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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용수 목사

[이정익목사]전도자의 또 다른 아픔(롬9: 1- 5)

작성자성경 벌레|작성시간22.05.13|조회수124 목록 댓글 0

전도자의 또 다른 아픔(91- 5)

성경본문: 로마서9:1-5

1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2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하노니

3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4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들에게는 양자 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5 조상들도 그들의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그들에게서 나셨으니 그는 만물 위에 계셔서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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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친구 목사님 중 한분은 열심히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그분은 많은 분들이 사랑하는 목사님입니다. 그래서 제가 보기에 그 목사님은 근심이 없을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그 목사님은 언제나 말이 없고 얼굴에 어두운 그림자가 서려 있었습니다.

언젠가 그 목사님이 남모를 걱정이 있다며 이렇게 고백을 했습니다.

내 부모님이 아직 예수를 믿지 않습니다. 이것이 내게 주어진 가장 큰 십자가입니다. 즐겁다가도 이 문제만 생각하면 즐거운 마음이 가시고 힘이 쭉 빠집니다. 남들은 잘도 믿던데 왜 내 부모님은 믿지 않으려고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이것이 나의 최대의 기도제목입니다.”

 

여러분, 그 목사님의 그 심정을 이해하시겠습니까?

지금 여러분 중에도 그런 근심이 있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남들은 잘도 믿더구만, 전도하면 잘 따르더구만, 왜 내 부모나 내 형제는 믿지 않고 고집만 부리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오늘 이 심정이 오늘 읽은 본문에서 고백하는 사도 바울의 심정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를 기록하면서 1장부터 8장까지 어떻게 구원받는가?, ”구원은 무엇인가?” 등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9장부터 11장까지 나 개인의 구원을 넘어 온 우주에서 구원이 어떻게 완성되는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오늘 읽은 본문 9장에서 사도 바울은 개인적인 고통을 피력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8장 31절에서 우리는 행복한 사람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러니 누가 우리를 하나님에게서 끊으리요…… 죽음이나 칼이랴 그 어떤 것도 우리를 끊어낼 수 없다고 장담하였습니다.

그리고 9장에 와서 자신에게 말 못할 고민이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 바울은 큰 근심마음의 고통이 있다고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1절에서 나에게 큰 근심과 마음의 고통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사람마다 마음에 고통이 있습니다. 그것이 질병일 수도 가난일 수도 자식이나 미래의 걱정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개인적인 일상의 고민도 있을 수 있지만 또 다른 고민 즉 영적인 고민도 있습니다. 내 자녀가 예수를 믿지 않고 있습니다.

내 부모가, 내 형제가 예수를 믿지 않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 문제 때문에 심각하게 고민해 보셨습니까?

사도 바울은 그것이 고민이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무슨 고통입니까?

3절을 보면 나의 형제 곧 골육지친이 예수를 믿지 않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면서 바울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예수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지금 돌아다니며 전도를 하고 있습니다. 유대인에게는 물론이고 이방인들에게까지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렇게 복음을 전하면 다 잘 믿습니다.

다 잘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내 동족 이스라엘 민족은 예수를 거부하고 한사코 믿지 않고 있습니다.

그것이 사도 바울이 느끼는 아픔이고 고민이었습니다.

아픔이 서두에서 말씀드린 어느 목사님의 아픔이고, 이 아픔이 신앙인들이 느끼게 되는 진정한 아픔입니다. 우리는 이 아픔을 느껴야 합니다. 그래야 전하게 되고 믿지 않는 분들을 위해서 중보기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로 원래 바울의 모습은 예수님을 싫어 했습니다.

원래 사도 바울은 부활 같은 허황된 이론을 퍼트리고 다니는 예수를 싫어했습니다. 그는 예수가 사기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사람이 부활한다는 것이 가능한 말입니까?

그런데 부활을 전하고 다닙니다.

바울은 그것은 사기라고 본 것입니다.

