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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용수 목사

[정근두목사]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마 5: 4)

작성자성경 벌레|작성시간22.09.26|조회수462 목록 댓글 0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54)

성경본문: 마태복음 5: 4

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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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일 우리는 행복에의 첫 걸음을 살폈습니다.

약속한대로 오늘 우리는 행복을 향한 여덟 가지 열쇠를 계속해서 살피려고 합니다.

구절마다 나오는 복이 있다는 말은 흔히 쓰는 말로 바꾸면 행복하다는 의미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예수님이 산 위에서 가르치신 기독교의 행복론은 세상에서 흔히 말하는 것과 정반대입니다.

피상적인 즐거움을 누리기 위해서 사람들이 미친 듯이 달려갑니다. 돈을 물 쓰듯이 쓰고, 시간과 에너지를 쏟는 사람들은 모두 한숨, 탄식 비탄, 애통, 통곡을 피해 보려는 필사적인 노력을 합니다.

 

세상은 고통을 떨쳐버리려 노력합니다. 고통은 잊어버려!” “무슨 짓을 해서라도 등을 돌려라고 외칩니다. 그래서 소위 유흥산업이, 엔터테인먼트 업계가 번성을 합니다.

 

힘들게 사는 사람들에게 하루의 피곤을 잊게 만들어야 한다고, 옛날에는 코메디 프로가 자리를 잡더니 요즈음에는 개그콘서트까지, 아예 줄여서 개콘이라 부르는 프로가 판을 칩니다!

 

하지만 텔레비전 앞에서 의미 없는 웃음을 남발한다고 삶이 더 풍요로워지고 행복해 지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텔레비전을 바라보며 그 소중한 시간 죽이기를 할 뿐입니다.

세상이 멀리하려고 발버둥치는 것이 바로 한숨이요, 탄식이요, 비탄이요, 애통이요, 통곡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합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 5:4)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애통은 일반적인 의미의 애통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보통 언제 애통을 합니까?

사랑하는 부모를 떠나보낼 때 눈물을 흘립니다.

어린 자식을 앞세울 때 우리는 애통을 합니다.

아니 사랑하는 배우자를 앞세울 때 우리는 통곡을 합니다.

그런 때에 복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성경의 가르침은 결코 그런 비상식적인 가르침이 아닙니다.

그러면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 5:4)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바른 의미를 발견하기 위해서 우리는 이 선언이 첫 번째 선언에 이어서 발한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말하자면 마음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는 선언에 이어진 축복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마태는 누가와 달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임이요(눅 6:20)

그런 오해를 미리 방지하기 위해서 마음이 가난한 자라고 한정하고 있습니다.

산위에서 가르치신 여덟 가지 복은 모두 영적인 의미입니다.

두 번째 복이 주어지는 “애통하는 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서 애통하는 자는 돈이 없어서 애통하는 자가 아닙니다. 건강이 나빠서 우는 자가 아닙니다.

물론 경제적인 어려움에서, 아니면 신체적인 건강 때문에 울 수가 있습니다.

울다가 그 눈이 하나님을 향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복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본래적인 의미는 영적인 것입니다.

산위에서 말씀하신 여덟 가지 기독교의 복은 부정적인 면에서부터 시작하고 있다는 것을 간과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늘의 복을 받기 전에 우리는 먼저 심령이 가난해져야 합니다.

구원의 참 기쁨을 맛보기 전에 죄의식을 먼저 느껴야 합니다.

참으로 행복해지기 위해서 먼저 애통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 5:4)라고 예수님이 말한 정확한 의미는 무엇일까요?

애통하는 자들만이 행복하다고 말합니다.

누가복음에 의하면 아주 엄숙하게 선언합니다.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눅 6:25)

 

주님은 오히려 피상적인 웃음 아니 세상적인 명랑함이나 행복은 그 위에 화 있을진저라고 선언합니다.

그러나 지금 우는 자에게는 축복과 행복과 즐거움과 평강을 선언합니다.

 

다시 한 번 묻습니다.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우리가 본받을 궁극적인 표준이신 예수님의 삶을 성경에서 살펴보면 아무데도 웃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화를 내신 기록이나 목마르고 굶주렸다는 기록은 나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생애에 웃었다는 기록은 나오지 않습니다.

