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체포(눅22장47-53)
성경본문: 누가복음22:47-53
47 말씀하실 때에 한 무리가 오는데 열둘 중의 하나인 유다라 하는 자가 그들을 앞장서 와서
48 예수께 입을 맞추려고 가까이 하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유다야 네가 입맞춤으로 인자를 파느냐 하시니
49 그의 주위 사람들이 그 된 일을 보고 여짜오되 주여 우리가 칼로 치리이까 하고
50 그 중의 한 사람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오른쪽 귀를 떨어뜨린지라
51 예수께서 일러 이르시되 이것까지 참으라 하시고 그 귀를 만져 낫게 하시더라
52 예수께서 그 잡으러 온 대제사장들과 성전의 경비대장들과 장로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 같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나왔느냐
53 내가 날마다 너희와 함께 성전에 있을 때에 내게 손을 대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이제는 너희 때요 어둠의 권세로다 하시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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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시 누가복음으로 돌아갑니다.
우린 고난주간특별기도회를 앞두고, 누가복음 22:39~46절을 <기도하라>는 제목으로 살핀 바 있습니다.
주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신앙인으로서 유혹을 이기는 유일한 방안은 기도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는, 주님의 권면을 흘러들은 제자들의 모습과, 자신의 말씀처럼 기도에 자신을 모두 쏟아 부은 예수님의 모습을 봅니다.
먼저 앞뒤를 살피면, 앞 문단은 주님께서 기도하라는 권면을 하셨고, 54절부터 시작하는 뒤 문단에는 베드로의 부인 사이에 오늘 본문이 나옵니다.
오늘 본문의 주제는 설교의 제목으로 밝힌 바대로 예수님의 체포입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 47~53절은 어떻게 구성되어 있습니까?
세 장면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 첫 장면은 유다가 앞장 선 한 무리의 등장입니다.
☞ 둘째 장면은 졸다가 깬 우왕좌왕하는 제자들의 모습입니다.
☞ 마지막 장면은 마지막 순간에도 위엄을 잃지 않으시고 호령하시는 주님의 모습입니다.
장면마다 주님의 말씀이 중심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러면
1 첫 장면(47~48절)부터 살펴봅시다.
배신자의 등장과 배신자를 향한 호소입니다.
한 글자 한 글자를 유심히 살펴보십시오.
“말씀하실 때에” 언제 무슨 말씀을 하실 때일까요?
오늘 본문 바로 앞 문단을 보시면 자연스런 결론이 가능합니다.
“습관을 따라 감람산에” 가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실 때 당신의 얼굴에는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처럼 흐르는데, 대조적으로 “기도 후에 일어나 제자들에게” 갔을 때 “슬픔으로 인하여 잠든 것을 보시고” “어찌하여 자느냐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고 “말씀하실 때”로 연결됩니다.
그 때 그 분위기를 깨는 “한 무리가” 등장합니다.
한 단어 한 단어를 기록을 남긴 누가의 입장에서 관찰해 주십시오.
누가는 백성이라는 단어와 무리라는 단어를 구분해서 사용합니다.
백성이라고 할 때는 하나님의 백성이란 뉘앙스를 싣고 있는데 반해서 무리는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이 없는 떼거지들을 뜻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그냥 어울려 다니며 시간을 죽이지 않습니다.
또한 그 귀한 시간을 하나님의 뜻을 대적하는 일에 사용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한 걸음 한 걸음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움직입니다.
한 마디 한 마디에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기 위해서 입을 엽니다.
다른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을 붙잡기 위해서 “등불과 햇불”(요 18:3)을 들고 나온 것을 보면 아직도 어둠이 짙게 깔린 이른 새벽 시간입니다.
이른 새벽의 열심, 그것이 하나님의 백성 됨을 보장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가 중요합니다.
감람산을 향해서 올라가는 노력보다 중요한 것은 목표입니다.
온 밤을 새우는 열정보다, 이른 새벽 아직도 캄캄한 시간에 설치는 것보다 무엇을 하려고 하는가가 더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한 걸음 한 걸음, 한 마디 한 마디가 아버지의 뜻에 부합한 언행이어야 합니다.
어두운 시간이지만 자세히 살펴보십시오.
여러분이 아는 얼굴이 등장하지 않습니까?
어둠을 밝히는 횃불이 날름거릴 때마다 그 얼굴의 윤곽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 무리들의 앞장을 선 사람을 자세히 살펴보십시오.
