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상 13장: 기쁨과 두려움 사이 – 하나님의 임재를 올바로 모시는 법
역대상 13장은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으로 확고히 자리 잡은 후, 가장 먼저 추진한 중요한 종교적 개혁——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오는 일——을 기록합니다. 역대기 저자는 이 사건을 통해 “다윗 왕국의 진정한 성공은 군사적 승리나 정치적 안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를 백성의 삶의 중심에 모시는 데 있다”는 신학적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역대상 11-12장에서 다윗은 온 이스라엘의 왕으로 추대되었고, 그의 용사들과 함께 예루살렘을 수도로 정했습니다. 이제 그는 정치적 안정을 넘어, 종교적 중심——즉,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언약궤——을 예루살렘으로 가져오고자 합니다. 그러나 이 과정은 예상치 못한 비극(웃사의 죽음)으로 중단됩니다.
이 장은 사무엘하 6:1-11과 병행됩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역대기 저자가 이 사건을 기록할 때, 다윗이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승리한 이야기(대상 14장)와 긴밀하게 연결하여 배치했다는 것입니다. 즉, 역대기 저자는 “하나님의 임재를 올바른 방법으로 모실 때, 승리가 따른다”는 교훈을 전달하려 했습니다.
저작 시기: BC 5세기 초,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한 후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던 시기.
앞뒤 장과의 관계: 12장(다윗에게 모여드는 군대, 이스라엘의 통일) → 13장(언약궤 이동 시도와 실패) → 14장(블레셋과의 전투, 승리). 13장의 실패는 14장에서 다윗이 ‘하나님께 묻는’ 법을 배우는 전환점이 됩니다.
역대상 13장은 세 부분으로 나누어집니다.
1-4절: 다윗의 제안과 백성의 동의 –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기자
다윗이 천부장, 백부장, 모든 지휘관과 의논하고, 이스라엘 온 회중에게 말합니다. “만일 너희가 좋게 여기고 또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로 말미암았으면, 우리가 남아 있는 우리 형제 모든 이스라엘 사람과 또 그들의 성읍에 사는 제사장과 레위인들에게 보내어 그들이 우리에게로 모여오게 하고, 우리 하나님의 궤를 다시 우리에게로 가져오자. 사울 때에는 우리가 궤 앞에서 묻지 아니하였느니라”(1-3절). 온 회중이 “그렇게 하자” 하였으니, 이 일이 모든 백성에게 옳게 보였기 때문입니다(4절).
5-8절: 장엄한 행진 – 기쁨과 찬송 속에 시작된 여정
다윗이 애굽의 시홀에서부터 하맛 어귀까지 온 이스라엘을 불러 모아, 기럇여아림에서 하나님의 궤를 가져오게 합니다(5-6절). 그들은 하나님의 궤를 새 수레에 싣고 아비나답의 집에서 나오는데, 웃사와 아히오가 수레를 몹니다(7절). 다윗과 온 이스라엘이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 앞에서 노래하며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제금과 나팔로 연주하며 기뻐합니다(8절).
9-14절: 비극 – 웃사의 죽음과 법궤의 정체
기돈의 타작 마당에 이르러, 소들이 뛰므로 웃사가 손을 펴서 궤를 붙듭니다(9절). 여호와께서 웃사에게 진노하사 그가 궤에 손을 댔으므로 치시니, 그가 거기에서 하나님 앞에 죽습니다(10절). 그 곳을 ‘베레스 웃사’(웃사에게 진노하심)라 부릅니다(11절). 다윗이 두려워하여 “내가 어떻게 하나님의 궤를 내 곳으로 오게 하리요?” 하고, 그 궤를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으로 옮깁니다(12-13절). 하나님의 궤가 오벧에돔의 집에 석 달 동안 머물렀더니, 여호와께서 오벧에돔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에 복을 내리십니다(14절).
