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의 삶이 주는 풍성한 결실(시1편1-3;요15장5- 7)
성경본문: 시편1-3;요한복음15:5-7
시편1-3;
1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3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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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15:5-7
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6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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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의 삶은 신앙인의 삶에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묵상”은 나를 비우는 시간입니다.
내 안의 육신적인 요소들과 땅의 것들을 축소시켜서 결국 비우게 하는 일입니다.
즉 “탐욕”, “부정”, “정욕”, “탐심”, “우상숭배”, “분노” 등을 내 마음에서 비워내는 일입니다.
이런 것들이 내안에 가득 차 있게 되면 하나님과 멀어지게 됩니다.
하나님과의 사이가 안개가 낀 것처럼 불투명하게 됩니다.
장막이 드리운 것처럼 단절이 됩니다.
그것들을 거두고 비우는 시간이 “묵상”의 시간입니다.
그렇게 비우면 채움을 받게 됩니다.
위의 것들로 채워지게 됩니다.
위의 것은 “긍휼”, “자비”, “겸손”, “온유” 등입니다.
이는 모두 하나님의 성품과 속성의 요소들입니다.
이것들로 내면이 채워지게 되면 안개가 걷히고 영혼이 맑아지게 됩니다.
그때 주어지는 은혜와 복이 이 있습니다. 아주 근본적인 복입니다.
1. 하나님을 만나는 복입니다.
최고의 복은 영적으로 하나님을 만나는 복입니다. 그때 우리에게 깊은 안정감이 주어집니다.
예레미야는 17장에서 여호와를 의지하는 사람은 물가에 심기운 나무와 같다고 말씀합니다.
물가에 심겨진 나무는 최상의 환경에서 자랍니다.
그래서 가물어도 걱정이 없고 더위가 와도 걱정이 없습니다.
그것이 말씀을 묵상하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복입니다. 또 요한복음 15장에서는 포도나무의 비유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포도나무는 주님이시고 가지는 성도들입니다.
주님은 그가 네 안에 내가 그 안에 있으면 많은 열매를 맺게 된다고 말씀합니다.
또 나를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말씀합니다.
내가 네 안에 깊이 들어가야 너를 깊이 알 수 있고 네가 내 안에 깊이 들어와야 네가 날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안다는 것은 하나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너와 내가 하나가 되는 조건은 깊이 아는 일입니다.
내가 주님 안에 깊숙이 거하고 주님도 내안에 깊숙이 거하면 성경은 무엇이든지 구하면 다 이루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최고의 경지입니다.
성도들 대부분은 하나님을 알고 만났습니다.
그런데 그 만남은 대부분 개념적으로 이론적으로 만난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러니까 그 신앙이 무력하고 메마른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다가 실제 상황이 주어지면 속수무책으로 왔다 갔다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묵상생활”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게 되면 <개념신앙>에서 <실제신앙>으로 모드가 전환되게 됩니다. 이것이 큰 변화입니다.
<민방위훈련>을 할 때 보면 “이것은 훈련상황입니다” 하고 멘트가 나옵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천천히 걸어서 피합니다.
또 “가상 적기가 떴습니다” 하고 멘트가 나오면 그 때에도 누구도 긴장하지 않습니다.
가상상황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실제상황입니다”라고 한다면 어떻겠습니까? 그래도 긴장하지 않겠습니까? 분명 반응이 달라지고 태도가 달라질 것입니다.
우리들이 깊은 묵상생활을 통해서 하나님 안에 깊이 들어가게 되면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때는 실제상황으로 모드가 전환하게 됩니다.
그러면 기도가 달라지고 삶과 생각이 달라지게 됩니다.
그 때는 마치 내가 물가에 심겨진 나무와 같이 더위가 와도 아무 해를 입지 않는 나무처럼 변하게 됩니다. 그것이 묵상생활이 주는 풍성한 열매입니다.
2. 하나님을 만나면 깊은 안목이 열립니다.
하나님을 만나면 영적 눈이 열리게 됩니다. 그래서 멀리 보고 깊이 보게 됩니다. 사람이 미성숙할 때는 멀리 보거나 깊이 보는 눈은 열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오늘 주어진 삭막한 현실만 보고 늘 불평불만을 토로합니다.
