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마 5장 3-10)
성경본문: 마태복음 5: 3-10
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9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10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
사랑하는 믿음의 식구 여러분, 그리고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이 자리에 오신 이웃 여러분, 계속해서 기독교의 팔복을 살피려고 합니다.
다섯 가지 복을 말하는 유교와 달리, 예수님은 행복에 이르는 여덟 가지 비결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유교와 기독교의 복은 단지 숫자의 차이가 아니라 차원을 달리하는 복이라는 것은 첫 시간부터 여러분은 알아채셨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마음이 청결한 자에게 주시는 그 여섯 번째 복을 다루게 될 것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8절)
2천년 기독교 역사 상 마음이 청결하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지, 또 하나님을 본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설명하기 위해서 많은 책들이 기록되었습니다.
그렇다면 한 시간의 설교로 그 깊은 의미를 들어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짐작하실 것입니다.
다만 그 핵심의미를, 주된 강조점을 조금 파악하려고 노력할 뿐입니다.
또한 그 주제의 심오함이 우리의 옷깃을 여미게 할 뿐입니다.
여섯 번째 복을 살필 때에 우리는 앞에서와 마찬가지로 서로 간의 연관성을 먼저 살펴야 합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팔복을 말씀하셨을 때 별 생각 없이 그냥 하셨을 리가 만무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마음에 있었던 생각의 흐름을 살피는 것이 바른 이해를 위해서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다만 조심해야 할 것은 우리의 생각을 읽어 들어가지 않도록 해야 하는 일입니다.
본문에 담긴 본래의 뜻을 읽어내는 대신에 본문에다가 우리의 생각을 읽어 들어갈 위험이 크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조심해야 하겠습니다.
첫 번째 던질 질문은 예수께서 왜 하필 이 복을 여기서 말씀하셨는가 하는 점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하나님을 보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최고선으로 여겨져 왔습니다.
그것은 성도들의 모든 노력의 궁극적인 지향점이요, 모든 종교의 지향점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보십시오.
이 복은 팔복의 첫 번째 복도 아니고 마지막 복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중심에 나오는 복도 아닙니다.
모든 종교가 추구하고 기독교인이 지향하는 하나님을 보는 복이 왜 하필 여기에 나오는가 하는 것이 우리가 궁금해 하는 점입니다.
이렇게 보면 어떨까요?
우선 6절이 해결의 중요한 실마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6절을 중심축으로 보고, 주님이 다룬 첫 세 가지 복은 이 중심 복을 향하여 인도되고 다음에 나오는 세 가지 복은 이 중심 복에서부터 연유하는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6절은 일종의 분수령이 되기 때문입니다.
자, 그러면 첫 세 가지 복은 우리의 필요와 관련을 갖습니다.
“마음의 가난”, “우리의 죄로 인한 애통”, “자신을 바로 알게 된 결과로 오는 온유함”을 깨닫는 것, 우리의 삶을 모두 망치는 자아 중심적인 성향과 그 비참함을 알게 되면 온유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세 가지는 모두 우리의 궁극적인 필요가 무엇인지를 강조하며 그 결과 하나님의 의를 목마르듯이 굶주리듯이 사모하게 됩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하나님은 우리의 목마른 것을 배고픈 것을 충만히 채워주십니다.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거기로부터, 그 만족으로부터, 하나님의 의에 배부른 결과로 먼저 긍휼이 여기는 사람이 되며, 또한 마음이 청결한 사람이 되며, 그리고 화평을 추구하는 사람이 됩니다.
그 궁극적인 결말이 의를 위한 핍박까지 감수하게 됩니다.
이번 가을에 산행들 하셨습니까?
올라가는 길과 내려오는 길을 달리하는 산행 코스라면 이렇게 생각해 보십시오.
