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롱당하신 예수(눅22장63-65)
성경본문: 누가복음22:63-65
63 지키는 사람들이 예수를 희롱하고 때리며
64 그의 눈을 가리고 물어 이르되 선지자 노릇 하라. 너를 친 자가 누구냐 하고
65 이 외에도 많은 말로 욕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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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지난 주일에 이어서, 오늘 다시 예배의 자리에 나오신 이웃 여러분,
몇 분이라도, 다시 예배의 자리를 찾는 분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오늘 어떤 말씀을 드려야 할까 주초부터 고민을 했습니다.
그래서 지난 화요일 이른 아침 산책을 하면서, 주일설교 구상을 아내에게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아내는 지난 주일에 “길 진리 생명”이신 예수님에 대해서 일반적인 이야기를 했으니, 또 다른 각도에서 일반적인 소개를 계속하는 것보다는 누가복음으로 다시 돌아가도 좋겠다는 의견을 말했습니다.
사실 아내는 항상 본문을 중심해서 설교하는 것을 평소에도 선호하는 사람이기도 하니까 조금도 예상 밖의 대답은 아닙니다.
그리고 지난주일 예수님에 관한 일반적인 이야기에서, 그동안 살펴오던 누가복음의 본문에 입각한, 특수적인 이야기로 이번 주일에 넘어가자는 것은 설득력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제게는 누가복음으로 돌아가서 예수님의 생애의 특수적인 면모를 다룬다고 해도 고민은 있었습니다.
문제는 조롱(63~65절)과 최후심문(66~71절)을 따로 취급할 것인지, 아니면 “내가 그니라”는 결정적 고백에 대한 서론으로 조롱당한 부분을 다룰 것인지 하는 것입니다.
조롱(63~65절)과 최후심문(66~71절), 전체를 한 편의 설교로 다루어도 좋을 것 같다는 아내의 의견을 따르기엔 마음에 부담이 있었습니다.
일찍 예언자들이 말하고, 주님 자신이 당신이 겪을 수난의 한 부분으로 조롱과 모욕을 당할 것이라고 반복적으로 언급하셨고, 복음서 기자들이 조롱당하는 장면을 모두 다 짧게나마 빠뜨리지 않고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말하자면 주님이 조롱받으신 부분을 그냥 디딤돌 삼아 슬쩍 뒷부분으로 넘어가기에는 마음이 편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비록 짧은 본문을 가지고 한 편의 설교를 준비한다는 것은 부담이 커긴 하지만, 본문에 정직해야 하는 것이 설교자의 부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결국 오늘 63~65절을 본문으로 “조롱당하신 예수님”을 상세하게 다루기로 한 것입니다.
물론 일반적으로 말하면 복음서라고 불리는 책들의 주인공은 예수님입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 바로 앞 부분에서는 조연으로 출연한 베드로도 한 번씩 조명을 받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베드로를 비추고 있던 카메라가 다시 조롱당하시는 예수님께로 집중하고 있습니다.
다시 한 번 본문을 읽어보겠습니다.
“지키는 사람들이 예수를 희롱하고 때리며 그의 눈을 가리고 물어 이르되 선지자 노릇 하라. 너를 친 자가 누구냐 하고 이 외에도 많은 말로 욕하더라.”
물론 우리가 읽은 이 부분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 누가가 쓴 복음서의 22장이 누가복음 전체 책의 어디 만큼에 해당하는지를 알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누가복음은 전체가 24장이니 22장이란 이야기가 거의 끝부분에 와 있다는 것을 누구나 알 수 있을 것입니다.
9장에 시작한 예루살렘으로 향하던 예수님의 발걸음은 이미 예루살렘에 도착했고, 22장을 펼치면 제자 중 한 사람 유다의 배신, 감람산의 치열한 예수님의 기도, 그리고 밤중의 체포, 베드로의 부인에 이어서 오늘 이야기인 조롱당하신 예수님의 이야기로 이어집니다.
더 이상 오늘 본문에는 베드로도 제자들도 모두 등장하지 않습니다.