1. “묻지 아니하였느니라”(dāraš, דָּרַשׁ, 3절)
‘드라쉬’(찾다, 구하다, 묻다)는 역대기 신학의 핵심 동사입니다. 본문에서 다윗은 사울 시대의 실패를 “우리가 궤 앞에서 묻지 아니하였다”(3절)고 진단합니다. 흥미롭게도, ‘다윗이 백성과 의논’(1-2절)은 기록되지만, 다윗이 하나님께 ‘묻는’ 장면은 전혀 등장하지 않습니다. 이는 14장에서 다윗이 “내가 블레셋 사람에게로 올라가리이까?”라고 묻는 장면과 대조됩니다. 웃사 사건의 근본 원인은 “하나님께 묻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는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지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잠 3:5)는 원리의 구약적 증거입니다.
2. “새 수레” / “소들이 뛰므로”(7절, 9절)
법궤를 새 수레에 싣고 운반하려 한 것은 블레셋의 방식을 따른 것입니다(삼상 6:7-12). 그러나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방식은 “고핫 자손이 성소의 지극히 거룩한 것을 멜 것은 … 어깨에 메어서 하느니라”(민 4:4-6, 15)였습니다. 수레 운반은 간편한 인간적 방법이었지만,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한 경외를 상실하게 했습니다. ‘소들이 뛰므로’(9절)는 인간의 방식으로 운반할 때 발생하는 불안정성의 상징입니다.
3. “기돈” / “베레스 웃사”(9절, 11절)
‘기돈’(חִידוֹן)은 ‘재앙, 멸망’을 뜻합니다. 역대기 저자가 이 지명을 기록한 것은, 이 사건이 단순한 사고가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함 앞에서 인간의 불순종이 빚어낸 필연적 결과임을 암시합니다. ‘베레스 웃사’(פֶּרֶץ עֻזָּא)는 ‘웃사에게 진노하심’으로, 다윗이 이곳에 이름을 붙인 것은 하나님의 심판을 기억하는 표지였습니다.
4. “오벧에돔” / “복을 내리셨더라”(13-14절)
‘오벧에돔’은 ‘가드 사람’(블레셋 출신의 이방인으로 추정)으로, 그의 집에 법궤가 머물자 하나님이 그에게 복을 내리셨습니다. 이는 법궤(하나님의 임재)가 ‘저주의 도구’가 아니라, 올바르게 대접될 때 ‘복의 근원’ 이 됨을 보여줍니다. 오벧에돔은 법궤를 자신의 집으로 영접한 자로서, 웃사와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1. ‘좋은 일’이라도 ‘하나님의 방법’으로 해야 한다 – 다윗의 언약궤 이동 계획은 그 자체로 경건하고 아름다운 일이었습니다(1-4절). 백성들도 모두 옳게 여겼습니다. 그러나 이 일의 동기는 옳았고, 대중의 지지도 있었음에도, 방법이 잘못되어 실패했습니다. 이는 오늘날 교회에서도 동일합니다. ‘좋은 목적’(부흥, 선교, 구제)도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한 ‘방법’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2. ‘하나님께 묻는 것’은 예배의 첫걸음이다 – 다윗은 백성과 의논했습니다(1절). 그러나 정작 누구와도 의논하지 않은 분이 계셨습니다.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다윗은 14장에서 블레셋과 싸울 때 반드시 하나님께 묻습니다(대상 14:10, 14). 웃사 사건은 그에게 ‘기도의 중요성’을 가르친 고통스러운 스승이었습니다.
3. 웃사의 죽음은 ‘잘못된 열심’의 경고다 – 웃사는 법궤가 떨어질까 봐 ‘좋은 의도’로 손을 뻗쳤습니다(9절). 그러나 그 행동은 하나님의 명령(“누구든지 성물을 만지면 죽으리라”, 민 4:15)을 무시한 것이었습니다. 웃사는 ‘신앙의 열심’만으로는 부족하며, ‘말씀에 순종하는 지식’이 동반되어야 함을 보여줍니다.
