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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로마서 16-433

로마서 12장

작성자에셀나무|작성시간25.09.17|조회수105 목록 댓글 0

1. 바울 사도는 12~16장에서 구원의 영광에 합당한 삶에 대한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교훈을 준다. 이제는 구약시대처럼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지는 않지만 구원받은 성도는 자신을 하나님께 살아있는 제물로 드려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삶 전부가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살아있는 예배라는 전제에서 사도는 신앙적 삶의 교훈을 준다. 사도는 생활 태도나 스타일의 변화가 아니라 생각과 지성의 변화를 말한다(2).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생각하고 이 분별의 기초 위에서 그 뜻을 행하고 살라!”

 

2. 먼저, 사도는 신자의 삶을 교회의 삶으로 규정한다. 교회를 떠난 신자의 거룩한 삶은 없다. 이 말은 교회를 다녀야 한다는 말이라기보다, 다른 신자들과의 교제가 없는 신자의 거룩한 삶은 없다는 의미다. 교회 생활에서 성도는 자기 믿음의 분량에 따라 자신을 볼 줄 알아야 한다(3). 자신을 대단하게 여기거나 세상에서의 자기 위치로 자신을 드러내려는 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바가 아니다. 교회는 한 몸의 여러 지체로 구성되었기에 각자 자기 위치를 아는 것이 교회의 화평을 위해서 중요하다.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위해 각 지체에게 은사를 주신다. 은사의 목적은 형제를 섬기고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세우는 것이다. 모든 신자는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은사를 알고 그것으로 형제와 교회를 섬겨야 한다. 사도는 형제 사이의 관계를 다룬다.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교회다. 선과 악에 대한 분별과 판단 위에서 사랑하고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이고 산 제사다. 구원의 은혜를 입은 성도는 기다리지 말고 먼저 사랑해야 한다. 또 부지런하여 게으름에 인생을 낭비하지 말고 열심히 주를 섬기는 것이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이다. 성도는 소망 중에 즐거워하고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는 사람이다. 궁핍한 형제들과 나그네들-순회 교사들을 포함-을 손대접하는 일이 또한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산 제사다. 주 안의 형제들과 희로애락을 함께 하는 것은 중요하다. 마음을 높은데 두는 것은 형제와의 화목을 깨는 요소다. 교회 안에서 사회적 종의 신분을 가진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고 그런 일을 마다하지 말라고 사도는 권한다. 그리고 성도는 악한 태도를 멀리해야 하는데, 자기를 핍박하는 사람이나 원수에게도 복수를 생각해서는 안 된다. 성도에게 요구되는 삶은 복수가 아니라 하나님께 맡기고 원수에게조차 선을 베푸는 삶이다. 이렇게 성도는 가능한 모든 사람과 화평의 관계를 가져야 한다. 다른 사람이 계속 적대적 관계를 만들어가는 것은 물론 그의 몫이 아니지만 말이다.

 

3. 로마서와 야고보서의 가르침이 모순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실제로 바울 사도가 전하는 복음의 내용이 야고보서의 가르침과 다르거나 성경이 일관성을 결여한 것은 아니다. 바울 사도는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 구원의 도리를 가르치지만, 구원의 열매는 신자의 삶 속에서 구체적이고 실제적으로 나타나야 한다고 가르친다. 이것은 행동으로 믿음을 보이라고 도전하는 야고보서의 강조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 믿음은 보이지 않지만, 삶의 태도를 통해 증거된다. 자기 믿음을 과대평가하여 교제를 허물거나, 과소평가하여 움츠러들지 말라. 형제들과 함께 하는 사랑의 교제가 바로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산 예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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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12장부터 새로운 파노라마가 펼쳐집니다. 1-11장에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의 도리를 설명했다면, 12장부터는 그렇다면 성도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이야기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1-2절은 너무나 유명한 성경구절입니다. 성도들의 삶의 원리에 대한 ‘대원칙(?)’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앞으로 서술되는 구체적인 삶의 지침들에 대한 함축이며 총론이라고 할 수 있는 구절입니다.

 

1절에 “그러므로…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권한다”라는 바울의 말은 지금부터 하는 말이 그리스도인의 윤리적 부담이나 정죄나 율법의 무거운 짐을 지우는 계명에 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에 근거하여 전하는 ‘권면’ 임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잠깐 헬라어를 살펴 보면 “자비하심”의 히브리어는 ‘라하밈’이라는 말로, 이 단어는 ‘모태(Womb)’을 뜻하는 말에서 온 단어로 하나님께서 죄에 빠진 인가을 불쌍히 여기는 것, 곧 ‘긍휼(compassion)’을 뜻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바울의 계속되는 권면의 지침들에는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을 근거로 권면하고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드리라’라는 말은 제사에서 사용되는 용어입니다. 성전에서 제사장이 짐승을 잡아서 드렸듯이 우리 몸을 제물로 바치라는 의미입니다. 이 때 제물로 등장하는 ‘몸’이라는 단어는 헬라어 ‘소마’로서 단순하게 육체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영과 육을 합한 인간 자체를 의미하므로 하나님께 드려져야 하는 것은 내 육신의 삶 뿐만 아니라, 내 생각과 사고방식, 세계관, 비젼과 꿈, 그리고 영의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제물이 ‘산 제물’ 입니다. 원래 제물이란 죽여서 드리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사람을 제물로 드리는 ‘인신제사’를 드리라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을 제물로 드리는 것은 하나님께서 금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바울은 ‘죽여서 드리는 제물’이 아니라, ‘산 제물’이라고 표현합니다. 어떻게 드리는 것이 산 제물일까를 묵상해 본다면 가장 근접한 성경적 표현 중의 하나는 마치 죽엇 하나님께 바쳐진 짐승 제물처럼 온전히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2절에서 바울은 ‘변화를 받아’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이는 외형적인 변화가 아니라, 근복적인 전환으로의 생각과 새로운 삶의 방향에 있어서의 변화입니다. 구원으로만 만족하는 사고방식이 아니라, 가치관과 세계관의 변화와 함께 삶의 실질적인 변화입니다. 바울이 골로새서 3장 10절에 그리스도인을 정의할 때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은 자”라고 표현하였듯이 그리스도인들은 경건의 훈련과 생활을 통해서 하나님을 닮아가고 하나님이 보시는 관점으로 세상과 만물을 바라보는 자들입니다.

 

3-8절까지는 구체적으로 성도의 생활이 어떠해야 할 것인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특히 본문은 혼자만의 경건생활에 대한 것이 아니라, ‘지체’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공동체로서의 교회 생활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고린도전서 12장에 나오는 바울의 ‘지체론’의 축소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각 지체는 공동체 안에서 각각 믿음의 분량에 따라 ‘기능’이나 ‘역할’은 달라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을 따라 일을 감당해야 합니다.