첫 세 가지 축복은 정상인 네 번째의 축복을 향한 오르막이라면, 다섯 째, 여섯 째, 일곱째는 정상에서부터 다른 편으로 내려오는 길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잘 살펴보면 첫 째 복, 마음이 가난한 자는 긍휼히 여기는 여섯째 복과 관련이 있습니다.
남을 긍휼히 여기는 자는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닌 자임을 아는 자입니다.
긍휼이 여기는 자가 되려면 자신의 무가치함을 먼저 인식해야 합니다.
자신을 바로 알아야 비로소 남을 바로 볼 수 있고 대할 수 있습니다.
자신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고백하며, 오직 하나님만 전적으로 의지하는 자가 다른 사람을 긍휼히 여깁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살피는 마음이 청결한 자는 애통하는 자가 누리는 두 번째 복과 관련을 갖습니다.
자기 마음의 악함과 세상의 악함을 두고 애통하는 자는, 자기가 저지른 악 때문만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이 악을 지향하는 사실을 두고 통곡하는 자입니다.
자신 안에 있는 죄굽성, 자신의 본성이 죄를 짓기를 원한다는 사실이 애통하게 만드는 핵심요인입니다. 성품과 인격의 부패로 인한 통곡입니다.
누가 그 마음이 청결한 자입니까?
자신의 마음이 악하고 부패함으로 인해서 우는 자입니다.
청결한 마음을 갖는 유일한 길은 자신의 마음의 추함과 악함으로 인해서 통곡하는 것입니다.
애통하는 것만이 청결과 순수를 향한 길입니다. 눈물만이 여러분의 마음을 깨끗하게 씻습니다.
예, 그렇기에 다음에 살필 화평케 하는 자도 세 번째 복이 선포되는 온유한 자와 관련을 갖습니다.
평화를 만드는 자는 온유한 자라야 합니다.
온유한 자가 아니면 화평을 추구할 리가 만무합니다.
하지만 이 순서문제 우린 시간을 더 쓸 수가 없습니다.
자신의 필요를 향한 세 단계가 만족의 정상으로 인도하고 만족한 결과로 우리는 다음 세 단계의 축복으로 나아가게 한다는 것만 기억합시다.
오늘 우리가 살필 여섯째 복은 마음의 청결을 무엇보다 강조합니다.
자 그러면 오늘 우리 본문을 차례로 살펴봅시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8절)
이와 같은 구절은 한 단어씩 살피는 것이 이해를 돕는 최선의 방법처럼 보입니다.
그러면 “마음”이란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이 마음을 무엇보다 강조하셨습니다.
물론 구약도 마찬가지입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바리새인들의 위선 때문입니다.
항아리의 겉만 깨끗하게 보이려고 하고 그 안을 살피지 않는 것처럼 겉으로 나타나는 행실을 엄청 신경을 쓰면서도 자신의 마음은 살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은 겉으로는 착한 척 하지만 그 속은 온갖 악이 가득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율법의 온갖 규칙은 세세하게 지키려고 하지만 가장 중요한 계명인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일은 생각도 하지 않고 사는 당대의 대표적인 종교인들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마음을 강조했고 마음은 그의 가르침의 중심입니다.
달리 말해 주님은 머리를 강조한 것이 아니라 마음을 강조했습니다.
두뇌나 지식을 강조하지 않고 주님의 관심은 마음에 있었다는 사실을 주목합시다.
기독교 신앙은 궁극적으로 교리나 교리의 이해에 있지 않고 마음의 상태에 있습니다.
물론 교리가 기독교에 있어서 중요하고 바로 이해하는 것을 핵심적인 일인 것은 틀림이 없습니다만 교리를 이해하는 것에만 멈춘다면 그보다 더 큰 비극도 달리 없을 것입니다.
성경을 꼭 배워야 합니다.
그러나 배운 것을 삶에 적용할 때에 비로소 가치가 있습니다.
주님이 강조한 것은 외부적인 모습이나 행위가 아니라 마음입니다.