상황은 점점 더 나빠지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친구들은 모두 도망치고, 원수들은 조롱하는 장면입니다.
“지키는 사람들이 예수를 희롱하고 때리며 그의 눈을 가리고 물어 이르되 선지자 노릇 하라 너를 친 자가 누구냐 하고 이 외에도 많은 말로 욕하더라.”
그러면 이제부터 한 구절씩 살펴볼 차례입니다.
“지키는 사람들이 예수를 희롱하고 때리며”
그동안 우리 울산교회를 꾸준히 다닌 분들은 우린 밤중에 감람산에서 체포된 일과 대제사장의 집에서 세 번씩이나 예수님을 부인한 베드로의 사건을 이미 살핀 적이 있습니다.
주님은 “대제사장들과 성전의 경비대장들과 장로들”(52절)이 보낸 무리들에 의해서 체포되셨습니다.
다른 복음서를 읽어보면 “예수를 잡은 자들이 그를 끌고 대제사장 가야바에게로 가니 거기 서기관과 장로들이 모여 있더라.”(마 26:57)고 합니다.
다른 복음서에 의하면 체포된 밤중에 대제사장 가야바의 집에 모여 있던 유대 산헤드린에 의해서 비공식적으로 정죄를 받습니다.
하지만 누가는 그 사건을 기록하지 않고 오늘 우리가 읽은 부분으로 바로 넘어갑니다.
“지키는 사람들이 예수를 희롱하고 때리며”
지금 예수님을 “지키는 사람들”은 대제사장의 종들을 가리킬 것입니다.
이제 주님은 남은 어둠의 시간들을 그를 지키고 있던 이들의 심심풀이의 대상으로 전락하여 지나가고 있는 것을 보여줍니다.
간밤에 한잠도 주무시지 못한 주님을 단 한순간도 쉬도록 내버려두지 않았습니다.
곧 있을 공식재판에 대비하여 마음을 가다듬고 준비할 여유도 주지 않았습니다.
그는 희롱의 대상으로, 조롱당하고 매 맞으며 잔인한 놀이의 대상이 되셨습니다.
비록 그를 지금 희롱하고 매를 때리며 잔인한 놀이의 대상으로 삼는 이들은 “지키는 사람들”, 즉 ‘아랫것들’이었지만 이것은 덕망 높은 산헤드린 의원들의 전적인 허락과 협조로 자행되고 있는 것을 능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그들은 지금 희롱당하는 예수님을 바라보며 대리만족하고 있을지 모릅니다.
마치 주인이 옆에 있으면 더욱 심하게 짓는 개들처럼 ‘아랫것들’은 즉 “지키는 사람들”은 온갖 비열하고 비인격적인 모욕을 그 밤에 예수님께 서슴지 않고 행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비록 인류의 4대 성인으로 간주하던, 아니면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하던, 지금 조롱당하시는 예수님에 대해서 생각해 보십시오.
사적인 삶을 사신 30년이나 공적인 삶을 산 3년을 통틀어 이런 취급을 당할 만한 일을 한 번도 하신 적이 없습니다.
특히 지난 3년 공적인 삶을 생각해 보십시오.
식사할 겨를도 없이 타인을 섬기는 삶을 사셨지만 자신이 그처럼 사랑하고 섬기려했던 사람들에 의해서 지금 조롱을 받고 계십니다.
“지키는 사람들이 예수를 희롱하고 때리며”(53절)
지금 죄인들에게 희롱당하고 멸시를 받습니다.
“희롱하다”는 말은 ‘무엇을 가지고 놀다’는 뜻입니다.
마치 예수님을 노리갯감으로 가지고 장난을 쳤다는 말입니다.
입안의 껌처럼, 심심풀이 땅콩처럼 취급했다는 뜻입니다.
“때리다”는 말은 “가죽을 벗기다” “매질하다”는 뜻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이 말들은 예수께서 대제사장의 종들에 의해서 어떤 조롱과 모욕을 당하셨는지를 짐작하게 합니다.
아예 짐승을 다루듯이 비인격적인 취급을 당했습니다.