 

또 예수의 제자들이 그런 허황된 이론을 전하고 다녔습니다.

그래서 그 제자들을 핍박하였고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는데 앞장섰던 것입니다.

그렇게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기 위해서 다메섹으로 가던 중 그는 회심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때 비로소 눈을 뜨게 되게 되었고 눈을 뜨고 보니 모든 것이 참 진리였습니다.

 

예수의 오심”, “십자가의 죽음”, “부활 등이 모두 하나님의 계시에 의한 섭리였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그의 인생이 180도로 변화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핍박하던 그 예수의 전도자가 된 것입니다.

그때부터 바울은 죽음을 불사하고 전도하러 다녔습니다.

그렇게 전도하다가 보니까 많은 사람들이 돌아오고 변화를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마음 한편이 뼈저리게 아파옴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나는 구원받았는데, 이방인들도 복음을 전하니 순순히 받아 구원받았는데 내 동족 이스라엘이 복음을 거부하고 하나님이 보낸 아들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이제는 내 동족이 멸망당할 처지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이 백성을 사랑하셔서 애굽에서 불러내셨습니다.

재앙 중에서 그들을 보호하셔서 마침내 출애굽 하여 홍해를 건너게 하셨습니다.

광야에서는 생수와 만나로 먹이시고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지켜주셨습니다.

그리고 이 백성들에게 가나안 들어가 정착하도록 꿈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민족이 감사를 몰랐습니다.

그래서 매일같이 불평을 늘어놓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주신 “불기둥 밑에서”, “구름기둥 밑에서, 아침도 저녁도 하나님이 주신 만나를 먹어가면서 불평불만을 털어놓았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아론과 공모하여 금송아지까지 만들어 놓고 그것에게 절하고 제물을 바쳐가며 이것이 우리의 하나님이라고 경배하였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하나님이 이 백성을 다 광야에서 죽게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모세가 볼 때도 이 백성은 아주 타락한 민족이었습니다.

참 우매하고 무지한 민족이었습니다.

그래도 멸망은 막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모세가 나서서 이렇게 중보기도를 하였습니다.

여호와께 여짜오되 슬프도소이다. 이 백성이 자기들을 위하여 금송아지를 만들었사오니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그러나 합의하시면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아니하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버려 주소서.”(출 32:31)

모세도 화가 났지만 일단은 이 백성을 심판에서 살려야 했습니다.

그래서 모세가 하나님을 향하여 용서의 중보기도를 하게 된 것입니다.

이 지점에서 모세의 심정으로 사도 바울이 이 백성들을 위하여 중보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스라엘 민족을 위해서 기도한 것은 그들이 동족이기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사실 장자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에게 하나님은 무한한 약속을 주셨습니다.

우선 양자가 되는 복을 주셨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가는 곳마다 지키시고 복을 주셨습니다.

 

애굽에서의 돌보심을 보십시오. 더 이상 할 수 없을 만큼 축복하십니다.

또 각종 언약을 주셨습니다.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고 많은 자손과 넓은 땅과 복의 근원이 되게 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모세와도 언약을 맺기를 내가 장차 이 백성으로 하여금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이 백성에게서 메시야가 태어나리라는 약속까지 주셨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먼저 된 자들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이스라엘이 이 약속들을 모두 저버리고 포기하고 무시했습니다.

에서가 소중한 유산들을 포기하듯이 버렸습니다.

예수의 오심도 거부하고 오히려 핍박하고 마침내 그 예수를 십자가에서 죽이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먼저 된 자가 결국 나중 된 자가 된 것입니다.

 

지금 사도 바울이 이것들을 생각하면 기가 막힌 것입니다.

이점을 생각하면 마음이 상하고 분노가 일어나고 안타까움이 일어났습니다.

내가 지금 돌아다니며 복음을 전할 때 이방인들도 순순히 따르고 믿는데 내 동족 이스라엘은 거부하고 귀를 막고 듣지 않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자신까지도 잡아 죽이려고 합니다.