 

물론 침묵에서부터 논증을 이끌어내는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동시에 구약의 예언을 살펴볼 때 시사하는 바가 크기 때문입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고, 버림을 받고, 고통을 많이 겪었다. 그는 언제나 병을 앓고 있었다. 사람들이 그에게 얼굴을 돌렸고, 그가 멸시를 받으니, 우리도 덩달아 그를 귀하게 여기지 않았다.”(사 53:3)

 

복음서를 살피면 이런 예언은 문자적으로 성취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세상에 오신 슬픔의 사람, 멸시와 고통을 많이 겪은 주님은 실제 나이보다 훨씬 더 들어보였다는 증거가 있습니다.

유대인 지도자들이 대들었다. ‘당신은 아직 나이 쉰 살도 못 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단 말이오?’”(요 8:57, 현대어성경)

 

예수께서 웃었다는 기록이 나오진 않지만 우셨다는 기록은 나옵니다.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셨다(요 11:35)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우셨습니다.

물론 친구가 죽었다고 우신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곧 그를 살려내실 것입니다.

살려내시려고 지금 무덤 앞에 서셨기 때문입니다.

 

그가 우신 기록은 또 나옵니다.

예루살렘 성에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기록한 복음서는 웃고 즐기는 모습의 예수님이 아니라 오히려 슬퍼하고 우시는 모습을 남기고 있습니다.

 

주님의 모습뿐 아니라 구약의 선지자의 모습이나 신약 사도의 가르침도 마찬가지입니다.

대표적인 눈물의 선지자가 바로 예레미야입니다.

그는 탄식합니다.

어찌하면 내 머리는 물이 되고 내 눈은 눈물 근원이 될꼬 죽임을 당한 딸 내 백성을 위하여 주야로 울리로다.”(렘 9:1)

 

신약의 대표적인 사도 바울의 가르침을 들어보십시오.

그가 그린 율법 아래 사는 자의 탄식을 들어보십시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

이 탄식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자기의 악함에 대하여 비탄에 잠긴 나머지 애통하며 울부짖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신앙인은 자기에 대해서 철저한 절망감을 가지고 고백합니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롬 7:18) 이어서 고백합니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롬 7:19)

 

율법 아래 살 때뿐 아니라 생명을 주시는 성령의 지배 아래 살면서도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롬 8:23)

 

애통한다는 것은 심령이 가난한데서 필연적으로 따라옵니다.

하나님과 그분의 거룩하심을 대면하고, 내가 살아야 할 삶을 직시하면 우리는 자신의 처절한 무능과 절망을 경험합니다. 그 결과 필연적으로 애통하게 됩니다.

자신을 참으로 보게 되고 자신에게 절망하는 자가 바로 애통하는 자입니다.

 

참으로 자기를 대면하고, 자신과 자기의 삶을 직시하는 사람은, 자기의 죄악됨으로 인해서 애통하게 됩니다.

기독교 2천년의 역사를 보십시오.

거룩한 삶을 추구했던 사람들은 자신의 하루하루를 돌아보았고 그런 삶을 살라고 우리에게 권했습니다.

 

집에 들어와서는 밥 먹고 텔레비전 연속극을 보다가, 잠자리에 누워서까지 스마트폰으로 카톡을 하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옆에 누워있는 배우자에게 우리 이제 자자라고 문자를 보내는 삶을 살지 않았습니다.

 

잠자리에서라도 자기 생활을 대충이라도 돌아보며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진 사람들입니다.

나는 오늘 무엇을 했는가?” “나는 무슨 말을 했는가?” “다른 사람들에 대하여 어떤 행동을 했는가?”라고 자문하는 좋은 습관을 가진 분들입니다.

 

그 과정에서 마땅히 해서는 안 될 일을, 말을, 행동을 했다면, 신앙인답지 못한 생각을 하고 감정을 품었다면 그 일로 인해서 고통하며 애통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새날은 그렇게 살지 않겠다고 결단하며 기도한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거기서 그치지는 않습니다.

자기의 행동, 그 속에 내포된 죄성을 바라보며 묻습니다.

내 속에서 나를 이처럼 행동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나는 왜 그렇게 쉽게 화를 내는가? ”걸핏하면 어떻게 그런 성질을 부리는가?” “나는 왜 불친절하고 시기심이 많고 악한 생각을 잘 하는가?”라고 물었습니다.