사람들은 때로 참 잔인하고 비열한 행동을 서슴지 않습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그의 눈을 가리고 물어 이르되 선지자 노릇 하라 너를 친 자가 누구냐 하고”(64절) 예수께서는 조롱당하고 매 맞으며 잔인한 놀이의 대상으로 취급을 당했습니다.
그들은 눈을 가린 다음 예수님을 심하게 때리고 그의 인격을 모독하는 말을 내뱉습니다.
“선지자 노릇 하라. 너를 친 자가 누구냐”라고 말합니다.
이미 예수님을 때리고 모욕한 그들의 상전인 종교지도자들을 흉내 낸 것이라고 마태와 마가는 밝힙니다.
좀 더 실감나게 마태는 기록합니다.
“이에 예수의 얼굴에 침 뱉으며 주먹으로 치고 어떤 사람은 손바닥으로 때리며 이르되 그리스도야 우리에게 선지자 노릇을 하라 너를 친 자가 누구냐?”(마 26:67~68)
간결하지만 마가 역시 보다 더 리얼하게 표현합니다.
“어떤 사람은 그에게 침을 뱉으며 그의 얼굴을 가리고 주먹으로 치며 이르되 선지자 노릇을 하라 하고 하인들은 손바닥으로 치더라”(막 14:65)
예수님을 지키던 군병들은 예수님을 희생양으로 삼아서 지루한 밤 시간을 보냅니다.
주님께는 힘들고 고통스런 밤이었지만 그들에겐 즐겁고 재미있는 밤이 되었습니다.
찬송을 받으실 예수께서는 블레셋 사람에게 사로잡힌 삼손처럼 놀잇감이 되셨습니다.
여기에는 복합적인 고통이 동시에 주어지고 있습니다.
신체적인 학대와 모욕적인 말로 정신적인 학대를 받았습니다.
더 나아가 영적인 능력에 대해서도 조롱을 당했습니다.
“그의 눈을 가리고 물어 이르되 선지자 노릇 하라 너를 친 자가 누구냐”(64절)
당시 아이들이 하던 놀이를 흉내 내어서 “그의 눈을 가리고” 갈대껍질로 얼굴을 때리고는 누가 때렸는지 알아맞힐 때까지 이 놀이를 계속했습니다.
이를 통해서 그가 선지자라고 하는 것을 조롱하는 것입니다.
그만이 가지고 있다는 은밀한 일을 안다는 능력을 조롱합니다.
여기서 갈대껍질로 그를 치는 것은 신체적인 고통을 주려는 것이 아니라 조롱을 위한 것입니다.
“선지자 노릇 하라. 너를 친 자가 누구냐”
하지만 그들의 이러한 행동 중에 어떤 것도 두려움을 안겨주지 못했고, 생지옥과 같은 상황에서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모든 것을 참으셨습니다.
우린 이렇게 설명해도 남이 당하는 고통은 잘 느끼지 못합니다.
사람들이 툭하며 나에게 던지는 한 마디의 조롱이나 막말에도 분을 삭이지 못하지만 예수님이 지금 당하는 것에 대해서는 느낌이 잘 와 닫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린 본문을 읽을 때 번역을 해서 들어야 합니다.
“그들은 예수의 눈을 가려 놓고 주먹으로 치면서 ‘예언자라 했으니 이번에는 누가 쳤는지 알아맞혀 보시지’하며 예수께 온갖 무례한 짓을 다 하였다.”고 현대어 성경은 번역합니다.
그래도 실감이 나지 않는 분이라면 “네가 집사냐?” “네가 권사냐?” “네가 장로냐?” “네가 목사냐?”로 바꾸어 들어보십시오.
툭하며 던진 한 마디의 평가나 막말에도 분을 삭이지 못하는 분이라면 온갖 모욕을 당하면서도 침묵하고 계신 주님이 예사분이 아님을 아셔야 합니다.
이런 모욕을 당함은 예언자의 예언을 성취하기 위함인 동시에 자신이 하신 예언의 성취이기도 합니다.
