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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용수 목사

[정근두목사]무엇으로 보답할까(시116: 8-12)

작성자성경 벌레|작성시간22.07.31|조회수337 목록 댓글 0

무엇으로 보답할까(1168-12)

성경본문: 시편116: 8-12

8 주께서 내 영혼을 사망에서, 내 눈을 눈물에서, 내 발을 넘어짐에서 건지셨나이다

9 내가 생명이 있는 땅에서 여호와 앞에 행하리로다

10 내가 크게 고통을 당하였다고 말할 때에도 나는 믿었도다

11 내가 놀라서 이르기를 모든 사람이 거짓말쟁이라 하였도다

12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내가 여호와께 무엇으로 보답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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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의 자리를 사모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이 예배의 자리에 함께 하신 이웃 여러분, 한가위 명절에 고향 잘 다녀오셨습니까?

민족고유의 감사절인 추석명절에 시작한 시편 116편을 오늘도 계속해서 살피도록 하겠습니다.

지난 주 말씀 드렸듯이 시편 116편은 한가위와 같은 절기에 살펴보기 합당한 감사의 시입니다.

신앙의 시인이 노래한 이 감사의 시 가운데 첫 두 분을 지난 주일에 살폈습니다.

 

서론이자 이 시 전체의 결론처럼 보이는 첫 부분과 그 결심에 도달한 구체적인 사연이 담긴 두 번째 부분을 살폈습니다.

오늘은 지난주일 살핀 전반부를 요약한 다음 오늘 본문인 8~12절, 세 번째 부분을 살피도록 하겠습니다.

 

시인은 맨 앞 첫 부분(1, 2절)에서 이 시 전부를 통해 하고 싶은 말을 고백합니다.

여호와께서 내 음성과 내 간구를 들으시므로 내가 그를 사랑하는도다. 그의 귀를 내게 기울이셨으므로 내가 평생에 기도하리로다

 

그리고는 두 번째 부분(3~7)에서 왜 그런 고백을 했는지를 풀어갑니다.

갑작스런 죽음의 위기에 몰렸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마치 저승사자가 포승을 가지고 그를 묶어, 음부로 끌고 가서 어두컴컴한 감옥에 가두는 것과 같은 절망적 상황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내 영혼을 건지소서!”라는 절규에 가까운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 때 주님이 개입하셨습니다. 사망의 줄을 끊으시고 음부의 고통에서 그를 구원해 내셨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을 새롭게 경험하고, 조상들의 신앙에 합류합니다.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며 의로우시며 우리 하나님은 자비하시도다.”

 

하나님에 대한 이런 아름다운 고백은 옛날 모세 시대부터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시인은 옛 조상들의 고백을 지금 자기 것으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사실 신앙이란 이미 수많은 성도들이 고백해 온 진리를 자기 것으로 인식하는 행위입니다.

신앙의 선배들이 앞서 체험한 진리를 지금 자신의 것으로 깨달을 때 믿음의 세계로 발걸음을 내딛습니다.

 

시인은 먼저 그분의 속성을 자기 고백으로 노래한 다음 이어서 그분의 사역을 고백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어리석은 자를 보존하시나니 내가 낮게 될 때에 나를 구원하셨도다.”(6절)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낮아질 때, 하나님의 구원은 찾아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비천한 자리에 떨어질 때, 찾아오십니다.

사람사이에 천덕꾸러기가 되고 미움과 눈총을 받는 자리에 있을 때 찾아오십니다.

 

삶이 바닥을 칠 때 하늘을 바라보십시오.

여러분도 내 영혼을 건지소서!”라고 절규해 보십시오.

무서운 질병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처참한 실패의 자리에서도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사람들 사이에서 비방과 멸시가 넘칠 때에도 하늘의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주님은 거기서 여러분을 구원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죽을 질병에서 우리를 건지시며, 파산선고가 내린 사업도 다시 일으키시며, 떨어진 명예를 다시 회복시키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구원을 체험한 시인은 스스로를 달랩니다.

내 영혼아 네 평안함에 돌아갈지어다. 여호와께서 너를 후대하심이로다.”(7절)

영적 침체에서 벗어나는 최선의 방법은 자신에게 하나님의 진리로 타이르는 법을 배우는 것임을 꼭 기억하십시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러므로 여러분의 마음속에 들리는 부정적인 소리나 사탄의 파괴적인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대신 하나님의 진리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하나님은 여전히 여러분을 사랑하시며 아직도 여러분을 위하여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더 이상 잃어버린 것에만 연연해하지 마십시오.

