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따 당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마 5장 3-10)
성경본문: 마태복음 5: 3-10
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9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10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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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행복에 이르는 여덟 가지 비결 가운데 그 마지막을 오늘 우리는 살피려고 합니다.
여덟 번째 복은 박해를, 그것도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성도를 향해서 선언합니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10절)
하지만 대한민국 울산에서 오늘을 살면서 박해를, 그것도 신앙 때문에 박해를 받는 일은, 사회적으로 정치적으로 박해를 받는 일은 흔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아직도 직장에서, 가정에서 박해를 받는 일은 그대로 남아있긴 합니다.
하지만 그런 경우는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다고 말하는 것보다, 차라리 “믿음 때문에 왕따를 당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표현하는 편이 더 실감이 날 것 같습니다.
사실 세상을 직시하면 그리스도인이 이상 피해갈 수 없는 현실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러므로 본문은 우리가 “혹 왕따를 당하면 복이 있다”는 뜻이 아니고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왕따를 당하는데 그때에 복이 있다”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그리스도인인 이상, 그리고 경건하게 살려고 결심한 이상 그런 상황을 미리 예상하고 준비해야 합니다.
세상이 점점 더 세속화되어가는 것은 특정지역의 문제가 아닙니다.
“강남스타일”은 온 지구촌을 달구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여기에 설명을 덧 붙였습니다.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11절) 의를 위한 박해를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다만 앞의 것들은 능동적인데 비해 이것은 수동적인 것입니다.
또한 평화를 만드는 자를 향한 복을 선언하고 이어서 의를 위해서 박해를 받는 자를 향한 복이 뒤따라 나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평화를 만드는 자이기에 핍박을 받습니다.
달리 말해 그리스도인은 특별하게 살아가는 사람이기에 박해를 받습니다.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딤후 3:12)
주님 자신도 말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박해하였은즉 너희도 박해할 것이요”(요 15:20)
그리고 우리가 살펴볼 또 다른 점은 첫 번째 약속과 마지막 여덟 번째 약속은 꼭 같다는 사실입니다.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팔복은 천국으로 시작하고 천국으로 끝을 맺습니다.
주님은 자기 말씀을 듣는 청중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천국이며 천국의 시민이 되는 것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천국으로 시작하고 천국으로 끝맺습니다.
예수님을 구원자로 믿고, 주님으로 섬기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천국생활을 여기서 할뿐 아니라 거기서 천국시민으로 영원히 살기 위함입니다.
팔복은 모두 천국에서 충만한 의미로 실현될 것입니다.
주님의 마음속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천국이 가득하셨나 봅니다. 그래서 천국으로 시작하고 천국으로 끝맺나 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러므로 “신앙생활 잘 하세요!” “예수 잘 믿으세요!”
천국에서 만나지 못하면 모든 것이 헛수고입니다.
천국에서 만나야 신앙생활하면서, 때로는 조롱과 박해를 받으면서 믿은 보람이 있습니다.
비록 세상을 살면서 신앙 때문에 왕따를 당하든, 재산을 모두 박탈을 당하든, 아니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빼앗기든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확인할 것입니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10절)
이 여덟 번째 복은 결코 일곱 가지 복의 부록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 복만큼 우리 자신을 철저히 살피도록 만드는 복은 없습니다.
그런데도 실제로는 가장 자주 오해하고 잘못 적용하는 일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의를 위하여”라는 구절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바로 파악해야 합니다.
우선 먼저 이 구절이
1 무엇을 의미하지 않는지를 살펴봅시다.
1.1 “비난을 받고 반대를 받는 자가 복이 있다”라고 하지 않습니다.
전도를 하는데, 어리석고 지혜가 모자라고, 현명하지 못해서 핍박을 받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신자들 가운데는 자기가 어리석게 처신해서 스스로 왕따 받는 일을 초래하는 성도들도 없잖아 있습니다.
너무 눈치 없이 처신해서, 자기 열심에 넘쳐서 상대방에 대한 기본배려도 하지 못해서 따돌리는 일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전도하는 것은 좋지만 혼자서 장광설을 늘어놓으면 사람들이 피하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 “왕따를 당하는 자가 복이 있나니”라는 제목만 봐도 은혜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자기가 지혜 없음으로 당하는 왕따를 복이 있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은 “의를 위하여” 따돌림을 당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합니다.
사실 우리는 스스로 온갖 어려움과 조롱을 불러들이는 행동을 할 수 있습니다.