“인자가 이방인들에게 넘겨져 희롱을 당하고 능욕을 당하고 침 뱉음을 당하겠으며”(눅 18:32)라고 한 대로 미천한 아랫것들에 의해서 당하는 온갖 수모를 다 견디어내셨습니다.
찬송을 받으실 분께서 이보다 더한 수모가 없었을 터이지만 이것들은 단지 그가 당한 많은 수모 가운데 한 예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구절은 기록합니다. “이 외에도 많은 말로 욕하더라.”(65절)고 오늘 본문은 마감하고 있습니다.
“욕하더라”는 “모독하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말인데 이 단어는 하나님이나 신성한 것에 대하여 마땅히 가져야 할 경외심을 갖지 않고 의도적으로 모욕하는 행위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그리하여 대제사장과 하속들, 즉 성전 수비대원들이 예수님을 향해 행한 희롱과 모욕이 신성모독과 같은 것임을 누가는 이 의도적인 단어를 사용함으로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신성모독을 하였다고 예수님을 정죄한 그들이야말로 가장 흉악하게 신성모독을 서슴지 않고 행한 자들임을 은근히 들어냅니다.
동시에 예수님이 구약에 고난 받는 메시야임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장면이 펼쳐지기 수백 년 전에 선지자 이사야는 마치 눈으로 보는 것처럼 예언했습니다.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 모욕과 침 뱉음을 당하여도 내 얼굴을 가리지 아니하였느니라.”(사 50:6)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사 53:3)
우린 아무리 말로 설명해도 남이 당하는 고통은 잘 느끼지 못합니다.
정말 우리는 사람들이 툭하며 나에게 던지는 한 마디의 조롱이나 막말에도 분을 삭이지 못하지만 예수님이 지금 당하는 것에 대해서는 느낌이 잘 와 닫지 않습니다.
하지만 진정으로 말한다면 우린 어떤 비난이나 조롱을 당해도, 악의적이고 편파적이라고 할지라도 일말의 비난당할 여지는 있습니다.
“그래서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날까?”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부분만 생각해도 보통 사람처럼 처신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아랫것들”조차 가지고 놀아도 한 마디 말도, 험한 표정은 그만두고, 한 순간의 일그러진 표정도 보이지는 않습니다.
오늘 이 예배의 자리에 나오신 이웃 여러분 그리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영광스런 아들을 사람들이 그렇게 무시하고 조롱하고 함부로 취급했다는 사실이 소름 돋는 끔찍한 일이 아닙니까?
그런데 왜 주님 자신은 그런 모욕과 조롱과 학대를 당하고만 있었을까요?
조롱당하신 것도 우리를 대신 당한 것이 아닐까요?
인류의 역사는 늘 가진 자, 힘 있는 자들이 상대방을, 그것도 별로 대단해 보이지 않으면 더더욱 무시하는 것이 세상에서 당한 수모를 당신이 다 겪으셨다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그렇게 당해온 사람들에게 “내가 먼저 너희를 위해서 이런 수모를 겪었다”고, “너희를 위해서 무시, 모욕, 조롱, 학대를 겪었다”고 말하고 싶었다면 더더욱 오늘 본문을 그냥 지나가며 언급하고 말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부분을 설명하기 위해서 오늘 여기에 머물고 있습니다.
무시당하고 조롱당하고 학대받는 것은 바로 우리가 날마다 겪는 현실입니다.
그러다보면, 누가 우리를 함부로 대하기도 전에 미리 주눅이 들어서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고 축복의 노래를 들려주어도 반신반의합니다.
한 편으로는 들으면서 감격해 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정말 그럴까 하는 의심이 들기도 합니다.
저는 그것을 두 주간 전 만난 젊은이들과 만나면서도 의외로 주눅이 들어 있는 모습, 별로 특별하지도 못한 자기들을 특별히 대우해 준다고 몹시 고마워하는 모습을 통해서 확인했습니다.
또 한 사람은 자기 사연, 자기의 계획을 기억해 준다고 너무 감격해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태초부터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의 대상”으로 태어났는데도 불구하고 너무나 함부로 취급받다보니 스스로도 주눅이 들어서 사는 것이 어찌 젊은이들만의 모습이겠습니까?
