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연혁
남면은 삼한시대에는 구사오단국, 백제시대에는 구사진혜현, 통일신라시대에는 진원현 지역으로 갑성군의 속현이었다. 1018년(고려 현종 9) 나주목에 예속되었다. 1600년(선조 33)에 장성현에 편입된 지역이다.
1789년 강행한《호구총수》에는 남일면은 17개마을 287호에 1,030인이 살고 있으며, 남이면은 13개마을 329호에 1,080인이 살았다고 하였다. 따라서 30개마을 616호에 2,110인이 살았음을 알 수 있다.
1910년 9월 30일 칙령 제357호로 [조선총독부 지방관제]에 의하여 군에 면을 두고, 면에 면장을 두되 면장은 군수의 지휘 감독을 받아 면행정사무를 처리하도록 되어 면사무소가 설치되었다. 이때의 마을은 42개 마을이었다
남일면은 현 분향리(분향, 죽분, 궁산, 병계), 삼태리(동태, 중태, 서태, 치촌, 회산), 월곡리(월곡, 신촌, 금리, 덕촌, 평촌일부), 월정리(불정, 월산, 월계, 신아산, 만동, 장성안청) 지역이었고 이때의 소재지는 분향리 69-1번지(죽분) 이었다.
남이면은 녹진리(도림, 녹진, 마산), 덕성리(회룡, 신안, 영산, 덕성, 자은, 풍산), 마령리(서촌, 내마, 외마, 선창, 선평, 백운, 반계, 시정), 행정리(검정, 행정, 송정), 평산리(평산, 장산, 옹점, 신평) 지역이었고 이때의 소재지는 평산리 534번지(장평)였다.
1914년 행정구역개편으로 남일면과 남이면, 내동면의 일부(시목, 영동), 광주군 삼소지면 일부(저작) 지역을 합병하여 남면이라 하고, 9개 법정리에 44개 마을이 되었다. 면소재지는 평산리 남이면 사무소를 사용하였다. 1920년에 사무소를 분향리 445번지(분향)로 옮기었다. 1930년에 다시 분향리 69-1번지(분향)로 옮겼다. 1995년에 분향리 334번지 현재 사무실로 옮겼다.
현재 9개 법정리 41개 자연마을에 1,618세대 4,242인이 살고 있다.
(2) 분향리(芬香里)
분향리는 본래 남일면의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죽분리와 궁산리, 병계리, 내동면의 영동, 시목리의 일부를 병합하여 분향리라 해서 남면에 편입되었다. 기존마을인 궁산리와 병계리·영동은 없어지고 새로 분향에서 매향·시목에서 마흥·죽분에서 중앙이 각각 분리하였다.
현 행정이동으로 분향 1리는 분향·매향, 분향 2리는 죽분, 분향 3리는 시목·마흥 분향4리는 중앙으로 하고 있다.
ㅇ 분향(芬香)
분향마을 성촌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처음에 장수황씨가 터를 잡고 집성촌을 이루고 살았고, 다음에 해주정씨가 들어왔다 하며, 1710년경에 영양천씨인 천귀흥(1688-1746)이 우복동에 터를 잡아 정착하였다고 한다. 뒤에 경주최씨 수원백씨 밀양손씨 금성오씨 이천서씨 등이 차례로 들어왔다. 마을형성은 현재 영양천씨 27호, 김해김씨 7호, 광산김씨 5호, 순흥안씨 금성오씨 4호 진주강씨 하동정씨 3호, 전주이씨 경주최씨 2호, 광주노씨 교하노씨 황주변씨 연안차씨 문화유씨 등 21개 성씨가 총 121호에 342인이 살고 있다. 그중 매향에 43호가 살고 있다.
마을형국이 매화낙지형국으로 매화향기를 뜻해 분향이라 하였다고 한다. 1960년대에 학교 앞 새터를 매향(梅香)이라 하여 분향에서 분리하였으나 1970년대에 분향으로 다시 합병하였으나 지금도 매향이라 부른다.