 

많은 질문들이 머리에서부터 쏟아져 나왔습니다. ‘거룩한 산 제물은 어떻게 준비될 수 있을까?,’ ‘이 세대를 본 받지 말라고 했는데 그럼 어떻게 세상 속에서 살아야 하는가?,’ ‘영적 예배라면 우리의 육적인 몸은 어떻게 에배에 참여하는가?,’ ‘새롭게 함이 우선인가? 변화가 우선인가?,’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가?’등등…

 

그런데 막상 묵상하려고 본문을 읽고 읽다 보니 마음에 남는 말은 위의 질문들에 대한 대답이 아니라, 두 문구의 단어가 가슴에 꽃혔습니다. 바로 2절의 끝에 있는 “분별하도록 하라”라는 말과 3절 끝에 있는 “지혜롭게 생각하라”라는 문구입니다. 이 두 문구의 단어인 분별하는 것과 지혜롭게 생각하는 것은 모두 ‘생각(Think)’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1절에서 언급하고 있는 ‘너희 몸을…거룩한 산 제물,’ 그리고 2절의 ‘마음을 새롭게 하여 변화를 받는 것’에 대해서 곰곰히 생각해 보니, 나 스스로가 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왜냐하면 아버지 하나님의 구원의 놀라운 섭리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와 성령 하나님의 끈질긴 견인이 아니고서는 죄인 된 인간의 노력이나 행실로 결코 이룰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분별하고, 지혜롭게 생각하는 것’은 우리가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더 엄밀하게 말한다면 이것들 조차도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바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없으며, 성령께서 우리의 생각을 바르게 인도해 주시지 않으면 헛되고 헛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서는 “하라!”라는 명령형을 사용해서 분별할 것과 지혜롭게 생각할 것을 주지시키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 마음 속에 “아! 그렇구나. 하나님께서 ‘하라!’라고 했으니 내 이성과 판단력으로 분별하고 지혜롭게 생각해 보자~”라고 마음을 먹은 바로 그 순간! 3절의 말씀이 제 눈에 확 다가 왔습니다.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라는 문구입니다. 지제 좀 무언가 해 보려고 마음을 먹었는데 이 문구로 인해서 더 이상 나갈 수 없이 정지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생각의 한계가 무엇인지 혼동이 오기 시작했습니다. 어디까지 내가 생각할 수 있고, 내 주관으로 분별하고 판단할 수 있는지 혼란스러워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 문구에 힌트가 있었습니다. “오직 하나님게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생각하라”라는 것입니다.

 

철학자 데카르트는 “Cogito, ergo sum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라틴어 명제를 통해서 인간 자신의 존재를 의심할 수 없다는 철학의 출발점을 제시하였습니다. 또 인류학에서는 현생 인류를 ‘Homo Sapiens”라 명하면서 “지혜가 있는 사람”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세상 학문은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존재임을 부인하지 않으며, 그 생각과 지식의 한계를 정하지 않습니다. 많이 생각할수록 발전할 수 있으며 더 나아질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성경에서는 그 생각의 한계를 정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분량대로”라는 생각의 한계점을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죄악된 것을 많이 생각하기 때문일까요? 인간이 너무 쓸데없는 것을 종종 생각하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인간의 생각이 이타적이기 보다는 이기적인 생각을 하기 때문일까요? 오늘 본문은 어떤 생각이 ‘마땅한 생각’이며, 얼마큼 생각하는 것이 ‘믿음의 분량’대로 생각하는 것인지 명확하게 말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분별하고 생각할 것을 말하다가 바울은 갑자기 4절 이하에서는 생각과는 다른 쟝르에 해당하는 행동에 대해서 말하면서 급전환을 합니다. 이 행동에 관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사를 따라 주신 것들로 어떤 이는 예언을, 어떤 이는 섬기는 일을, 어떤 이는 가르치는 일을, 어떤 이는 위로하는 일을, 어떤 이는 구제하는 일을, 어떤 이는 다스리는 일을, 어떤 이는 긍휼을 베푸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분별할 것과 지혜롭게 생각할 것을 말하다가 무엇을 어떻게 분별해야 할지, 또 어떻게 생각하는 것이 지혜로운 것인지에 대해서 말하지 않고 은사로 주신 각 사람의 사명과 일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 바울의 서술을 따라 가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하! 하나님이 내게 주신 사명에 관한 생각! 그 일을 온전하게 잘 감당하기 위한 분별력과 지혜만 있어도 충분하다”라는 생각입니다. 나의 생각이 하나님의 주신 은사를 잘 감당하기 위한 생각이라면, 또 나의 분별력이 이 땅에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따라 사명을 감당하기 위한 것이라면 그리스도 안에서 지체된 나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다는 믿음의 확신입니다.

 

오늘 말씀 묵상을 써 내려가면서 사변적이고 정리가 모호하다는 느낌이 있습니다. 아마 좀 더 깊은 묵상과 본문 주해가 필요하다고 생각 됩니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하게 함께 나누고 삶에 적용해 본다면, 지금 우리는 힘들고 어려운 터널을 지나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터널을 지나가면서 ‘어떻게 해야지? 무엇을 해야지?’라는 고민과 염려 속에서 가치보다는 생존을 위해서 다양한 생각과 결정을 하고 있습니다. 이럴 때에 오늘 본문을 삶에 적용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어떤 생각과 결정이든지 하나님께서 내게 은사로 주신 것이 분명이 있으며, 그 은사로 주신 사명을 감당하기 위한 분별력과 지혜로운 결정이 필요한 때가 바로 지금 우리가 지나고 있는 시대입니다.

 

본문 9-13절에 모든 성도들에게 적용되는 권면을 하고 있습니다. 사랑, 형제 우애, 부지런함, 소망 중에 즐거움, 인내, 기도, 나눔, 대접 등등은 특정한 사람들에게만 적용되는 ‘은사’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해당되는 선한 믿음의 행동강령들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된 지체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14절은 교회 안이든 밖이든 괴롭히고 대적하며 박해하는 자를 위한 행동강령입니다. 마태복음 5장 43-48절에 나와 있는 원수를 사랑하는 산상수훈의 말씀처럼 대적자와 박해자를 대하는 대원칙입니다. ‘핍박’이라는 단어의 유래에는 ‘뒤쫓다, 추격하다’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즉 한번, 두번처럼 단기간이나 일회성의 괴롭힘이 아니라, 계속해서 끈질기게 따라오면서 괴롭히고 박해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고 인내함이 없이는 견딜 수 없는 것입니다.

 

찬송 452장 “내 모든 소원 기도의 제목”  이 찬송의 가사를 보니 “내 모든 소원 기도의 제목 예수님 닮기 원함이라…(후렴)...예수님 닮기 내가 원하네 날 구원하신 예수님을 내 마음속에 지금 곧 오사 주님의 형상 인치소서” 입니다. 오늘의 찬송가를 묵상해 보니 오늘의 본문 9-14절의 그리스도인의 삶의 행동강령을 어떻게 지켜낼 수 있는지 길이 보였습니다.

 

바로 예수님을 닮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미 12장 2절에서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으라”라고 권면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닮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로 마음을 새롭게 하는 것이며 새로운 피조물로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닮고 변화를 받는 것은 과거의 내 모습과 형질을 그대로 갖고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변화됨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주님 닮기 전의 과거의 내 모습은 할 수 없지만, 변화된 그리스도인은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의 행동강령들 중에서 14절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라는 말씀의 행동강령은 지키기 쉽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주께서 “원수를 사랑하라”라고 말씀하셨지만, 이 말씀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모든 그리스도인이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박해가 오면 피하거나, 또는 박해자를 원수나 대적자로 생각하고 ‘하나님, 저 대적자와 원수들을 물리쳐 주십시오’라고 기도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다윗은 자신을 계속 추적하며 죽이려고 하였던 사울 왕을 해하지는 않았지만, 시편의 여러 고백들 속에서 다윗조차 원수와 대적들 때문에 얼마나 괴롭고 힘들었는지 고백하고 있으며, 또한 하나님께 물리쳐 달라고 기도하고 징계와 벌을 주라고 기도하는 고백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럼 다윗은 성경의 가르침과 반대의 기도를 한 것은 아닐까요? 다윗도 그랬는데 우리에게는 왜 저주하지 말고 축복하라고 말씀하고 있을까요? 이 질문에 대답은 내일 말씀묵상의 본문이지만 로마서 12장 17-21절에 있습니다. 바로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선으로 악을 이기라”라는 말씀들입니다.