오늘 우리 가운데 한 번도 무시당하지 않고 살아온 사람이 어디 있을까요?
누구라도 당해 보셨을 것입니다.
특별히 제 아내와 같은 왜소한 체구의 사람이면, 무시당하는 것은, 자라면서 당한 일상사이기도 했을 것입니다.
대학교에 다니면서도 서로 모르는 동급생들조차 아예 반말거지를 들어야 했습니다.
결혼을 해서 서울 어느 교회에서 부목사 사모로 지낼 때도 별 생각 없이 하는 말들, 괜찮은 국립대학을 나오고 중등학교 교사를 했다는 것을 뒤늦게 알자 “그러면 그렇지”라고 평소에 가진 “너무 기울어진 결혼”이라는 그동안의 오해가 풀렸다는 듯이 한 마디 던지는 말도, 때로는 당사자에겐 상처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 이야기는 스스로 잘난 사람들로 처신하는 서울 사람들만의 언행만이 아닙니다.
울산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마 족히 10년의 세월이 흘렀을 것입니다.
어떤 공동체가 전체 모임을 지하식당에서 할 때였다고 들었습니다.
어떤 구역장이 열심히 아내를 찾아 만나서 하는 말이, 구역 원 한 분이 꼭 사모님이 어떤 분인지를 만나고 싶다고 해서 데리고 왔는데 느닷없이 첫 마디가 “사모님, 참 시집 잘 갔네요.”라고 하더랍니다.
고깝게 들으려면 무슨 뜻이죠?
우린 사람들을 너무 쉽게 보이는 데로 평가합니다. 생긴 허우대며 현재의 위치며 이런 저런 외적 요소로 평가합니다.
이런 취급을, 예언자가 이미 말한 대로, 영광스런 하나님의 아들께서도 수없이 당하셨습니다.
대표적인 예언은 이사야 53:2입니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사 52:3, 개역개정)
“그는 주 안에서, 마치 연한 순과 같이, 마른 땅에서 나온 싹과 같이 자라서, 그에게는 고운 모양도 없고, 휼륭한 풍채도 없으니,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모습이 없다.”(표준새번역)
“그러나 여호와의 종이 실제로 마른 땅에서 돋아난 연한 순같이 형편없는 모양으로 자라났다. 여호와께서 그토록 기막힌 꼴이 되게 하셨다. 그의 모양은 아름답지도 않고 장엄한 것도 없었다. 도대체 우리가 부러워하고 매력을 느낄 만한 것이 그에게 하나도 없었다.”(현대어성경)
예언만이 아닙니다. 현실도 그랬습니다.
요한복음 8:57을 보면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그가 들었던 유대인들의 말입니다.
“네가 아직 오십도 못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느냐”
여러분 모두가 아는 대로 험한 삶을 살면 나이보다 폭삭 늙어 보이는 것이 일반적 현상입니다.
주님은 유대인으로부터 “네가 아직 사십도 못되었는데”가 아니라 “네가 아직 오십도 못되었는데”라고 평가를 받았는데 그 때 그분의 나이는 30대 초반이셨습니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서도 험한 삶을 살다보니 나이보다 훨씬 더 늙은이 취급을 혹 당하기도 하셔서 마음이 상하셨습니까?
약 10년 전에 복지관에 봉사를 갔는데 식판을 받아서 갖다 주는데 앉아서 식판을 받는 사람은 여러분보다 더 싱싱하고 젊어보였던 것을 보면서 마음이 상하셨죠?
하지만 “네가 아직 오십도 못되었는데”라고 평가를 받은 주님을 기억하고 주님 닮은 모습이 한 군데는 있다고 그런 상황에서도 앞으로는 위로 받으십시오.
오늘 본문을 보면 그는 온갖 모욕을 당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잘난 사람들과 아랫것들까지 온갖 무례한 짓을 다했습니다.
조롱을 당하고 욕설을 들었을 뿐 아니라 빰을 손바닥을 때리고 주먹으로 얼굴을 때리기도 했습니다. 얼굴에 침을 밷기도 했습니다.