전도를 한다, 간증을 한다고 하면서도 스스로 잘난 체하고 열심 있는 체 하면서 불필요한 따돌림과 무시를 불러올 수 있습니다.
성도로서 포기할 수 없는 원칙 때문이 아니라 개인적인 편견으로 인해서 비난과 반대를 불러들이기도 합니다.
어쩔 수 없는 반대에 직면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반대를 받는 행동을 자취하는 경우입니다.
예수 믿는다고 잘난 척하면 세상에 아무도 좋아할 리 없습니다.
1.2 “지나친 열심 때문에 박해를 받는 자가 복이 있다”라고 하지 않습니다.
지나친 열심과 광적인 행동은 사람들이 싫어하고 혐오하는 현상입니다. 그들은 건강한 교회와 광신자의 집단을 구별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이웃들을 초청한 자리에서 통성으로 기도하는 것은 아주 조심해야 합니다.
소리쳐서 기도하면 영상을 통해서 광신자들의 집단을 볼 때의 장면을 바로 떠올리기 때문입니다. 시도 때도 없이 아멘을 소리치는 것도 오해를 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전공한 로이드존스 목사님은 이런 재미있는 표현을 했습니다.
강사가 재채기만 해도 “아멘”이 터져 나오는 모임에서는 “아멘”소리가 잦아들면 성령께서 역사하기 시작하는 것으로 간주하고, 평소에 너무 엄숙하게 쥐 죽은 듯이 예배하는 모임에서는 “아멘”소리가 나오면 성령이 역사하기 시작하는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아멘”을 자주하면 영성이 높은 것으로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영성이 뛰어난 성도는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사람입니다.
자기의 “아멘” 소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입니다.
그렇다고 “ “아멘”을 하지 않아야 경건한 것으로 오해해도 안 됩니다.
성령께서 운행하셔서 우리의 막힌 마음을 열고 반응하게 하실 때는 “아멘”할 수 있어야 성숙한 성도입니다.
소리를 내어서 기도하는 사람 옆에 가서 어깨를 찌르면서 “조용히 기도하라”고 요구하는 일들은 좋은 교회 울산교회에서는 사라져야 합니다.
이런 저런 우리의 어리석은 처신이 박해를 불러올 때 복이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말씀을 기억하고 절제할 수 있어야 합니다.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마 10:16) 지혜로움과 순결함을 둘 다 주님이 하신 요구입니다.
1.3 “개인적 신념 때문에 박해를 받는 자가 복이 있다”라고 하지 않습니다.
의를 위해서 핍박을 받는 것과 명분을 위해서 박해를 받는 것은 서로 다를 수 있습니다. 자신의 어떤 소신으로 인해서 받는 박해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자신의 악행이나 잘못으로 박해를 받는 것은 뜻할 리가 없습니다.
선하고 고상하고 자기희생적이기 때문에 받는 박해를 뜻하지도 않습니다. 순교자와 신앙을 지킨 자들이 의를 위해서도 핍박을 받는 동시에 자기의 소신과 주장을 위해서도 고난을 받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가 항상 일치하는 것은 아닙니다.
종교적인,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박해를 받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한 것이 아닙니다.
나치 치하에서도 공터에서 설교를 하면서도 구금당하지 않는 이도 있었고, 감방이나 포로수용소에 수감된 이들도 있습니다. 종교와 정치를 혼합시키면 박해가 찾아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합니다.
의를 위한 핍박과 정치적 소신을 위한 핍박은 항상 같은 것은 아닙니다.
여기 여덟 째 복은 “의를 위하여” 박해를 당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에게 지혜와 은혜를 베푸셔서 우리의 정치적인 편견과 우리의 영적인 원리를 구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독교와 반공을 동일시하거나 그렇다고 용공과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자유경제적인 세상에 사는 세속적인 사람들에게도, 공산주의나 사회주의 치하에 있는 영혼들에게도 복음을 전할 의무가 있기 때문에 우리의 색깔을 나타내는 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그러면 이제 “의를 위하여”란 구절이
2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살펴봅시다.
2.1 그리스도를 닮아가기 때문에 받는 핍박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의로운 주님을 닮아가는 것 때문에, 의를 실천하는 것 때문에 박해를 받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를 닮아가는 자는 항상 박해를 받을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의 가르침입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박해하였은즉 너희도 박해할 것이요”(요 15:18~20)
예외가 없습니다. 명제적인 선언입니다.