 

다윗이 하나님께 대적자와 원수를 위해 벌을 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자기 능력과 힘으로 하려고 했던 것이 아닙니다. 다윗의 시편 기도는 원수와 대적자를 내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해결해 달라고 맡기는 것입니다. 마음은 괴롭고 힘들지만 하나님의 손에 맡기는 것이 바로 로마서 12장 17-21절의 요지이며 참된 선이신 하나님으로 악을 이기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다윗처럼 하나님의 손에 맡기는 것이며, 원수와 대적자들, 박해자들을 불쌍히 여겨 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또한 저들의 영혼이 지옥에 가는 것보다 주께 회개하고 돌아옴을 바라보며 주의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본문에 있듯이 축복하는 행위가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행동강령들을 곰곰이 생각해 보면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그리고 우리 스스로에게 실천해 보면 어떨까요? “거짓없는 사랑, 선에 속하는 것, 형제 우애, 먼저 존경하기, 부지런하기, 열심으로 주를 섬기기, 소망 중에 즐거워하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하기, 서로 쓸 것을 공급해 주기, 손님 대접하기, 그리고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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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12장 1-8절

 

 

16장으로 구성된 로마서는 크게 1장-11장과 12장-16장,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장에서 11장은 교리적 또는 신학적 부분이며, 12장에서 16장은 실천적 또는 윤리적 부분입니다. 즉 1장-11장까지는 ‘우리가 무엇을 믿는가?’를 신학적으로 설명했고, 12장-16장은 ‘믿는 사람은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를 실천적 차원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를 신학적 용어로 설명하면 1-11장은 ‘칭의(justification)’에 대한 내용이며, 12-16장은 ‘성화(sanctification)’에 대한 내용입니다.

 

칭의(稱義), 즉 이신칭의(以信稱義, justification by faith)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더 이상 죄인으로 여기지 않고 의인으로 간주해 주신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내가 구원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거나 구원받을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죄인인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일방적인 사랑과 신비한 구원의 능력이 나를 살려주시고 의롭다고 여겨주셨다는 의미입니다. 이 구원의 진리를 신학적으로 설명해나가던 바울은 인간이 더 이상 이해할 수도 설명할 수도 없는 그 신비의 무한히 깊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신묘막측(神妙莫測, 하나님은 신비하고 오묘하심은 측량할 길이 없다)하신 하나님은 지적 탐구의 대상이 아니라 경배와 찬양의 대상임을 깨닫고, 바로 앞장에서 로마서의 신학적, 교리적 부분의 끝을 다음과 같이 맺었습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 (롬 11:33-36)

 

주일설교를 통해 살펴보았던 삭개오는 같은 민족에게 매국노라고 비난받는 세리였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는 그의 집에 들어가 구원의 은총을 베풀어주셨습니다. 그러자 그는 삶의 목적이었던 모든 물질을 내려놓겠다고, 즉 주님을 목적 삼는 삶을 살겠다고 고백했습니다. 무엇이 그의 삶을 180도 변화시켰습니까! 바로 주님의 한량없이 깊은 은혜와 사랑입니다. 자신을 향하신 신묘막측하신 주님의 사랑을 깨달았기에 그는 불의하게 모은 재물을 기꺼이 내려놓겠다고 선포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오늘 본문인 12장은 로마서 1-11장까지 나타난 하나님의 신비하신 사랑을 깨달은 사람은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 즉 ‘성화’에 대해 설명합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이 ‘그러므로‘라는 접속사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바울은 로마 교인들을 향해 친근하게 ‘형제들아’ 부릅니다. 그는 사도의 권위로 로마 교인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형제의 자격으로 다가갔습니다. 로마 교인들에게 형제의 자격으로 친근하게 다가간 바울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권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자비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비하심은 어떻습니까? 만약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한계가 있다면 오늘의 나는 존재할 수 있었을까요? 하나님께서 택하신 이스라엘의 역사를 살펴볼 때,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끊임없이 배반했습니다. 하다하다 그들은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님까지도 모욕하며 십자가에 매달지 않았습니까!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내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은 오래 참으심, 인내하심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은 모든 사람을 구원에 이르게 하시는 자비하심입니다. 율법의 행위로는 결코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없는 자들에게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얻게 하기로 하신 자비하심입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죽게 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어리석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독생자를 죽이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이같은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바탕으로 바울은 로마교인들에게 권하고 있습니다. 주님을 믿는 공동체라면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을 바탕으로 서로를 권해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조건이 있습니다. 주님 안에서 형제, 자매로 서로가 대등한 관계이어야 합니다.

 

주님 안에서 우리 모두는 형제, 자매입니다. 침례교에는 직분이 목사와 집사만 있습니다. 물론 다른 교단과의 교류를 위해 호칭 장로제를 사용하는 침례교회도 있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침례교회에서는 서로 형제, 자매라고 호칭합니다. 저보다 연장자에게 형제님, 자매님이라고 부르는게 처음에는 많이 어색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 이 호칭을 통해 나이와 신분을 뛰어넘어 대등한 관계가 형성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나이에 관계없이 존대 말을 사용하는 부부가 있습니다. 서로 존대하는 부부가 부부싸움이 많겠습니까? 서로 반말하는 부부가 부부싸움을 많이 하겠습니까? 부부간에 존대하면 서로를 존중하는 대등한 관계가 형성됩니다. 주님의 신묘막측한 은혜를 입은 믿음의 공동체는 사회적 신분이나 연령차이나 남녀노소에 관계없이 서로를 존중하는 대등한 관계에서 주님의 자비하심으로 서로를 권해야 합니다. 서로를 존중하는 대등한 관계에서 주님의 자비하심으로 상대방의 잘못을 꾸짖기보다는 그가 바로 설 수 있을 때까지 주님의 사랑으로 품고 말씀으로 격려해서 바른 삶으로 이끌어가야 합니다.

 

바울은 주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로마 교인들에게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고 권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제사를 지냈습니다. 제사에는 당연히 동물이나 곡물과 같은 제물이 있어야 했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에 바치는 제물은 당연히 정결하고 흠이 없어야 했습니다. 바울은 우리 몸을 제물로 드리라고 합니다. 우리의 몸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한 제물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 몸은 정결하고 흠이 없어야 합니다. 몸이 정결하고 흠이 없어야 한다는 의미는 내 뜻이나 내 주장이나 내 의지를 모두 비운 상태를 의미합니다. 삶속에서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제사에 바쳐진 동물이 모두 죽었듯이, 예배는 나를 죽이는 시간입니다. 예배를 통해 내가 죽어야 합니다. 말씀 안에서 내가 온전히 죽어야만 말씀 안에서 우리는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우리 ‘몸을 산 제물로 드리라’고 권합니다. 우리 몸을 산 제물로 드리라는 의미는 우리의 삶 자체가 하나님께 드려지는 산 제물이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즉 바울은 우리의 삶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한 제물이 되고 제사가 되어야 한다고 권하고 있습니다.

