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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용수 목사

[이정익목사]사도 바울의 아름다운 결산(행20:35)

작성자성경 벌레|작성시간22.05.30|조회수643 목록 댓글 0

사도 바울의 아름다운 결산(2035)

성경본문: 사도행전20:35

35 범사에 여러분에게 모본을 보여준 바와 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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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은 사도 바울의 소아시아 지역 전도를 결산하는 내용입니다. 사도 바울은 안디옥교회에서 파송받아 선교사의 길에 들어섰습니다. 그는 선교사역 동안 네 차례에 걸쳐 전도여행을 떠났습니다.

그 중 3차 여행 때는 에베소를 방문하여 3년 반 정도 전도하였습니다. 그래서 다른 지역보다 에베소에 대한 애착이 컸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제 사도 바울도 황혼기에 들어섰습니다.

이제는 로마에 가서 전도하는 것이 꿈이었습니다.

당시 로마는 세계의 끝이라고 인식되었던 때입니다. 그래서 로마가 전도되면 주님이 곧 재림하실 것으로 믿었습니다.

사도 바울도 당연히 로마 전도에 열망을 품었습니다.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지금 드로아에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루살렘에 들렸다가 로마로 가기로 작정했습니다. 예루살렘에 가기 전에 에베소에 들러 성도들을 만나보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에베소는 여기서 50km나 떨어진 먼 거리였습니다.

그래서 그곳에 다녀올 시간적 여유가 없었습니다. 오늘 같으면 자동차로 1시간도 안되는 거리지만 당시는 순전히 걸어 다녀야 하는 오솔길이었습니다.

그래서 에베소 교회에 연락하여 지도자들인 장로들로 하여금 중간지점인 밀레도에서 만나자고 했습니다.

마침내 에베소교회 지도자들이 밀레도로 왔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 지도자들을 만나서 마지막 유언 같은 대화를 나누게 됩니다(17-35절).

여러분은 내가 3년간 에베소에서 어떻게 행한 것을 잘 알 것이요(18).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로 시험당한 것도 알 것이요(19). 또한 내가 그동안 회개와 믿음에 대해서 설교한 것도 잘 알 것이고(21), 내가 그동안 은이나 금이나 탐내지 않은 것도 알 것이고(33), 내가 경비가 부족하면 스스로 일해서 벌어 썼음도 알 것이요(34).”

 

바울은 그동안 선교사역에서 나타난 일들을 일일이 결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본문 35절에서는 내가 지금까지 여러분에게 모본을 보였소. 그러니 여러분들도 본을 보여 약한 자를 돕고 주는 자가 복이 있다고 했으니 이것을 행하시오라고 당부하였습니다.

그리고 나는 이제 예루살렘으로 가지만 예루살렘에 가면 무슨 일을 당할는지 모르오. 성령께서 말씀하시는데 내가 곧 결박과 환란을 당할 것이라고 하셨소. 만일 내가 죽임을 당한다 할지라도 나는 내 생명을 아낌없이 바칠 것이요. 이제 여러분 얼굴을 다시 보지 못할 것 같소”(22-25절)라고 유언 같은 내용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습니다.

그러자 37절을 보면 모두 크게 울고 서로 목을 껴안고 작별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참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성도의 교제입니다.

이것이 성도들과 목회자와의 관계입니다.

그런데 오늘은 이런 아름다운 관계가 다 깨졌습니다.

헤어질 때는 서로 원수가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 본문 중에 악센트를 두고 싶은 구절이 서로 울며 작별하였다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아시아 선교사역에 촌치의 여한도 없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에게는 조금의 후회도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우리들이 무슨 일을 하든지 이렇게 결산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영광이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아주 행복하고 만족할 만하게 선교사역을 감당하였습니다.

본문을 보면 사도 바울이 이렇게 만족하게 선교사역을 결산할 수 있었던 것에는 몇가지 원인이 있어 보입니다.

좋은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하나는 아주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37절을 보면 다 크게 울며 바울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고... 전송하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입니까?

모든 불행은 인간관계의 불화로 시작됩니다.

최고로 성숙한 삶은 누구나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가족 간에, 부부간에, 형제간에, 고부간에, 교우와 이웃 간에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면 이것도 은사의 삶을 이루는 삶일 것입니다.

 

특히 가족관계, 이 관계는 잘 유지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은 이 관계가 잘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가는 곳마다 불화가 넘칩니다. 가정이 불화합니다. 교회가 불화합니다. 모든 관계들이 불화합니다.

그러니까 그 불화는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마지막에 하나님과의 관계에도 악영향을 미칩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신앙의 길에서 떠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교회 성도들과 아주 화목한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서로 울며 헤어졌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의 승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맡겨진 사역을 즐거운 마음으로 감당했습니다.

두 번째는 즐거움의 사역입니다.

사도 바울은 사역을 함에 있어 아주 즐겁고 행복하게 임했습니다. 24절을 보면 하나님의 복음 전하는 일에 나의 생명조차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겠다고 하였습니다.

또 31절을 보면 내가 삼년 반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고 했습니다.

