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이유(요한1서 4장 9- 21)
성경본문: 요한1서 4:9-21
9.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11.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12.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
13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
14. 아버지가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신 것을 우리가 보았고 또 증언하노니
15.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그의 안에 거하시고 그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
16.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
17.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루어진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께서 그러하심과 같이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러하니라
18.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19.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20.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21.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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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많은 사람들 중에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구원하시고 자녀 삼으시고 제자 삼으셨고 직분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왜 이렇게 부르셨을까요?
그리고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구원받은 것으로 끝나지 않고 이 세상에서 해야 할 역할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역할이 사랑하는 일이고 섬기고 세우는 일을 하라는 뜻일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대부분 관계를 이루며 살아갑니다.
한곳에 모여 살고 동네를 이루고 사회를 이루어 살아갑니다.
그렇게 모여 관계를 이루며 살아가는 삶에는 많은 문제들이 발생하게 됩니다.
거기에는 행복한 일도 보람 있는 일도 발생할 것입니다.
그러나 때로는 실망스러운 일이나 다툼이나 갈등도 발생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 관계의 삶을 잘 해나가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삶에 기쁨이나 즐거움이나 행복함과 보람이 주어지게 됩니다.
이 관계의 삶을 이루어 나가는데 중요한 요소가 있다면 그것이 사랑하는 일입니다.
사랑은 너를 위한 요소입니다.
100% 너를 위한 정신이 사랑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사랑을 강조합니다.
그렇다면 사랑은 무엇이며 사랑에는 무슨 정신을 담고 있습니까?
본문은 그 사랑이 무엇인가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요한1서는 저자가 사도요한입니다.
사도 요한은 유독 사랑을 강조합니다.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과 요한 1,2,3서와 계시록을 기록하였습니다.
요한이 기록한 성경 안에는 유독 사랑을 강조합니다.
그의 말년에 제자들이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교훈을 말씀해 달라고 조르자 요한은 내게 무슨 더 말할 교훈이 있겠느냐고 반문했습니다.
그러면서 “주께서 사랑하라 하셨으니 서로 사랑하라는 말 밖에는 할말이 없다”고 말했다는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특히 요한1서 4장을 보면 사랑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기 보면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전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고 강조합니다.
왜 사랑해야 하는가 하면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본체이십니다. 사랑은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사랑의 깊이를 다 알 수가 없습니다. 그냥 흉내만 내고 있을 뿐입니다.
본문은 그 하나님의 사랑을 말씀하고 그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것인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10절을 보면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데 얼마나 사랑하시는가 하면 “아들을 화목제물로 주시기까지 사랑하셨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100% 주는 사랑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당부하십니다.
11절을 보면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 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사랑을 받았느니 너희도 사랑하라”고 강조하십니다.
또 20절에서는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말하면서도 그 형제를 미워하면 거짓말 하는 자요 그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라고 강조하십니다. 그러면서 20절 끝에서는 “보이는 형제도 사랑하지 못하는 자가 어찌 보이지 않는 자를 사랑하리요”하고 사랑의 의미와 정신을 설명합니다.
여기서 사도 요한이 이렇게 사랑을 강조하게 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당시 영지주의자들 때문입니다.
본문은 일종의 영지주의자들에 대한 경고용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당시 영지주의는 거세게 융성했습니다.
그래서 당시 영지주의자들은 우월감에 빠지고 교만하고 자만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끼리만 교제하고 사랑하고 남들은 쳐다보지도 않았습니다.
오늘도 이런 교회들이 많이 있습니다. 자기들끼리만 모입니다.
그리고 자기들끼리만 교제하고 사랑합니다.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본문은 그것을 지적하고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은 다음의 두가지가 이루어져야 완성됩니다.
☞하나는 대신(對神)관계가 건강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수직적인 관계가 건강해야 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대인(對人)관계가 건강해야 합니다.
이웃과 나와의 수평적인 관계가 건강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두가지를 다 이루셨습니다.
먼저 하나님과 수직적인 관계에 충실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에 절대복종하였고 충실했습니다.
그리고 인간을 향한 수평관계에도 충실했습니다. 그래서 인류를 위한 절대희생을 주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을 모범으로 보고 따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요 13:34)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또 다른 사랑이라는 말은 또 다른 사랑을 제시하셨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미 구약 시대부터 사랑하라고 주어진 그 사랑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그 사랑이 주어졌음에도 우리들끼리 즉 유대인들끼리만 교제하고 이방인이나 사마리아인은 상종도 하지 않았습니다.
상종은 고사하고 그들을 불결하다고 정죄하고 대화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성경은 그것은 사랑도 아니라고 단언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진정한 사랑을 발휘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본문말씀에 비추어 사랑의 정신을 몇가지로 나누어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Ⅰ.내 필요를 축소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대는 모두가 가까이 모여 살면서 복잡한 관계를 이루며 살아가는 시대입니다.