그러면 “열둘 중의 하나인 유다라 하는 자”가 앞장서 주님께로 다가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 그는 열두 제자 중의 하나였습니다.
그러나 누가는 그냥 “열둘 중의 하나”라고 말합니다.
더 이상 제자라는 호칭을 사용하는 것을 피하는 듯합니다.
그래서 누가는 “열둘 중의 하나”라고만 소개합니다.
그렇습니다. 그의 행동을 아는, 배신을 기록하는 자리에는 제자라는 칭호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우린 유다라는 이름의 뜻을 알고 있습니다.
일찍 야곱의 열두 아들 중 하나로 등장하는 유다는 찬송이란 뜻입니다.
하나님을 찬송하고, 그 분의 사역을 찬송해야 할 “유다”가 아이러니컬하게도 “찬송 받을 이의 아들”(막 14:16)을 배신하고 있습니다.
우린 어떠합니까?
이름에 걸맞은, 호칭에 걸맞은 삶을 살고 있습니까?
우리의 신분은 어떠합니까?
저처럼 목사라고 불립니까?
아니면 장로라고 불립니까?
아니면 피택 집사나 권사라고 불립니까?
여러분의 신분에 걸맞은 걸음을 옮기고 있습니까?
앞장을 선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선동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직분에 걸맞은 삶이 요구됩니다.
목사가 되어도 이전의 삶에서 달라지지 않고, 장로가 되어도 이전의 모습과 변화하지 않는다면 자신을 살피시길 바랍니다.
서울 정릉에서 목회할 때의 일입니다.
<탄포리교회>라는 이름을 가진 정릉에 있는 교회의 예배처소는 산중턱에 있었습니다.
겨울에는 아랫동네보다 영하 3~4도 차이는 나는 곳입니다.
하지만 겨울이 지나면 그 약점은 장점으로 변합니다.
아시죠? 고랭지 채소라는 말을 아시죠!
산중턱이기에 채소가 잘 됩니다.
하루 새벽은 기도를 마치고 채전에 일하는 어머님 곁을 지나면서, 아무 말도 없이 그 옆을 지나오기가 뭐해서 한 마디 걸쳤습니다.
“어머니, 뭘 그렇게 열심히 하십니까?” 그랬더니 어머니가 한 마디 했습니다.
“왜? 내 채소 가꾸듯이 네 목회를 해봐라, 목회가 왜 안 되는지 . . .” 평생 잊을 수 없는 한 마디였습니다.
매일 채전 가꾸듯이,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을 매일 돌보면 목회가 안 될 리가 없지요!
목사라면 농부가 농사짓듯이 사역을 해야 합니다.
그러면 주중에는 자전거를 훔치고 주말에는 배운 도둑질이라고 목회를 하는 난센스를 저지르지는 않습니다.
부인 권사님께서 자기 남편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장로 되고 나서 사람이 참 많이 달라졌다.”고, 좋은 쪽으로 변했다는 말입니다.
여러분의 남편, 여러분의 아내는 항상 착했습니까?
더 이상 자랄 이유가 없는 온전한 사람입니까?
직분이 새롭게 주어지면 사람이 더욱 영적으로 자라야 합니다.
그래서 가까운 사람들의 선한 증거가 뒤따라야 직분에 합당한 삶을 사는 자입니다.
피택자 여러분, 여러분의 영적 수준을 교회가 인정해서 택한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직분에 피택 되었으면 각오를 새롭게 하십시오.
그래서 한 달에 한 차례 영성일기를, 큐티한 것을 제출하도록 부탁드린 것입니다.
이달의 모습을 정직하게 기록하십시오.
그리고 한 달씩 지나갈 때마다 어떻게 성장하는지를 측정하기 위해서입니다.
아이들 어릴 때 벽에다가 기린 그림 붙이고 매달 키가 어떻게 자라는지 재는 아이와 같은 호기심을 가지고 자신의 영적 성장을 살펴보십시오. 그래야 영적으로 자랍니다.
찬송, 유다라는 이름을 가지고 찬송 받으실 자의 아들을 팔아넘기는 범죄를 하지 마십시오.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 받은 직분으로, 자기를 내세우기 위해서 사용하지 마십시오.
목회를 돕기 위해서 직분을 받아서 목회를 힘들게 하지 마십시오.
목회의 걸림돌이 되지 마시고 목회의 디딤돌이 되기로 결단하십시오.
백성들 가운데서, 칠십 인의 전도자 가운데서, 아니 열둘 중의 하나가 되어서 스승을 팔아넘기려고 앞장서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마음의 떨림이 없고, 양심에 가책이 없다면 불행한 자입니다.
