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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드라마 동이와 실제역사

작성자해피데이|작성시간11.04.21|조회수147 목록 댓글 0

1. 숙빈 최씨는 영조의 생모이며 최씨와 인현왕후 민씨는 서인 세력, 영조 또한 노론(서인의 강경파)의 절대적 지지로 임금이 되었다.

 

2. 숙종실록은 경종 때 집필이 시작됐지만 완성이 되지 않아 영조 때 이어 완성되었고, 이에 실록의 내용엔 임금도 간여할 수 없다는 룰이 깨진 상태였기에 의도적인 편집과 삭제가 있었다.

 

3. 영조 집권 초기, 왕가 종친들과 소론, 그리고 이미 전멸당한 상태나 다름없던 남인이 경종 독살(영조가 어의들의 만류를 뒤로 하고 경종에게 부자와 인삼으로 탕/차를 올렸고 몇 시간 뒤 경종 사망)과 영조의 왕위 찬탈을 확신하여 경종 부인이 양자로 입적하려 했던 밀풍군 탄(소현세자의 증손)을 추대하여 크고 작은 모반을 일으켰다. 대표적인 것이 이인좌의 난. 그런데 훗날 사도세자가 집권세력인 노론을 적으로 두고 소론을 가까이 함. 그 결과는 뒤주에 갖혀 사망. 그리고 훗날 왕위에 오른 정조 또한 노론에게 안면몰수하고 소론을 곁에 둠. 결과는... 그 이후부터 조선 패망까지 노론의 세력 아래 있었음.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에 역사에 기록되어 있다고 해서 완전히 진실이라고 볼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광해군과 인조에 대한 평가가 최근에 들어 바뀌었고, 소현세자와 정조임금의 죽음에 대한 의혹도 최근에 들어 다시 불거졌듯이요. 즉, 과거의 충신이 실제로는 간신이거나 역신일 수도 있고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는 것. 

 

아무튼,

 

드라마 동이와 실제의 숙빈 최씨의 차이점.

 

1. 동이는 드라마를 위해 만들어낸 숙빈 최씨의 가상의 이름. 최씨의 이름은 정확히 기록되어지지 않았다. 게다가 기록에 남아있는 숙빈 최씨의 아비 최효원 또한 실제론 족보에 없다고 함.

 

2. 동이는 각종 전문 직종을 거친 파란만장한 출신. 실제의 숙빈 최씨의 출신 중엔 침방 나인이라는 설과 무수리라는 설이 있는데, 침방 나인이라는 설은 어미의 출신에 컴플렉스를 갖고 있었고, 조졸하였던 형이 숙종의 아들이 아니었다는 설 등에 괴로워했던 영조가 지어냈을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무수리 중 다수가 유부녀였기에 실은 영조 또한 숙종의 친자가 아니다라는 설로 역모까지 겪었던 영조로선 기록을 바꿔서라도 숙빈 최씨의 출신을 정식 궁녀로 만들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최씨의 손과 발이 지독히도 거칠어 버선을 신고 벗기 어려웠다는 사실과 영조의 첫 정비였던 정성와후 서씨가 고생을 한 적이 없어 손이 곱다는 말에 영조가 미워했다는 사실에 의거. 궁녀들은 모두 지밀, 침방, 수방, 소줏간 등 전각별로 기능적인 조직에 속해 있는데 침방의 서열은 아주 상급에 속하며 궁녀에겐 궂은일을 맡아하는 비자(궁녀의 여종)가 있었으니 왕의 총희로서 최고의 케어를 장기간 받고서도 치료가 되지 않을 정도로 거친 손발을 가졌다는 것은 모순이 있다. 또, 지밀과 침방 수방의 궁녀들은 대부분 중인 출신이었다고 한다.

 

같은 이유로 7세에 입궁하였다는 최씨의 입궁 시기 또한 신빙성은 없다. (궁녀들의 입궁시기는 지밀, 침방, 수방은 3-5세, 나머지 처소는 평균 7-8세이지만 15세 이후에 입궁하는 경우도 있음. 비자도 하지 않는 궂은 일을 해야 하는 무수리의 입궁 연령은 궁녀보다 높은 편)

 

3. 명성왕후의 죽음. 명성왕후는 당시 병석에 있던 숙종의 완쾌를 빌기 위해 굿을 하였는데 그때 얻은 계시로 혼자 하겠다는 며느리 인현왕후의 권유를 무시하고 한겨울에 차가운 물을 몸에 끼얹으며 치성을 드리다 병을 얻어 사망하였음. 희빈 장씨는 3년 전인 1680년에 명성왕후의 독단적인 명으로 강제로 출궁당해 종친 숭선군의 부인의 보살핌을 받으며 지내고 있었고, 명성왕후의 복상을 마친 1686년에 재입궐했으니 명성왕후의 죽음과 장씨는 전혀 무관함.