그 관계의 삶에서 종종 나타나는 것이 관계의 악화입니다. 어떤 이들은 관계가 악화되어 서로 원망하고 원수로 지내기도 합니다. 그것은 내 이익을 너무 챙기기 때문이고 내가 너무 강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포기되고 축소되어야 이 관계가 원만하게 이루어질 수 있는데 내가 내 이익을 다 챙긴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은 내 것을 포기하고 축소해야 비로소 발휘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사랑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은 바로 이 요소들 때문입니다. 사랑은 너를 빼면 발휘될 수가 없습니다. 사랑은 너 때문에 나를 배제하고 축소해야만 발휘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랑은 생각보다 힘들고 어려운 일입니다.
누가 자기를 축소하고 배제하고 손해보고 너를 위주로 행할 수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성경은 사랑하라고 강조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려고 한다면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사랑하고자 한다면 성령께서 우리로 하여금 감당할 수 있도록 도우시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두 요소를 지니고 살아갑니다. 하나는 아주 천박해질 수 있는 악마적 요소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짐승 수준의 행동도 할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이 사람을 죽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내 안에 악마적 요소가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가 하면 인간은 아주 위대해 질 수 있는 요소도 지니고 있습니다. 인간은 때로 천사 수준의 행동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사람을 줄일 수도 있지만 순교도 하고 십자가를 질 수도 있고 예수님을 흉내도 낼 수 있는 것입니다.
한국 기독교 역사를 보면 신앙을 빛낸 분들이 여러 분 있습니다. 그중 한분이 손양원 목사님입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여수 반란사건 때 두 아들이 공비들에게 총을 맞고 무참히 살해되었습니다. 그런데 반란을 진압하고 범인을 잡아보니 동네 청년이었습니다.
이 청년이 총살을 당해야 하는 처지에 놓였습니다. 그 때 손양원 목사님은 고민을 하게 되었습니다. 아버지 심정으로는 두 아들을 죽인 범인을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주님은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범인을 총살한다고 한들 이미 죽은 내 두 아들이 소생해 돌아오는 것도 아닙니다. 이 지점에 이르자 이 범인을 용서하자는 마음이 들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래서 범인 구명운동에 직접 나서게 되었고 결국 그를 구해낸 후 그 범인을 이미 죽을 아들을 대신하여 양아들로 삼게 되었습니다.
생각해 보면 어떻게 이런 일을 할 수 있습니까? 내 두 아들을 죽인 범인을 용서한 것도 큰 일인데 그를 내 양아들로 받아들인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이것은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세계사에서도 전례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분은 해 냈습니다. 어떻게 해냈느냐 하면 내가 하려고 하니까 성령께서 그에게 감동의 마음과 힘을 주셨던 것입니다. 너를 위해 내 필요를 축소하고 포기하니까 성령이 도우신 것입니다. 사랑은 나의 필요를 축소시키고 나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Ⅱ. 영적인 눈으로 내면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사랑은 외모를 보지 않고 영적인 눈으로 내면을 바라볼 때 발휘되는 것입니다. 외모를 보면 먼저 오해가 발생합니다. 거리감이 생기고 장벽이 생기게 됩니다. 상대의 외모를 보게 되면 내가 먼저 그를 심판하게 됩니다.
그래서 용서는 상대의 외모를 보지 않고 그를 영적인 눈으로 바라보는 일입니다. 손양원 목사님이 아들을 죽인 범인의 모습만 보았더라면 그를 용서하는 것은 불가능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손양원 목사님은 그의 상한 영혼과 악해진 그의 내면을 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히려 그의 영혼을 위하여 기도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복음서를 보면 음행하다 잡혀온 여인이 나옵니다.(요 8:4) 그 여인은 부정한 여인이었습니다. 부정을 저지르는 그 여인을 현장에서 잡아 예수께 데리고 왔습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손에 돌을 들고 예수께 이 여인을 돌로 칠까요 말까요 하고 질문을 던졌습니다.
거기 모인 유대인들은 모두 그 여인의 부정한 모습만 보고 그 여인의 육신만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 여인도 자기들과 똑같은 동족이고 이웃인데 정죄만 하고 경멸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그 여인의 외모만 보니까 불결함만 보였고 정숙치 못함만 보였습니다.
그러니 그 여인을 용서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그 여인을 영적인 눈으로 바라 보셨습니다. 그의 초라한 영혼을 보셨고 그 여인의 남루한 심령을 보셨습니다. 그래서 그 여인을 불쌍하게 바라보셨고 그를 도와주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물가의 여인도 그렇습니다.(요 4:7)
그 여인도 부정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피해 다니던 여인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그 여인의 겉모습만 보고 그를 정죄하고 경멸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여인을 영적인 눈으로 바라보셨습니다.
그 여인의 직업이나 출신을 보지 않으셨습니다.
그 여인에게 지금 남편이 다섯이나 있다는 것을 보지 않으시고 그 여인의 상한 영혼을 보셨습니다.
그러니까 그 여인을 불쌍히 바라보셨고 그에게 다가가 굶주려 있는 그의 영혼을 치유하고 회복시키고 그 갈증을 풀어주셨던 것입니다.