바리새인들은 모든 것을 외부적인 행위나 행동, 윤리의 문제로 만드는 전문가입니다.
하지만 교리 이전에 기독교는 새로운 삶의 방식입니다.
예, 성경을 외우는 것보다 기독교인의 삶을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마음상태입니다.
그러면 주님이 그처럼 강조하신
1 마음이란 무엇을 뜻할까요?
보통 성경에는
1.1 인격의 중심을 뜻하는 말로 사용됩니다.
단지 애정과 감정의 좌소만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팔복은 기독교 신앙을 감정이나 지성이나 의지에만 영향을 끼치는 것으로 보지 않습니다.
마음은 이 세 가지 모두를 포함합니다.
마음은 사람의 존재와 인격의 중심을 뜻합니다.
우리 삶의 모든 것이 흘러나오는 샘을 뜻합니다. 지정의 모든 것을 포함합니다.
마음은 전인을 뜻합니다. 그런 뜻으로 주님은 선언합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8절)
겉모습과 행동이 깨끗한 사람이 아니라 그 중심, 존재의 근원이요 모든 활동의 원천인 마음이 깨끗한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기독교는 항상 마음을 강조합니다. 기독교의 복음은 마음에서부터 출발합니다.
성경은,
1.2 마음을 우리의 모든 문제의 근원이요 모판으로 봅니다.
주님은 이렇게 말합니다.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비방이니”(마 15:19)
예, 우리의 모든 문제의 근원은 우리의 잘못된 환경이나 교육이나 불공정한 분배문제가 아닙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람이 타락한 것은 모든 문제가 없는 완벽한 환경에서, 낙원에서 타락한 것임을 잊지 마십시오.
그러므로 완벽한 사회에서도 문제는 생겨납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말씀하신대로 인간의 모든 문제는 마음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오죽하면 예레미야가 이렇게 탄식했겠습니까?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이를 알리요?”(렘 17:9)
타락과 죄를 범한 결과 사람의 마음은 그 어떤 것보다 심히 부패한 것입니다.
온갖 악과 추한 것이 사람의 마음에서부터 나옵니다.
문제는 인간 존재의 중심부에서 나옵니다.
그러면 두 번째 말, “마음이 “청결”한 자가 복이 있나니” 우린 방금 인간의 마음이 얼마나 부패했는지를 살폈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청결한 마음을 가져 하나님을 볼 수 있겠습니까?
마음이 청결한 자만이 하나님을 본다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완전절망입니다.
태어난 본성을 가지고 말하면 우린 아무도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처지가 되지 못합니다.
누가 우리를 전적타락의 웅덩이에서 건져내어 하늘로 올리겠습니까?
초자연적인 개입이 아니고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마음이 “청결”한 자가 복이 있나니”라고 했을 때
2. 청결이란 무슨 뜻일까요?
두 가지 중심적인 의미를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그 하나가
2.1 위선이 없는, 꾸밈이 없는, 나뉨이 없는, 순수한 마음입니다.
초점이 바로 되어서 사물이 바로 보이는 상태의 눈처럼 순수한 것을 뜻합니다.
청결한 마음은 일편단심의 마음이요, 단 마음으로 주님을 향한 헌신의 마음입니다.
“여호와여 주의 도를 내게 가르치소서. 내가 주의 진리에 행하오리니 일심으로 주의 이름을 경외하게 하소서”(시 86:11)
일심으로 주의 이름을 경외해야 하는데 우리 마음은 시시때때로 나뉜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한 편 마음은 주님을 알고 싶고 주님 위해 살고 싶은데, 다른 한 편의 마음은 또 다른 쪽으로 쏠립니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 도다”(롬 7:22, 23)
순수한 마음은 더 이상 나뉨이 없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일심으로 주의 이름을 경외하게 하소서”(시 86:11)라고 기도합니다.
시인은 자기의 문제가 마음이 집중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간구합니다. 온전하게, 감춘 것이 없이, 진지하게 되기를 소원합니다.