 

4. 명성왕후의 성격. 실제의 명성왕후는 당색과 성격이 지나치게 뚜렷했던 여인으로 편전에 마음대로 자신의 자리를 만들어 조정 일에 간섭하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대신들 앞에서 소리를 지르기도 했고, 숙종의 이름으로 한밤 중에 대신들을 궐로 대뜸 불러 복평군 복창군을 죽이라며 통곡했던 인물. 참다못한 남인들의 비판에 숙종이 명성왕후의 간섭에서 벗어나려 하기도 했지만 자결하겠다고 협박해 숙종이 두 손을 들 수밖에 없었음. 이런 그녀의 행위가 희대의 악비였던 문정왕후에 비교되어 아버지 김우명이 수치심으로 죽을 정도. 

 

5. 동이에선 남인의 세력이 대단해보이지만 사실 삼복의 난 이후부터 장씨가 경종을 낳아 원자로 책봉될 때까지 남인은 숨을 죽인 채 목숨을 부지하고 있던 상태. 본래 숙종의 아버지인 현종이 승하할 당시 어린 숙종에게 김수항(서인)과 허적(남인)은 믿을 수 있는 자들이니 중용하라고 유지를 내렸지만, 명성왕후와 서인이 공모하여 삼복(복창군, 복평군, 복선군) 형제와 남인의 당수인 허적을 억지로 연류시켜 죽이게 함. 그로 인해 대부분의 남인 세력이 정계에서 밀려남(경신환국). 남인이 재집권을 한 것은 1689년 1월 장씨의 소생 윤이 원자 책봉이 되면서 그에 반대하는 서인들을 숙종이 숙청하면서부터. 이때 경신환국 때의 보복으로 서인의 뿌리를 완전히 뽑으려고 하다가 숙종이 마음을 돌려버려 전세가 뒤집혀버림.

 

6. 희빈 장씨의 어미는 본래 자의대비의 친정사람인 조사석의 아내 집안의 노비였지만 (조사석의 목숨을 구한 이유로) 면천되어 장씨의 아비 장경의 후처 혹은 첩이 되고 장씨를 낳았음. 이에 장씨는 엄연한 양인 신분이지만 계속해 서인들에게 천민이라 손가락질 당했음. 또한 첩의 딸인 서녀는 궁녀가 될 수 없었으니 첩의 딸이라는 것도 서인들이 만들어낸 고정관념일 가능성이 있음. 장씨의 아비 장경은 역관이었지만 일찍 사망하여 아버지의 종형제인 장현의 보살핌을 받으며 자랐다고 함. 장현은 역관의 우두머리로 당대 최고의 거부였기도 했고 수차례 외교로 공을 세워 중인 신분으로 종1품 숭록대부의 벼슬을 받은 거물. 하지만 명성왕후에 의해 제거된 종친 복창군 복선군 형제와 친분이 있다는 이유로 장현 형제와 아들이 고스란히 유배를 당해 집안이 패가망신. 이후 장씨가 희빈이 되고 중전이 되고 나서야 잠시지만 소생함. 조사석이 장씨의 어미와 정을 통하고 있고, 그래서 자의대비가 남인인 장씨 집안의 덕도 볼 겸 장씨를 아꼈다는 말이 있지만 전자는 서인이 만들어낸 말이고, 후자는 당시 남인으로 몰려 몰락한 장씨의 친정이나 힘을 완전히 잃었던 남인의 상태로 봤을 때 억지다. 애초 자의대비는 과거 복상문제로 왕권을 능멸한 서인을 싫어하긴 했지만 명성왕후처럼 정치에 간여하거나 인현왕후처럼 뚜렷이 당파를 드러낸 바 없으니 남인이었다는 확증은 없다.

 

7. 윤의 원자 책봉까지 장씨에겐 숙종의 사랑, 그리고 숙종의 절대적인 신임은 받지만 힘은 전혀 없는 자의대비와 종친인 숭선군 이외엔 전혀 힘이 없었음. 아비는 오래전에 죽은 데다가 어미는 노비 출신, 종숙부 집안은 멸문한 상태. 덕분에 궁에 돌아오자마자 장씨를 쫓아내려는 서인들이 천하다는 둥 온갖 자연재해에도 장씨 탓을 했지만 편을 들어주는 이가 없었음. 궁내에서도 장씨는 후궁 중 가장 지위가 낮았고, 재입궐하고 거의 1년 간 인현왕후에게 첩지도 받지 못해 특별상궁으로 머물어야 했는데다 왕따도 심했음. 민씨는 과거 숙종의 총애를 받았던 장씨가 입궐하자마자 즉시 김수항의 종손녀인 영빈 김씨를 후궁으로 들여 3월에 숙의로 책봉하며 노비 150을 하사하는 둥 차별을 보였고, 궁인 출신인 귀인 김씨에게도 5월에 소의로 진봉 11월에 귀인으로 책봉해줬으면서 시증조모인 자의대비가 특별히 귀애하고 숙종이 총애하는 장씨는 12월에야 숙원 첩지를 내려줌. 다음 해에도 숙종이 쳐다도 안 봤다던 영빈은 소의에 귀인으로 진봉되지만 장씨는 회임을 한 그 다음 해에야 겨우 소의로 승격될 정도. 인현왕후가 버릇을 고치기 위해 종아리를 칠 정도로 건방졌다는 장씨이지만 사실 장씨가 대놓고 건방지게 굴 수 있을 상황이나 처지가 전혀 아니었음.

