘은 어린이들의 동화 '토끼와 거북이'라는 내용의 토끼와 거북이 같았다. 뛰어난 재능을 가진 양일은 훈련이 부실했고 재능은 그다지 눈에 띄지 않았으나 김철호는 거북이처럼 언제나 노력형이었다. 당장엔 눈에 띄진 않았지만 둘의 차이는 점점 좁혀져 갔다. 복싱 뿐 아니라 모든 면에서 노력없는 재능 보다는 재능 없는 노력이 나중에 훨씬 좋은 결과를 가져다 준다는 것을 이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10연승을 달리던 김철호는 79년 김영환에게 판정패 첫 검은 별을 달게 된다.
느닷없이 찾아온 행운
김영환에게 패배를 맛본 후 연이어 1980년 하경주와 무승부를 기록하며 한계를 드러내는 것이 아닌가 했으나 첫 국제전인 넬리 엔리케스를 6회 KO로 잡아내면서 부활했고 최일성이 가진 한국 수퍼플라이급타이틀을 뺐는데 성공한다.
1차방어를 치른 김철호는 베를린 올리베티라는 선수를 잡고 1980년 겨울을 맞는다. 그때 그에게 세계타이틀 출전 제의가 들어온다.
김철호는 프로모터권이 극동프로모션에 있었다. 이승훈과 결정전에서 이기고 챔피언에 오른 라파엘 오로노의 도전자로 나서라는 것이었다. 겨우 16전을 치른 한국챔피언에게 느닷없는 세계타이틀 도전은 의외였지만 극동측에서도 뽑을만한 카드가 없었다.
이승훈은 이미 수퍼플라이급 한계체중을 맞추는데 어려움이 많았고 김성준은 오구마 쇼지에게 도전해 실패하며 많이 위축된 상황이었다. 그리고 수퍼플라이급으로 월장도 탐탁치 않았다.
그래서 도전권은 김철호에게로 넘어간 것이었다. 그러나 역사는 이뤄졌고 김철호는 세계챔피언에 오른다.
타이틀 획득 후 3개월 김철호는 후일 일본의 대표적인 세계챔피언에 오르는 와다나베 지로를 1차방어전의 도전자로 맞이한다. 힘든 전투를 벌였지만 15라운드를 충분히 버텨낼 수 있는 힘이 있었던 김철호의 판정승이었다. 한국, 일본의 부심 뿐 아니라 레퍼리까지 모두 1점차의 판정을 내렸다. 큰 산 하나를 넘은 것이었다.
강한 챔피언으로 탈바꿈
첫 방어전을 힘들게 넘긴 김철호에게는 또 한번의 고비가 찾아온다. 지명방어전이었다. 미국의 윌리 젠센이 상대였다.
전미 플라이급챔피언이었던 윌리 젠센은 라파엘 오로노에게 도전했다가 무승부로 뜻을 이루지 못한 실력파였다. 전적도 22승 1패 2무였다. 도전자의 테크닉은 화려했지만 역시 김철호에겐 힘이 넘쳤다.
3심 모두에게 일방적 스코어를 채점받은 가운데 13회 TKO승, 지명방어전의 고비를 넘긴다. 오로노에게 이긴 것도 운이 아니라 실력이었다는 쪽으로 분위기는 몰려 갔다.
자칼 마루야마와 이시이 고키를 KO로 연파하며 4차례 방어를 마친 김철호에게 적신호가 울린 것은 5차방어.
두 심판은 145-145로 무승부를 채점했고 한국측 부심은 148-146으로 김철호의 우세를 채점해 무승부로 판정이 난다. 그런데 김철호진영에선 체중을 지키기 어렵다는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 것이 한창 자랄 나이인 19세에 챔피언이 되었으니 그 이후로도 더 자랐을 것이 아닌가...게다가 극동측에선 김철호의 트레이너를 매번 교체하는데 이것도 한창 감수성이 예민한 챔피언에겐 독이었다.
챔피언에 오를 땐 김진길씨가 챔피언이 되고 나서는 서강일, 홍수환, 진충수, 김준호...매번 달라지는 트레이너. 그에 따라 지도방법도 매번 달라졌을 것이고 김철호는 갈지자 행보를 할 수 밖에 없었다.
오로노와의 재전...패장으로
1982년 11월 28일 서울 장충체육관 6차방어에 나선 김철호의 도전자는 라파엘 오로노였다.
박찬희의 타이틀 방어 횟수와 동률이었던 김철호는 이 경기를 승리로 이끌면 그는 한국의 최장수챔피언이 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영광스러움도 얻게 되는 경기였지만 이미 검은 구름은 김철호진영을 감싸고 있었다.
체중조절도 힘에 겨웠고 매번 바뀌는 트레이너로 인해 챔피언은 밝은 얼굴이 아니었다. 경기가 시작되자 이런 우려들이 현실로 나타나기 시작한다. 5회 오로노의 라이트를 안면에 허용한 김철호는 등을 돌렸고 레퍼리는 카운트...이미 해는 기운 것으로 보였다.
다시 파이트..그러나 샌드백처럼 오로노의 공격을 일방적으로 허용한 김철호는 다시 다운...5회는 억지로 넘겼으나 6회에 접어들자 오로노의 융단폭격이 감행되고 6회가 시작된지 38초만에 챔피언은 무너지고 만다.
그렇게 타이틀을 풀고 하야한 김철호는 1년 가까운 공백을 갖고 링에 돌아왔지만 나중에 전주도와 이승훈의 IBF 타이틀에 도전해 실패하는 프라유라삭 무앙수린에게 판정으로 패하며 링 생활을 마감한다.
복서로서의 특별한 장기는 없는 선수였지만 끝없는 스테미너로 링을 장악하는 힘이 돋보였던 그는 챔피언에 오를때는 운이 많이 작용한 것으로 평가 받았으나 챔피언에 오른 후 더욱 강해진 모습으로 팬들의 사랑을 받았었다.
토탈 24전 19승(9KO) 3패 2무의 전적을 남긴 김철호는 이후 88프로모션에서 문성길, 김용강등을 길러냈으나 여러가지 일로 한국을 떠나 있어야 했지만 목회일을 하는 아내를 맞아 최근 돌아와 가끔씩 복싱인들의 모임에 얼굴을 드러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