1920년에 면사무소가 마을로 옮겨와 면소재지 마을이 되고, 1934년 분향초등학교가 설립되었으며, 1985년 남면보건지소 설립되었다. 1995년에 현재 면사무소로 옮겨갔다.
인물로는 남면장을 지낸 천세욱 천익준 천광욱 천일창과 관재국 총무과장 천명수, 장성북중 교장 천세봉, 초등학교장 천명엽, 동인방사선과 원장 천명철, 공군중령 천왕봉, 국방부 병무국장 백형채, 호남대교수 천병권 등이 이 마을 출신이다.
문화유적으로는 향포정 천효자(복철)망곡단비, 밀양박씨 효열각, 면장 천공세 욱공덕불망비 등이 있다.
ㅇ 죽분(竹芬)
죽분마을의 성촌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마을 위쪽에 내상(내동)리가 먼저 생긴 마을로 마을 앞에 수구막이 나무들이 있어 마을을 가리고 있었는데 중년에 시주차 들린 스님을 박대하여 스님이 이 마을은 앞에 있는 나무를 배면 마을이 더 흥할 것이라 하였다. 이 말에 수구막이 나무를 베어 버렸다 한다. 이후 마을이 폐촌이 되고 아래쪽에 마을이 형성되어 죽분이 되었다고 한다. 1600년대에 남평문씨와 동복오씨가 처음으로 들어 왔으며 그후에 전주이씨가 들어 왔다. 마을형성은 전주이씨 13호, 장수황씨 광산김씨 8호, 동복오씨 김해김씨 조양임씨 6호, 남평문씨 5호, 평택임씨 4호, 밀양박씨·밀양손씨 함평이씨·고령신씨·부안김씨 3호, 함양박씨 진주강씨 이천서씨 2호, 연안차씨 장흥고씨 해주최씨 진주하씨 인동장씨 등이 111호에 339인이 살고 있다.
마을 형국이 조리형국으로 죽산죽하초두로혈(竹山竹下草頭露穴)이라 해서 처음에는 죽분(竹墳)이라 하였는데 1900년 이후에 죽분(竹芬)으로 글자가 바뀌었다.
1910년 면제 실시에 따라 남일 면사무소가 마을에 있었으나 1914년에 남이면에 합병되어 평산리로 옮겼다.
인물로는 남면장 신선우 황금주, 농산물검사소장 강창록 황의선, 농어촌진흥공사 강세록, 농림부 기좌 이명모, 전남임업시험장장 이문환, 육군중령 황복연, 중앙인사관리위원회 황기연, 육군 소장 백종렬, 천원역장 오치상, 현대건설부장 차상준, 목사 남정규 임재환 최원수 손경수 최룡, 남면노인회장 이춘환 등이다.
문화유적으로는 황의선 송덕비와 마을 앞에 입석 2개가 있다.
ㅇ 시목(枾木)
시목은 500여년 전에 밀양박씨가 터를 잡아 살았다고 한다. 뒤에 수원백씨와 능성구씨가 다음으로 한양조씨와 곡부공씨가 차례로 들어왔다. 마을형성은 곡부공씨 20호, 경주정씨 6호, 광산김씨·울산김씨 5호, 한양조씨 4호, 인동장씨·밀양박씨 3호, 김해김씨·안동권씨·진주강씨·청송심씨 2호, 능성구씨·동래정씨·의령남씨·수원백씨·이천서씨·남양홍씨 등이 89호에 213명이 살고 있다.
본래의 마을 이름이 감나무정(쟁)이 이었다. 이는 마을 가운데 큰 감나무가 있고 주위에 감나무가 많았다고 한다. 따라서 순수한 우리말로 감나무정이를 한자로 쓰면서 시목(枾木)으로 표기한 것이다.
인물로는 남면장 공영진, 정보통신부 과장 공연창, 현대건설부사장 공영호, 초등학교장 조흥조, KBS 금산송신소장 조정윤, 군의원 심동섭, 남면농협조합장 공양진 등이 이 마을 출신이다.