4. 하나님의 임재는 ‘복’과 ‘두려움’을 동시에 가져온다 – 본장에서 법궤는 두 가지 반응을 불러일으킵니다. 웃사에게는 심판으로, 오벧에돔에게는 복으로. 이는 하나님이 누구인가에 따라 동일한 임재가 다르게 경험됨을 보여줍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잠 1:7)은 구약의 핵심 가르침입니다. 다윗은 “내가 어떻게 하나님의 궤를 내 곳으로 오게 하리요?”라고 말하며, 그분의 거룩하심 앞에 겸손히 무릎 꿉니다(12절).
5. 오벧에돔의 집 – 하나님의 임재가 머무는 곳에는 ‘복’이 있다 – 법궤가 오벧에돔의 집에 석 달 동안 머물자, 하나님은 그의 집과 모든 소유에 복을 내리셨습니다(14절). 이는 예수님의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 6:33)는 원리의 구약적 예표입니다. 웃사의 비극과 오벧에돔의 복은 동일한 법궤가 사람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를 가져온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언약궤는 블레셋에 빼앗겼다가 돌아온 후, 기럇여아림의 아비나답 집에 안치되었습니다(삼상 7:1). 다윗이 왕이 될 때까지 약 70년 동안 법궤는 그곳에 머물렀습니다. 사울 시대 내내 법궤는 백성의 삶의 중심이 아니었고, 그들은 “궤 앞에서 묻지 아니하였습니다”(3절). 이는 사울 왕국의 영적 침체를 보여주는 명확한 증거입니다. 다윗의 첫 번째 행동이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기려 한 것은, 바로 이 영적 공백을 메우기 위함이었습니다.
다윗이 법궤를 운반할 때 ‘새 수레’를 사용한 것은, 블레셋이 법궤를 돌려보낼 때 사용한 방식을 따른 것입니다(삼상 6:7-12). 블레셋은 이방인으로서 법궤를 다루는 법을 몰랐기에, 자신들의 방식대로 수레를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다윗도 이 ‘이방인의 방식’을 그대로 모방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방식은 명확했습니다. 오직 고핫 자손이 채로 어깨에 메어 운반해야 했습니다(민 4:4-6, 15). 수레는 인간에게 편리했지만, 그 편리함이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훼손했습니다.
‘기돈’이라는 지명 자체가 ‘재앙, 멸망’을 의미합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 타작 마당은 생명을 유지하는 곡식을 얻는 장소였지만, 역대기 저자는 이곳을 ‘재앙’의 장소로 명명함으로써, 이 사건의 신학적 무게를 강조합니다. 웃사의 죽음은 단순한 불행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서 인간의 불순종이 초래한 필연적 결과였습니다.
법궤의 이동 경로는 이스라엘의 영적 상태를 반영합니다. 가나안 정복 후 법궤는 실로에 있었으나(수 18:1), 엘리 시대에 블레셋에 빼앗겼고(삼상 4장), 돌아온 후에는 기럇여아림의 아비나답 집에 머물렀습니다(삼상 7:1). 다윗은 이 법궤를 예루살렘, 즉 수도로 옮기고자 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임재’를 왕국의 중심에 두려는 신학적 결단이었습니다.
‘고핫 자손’의 직분(민 4:4-6, 15)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시기를, 지성소의 기물들(언약궤 포함)은 오직 고핫 자손(레위 지파)만이 운반할 수 있으며, 그들은 성물을 만져서는 안 되고, 먼저 덮개로 싼 후 채로 어깨에 메어 운반해야 했습니다. 만일 누구든지 성물을 만지면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민 4:15). 이는 거룩하신 하나님께 접근하는 일이 결코 인간의 편의대로 될 수 없음을 가르칩니다. 다윗의 ‘새 수레’는 이 규정에 대한 명백한 위반이었습니다.
‘웃사’의 신분 – 아비나답의 아들
웃사는 기럇여아림 아비나답의 아들로(삼상 7:1), 어릴 때부터 법궤 곁에서 자란 사람입니다. 그는 법궤를 가장 가까이서 지켜보았기에, 법궤의 거룩함에 대해 무감각해졌을 가능성이 큽니다. 이는 신앙의 ‘익숙함’이 얼마나 위험한지 보여줍니다. 가장 가까이 있는 자가 오히려 가장 큰 실수를 저지를 수 있습니다.