 

선하게 살고 싶은 욕망과 살지 못하는 현실 사이의 처절한 싸움으로 인해서 고통하며 추한 자신을 미워하며 죄악된 자신으로 애통합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 애통은 피해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자신 속에 있는 추하고 죄악된 것들 때문에 애통한다면 나는 참으로 애통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동시에 기독교인은 거기에 머물러 서있지 않습니다.

참된 신앙인은 자신의 악함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죄 때문에도 애통하는 사람입니다.

자신 안에 있는 죄뿐 아니라 세상에 만연한 죄로 인해서도 슬퍼하고 애통합니다.

 

신문을 보면서, 텔레비전을 보면서 악한 세상, 짐승처럼 사는 이들을 보면서 혐오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들로 인하여 애통합니다.

소중한 삶을, 그 귀한 시간을 헛되고 악한 일에 낭비하는 사람들로 인해서 괴로워합니다.

 

성숙한 신앙인은 다른 사람들의 죄 때문에 애통하는 자입니다.

세상의 도덕적 혼란과 인류의 불행과 고통을 보면서 세상의 악한 상태로 인해서 애통하는 사람입니다.

불의한 세상과 부도덕한 사람들로 인해서, 그 모두가 죄 때문인 것을 알며 애통합니다.

 

예수께서 세상에 계실 때 우신 까닭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이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친구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우셨습니다.

우리에게 죽음을 가져오고, 삶을 망쳐놓고, 우리를 불행하게 만든 죄의 추악한 본질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셨습니다.

주님의 마음의 고통이 예루살렘을 바라보실 때 눈물로 그 얼굴에 흘러내리셨습니다.

구원자인 예수님을 배척하고 심판 아래 빠져들 것을 내어다 보고 애통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왜 애통해야 합니까?

그분의 성품을 받고 그의 고난의 발자취를 따라 가는 성도들은 죄가 세상에 들어와서 이와 같은 참혹한 결과를 가져온 것으로 인해서 애통합니다.

죄를 향한 하나님의 철저한 혐오와 증오, 하나님의 고통으로 인해서 애통합니다.

 

이것이 바로 산위에서 선포하신 애통한다는 말의 영적인 의미입니다.

이것은 세상 정신과 정반대입니다.

지금 웃는바깥 세상을 관찰해 보십시오.

세상은 자신의 실태를 외면하며 그것을 무시하고 스스로 행복해지려는 온갖 노력을 합니다.

 

이 정신이 잘 나타난 세상 사람들의 구호는 무엇입니까?

먹고 마시고 즐기자입니다. 고통스런 일에 너무 집착하지 마!”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는 말에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애통하는 것과 정반대의 주장을 외칩니다.

이처럼 세상의 태도와 기독교인의 자세는 서로 다릅니다.

 

이제 우리는 주님의 계속되는 선언에 귀를 기울일 차례입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예, 주님은 애통하는 자들을 향해 말씀하십니다. 애통하는 사람이 참으로 복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또 하나의 역설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들은 행복합니까?

무엇보다도 죄를 인해서 슬퍼하는 자는 하나님의 영을 통한 즉각적이고 개인적인 위로가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죄로 인해 애통하는 사람은 회개하려는 사람입니다.

사실은 이미 회개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성령의 사역의 결과로 참으로 회개하는 사람은 주 예수님께로 인도받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는 자기의 처절한 죄악 됨과 절망을 보고서 구원자 예수님을 찾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애통의 의미를 알기 전에는 아무도 예수님을 구세주로 만날 수가 없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라고 울부짖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롬 7:25)라고 고백합니다.

 

사랑하는 이웃 여러분, 만일 여러분도 참으로 애통한다면 여러분도 위로를 받을 것입니다.

우리가 철저한 절망 속에 있는 자신을 보게 되면 기쁨과 감사의 새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성령께서 여러분의 완전한 만족과 기쁨의 대상이 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 돌아가신 사실을 깨닫게 해 주실 것입니다.

그 사실을 믿기만 하면 이 세상에서도 하나님이 예비하신 완벽한 구원의 길을 걷게 될 것입니다.

장차 마지막 심판의 자리에도 우리를 죄 없다고 하실 것입니다.