눈 앞만 보니까 낭떠러지만 보게 되고 그래서 늘 불안해하게 됩니다.
그 눈에는 낭떠러지 건너편에 있는 넓은 땅은 보이지 않습니다.
저 산 너머에 있는 넓은 세상은 상상도 하지 못합니다.
더구나 저 하늘 높이 떠 있는 빛나는 별들이 그 눈에 보일 리가 없습니다.
언더우드 선교사의 부인과 명성황후는 자주 대화를 했다고 합니다. 명성황후는 늘 <미국>에 대해서 궁금해 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질문을 했습니다. 그때마다 언더우드 부인은 <미국>의 아름다움을 말해 주었습니다.
하루는 <미국>을 얘기하면서 <미국>보다 더 아름다운 천국이 있다는 말을 해주었습니다.
그때 명성황후는 생전 처음 <천국>이라는 나라가 있다는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십시오. 똑같은 자리, 똑같은 시간에 두 여인이 앉아 있습니다.
그런데 한 여인은 천국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 말은 천국을 알고, 보고, 믿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다른 한 여인은 그런 나라가 있는 줄도 모릅니다.
처음 듣는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진정한 복이 무엇입니까?
묵상의 삶을 통해서 주어지는 멀리 보고 깊이 보는 눈이 뜨이는 복입니다.
그 눈으로 천국을 보고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진정한 복인 것입니다.
1967년에 <미국>이 <소련>으로부터 <알라스카> 땅을 사들였습니다. 그 땅은 <미국> 땅의 1/5에 해당하는 넓은 땅입니다. 한반도의 7배이고 남한의 15배나 되는 엄청난 땅입니다.
<미국>은 그 땅을 단돈 7,209만 달러에 사들였습니다.
1에이커 즉 1,300평을 단돈 2센트, 우리 돈 20원씩에 사 들였습니다.
그 땅을 사려고 할 때 <미국> 조야에서는 극구 반대하였습니다. 왜 쓸모없는 얼음산을 사려 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때 <국무장관> 윌리엄 시워드가 말했습니다.
“얼음산만 보지 말고 그 안에 감추어진 무한한 보고를 보십시오. 그리고 우리 세대가 아닌 다음 세대를 위하여 이 땅을 사야 합니다” 이렇게 설득하여 의회에서 표결에 붙인 결과 1표차로 가결되어 그 땅을 사 들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사들인 땅이 오늘 미국이 지닌 보화 중에 가장 큰 자산이고 보물이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앞으로 가정이나 직장이나 교회나 어느 공동체에서라도 무슨 일을 할 때에는 극구 반대하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그리고 매사를 결정하여야 할 때에는 멀리 보십시오.
가까이 보면 얼음산만 보입니다.
높고 차갑게 쓸모없는 모습만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그 산을 멀리 보게 되면 얼음산이 아니라 희망의 산으로 보이게 됩니다.
묵상의 삶은 눈이 뜨이는 시간입니다.
눈도 육신의 눈이 아니고 신령한 영적인 눈이 뜨이게 됩니다.
그래서 저 높은 곳을 보게 합니다. 저 멀리 있는 곳을 보게 하고 감추어 있는 길을 찾게 되는 눈을 뜨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를 보고 천국을 사모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이것이 묵상의 삶이 주는 풍성한 열매들입니다.
3. 하나님을 만나면 풍성한 결실을 맺습니다.
요한복음 15장을 보면 말씀안에 거하는 자는 풍성한 열매를 맺는다고 주님께서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내안에 내가 네 안에 있으면 많은 열매를 맺으리라.”(5절)
또 시편 1편에서는 “여호와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는 시냇가에 심겨진 나무와 같이 시절을 좆아 열매를 많이 맺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사울을 피해 도망다닐 때에도 풍성한 열매를 맺고 결실하는 복을 받았습니다.
말씀을 묵상하는 삶 때문입니다.
다윗이 쓴 시편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시로 인정받는 시가 둘이 있습니다.
☞하나는 시편 34편입니다.
다윗이 사울 왕에게 쫓겨 아비멜렉(아기스)왕에게 갔습니다.(삼상 21:10)
그때 아비멜렉의 부하들이 염려를 했습니다.
