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사40장 6- 8)
성경본문: 이사야40: 6-8
6 말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하니 이르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의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으니
7 풀은 마르고 꽃이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8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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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사랑을 이미 경험한 성도 여러분,
그리고 하나님을 믿으려고 이 자리를 찾으신 이웃 여러분, 오늘 본문은 우리가 지금 예배하는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소식을 시온에 전하는 자여, 너는 높은 산에 오르라 아름다운 소식을 예루살렘에 전하는 자여‘ 너는 힘써 소리를 높이라 두려워 말고 소리를 높여 유다의 성읍들에 이르기를 너희 하나님을 보라 하라”
이 말씀을 누구에게 처음 하셨습니까?
이 예언은 약 2,700년 전에 주어졌습니다.
바벨론의 포로가 된 이스라엘이 70년 가까운 세월을 보내고 있을 때에 예언자 이사야가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 소리친 것입니다.
당시 바벨론제국의 포로 생활을 하는 이스라엘을 향해 주신 말씀입니다.
그 죄로 인해서 처참한 강제노동을 하고 있는 이스라엘을 기억해 보십시오.
이사야는 지금 그들을 해방시키려고 오는 하나님을 보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너희 하나님을 보라”
“너희를 속박의 굴레에서 구출하러 오시는 그 하나님을 보라”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에 대해서 소리치라는 외치라는 것입니다.
그때는 스피커도 라디오도 텔레비전도 스마트폰도 없었습니다.
그러기에 널리 알릴 소식이 있는 사람은 높은 곳에 올라가야 했습니다. 거기서 목소리를 높이는 길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지금은 한꺼번에 많은 사람에게 알리기 위해서 어떻게 합니까?
대통령이 특별담화를 발표할 때는 옛날에는 담화문을 발표해서 담벼락에 붙였습니다만 지금은 텔레비전을 사용합니다.
하지만 그때로서는 달리 알릴 방법이 없었습니다.
높은 곳에서 외칠수록 많은 사람이 들을 수 있고, 거기서 목소리를 높일수록 더 많은 사람들이 들을 수 있었습니다.
70년의 포로 생활이 끝나고 곧 해방시키러 오는 “너희 하나님을 보라”고 감격에 떨리는 목소리로 예언하고 있습니다.
동일한 감격의 목소리로 울산광역시 사람 사는 동네마다 선포해야 합니다.
“너희 하나님을 보라”
죄 가운데 매여서 살고 있는 사람들을 향해서 외칩시다.
서로 미워하고 시기하고 증오함으로 그 삶을 끝내지 않도록 도와줍시다.
모든 사람들을 향해서 “너희 하나님을 보라” 고 고해야 합니다.
문제는 상대방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사랑하지 못하고 사는 우리 자신이 죄인인 것을 선언해야 합니다.
문제의 핵심은 사람들을 이간시키는 악한 영에게 있다는 것을 선포해야 합니다.
우리는 죄에서부터 구원하러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골목마다 집집마다 전하기 위해서 부름 받은 사람들입니다.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는 예언의 그 1차적인 성취는 바벨론 포로에서 해방되므로 시작해서 그 온전한 성취는 대망의 구주 오심으로 완성되었습니다.
본문의 예언도 바벨론의 70년 포로생활을 끝내므로 성취되기 시작했지만 그리스도 오심으로 악한 영의 포로 된 백성이 해방됨으로 성취됩니다.
지금도 이 소식을 듣고 마음에 믿는 모든 사람의 삶에 실현되고 있는 예언입니다.
본문을 유심히 보십시오.
개역개정 성경을 읽어보면 “아름다운 소식을 시온에 전하는 자여”
누군가가 아름다운 소식을 시온에 전하고 있습니다.
개역개정 성경을 번역한 사람들은 시온이야 말로 이 아름다운 소식을 들어야 할 사람들로서 여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난 하의 주를 보면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시온이여 너는”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예루살렘이여 너는”라고도 번역할 수 있다는 것을 밝혀두고 있습니다.