성도의 마음은 선한 일에 감동을 하고, 뭔가 성도를 세우려는 일에 열심을 내어야 합니다.
가까이 온다고 다 옳은 것은 아닙니다.
어떤 자들이 “무리”입니까?
예수님의 말씀에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주일마다 선포되는 말씀을 듣고도 변화하려고 노력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오히려 적대감을 품고 있었던 사람들이요 지금도 품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열둘 중의 하나인 유다라 하는 자가 그들을 앞장서 와서 예수께 입을 맞추려고 가까이 하는지라”
사람 사이에서 가장 친밀한 사랑과 존경의 표시인 입맞춤을 배신의 도구로 선택한 유다의 위선을 따라서는 안 됩니다.
아름다운 것은 아름답게, 사랑스런 것은 사랑스럽게 활용하셔야 합니다.
우리 때문에 세상을 조금 더 아름답게 만듭시다.
우리로 인해서 좋은 관계가 파괴되면 우린 차라리 나지 아니한 것이 더 낫습니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막 14:21)
내가 걸어왔기 때문에 광야에 좀 더 나은 길이 나고, 내가 지나갔기에 길을 가로막는 가지들이 치워지고, 내가 살았기에 땅위에 꽃 하나라도 더 피어나고, 내가 같이 이웃했기에, 한숨과 눈물이 줄어든다면, 우린 의미 있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유다라는 이름 아니라도, 열둘이라는 숫자에 들지 못해도 말입니다.
주님은 무리들을 그들을 “앞장서 와서 예수께 입을 맞추려고 가까이 하는” 한 때의 제자를 향해서 마지막 호소를 그 양심에 하고 있습니다.
“유다야 네가 입맞춤으로 인자를 파느냐”
이 말에는 유다의 잘못을 지적하는 동시에 진심어린 회개의 촉구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조금이라도 양심이 살아 작동했다면 그 한 마디에 뒤로 주춤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의 양심은 이미 화인을 맞았습니다.
악한 자의 손안에 놀아났습니다.
“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인이라 부르는 유다에게 사탄이 들어가니”(3절)라고 앞서 밝힌바와 같습니다.
그 이름에 합당한 제자였다면, 아니 하나님의 백성이었다면, 예수님의 마지막 호소에 반응했을 것입니다.
잘못된 걸음을 돌이켜 올바른 길로 돌아서야 했을 것입니다.
그는 말씀을 들었지만 그 말씀을 거부한 채 자기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우린 누구나 선택할 수 있는 의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무슨 말도 무슨 행동이라도 여러분은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성령의 인도를 받은 언행이라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결과로 자신의 마음에 기쁨이 자리합니다.
날마다 잠자리에 누워서 하루를 돌아보십시오.
때론 소원하는 일이 이뤄지기도 하고 때론 이뤄지지 않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뜻이 이뤄지는 것을 삶의 좌표로 삼으로 날마다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뭔가 그 어떤 언행으로 인해서라도 기쁨 기도 감사가 사라지면 여러분의 마음에 누가 자리하고, 누가 지배하는 지를 살펴야 합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갈 5:22,23)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백성입니까?
교회의 지도자입니까?
자신과 타인의 하루의 언행으로 기쁨과 기도와 감사가 더 자리합니까?
그러면 여러분의 하루는 복된 날입니다.
여러분의 언행은 주님을 기쁘게 한 것입니다.
만일 그렇지 못하고 화가 나서 씩씩 거린다면 여러분은 성령의 지배아래 있지 않을지 모릅니다.
입맞춤 아니라고 상관이 없습니다.
다만 기본적인 예의를 갖추십시오.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롬 12:10)라는 성경말씀이 아니라도 좋습니다.
자기의 양심에 비추어 정직하십시오.
내일 날이 새면 하늘과 땅에 부끄럽지 않는 삶을 살기로 잠자리에서 다짐하십시오.
이제 2 두 번째 장면을 살펴봅시다.
졸다가 일어난 제자들이 비로소 상황을 접수하고 묻습니다.
“주여, 우리가 칼로 치리이까?” 위급한 상황을 해결하려고 미리 준비했던 칼을 떠올립니다. “주여 보소서 여기 검 둘이 있나이다.”(38절)라고 답했던 제자들을 기억하시지요?
