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지용수 목사

[정근두목사]섬기는 지도자(눅22:24-30)

작성자성경 벌레|작성시간22.09.21|조회수1,366 목록 댓글 0

섬기는 지도자(2224-30)

성경본문: 누가복음22:24-30

24 또 그들 사이에 그 중 누가 크냐 하는 다툼이 난지라

25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방인의 임금들은 그들을 주관하며 그 집권자들은 은인이라 칭함을 받으나

26 너희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큰 자는 젊은 자와 같고 다스리는 자는 섬기는 자와 같을지니라

27 앉아서 먹는 자가 크냐 섬기는 자가 크냐 앉아서 먹는 자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

28 너희는 나의 모든 시험 중에 항상 나와 함께 한 자들인즉

29 내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신 것 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겨

30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다스리게 하려 하노라

==============================================================================

 

사랑하는 믿음의 식구 여러분,

그리고 이 복된 자리에 나아오신 이웃 여러분,

올해 들어 우리는 신앙생활, 일터에서라는 연간 주제를 가지고, 1월 첫 주에는 주부, 2월 첫 주에는 근로자, 3월 첫 주에는 학생들을 격려했습니다.

지난주는 그들의 일터, 학교에서 어떻게 신앙생활을 할 것인지를 살폈습니다.

 

이제, 오늘부터는, 매월 첫 주나 절기를 제외하고는, 누가복음 연속강해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제가 누가복음 1장을 처음 설교한 것은 자그마치 29년 전의 일입니다.

유학 후 서울 장승백이에서 두레교회를 개척하면서 1987년 1월 11일 주일에 누가복음 1:1~4절을 본문으로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건이라는 제목으로 첫 설교를 했습니다.

 

물론 약 20년 전 울산교회에 부임해서 다시 처음부터 누가복음 설교를 시작했습니다.

그래도 만 19년이 지났으니까 지금쯤은 누가복음 설교를 끝냈어야 한다고 여러분도 생각하실 것입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아직도 누가복음 22장에 머물고 있습니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누가복음을 줄기차게 설교해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작년에는 고작 네 번, 12년과 13년에는 한 번도 못했고, 11년에는 좀 열심히 하고 . . . 이런 식이니 30년 세월은 흘렀는데 아직도 22장입니다.

그런데 올해는 좀 끝을 내고 싶습니다. 여러분이라도 그런 마음이 들겠지요?

 

앞으로 제가 주력하고 싶은 사역은 우리 교회 장로님들과 시간을 좀 더 갖고 서로 알아가고 사랑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울산교회에서 함께 사역하는 동역자들과 설교사역을 위한 시간을 내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우선 공동체 담당자, 여덟 사람에다가 행정담당 권 목사님, 그리고 김차순, 한영숙 전도사님해서 저까지 모두 12명이 그 첫 번째 시간을 지난 2월 16일 월요일에 시민교회 오래뜰 카페에서 가졌습니다.

 

정한 본문을 각자가 미리 연구를 한 다음, 거기서 만났습니다.

각자의 시각으로 보았던 같은 본문을 두고, 차례로 발표를 하고, 그 발표한 부분을 들으면서 새롭게 깨달은 것이나 공감하는 것이나, 혹 이해가 안 되거나 동의가 어려운 부분도 자연스럽게 나누었습니다.

 

처음 해 보는 일이라 서먹한 마음으로 참석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모두가 분위기에 빨려들어, 시간이 얼마나 빨리 지나가고 모두들 행복했는지 모릅니다.

그 결과, 같은 본문으로 지난 주 수요일(4일) 공동체별로 설교를 하고, 오늘 주일에는 같은 본문을 두고 제가 설교를 하기로 했습니다.

 

모험이죠! 왜냐하면 우리 교회 부교역자들의 실력이 탁월해서 지난 수요일 설교가 더 은혜가 있었다고 평가하면, 제 스스로 죽음의 늪으로 빠져드는 위험한 선택입니다.