유대 전통 – ‘웃사의 죽음’에 대한 해석
랍비 문헌(미드라쉬)은 웃사의 죽음에 대해 “그가 왕이었거나, 레위인이 아니었거나, 혹은 정결 의식을 게을리했기 때문”이라는 다양한 해석을 제시합니다. 그러나 요약하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무지’가 그의 죽음의 근본 원인이었습니다. 웃사의 죽음은 단순한 개인의 실패가 아니라, 사울 시대 내내 지속된 ‘하나님께 묻지 않는’ 영적 침체의 결과였습니다.
신약에서의 완성: 예수님과 언약궤
언약궤는 하나님의 임재, 말씀(십계명), 생명(만나), 제사장직(아론의 지팡이)을 상징했습니다.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이 모든 것을 완성하셨습니다. 그분은 ‘임마누엘’(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심)이시며, ‘생명의 떡’이시며, 영원한 대제사장이십니다. 또한 신약 성도는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성전’(고전 3:16)이 되었기에, 우리의 몸은 더 이상 멀리해야 할 ‘거룩한 물건’이 아니라, 성령의 거룩한 처소입니다.
다윗의 ‘새 수레’는 인간의 편리함과 효율성을 추구한 결과였습니다. 2026년 한국 교회는 ‘효율적 사역’, ‘성공적 프로그램’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역대상 13장은 아무리 좋은 목적이라도,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면 실패할 수 있음을 경고합니다.
2026년 1월, 한 기독교 뉴스는 ‘코로나 이후 한국 교회의 온라인 예배 실태’를 보도했습니다. 많은 교회가 온라인 예배의 효율성에 익숙해졌지만, 실제 성도들의 영적 교제와 공동체 의식은 약화되었습니다. 이는 ‘편리함’이 예배의 본질을 위협하는 ‘현대판 새 수레’의 사례입니다. 한 목사는 인터뷰에서 “우리는 편리함 때문에 본질을 잃은 것은 아닌지, 말씀에 기초한 예배 회복을 위해 다시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고백했습니다.
웃사는 법궤 곁에서 자란 사람입니다. 오히려 그 익숙함이 그로 하여금 법궤의 거룩함을 잊게 만들었습니다. 2026년, 교회에 오래 다닌 성도들은 ‘은혜’에 익숙해져, 예배를 형식적으로 드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웃사의 죽음은 ‘익숙함’이 얼마나 위험한가를 경고합니다.
2026년 3월, 국민일보는 ‘예배 시간에 졸거나 스마트폰을 하는 성도들의 실태’를 보도했습니다. 설문조사에 따르면, 교회 출석 10년 이상 된 성도의 60%가 “예배가 습관이 되었다”고 응답했습니다. 이는 웃사처럼 ‘하나님의 임재’를 가까이 하면서도 그 거룩함을 잊어버린 현대판 ‘무감각’입니다.
법궤가 오벧에돔의 집에 석 달 동안 머물렀더니, 하나님께서 그의 집과 모든 소유에 복을 내리셨습니다(14절). 오벧에돔은 법궤가 오기를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영접했습니다. 그는 ‘가드 사람’으로 블레셋 출신의 이방인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임재 앞에 겸손히 나아가는 자는 누구든지(민족을 막론하고) 복을 받는다는 놀라운 은혜를 보여줍니다.
1. ‘좋은 일’을 할 때도, ‘하나님께 묻는’ 습관을 잃지 말라 – 아무리 경건하고 아름다운 계획이라 할지라도, 먼저 기도로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2. ‘웃사의 열심’이 아닌, ‘말씀에 순종하는 열심’을 가지라 – 잘못된 방법으로 드리는 열심은 오히려 해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한 지혜를 구하십시오.
3.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두려움’과 ‘기쁨’의 균형을 유지하라 – 하나님은 사랑이시지만, 동시에 거룩하신 분입니다. 그분 앞에서 함부로 나아오지 말고, 경외함으로 예배드리십시오.
4. 당신의 ‘집’이 오벧에돔의 집이 되게 하라 – 가정 예배, 가족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임재를 당신의 집으로 초대하십시오.