이 고백들은 에베소에 있는 동안 사역을 아주 행복하게 만족스럽게 열심히 했다는 고백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를 알고 난 이후에 주저함이나 망설임이 전혀 없는 태도로 전도사역에 임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누구인지 아십니까?

이렇게 자기가 하는 일에 기쁨과 즐거움으로 일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사도 바울은 참 행복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를 알고 난 후부터 주저함이나 망설임이 없이 전도사역에 매진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서신서 첫머리마다 공통적으로 주께로부터 부름 받아 사도된 나 바울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이 전도자의 삶은 주님께로부터 주어진 사명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는 이 전도자의 삶을 그토록 즐겁고 만족하며 수행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히말라야라는 영화를 보면 눈 덮인 높은 산을 줄 하나에 의지해서 오르는 산악인들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순간 잘못하면 수십미터 낭떠어지길로 추락해서 죽을 수도 있습니다.

또 산을 오르다 날이 저물면 오르던 줄에 매달린 채 절벽에서 밤을 지새워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렇게 영하 3-40도 되는 추위 속에서 밤을 지새웁니다.

그런데 그렇게 위험천만한 일을 왜 하는 것입니까?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지만 그 일에 기쁨이 있고 행복이 있고 즐거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책을 읽으니까 한 38세 노정헌이라는 젊은이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그는 외조부가 의사였고 아버지도 의사였습니다. 이 정도 되면 대개 부모들은 아들이 당연히 의사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들이 의사가 되면 아버지 병원을 물려받아 평생 평안한 삶을 살 수가 있으니 그렇게 살기를 원하는 것이 부모들의 일반적인 생각입니다.

 

그런데 그 아들은 그 생각만 하면 기쁨도 행복한 마음도 달아났습니다. 마음이 답답했습니다.

그러나 집안의 강요로 그는 모 의과대학에 진학을 했습니다. 이제 졸업반이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그는 본격적으로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아무래도 이 길은 내가 가야할 길이 아니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 일은 내가 밤을 새워가며 행복하게 일할 분야가 아닌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국가시험이 있던 날 그는 시험을 포기했습니다. 온 집안이 난리가 났습니다. 모두 집안 망할 것처럼 걱정하며 야단이었습니다.

그때 그는 홀연히 미국으로 떠났습니다. 그리고 요리 학교에 진학을 해서 공부를 마친 후에 돌아와 유명 호텔의 주방장이 되었습니다.

이 사람은 아주 즐겁고 행복한 마음으로, 아주 만족한 마음으로 음식을 만들었습니다.

손님들이 음식을 남겼을 때에는 그 남은 음식을 먹어보면서 왜 남겼을까, 맛이 없었던 것일까, 원인이 무엇일까를 생각하면서 밤새워 다시 연구하고 도전하며 몰두하였습니다.

남이 시킨다고 그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자신이 기쁘고 행복했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람은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살아가는데 삶의 의미가 있고 뜻이 있고 보람이 있고 행복함이 있습니다.

그렇게 보면 어쩌면 그 일은 하나님이 그에게 준 사명일 수 있습니다. 사람은 그렇게 자기에게 주어진 그 사명을 찾았을 때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일을 수행할 때 또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일하면 자신만 행복한 것은 아닙니다.

그 사람이 그렇게 일하는 모습을 보는 주위의 사람들이 모두 행복해집니다.

또 그런 사람이 있는 이 세상이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하는 일에 행복을 느끼고 있습니까?

아니면 억지로 살기 위해 일하고 있습니까?

그러니까 나의 삶에 행복이 없는 것입니다.

그 삶은 하나님이 내 인생에게 주신 사명을 발견하지 못한 삶입니다.

발견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내가 지금 무엇을 하여야 하는지, 또 장차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를 모르니까 이곳저곳으로 옮겨 다니고 그러니까 내가 하는 일이 행복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사도 바울은 연구대상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모든 사람들과 화목하게 지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역을 이루기 위해서 그는 만족하게 행복한 마음으로 그 일을 수행하였습니다.

그러니 그의 인생이 얼마나 행복하였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늘 감사한 마음을 품고 일했고 언제나 기쁨으로 일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처럼 행복하고 감사하게 전도자의 삶을 살아간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행복이나 감사는 조건이나 환경이나 소유에 있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조건은 전무한 상태였습니다. 기왕에 주어졌던 환경이나 조건들은 이미 모두 버린 상태였습니다.

그럼에도 바울이 그토록 감사하고 기뻐하며 즐겁게 사역에 임할 수 있었던 것은 예수를 발견했고 그 예수를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언제나 감사를 말하였고 기쁨을 말하였습니다.

이렇게 행복함이나 감사함이나 기쁨이 있는 사람의 얼굴은 다릅니다. 얼굴에 그 행복함과 기쁨과 감사함이 그대로 나타나게 됩니다. 그래서 얼굴은 마음의 창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설교가 스펄젼이 신학생들에게 설교학을 가르치면서 말했습니다.