난 하의 주를 따라서 이해하면 시온이 이 아름다운 소식을 전할 자로서 지칭되고 있습니다.
난 하에 주를 달 때는 대개 의견이 팽배했을 때입니다.
두 가지 의견이 문법적으로 타당하여 백중세를 이룰 때 난 하의 주를 달아서 그 소수 의견을 밝히게 됩니다.
문법적으로 보아 둘 다 타당하고 문맥적으로 보아도 일방적인 판단이 되지 않았기에 주를 첨가한 것입니다.
“아름다운 소식을 시온에 전하는 자여! 너는 힘써 소리를 높이라, 두려워 말고 소리를 높여 유다의 성읍들에 이르기를 주 너희 하나님이 오시고 있다”고 해도 은혜가 됩니다. 또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시온이여 너는 가서 큰 소리로 유다의 성읍들에 전하라 주 너희 하나님이 오시고 있다”고 해도 마찬가지로 은혜가 됩니다.
다행히 우리는 이런 문제에 봉착할 때 둘 중의 하나를 꼭 선택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순수한 학문적인 욕구를 채우기 위해서는 모르지만 보통 신자들에게는 둘 다 생각해도 상관이 없습니다.
시온은 우선 이 소식을 들어야 할 대상입니다.
구원자 하나님이 오고 있다는 소식을 들어야 할 대상입니다.
70년이란 세월은 짧지 않은 세월입니다. 세월이 흘러 갈수록 포로생활은 더 굳어만 가는 상태에 있었던 것입니다. 포로에서 풀려난다는 것은 당시 세계정세를 볼 때 도무지 불가능했습니다. 마치 남북통일처럼 말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 민족도 분단된 지 벌써 70여년을 훌쩍 넘어서는 세월을 살았습니다. 분단 70여년을 넘어서는 세월을 보내면서 분단되어 사는 것이 일상인 것처럼, 마치 그것이 기정사실인 것처럼 모두들 받아들이고 있지 않습니까?
이스라엘 역시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서 70년의 세월이 차기까지 거기에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영원히 종노릇하면서 살 것처럼 보이던 것이 그 당시의 정치적 현실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여기 이사야 선지자는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시온에 소식을 전하는 자여, 너희 해방자가 다가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그런 소망을 우리 민족에게, 한국교회에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성도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남북이 하나 되는 날을 주시기를 소원합니다.
그것은 남북 간에 더욱 더 적대감을 심어서 이루어 질 일이 아닙니다.
남쪽 사회의 평화도 잘 사는 사람과 못사는 사람을 이간시킴으로서 풀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계층 간에 적대감을 심어서 이룰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이 일은 서로 서로 섬김으로, 서로 서로 사랑함으로 이루어 질 수 있는 일입니다.
밤낮 부르짖는 성도들의 기도를 통해서 병영화 되고, 사교화 되어 있는 북녘 땅은 해방될 수 있을 것입니다.
역시 밤낮 없이 부르짖는 성도들의 기도를 통해서 돈의 노예가 되어서 잘 사는 것이 전부인 것처럼 사는 남녘 사람들에게도 진정한 해방의 날이 올 것입니다.
교회가 부조리한 현실을 바라보면서 묵시적 동조를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동시에 교회가 모든 기존 질서를 파괴하는 혼란의 모판이 되어서도 안 됩니다.
남북통일이나 남남갈등 역시 계층 간의 적대감을 고조시켜서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화해의 씨를 뿌리는 작업을 하므로 가능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복음을 먼저 들은 우리가 복음대로 사는 삶이 어떠한 것인지를 보여줍시다.
“너희 평화를 심는 자여” 우리는 이 땅에 평화를 심는 자들입니다. 남북통일을 위해서도, 빈부의 갈등을 위해서도 평화의 씨를 뿌리고 가꾸는 우리의 사명을 계속해서 감당합시다.