그러므로 “주여, 우리가 칼로 치리이까?”라고 묻는 것은 엉겁결에 한 말이요 지나가는 말에 불과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주님의 대답을 기다려야 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무엇을 해야 할지를 안다고 자신하는 사람은 주님의 대답을 기다릴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물론 설교도 귀에 들어올 리 없습니다. 마음에 남아 있을 리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기도는 어떠합니까?
예, 기도는 하나님께 묻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기도하십니까?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그 기도에 어떻게 응답하는지 자신을 살펴보십시오.
그렇다고 여러분에게 하박국 선지자 수준을 요구하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내 파수하는 곳에 서며 성루에 서리라. 그가 내게 무엇이라 말씀하실는지 기다리고 바라보며 나의 질문에 대하여 어떻게 대답하실는지 보리라”(합 2:1)
그러나 물었으면 대답을 기다려보십시오. 기
본예의가 아닐까요?
묻고 나서는 답도 듣기 전에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은 무례한 일입니다.
하나님이 아니라 목회자나 동료 신자에게라도 물었으면 들어보십시오.
원하는 대답을 들으려고 다가서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기도가 하나님께 드리는 통보가 되지 말게 하십시오.
“하나님, 내 상황을 다 말씀 드렸습니다.”하고 바로 일어서는 수준이 되지 말기를 바랍니다.
오죽하면 지난주일 오후에 정주채 목사님이 이런 제안을 했을까요?
“10분 기도했으면 단 1분이라도, 20분 기도했다면 단 2분이라도 기다리라”고 말입니다.
참으로 어려운 요구이기도 합니다.
몇 초를 기다리지 못해서 비싼 요금을 지불하기를 주저하지 않는 시대입니다.
시간을 조금 아낀다고 돈을 배나 지불하는 인스탄트 시대요, 효율만이 중요시되는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주를 위해서 사역을 해도 금방 금방 결과를 보기를 원하는 것이 시대정신인가 봅니다.
그러나 잠잠히 기다리는 미학을 배우십시오.
벚꽃 구경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돌이켜 생각해보면 꽃 한 송이라도 자세히 살펴보았습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예 보지도 않고 본다고 해도 스쳐지나갑니다.
5초나 10초 동안 보는 사람은 아주 드물 것입니다.
그러다보면 자연히 교회 안에서도 눈에 빨리 띠는 사역이 선호의 대상입니다.
하지만 눈에 잘 보이지 않는 곳에서라도, 묵묵히 주어진 일을 감당하는 분들을 귀히 여기는 새로운 전통을 만들어갑시다.
수년 동안 누워 지내는 가족을 돌보면서도 원망 없이 고통을 인내하는 아름다운 삶을 사는 분들을 존귀히 여기는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갑시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감사하며 섬기리다.”라고 노래만 하지 말고 고백대로, 찬양대로 살아가는 좋은 교회 울산교회 성도들이 되도록, 힘을 다해 여러분은 섬기는 목사, 장로가 되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이름에 걸맞은 사역을 잘 감당하게 기도해 주십시오.
그러기 위해서는 치열한 기도의 준비가 필요합니다.
소원만 가지고는 삶이 변하지 않습니다.
소원만 가지고는 통일이 오지 않습니다.
목숨을 걸고 기도하는 용사들이 우리 가운데 일어나길 바랍니다.
삶의 모습, 그 한 부분이라도 바뀌려면 치열한 기도가 필요합니다.
보십시오. “기도하라”는 주님의 권면을 듣지 않고 잠들었던 제자들 가운데 한 사람은 그 성격대로 칼을 휘두릅니다. “그 중의 한 사람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오른쪽 귀를 떨어뜨린지라”
답변을 기다리지 않는 제자들은 묻지 않는 제자들보다 더 나은 것은 없습니다.
질문해놓고도 자신의 생각대로 칼을 휘두르는 모습은 마치 오늘 우리의 자화상 같습니다. 줄기차게 기도는 하는데도 행동은 조금도 변화하지 않습니다.
은혜롭게 찬양을 부르는데도 삶은 영향을 미치지 못합니다.
“신앙생활 일터에서!”라고 구호를 백일 넘도록 외쳤으면 이제 일터에서 신앙인의 향기가 드러나야 합니다. 드러나려면 진지한 기도가 필요합니다.
칼도 두 자루나 있고 주님을 따르는 제자로서, 그것도 수제자로서 가만히 있다는 것은 상식적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쩌면 예수님의 대답이 떨어지기도 전에 행동으로 들어갔을 것입니다.
당연히 그가 할 수 있는 행동을, 스승을 보호하기 위한 행동개시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베드로의 행동을 수긍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것까지 참으라”고 말씀 하십니다.
