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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서(소선지서)

미가서 서론 ( 1 )

작성자jung8h|작성시간25.01.04|조회수29 목록 댓글 0

미가서 서론 ( 1 )                                                                                                                

                                                                                                                                                        

 

미 가 서

 

 

서 론

 

 

1. 명 칭

 

미가서(The Book of Micah)라는 명칭은 선지자 자신의 이름을 따라 붙여 졌다. 

 

'미가'는 미가야의 약자이다. 히브리 성경의 예레미야 26 18에는 완전한 이름인 미가야가 나온다. 

 

이 이름의 원래의 형태는 미가야후인데, 이것은 "누가 여호와와 같은가?"라는 뜻이다. 

 

이러한 형태의 이름은 히브리 성서의 역대기하 17 7에서 한 방백의 이름으로 나온다. 

 

'야후'(Yahu)는 이스라엘 하나님의 이름을 나타내는 고대형이며, 흔히 "주"로 번역된다.

 

 6: 3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전능의 하나님으로 나타났으나 나의 이름을 여호와로는 그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였고

 

 83: 18 여호와라 이름하신 주만 온 세계의 지존자로 알게 하소서.

 

 12: 2 – 보라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내가 신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심이라.

 

 26: 4 너희는 여호와를 영원히 신뢰하라 주 여호와는 영원한 반석이심이로다.

 

 선지자의 이름은 중요하다. 하나님이나 주와 관련된 이름들은 그 선지자의 태도와 충성을 나타내는, 미가의 경우에는 그것이 거짓 선지자와 죄인들에 대한 도전의 표시였다.

 

본서의 위치는 12 소선지서 중, 히브리어 성서에서는 여섯 번째, 요나서와 나훔서 사이에 두어져 있고, 그리스어 역 구약성서(칠십인 역)에 있어서는 세 번째, 아모스서와 요엘서의 사이에 위치해 있다.

 


2. 저 자

 

미가는 주전 8세기 무렵 책을 기록했던 위대한 4명의 선지자들 중 맨 나중에 활동했던 선지자이다. 

 

그는 요담(주전 742-735)과 아하스(주전 735-715), 히스기야(주전 715-687) 시대에 자신의 선지자 임무를 수행하였다(1:1). 

 

그의 책에서는 아모스의 사상이 두드러지게 반영되어 있다. 

 

실제로 미가서는 아모스서나 호세아서 그리고 이사야에서 볼 수 있는 몇 가지 강조점들이 그 나름대로의 독특한 방식으로 언급되고 있다.

 

미가서 1: 1에서 그는 [모레셋 사람]으로 증언되었다.

 

그는[모레셋 가드](1: 14)의 주민으로서, 예루살렘의 약 40km 서남의 블레셋과 유다 산악지와의 중간의 낮은 구릉지대, 블레셋의 경계에 가까운 소촌 출신이다.

 

그의 이름의 뜻은 [누가 여호와 같으시랴]인데, [미카예후- Why]k;ymi (mikayehu)의 단축형이다.

 

삿 17: 1, 4 -  에브라임 산지에 미가라 이름하는 사람이 있더니 4  미가가 그 은을 그의 어머니에게 도로 주었으므로 어머니가 그 은 이백을 가져다 은장색에게 주어 한 신상을 새기고 한 신상을 부어 만들었더니 그 신상이 미가의 집에 있더라.

 

그는 유다 열왕 요람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렘 26: 18,19참조)에 활동하고 있다(1: 1).

 

렘 26: 18-19 - 18  유다의 왕 히스기야 시대에 모레셋 사람 미가가 유다의 모든 백성에게 예언하여 이르되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셨느니라시온은 밭같이 경작지가 될 것이며 예루살렘은 돌무더기가 되며 이 성전의 산은 산당의 숲과 같이 되리라 하였으나 19  유다의 왕 히스기야와 모든 유다가 그를 죽였느냐히스기야가 여호와를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선언한 재앙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지 아니하셨느냐우리가 이같이 하면 우리의 생명을 스스로 심히 해롭게 하는 것이니라.