그래도 좋습니다.

물고기 한 마리도 자신을 희생해서 후대를 준비하는 지혜를 발휘하거든요.

 

그리고 이것은 우리의 선배들, 청교도(淸敎徒)들이 후진 설교자를 양성하는 방법이기도 했습니다.

다만 그 때는 같은 장(場)에서 젊은 설교자가 설교를 하고, 바로 그 자리에서 나이든 설교자가 같은 본문으로 설교를 했는데, 이번에 우리는 나흘 시차를 두고 시도합니다.

 

성도님들께 꼭 드리고 싶은 부탁은 누구 설교가 더 좋더라.”는 말을 조심해 주십시오.

우린 여러분의 평가가 없어도 누가 더 크냐고 다투는 오늘 본문의 제자들처럼 신경을 쓸 것이기 때문입니다.

깨어있지 않으면, 우리들도 누가 더 크냐고, 누가 설교를 더 잘하냐?”에 신경이 쓰일 텐데, 거기에다가 여러분이 기름을 끼얹을 필요가 없습니다.

 

이런 시도를 하는 것은 제 남은 목회 목표의 하나인 후진 목회자를 돕기 위한 것이고, 동시에 성도 여러분들은, 누가 말하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훈련을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 시대에 사라져버린 설교자 훈련 방식을 회복하고, 우리 시대에 사라져버린 겸비한 청중들을 다시 찾는 방식이기도 합니다. 들을 때마다 기도해 주시고 은혜를 위해서 사모하십시오.

 

자, 그러면 오늘 말씀으로 가 봅시다.

이미 제자훈련 과정에서 큐티하는 법을 배워서 이미 D형 큐티를 하거나, 다음 주 화요일 17일부터 시작하는 큐티 세미나를 참석하면 배우시게 될 방법을 따라서, 본문을 분석하면 됩니다.

 

먼저 본문의 배경, 문맥을 살피는 것입니다.

본문은 예루살렘에서 마지막 유월절을 보내는 장면을 배경으로 합니다.

유월절 잔치이기도 하고 최후의 만찬 자리이기도 한 이 자리에서 제자들은 앞서 누가 예수를 팔자인가?” 하는 논쟁을 하다가 바로 이어서 오늘 본문의 시작에는 누가 크냐?”는 논쟁으로 이어집니다.

 

앞 문맥 유월절 만찬의 자리에서는 유다의 배반에 대한 말씀이 나왔다면, 오늘 본문 뒤 문맥에는 베드로의 부인을 미리 말씀하시는 장면으로 이어집니다.

다음으로는 본문(22:26~30)의 구조를 살펴야 합니다. 소제목 형으로 구분해 봅시다.

<방송실에서 수고하는 형제 여러분, 하나씩 자막에 올려주십시오>

1. 다투는 제자들(25절)

2. 가르치는 예수님(25~27절)

3. 격려하시는 예수님(28~30절)

세 장면으로 본문의 구조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그러고 나면 큐티의 핵심 과정으로서 본문에 대한 연구와 관찰, 느낀 점, 결단과 적용이 뒤따릅니다.

큐티에서는 개인적으로 느낀 점이나 거기 따른 결단과 적용에 초점을 맞춥니다.

 

그러나 설교자로서 저는 이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 공동체에 주시길 원하시는 말씀에 초점을 맞추겠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설교의 제목을 <섬기는 지도자>이라고 잡았습니다.

눈앞에서 다투는 제자들을 지금 바라보는 주님의 마음속에 그리던 제자들의 내일의 모습은 섬기는 지도자들이길 원했기 때문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저는 오늘 본문의 구조를 말할 때는 소제목 형으로 나누었습니다만 설교의 구조를 위해서는 소제목 형에서 핵심 서술형 세 대지로 바꾸어 오늘 설교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면 주님이 바라는 섬기는 지도자란 어떤 사람입니까?

첫째로 섬기는 지도자는 서로 다투지 않습니다.