ㅇ 마흥(馬興)
이 마을은 본래 시목리의 6반으로 있던 마을이 1958년 시목에서 분리된 마을이다. 1934년 전주이씨(이원욱)가 처음으로 거주하기 시작하여 1950년 이후에 청주한씨·밀양박씨·영양천씨·서흥김씨·함안조씨·순흥안씨 등이 차례로 들어와 마을이 형성되었다.
마을형성은 전주이씨 4호, 청주한씨·순흥안씨·밀양박씨·서흥김씨·함양박씨 2호, 영양천씨 등이 22호에 87인이 살고 있다.
마을 형국은 거무형국이라 하며, 마을 이름을 마흥이라 한 것은 마을 뒷산이 천마봉이고 서쪽 능선이 마산 마령으로 뻗어 있어 말이 일어서야 마을이 좋다고 하여 마흥이라 하였다 한다.
문화유적으로 옛날에 목호원(牧虎院)터가 마을 위 저수지 제방근처에 있었다 한다.
ㅇ 중앙(中央)
이 마을은 본래 죽분리에 속했던 마을로 1965년에 죽분에서 분리된 마을이다. 1910년대에 밀양박씨(박도주)가 들어왔으며 1920년대에 신선우가 주조장을 개설하면서 밀양손씨 경주정씨가 차례로 들어와 마을이 형성되었다. 그후 1942년에 남면지서가 들어오고, 1946년에 분향교회 1963년에 남면농업협동조합 1965년에 남면우체국 1966년에 농촌지도소남부지소 1970년에 장성남중학교 1995년에 남면사무소가 들어오게 되었다. 이로써 남면의 소재지 마을이 되었다. 마을형성은 경주이씨 경주정씨 5호, 김해김씨 3호, 전주이씨 진주강씨 연안차씨 고령신씨 장흥고씨 2호 등 66호에 130인이 살고 있다.
인물로는 국회의원 이국헌, 남면단위농협장 정우용, 광주지방법원 계장 신용수 등이 이 마을 출신이다.
문화유적으로 면장 임면규 시혜비와 송은 이승비 선생 공적비, 정순조 충의비가 있다.
(3) 녹진리(鹿津里)
녹진리는 본래 남이면의 지역으로 녹진동( 眞洞)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마산리 도림리와 내동면의 영동리 일부 지역을 병합하여 녹진리라 해서 남면에 편입되었다. 기존마을인 도림리는 녹진 서북쪽에 있었는데 없어지고, 신흥마을은 본래 마산이었는데 1958년 분리되면서 신흥이라 하였다.
현 행정이동으로 녹진 1리는 마산·신흥, 녹진 2리는 녹진으로 하고 있다.
ㅇ 마산(馬山)]
마산은 400여년 전에 영광김씨가 터를잡아 살았다 한다. 뒤에 곡부공씨와 금성범씨·진주정씨가 들어왔다. 현재 마을형성은 곡부공씨 13호, 밀양박씨 7호, 청송심씨 7호, 금성범씨 6호, 영광김씨·진주정씨·동래정씨 3호, 광산김씨 2호 등 59호에 160인이 살고 있다.
마을형국이 누워 있는 말형국이라하여 마산이라 하였다 한다. 1789년 간행한《호구총수》에 제내리(堤內里)가 뒤에 마산으로 변한 것으로 보인다. 일설에는 마을 위에 마장 터가 있는데 이로 인해 마산이라 하였다는 설도 있다.
인물로는 공길환(면장), 육군 소령 심상초, 전국기술자협회장 심상채, 이 마을 출신이다.
문화유적으로 효자공필장정려비각, 효자공도기지비, 효자공도형지비 등이 있다,
ㅇ 신흥(新興)
신흥은 본래 마산마을에 속한 마을로 1958년에 분리되어 새로 생긴 마을이라 하여 새터라 하였는데 한자 표기로 신흥이라 하였다. 1850년경에 처음으로 금성범씨가 터를 잡아 들어오고 뒤에 평택임씨·여양진씨·진주정씨·김해김씨·곡부공씨·전주이씨 등이 들어와 17호에 28인이 살고 있다.