“저가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이 아닙니까?”
다윗이 왕과의 친분 때문에 오긴 했지만 부하들의 눈에 있어서는 여전히 불길한 존재였습니다.
그래서 감시의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습니다.
다윗은 순간 기지를 발휘했습니다.
아비멜렉 왕 앞에서 미친 척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쫓겨나게 되어 다윗은 간신히 화를 면합니다.
그때 감정을 표현하여 쓴 시가 시편 34편입니다.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34:8)
☞또 하나는 시편 63편입니다.
다윗이 사울 왕을 피해 유대광야에 있는 동굴 속에 피신해 있었습니다. 그때 동굴 속에서 밖을 내다보니까 사울이 군사를 이끌고 오는 것입니다. 그러더니 다윗이 숨어있는 굴속으로 들어오는 겁니다.
순간 얼마나 당황했겠습니까? 현실이 암담하게 느껴졌을 것입니다.
다윗은 그때 일생일대의 가장 큰 고난을 당합니다.
그때 지어진 시가 63편입니다.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63:3)
다윗은 이렇게 도망 다닐 때에도 풍성한 열매를 맺었습니다. 이것이 묵상하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복입니다.
묵상하는 사람의 생명력은 그렇지 아니한 사람과는 다릅니다.
그들의 영은 마르지 않는 것입니다.
시편 1편3절에서는 “나무가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다”고 말씀합니다.
묵상하는 사람은 말씀이 내 안에서 역사하기 때문에 내 영이 늘 새로워집니다.
그래서 일생을 하나님 말씀 안에서 거하게 됩니다.
고난과 어려움 속에 있다 할지라도 주님과 동행하게 됩니다.
몸이 쇠약한 사람이 늘 사람들에게 늘 의존하는 삶을 살 수밖에 없을지라도 이런 사람은 영이 늘 새로워지기 때문에 생명력이 있어서 오히려 다른 사람들을 격려하고 살아나게 됩니다.
그것이 말씀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의 아름다움이고 능력이고 힘입니다.
옷나무에 상처를 입히면 진액이 나옵니다. 그것을 옷고름이라고 합니다.
그 진액으로 칠을 하면 변함이 없습니다.
살아가다가 상처를 입어본 사람은 마음에서 고름이 나옵니다.
그런데 그렇게 고름이 나와 본 사람만이 누구를 위로하고 상처를 치유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몸은 건강한데 속사람은 메마른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천천히 쇠퇴해 가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누굴 위로하거나 치유하지 못합니다.
그냥 아주 메마른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 심령을 가지고 누굴 위로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면 이 둘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무엇을 신뢰하며 살아가느냐의 차이입니다. 이것에 따라 달라지는 것입니다.
묵상하는 사람은 날마다 주님의 보좌를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에게 자신의 삶을 맡깁니다.
그래서 주님의 임재 안에서 새로워지고 기쁨이 충만해집니다. 늘 말씀을 경청하고 순종하고 싶어집니다.
반대로 날마다 말씀 밖에서 살면 자신 외에 신뢰할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위로 받을 사람도 없고 위로 할 수도 없는 마치 사막의 말라버린 떨기나무와 같은 인생을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진정한 복이 무엇입니까?
예레미야 17:7-8에서는 “그러나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 물가에 심기운 나무처럼 ...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니라”고 말씀합니다.
시편 1편에서는 “여호와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는 철을 따라 과실을 맺는다”고 말씀합니다.
요한복음 15장에서는 “내가 네 안에 네가 내안에 거하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풍성한 결실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4. 하나님을 만나면 능력있는 사람이 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감으로 쓰인 말씀입니다. 기록자는 영감을 받은 인간이고 저자는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에는 영감이 충만하게 들어있습니다. 그렇기에 이 말씀을 묵상하는 자는 하나님의 능력과 힘과 입김과 영감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마치 누룩과 같습니다.
누룩은 부풀게 하고 변화하게 폭발하도록 발효를 시킵니다.
이 말씀도 영적 능력이 내포되어 있어서 내안에서 성령의 능력을 발휘하게 만듭니다.