본문에 의하면 성도들은 누구입니까? “아름다운 소식”을 들어야 하는 자입니다. 동시에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자입니다.
먼저 시온은 오늘 이 소식을 들어야 할 대상입니다.
오늘 교회는 하나님이 해방하러 오셨다는 이 소식을 들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해방 자는 붉은 군대가 아닙니다.
흰옷 입은 예수 그리스도의 의의 군대입니다.
흰옷 입은 주님의 군대만이 인생을 죄에서 해방시킵니다.
오늘 남쪽에 있는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교회의 이름으로 정치에 시중드는 일이 사라질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새로운 세상은 물질 만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행복해지기 위해서 지금보다 몇 배의 국민소득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지금 가진 것을 함께 나누므로 건설될 수 있는 새로운 사회입니다. 그것을 실험할 수 있는 현장이 바로 신앙 공동체입니다.
구역 소그룹이 그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시온은 예루살렘의 애칭이며 교회의 별명입니다.
“지금껏 절망 가운데 지낸 너 예루살렘이여 너 시온이여 무거운 죄의 아래 있는 너희여 위로가 필요한 내 백성이여 너희 하나님을 보라”
기쁨과 확신 가운데 외치는 전령사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그가 오시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는 지은 죄 때문에 고개를 들지 못하고 지내는 분은 없습니까?
후회와 절망 속에서 사는 분은 없습니까?
자신이 지은 죄로 인해 아직도 하나님의 벌을 받고 있다고 자신을 정죄하고 사는 분은 없습니까?
여러분의 죄악을 용서하러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오.
여러분이 지은 죄에서 눈을 돌려 그 죄를 용서하려고 대신 처벌받으신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죄 아래 사는 인생에게는 기쁨이 없습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꽃향기도 여러분의 심령을 새롭게 하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해방 자 하나님의 어린양을 보십시오.
여러분이 지은 죄 때문에 하나님의 손에서 대신 배나 받으신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대망하십시오.
죄 때문에 고통 하는 심령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흘린 보혈로 씻음을 받을 때 그 심령에 평안이 찾아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 지은 죄를 사함 받은 기쁨을 누린 분은 그 체험을 날마다 새롭게 하십시오.
“주 예수 내 맘에 들어와 계신 후 변하여 새 사람 되고
내가 늘 바라던 참 빛을 찾음도 주 예수 내 맘에 오심
주 예수 내 맘에 오심 주 예수 내 맘에 오심
물밀듯 내 맘에 기쁨이 넘침은 주 예수 내 맘에 오심”
그 찬송이 여러분 자신의 것이 되었던 그 순간을 돌이켜 보십시오.
그러면 용서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라는 이 소식을 전하는 일에 여러분의 삶을 드리고 싶은 소원이 생길 것입니다.
“너희 하나님을 바라보라”고 유다의 성읍에서, 죄 중에 포로 된 동료인생을 향해서 소리치고 싶은 소원이 용솟음 칠 것입니다.
그러기에 시온은 이 아름다운 소식을 들어야 할 자요 동시에 전해야 할 자입니다.
성도는 이 복된 소식을 들어야 할 자요 동시에 이들은 복음을 전해야 할 자입니다.
우리는 “너희 하나님을 보라”고 높은 곳에서 외칠 참된 사명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학자들이 의견이 나뉘는 곳에도 즐거워하면서 생수를 마실 수 있습니다.
입장이 다른 것을 분열이라고만 보지 마십시오.
서로 다른 입장을 취한다고 대립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두 해석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이중 축복임을 깨닫기를 바랍니다.
이 소식은 우리가 들어야 할 소식인 동시에 전해야 할 소식입니다.
이 혼란한 세대에 복된 소식을 전합시다.
계층을 화해시키고 민족분단을 풀 수 있는 이 복된 소식이 성경에 있다는 것을 전합시다.