아직도 남겨진 것들로 인해서 감사하십시오.

사랑하던 이가 떠난 것으로 허전해하는 대신 아직도 당신의 사랑을 기다리는 이들을 남겨져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여러분을 후대하신 하나님을 회상하십시오.

여호와께서 너를 후대하심이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을 후대하셨습니다. 우리 모두에게 풍성한 은혜로 찾아오셨습니다. 풍성한 소산으로 인한 기쁨보다도 더 큰 구원의 기쁨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시인 다윗은 고백합니다.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저희의 곡식과 새 포도주의 풍성할 때보다 더하니 이다.”(시 4:7)

하나님은 풍성한 추수의 기쁨보다 더 큰 기쁨을 우리의 마음에 허락하셨습니다.

하늘에서 가장 귀한 당신의 아들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리고 성령을 덤으로 주셨습니다. 성령을 통해서 하늘에 속한 모든 복을 다 허락하셨습니다.

하늘의 충만한 은사들을 모두 허락하셔서 그 충만한데서 우리는 모든 것을 얻습니다. 그리하여 은혜 위에 은혜를 누리며 살게 하십니다.

 

이제 오늘 본문인 이 시의 세 번째 부분(8~12절)을 살핍시다.

오늘 우리가 살필 세 번째 부분은 앞에서 설명한 자신이 당한 시련과 주님이 베푸신 구원을 좀 더 상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후대하신 하나님의 행동을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주께서 내 영혼을 사망에서, 내 눈을 눈물에서, 내 발을 넘어짐에서 건지셨나이다.”(8절)

후대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일들이 하나씩 열거하고 있습니다.

보십시오. 시인은 내 영혼을 건지소서.”(4절)라고 단 한 마디를 아뢨는데 하나님은 세 가지나 주셨습니다.

 

영혼을 사망으로부터, 눈물로부터 눈을 구원하시고, 넘어짐에서부터 발을 구원하셨다고 증거 합니다.

이 모든 것을 경험하고도 그 영혼이 평안함에 돌아가지 못한다면 여러분은 더 이상 어떤 것에도 만족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가 간구한 것 이상, 넘치도록 우리에게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구한 것이나 상상한 것보다 훨씬 넘치도록 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는 그 분을 찬양합니다.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무궁하기를 원하노라 아멘(엡3:20-21)

 

그 때 시인의 현실은 사망과 눈물, 넘어짐으로 묘사되는 처지였습니다.

그는 너무나 어려운 시련을 많이 당했습니다. 그는 슬픔으로 인해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의 걸음은 몸을 가눌 수 없이 비틀거렸습니다.

 

그러나 이제 모든 슬픔과 위험이 사라지고 사망에서 그 생명을 건져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시인은 고백합니다.

내가 생명이 있는 땅에서 여호와 앞에 행하리로다.”(9절) 죽음이 넘실대던 사망의 세계에서 이제 생명이 있는 땅으로 넘어왔습니다.

사망의 그늘진 땅에서 이제 생명의 빛이 넘치는 땅으로 넘어왔습니다.

시인은 이제 생존 세계에서 사는 자유를 마음껏 느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을 후대하신 하나님은 여러분의 생명을 무덤에 버려두지 않게 하셨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을 슬픔의 골짜기에 던져두지 아니했습니다.

여러분의 삶의 걸음걸음을 넘어지지 않도록 인도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생명의 하나님께서 우리를 가까이 하시면, 사망은 놀라 달아납니다.

영혼의 구원을 받은 자에게는 죄로 인한 회한의 눈물은 마르고, 심판의 두려움은 사라집니다.

그러므로 시인은 자신의 생명이 허락하는 한 하나님 앞에서 살리라고 결단합니다.

 

이같이 놀라운 구원을 받은 자는 영원토록 하나님을 섬기는 자가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시인뿐 아니라 오늘 예배하는 우리 모두 하나님의 놀라운 개입으로 생존세계에서 하나님과 온전한 교제를 누리는 자리로 나아왔습니다.

 

이전에는 사는 것이 사는 것 같지 않았습니다.

죽지 못해 산다는 느낌이 우리를 사로잡을 때도 있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나 죽음의 자리에 있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주님의 함께 하심을 느끼며 주님과 교제하는 생존 세계로 나아왔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러나 세상에는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죽지 못해 산다고 되뇌이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소중한 사람들이 무의미한 삶을 살면서 죽음을 호흡하며 지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린 공동체가 함께 타킷을 정해서 그들을 구역으로, 교회로 인도하려고 합니다.