그러니까 바울이 그 심정을 표현하기를 내 자신이 주께로부터 저주를 받아 끊어질지라도 바라는 바니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이렇게 무자할 수 있는 것은 유대인들의 잘못된 신앙 때문입니다.

그러면 유대인들이 왜 이렇게 무지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그들의 신앙이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우선 이스라엘 백성들은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율법과 전통과 행위로 구원받는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새 시대, 복음시대가 되었습니다.

예수께서 오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돌아다니며 그 부활을 전하고 다니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그 십자가를 믿으면 구원받는다고 역설하고 다니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유대인들은 여전히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를 죽이고서도 회개를 하지 않고 다시 오실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오늘은 <예정론>을 강하게 말하고 다니지는 않습니다.

<예정론>은 멸망당할 운명을 지닌 사람이 있다는 이론입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멸망당할 사람을 미리 운명지어 놓았다는 이론이 성립될 수 있느냐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이스라엘을 보면 그렇게 멸망당하기로 작정된 사람이 있을 수도 있겠다 싶은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사람이 마음에 저주를 받으면 강퍅해지고 무슨 말을 해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믿지 않으려고 귀를 막고 못들은 척하고 거부하고 고집 세게 행동합니다.

별소리를 다 들려주고 보여주어도 믿지 않습니다. 믿지 않으려고 열심히 귀를 막고 있습니다.

 

옛날 양반들이 가족들이 교회에 가서 변화되어 오는 것을 보고 속으로 자신도 교회에 가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자존심이 허락지 않아 끝까지 고집을 부리다가 죽었습니다.

이스라엘이 그랬습니다.

그래서 멸망당할 사람은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드는 대목입니다.

지금 이스라엘이 그 형편에 처해 있습니다.

그런 이스라엘의 고집과 무지와 잘못된 점을 사도 바울은 신랄하게 질타했습니다.

그러다가 독백처럼 외쳤습니다.

차라리 내가 저주 받는다 할지라도 내 백성이 믿는다면.” 그는 이 말에 자기 심정을 피력합니다. 그 마음은 사랑입니다.

 

모세가 자기가 백성들을 봐도 너무 타락한 백성이었습니다.

보통 타락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기가 봐도 심판받고 저주 받아도 마땅한 백성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모세는 중보기도를 합니다.

이 백성을 용서하소서. 언제는 이 백성이 선한 백성이었습니까?. 언제는 선해서 이 백성을 선택하셨습니까? 아니면 나도 저주받아 죽겠습니다.”

 

예수님도 저들을 용서하소서. 저들이 하는 짓을 알지 못함이니이다하고 중보기도를 하셨습니다.

스데반도 저들을 용서하소서 하고 중보기도 하였습니다.

 

사랑이 크면 처음에는 미움이 밀려옵니다.

그래서 막 질책하고 책망하고 매를 듭니다. 그러다가도 나중에는 용서를 하게 됩니다.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또 하나님의 의를 왜곡하였습니다.

롬 10:3을 보면 저희가 하나님을 모르고 자기의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니라고 말씀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누구보다 하나님을 잘 아는 척 했습니다.

그들은 열심도 있었고 뜨거운 열정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에게는 진리가 없었습니다.

열심이 다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공산주의에도 열심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열심은 모순된 열심입니다.

이단의 열심도 모순된 열심입니다.

 

이스라엘의 열심은 대단했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을 보면 안타까울 정도로 철저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의 의를 몰랐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했다고 잡아서 사형에 처했습니다.

간음한 자를 데리고 와서 돌로 칠까요 말까요 하고 물었습니다.

 

<안식일>에는 짐승이 우물에 빠져도 건지지를 못하였습니다. 이런 무지로 인해 구원이 가까이 왔을 때 선뜻 받지 않고 거부하였고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도 거부하고 죽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신 부활도 거부하였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오해하고 내 의에 기준을 삼았기 때문입니다.