우리들과 예수님과의 차이가 있다면 우리들은 그 여인들의 외적인 모습을 보았고 예수님은 상한 마음을 보시고 피폐된 그들의 영혼과 내면의 모습을 보셨다는 것입니다.
어느 날 강도가 가정에 침입하여 한 가정의 어머니와 아내와 아들을 죽였습니다.
살아남은 가장에게는 충격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범인을 죽이고 싶은 충동에 한동안 혼란을 겪었습니다.
죽이고 싶은 마음에 분노가 일어났고 도저히 용서가 안되어 한동안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마침내 그 범인을 용서하게 되었습니다.
그가 그 범인을 용서하게 된 이유가 두가지라고 합니다.
☞하나는 내가 더 불편하고 마음이 불화해서 그를 용서했다고 합니다.
이 문제로부터 내가 해방되고 자유해지기 위해서 용서한 것입니다.
☞또 하나는 그를 생각할 때마다 그의 영혼이 불쌍해서 용서했다고 합니다.
그 범인의 영혼을 생각할 때마다 그 영혼이 불쌍하고 측은했습니다. 그러니까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대상을 용서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랑은 무엇입니까?
사랑은 나를 포기하는 일이고 나를 축소하는 일입니다.
그때 성령의 도우심이 나에게 주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이런 사랑을 감당할 수 없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나는 지금도 상대의 부족한 부분만 바라보고 상대의 흠만 바라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가가기를 꺼려하고 관심을 가지려고도 하지 않고 대화도 거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형제를 사랑하라”, “형제의 겉만 보지 말고 영혼을 보라.”
예수님은 그 여인의 병든 영혼을 보셨고 그 여인의 초라하고 피폐해진 그의 마음을 보신 것입니다.
Ⅲ. 사랑은 말이 아니라 행동입니다.
사랑은 나를 축소하는 일이고 상대의 병든 영혼을 바라볼 때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랑은 말이 아니고 행동입니다.
오늘은 말이 너무 많은 시대입니다. 사랑을 너무 말로 합니다. 그래서 감동이 없는 것입니다. 마음이 없는 사랑에는 행동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우리 부모님 세대는 평생 사랑이라는 말을 하지도 듣지도 못하고 살아왔습니다.
그럼에도 살아가는데 별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사랑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아가는데도 하구 많은 문제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사랑은 말이 아니고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말씀을 많이 듣는 것이 중요합니다.
성경공부도 많이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행동하는 것은 더 중요합니다.
사랑은 말이 아니고 이론이 아니고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엊그제 읽은 책 중에 이런 내용이 있었습니다.
두 재벌 회장의 죽음을 앞둔 모습을 비교해 놓았습니다.
하나는 재벌>의 운명의 모습입니다.
운명을 눈앞에 둔 재벌의 병원풍경을 스케치했습니다. 재벌>이 의식이 오락가락 하고 있습니다.
자녀들이 밖에 대기하고 있다가 의식이 잠시 돌아오면 녹음기를 들고 우르르 몰려와서 아버지 입에 대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자녀들은 아버지가 누굴 후계자로 뽑을지 유산분할은 어떻게 할지가 초미의 관심사였습니다.
그리고 연예인 H씨가 병문안을 올까봐 모든 자녀들이 긴장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 재벌이 그 연예인을 좋아했는데 정신이 돌아온 그 시간에 혹시 면회를 오게 되면 “얘들아 골프장은 H씨에게 주라”고 할까봐 그랬다는 것입니다.
주치의가 그런 모습을 바라보면서 그 재벌이 불쌍해서 혼났다고 합니다.
그런가 하면 또 다른 재벌 B씨는 암 선고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 재벌은 자신의 죽음을 위하여 삶을 조용히 준비했다고 합니다.
그는 매일 그동안 친하게 지냈던 사람들을 한명씩 불러서 그동안 참 고마웠다고 감사의 인사를 했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은 아들에게 3천만원을 가져오라고 해서 마지막 힘을 다하여 평소 다니던 이발소에 찾아가 그동안 고마웠다고 봉투 하나를 주었고 평소 잘 다니던 음식점을 찾아가 주인과 종업원들에게 봉투 하나씩 주면서 그동안 고마웠다고 인사를 했습니다.
그의 장례식날 가장 많이 울어준 사람들이 그 이발사, 음식점 종업원, 양복점 주인들이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일은 대단한 것도 어려운 일도 아닙니다.
나의 조그만 관심을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따뜻한 대화 한마디 나누는 것입니다.
또한 열린 마음으로 상대에게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상대에게 감동을 주는 나눔이고 함께 하는 사랑입니다.
사랑은 너를 위해 나의 필요를 조금 축소하고 포기하는 것입니다.
상대의 외모를 보지 말고 상대방의 상한 마음을 갖는 일입니다.
그리고 사랑은 말이 아니고 행동입니다.
오늘은 가는 곳마다 시끄럽습니다.
갈등이 난무하고 불화와 싸움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집안에서도 교회 안에서도 이웃에서도 어디서나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사랑하라고 당부하십니다. 본문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전제합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사랑을 받았으니 너희도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강조하고 계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