이 사실을 알지 못한 디모데에게 바울은 말합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딤후 3:12)
일반적으로 말해서 예외 없이 제대로 신앙생활을 하려면 박해를 각오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신앙인으로서 안팎의 사람으로부터 모두 칭송을 받고 있습니까?
성경을 살펴보십시오.
아벨은 자기 형으로부터 박해를 받아 순교를 당했습니다.
모세도 엄청난 박해를 받았고 다윗 역시 무수한 박해 속에 그 목숨을 노리는 칼잡이들의 추적을 받았습니다.
엘리야, 예레미야, 다니엘이 모두 박해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어려운 사람들이라서가 아닙니다. 지나친 열심 때문도 아닙니다.
단지 의로운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신약인들 다를 리가 없습니다.
온유하고 친절하고 의로운 삶을 산 바울 사도는 자기 교훈대로 “박해”(딤후 3:12)를 받은 대표적 인물입니다.
박해를 당한 가장 대표적인 분은 우리 주님입니다.
완벽한, 절대적인 삶을 사시고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신” 그처럼 온유하고 거짓이 없는 삶을 사신 분께서는 십자가에 그 목숨을 내어놓았습니다.
그분의 뒤를 따른 2천년 기독교 역사를 살펴봐도 무수한 증인들을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순교자들의 생애나 요한 후스나 언약파들이나 프로테스탄트 선조들을 보아도 입증됩니다.
그러면
2.2 누가 주로 핍박을 했습니까?
성경의 역사를 살필 때나 교회의 역사를 살펴보면 핍박은 세상 사람들만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오히려 극심한 박해는 교회에 의해서, 종교적인 사람들에 의해서 자행된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이름뿐인 그리스도인들에 의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이방인들이 주님을 핍박한 것은 없습니다.
오히려 유대종교의 대표자들, 바리새인들, 서기관들, 대제사장들이 극심한 박해를 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중세의 교회사를 보면 주로 천주교인들에 의해서 극심한 박해를 받았습니다.
성경이나 역사가 가르치는 바는 극심한 박해는 주로 외부로부터가 아니라 내부로부터였습니다.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아니할 것입니다.
처음 교회를 다니고 신앙을 갖게 되면 세상 친구들뿐만 아니라 오히려 먼저 교회를 다닌 사람들로부터 구박을 각오해야 합니다.
형식적인 기독교야말로 순수한 신앙의 가장 큰 원수입니다.
그러면
2.3 왜 의인들은 박해를 받습니까?
선하고 고상한 사람들이 아니라 왜 의로운 자들이 핍박을 받습니까?
선하고 고상한 사람들은 거의 박해를 받는 일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자기들도 최선을 다하면 그렇게 살 수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의로운 사람들은 박해를 받는 이유는 세상 사람들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박해했던 이유입니다.
예수님이 선했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은 그들과 달랐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나타남으로 자기들의 신앙생활을 값싸고 비열한 것으로 보이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기를 쓰고 증오한 것은 바로 그 점 때문입니다. 의
로운 자들은 말로 무엇을 들러내어서가 아닙니다.
다만 그들의 삶의 모습이 자기들의 위선적인 삶을 폭로 시켰고 불편하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갑자기 그 모든 그들의 노력을 초라한 것으로 드러내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오늘도 말합니다.
“신앙 생활하는 것은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저 사람들은 정말 별나! 봐 줄 수가 없어! 너무 심해!”
그런 이유로 다니엘을 박해했습니다. 사자 굴로 내몰았습니다. 그는 조용히 자신의 길을 걸었을 뿐입니다. 늘 자신이 하는 대로 조용히 예루살렘을 향한 창을 열고 무릎을 꿇었을 뿐입니다.
다니엘의 의로운 행동이 그들을 화나게 만들었습니다.
“잡아들여, 잘난 척하긴!”이라고 거품을 물고 달려듭니다.
바리새인들과 그 무리들이 예수님을 미워한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의 절대적인 거룩함과 의로움과 진리되심 때문에 증오한 것입니다. 온유하고 사람들을 사랑하고 사랑을 받는 허드슨 같은 사람을 핍박한 것은 중국의 무지한 사람들이 아니라 이름뿐인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러면
3 이 사실로부터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실제적인 교훈은 무엇일까요?
3.1 모든 세상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듣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은 세상 모든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듣고 존경을 받은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람들은 마지막에 그를 향해 조롱하고 십자가로 내몰았습니다.