 

그는 사마리아의 멸망을 예언하고(1: 6), 렘 26: 18-19의 언급에 의해 히스기야 왕의 시대에도 활동하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으므로 늦어도 기원전 730년 후반에서 690년대에 있던 선지자로 여겨진다.

 

따라서 미가는 아모스 후 그리고 호세이의 후기, 이사야와는 거의 동시대의 선지자이다.

 

사 1: 1 - 유다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에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관하여 본 계시라.

 

호 1: 1 -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가 이어 유다 왕이 된 시대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이 이스라엘 왕이 된 시대에 브에리의 아들 호세아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라.

 

암 1: 1 - 유다  웃시야의 시대 이스라엘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의 시대 지진 전 이년에 드고아 목자 중 아모스가 이스라엘에 대하여 이상으로 받은 말씀이라.

 

아모스, 호세아와 한가지로 북왕국 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의 멸망을 예언하고, 또 아모스처럼(북왕국뿐 아니라 남왕국 유다에 있어서도), 저변에 사는 민중에 대한 압박 및 사회 부정을 규탄했다.

 

이사야가 상류계급, 지도자층의 외정면(外政面)에 대해 예언한 것에 대해, 미가는 지도자의 내정의 부패, 민중의 종교 면에 대해 예언했다고 할 수 있다.

 

 

3. 시대적 배경

 

미가서는 선지자 미가가 농부 출신이었음을 암시해 주고 있다. 무엇보다도 그는 압제 받는 자와 세력이 없는 자 그리고 특별히 냉혹한 대지주들에게 착취당하고 있는 가난한 농부들 편에 서서 그들을 옹호하고 나섰던 용감한 대변자였다. 

 

그는 당시 사회 곳곳에 독버섯처럼 돋아나 있던 경제적인 부패상을 바라보면서 가슴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금할 수 없었다. 

 

더욱이 그의 울분을 터뜨리게 한 것은 나라 안의 암담한 종교적 상황이었다. 각종 종교 "의식"들이 성대히 거행되었지만 기본적인 "윤리"는 완전히 질식 상태에 있었다. 

 

제사장과 선지자, 재판장, 상인은 모두 이권을 얻는 일에만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 

 

미가는 이러한 상황들을 보면서 그대로 앉아 있을 수 없었다. 

 

그는 분연히 일어나 솔직하면서도 예리한 공격의 화살을 그들의 가슴을 향해 사정없이 쏘았으며, 아무리 훌륭한 종교 의식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이 도덕적으로 때묻은 손을 가지고 드려질 때에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고 강조했다. 

 

그가 예루살렘과 그 성전에 대해 말했던 부분은 동시대에 활동했던 선지자의 말과는 약간 다른 듯한 느낌이 있다. 

 

이사야는 시온이 앞으로 결코 무너지지 않을 것이며 무너질 수도 없다고 선포했지만, 미가는 시온이 "밭같이 갊을 당하게 될 것이다"(3: 12)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본질적인 내용에 있어서는 두 선지자가 동일한 것을 말했다고 볼 수 있다. 이사야는 영원한 예루살렘을 미가는 그 당시의 현실적인 예루살렘을 각각 염두에 두고 말했기 때문이다. 

 

물론 미가 선지자의 메시지에는 장차 임하게 될 비극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기는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그(하나님)와 이스라엘을 언약 관계로 굳게 연결시킨 확고한 사랑에 대해서도 역시 언급했기 때문이다. 

 

미가서의 히브리어 원본은 잘 보존되어 있지 않을뿐더러 호세아서에 못지않게 큰 난제들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본문의 의미를 정확히 이해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미가와 이사야는 주로 유다에서 활동했지만, 하나님의 심판이 북왕국에도 역시 임하게 될 것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미가가 히스기야 왕의 통치 기간 때 예언했다는 것은 예레미야 26 18, 19을 볼 때 분명하다. 