 

코로나19를 통해 ‘대면 예배’, ‘비대면 예배’라는 새로운 용어가 생겼습니다. 이 사태가 있기 전까지 온라인으로 드리는 예배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이 많았습니다. 온라인으로 드리는 예배는 온전한 예배가 아니고, 예배당에 함께 모여 드리는 예배만이 진정한 예배라고 여겼습니다. 물론 온라인상으로 드리는 예배는 예배당에 나와서 드리는 예배에 비하면 복장, 태도 등 여러 가지 면에서 취약점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온라인 예배는 온전한 예배가 아니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대면 예배냐 비대면 예배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배에 임하는 우리의 자세가 중요합니다. 성경도 마찬가지입니다. 종이로 인쇄된 성경책도 성경이고, 스마트 폰이나 스마트 패드의 성경 어플에 있는 성경도 성경입니다. 비대면 예배가 장기화 되면서 예배에 임하는 우리의 태도가 나태해질 우려도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대면 예배를 드리면서도 다른 생각을 하거나 꾸벅 꾸벅 조는 교인들이 있는 것처럼, 비대면 예배를 드린다고 나태해지는 분들도 있지만, 모두가 다 나태해질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때로는 비대면 예배를 통해 우리의 가정이 예배당이 되고, 나아가 우리의 삶의 현장이 예배당이 되어서, ‘예배의 생활화, 생활의 예배화’를 우리의 삶속에서 구현시킬 수 있도록 주님께서 허락하신 큰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바울은 우리 삶을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는 예배를 하나님께 드리는 ‘영적 예배’라고 말합니다. 영적 예배를 ‘성령의 예배’로 착각하는 경우도 있는데, ‘영적’으로 번역된 헬라어 ‘로기켄(λογικην)’은 ‘성령, 혹은 영’이 아니라 ‘말씀’을 의미하는 ‘λογος(로고스)’의 형용사로 reasonable 즉, '합리적인', '논리적인', '말이 되는'이란 뜻을 지닌 단어입니다. 즉 영적 예배는 ‘합당한 예배’, ‘참되고 사리에 맞는 예배’, ‘구속받은 피조물이 드려 마땅한 예배’란 뜻입니다. 따라서 ‘영적 예배’란 우리의 삶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이 되고, 온전히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삶을 사는 이들이 드리는 예배를 의미합니다.

 

우리의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는 것, 하나님께 드리는 합당한 예배가 무엇인지를 바울은 다음과 같이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첫째로 이 세대를 본받지 않는 것입니다. 즉 세상의 조류에 휩싸이지 말라는 것입니다. 주식투자에서 ‘개미’는 ‘주식에 관한 지식이 없는 일반 주식투자자를 일컫는 투자용어입니다. 개미투자자들의 가장 큰 특징은 증시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기에 다른 사람의 의견을 쫓아가기에 자칫하면 막차를 탈 위험이 매우 높다는데 있습니다. 세대를 본받아 재물을 목적삼고 살았던 삭개오는 주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불의한 재물을 기꺼이 내려놓겠다고 선포했습니다. 그런 그를 향해 주님께서는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눅 19:9)라고 칭찬하셨습니다.

 

두 번째로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는 것입니다. 새해가 맞이하면서 사람들은 잘못된 것을 내려놓고 새롭게 거듭나겠다고 결단하곤 합니다. 그런데 대부분 작심삼일로 그칠 때가 많습니다. 금연하겠다고 결단했지만 실패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새롭게 변화하겠다고 결단한다고 내가 새롭게 될 수 있습니까? 물론 의지가 강한 사람의 경우 금연에 성공하고 다이어트로 살을 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적인 면에서 우리의 의지만으로 우리가 거듭날 수 없습니다. 오로지 세상 것을 내려놓고 주님을 목적삼고 주님의 말씀 안에서 나를 비울 때만 우리는 변화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세 번째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선택의 기로에서 고민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지 알게 해달라고 기도하곤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내가 택한 선택이 선한 것인가 아니면 부정직한 방법인가를 구분하면 됩니다. 그리고 내가 택한 선택에 하나님의 기뻐하심이 있는가 아니면 내 욕심을 채우기 위한 것인가를 살펴봅니다. 마지막으로 내가 택한 선택이 선한 것이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라고 판단된다면 그것을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계속해서 바울은 (3b)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고 권합니다.

새번역은 ‘여러분은 스스로 마땅히 생각해야 하는 것 이상으로 생각하지 말고’로 해석했습니다. 즉 자신을 과대평가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자신을 과소평가하는 것도 좋지 않지만, 자신을 과대평가하는 것은 자칫하면 현실에 만족하지 못하거나,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의를 드러내는 우를 범할 수 있기에 조심해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처신해야 할까요?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고 권합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에게는 큰 믿음을 주시고, 다른 사람에게는 작은 믿음을 주실까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믿음을 주셨는데, 사람마다 하나님께서 주신 믿음에 자신을 의지하는 바가 각기 다릅니다. 12명의 제자들 모두가 주님을 향한 믿음이 동일하지 않았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가룟 유다입니다. 가룟 유다가 다른 제자들과 동일한 믿음을 갖고 있었다면 그는 예수님을 팔아넘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바울은 내게 주어진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믿음에 내가 얼마나 의지하는가를 잘 생각해보라고 합니다.

 

바울이 각자 처한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자신을 생각해보라고 한 이유는 성화의 과정이 모두가 동일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생김새가 다르듯이 우리의 능력도 모두 다릅니다. 저 사람에게는 있고 나에게 없는 능력이 있습니다.

 

(4-5)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기능을 가진 것이 아니니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각자 다른 삶의 자리에서 살고 있고, 각자 다른 능력을 지닌 우리가 모여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된 우리는 제일 먼저 주님께서 주신 능력이 서로 다름을 인정해야 합니다. 최근 방영하는 무명가수 오디션 프로그램을 보면서 제가 신선하다고 느낀 점이 있습니다. 경쟁 프로그램인데도 상대방에 대해 질투하거나 반목하지 않고, 서로를 인정해주는 모습이 참 인상적이었습니다. 사람마다 주님께서 주신 능력이 다름을 인정할 때, 우리는 비로소 아름다운 믿음의 공동체를 이루게 됩니다.

 

6절에서 8절은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지체가 각자 주님께서 허락해주신 삶의 터전에서 주님께서 주신 능력을 주님께서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최선을 다해 매진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신묘막측한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에 대해 나누어 보았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을 바탕으로 대등한 관계에서 바른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서로가 권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목적 삼을 때만 세상의 조류에 휩싸이지 않고 늘 새롭게 변화된다는 사실을 잊지마십시다.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며 주님께서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는 뜻이 이루어 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는 삶이야 말로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우리가 드릴 수 있는 영적 예배라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다.

 

 

로마서 1-11장까지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신 일과 그로 인해 일어난 일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곧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죄인인 우리가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게 하셨습니다. 이는 행위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값없는 은혜로 어떻게 죄인을 의롭다 하시는 지에 대해 말씀합니다.

 

이렇게 11장까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행하신 일로 인해, 사람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게 됨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12장부터는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은 사람들의 삶과 행위에 대해 말씀합니다.