 

한 날 여러분의 애통은 기쁨으로 변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슬픔이 없이는 기쁨도 없습니다.

처음 하나님을 향할 때뿐만 아니라 기독교인의 삶에 계속되는 여정이기도 합니다.

먼저 죄책이 자기에게 있음을 발견합니다.

처음에는 그것 때문에 낙심하고 애통합니다. 하지만 뒤에는 그 사실로 인해서 예수님을 찾고 예수님께로 향합니다.

 

사랑하는 이웃 여러분,

여러분이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순간 예수님의 평화와 기쁨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그 때 여러분은 세상이 알지 못하는 위로를 받습니다. 참으로 애통하는 사람은 위로를 받으며 기쁨을 맛볼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애통과 기쁨이, 슬픔과 행복이 교차하는 생활입니다.

애통이 즉각 위로의 원천이 됩니다.

하지만 신앙인에게 주는 것은 즉각적인 위로만이 전부가 아닙니다.

바울 사도가 로마서 8장에서 상세히 설명하는 바와 같습니다. 복된 소망이 우리를 기다립니다.

 

우리 신앙인은 자신을 바라보고 세상을 바라볼 때 불행합니다.

우리는 마음 깊숙한 곳에서 신음합니다.

사도들과 예수님께서 느끼신 죄의 짐을 느낍니다.

 

하지만 우리는 성령께서 주시는 위로를 받습니다. 우리는 다가오는 영광을 대망합니다. 우리의 희망이신 그리스도께서 돌아오시는 영광의 날이 동터올 것을 압니다.

 

그날에는 우리의 죄 짐이 풀려나고 죄악 된 세상은 물러갈 것입니다.

불의한 세상은 밀려나고 의가 보금자리를 트는 새 하늘과 새 땅이 임할 것입니다.

그날 우리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 5:4)라는 의미를 완전 이해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사실이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무슨 희망이 있겠습니까?

세상을 바라보고 신문을 읽고 뉴스를 들어보십시오.

거기서 여러분은 무슨 위로를 받을 수 있습니까?

눈뜨면 신문을 찾고 잠자리에 들기 전에 뉴스를 듣지만 거기에 무슨 위로가 있습니까?

 

우리의 교육제도는 대학교육을 보편화시켰지만 우린 거기에 희망이 없다는 사실을 이미 확인하고 있습니다.

국제연합이 대답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우리 모두는 잘 알고 있습니다.

온갖 시도를 해 보았지만 모두 다 실패했습니다.

세상에 무슨 희망이 남이 있습니까?

남자가 대통령이 되든 여자가 대통령이 되든 거기엔 희망은 없습니다.

이제 세상을 위한 위로는 하나도 없습니다.

 

하지만 죄와 세상의 비참함 때문에 애통하는 기독교인에게는 위로가 있습니다.

복된 희망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장차 다가오는 영광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인도 비록 여기 땅에서 신음하지만 동시에 우리 앞에 있는 희망으로 인해서 행복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는 궁극적인 영원의 소망이 있습니다.

거기는 슬픔과 탄식이 다시는 없을 것입니다.

모든 눈에서 눈물을 씻겨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빛 가운데서 하나님의 영광을 볼 것입니다. 순수하고 온전한 기쁨과 영광을 경험할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 희망이 없다면 우리는 신앙이라고 불릴 수 없습니다.

죄를 용서받은 이 기쁨, 하나님과 화해한 기쁨, 우리가 하나님을 멀리 떠났을 때 우리를 도로 아 주신 이 기쁨이 오늘 여러분의 것이기를 바랍니다.

더 나아가서 오늘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완벽한 기쁨이 우리를 내일 기다립니다.

 

이제 지금껏 말한 것을 정리하고 마치려고 합니다.

여기 애통하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슬퍼하고 눈물 흘리지만 병적인 인간은 아닙니다.

슬퍼하지만 비참한 사람은 아닙니다. 심각한 사람이지만 엄숙한 사람은 아닙니다. 진지하지만 퉁명스런 사람은 아닙니다.

 

그는 진지하지만 냉정하지는 않습니다.

부정적이거나 비관적인 사람은 아닙니다.

진지함 속에는 따스함과 사람을 끌어당기는 매력이 있습니다.

그는 삶을 심각하게 사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는 사람입니다.