성령의 능력은 내 안에서 성령데모(Demonstration Spirit)를 일으킵니다.
나로 모험하게 만들고 행동하게 만들고 나로 역사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역사를 보면 이런 성령의 능력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모험자로 개척자로 전도자로 순교자로 나타났습니다.
그들은 공통적으로 말씀을 묵상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세계는 묘한 부분이 있습니다.
반드시 모험의 현장에서 기적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안일한 장소에서는 결코 기적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모험 없는 신앙은 메마른 신앙입니다.
그리고 기적을 체험한 사람들이나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체험한 사람들은 한결같이 모험자들 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모험의 믿음 안에서 다가오십니다.
어느 독일교수가 유독 <히브리어>를 잘했습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그가 대학에 다닐 때 옆에 유대인 친구가 있었습니다. 이 유대인 친구는 쉬는 시간이 되면 뭔가를 중얼중얼 외웠습니다. 시편 23편을 히브리어로 암송한 것입니다.
그렇게 암송하고 나면 마음이 상쾌하고 공부가 잘 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히틀러 나치 비밀경찰이 이 유대인 친구를 연행해 갔고 그의 가족들도 모두 끌려갔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 친구의 집으로 자전거를 타고 서둘러 가 보았습니다.
집 앞에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온가족이 트럭에 실려서 끌려가고 있었습니다.
그때 유대인 친구가 트럭 밖으로 얼굴을 내밀고 씩 웃더니 갑자기 큰소리로 시편 23편을 히브리어로 외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라져 갔습니다.
그에게는 그 모습이 아주 인상적이었습니다.
그 후 이 학생도 독일군으로 징집을 당해서 전선에 투입되었습니다.
전투를 하다가 연합군인 러시아군에게 포로로 잡혔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다른 독일군 포로들과 함께 총살장으로 끌려가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의 머리에 유대인 친구 생각이 번뜩 들었습니다.
그 유대인 친구가 비밀경찰에 끌려가면서도 씩 웃으며 시편 23편을 외우던 모습이 순간 생각났습니다.
그래서 ‘나도 그 친구처럼 웃으며 용기 있게 죽자’ 생각하고 자기 차례가 되었을 때 용기 있게 외쳤습니다.
“잠깐만 기다려 달라!” 그리고 큰소리로 시편 23편을 히브리어로 암송했습니다.
그러자 순간 두렵던 마음과 근심이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자신도 알 수 없는 자신감이 솟아났습니다.
그때 사형을 집행하던 연합군 장교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습니다.
그러더니 자신도 시편 23편을 히브리어로 외우는 것이었습니다.
그 장교가 유대인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사람을 풀어주라. 그가 비록 독일군 악마의 제복을 입었으나 하나님 백성은 하나님 백성이다.”
여러분은 이런 신비함을 느껴 보셨습니까?
이것이 말씀이 주시는 능력이고 용기이고 힘입니다.
어느 젊은이가 군에 들어갔습니다.
주일날이 되었는데 교회 갈 사람은 다 나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한명도 안 빠지고 다 나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고참이 “너희들이 다 교회에 가면 내무반은 누가 지키냐?
내가 지키란 말이냐? 너희들 진짜로 다 교회에 다니는지 어디 한번 실험해 보자.” 그러더니 일렬로 줄을 세워놓고 <주기도문>을 외워보라고 하였습니다. 이 젊은이는 교회에 가서 놀고는 싶은데 교회는 어렸을 때 몇 번 가 본 기억 밖에 없어 <주기도문>이 잘 생각이 나질 않았습니다.
그래서 가까스로 기억해서 <주기도문>을 외울 준비를 했습니다. 이제 자기 차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고참이 말했습니다. “너부터는 <사도신경>을 외워 보아라.” 그래서 낭패를 보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믿으려면 화끈하게 믿어야 합니다.
그래야 믿음입니다.
고백을 하려면 분명하게 고백해야 합니다.
묵상생활을 하려면 깊이 있게 분명하게 묵상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것은 분명 중요한 일입니다.
위기의 때에 묵상하는 것은 더 중요합니다.
그러니까 그곳에서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분명하게 말씀을 묵상하십시오.
확실하게 묵상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삶에도 이런 기적이 일어날 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