 

그 중에 오늘 12장 9절부터 21절까지는 ‘사랑’에 대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랑에는 거짓이 없나니 (9)

 

(9) 사랑에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사랑에는 거짓이 없나니’는 완전한 한 문장입니다. 우리가 읽은 성경에는 문장이 이어지지만 헬라어 원문에는 (헤 아가페 아뉘포 크리토스’, Ἡ ἀγάπη ἀνυπόκριτος.) 마침표가 있는 한 문장입니다. 새번역 성경에서는 ‘사랑에는 거짓이 없어야 합니다’ 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거짓 없는 사랑’을 강령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랑’의 명령은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예수께서도 말씀하신 것과 같이 구약의 율법의 모든 강령이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구약의 율법을 그대로 지킬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만, 율법의 본질과 동일한 ‘사랑’을 행할 것을 명하는 것입니다. 이전 까지는 율법을 지켜서 의롭게 될 수 없다고 말씀하다가, 다시 율법과 같은 사랑을 명령하는 것에 대해 그 의미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로마서가 형식적인 율법이 아니라 본질인 ‘사랑’을 말씀한다고 해서, 곧 바로 ‘사랑하라’는 적용이 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로마서의 전반부 1-3장에 따르면 ‘거짓이 없는 사랑’은 사람에게는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로마서를 시작하면서, 1-3장은 사람의 본성에 대해서 규명했습니다. 3장 10-18절은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그들의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로마서 3:10-18)”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사람의 본성에 대해 1-3장에 걸쳐 논증하였습니다.

 

이 말씀에 따를 때 ‘거짓 없는 사랑’은 사람에게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율법을 지킬 수 없는 사람의 내적인 반응에 대해서 설명하였습니다. 즉 7장에서 율법은 사람에게 탐심을 일으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에게 율법이 제시될 경우, 죄가 율법을 이용해 그 사람 속에 탐심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이 탐심이 의미하는 것은, 사람이 율법을 지켜 스스로 의롭게 되려는 ‘자기의’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또는, 율법이 사람 속에 있는 독립성을 자극하여서, 율법에 저항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즉 율법을 어김으로 율법의 통제에서 해방되려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율법을 행하는 것이 불가능한 상태에 있는 사람에게, ‘사랑’을 명령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을 하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12장에서는 사랑 하라고 명령하는 것이 가능해진 것입니까?

 

우리는 이 사랑하라는 명령으로 들어가기 앞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인해 사람에게 어떠한 일이 일어나는지 알아야 합니다. 1장에서 11장을 거치면서, 믿는 사람은 변화합니다. 자신의 행위로는 구원받을 수 없는 불가능한 상태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은혜를 입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 것이며, 일을 하지 아니하고도 삯을 받는 것이고(4:5), 예수님의 비유로 표현하면 일만 달란트의 빚을 탕감 받은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마18:23-34).

 

이렇게 오늘 본문의 ‘사랑하라’는 말씀을 포함한 21절까지의 말씀은 모두, 무한한 은혜를 입은 사람이 받는 말씀입니다. 율법의 행위를 의지하는 사람에게는 불가능한 명령이지만,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에게는 합당한 명령입니다.

 

구체적으로 9절에서 사랑에 대해, ‘사랑은 거짓이 없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사랑에 거짓이 없다는 것은 조건 없는 무조건 적인 사랑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하나님의 속성 중 하나로 하나님의 사랑은 무조건적인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욥기에서 사탄은 하나님께 이해관계가 없는 사랑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했습니다(욥1:9). 사탄은 하나님께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라고 하며 이해관계가 없는 사랑을 부정했습니다. 즉 욥이 하나님께 얻을 것이 있기 때문에 혹은, 하나님께서 욥에게 많은 것을 주셨기 때문에 욥이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주장입니다.

또한 9절 후반절에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는 말씀에서, 악의 명사형인 ‘포네론’이 쓰여 사탄과 연관 되어 있습니다. 신약에서 '악'을 명사형으로 ‘포네론’을 사용할 때는, 주로 사탄과 연결을 시켜서 사용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무조건적 사랑을 부정하고 이해타산적 관계를 조장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사탄적인 이해타산적 관계를 미워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까닭 없이 사랑하시며, 까닭 없이 은혜를 베푸십니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믿음으로 의롭다하시는 은혜로 나타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의롭다고 해주신 것은, 하나님의 거짓이 없는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또한 사랑받을 만한 자격이나 행위나 모습으로 사랑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우리가 사랑의 이유를 나 자신에게서나 혹은 상대방에서 찾는다면 우리는 사랑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절망에 부딪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지 못하는 자신의 실상과 사랑 받을 만하지 못한 인간의 실상으로 절망스러운 현실에 맞닥뜨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이 말하는 사랑은 사람의 노력과 행위로부터 시작된 사랑이 아닌, 하나님의 작정에서 시작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완성된 사랑입니다. 그 사이에 우리는 은혜를 입은 자로 아무런 공로 없이 혜택을 받은 자로 참여할 뿐입니다.

 

서로 먼저하라(10-13)

 

(10-13) 형제를 사랑하며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

 

그리고 10절에서 ‘형제를 사랑하며’는, ‘형제의 사랑으로 사랑하라’고 번역됩니다. 형제의 사랑이란 가족 관계에서의 사랑을 의미합니다. 가족의 특징은 이해관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가족이기에 허물을 덮어주고 서로를 위해주며 댓가를 바라지 않고 주는 조건적이지 않는 관계입니다.

 

또한 10절 후반절에서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라고 말씀합니다. 강조는 ‘먼저’ 하라는 것에 있습니다. 누가 존경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지에 상관없이 서로 먼저 존경하는 것입니다. 서로 먼저 하는 것은 그 자격이나 행위와 상관없는 무조건적인 태도를 의미합니다.

 

11절에서는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것과, 주님을 섬기는 것은 다르지 않습니다. 주님을 섬긴다는 의미는, 아무도 없는 산속에서 혼자 기도하고 말씀 보고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을 섬기는 것은 주님의 몸을 섬기는 것이며 그 몸 된 지체를 섬기는 것입니다. 나 홀로 신앙심을 키워가는 것은, 타종교에서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주님을 섬기는 것은 사람과 지체를 사랑하는 것과 때어놓을 수 없는 관계에 있습니다.

 

12절은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라고 말씀합니다. 이를 통해 사랑은 환란의 상황에도 예외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거짓 없는 사랑은 환경과 상황에서도 구애 받지 않는 무조건적인 것입니다.

 

13절은 성도의 실질적인 필요를 공급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실질적인 도움이 동반되는 것이 거짓 없는 사랑입니다. 또한 후반절에는 ‘손 대접’에 힘쓰라고 말씀하십니다. ‘손 대접’ 이라는 말은 낯선 사람에 대한 사랑과 환대를 의미할 때 쓰는 표현입니다. 우리가 관계를 맺고 있는 성도들뿐만 아니라, 낯선 사람에게도 실질적인 필요를 공급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흔히 두 번 볼일 없는 사람이라고 하면, 신경 쓸 필요 없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나에게 이득도 손해도 주지 않는 실속 없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손 대접’은, 이해득실을 떠난 무조건 적인 사랑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들을 통해 이해관계와 상관없는, 은혜 받은 자로서 조건 없는 사랑을 할 것을 요구받고 있습니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므로 의롭다 함을 얻어, 하나님께 무한한 은혜를 우리가 입었기 때문입니다.