 

자유주의 비평가들은 이 책을 단순히 인간이 만들어 낸 것으로 생각한다. 

 

그들은 서로 다른 시기에 선포된 메시지 가운데 일부가 전해졌다는 사실과 그가 성령의 감화를 받았다는 사실을 잊은 체, 설명 부분이나 삽입 구절이 포로시대 이후에 기록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예언의 초자연적 능력을 부인하며 특히 앗수르가 당시의 적대 세력임에도 불구하고, 4장 10에 바벨론이 나오는 것을 반박한다. 

 

1-5의 배열과 범위는 이사야의 예언들과 비슷하다. 1-3에서 미가는 임박한 죄의 심판을 알리고, 4, 5에서는 이스라엘이 용서받고 회복됨으로 위로받게 될 것이라고 선포한다. 

 

이 때문에 자유주의자들은 4과 5을 포로시대 이후의 제 2 미가서로 본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 책 전체가 이사야와 동시대에 예언한 미가의 작품이라고 본다. 

 


4. 역사적 배경

 

이 시대의 앗수르 왕들은 디글랏빌레셀 3세(주전 745-727), 살만에셀 5세 (주전 727-722), 사르곤 2세(주전 722-705), 산헤립(주전 705-681)이 있다. 

 

이 시대의 국제정세로 말하면 주전 722년에 사마리아를 함락시킨 앗수르군은, 유다와의 동맹을 무시하고 남왕국을 침략하기 시작하여, 유다는 위기에 빠졌다.

 

앗수르 왕 사르곤 2세는 애굽을 후원자로 삼은 아스돗을 중심으로 하여 반 앗수르 동맹을 깨치고, 아스돗을 점령했다(주전 711년).

 

다음 왕 산헤립(주전 705-681)은, 주전 701년에 라기스(모레셋가드 부근)를 점령하고, 유다에 침입하여 46의 성읍을 공략하고, 히스기야를 조롱 속의 새처럼, 그 왕국의 성읍 예루살렘 안에 가두어 버렸다.

(산헤립의 6각 프리즘에 의함).

 

미가의 고향 모레셋 가드는, 바로 이 외국군의 진로에 있었다(이 성읍은 산헤립이 정복했다는 유다의 46의 성읍, 또는 다른 작은 성읍의 하나였는지도 모른다). 

 

산헤립은 그의 군사를 이끌고 유다의 북부와 서부로 진격하여 예루살렘을 포위하였다. 그러나 오랫 동안의 포위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은 함락되지 않았다. 예루살렘의 함락과 파멸에 관한 예언은 보다 후대인 느부갓네살 시대를 가리킨다. 

 

앗수르는 애굽과 예루살렘을 제외한 근동 전체를 정복하였다. 그러나 앗수르 군대가 모든 지역에 주둔하지는 않았고 그들 나라들을 속국으로 삼아 매년 공물을 바치도록 하였다. 

 

새로운 후제자가 앗수르의 왕위에 등극하였을 때는 공물을 바치던 나라들이 반역하기 일쑤였다. 그러므로 군대의 원정을 통하여 전에 예속되었던 나라들을 다시 정복하는 것이 새 통치자가 해야 할 일이다. 

 

이 시기는 특히 농민과 지방 주민들에게는 혼란, 불안, 시련의 시대였다. 흔히 작은 마을을 침략하여 그 주민들을 노예로 삼았던 군사들의 횡포로 인하여 불안한 상태가 생겨났다. 

 

이스라엘과 유다 두 나라에서는, 방백들과 부자들, 그리고 이들의 악행을 묵인하는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이 큰 성읍의 튼튼한 요새에서 안정을 누리며 가난한 사람들을 억압하였다. 

 

농민들은 앗수르 사람들과 자기 나라의 착취자들로부터 이중으로 고통을 받았다. 미가는 이 억압받는 백성들의 주장을 옹호하기 위하여 담대하게 성령의 인도를 따라 자신의 목숨을 걸고 예언을 선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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