1973년 호남고속도로 개통시 마을의 일부가 편입되어 호수가 줄어들었다. 군도가 마을 뒤로 개통되어 교통이 편리해졌다.
인물로는 한국통신 여수전화국장 임한규, 세무서과장 임한풍이 이 마을 출신이다.
ㅇ 녹진(鹿津)
녹진은 500여년 전에 장성서씨와 곡부공씨가 터를 잡고 살았는데 뒤에 의성김씨·밀양박씨·김해김씨·보성선씨·진주강씨 등이 차례로 들어와 마을이 점차 커졌다. 마을형성은 의성김씨 20호, 보성선씨 6호, 김해김씨·밀양박씨 5호, 진주강씨·하동정씨 2호 등 59호에 124인이 살고 있다.
풍수지리설에 마을 뒷편이 사슴형국(臥鹿形)이라 하여 녹동이라 하였으며, 마을 아랫편은 옛날에 바다 나루터가 있었다 하여 조동(釣洞)이라 하였다. 두 곳을 합하여 윗 마을의 녹자와 아래 마을의 조자를 나루터진자로 고쳐 녹진이라 하였다 한다. 그러나 1789년 간행한《호구총수》에는 녹진동( 眞洞)으로 표기되어 있고, 1912년부터 녹진(鹿津)으로 기록하고 있다.
인물로는 효자 공필장, 의병장 김봉수·김익중·김봉훈·박준기, 3.1독립운동에 참여한 선화룡·선광태·김병선, 남면 면의원 선태식, 장성군 축협장 선재준, 전남교육감 김낙운, 장성교육장 김종련, 목포대 서무과장 김낙영, 판사 선재성, 외교관 김두영, 경찰청 경감 김형열 , 삼도해운 회장 박국일, 협진실업 대표이사 선광호, 진선미화학 대표 김갑주, 심영섭(면장), 심동섭(군의원) 등이 이 마을 출신이다.
(4) 덕성리(德星里)
본래 남이면의 지역으로 둔덕에 있으므로 덕성이라 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회룡리, 신안리, 영산리, 자은리, 풍산리 지역을 병합하여 덕성리라 해서 남면에 편입되었다. 그러나 1789년 간행된《호구총수》에는 덕성리, 자은곡리, 회룡동이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신안리와 영산리는 새로 생기고 풍산리는 자은곡리에서 분리되었다. 영산리는 일제 말에 연산리로 바뀌고, 자은과 풍산은 합하여 자풍이라 한다.
현 행정이동은 덕성1리는 회룡·신안이고, 덕성 2리는 자은·풍산, 덕성 3리는 덕성·연산이다.
ㅇ 회룡(回龍)
회룡은 300여년 전에 청송심씨가 터를 잡아 들어 왔다고 한다. 뒤에 양천허씨·평택임씨가 들어오고, 아래뜸(우산)은 100여년 전에 수원백씨가 들어 왔다고 한다. 현재 마을형성은 양천허씨 7호, 수원백씨 5호, 경주정씨·밀양박씨·의성김씨 4호, 청송심씨·순천박씨 2호 등 32호에 97인이 살고 있다.
마을 형국이 회룡고조형국으로 회룡이라 하였다 한다. 그러나 1789년 간행한《호구총수》에는 회룡동(會龍洞)으로 기록하고 있다. 덕성 1리로 회룡과 신안을 합하여 회신이라 부르기도 한다.
인물로는 광주시 서동동장 김복식, 남면서교장 김현수, 광주지검 과장 김현묵, 원주경찰서장 범희천, 국회사무처 서기관 임동섭, 숭실대교수 정휘훈 등이 이 마을 출신이다.