 

선으로 악을 이기라(14-21)

 

(14-18)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하지 말라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14절에서 21절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의 일환으로 볼 수 있습니다. 18절의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는 말씀은, 나와 친하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과 화목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화목해야할 모든 사람에는 원수와 나를 박해하는 사람과 나에게 해를 끼치는 사람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앞뒤의 구절이 원수와 박해자와 악과 해를 끼치는 사람에 대한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나에게 악을 행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이 말씀은 분명히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일만 달란트 빚을 탕감받은 사람에게 더 적은 빚을 진 사람들을 탕감해주라는 말씀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갚을 길이 없는 빚을 탕감 받은 사람은, 자신에게 빚진 사람들에게 탕감해주지 못할 빚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죽을 수 밖에 없는 죄를 용서 받았습니다. 그래서 아무런 댓가도 공로도 없이 영원한 생명을 얻었습니다. 어떠한 사람이 우리를 해롭게 하고 저주하고 박해 하더라도,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받은 영원한 생명과 삶을 조금도 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설사 끔찍한 범죄를 당해 해를 입더라도, 그것으로 인해 영원한 생명과 삶에 어떤 영향도 주지 못합니다(롬8:37-39).

 

그래서 우리는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선으로 갚을 수 있으며, 원수도 사랑할 수 있는 길을 얻었습니다. 악을 갚지 않아도 되고 원수도 사랑할 수 있는 자유를 얻은 것입니다(갈5:13-14). 우리를 사랑하게 만드는 것은 사랑하라는 율법도 아니며, 구체적인 실천 방안도 아닙니다. 우리에게 원수도 사랑할 수 있게 하는 것은, 불가능한 죄인을 아무런 이유와 조건 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하셔서 영원한 자녀가 되게 하신, 그 은혜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사랑은 창세전 하나님의 작정에서 시작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완성된 사랑입니다.

 

우리는 그 사랑을 입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맡기시는 어떤 작은 일이라도,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무한한 은혜의 무게로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맡기신 작은 일에도 충성해야 합니다. 오늘 하루도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은 자로서, 거짓 없는 사랑을 할 수 있는 자유를 누리는 하루되시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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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12:1-8

 

로마서 1-11장이 복음의 내용을 설명했다면 오늘 부터 시작되는 12장에서 15장은 복음으로 의롭게 된 자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 즉 그리스도인의 삶의 실천적 부분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래서 12장을 시작하면서 본문은 “그러므로” 라는 단어로 시작합니다. 1절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오늘 이 시대를 크리스챤으로 살아간다는 것,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로 이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오늘 로마서12장은 예수를 믿고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크리스챤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곧 ‘산 제물이 되는 것’이라고 가르쳐줍니다.

 

1) 제물은 스스로를 위한 목적이 아닌 하나님을 위한 목적으로 사용됩니다.

제물은 제단위에 올려져 피흘려 죽임을 당하는 흠 없는 동물을 가리킵니다. 흠없는 동물은 반드시 죽게 되는데 이 죽임을 당한 동물이 제단 위에 올려져 하나님에게 드려질 때 이 동물을 가리켜 제물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에게 드려진 존재가 제물입니다. 제물의 삶의 존재 이유는 하나님께 드려지기 위해서입니다. 크리스챤으로 살아간다는 것, 곧 하나님께 제물이 된다는 의미는 우리의 삶의 목적이 제물 자신에게 있지 아니하고 제물을 받으시는 하나님께 있음을 말합니다. 우리의 삶의 결과가 우리 자신의 성공이나 목적달성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목적을 달성하는데 있음을 제물은 일깨워줍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희생되는 제물이 되기 보다는 하나님을 우리의 제물로 삼으려 할 때가 참 많지 않습니까? 우리의 목적과 성공을 위해서, 우리의 행복과 계획을 이루기 위해서, 자신의 성공과 사람들의 인정을 받기 위해서 하나님을 우리의 제물로 삼으려 할 때가 참 많습니다. 크리스챤은 자신의 인생을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드리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2)제물의 참된 의미는 죽음에 있습니다.

제물이 죽어야 하는 이유는 제물을 가지고 온 사람을 살리고 용서함을 받게 하기 위함입니다. 제물이 살아 있어서는 용서함이 없습니다. 화해가 없습니다.

히9:22 율법을 따라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하게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제단위에 드려지는 제물이 죽어 피를 흘려야 죄사함이 있다는 말입니다. 제물이 죽어서 피흘림이 있어야 제사를 드리는 사람들이 용서함과 화해를 얻습니다. 회복을 얻게 됩니다.

우리가운데 화해와 평화가 없고, 다툼과 불평과 잡음이 가득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 스스로가 제물로 죽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제물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를 제물 삼으려고 혈안이 되어있지 스스로 제물되는 사람이 드뭅니다. 스스로 제물이 되는 사람이 적기에 분쟁과 다툼이 가족안에, 우리의 모임안에 여전히 있는 것입니다.

 

제물은 죽는 것이 마땅하고 당연한데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명령합니다. “산 제물로 드리라”(1절) 죽은 제물이 아니라 살아있는 제물이 되라고 가르칩니다. “Living sacrifice”

 

3)예수 그리스도가 ‘산 제물’의 본이 되셨습니다.

우리에게 ‘살아있는 제물’이 되라고 가르치는 성경은 말로만이 아니라 실제로 그것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살아있는 제물의 본보기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우리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이 제물로서 죽었으나 지금도 살아있는 제물이 되셨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를 나무에 달아 죽였으나 하나님이 사흘만에 다시 살리’셨습니다. (행10:39-40) 하나님께서 죽음에서 일으켜 세우신 예수는 죽었으나 사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죽었으나 살아계신 산 제물의 원형입니다. 자신의 옛 자아는 십자가에 못박혀 죽고 예수안에서 새로운 자아로 태어난 인생이 바로 산 제물입니다. 나의 옛 자아는 죽고 예수가 내안에 사시는 새로운 피조물, 그가 바로 산 제물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본받아 ‘산 제물’로 살아가는 주의 사람은 바울의 고백처럼 고백하게 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라디어서2:20) 자신은 죽고 예수는 사는 삶. 이것이 바로 크리스챤의 삶이요, 곧 거룩한 산 제물로서의 삶입니다.

 

4)산 제물로 드려지는 인생이 되어야 주님은 뜻을 분별할수 있게 됩니다.

이렇게 주님께 드려진 거룩한 산 제물로 살아갈 때 우리는 비로소 주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게 됩니다(2절). 주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분별하며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드려진 거룩한 산 제물로 살아갈 때 주님의 뜻을 분별허게 될 뿐 아니라 공동체안에서의 자기의 역할도 깨닫게됩니다. 자신의 것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더 큰 공동체의 부분이요, 한 몸의 작은 지체임을 인식하게 되고 따라서 자신이 마땅히 해야 할 역할을 감당할 수 있게 됩니다(3-8절).

 

 

이제 우리 마음을 새롭게 하십시다. 우리의 마음의 결단을 주님은 요구하십니다(2절)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라

우리 스스로 마음의 결단을 하십시다. 마음을 새롭게 하십시다. 우리를 거룩한 산 제물로 변화시키기 위해 기다리고 계신 주님의 능력에 우리 자신을 맡기십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제물로 드릴 때 주님은 우리를 통해서 이 삭막한 광야에 소망의 길을, 이 메마른 사막에 생명의 강을 만들어 가실 것입니다. 그럴때 우리는 산 제물되신 예수님처럼, 용서함이 필요한 곳에, 화해가 필요한 곳에, 죄사함이 필요한 곳에, 구원이 필요한 곳에, 회복이 필요한 곳에 주님의 도구로 쓰임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를 주의 거룩한 산 제물로 사용하기 원하시는 주님의 목적을 이루어 드리는 오늘 하루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최상의 예물은 우리의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는” 것(로마서 12:1), 즉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광야와 사막에서 소망의 길을 뚫는 생명의 강을 내는 소명을 완수하기 위해, 우리 육체의 생명조차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고 던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육체의 생명조차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고 던질 수 있는 근거는 앞서 열한 장에 걸쳐 바울이 설명했듯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기인합니다. 어제의 본문이 우리의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드려야 한다” 것에 대한 총론이었다면, 오늘부터 살펴볼 본문은 이에 대한 각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크게 두 개의 관계성, 즉 신앙 공동체 내의 관계성과 공동체 밖 특히 박해 또는 탄압하는 자들과의 관계성으로 나누어 생각해보겠습니다. 그런데 이 두 개의 관계성 전체를 지배하는 기본은 사랑(아가페)입니다.