비록 지금은 누가 높으냐?”고 싸우고 있습니다만 주님이 바라는 지도자의 모습은 아닙니다.

누가 높으냐?”는 서열 다툼은 제자들 사이에서 꽤 자주 나옵니다.

다른 복음서에서도 자주 등장하는 사건입니다.

누가 복음 9장에서도 제자 중에서 누가 크냐? 하는 변론이 일어나니(눅 9:46)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누가 높으냐? 는 명제는 두 사람 이상이 모인 곳에는 언제나 있어온 관심사입니다.

가정에서도 일어납니다.

부부 사이에만 아니라 부모자식 간에서 있습니다.

유교는 아예 그 싹을 자르기 위해 세상의 기본원리의 하나로 장유유서를 못 박았습니다.

주일날 예배하는 교회에서도, 월요일의 일터에서도 누가 크냐?”하는 질문은 일어납니다.

 

하지만 제자 중에서 누가 크냐?”(눅 9:46)하는 변론은 인류보편적인 관심사인 동시에, 제자들이기에, 아니 지금 주님의 발걸음이 예루살렘으로 향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특수적인 관심이기도 합니다.

이 주제를 두고 첫 다툼이 일어난 직후 성경은 그 배경을 말합니다.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눅 9:51)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결코 그들이 받은 제자훈련이 시원찮아서 일어난 것은 아닙니다.

요즈음 제자훈련이란 보통 목회자들로부터 일주일에 두세 시간씩 8개월 정도 받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의 경우에는 인류 가운데 가장 탁월하신 스승으로부터 일주일에 168시간씩, 거의 3년에 걸쳐 제자훈련을 받은 자들 사이에서, 제자 중에서 누가 크냐?”(눅 9:46)하는 변론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누가 크냐 하는 다툼은 인류 보편적인 관심이라기보다는 그들의 오해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오해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예루살렘에 곧 건설될 것이고 주님이 왕으로 등극하신다는 잘못된 생각 때문입니다.

 

사람의 편견은 쉽게 고쳐지지 않습니다.

수난에 대해서 몇 차례 알아듣도록 말씀하셨지만 정말 소귀에 경 읽기라는 속담처럼 보입니다.

18장에서 세 번째로, 예수님은 영생을, 하나님나라를, 구원을 말씀하시고 당신이 희롱, 능욕, 침 밷음, 채찍질을 당하고 죽임을 당하리라는 요즈음 표현을 빌리면, 안 봐도 비디오처럼, 너무나 생생하게 말씀을 하셨는데도, 아니 3일만의 다시 살아남까지 말씀하셨지만 제자들은 전혀 깨달음이 없습니다.

 

제자들이 이것을 하나도 깨닫지 못하였으니 그 말씀이 감취였으므로 그들이 그 이르신 바를 알지 못하였더라.”(눅 18:34)

그 결과 스승이 뭐라고 말해도 오로지 그들의 관심사는 주께서 왕으로 등극하신 후 첫째 자리를 누가 차지하느냐입니다.

한 두 제자의 관심사가 아니라 그들 모두의 관심사였습니다.

제자수료식을 앞둔 그들 모두의 생각이 세속적이었습니다.

 

바로 앞 장면을 보십시오.

최후의 만찬의 자리에서 그처럼 엄숙한 교훈을 하셨지만 계속 예수께서 왕으로서 등극만 하면 한 자리를 차지할 자기 속의 욕망의 소리가 너무 컸기 때문에, 주님의 음성은 들리지 않습니다.

이미 유다는 배신의 길로 나갔고, 나머지는 그들 중에 가장 큰 자가 되려고 다투고 있습니다.

 

제자들을 위해서 당신의 몸을, 새 언약을 위해서 당신의 피를 쏟아 붓는 교훈을 하셨으나 <여기서도 차례로 자막을!!> 누가 파냐?”는 토론에서 누가 크냐?”는 논쟁으로 열을 올리고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필연적으로 섬김의 제자도를 말씀하셔야 했습니다.