그들로 하여금 신앙의 시인처럼 고백하도록 하길 원합니다.

내가 생명이 있는 땅에서 여호와 앞에 행하리로다.”(9절)

동시에 시인의 이 고백은 우리 신앙인이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말해줍니다. 하나님 앞에서(Coram Deo)”가 바로 우리 신앙인의 현주소이어야 합니다.

주님께 순종하며 살아야 합니다. 주님의 뜻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주님의 임재를 누리며 살아야 합니다.

 

세상에 이보다 더 좋은 삶은 없습니다.

하나님만 바라보며 사는 삶이란 자유로운 삶입니다.

오직 주님의 인정만 받기 원하는 삶은 사람눈치 살필 일이 없습니다.

물론 사람사이에서 성실하고 예의바르게 살아야 하지만 사람에게 절대적인 권위를 주고 살 이유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람들의 평가란 아침저녁으로 변합니다.

사람들의 평가는 피상적이고 상대적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살면 당당하게 인생길을 걸을 수 있습니다.

넘어짐에서 건짐 받은 발걸음은 여호와 앞에 행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내가 . . . 여호와 앞에 행하리로다.”(9절)

시제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서 의미가 달라집니다.

단순 미래로 보면 확신에 찬 기대를 나타냅니다.

의지 미래로 보면 순종의 결단을 의미합니다.

 

신앙인의 삶은 하나님에 대해 무엇인가를 다짐하는 삶이며 동시에 하나님으로부터 무엇인가를 받을 것을 기대하는 삶입니다.

신앙인에게 있어서 산다는 것은 하나님을 섬길 기회입니다.

 

시인이 눈에 현세가 그토록 애착이 갔던 것은 하나님을 섬기려는 열정이 그를 지배했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성도들은 죽음과 무덤의 영역에서는 주님께 감사하며 찬양하지 못한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신앙이 없는 사람도 생존세계에서 살아가기를 갈망합니다.

그것은 단지 자신의 삶을 즐기기 위함이요 자신의 쾌락을 채우기 위함이요 자신의 탐욕과 부를 늘리기 위함입니다.

 

반면에 신앙인이 생명이 있는 땅에서 살기를 원하는 것은 다릅니다.

신앙인은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삶의 공간에서 그분을 섬길 수 있기를, 그 분의 영광을 드높이며 그분이 맡긴 일을 완수하기 위함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호와 하나님의 보살피는 눈 아래서 살아가십시오.

하나님의 은총 아래서 살기를 소원하십시오.

전능하신 분의 자상하신 보호 아래 안전하게 사는 삶을 추구하십시오.

내가 생명이 있는 땅에서 여호와 앞에 행하리로다.”(9절)

시인이 남은 생애 동안 줄곧 하나님의 은혜로운 섭리의 보살핌을 받을 것이라고 기뻐하는 것처럼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도 남은 날 동안 하나님이 계획하신 삶을 살도록 소원하십시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예수님 때문에 항상 기뻐하며 살기를 바라십니다.

성령을 보내셔서 부단히 우리가 기도하기를 바라십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감사하는 삶을 살기를 바라십니다.

정말 생명이 있는 땅에서에 사는 것처럼 살기를 소원하십니다.

 

여러분의 소중한 분들에게 기쁨, 기도, 감사의 삶을 살도록 기도하며 구역으로 교회로 초대하십시오.

혼자서 하기 힘들면 구역원이 함께 하도록 본래 공동체 전도 잔치는 의도되었습니다. 남은 두 주간 동안 힘을 합해 보십시오.

예수님 때문에 기쁨, 기도, 감사의 삶을 사는 분들은, 그것을 나누는 기회로 삼아 보십시오.

 

이제 계속되는 시인의 고백을 들어봅시다.

내가 크게 고통을 당하였다고 말할 때에도 나는 믿었도다.”(10절)

공동번역은 내 인생이 왜 이리 고달프냐 하고 생각될 때도, 나는 믿음을 잃지 않았다.”로 번역합니다.

표준새번역은 내 인생이 왜 이렇게 고통스러우냐? 하고 생각할 때도 나의 믿음이 흔들리지 않았습니다.”로 한결같이 나는 믿었도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하지만 이 믿음은 과거의 믿음이 아니라 현재의 믿음입니다.

어쩌면 과거로부터 계속 믿어온 현재의 믿음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을 지금 믿는 고로 자신의 과거에 있었던 일을 담담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전 개역성경은 내가 믿는 고로 말하리라.”(10절)고 번역합니다.