 

“사랑에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9)

 

사랑에는 거짓이 없어야 합니다. 거짓은 사실과 다른 것이나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처럼 꾸미거나 그렇게 말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헬라어로 연기자, 무대공연자를 뜻하는 명사가 바로 이 거짓을 뜻하는 단어와 어원이 같습니다. 즉 거짓은 공동체를 연극 무대로 변질시킵니다. 실질적으로 교회를 연극무대처럼 교회에서만 거룩한 모습을 유지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저 개인적으로도 고등학교 시절 처음 다녔던 교회에서 교회를 연극무대로 변질시킨 몇 몇 분들의 모습에 실망해서 교회를 뛰쳐나와 얼마나 오랫동안 방황했는지 모릅니다.

 

거짓 없는 사랑은 선과 악 모두를 용납하는 것이 아닙니다.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라는 헬라어 원어적 의미는 악에 대한 미움 정도는 치를 떨며 혐오하는 수준을 뜻하며, 선에 속하는 정도도 아교처럼 떨어지지 않을 정도로 딱 달라붙는 것을 말합니다. 즉 거짓 없는 사랑은 악을 무조건 포용하는 맹목적인 사랑이 아닙니다. 어린 사무엘을 받아들인 엘리 제사장은 자신의 아들들이 제사장으로서 직무를 유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불러 책망하거나 벌하지 않고 수수방관했습니다. 엘리 제사장은 그것이 아들들을 사랑하는 것이 생각했지만, 그는 자녀들이 저지르고 있는 악을 포용하는 거짓된 사랑을 했던 것입니다. 그 거짓된 사랑의 결과 자녀들은 물론 자신조차도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오늘을 사는 현실에도 이같이 변질된 거짓 사랑을 하는 부모들이 우리 주변에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유의해야 할 점은 바울은 악을 혐오하라고 했지, 악인을 혐오하라고 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말을 어기고 죄악을 저지른 아담과 하와를 혐오하지 않으셨고, 오히려 그들을 당신의 사랑으로 품어주셨습니다. 좀 더 자세한 내용은 다음에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기독교) 공동체에서의 관계성에 대해 바울은 다음과 같이 서술했습니다.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 (10-13)

 

바울은 유대인과 이방인들로 구성된 로마교회 교인들에게 서로 사랑하되 형제자매처럼 그리고 가족처럼 사랑(서로 우애하고)할 것을 권면합니다. 유대인과 이방인들로 구성된 로마교회 교인들에게 사랑하되 가족처럼 친형제 자매처럼 사랑하라고 합니다. 가족은 내가 힘들 때 의지할 수 있고, 남들이 다 싫어해도 감싸주는 존재입니다. 존경한다는 것은 상대방의 가치를 인정한다는 의미입니다. 인간의 가치는 그가 가진 권력이나 재물과 소유의 유무에 의해서 평가되어서는 안 됩니다. 인간은 인간 그 자체로서 이미 가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당신의 형상으로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상대방의 가치를 인정하고 존경하는 사람은 상대방으로부터 존경받습니다. 그러나 상대방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고 자신의 가치만 인정받기를 원하는 사람은 그 누구로부터 진정으로 존경받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신앙 공동체가 진정한 공동체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가족의 사랑으로 하나 된 모두가 합심하여 주님을 섬겨야 합니다. 주님을 섬기되 열심을 내서 부지런히 일하며, 성령으로 뜨거워진 마음을 가지고(11, 표준새번역) 섬겨야 합니다. 종교적 열심은 광신과는 구분되어야 할 것입니다. 맹목적인 사랑이 거짓된 사랑인 것처럼, 광신은 거짓된 신앙입니다. 광신과 종교적 열심의 구분은 그 중심이 무엇인가를 살펴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을 열심히 섬기는 중심에 내 욕심이 앞서거나 타인의 욕구를 채우기 위해서라면 그것은 광신입니다. 종교적 열심에는 오로지 성령님이 그 중심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신앙의 연륜이 깊어질수록 열심히 주님을 섬겨야 하는데, 반대로 시간이 흐를수록 주님을 섬기는 일에 소홀히 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 근본적인 이유는 성령의 뜨거움이 없기 때문입니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미적지근한 태도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때가 있습니다. 이렇게 깨닫는 것만 해도 은혜입니다. 성령의 뜨거움을 어떻게 회복할 수 있을까요?

 

미래에 대한 소망이 없는 사람은 현실에서의 즐거움도 참을성도 없어지고 기도도 하지 않습니다. 신앙인의 소망은 성경 말씀대로 이루어진다는 믿음입니다. 즉 눈앞에 펼쳐지는 현실이 아무리 암울하다 할지라도 주님의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에 미래에 대한 소망으로 현실을 기꺼이 기쁨으로 포용하게 되고 주님께 기도하며 나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신앙의 회복은 나눔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주는 것보다는 받는 것에 익숙합니다. 그러나 기쁨은 나누면 배가 되고 슬픔은 나누면 반이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나누면 비는 것이 아니라 더 채워진다는 나눔의 역설을 “마더 테레사 효과” 또는 “슈바이처 효과”라고 합니다. 1998년 하버드대학교 의학대학에서 시행한 연구로 테레사 수녀처럼 남을 위한 봉사활동을 하거나 선한 일을 보기만 해도 인체의 면역기능이 크게 향상되는 결과를 나타냈습니다. 남을 도우면 느끼게 되는 최고조에 이른 기분 즉 “헬퍼스 하이(Helper's High)”가 있는데, 남을 돕는 봉사를 하고 난 뒤에는 거의 모든 경우 심리적 포만감 즉 “하이” 상태가 며칠 또는 몇 주 동안 지속되며, 의학적으로도 혈압과 콜레스테롤 수치가 현저히 낮아지고 엔돌핀이 정상치의 3배 이상 분비되어 몸과 마음에 활력이 넘친다고 합니다. 이처럼 나눔은 남을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결국에는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나눔을 통해 육체적으로 건강해질 뿐 아니라, 믿음이 더욱 굳건하게 서게 됩니다.

 

두 번째로 신앙 공동체 밖 특히 신앙 공동체 또는 성도들을 종교적으로 박해하거나 탄압하는 자들과의 관계성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바울은 자신 또는 우리를 핍박하는 자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하라고 합니다.

1) 저주하지 말라(14)

2) 악으로 악을 갚지 말라(17)

3) 원수를 갚지 말라(19절)

4) 악에게 지지 말라(21)

핍박하는 자들을 향해 저주하지 말고, 악으로 원수를 갚지 말고, 악에게 지지 말라는 이 말들은 인간의 본성을 거스르는 권고가 아닐 수 없습니다. 출애굽기 21장에는 폭행에 대한 법이 있습니다.