ㅇ 신안(新安)
신안은 150여년 전에 김해김씨와 울산김씨가 들어와 살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한다. 그 뒤 청송심씨·광산김씨가 차례로 들어왔다. 현재 마을형성은 김해김씨·청송심씨 4호, 광산김씨 3호, 황주변씨·광주정씨 등 14호에 30인이 살고 있다.
마을의 형국은 조리형국이라 하며, 새로 생긴 마을이라 하여 신안이라 하였다 한다.
인물로는 남면장 김현남, 고려대학교 사범대학 교수 김성수, 서울서부경찰서과장 김재영 등이 이 마을 출신이다.
ㅇ 자풍(自豊)
자풍은 성촌연대는 알 수 없으나 700여년전 이씨터이었다 한다. 그 뒤 봉산이씨와 금성오씨·수원백씨·해주최씨가 차례로 들어왔다고 한다. 현재 마을형성은 금성오씨 12호, 김해김씨 11호, 수원백씨 5호, 밀양박씨 4호, 광산김씨·천안전씨·해주오씨·한양조씨·하동정씨·진주강씨·장흥고씨 2호 등 55호에 174인이 살고 있다.
마을 형국이 주머니 형국으로 자랑곡(自囊谷)이라 하였는데 1789년 간행한《호구총수》에는 자은곡(自隱谷)리로 기록하고 있다. 1912년에 자은과 풍산(豊山)으로 분리되었다가 1980년대에 자풍으로 통합되었다.
인물로는 남면 면의원 김팔수, 남면국민회장 조형원, 육군대령 오현석, 조선대학교 교수 오수열 등이 이 마을 출신이다.
ㅇ 덕성(德星)
덕성은 500여년 전에 청송심씨가 터를 잡아 자작일촌을 이루고 살았는데 뒤에 남양방씨·달성배씨·밀양박씨가 차례로 들어왔다. 마을형성은 청송심씨 13호, 밀양박씨·달성배씨 2호, 남양방씨 등 26호에 71인이 살고 있다.
마을 이름을 본래 덕성(德成)이라 하였다 한다. 그러나 1789년 간행한《호구총수》에는 덕성(德星)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는 마을의 주봉이 목성(木星)이라 하여 별성자로 하였다 한다.
인물로는 남면장 심상원, 해병 대령 심해택, 장성산림조합장 심상록, 국정원 과장 심상희, 전북대학교 교수 심상욱, 육군 소령 심상필 등이 이 마을 출신이다.
문화유적으로 1924년에 건립한 전면 2칸 측면 2칸의 영풍정이 있다.
ο 연산(連山)
연산은 300여년 전에 김해김씨가 터를 잡아 마을이 형성되었다 한다. 뒤에 나주임씨·청송심씨가 차례로 들어왔다. 마을형성은 청송심씨 11호, 김해김씨 4호, 나주임씨·광산김씨 3호, 밀양박씨 등 35호에 90인이 살고 있다.
마을 형국은 와우형국이라 한다. 마을 이름은 본래 영산(永山)이라 하였는데 일제말기에 우연히 연산을 바뀌어졌다.
인물로는 남면 면의원 심상무, 대성초등학교장 심상문, 순천대학교 교수 심명섭 등이 있다.
(5) 마령리(馬嶺里)
본래 남이면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서촌리·내마리·외마리·선창리·선평리·백운리·반계리·시정리 지역을 병합하여 마령리라 해서 남면에 편입되었다. 그러나 1789년 간행한《호구총수》에는 흑암리, 고마산리, 내마량리, 외마량리가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1914년 이전에 흑암리(검바우 또는 봉하촌)는 시정 앞 잔등넘어 있었던 마을로 없어 졌고, 고마산리도 선창 앞 안산에 있었던 마을로 없어졌다. 내마량리는 내마리가 되고, 외마량리는 외마리가 되었다. 그리고 서촌리·선창리·선평리·백운리·반계리·시정리가 새로 생겼다. 그중 반계리는 1960년경에 없어졌다.