 

믿음이 없다면 시인은 이와 같은 고백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믿음이 우리를 살리지 아니했다면, 믿음이 우리를 구원하지 아니했다면 우리는 결코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동료 인생들에게 진리를 증거 하지 아니할 것입니다.

 

동시에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어떤 상황 속에서도 고백하게 해야 합니다.

내가 믿는 고로 말하리라.”

외부적인 강요나 남의 권유에 의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확실한 소신을 사람들 앞에 말하는 것이 신앙생활에는 요구됩니다.

 

또한 믿음은 우리에게 빈말을 늘어놓지 않고 진실하게 자신의 확신을 말합니다.

마음속의 확실한 믿음은 신앙고백을 하게 합니다. 복음을 믿기 때문에 말하는 것이고 전하는 것입니다.

진리를 확신하는 자의 입술에서 나오는 말처럼 강한 말은 없습니다.

 

또한 믿는 고로 말한다는 것은 우리의 언어생활에서 중요한 원리입니다.

현실은 우리로 하여금 믿는 고로 말하도록 쉽게 버려두질 않기 때문입니다.

비록 우리가 시련에 빠지고 여러 가지 생각이 들 때도 여전히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고백을 주저하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믿는 고로 말하리라 내가 큰 곤란을 당하였도다.”(개역)

시인이 당한 곤란은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쓰라리고 무서운 것이었습니다.

그런 곤경으로부터 구원받은 까닭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만 기도하기로 결단하고 있습니다.

비록 그 믿음은 큰 시련을 만났으나 파괴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런 와중에 다만 한 때는 실수를 한 적은 있었다고 고백합니다.

내가 놀라서 이르기를 모든 사람은 거짓말쟁이라 하였도다.”(11절)

특히 내가 놀라서 이르기를이라는 표현은 자신의 말을 정당화하는 대신 성급하게 나온 것임을 인정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궁극적인 의미로는 모든 사람을 거짓말 하는 자라고 말할 수 있지만 현실적으로는 모든 사람을 불신할 권리가 우리에게 없는 것도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 중에는 정직하고 신실하며 양심적인 자들도 많기 때문입니다.

 

신실한 친구들과 충성스런 지지자들도 있습니다.

때때로 그들이 우리를 실망시킨다고 해도, 의지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능력이 부족해서 그렇다면 우리가 그들을 거짓말쟁이로 부르는 것은 야박합니다.

큰 곤란에 직면한 내 처지에서는 그들이 오히려 야박해 보이지만 느낌대로 말하는 것은 결코 지혜로운 처신이 못됩니다.

 

큰 곤란 가운데서 엉겁결에 두려움에 사로 잡혀서 내뱉은 말은 대개 쓰라린 후회를 동반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마음이 편치 못할 때, 다급한 상황에서는 판단을 보류하고 침묵하는 편이 유익합니다.

 

물론 뒤에 자신의 말을 후회할 수는 있지만 그 말을 취소한다고 해서 그 말로 생긴 해악을 제거할 수는 없습니다.

시인뿐 아니라 우리 모두는 경겁 중에 식언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입에 재갈을 먹여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엉겁결에 내뱉은 그의 말이 갖는 진실성도 있습니다.

극한 상황 속에서 시인은 인간적 도움이 얼마나 기만적인지를 느꼈던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은 거짓말쟁이라.”라고 말하는 시인의 고백은 궁극적인 의미에서 진실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번 추석대목은 어떠했습니까?

어떤 사람은 도와준다고 말해 놓고도 정작 도움이 필요한 때는 외면합니다.

어떤 이는 도울 수 있는데도 도와주지 않습니다.

어떤 이는 도우고 싶지만 힘이 없어 도우지 못합니다.

 

다급한 상황은 우리로 하여금 사람의 기만성을 절감하게 됩니다.

시인은 친구와 친척까지도 고난당하는 자신을 버리고 있음을 절감합니다.

모든 사람으로부터 버림을 당했습니다.

그러기에 오직 주님만 바라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상황에서도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고 붙잡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람이 내뱉는 가장 큰 거짓말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지금 어려운 처지에 빠져 있다고 해서 하나님이 성도들을 배려하지도 않고 사랑하지도 않는다고 생각하거나 말하는 모든 사람들은 가장 큰 거짓말쟁이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곤경이 아무리 크다고 할지라도 그분의 은총만큼 크지는 못합니다. 우리가 겪는 가장 큰 고통은 하나님이 무심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가장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자녀들을 극심한 역경과 환란 가운데 두는 것은 그 고난을 통하여 지극히 크고 중한 영광에 합당한 자로 빚으시기 위함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러므로 극한 어려움 속에서도 믿음을 잃지 않는 것은 얼마나 귀한 일인지 모릅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가장 자비하시고 가장 믿을만한 분이십니다.