 

둘째로 섬기는 지도자는 주님의 말씀을 귀담아 듣습니다(25~27).

당신의 말을 쉽게 알아듣도록 하기 위해

2.1 세상의 지배방식을 설명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방인의 임금들은 그들을 주관하며 그 집권자들은 은인이라 칭함을 받느니라.”(25절)

 

세상은 그 때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습니다.

소위 세상의 왕들은 백성들을 지배하고 군림합니다. 힘으로 다른 사람을 통치하면서도, 그 통치를 받는 사람들이 자기를 은인이라고, 시혜자라고 불러주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이미지를 조작해서 자신의 잔혹하고 추악한 실체를 세탁하려고 합니다.

 

사실 은인이란 단어는 그리스나 로마사회에서 공로가 있는 사람들, 특히 왕에게 부여된 영예의 칭호로 자연스럽게 사용되었습니다.

하지만 세상의 권세자들은 남들이 불러주기를 기다리지 않고 오히려 그렇게 불리기를 추구했습니다.

어디 권력자들만의 위선이겠습니까?

종교지도자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위선이기도 했습니다(눅11:43, 20:46).

 

물론 2천 년 전과는 달리 요즈음은 아무도 문자적으로 은인이라고 불러주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오히려 보통 사람이라든지 서민의 친구”(the friend of people) NLT)등으로 자신을 포장합니다. 그러나 그 속내는 변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강하게 자기 제자들에게 이런 모습을 금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지배 방식을 설명한 후에 그와는 대조적인

2.2 하나님 나라의 권세를 설명합니다.

“(그러나) 너희는 그렇지 않을지니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가치관과는 반대되는 새로운 하나님나라의 가치관을 제시하십니다.

 

하나님의 통치 아래 사는 자들은 달리 살아야 합니다.

세상은 가진 자가 큰 소리를 치고 군림하며 존경을 받으려 들지만, 하나님 나라의 지도자는 스스로 낮아진 자리에서 없는 자를, 약한 자를 섬겨야 합니다.

“(그러나) 너희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큰 자는 젊은 자와 같고, 다스리는 자는 섬기는 자와 같을지니라.”(26절)

 

그 가르침을 이해시키려고 그들의 풍습, 그들의 상식에 호소합니다.

앉아서 먹는 자가 크냐? 섬기는 자가 크냐? 앉아서 먹는 자가 아니냐!”

그 때만 아니라 지금도 식탁에 앉아 있는 사람은 서서 시중드는 사람보다 사회적인 지위가 높습니다.

식당에서 음식을 먹는 경우를 떠올려보십시오.

음식점에서도 섬김을 받으면 우리는 팁을 놓을 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앞서는 “(그러나) 너희는 그렇지 않을지니라고 선언하셨다면 여기서는 “앉아서 먹는 자가 크냐? 섬기는 자가 크냐? 앉아서 먹는 자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

앞서는 교훈으로, 여기서는 모범으로, 하나님의 통치 아래 사는 자들의 삶을, 가르치고 보여주십니다.

 

섬김을 받으시기 합당하신 분께서 우리를 섬기시러 세상에 오셨습니다.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심 자체가 낮아지심이요 섬김입니다.

섬김의 삶의 자신의 삶의 좌우명이셨습니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5)

 

예, 한 번도 한 눈 팔지 않고 살면서 섬기고, 죽으면서 대속물로 자신을 드리는 삶을 살려고 세상에 오신 분이십니다.

섬김의 삶을 살다가 마침내 자신을 대속물로 드리는 것이 그 분의 최후 목표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나라의 지도자들은 주님의 섬김의 교훈과 주님의 섬김의 삶을 본받아야 합니다.

 

세상은 대우받고 인정받고 군림하지만, 하나님 나라는 섬기고 자신을 희생하는 곳입니다.