물론 우리 대부분은 무시를 당하기도 하고 욕설을 듣기도 했겠지만 침밷음을 당하고 빰을 맞고 주먹으로 얼굴을 가격당한 경험을 그나마 우리에게는 일상적인 것은 아닙니다.
아마 그랬다면, 그것도 아무 잘못 없이 당했다면 우린 길길이 날뛰고 잠도 자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부터 꼭 기억하십시오.
찬송 받으실 하나님 아들께서는 우리의 죄악을 대신 담당하기 위해서 온갖 모욕을 다 겪으셨습니다.
심지어 침밷음과 손바닥으로 빰을 맞고, 주먹으로 얼굴을 가격당하기도 하셨습니다.
우리는 앞으로 어떤 수모를 당하더라도 조롱당하신 예수님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기억합시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라고 하셨습니다.
절대 말하는 것처럼, 듣는 것처럼 쉽지는 않겠지만 우리에게 주신 기준은 떨어뜨려서는 안 됩니다.
주님은 그 상황에서도 조용히 그리고 위엄 있게, 단 한 마디도 그들의 질문과 조롱에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그는 모든 날뛰는 모욕적인 행동과 고통을 수용하셨습니다.
우리를 위한 대신 당한 모욕이고 고통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여러분과 저를 위한 새로운 삶의 길을 마련하셨습니다.
우리의 고통에만 눈길을 집중하면 우린 세상에서 가장 고통스런 사람이 됩니다.
그러나 좀 더 넓게 살펴보면 황형택 집사님처럼 뜻밖의 사고를 당하고도 견딜 뿐 아니라 새로운 도전을 수용하여 스포츠에도 성악에도 기량을 발휘하며 삽니다.
우리가 받는 모욕만 마음에 새기면 우린 짐승처럼 날뛰어야 하지만 예수님의 조롱받으심을 기억하면 우리가 당하는 모욕과 고통을 한결 받아드리기가 쉬워집니다.
찬송받기에 합당하신 그가 받은 조롱과 수모를 기억하면 세상에서 견디지 못할 조롱과 고통은 없을 것입니다.
물론 집에서는 배우자에게, 직장에서는 동료에게, 아는 것만큼 생활하기 위해서는 쉽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명합니다. “기도에 항상 힘쓰며”라고 요구합니다. 그 길 외에는 성도답게 사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정답을 안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정답대로 행동하기 위해서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반복해서 강조합니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눅 11:9~10)
강조하실 뿐 아니라 알아듣도록 예화를 수차례 들어가며 도전합니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눅 11:13)
예, 배우자가 여러분에게 상처를 주는 말들을 습관적으로 퍼붓습니까?
온갖 욕설들을 입만 열면 쏟아냅니까?
그래도 여러분은 손바닥으로 얼굴을 맞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주먹으로 얼굴을 때리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얼굴에 침밷음을 당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물론 가정폭력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영광스런 하나님의 아들을 폭행한 세상은 아직도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공의를 따라 판단하고 집행하는 법조인이 필요하고 좀 더 의로운 세상을 만드는 하나님의 대리인으로 공무원 이 필요합니다.
또 긴급피난처도 여전히 필요하고 폭력의 피해로부터 일정기간 지낼 수 있는 주거지원 사업도 펼치고 있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욕망을 못 박기 싫어하는 세상을 외칠 것입니다.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결국 그들의 외침이 이겼고 이길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자신을 십자가에 내어 주셨습니다. 그 때도 내어주셨고 지금도 내어주셔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자신의 욕망을 못 박지 아니하면 결국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됩니다.
좀 더 쉬고 싶고 좀 더 자고 싶은 욕망을 따라가면 우린 게으른 실패자들이 됩니다.
“게으른 자는 그 손을 그릇에 넣고도 입으로 올리기를 괴로워하느니라”(잠 26:15)
여러분이 누구든, 공무원이든 법조인이든, 신앙인으로 합당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기도해야 합니다.
그 때 비로소 “신앙생활 일터에서”란 주제에 맞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