현 행정이동은 마령 1리는 서촌·내마·외마이고, 마령 2리는 선창·선평, 마령 3리는 백운·시정이다.
ㅇ 서촌(西村)
서촌은 500여년 전에 금성오씨가 살기 시작하였다 한다. 뒤에 김해김씨와 탐진최씨가 들어왔다. 마을형성은 탐진최씨 10호, 김해김씨 7호, 금성오씨·광산김씨·천안전씨 2호, 밀양박씨 등 26호에 72인이 살고 있다.
마을 형국은 복치(伏雉)형국이라 한다. 본래 자은(자랑곡)마을과 같은 마을인데 1914년 세부측량시 법정리 경계가 마을 능선으로 확정됨에 따라 마령리로 편입되면서 자은마을 서쪽에 위치하고 있어 서촌이라 하였다 한다.
인물로는 남면 예비군중대장 김선기, 육군대위 김호남, 남면농업협동조합장 김호영 등이 이 마을 출신이다.
ㅇ 내마(內馬)
내마는 600여년 전에 청송심씨인 심계년이 이곳에 은거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어 청송심씨 자작일촌을 이루고 살았다. 1900년대에 나주오씨와 함안주씨·여산송씨·청안이씨·장흥고씨 등이 차례로 들어 왔다. 마을 형성은 장흥고씨 6호, 행주기씨·청안이씨·김해김씨 2호, 청송심씨 등 19호에 33인이 살고 있다.
마을 뒤 청양산이 말형국이라 하고 마을 앞 말바위가 있어 안쪽을 내마 바깥쪽을 외마라 1912년부터 기록하고 있다. 원래 마을 이름은 마랭이(몰랭이) 인데 1789년 간행한《호구총수》에는 내마량리(內馬良里)로 표기하고 있다.
인물로는 감찰어사 심연, 좌승지 심종하, 동복현감 심발, 남면장 기세풍, 장성군의회의원 심동섭, 의학박사 심의철, 초등학교장 기영환, 공군소령 이용산 등이 이 마을 출신이다.
문화유적으로는 심덕부를 주향하고 심계년과 심연을 배향한 양계사가 있다.
ㅇ 외마(外馬)
외마는 400여년 전에 청송심씨가 터를 잡고 살았으며, 1870년경에 청주한씨가 들어왔고 뒤에 밀양박씨·광주정씨가 들어왔다. 마을형성은 청송심씨 6호, 밀양박씨 2호, 광주정씨 등 11호에 24인이 살고 있다.
마을 뒤 청양산이 말형국이고 마을 북쪽에 내마 앞의 말바우 밖에 있어 1912년부터 외마로 기록하고 있다. 원래 마을 이름은 외마량(外馬良)으로 1789년 간행한《호구총수》에 기록하고 있다. 내마와 같이 안 밖으로 형성된 마을이다.
인물로는 단국대학교 교수 심경섭, 강남세무서 직세과장 심정근, 순천대교수 심중선이 이 마을 출신이다.
문화유적으로는 마을 서쪽 통현산에 통현사지가 남아 있다.
ㅇ 선창(船昌)
선창은 200여년 전에 청송심씨인 심홍권이 터를 잡아 들어왔다 한다. 뒤에 상산김씨가 들어오고, 다음에 밀양박씨·양성이씨·수원백씨가 차례로 들어왔다. 마을형성은 상산김씨 3호, 청송심씨 2호, 양성이씨·수원백씨·밀양박씨·김해김씨 등 11호에 30인이 살고 있다.
마을 형국이 배형국이고, 옛날에 이곳이 바다가로 배가 드나드는 선창이 있었다하여 선창이라 하였다 한다. 마을 앞에 고마산리(叩馬山里, 1789년 기록)가 있었는데 1912년 기록에 없어지고 선창, 선평이 새로 생겨났다. 고마산리는 150여년 전에 괴질이 돌아 폐촌이 되었다고 하나 선창과 선평이 고마산리에서 새로 생겨 분리된 마을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인물로는 참봉 심붕지, 심능문, 장성군유도회장 심경택, 전남잠업검사소장 심완택, 송원대학 교무처장 심상호, 광주고검 고검장 심상명, 목사 심덕원, 주택은행 대전지점장 김상욱 등이 이 마을 출신이다.