지난해 연말에 피택되고 이달부터 훈련을 시작하는 중직자 후보 여러분,

여러분이 사랑받고 존경받는 권사, 집사, 장로가 되려면 대우받으려 들지 말고 섬기려고 드십시오.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

다시 말합니다.

그분은 섬김을 받으시기 합당하신 분이지만 섬기는 자로 제자들 가운데 계신다고 선언하십니다.

제자들의 발까지 씻기시고, 마지막 만찬에서도 섬기셨지만, 사실 함께 한 3년의 삶이 섬김의 본을 보이신 삶입니다.

스승이신 예수님께서 섬기셨다면, 제자는 당연히 스승의 가르침을 배우고 스승을 닮아야합니다.

 

그러면 이제

세 번째 대지로 나아갑시다.

놀랍게도, 서로 다투는 제자들을 바라보시는 예수님께서는 여전히 따뜻한 시각으로, 하나님나라의 관점에서 말씀하십니다.

셋째 섬기는 지도자는 주님 때문에 감격하는 삶을 삽니다(28~30).

주님의 감격스런 말씀을 귀담아 들어보십시오.

일단 주님의 말씀이 귀에 들어오면 우린 감동하고 감격합니다.

통독이든 큐티든, 개인성경공부든, 설교든 마찬가지입니다.

 

방금 눈앞에서 제자들은 서로 누가 크냐고, 누가 제일 잘났느냐고 다투고 있습니다.

그런 제자들을 향해서 가르침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자상하게 세상의 리더십과 하나님나라의 리더십이 어떻게 다른지를 잘 설명하셨을 뿐 아니라 격려까지 하십니다.

그러므로 그 격려와 약속으로 인해 감격하는 삶을 삽니다.

너희는 나의 모든 시험 중에 항상 나와 함께 한 자들인즉”(28절)

다른 할 말이 왜 없었겠습니까마는 주님은 제자들을 책망하시는 대신에 격려하십니다.

지금 다투는 순간이 아니라, 더 넓은 시각에서 제자들을 바라보시고 평가하십니다.

상대방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우린 행동이 달라집니다.

 

주님은 어떻게 제자들을 이해하십니까?

3년씩이나 가르쳐도 방금도 서로 싸우는 대책 없는 것들이라도 보지 않으십니다.

제자들을 향한 따뜻한 시각이 그들에 대한 새로운 기대를 하게 하십니다.

너희는 나의 모든 시험 중에 항상 나와 함께 한 자들인즉(28절)

 

나의 모든 시험 중에란 무슨 뜻입니까?

광야의 시험으로부터 시작해서 십자가를 피해 가도록 하는 계속되는 시험입니다.

예수께서 받은 그 모든 시험의 길에 지금까지 제자들이 보여준 그 충성심을 인정하십니다. 가르침이 어렵다고 불평하며 떠나가던 와중에도 베드로의 입을 통해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요6:68) 고백한 신실한 자로서 제자들을 평가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공동체의 지도자로 섬기게 될 피택자 여러분,

예수께서 낮아져서 시험을 받을 때 여러분은 어디에 있습니까?

주님 안에 계속해서 머물고 거하는 자리에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면 주께서는 주님과 함께 시험 중에 같이 하는 자로 인정하실 것입니다.

 

당신이 낮아져서 시험을 받는 동안 신실하게 동참한 자로 제자들을 바라보시며 그들이 장차 왕적인 통치에 참여할 자로 보십니다.

흔히 자녀양육에서 신뢰해 주는 것만큼 성장한다.”는 말처럼 주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을 믿어주고 격려하심으로 앞으로 받게 될 고난에도 변함없이 신실하게 충성할 것을 기대하십니다.

 

내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신 것 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겨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다스리게 하려 하노라”(29~30)

지금은 다소 부족하더라도 그 제자들에게 놀라운 말씀을 들려주십니다.

섬김을 요청하는 동시에 약속을 주십니다.

내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신 것 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겨

하나님 아버지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예수님께 맡겨주셨습니다.