또 내 지식에 근거를 두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본문은 자기의 의를 세우려고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니라(10:3)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오늘 교회 안에서 다툼이 일어나는 것은 내 의를 주장하고 내가 강조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의가 왜곡되는 것입니다.

모든 신앙인이 하나님의 의에 기준을 둔다면 갈등은 금방 사라질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자기의 의를 믿으니까 예수를 받아들이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또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뜻을 왜곡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세상 모든 사람이 구원받는 것입니다.

누구도 멸망당하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롬 10:13에서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하였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예수를 알고 믿게 되었습니까?

여러분들이 예수를 알고 믿게 되었다는 것은 굉장한 사건이고 은혜이고 복입니다.

사람이 예수를 믿는 일은 아주 어려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를 믿어도 당장 생기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내가 오늘 예수를 믿거나 안믿거나 아무런 변화가 없습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뭐가 생깁니까?

아무것도 주어지는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 바쁜 시대에 주일날 할 일도 많은데 왜 교회에 가야 합니까?

그래서 사람들이 안믿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무관심 때문입니다.

먹고 살기에 바쁜데 예수에 관심 갖기가 어렵습니다.

우리들이 성경을 왜 안읽는가 하면 관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을 손에 들기만 하면 잠이 오는 것입니다. 관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관심이 있어 보십시오.

잠이 오겠습니까?

이 무관심이 참 무서운 것입니다.

어느 여인이 책 한권을 사서 읽었는데 재미가 없어서 그냥 버렸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결혼을 하고 보니 그 책을 쓴 저자가 남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책을 찾아 다시 읽어보니까 그렇게 재미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뭐가 달라졌습니까?

달라진 것은 아무 것도 없는데 관심만 달라졌습니다.

그러니까 그 책이 재미가 있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이 전도를 하면 잘 받아들이지를 않습니다. 그것은 관심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아주 쉽게 예수를 받아들입니다.

그것이 그 사람에게 주어진 은혜입니다.

 

유대인들은 큰 오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생각을 오해한 것입니다.

하나님 생각은 온 인류가 구원받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세상에 예수를 보내신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이를 오해하여 하나님은 우리들만의 하나님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하나님을 향하여 아버지라고 말했다고 십자가에 달아 죽였습니다.

이런 오해가 어디 있습니까?

 

사도 바울이 이같은 하나님의 섭리와 뜻을 깨닫고 난 후 그 사실을 이스라엘에게 알리려 하자 받아들이기는커녕 오히려 잡아 죽이려 했습니다.

그래서 고백하기를 내 자신이 저주받아 예수에게서 끊어질지라도 바라는 바라고 고백을 하였습니다.

 

바울은 결국 유대인들 믿을 것을 기대했습니다.

바울은 이 백성들이 결국은 하나님을 믿으리라고 믿었습니다. 그것은 10:2절에 근거해서입니다. 이스라엘에 대하여 이르되 순종하지 아니하고 거슬러 말하는 백성에게 내가 종일 내 손을 벌렸노라 하시니라.”

 

이 말씀은 탕자 아버지의 모습입니다.

매일 밤 문을 열어 놓고 탕자가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는 아버지의 모습입니다.

또 호세아가 집나간 아내가 돌아오기를 밤새 기다리는 모습입니다. “

지금 거스르는 이 백성에게 내가 종일 내 손을 벌렸노라.”

 

이 말씀은 바울은 결국 이 백성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을 믿고 기대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들의 가족이 모두 믿는다면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그런데 자식 하나가 그리고 아버지가 믿지 않는다면 또 무슨 불행입니까?

즐겁다가도 그 생각만 하면 즐거움이 사라집니다.

그 고민이 나의 고민이고 우리들의 고민이고 사도 바울의 고민이고 하나님의 고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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