“좋은 일, 그러나 잘못된 방법”
역대상 13장은 아이러니한 장면으로 가득합니다. 다윗은 가장 경건한 마음으로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기려 했습니다. 그는 온 이스라엘의 지도자들과 의논했고(1-2절), 백성들은 모두 찬성했으며(4절), 수많은 군중이 모여 수금과 비파와 소고로 연주하며 마음을 다해 기뻐했습니다(8절). 이 모든 것이 ‘좋아 보였습니다’. 그런데 그 행진은 갑자기 멈춰 섰습니다. ‘웃사의 죽음’(9-11절)이라는 비극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그 이유는 좋은 일을 했지만, 잘못된 방법으로 했기 때문입니다.
첫째: 다윗은 ‘백성과 의논’했지만, ‘하나님께 묻지’ 않았다 (1-4절)
다윗은 이스라엘의 지도자들과 의논했습니다(1절). 그들은 법궤를 옮기는 일이 ‘모든 백성에게 옳게 보였다’(4절)고 판단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누구와도 의논하지 않은 분이 계셨습니다.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다윗은 14장에서 블레셋과 싸울 때는 ‘내가 올라가리이까?’라고 묻지만(대상 14:10), 13장에는 그 ‘묻는’ 장면이 전혀 없습니다. 이는 오늘날 우리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중요한 결정 앞에서 ‘하나님께 묻는’ 기도를 생략하고 있지 않습니까? 당신의 계획이 아무리 좋고, 주변 사람들이 모두 찬성해도, 하나님께 묻지 않았다면 그 계획은 위험합니다.
둘째: 다윗은 ‘블레셋의 방식’을 따랐다 (5-8절)
하나님께서는 법궤를 오직 레위인(고핫 자손)이 채로 어깨에 메어 운반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민 4:4-6, 15). 그러나 다윗은 ‘새 수레’를 만들고 소가 끌게 했습니다(7절). 이는 블레셋이 법궤를 돌려보낼 때 사용했던 ‘이방인의 방식’(삼상 6:7-12)을 그대로 따른 것입니다. 방법이 잘못되었으니, 그 결과도 비극적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는 오늘날 우리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효율적이고 편리한’ 인간의 방법을 따라 예배하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식은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셋째: 웃사는 ‘좋은 의도’로 손을 뻗쳤으나, 그것이 ‘죄’가 되었다 (9-11절)
웃사는 법궤가 땅에 떨어질까 걱정하여 손을 뻗쳤습니다(9절). 그의 의도는 좋았습니다. 그러나 그 행동은 ‘성물을 만지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민 4:15)을 위반한 것이었습니다. 웃사는 ‘열심’만 있었지, ‘지식’이 없었습니다. 이는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호 4:6)는 말씀을 그대로 증명합니다.
역대상 13장은 실패의 기록입니다. 그러나 역대기 저자는 이 실패를 기록함으로써, 포로 후 공동체에게 ‘참된 예배의 방식’이 무엇인지 가르쳐 줍니다. 그것은 ‘백성의 의견’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며, ‘인간의 편리함’이 아니라 ‘말씀에 대한 순종’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더 좋은 중보자——예수 그리스도——를 모셨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법궤’이시며, 그분의 몸(교회) 안에서 우리는 올바르게 그분을 모실 수 있습니다.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며, 그분의 임재 앞에 경외함으로 예배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역대상 13장은 ‘좋은 일’을 했지만 ‘잘못된 방법’으로 실패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이 실패는 절망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다윗은 이 실패를 통해 배웠고, 14장에서 ‘하나님께 묻는’ 법을 배운 후 승리했습니다. 포로 후 공동체가 이 기록을 소중히 간직했듯, 오늘날 우리도 이 말씀을 통해 ‘말씀에 순종하는 예배’, ‘하나님께 묻는 기도’, 그리고 ‘하나님의 임재를 경외하는 두려움’을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그때, 우리의 ‘오벧에돔의 집’에도 하나님의 복이 임할 것입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