다행히 역사는 칼 막스의 이론대로 진전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바에 따라서 진행됩니다.
민족사(民族史)는 남의 피를 흘림으로서 건설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흘린 보혈에 의해 진전됩니다.
역사의 발전은 계층 간의 투쟁을 통해서가 아니라 계층 간의 섬김을 통해서만이 진전됩니다.
갖지 못한 자가 가진 자를 적으로 규정하고 투쟁하는 대신 가진 자가 갖지 못한 자의 아픔을 나눌 때 새로운 사회는 건설됩니다.
불타는 적개심을 가지고 더 많이 가진 타인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재물의 차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인생을 애끓는 사랑을 가지고 대할 때 새로운 세계는 건설됩니다.
조국 대한민국은 부르주아 몇 십만을 살상시켜야 개조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흘린 보혈이 전해져야 민족사는 개선됩니다. 그 보혈에 근거해서 나도 눈물을 흘리고, 나도 땀을 흘리며, 필요하다면 나의 피라도 바칠 각오가 될 때, 사람 살만한 세상이 도래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계층 간에 불화 대신 화평을 심는 복음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조국 민족사를 바꿀 수 있는 유일한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은 이 땅에 평화를 심고 일구어가는 유일한 무리들입니다.
열악한 생존 환경 속에 사는 노동자의 자취방에 가보고 도우려는 마음이 세상을 새롭게 합니다.
눈을 들어 해외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손을 펴서 이 땅에 들어와 있는 이주 외국인을 도와야 합니다.
날로 치열해지는 무역 경쟁 속에 사업주의 고충을 이해하는 노동자의 마음이 세상을 새롭게 합니다.
‘이 회사 망하면 다른 회사 가면 되지’ 하는 심리로 나오면 서로 망합니다.
부자 동네 지나면서 이놈의 세상 뒤집혀야지 되뇌면 신앙인의 마음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서로 싸우다가 함께 망하는 일이 없도록 눈물로써, 새벽을 깨우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의심이 있는 곳에 신뢰를, 불화가 있는 곳에 평화를, 싸움이 있는 곳에 화목을 심는 자가 그리스도인입니다.
악의 영이 지배하는 곳에는 의심, 불화, 싸움이 있습니다.
노동자의 마음속에도, 사용자의 마음속에도 동일한 악령이 판을 칩니다.
기물을 파괴하는 이들의 마음 속 만큼이나 인간 이하의 열악한 생존 환경에 처한 노동자의 형편을 무시하고 자기 이익을 챙기는 경영자의 마음속에도 악령이 지배합니다.
서로 도우며 사는 대신 이용, 갈취하려는 마음속에는 언제나 악령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사람들을 만나서 확신을 갖고 설득합시다.
그러기 위해서 여러분 자신이 사죄를 말미암아 맺어진 새 공동체가 어떤 것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이 공동체에서 사랑 받는 것이 무엇인지를 경험해 보아야 합니다. 이 공동체에서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 체험해 보아야 합니다.
서로 용서하고 용서받는 그것이 어떤 즐거움인지 여러분 자신이 느껴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정말 내 필요한 것도 채우지 못하는 다급한 사정이지만 형제자매의 어려움을 볼 때에 그 필요를 채워 줄 것입니다.
그 즐거움을 맛본 사람만이 세상에 나가서 여기 새 길이 있다고 전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삶이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한 삶이 되지 못할 때에 주일마다 듣는 복음이 여러분의 마음에 부담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여러분에게 부담을 주기 위해서 설교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일마다 야단을 친다고 오해하지 마십시오.
여러분 자신이 복음에 입각한 삶의 결단을 내리면, 여기서 듣는 설교가 복된 것으로 느껴질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삶이 세상보다 탁월해야 합니다.
강제가 아니라 자원함으로 섬기는 기쁨을 맛보십시오.