또 “청결하다”는 다른 의미는
2.2 “더럽히지 않는” “깨끗한”이란 뜻입니다.
계시록을 보면 요한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자를 이렇게 말합니다.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가지 못하되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만 들어가리라”( 계 21:27)
“자기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그들이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받으려 함이로다”(계 22:14)
예 그렇습니다. 개들과 점술가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는 결코 거기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들은 다 성 밖에 있을 것입니다.
다른 말로 설명하면 마음이 청결하다는 것은
2.3 하나님을 향한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그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시고 그 입에 거짓도 없으시며”(벧전 2:22)
흠 없고 순전한 마음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을 최고선으로 삼는 나뉨이 없는 마음입니다.
일편단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기처럼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눅 10:27)
좀 더 요약하면 청결한 마음이란 모든 면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는 것을 우리의 삶에 궁극적인 소원으로 삼는 마음입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을 갈구하며 하나님을 알기를 갈망하며 하나님을 섬기길 열망합니다.
그런 자가 하나님을 볼 것이라고 주님은 말합니다.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히 12:14)
거룩을 설교하고 거룩을 추구하는 삶을 살아가십시오.
간결하게 분명하게 성경은 말합니다.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이제 다음 주제로 옮겨갑시다.
기독교는 우리를 하나님을 보도록 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우리를 하나님을 보는 자리로 옮겨놓는 것이 궁극적인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예의바르고 도덕적이고 기독교에 대한 지적인 관심의 문제가 아닙니다.
전 존재의 문제요, 전인격적인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거룩함, 순결한 마음, 흠 없는 삶은 필수적입니다.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요1서 1:5)
영적인 영역이기에 빛과 어두움을 섞을 수 없습니다. 흑백을 혼합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울릴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오직 예수님과 같은 자만이 하나님을 볼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보기 위해 “마음이 청결한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은 명백합니다.
그러면
3 하나님을 본다는 것을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 주제 역시 2천 년 기독교 역사상 엄청 많은 글들이 쓰인 주제입니다.
초대교부들로부터 상당히 많은 분들이 지대한 관심을 가진 주제입니다.
정말로 영광스런 상태에서 우리의 육안으로 하나님을 본다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까?
객관적이고 가시적인 문제입니까?
아니면 순전히 영적인 의미입니까?
쉽게 답할 수 없는 문제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하지만 몇 가지 증거들은 성경에 있습니다.
모세에게 있었던 일을 기억하시죠?
하나님께서 그를 바위틈에 두시고 당신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면서 등만 보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육안으로 보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사자들이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난 것도 육신적으로는 볼 수 없다는 것을 역시 말합니다.
또한 주님 자신이 하신 말씀도 있습니다.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마 11:27)
하여간 하나님의 존재는 초월적이고 영원하기에 우리 노력으로 도달할 영역이 아닙니다.
영광의 하나님을 인간의 용어로 적절하게 표현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의 이성은 유한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묘사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질 않습니다.
다만 하나님이 주신 영광스런 약속이 있다는 사실과 그 약속은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4.영광스런 약속은 어떻게 성취될까요?
팔복의 다른 약속처럼 하나님을 본다는
4.1 약속의 일부는 지금 여기에서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성도들은 어떤 의미에서 세상 사람들과 달리 하나님을 이 땅에서 봅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사건 가운데서 우리는 하나님을 봅니다.
믿음의 눈으로 우리는 이 비전을 가집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느낍니다. 그가 가까이 계신 것을 느끼는 동시에 그의 임재를 즐거워합니다.
히브리서 11장을 보면 모세는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임금의 노함을 무서워 아니하고 곧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같이 하여 참았으며”(히 11:27)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본다는 약속은 그와 같이 여기 이 땅에서 성취됩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비록 우리는 불완전하지만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약속성취를 맛봅니다.
또 다른 방식으로 우리는 하나님을 봅니다.