희망을 설교할 때는 위를 바라보십시오. 은혜와 감사와 영광을 설교할 때는 눈을 크게 뜨고 빛나는 눈동자를 보이십시오.”

그러자 한 학생이 그러면 지옥을 설교할 때는 얼굴표정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 때 스펄전자네 지금 얼굴 표정이 적당하네라고 대답하였다고 합니다.

사람이 얼굴을 찌푸릴 때는 근육이 72개가 움직이고 웃을 때는 14개만 움직인다고 합니다.

그 말은 불평과 원망으로 얼굴을 자주 찌푸리면 주름살이 늘어난다는 말이고 쉽게 늙는다는 말입니다.

또 그 말은 감사의 삶과 기쁨과 행복할 때는 그동안 원망과 불평으로 구겨졌던 주름살이 펴진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범사에 감사하라 항상 기뻐하라고 하였습니다.

그것도 어디에서 하신 말씀인가 하면 옥중에서 밖에 있는 성도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는 너무 서툴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삶을 기쁨으로 영위하는 법을 모르고 잊은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행복한 마음으로 사역에 임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사역에 승리하고 성공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주는 삶은 행복한 삶입니다.

또 하나는 주는 삶입니다. 35절을 보면 약한 자들을 돕고 또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주다라는 말에는 넓은 뜻이 들어 있습니다.

영적으로 약한 자를 돌보는 일도 주는 삶입니다. 병들고 신체적으로 약한 사람을 돌보는 일도 주는 삶입니다.

교회에 처음 나온 분들을 돌보는 일도 주는 삶이고 예수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에게 전도하는 것도 주는 삶입니다.

물론 물질을 나누는 것도 주는 삶입니다.

이런 나눔의 삶은 참으로 고상한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타인을 행복하게 하고 자신을 행복하게 해주는 삶이 나누는 삶입니다.

 

어느 ‘TV 프로그램에서 아프리카의 모습이 방영되었습니다.

화면에는 가난하고 열악한 집안 모습이 비추어졌습니다. 고만고만한 아이들 셋을 키우고 있는 엄마는 먹일 것이 없어 마음이 늘 안타까웠습니다.

그때 제작진이 빵 하나를 어머니에게 건네주었습니다.

그 빵을 받아든 어머니는 주저하지 않고 빵을 세 조각으로 나누어서 아이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맛있게 먹는 아이들을 바라보면서 그토록 행복해 했습니다.

그 얼굴 표정은 자신이 배불리 먹는 것보다 훨씬 더 행복한 모습이었습니다.

내가 배고픈데, 내가 못 먹는데 어떻게 행복할 수 있습니까?

그것이 주는 행복입니다.

주는 행복은 받을 때 주어지는 행복과는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의 삶은 다 주는 삶이었습니다.

인생도, 생명도, 물질도, 자신의 혼까지도 예수를 위해 다 내주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는 언제나 당당하였습니다. 그래서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을 것이라고 자신있게 고백하였습니다.

그래서 기부자는 언제나 당당한 것입니다. 또 독지가나 자선가도 언제나 당당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누기 때문입니다. 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꾸러 다니는 사람은 당당할 수가 없습니다.

빚진 자도 항상 떳떳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마지막으로 교훈을 남기고 있습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 보다 복이 있다.”

 

살 때 부끄러울 것이 없는 삶을 살게 돕니다.

또한 부끄러움이 없는 삶입니다. 본문은 3년 동안 에베소에서의 전도의 삶을 결산하는 내용입니다. 그는 돌아오는 길에 에베소교회 장로들을 밀레도로 불러 자신의 사역에 대해 결산을 하고 있습니다.

33절을 보면 내가 아무의 금이나 은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고라고 선언합니다.

그 말은 그동안 내게 무슨 하자가 있거나 떼먹은 돈이 있거나 원망을 살 일이 있으면 말해보라는 말입니다.

그러자 37절을 보면 다 크게 울며 바울의 목을 안고 입 맞추고 작별하니라고 했습니다.

그 말은 내 인생에 부끄러울 일이 없었다는 말입니다.

이 마지막 결산이 중요합니다. 마지막이 좋아야 다 성공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만날 때도 좋아야 합니다.

그런데 헤어질 때는 더 좋아야 합니다.

사람은 태어날 때도 모두가 기다리는 중에 태어나야 합니다. 그것이 복을 받은 생명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생을 마칠 때에도 행복하게 떠나야 합니다.

남겨진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모습으로 남아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습입니다.

 

마틴 루터 킹 목사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사람들이 내게 장례식장에서 무슨 말로 평가해 주기를 원하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모든 사람을 사랑했던 사람이었다는 말을 듣고 싶다.”

그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모습일 것입니다. 시작도 중요하지만 마지막이 더 중요합니다. 마치고 결산하는 시간이 더 소중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한 교회에서 몸담고 신앙 생활하는 성도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한 교회로 모아주셔서 한 형제자매들이 되었습니다.

서로가 얼마나 소중한 지체들입니까?

이제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은 서로 섬기며, 돌보며, 헌신하며, 나누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신 뜻입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그런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삶의 모습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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