하나님이 내게 주신 물질이지만, 나눌 수 있는 기쁨을 체험하십시오.
그래야 우리의 삶에 자신을 갖게 될 것입니다. 어느 순간 누굴 만나도 이 길만이 살길이라는 것을 전할 수 있는 자신을 가질 것입니다.
그저 예수 믿는다고, 은혜로 구원받는다고 말들은 하면서 전적인 헌신을 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말씀 듣는 순간부터 고민하게 됩니다.
설교자의 톤만 조금 높아져도 야단을 맞는다고 느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그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야 할 때입니다.
들을 말씀을 따라서 아주 작은 부분이라도 순종해 보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마음에 평안과 기쁨이 자리할 것입니다.
설교자와 함께 “너희 하나님이 오시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갈 때는 천둥과 벼락 속에서도 평안을 누릴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통해서 “너희 하나님이 오시고 있다”는 소식을 이 세상에 전하기를 원하십시오. 이 혼란한 세대에 여기 복된 소식이 증거 할 책임을 우리에게 맡기셨습니다.
이제는 그저 슬그머니 문 밑에 전도지를 밀어 넣고 마는 그런 소극적인 태도에서 탈피해야 합니다. 그저 편지통에 꽂아두고 도망치듯 나오는 것이 아니라 여기에 새 소식이 있다는 것을 확신을 가지고 당당히 전하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복음을 위해 일어서는 성도들이 되기 위해 우리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본문에 따라 좀 더 살펴봅시다.
“보라 주 여호와께서 장차 강한 자로 임하실 것이요. 친히 그 강한 팔로 다스릴 것이라 보라 상급이 그에게 있고 보응이 그 앞에 있고 그는 목자같이 양 무리를 먹이실 것이요 어린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시리로다”
9절에서 “너희 하나님을 보라”고 외치고 나서 10, 11절에서 그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자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기 예언자는 하나님을 장차 오실 강한 자로 표현함과 동시에 한없이 부드러운 목자로서 묘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열방 가운데서 이스라엘을 구출하러 오시는 강한 통치자로 먼저 소개합니다.
친히 그 팔로 다스리는 강한 자로 올 것을 예언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대적하는 모든 세력들을 철장으로 질그릇 깨뜨리듯이 다스리시는 강한 통치자입니다.
하나님을 아십시오.
우리 하나님을 대적하는 어떤 세력도 깨뜨려졌고 깨뜨려 질 것입니다.
어떤 개인이나 단체나, 어떤 나라라도 하나님의 역사를 대적한 순간 그들은 최후통첩을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 역사의 진전은 결단코 가로막히지 않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인간계의 어떤 세력이나 영계의 어떤 세력에라도 그 세력들을 격파하는 분입니다.
그 하나님과 더불어서 성도들은 여기까지 왔습니다.
사단은 언제나 우리는 대항합니다.
항상 하나님의 역사를 거역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악의 세력도 우리 구주, 강한 그 통치자를 이길 수 없습니다.
사단은 능력이 있지만 우리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입니다.
악한 자가 승리했다고 생각하는 순간은 항상 하나님의 승리의 순간입니다.
그 하나님께 사로잡힘으로서 우리가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과 함께 또 나아갈 것입니다.
나아가서 내노라고 하는 모든 인생들에게 진리를 증거 할 것입니다.
“그런즉 군왕들아 너희는 지혜를 얻으며 세상의 관원들이 교훈을 받을 지어다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찌어다 그 아들에게 입 맞추라 그렇치 않으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그 진노가 급하심이라.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다 복 되도다.”
우리가 전하는 하나님은 강한 자이십니다.
초개같은 인생들을 붙들고 믿어 달라고 애걸하지 않습니다.