 

생명은 생명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덴 것은 덴 것으로, 상하게 한 것은 상함으로, 때린 것은 때림으로 갚을지니라(출 21:23-25)

 

분명 구약에 이런 규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이와는 상반된 말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출애굽기에 이와 같은 규정을 세우신 것은 죄에 대한 공식적인 형벌을 말하는 것으로 개인적으로 보복하는 것을 금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이런 이유로 바울은 주님을 섬기는 신앙인으로서 믿지 않은 사람들과 함께 공존하는 사회에서는 더욱 더 모범된 삶을 살아야 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말로는 주님을 믿는다면서도 주님을 의탁하기 보다는 사회적 규범과 가치관을 잣대로 그들과 동일하게 보복하고 저주한다면 일반인들과 차이가 하나도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일반인들이 인간의 본성대로 자신을 핍박하는 사람에 대해 저주하고 악을 악으로 갚을지라도 신앙인은 저주하지 말고 악을 갚지 않은 것으로 그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축복함으로 선을 행하라고 권면합니다. 믿음은 나의 주관이나 사회적 가치관이 우선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매달린 자신을 향해 침을 뱉으며 저주하는 유대인들을 향해 저주하시지 않으시고 오히려 하나님께 그들의 무지를 용서해달라고 간청했습니다. 다윗은 시기심에 불타 자신을 죽이려는 사울을 처치할 수 있는 두 번의 절호의 기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사울을 해하고자 하는 부하들을 오히려 나무랐습니다. 이유는 주님만이 심판자이시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신명기 32:35 말씀을 인용하여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19)라고 합니다. 인간이 인간을 심판하는 것처럼 위험한 일은 없습니다. 더 나아가 원수가 곤란한 처지에 처해있다면 그를 외면하지 말고 오히려 그에게 은혜를 베풀 것을 요청합니다.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20)

 

 연탄불이 꺼지면 옆집에 가서 불을 붙여 오거나 불붙은 연탄불을 빌려오곤 했습니다. 숯불을 그 머리에 쌓겠다는 이야기도 당시 원수가 화로에 불씨가 꺼져서 불씨를 빌리려 왔을 때 냉대하지 말고 불씨를 나누어주는 은혜를 베풀라는 의미입니다. 구약에서 화목제를 지낼 경우 화목제물의 고기는 당일에 모두 먹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이 미워하는 이웃과도 고기를 나누어 먹어야 했습니다. 오늘 바울이 본문을 통해 전한 공동체 내외적인 관계성을 요약하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X의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면서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삶은 거짓된 삶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이웃을 사랑해야 하는데 우리는 예수님처럼 원수를 그렇게 사랑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고 원수를 용서할 수 없습니다. 나는 할 수 없지만,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님의 능력으로는 가능합니다. 국내외적으로 일어난 일련의 불상사로 인해 국내는 물론 전세계에 혼돈과 증오와 미움이 가득합니다. 이럴 때 신앙인으로서 우리는 더욱 더 기도해야 되겠습니다. 피해를 당한 이들에게 주님의 위로하심이 그리고 가해한 이들에 대해서는 악은 선을 이길 수 없다는 진리 앞에서 주님의 진노하심 앞에 서게 될 그들을 긍휼히 여기사 그들로 하여금 더 이상 폭력적인 방법에 의지하지 말고 평화적인 방법으로 모든 사태를 잘 풀어갈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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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로 드리는 영적 예배, 삶의 변화

 

예배의 새로운 정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로마서 12장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참된 예배가 무엇인지에 대해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이 장은 단순히 교회의 건물 안에서 드리는 형식을 넘어, 우리의 삶 전체를 하나님께 드리는 영적 예배에 대해 가르쳐 줍니다.

우리는 살면서 때때로 예배를 주일 하루의 의무적인 행사로만 여길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로마서 12장은 우리의 생각, 행동, 그리고 관계까지도 모두 예배의 영역이 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는 우리에게 감사로 드리는 삶의 예배가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합니다.

 

본론 1: 몸으로 드리는 산 제사 - 마음의 변화

로마서 12장의 첫 구절은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라고 시작됩니다. 여기서 **'몸을 드리라'**는 것은 단순히 육체를 드리는 것을 넘어, 우리의 삶 전체를 헌신하라는 의미입니다.

구약 시대에는 짐승을 잡아 제사를 드렸지만, 신약 시대의 우리는 우리의 몸과 삶을 산 제물로 드려야 합니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때마다 죽어가는 제물이 아니라, 살아 있는 몸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며,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살아야 함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변화된 마음'**에서 시작됩니다. 바울은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권면합니다. 세상의 가치관과 유행에 휩쓸리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해야 합니다. 마음이 변할 때, 우리의 행동과 삶도 변하게 됩니다.

 

본론 2: 은사로 드리는 봉사 - 공동체의 조화

로마서 12장의 두 번째 주제는 각자의 은사를 사용하여 교회 공동체를 섬기는 것입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라고 말하며, 예언, 섬기는 일, 가르치는 일, 위로하는 일, 구제, 다스리는 일 등 다양한 은사를 언급합니다. 모든 은사는 우월함이나 열등함 없이 동등하게 중요하며, 각자의 은사를 사용하여 공동체를 섬길 때 교회는 온전한 몸을 이룰 수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교향악단'**과 같습니다. 교향악단에는 바이올린, 첼로, 트럼펫, 클라리넷 등 다양한 악기가 있습니다. 각 악기는 고유의 소리를 가지고 있지만, 지휘자의 지휘 아래 조화롭게 연주될 때 아름다운 화음을 만들어냅니다. 교회 공동체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각자는 다른 은사를 가졌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지휘 아래 서로를 섬길 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아름다운 교향곡을 연주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은사를 자랑하거나, 다른 사람의 은사를 부러워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사에 감사하며, 그 은사를 통해 다른 사람을 섬겨야 합니다. 우리의 봉사를 통해 서로가 세워지고, 결국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온전한 공동체를 이루어 나갈 수 있습니다.

 

본론 3: 사랑으로 드리는 삶 - 거룩한 실천

로마서 12장의 마지막 부분은 사랑의 구체적인 실천에 대해 다룹니다. 바울은 "사랑에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라고 권면합니다.

진정한 예배는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서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기뻐하는 자들과 함께 기뻐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며, 원수를 사랑하고,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는 삶이 바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영적 예배입니다. 이는 단순히 감정적인 사랑이 아니라, 우리의 의지를 동원하여 실천하는 거룩한 삶입니다.

이러한 사랑의 실천은 우리가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는 힘을 줍니다. 원수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환난 중에 참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그 사랑을 실천할 때, 우리의 삶은 자연스럽게 감사가 넘치게 됩니다.

 

결론: 감사로 완성되는 영적 예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로마서 12장은 우리에게 우리의 삶 전체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영적 예배로 드리라고 권면합니다. 우리의 몸을 하나님께 드리고, 마음을 새롭게 하며, 각자의 은사로 공동체를 섬기고,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자신의 삶을 예배로 드리고, 그 예배를 통해 감사를 생활화한다."는 말처럼, 우리는 우리의 모든 순간을 하나님께 감사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살아 있는 예배가 될 때, 우리는 세상이 줄 수 없는 진정한 기쁨과 평화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데살로니가전서 5:16-18)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에 감사하며, 우리의 삶 전체가 하나님께 드려지는 영원한 예배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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