그리고 “그 귀를 만져 낫게 하시더라”고 누가는 밝힙니다.
앞서 “그 오른쪽 귀를 떨어뜨린지라”는 기록이나 여기 “그 귀를 만져 낫게 하시더라”는 표현은 모두 누가만이 기록한 것입니다.
손상된 부위를 정확하게 기록하고, 어떻게 치료했는지를 밝히는 것은 의사 누가의 직업적 관심입니다.
“그 귀를 만져 낫게 하시더라”는 이 지상사역 마지막 기적은 원수를 위한 것입니다.
우리가 믿고 흠모하는 주님의 모습을 생각해 봅시다.
배신의 도구로 사용하는 제자의 입맞춤도 거부하지 않으신 주님께서, 여기서는 당신을 잡으러 온 원수까지 사랑하는 모범을 보여주십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그처럼 긴박한 순간에도, 사람을 치료하는 참다운 의사의 모습입니다.
방금 말씀드렸듯이 “그 귀를 만져 낫게”하신 것은 예수께서 세상에 오셔서 행하신 마지막 기적입니다.
이 마지막 병 고치는 기적을 친구도 이웃도 아닌 자신을 잡으려고 온 대적에게 행하심으로 친히 원수를 사랑하는 본을 보여주십니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라”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라”고 말하면 세상은 이해하지도 수용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그래야 한다고 수긍합니다.
수긍할뿐 아니라 기도의 능력을 경험한 그리스도인들을 그렇게 살았습니다.
엎드리는 성도들은 오른 빰을 때리는 자에게 왼 빰을 돌려대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들은 “너희 원수를 사랑하라”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라”고는 주님의 말씀을 흘러듣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원수를 사랑하는 능력을 간구합니다.
그 때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는 새로운 맛을 보는 차원으로 들어갑니다.
그러면 3 마지막 장면으로 가봅시다.
예수님은 자기를 잡으려 나온 대제사장들과 성전의 경비대장들과 장로들에게 질책합니다.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 같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나왔느냐? 내가 날마다 너희와 함께 성전에 있을 때에 내게 손을 대지 아니하였도다.”
“내가 강도냐?” “내가 무슨 폭력으로 정권을 전복시키려는 현행범이냐?”고 그들의 위선을 꼬집습니다.
“내가 날마다 너희와 함께 성전에 있을 때에 내게 손을 대지 아니하였도다.”
백성들이 소요를 일으킬까 두려워하여 낮에 성전에서 가르치는 예수님을 건드리지 못했습니다.
이제 밤의 어두움을 이용해서 비밀리에 예수님을 잡으려고 시도합니다.
체포할 만한 정당한 근거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지금 이른 새벽에 지켜보는 백성들이 없어서 잡히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시간이 도래했기 때문에 예수님을 체포할 수 있었습니다.
잡히시는 순간이나 장차 십자가에 달리시는 순간까지 상황을 지배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너희 때요 어둠의 권세로다”라고 선언합니다.
비록 사단이 날뛰고 어두움의 세력이 상황을 접수한 듯 보이지만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진행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체포상황을 실제로 주도하는 인물은 유다가 아니라 예수님 자신임이 분명합니다.
어두움의 세력은 일시적인 승리를 얻을 뿐 궁극적인 승리, 영원한 승리는 하나님께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도 원수가 승리하는 것처럼 보이는 상황이 있지만 그 승리는 일시적이고 제한적일 뿐입니다.
어둠은 물러가고 찬란한 태양이 떠오를 것입니다.
밤이 가장 어두워지면 새벽이 가깝습니다.
아무리 추워도 겨울은 지나가고, 봄은 반드시 옵니다.
무서운 폭풍우도 곧 맑은 하늘, 더 푸르고 찬란한 날에게 자리를 양보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시련의 때는 아무리 힘들어도 반드시 끝이 있습니다.
최악의 순간에도 하나님이 모든 상황을 다스리고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붙들고 “어둠의 때, 어둠의 권세”를 이겨냅시다.
영원한 승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속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영원한 승리를 보장하신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 살아갈 동안 우리의 소망이 주님께 있음을 깨닫게 하시려고 때론 어둠의 때, 어둠의 권세를 허용하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시작과 마지막입니다.
창조주요 심판주입니다.
모든 역사는 하나님의 손 안에 있습니다.
최후의 승리는 주의 백성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도 우리의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어둠이 판을 치는 시대에도 주님이 다스리심을 믿는 은혜를 누리길 바랍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