 

8. 인현왕후는 숙종에게 장씨는 짐승의 화신이고 팔자에 아들이 없으니 밤마다 헛힘 쓸 필요 없으며 대신 자신과 자면 자손이 많을 것이다고 큰소리를 쳤을 정도이니 알려진 대로 덕성있고 정숙한 여인은 아니었음. 오히려 장씨를 견제하기 위해 후궁을 들이면서 미모보단 자기 당파 사람을 골라 들일 정도였으니 어리석거나 명성왕후처럼 정치색이 지나치게 강한 여인이었음이 옳은 표현임. 또 차별도 심했는데 장씨 뿐만 아니라 승은을 입고도 10여년 간 특별상궁으로 주욱 지내야 했던 연령군의 생모 명빈 박씨도 있음. (훗날 박씨가 죽었을 때 숙종이 박씨의 상주를 들게 하기 위해 6살 후부터 왕자를 봉작하는 관례를 깨고 5살인 연령군을 봉작했을 때 당시 조정을 평정했던 노론 대신들이 들고 일어나 숙종이 귀양까지 보내야 했을 정도였던 걸 보면 박씨가 서인이 아니었음을 짐작할 수 있음. 숙종의 가장 많은 사랑을 받았던 연령군은 숙종의 병환을 간호하다 20살의 나이로 갑작스레 병사.) 또, 인현왕후가 병석에서 사선을 넘나들면서도 숙종이나 주변 사람들에게 몸이 이상하다 아무래도 저주를 받은 것 같다 장씨의 궁녀들이 엿보고 다니는 것 같다는 둥 끝까지 장씨를 물고 늘어진 것으로 보아 집요한 면도 있음. 장씨가 인현왕후가 죽기를 기도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무당의 저주로 병에 걸려 죽었다는 것 자체가 현대인의 시선으로 봤을 땐 확실히...

 

9. 장씨의 모함으로 인현왕후가 폐비가 되었다지만 정확한 이유는 아님. 정확한 사단의 근거는 장씨가 숙종의 첫 아들을 낳았는데도 조정을 장악하고 있던 서인들이 축하 인사조차 하지 않아 숙종이 위기감을 느꼈음. 또 장씨의 산후조리를 돕기 위해 장씨의 어미가 특별히 숙종의 허락을 받고 입궁하는데 천것이 감히 옥교를 타고 궁안 출입을 하였다고 엄연한 숙종의 장모이고 숙종 아들의 외조모인 장씨의 어미를 옥교에서 끌어내려서 망신을 주고 옥교를 빼앗아버리기까지 한 서인들의 행태에 숙종이 이대로면 아들 윤의 장래가 위험할 것이다고 판단해 서둘러 원자 책봉을 한 것이고, 이에 반발하는 서인들을 송시열(서인의 영수)부터 차례로 숙청해나가다 인현왕후와 영빈김씨도 숙청의 대상이 되어 버린 것. 장씨가 모함 여부는 야사에만 존재할 뿐 기록된 바는 없고, 아예 상관도 없었음.

 

 

아직 드라마 상에선 등장하진 않는 에피소드:

 

1. 숙빈 최씨는 장씨가 사망(자진 혹은 사사)한 후 곧 이현궁으로 옮겨지고, 10년 후 숙종의 명으로 이현궁이 다시 소환되어  영조의 잠저에서 지냄. 임금이 생존하는데 젊고 건강한 후궁이 출궁하는 건 이례적인 일. 최씨가 출궁했을 당시 영조의 나이는 7살. 어린 아들과 생이별을 한 셈이니 호화로운 이화궁을 하사받긴 했으나 실제적으로는 숙종에게 버림받은 것이나 다름없음. 궐과 이현궁의 거리로 보아 숙종이 다시 최씨를 찾았을 가능성도 희박하며 기록에도 없음. (지나쳤다는 기록은 있음) 최씨는 두 번 다시 궁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사망.