풀의 꽃같이 사라지는 그 인생의 영광 앞에 황홀해 하는 그런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온갖 상품권과 선물을 수없이 쌓아 놓고 사람들을 한번만 와 달라고 비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이웃 여러분,
하나님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신앙 생활하는 기쁨을 맛볼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을 알아야 그 하나님을 바로 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로 알지 못하면 잘못된 방법을 동원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바로 알지 못하면 잘못된 하나님을 잘못 전하게 됩니다.
“너희 인생들아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찌어다 그 아들에게 입 맞추라 그렇치 않으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그 진노가 급하심이라”
그 팔의 위력으로 친히 다스리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증거 합시다.
모든 인생을 없는 것 같이 여기시는 하나님을 우리는 섬기고 있습니다.
하늘을 나는 새라도 떨어뜨린다는 권세자들조차 우습게 아시는 분이십니다.
사랑하는 이웃 여러분, 우리 하나님은 능력이 한이 없으신 분이십니다.
그 분은 전능자이십니다.
전능 자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신 사람은 삶의 차원이 달라집니다.
하나님을 섬김으로 거침없는 인생노정을 시작하십시오.
오직 한 분만 두려워하면 세상 누구도 두렵지 않습니다.
그분의 뜻만 주시하면 언제나 방황하지 않습니다.
거침없는 인생을 이제부터 살아보십시오.
“보라 그 앞에 상급이 그에게 있고 보응이 그에게 있으며”
그저 속수무책으로 인생의 소요사태를 바라보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수 만 명이 모여 시위를 했다는 보고를 듣고 어쩔 줄 몰라 그 숫자에 맞먹는 전경을 풀지 않으면 안심할 수 없는 그런 세상의 군왕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위대한 통치자이신 동시에 위엄 있는 심판관이십니다.
전능의 능력으로 오늘 이 세상을 다스리시는 동시에 내일 우리 삶을 심판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의 원수에게는 징벌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교회가 하는 일이면 앞장서서 반대하며, 성도가 잘되는 것을 질시하는 이들을 가차 없이 심판하시는 분이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남달리 사랑하고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자에게는 상급으로 찾아오십니다. 은밀한 가운데서 하나님을 섬기며 흘리는 눈물을 하나님은 기억하십니다.
그를 위해 은혜로운 보상의 때를 반드시 지키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분의 말씀이 신속히 이뤄지기를 기다리고 있습니까?
그분이 오신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두려워하고 있습니까?
그분 오심을 기다리는 자에게는 상급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분 오심이 두려운 자에게는 보응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 개개인의 삶을 판단하지 않겠습니다.
오늘이라도 주님이 오셔서 여러분을 만나시면, 오늘이 여러분의 최후의 시간이 된다고 한다면 여러분은 그 순간을 어떤 심정으로 맞이하시겠습니까?
그것이 여러분이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를 판단할 것입니다.
불신앙에서 신앙의 자리로 나아오십시오.
불순종에서 순종의 자리로 나오십시오.
죄의 용서를 구하는 자는 죄의 용서 뿐 아니라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는 능력까지 하나님은 주십니다.
능력 있는 통치자요 위력 있는 심판자로 하나님을 소개한 뒤에 자애로운 목자로서 하나님을 말해 줍니다.
행여 하나님을 오해하지 않도록 또 다른 하나님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는 목자 같이 양 무리를 먹이시며 어린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시리로다”
“그는 목자같이 양 무리를 먹이시며”라고 하면 확 가슴에 와 닿아야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문화가 달라서 그렇습니다.
우리는 목자노릇을 해 본적도 없고 목자노릇 하는 것을 구경한 적도 없으니까 그 말이 주는 감동을 느끼지 못합니다.
차라리 개나리 피는 봄날에 “어미 닭이 그 병아리를 돌보듯이 돌보시는 분이시다”고 말하면 조금 감동이 될지 모르겠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목자라는 말만 들어도 가슴 찡하게 와 닿는 것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언자는 그 이스라엘을 향해서 자세히 풀어서 목자 되신 하나님이 얼마나 자상하신 분인가를 설명해 준 것을 당대의 사람만이 아니라 오늘 이 말씀을 듣는 우리들까지 생각하고 계셨던 것 같습니다.