그리고 이 하나님 나라의 통치권을 제자들에게 맡겨졌다고 하십니다.

그 때 예수님의 제자들뿐만 아니라 오늘 우리 성도들에게도 그런 왕권을 맡겨주셨습니다.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눅 12:32)

예수님은 오늘도 신실한 무리들에게 그 나라를 주시길 기뻐하시는 분이십니다. 끝까지 당신과 함께 견디는 자들에게 상급으로 그 나라를 주시길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처음 아버지께서 예수님께 맡겨주셨고, 다음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맡겨주셨습니다.

하지만 그 나라는 군림하는 나라가 아니라 섬기는 나라입니다.

예수님은 당신과 함께 하는 신실한 자들에게 오늘도 그 나라를 맡겨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약속해 주시는 나라, 상급으로 주시는 나라는 무엇입니까?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다스리게 하려 하노라(30절)

비록 지금은 누가 크냐.”란 다툼 중에 있지만 한날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면 하나님 나라를 땅 끝까지 겸손하게 세워갈 것입니다.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장차 하늘 잔치에 참석할 것을 암시합니다.

동시에 오늘 우리는 영광스러운 주님의 통치에 부름 받은 자들입니다.

미래적인 소망이 있기에 현재의 섬김의 삶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또는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다스리게 하려 하노라

고대 근동의 보좌는, 경복궁 근정전에 있는 혼자 앉는 왕의 보좌보다는, 넓은 거실에 여러 사람이 함께 앉는 소파를 차라리 연상하는 편이 좋습니다.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운 장수를 왕의 넓은 보좌 옆에 앉게 하고, 이를 통해서 왕권의 일부를 상으로 부여하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하지만 그 나라의 왕권을 맡은 자들은 세상 사람들과 달라야 합니다.

권력을 휘둘러 남을 주관하는 대신에 다른 사람의 연약함과 필요를 섬기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기는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섬기는 지도자야말로 하나님 나라의 왕권을 행사하는 자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무리할 시간입니다.

세속적인 지도력은 노골적인 권위행사이고 공적인 인정을 받는 것입니다.

세상 나라에서는 영광과 존경은 항상 지도자의 몫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위대함은 요한복음 13장의 제자들의 발을 씻기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섬기는 지도자의 모습은 지위나 경력이 아니라 섬기는 태도에 달려 있습니다.

 

오늘도 주님은 성도들의 일관됨을 주목하십니다.

배신자와는 달리, 시련의 순간에도 늘 동행했고, 핍박 가운데도 택한 자와 함께 굳게 섰던 것을 인정하십니다.

하나님은 그 나라를 주님께 주셨고, 이제 그 권세를 제자들의 것이 되었습니다(마28:18-20).

그래서 이미 주님께서 소유하신 왕권을, 제자들에게 수여하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이는 왕의 식탁교제와 통치참여를 의미했습니다.

주님과의 연합은 지금 여기서부터 그의 통치의 참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의 내일이 우리를 기다린다는 것을 알면 오늘 주님의 고난을 받아드릴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열한 제자에게 주신 권세는 독특하지만, 모든 성도들은 식탁에 함께 앉는 약속은 공유할 것입니다.

특히 여기서 주님의 위대함과 통치에 대한 말씀은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를 생각할 때 의미심장합니다.

고통, 거절, 핍박이 아무리 극심해도 그날이, 갚아주시고 다스리는 날이 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주님은 섬김을 요청하는 동시에 약속을 하십니다.

섬기는 지도자로서 살기 위해서는 지금 여러분이 누구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우린 지금 그분의 제자입니다.

우릴 섬기려 세상에 오셔서 우릴 섬겨주시는 주님의 제자입니다.

그리고 우린 그분의 영광에 동참할 자들입니다.

섬기는 지도자를 주님은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속한 나라는 세상나라와 다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섬기는 지도자로 나타날 때 우리교회는 좋은 교회, 자랑스런 교회가 될 것입니다. 아멘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