그러기에 신앙인들은 고백합니다.

여호와께 피함이 사람을 신뢰함보다 나으며 여호와께 피함이 방백들을 신뢰함보다 낫도다.”(시 118:8, 9)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모든 사람은 거짓말쟁이라.”는 말 속에는 그 반대로 하나님은 진실하시다는 고백이 깊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결코 거짓말할 수 없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의 거짓됨과 그 자신의 언짢은 기분을 털어버리고 이제 시인은 이 신실하신 하나님께로 눈을 돌립니다.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내가 여호와께 무엇으로 보답할까?”(12절)

불완전하고 속이길 잘하는 사람들과 더불어 실랑이를 벌이는 것은 별로 유익하지 못합니다.

그 보다는 하나님의 온전하심과 신실하심을 묵상하고 찬양하는 것이 훨씬 더 낫기 때문입니다.

 

이번 한가위를 맞이하면서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주신 은혜를 헤아려보셨습니까?

비록 길이 막혀도 고향길 가는 분들은 기다리는 가족 있음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차가 천천히 달리면 주변 경치가 눈에 들어옵니다.

산등성과 들판에 풍성하게 남아있는 오곡백과가 눈에 들어왔을 것입니다.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내가 여호와께 무엇으로 보답할까?”(12절)

이 질문은 신앙인의 마음을 고스란히 드러냅니다.

어찌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푼 은혜가 무르익은 가을 들녘뿐이겠습니까?

이 예배의 자리에 나오신 우리의 마음에 넘치는 감사도 주님이 주신 신령한 은혜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구속함을 받은 성도는 마음 깊은 곳에서 이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습니다.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내가 여호와께 무엇으로 보답할까?”(12절)

이 질문 속에는 구원받은 성도의 깊은 감사가 깔려 있습니다.

 

오곡백과가 풍성해도 불안과 두려움 속에 또 한해의 풍년을 빌던 옛날과는 성도의 추석은 다릅니다.

이제는 수확하는 추수의 질이나 양을 떠나서 범사에 감사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진 것은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삶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내가 여호와께 무엇으로 보답할까?”(12절)

모든 은혜라고 하는 말에 주의하십시오.

부분적인 순종이 좋지 않듯이 부분적인 감사도 무가치합니다.

그렇다고 모든 계명을 다 지킬 수 있는 성도가 있다거나 모든 은혜를 다 헤아릴 수 있는 성도가 있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다만 우리 모두 주의 모든 계명에 주의하듯이 그 모든 은혜를 소중히 여기며 최선을 다해 하나님께 찬양하길 원할 따름입니다.

건강한 성도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를 숨기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 모든 은혜로 인해 오히려 감사 찬양하려고 소원합니다.

민족고유의 감사절 한가위를 맞이해서 우리가 받은 모든 은혜에 대한 감사가 자리해야 옳습니다.

 

은혜의 교향곡을 연주할 때에 악보 하나만 틀리거나 빠뜨려도 그 연주가 엉망이 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한 가지 은총에 대한 감사를 놓치면 나머지 은혜에 대한 감사마저 시들해 질 것입니다.

무엇으로 보답할꼬?”

참되신 하나님께 올바른 방법으로 드리는 것이 신앙생활의 핵심입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참된 경건입니다.

세를 얻어 포도원을 가꾸었으면 주인에게 열매를 드리는 것이 마땅합니다.

너무 많은 은혜를 받은 것을 깨달은 성숙한 신앙은 무엇을 드릴까를 생각합니다.

예배 역시 드리는 것입니다.

오늘 내가 무엇을 얻었는가?”를 질문하며 교회당 문을 나서지 마십시오.

 

오히려 성숙한 성도는 이렇게 자문합니다.

나의 예배로 오늘 하나님께서 기뻐하셨는가?”

예배의 핵심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어떤 분은 예배란 주인이 누구인지를 기억하는 행위라고 정의합니다.

예, 예배는 우리의 삶의 주인이 누구인지 기억하는 행위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말씀을 맺습니다.

예배의 자리에 나아오실 때마다 무엇으로 보답할까?”무슨 방법으로 드려야 할까를 생각하는 성숙한 신앙의 자리로 나아가는 결실의 가을, 전도의 열매가 풍성한 계절이 되길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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