ㅇ 선평(船坪)
선평은 200여년 전에 청송심씨가 터를 잡아 형성된 마을로 뒤에 밀양박씨·상산김씨·광산김씨가 차례로 들어왔다. 마을형성은 청송심씨 9호, 장흥고씨 3호, 광산김씨 2호, 상산김씨·청안이씨 등 24호에 70인이 살고 있다.
마을 형국이 배형국이라 하여 마을 안에 샘을 파지 않고 마을 밖에 식수를 이용하고 있다. 옛날에 이곳이 바닷가로 배가 드나드는 선창의 언덕백이라 하여 선평이라 하였다 한다. 마을 앞에 고마산리(叩馬山里, 1789년 기록)가 있었는데 1912년 기록에 없어지고 선평 선창이 새로 생겨 낳다. 고마산리는 150여년 전에 괴질이 돌아 폐촌이 되었다고 하나 선창과 선평이 고마산리에서 새로 생겨 분리된 마을로 보아야 할 것이다.
1947년 남면서초등학교가 이 마을에 세워졌으나 1998년 학생수 감소로 폐교되었다.
인물로는 장성향교 전교 심능구, 남면장 심의현, 전남임업시험장장 심형택, 육군 소령 심영일, 월평초등학교장 이영휴, 한국전력공사 부장 심광일, 동양콤비락사장 김만중 등이 이 마을 출신이다.
ㅇ 백운(白雲)
백운은 300여년 전에 금성오씨가 터를 잡아 살았다고 하다. 뒤에 하남정씨가 들어오고, 이어 제주양씨·여양진씨·김해김씨가 차례로 들어왔다. 마을형성은 여양진씨·제주양씨 3호, 김해김씨·광산김씨 청송심씨 2호, 금성오씨·하남정씨·전주이씨 등 27호에 69인이 살고 있다.
마을 형국이 운중반월형이라 하여 백운동이라 하였다 한다. 1938년 분향공립심상소학교 부설 간이학교가 개설되었으나 1947년 선평으로 옮기었고, 1963년 청양리농업협동조합을 신설하고 창고와 사무실을 건립하였다. 1972년 면단위로 합병 남면농업협동조합 개설로 분점이 되었다. 1985년에 마령보건진료소가 이 마을에 개설되었다. 수리시설로 19441945년에 걸쳐 백운제가 시설되므로 들가운데 있던 반계(磻溪)마을은 수해의 위험으로 시정과 선평으로 이주하기 시작하여 1960년대에 완전히 없어졌다.
문화유적으로는 마을 뒤 능선에 8기의 고인돌이 있다.
ㅇ 시정(枾亭)
시정은 300여년 전에 청송심씨와 밀양박씨가 터를 잡아 살았다고 한다. 뒤에 여양진씨·행주기씨·김해김씨가 차례로 들어왔다. 마을형성은 청송심씨·김해김씨 7호, 행주기씨·여양진씨·밀양박씨 등 29호에 70인이 살고 있다.
원래 마을이 지금의 남서쪽에 형성되었는데 100여년 전에 이곳으로 옮겨왔다고 한다. 따라서 《호구총수》에 흑암동(검바우 또는 봉하촌)이 시정의 남서쪽에 있었는데 1912년에 시정이 새로 생기고 흑암동이 없어졌다. 이는 흑암동이 없어지면서 시정으로 편입된 것으로 본다. 본래 마을 이름은 감나무가 많아 감남징이라 하였는데 한자로 표기하면서 시정으로 되었다.
인물로는 남면장 박진우가 이 마을 출신이다.
문화유적으로 흑암동과 봉하촌 지역에 원삼국시대의 유물산포지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