우리의 신앙여정을 살펴보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은혜롭게 대하시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저런 일에 하나님의 손길을 본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4.2 영광스런 약속의 성취는 아직 다가올 것입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고전 13:12)
요한 역시 고백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요1서 3:2)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 이런 놀라운 약속이 있는 것을 기억하며 살고 있습니까? 비록 여러 가지 문제와 고통이 있는 세상을 지금 살고 있지만 여러분과 저는 장차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입니다.
장차 우리는 주님이 나타나실 때에 그분을 계신 그대로 볼 것입니다.
이 사실을 바로 알고 살아간다면 우리의 삶에는 놀라운 변화가 찾아올 것입니다.
여러분과 저는 하나님의 존전에 알현할 존재들입니다.
우린 대한민국 대통령이나 아니 울산 시장과 올해 송년회를 함께 하지 못할지라도 온 세상의 최고 통치자이신 하나님을 장차 알현하게 될 귀한 신분입니다.
만왕의 왕 되신 그 분의 임재에 함께 하며 존귀하신 분을 얼굴과 얼굴로 마주 하게 될 것입니다.
희미하게, 어렴픗이 보는 것이 아니라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입니다.
이 사실을 바로 파악한다면 사소한 세상일에 그처럼 일희일비하지 아니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여기서 부분적인 의미로 하나님을 만나 뵙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영광스런 약속실현의 날에 마음을 드리십시오.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골 3:2)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그와 함께 영광중에 나타날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한 해의 마지막 한 달 12월을 보낼 때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처럼 응시하십시오.
여러분을 위해 예약된 장차 나타날 영광을 묵상하는 시간을 가지십시오. 그렇다면 여러분의 삶의 가장 큰 관심사는 순결한 마음을 갖는 것이 될 것입니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5 어떻게 우리의 마음은 청결해 질 수 있을까요?
크게 두 가지 방안이 제시됩니다.
5.1 수도사가 되어서 세상으로부터 우리는 격리시켜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청결한 마음을 가지는 일은 다른 모든 일을 중단하고 전념해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그러나 신약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스스로를 깨끗케 하려는 모든 노력은 시작부터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본성적으로 우리의 마음이 만물보다 더러운 것임을 아는 자는 다윗처럼 부르짖어야 합니다.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51:10)
만약 여러분이 스스로 자기 마음을 깨끗케 하기 시작한다면 마지막에는 처음보다 더 더러운 마음으로 귀착할 것입니다.
5.2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의 마음을 깨끗하게 하십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을 정케하고 새롭게 하십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내주하시고 역사하실 때에 우리 마음은 깨끗해집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 안에 계시면서 순종하는 마음을 일으켜 주고 하나님께서 원하는 일을 할 수 있도록 여러분을 도와주십니다.”(빌 2:13, 현대어성경) 바울은 그래서 확신합니다.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빌 1:6)
그것만이 유일한 희망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손에 있습니다.
날마다 주께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고 계십니다.
그날이 오면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엡 5:27)하실 것입니다.
그렇다고 우리는 손을 맺고 뒷짐 짓고 사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역을 믿는 사람은 수동적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살아갑니다.
야고보 선생은 말합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약 4:8상)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까이 오시길 바란다면 마음을 검게 한 채로 살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야고보는 말합니다.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약 4:8하)
바울도 로마서에서 밝힙니다.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롬 8:13)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골 3:5)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가장 큰 소원은 무엇입니까?
가장 큰 열망은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을 보는 것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렇다면 요한의 말을 귀담아 듣기를 바랍니다.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요1서 3:3)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시간을 허비하지 마십시오.
남은 날들은 오직 하나의 소원만이 여러분의 마음에 가득하게 하십시오.
여러분은 곧 하나님을 보게 될 것입니다.
영원하신 아버지의 영광에 함께 할 것입니다.
이 사실을 믿기에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요1서 3:3)하는 성도들이 되길 바랍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