이사야가 어떻게 우리를 알았겠습니까만 이사야를 통해서 말씀하신 하나님의 영은 오고 오는 세대에 이 말씀이 증거 되어야 함을 아셨기 때문이죠.
이런 작업이 바로 가르치는 자들이 해야 하는 작업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뭉뚱그려 가르쳐도 알아듣는 이들은 알아듣겠죠.
그래서 목자같이 양 무리를 먹이시는 그 말만 들어도 감격해서 눈물 콧물 흘리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그래가지고 아직도 잘 모르는 이들도 있을 것이니까 “그는 목자 같이 양 무리를 먹이시며 어린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고 다니는”이라는 설명이 필요합니다.
양을 치는 어지신 목자를 생각해 봅시다.
이스라엘 목자는 푸른 풀이 자라는 목장에서 양을 먹이지 않습니다. 당시의 목자는 풀을 따라 옮겨 다니면서 양을 칩니다. 양떼들을 이동을 시켜야 하는데 갓 태어난 양들을 걷게 하기에는 목자의 마음이 너무 애처롭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이동을 한다면 안아야 된다는 것 그게 여기 목자의 심정입니다.
그리고 그는 젖먹이들을 기르는 암컷들을 인도할 때 부드럽게 한다 그랬지요.
여러분 가운데 미약한 자기모습으로 고민할 때에 목자를 기억하십시오.
이 선하신 목자를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이 연약할 때 안고 가는 그 주님을 생각해 보십시오.
험한 길을 혼자 걷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그 품에 안고 가는 주님을 생각하십시오.
이런 저런 일로 신앙생활하기 어려워하는 분은 없습니까?
여러분 곁에 주님이 계십니다.
여러분의 행보에 맞춰서 걷고 계신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제가 목회 하면서 배웠던 것 하나가 그것입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초원이 기다리고 있다 하더라도, 오아시스와 샘솟는 곳이 펼쳐져 있다 할지라도 그곳을 향해서 채찍으로 성도들을 다그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성도들의 행보대로 나아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게 목자의 일이라는 것을 그동안 배웠습니다.
방향은 목자로서 제시하지만 속도는 여러분에게 달렸습니다.
그 중에는 천천히 걷는 사람도 있으니까 제게 필요한 것은 인내입니다.
그래서 “주의 종은 가르치기를 잘하며 오래 참고” 라고 하는데 그 “오래 참고”가 왜 거기 나오는지 이제는 제가 조금 깨닫습니다.
어릴 때 제 별명은 불 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상당히 오래 참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힘을 내십시오. 주님이 여러분 곁에 여러분의 상황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또 여러분 가운데서는 힘을 내고 가야 할 사람이 있습니다.
좀 빠른 걸음으로 가야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혹 여러분의 힘이 그것밖에 안 되어서 천천히 걷는다면 그때도 주님이 함께 하십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여러분은 이 놀라운 주님을 만난 적이 있습니까?
이 놀라운 주님의 인도를 받아 보신 적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이제 높은 곳에 올라가서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십시오.
힘껏 소리 높여서 그 아름다운 하나님을 외롭고 지친 인생길을 걷는 이들에게 전합시다.
무모하리만큼 어리석게 인생을 사는 이들에게 심판주가 있다는 것을 전해줍시다.
자기 뜻대로 안 된다고 짜증내는 인생들에게 인생은 내 뜻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뜻을 이루는 기회임을 전해 줍시다.
너무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 만을 위해 복음의 축복을 마음껏 누리고 있지만, 아직도 수없이 많은 이들은 그 축복을 들어본 적도 없습니다.
올해 남은 반년은 아름다운 소식을 함께 듣고 힘껏 전파하는 성도들이 되도록 다 함께 나아갑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