 

2. 최씨가 숙종에게 권해 장씨의 정체를 깨닫게 했다는 사씨남정기. 하지만 실제로 내용 속의 악첩 교씨는 장씨보단 최씨와 비슷한 면이 더 많음. 숙종이 인현왕후를 폐비하여 쫓아낼 때 인현왕후가 장씨를 험담하고 이간했음을 듣는 대신들이 민망할 정도로 낱낱이 알렸지만, 장씨를 폐비하거나 죽이라 명했을 땐 장씨가 인현왕후를 저주했다는 사실이외엔 인현왕후에게 문안도 올리지 않았고 하인을 보낸 적도 없었고 인현왕후를 민씨나 민가(=형)이라고 부른 적이 있었다고만 했지 뒷담화를 했다는 내용은 전혀 없었음. 하지만 최씨의 경우엔 뒷담화로 장씨를 정처자리에서 끌어내고 죽음에 몰아넣었으니 사씨남정기의 교씨와 흡사할 뿐만 아니라 되려 더 독함. 또 교씨의 악행 중 제 자식을 직접 죽여 그 죄를 처에게 뒤집어 씌우는 장면이 있는데 장희빈의 죽은 아들은 민씨나 최씨 등이 궁에 없을 때였고 서인들도 물러난 상태였으니 뒤집어 씌우려 해도 불가능했었음. 하지만 그 반대로 최씨는 장씨가 자신과 아이들을 죽이려고 든다고 숙종에게 수차례 고변했고, 실제로 아이 둘이 죽어 숙종이 장씨를 멀리하게 만들었음.

 

3. 인현왕후가 장씨를 견제할 목적으로 후궁으로 들여 전폭적인 지지를 했던 영빈 김씨. 하지만 김씨는 숙종의 사랑도 얻지 못했고, 자식도 얻지 못했으며, 나중엔 인현왕후와 함께 폐서인되어 출궁 당하는 시련을 겪었음. 일설에는 인현왕후보다 먼저 쫓겨났다는 설이 있음. 게다가 인현왕후가 복권되어 다시 입궁할 때도, 같이 돌아온게 아니라 인현왕후의 간청으로 뒤에 돌아왔다고 함. 그 뿐만이 아님. 단종 복위 기념으로 숙종이 후궁들 품계를 올려주었는데 명빈 박씨와 숙빈 최씨, 그리고 전 해에 갓 후궁 첩지를 받은 소의 유씨도 이 혜택을 받았지만 영빈 김씨는 받지 못함. 그래도 1702년에 다시 숙종이 후궁들 첩지를 올려줬는데 이땐 따돌림 당하지 않고 진봉되어 빈 첩지를 받음. 숙종이 승하할 때까지 계속 궁에 남아 있을 수 있었지만 숙종이 정말 안 좋아 했었던 같음. (집안을 패가망신 시켰는데 미안함도 없었는 듯하고 양심의 가책도 없었는 듯. 오히려 경종이 그녀가 출궁할 때 대신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큰 집을 지어줬다고 함) 영조가 어머니라고 부르며 엄청 따랐다고 함. 추가로 인현왕후가 진봉을 거듭해 희빈 장씨와 비교시킨 귀인 김씨도 1686년 이후로 기록에서 사라진 것으로 봐선 죽었거나 쫓겨나 다시 못 돌아왔을 가능성이 있음.

 

4. 명성왕후가 복창군 복평군을 죽여야 한다고 패악까지 부리며 주장했던 이유가 종친이 감히 왕의 여인인 궁녀와 간통했다는 이유였음. 그런데, 영조의 후궁인 정빈 이씨(효장세자의 생모)와 영빈 이씨(사도세자의 생모) 모두 숙종 때와 경종 때의 궁녀였고, 정빈 이씨는 경종이 세자였을 때 동궁전 나인이었고 영빈 이씨는 경종의 3년상이 끝난 후 3개월 만에 영조의 후궁이 되었는데 이미 화평옹주를 낳은 상태. 덤으로 경종의 계비인 선의왕후 어씨가 죽고 얼마 뒤에 영조가 영빈에게 정1품 빈 첩지를 내림. 즉, 영조는 경종에게 형제의 의리도 없었고 군신로서로의 의리도 전혀 없었다는 뜻.

 

년도 숫자까지 맞춰보면 더 재미있어짐. 효장세자의 출생년도와 연령군의 사망년도가 일치. 동궁전의 궁녀(형의 여자)를, 그것도 이미 잠저로 나가 살던 영조가 동궁에 잠입했건 궁밖으로 끌어냈건 아무튼 정을 통해 아이까지 만들었는데 숙종의 마음이 어땠을까? 자식사랑이 끔찍했던 숙종이었으니 영조를 차마 벌하진 못해도 정도 떨어지고 불신감도 생겼을 터. 이때 숙종 옆엔 경종과도 우애가 깊고 병든 아비의 변까지 맛볼 정도로 효성이 깊어 숙종이 더없이 사랑했던 연령군이 있었으니... (뭐, 이건 제 개인적인 의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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