 

속으로는 신음하지만 장차 올 영광으로 인하여 행복한 사람입니다.

자신과 세상의 악함 때문에 슬퍼하고 눈물 흘리며 애통하지만 함께 하는 예수님으로 인해 기쁨과 감사의 삶을 사는 자입니다.

그의 기쁨은 거룩한 기쁨이요 심각한 행복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도의 기쁨은 엄숙한 기쁨이요, 거룩한 기쁨이요, 진지한 행복입니다.

그러므로 진지하고 심각하긴 해도 결코 냉소적이거나 비판적인 사람은 아닙니다.

비록 예수님을 닮아서 신음하고 울지만 그 앞에 기다리는 기쁨으로 인하여 그 앞에 보이는 고난의 발자취를 따라갑니다. 십자가를 참으며 수치를 견디어 냅니다.

 

여기 마지막 질문이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예수님이 주시는 위로를 받을 수 있습니까?

우리는 어떻게 애통하는 자의 길을 어떻게 걸을 수 있습니까?

예, 하나님의 위로를 받을 때입니다. 하나님의 위로를 체험하려면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심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는 상처를 입고 고통을 당하면 하나님이 계신다는 사실을 잊어버립니다.

기억한다면 멀리 계신 하나님, 우리에 대해서 무관심한 하나님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시편은 말합니다.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 하시고 충심으로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 도다.”(시 34:18) 하나님은 고통 가운데 있는 여러분과 함께 하십니다.

 

고통 가운데 있을 때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여러분의 고통을 알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욥은 말합니다. “(하나님은) 나의 모든 길을 살피사 내 발자취를 점검하시나이다(욥 13:27)

 

하나님은 여러분을 굽어 살피고 계십니다.

그 무엇도 하나님의 눈길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의 눈물을, 여러분의 절규를 헤아리십니다.

아무도 내 고통은 몰라라고 말들 하지만 하나님은 아시고 하나님은 돌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돌보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여호와는 선하시며 환난 날에 산성이시라 그는 자기에게 피하는 자들을 아시느니라(나 1:7)

우리 하늘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정말로 돌보시는 동정이 많으신 분이십니다.

여러분의 고통은 하나님께 아픔이 되십니다. 여러분의 고통을 있는 그대로 하나님께 아뢰십시오.

 

더 나아가서 하나님은 도와주시길 원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6)

 

단지 우리의 고통을 아실뿐 아니라 우리를 도와주시길 원하십니다.

여러분의 상처를 접수하실 뿐 아니라 여러분의 상처를 치유하시길 원하십니다.

요즘 힘들지? 너를 생각하고 있어라는 쪽지만 남기질 않습니다. 위로하고 새로운 힘을 공급하십니다.

 

부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위로를 받으시길 바랍니다.

특히 시편은 위로의 보고(寶庫)입니다.

읽으면서 위로가 되는 구절에 줄을 쳐 보십시오. 거기 나오는 약속마다 밑줄을 치며 읽고 암송해 보십시오.

 

또한 하나님의 백성들을 통해서 위로 받기를 바랍니다.

우린 서로를 필요로 하는 존재입니다.

결혼생활과 신앙생활은 혼자서 할 수 없습니다.

실제로 가족이 없는 사람이라도 소그룹공동체를 통해서 기쁨과 슬픔을 나누십시오.

특히 힘든 순간에 여러분과 함께 설 소그룹을 선물로 주셨음을 기억하십시오.

 

마지막으로는 하나님의 위로의 영, 성령님을 기억하십시오.

최상의 위로는 그분으로부터 오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2천 년 전, 세상을 떠나면서 성령님을 보내시기로, 그리하여 자신을 대신 하시기로 약속하셨습니다.

사별의 슬픔이 여러분을 덮쳐올 때 여러분의 신앙이 마지막 점검을 받을 것입니다.

 

그 순간에도 여러분은 위로 받을 수 있습니다.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계 21:3,4)

 

그 마지막 위로의 날을 사모하며 살아가는 성도님들 되길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것의 모든 것 되십니다.

주님만으로 만족하는 가난한 마음을 소유하고 세상 살 때 여러분의 모든 애통조차 그날은 기쁨으로 화할 것입니다.

오늘 슬퍼하는 자에겐 영원한 기쁨이 그날 활짝 피어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선언하십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 5: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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