물론 아직도 예수님을 세계 4대 성인으로 추종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을 바로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들 스스로 생각한 모습만을 바라보고 주님이 하신 말씀을 들은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마 복음서의 예수님을 바로 본다면 결과는 달라질 수 있습니다.
동시대인들이 보였던 것처럼 반응을 보일 것입니다. 주님을 미워할 것입니다. 주님도 변하지 않았고 세상 사람도 변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십자가로 내몬 세상은 아직도 달라진 적이 없습니다. 세상 사람이 쉽게 존경하고 갈채를 보내는 예수는 성경의 예수가 아닙니다.
3.2. 오늘 말씀은 누가 그리스도인인지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살피게 만듭니다.
그리스도인은 그의 주님을 닮은 사람입니다.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그들의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눅 6:26)
완벽한 그리스도인은 아무에게도 부딪치지 않고 누구에게나 인기 있고 쉽게 아무나 어울리는 사람을 떠올리지만 오늘 말씀에 따르면 그런 사람은 참된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모든 사람이 칭송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들은 우리 주님을 칭송하지 않았고 예수님처럼 산다면 모든 사람이 칭송할 리 만무합니다.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거짓 선지자에겐 모든 사람이 칭찬했지만 우리 주님께 모든 사람이 칭찬하진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자연인은 하나님께 대해서 적의를 품기 때문입니다.
비록 하나님에 대해서 말은 하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을 미워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은 세상에 오셨을 때 미움을 받고 십자가에 내몰렸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그런 태도는 아직 바뀐 적이 없습니다.
3.3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새로 태어나는 일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그리스도와 같아지는 것입니다. 근본적으로 완전히 달라지기 전에는 아무도 그리스도와 같아질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미워하고 의로운 삶을 사는 자를 미워하는 옛 사람을 처리하고 새로운 것을 사랑하고 주님을 사랑하는 새로운 성품이 우리에겐 필요합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겉모습만 닮아가려고 노력하면 세상은 여러분을 칭찬할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닮아가면 세상을 여러분을 미워할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에게 질문하면서 이제 말씀 정리합시다.
의를 위한 박해가 무엇인지 알고 계십니까?
주님을 닮아가기 위해서 우리는 빛이 되어야만 합니다. 빛은 본성상 어두움을 폭로합니다. 그러므로 어두움은 빛을 항상 미워합니다.
우리는 세상의 걸림이 되려고 애쓸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할 이유는 없습니다.
미련하려고 노력할 필요도 없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으로 나타내려고 행세할 이유도 없습니다.
박해를 불러들일 필요는 없습니다.
만약 그리스도와 같아진다면 자연히 박해를 받는 것은 피할 수 없습니다.
두렵습니까? 아닙니다.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베드로는 박해의 도가니 가운데 있는 성도들을 향해서 말합니다.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벧전 1:8,9)
예수님 자신이 말씀하셨습니다.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마 5:11,12)
지금까지 신앙생활을 하면서 한 번이라도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적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인 증거를 얻은 셈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천국백성의 신분증을 확인한 셈입니다.
빌립보 성도들을 향한 바울의 권면을 들어보십시오.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빌 1:29)
심한 박해를 받던 초대교인들의 모습을 보십시오.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행 5:41)
현재의 고난의 실체를 파악하고 영광스런 약속을 붙드십시오.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어려움과 고난은 아무 것도 아니며 오래 가지도 않습니다. 이 짧은 고통은 영원히 다함이 없는 영광을 가져올 것입니다.”(고후 4:17, 현대어성경)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서 크신 지혜와 분별력을 주시길 원합니다.
하여 그를 위한 고난을 받게 하실 때에, 의를 위한 박해임을 분명히 인식할 때 영광스런 위로와 평안을 주시길 빕니다.
그렇게 살기를 원하면 먼저 여러분의 삶을 주님께 위탁하십시오.
그리고 주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 교회의 일원이 되십시오.
여러분의 입에서는 더 이상 울산교회가 아니라 우리 교회라고 부르길 바랍니다.
그리고 구역에 속하여 성도의 삶에 동참하십시오.
교회가 나아가는 방향을 함께 바라보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헌신할 때 함께 힘을 합합시다.
아무도 무임승차하지 마십시오.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해 믿음의 대가를 지불하며 살아가는 복된 성도들이 되길 바랍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