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생 라합의 믿음(수2장 1-14)
성경본문: 여호수아 2: 1-14
1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싯딤에서 두 사람을 정탐꾼으로 보내며 이르되 가서 그 땅과 여리고를 엿보라 하매 그들이 가서 라합이라 하는 기생의 집에 들어가 거기서 유숙하더니
2 어떤 사람이 여리고 왕에게 말하여 이르되 보소서 이 밤에 이스라엘 자손 중의 몇 사람이 이 땅을 정탐하러 이리로 들어왔나이다
3 여리고 왕이 라합에게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네게로 와서 네 집에 들어간 그 사람들을 끌어내라 그들은 이 온 땅을 정탐하러 왔느니라
4 그 여인이 그 두 사람을 이미 숨긴지라 이르되 과연 그 사람들이 내게 왔었으나 그들이 어디에서 왔는지 나는 알지 못하였고
5 그 사람들이 어두워 성문을 닫을 때쯤 되어 나갔으니 어디로 갔는지 내가 알지 못하나 급히 따라가라 그리하면 그들을 따라잡으리라 하였으나
6 그가 이미 그들을 이끌고 지붕에 올라가서 그 지붕에 벌여 놓은 삼대에 숨겼더라
7 그 사람들은 요단 나루터까지 그들을 쫓아갔고 그들을 뒤쫓는 자들이 나가자 곧 성문을 닫았더라
8 또 그들이 눕기 전에 라합이 지붕에 올라가서 그들에게 이르러
9 말하되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 우리가 너희를 심히 두려워하고 이 땅 주민들이 다 너희 앞에서 간담이 녹나니
10 이는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홍해 물을 마르게 하신 일과 너희가 요단 저쪽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에게 행한 일 곧 그들을 전멸시킨 일을 우리가 들었음이니라
11 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로 말미암아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위로는 하늘에서도 아래로는 땅에서도 하나님이시니라
12 그러므로 이제 청하노니 내가 너희를 선대하였은즉 너희도 내 아버지의 집을 선대하도록 여호와로 내게 맹세하고 내게 증표를 내라
13 그리고 나의 부모와 나의 남녀 형제와 그들에게 속한 모든 사람을 살려 주어 우리 목숨을 죽음에서 건져내라
14 그 사람들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우리의 이 일을 누설하지 아니하면 우리의 목숨으로 너희를 대신할 것이요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이 땅을 주실 때에는 인자하고 진실하게 너를 대우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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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전체의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인류 구원’입니다.
구약은 오실 그리스도, 신약은 오신 그리스도를 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성도들은 성경 전체의 요절로써,요한복음3:16절을 뽑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구원을 얻게 된다’는 이 복음이 주로 신약 성경에서 강조되고 있지만, 구약에도 이 복음에 대한 모형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모형으로써 대표적인 것들로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1) 창3장 –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 옷을 지어 입힌 사건
(2) 창6-9장에 나오는 노아의 방주 사건
(3) 출애굽기의 출애굽 사건, 유월절, 성막
(4) 본문의 기생 라합이 구원받은 사건 등
여호수아서는 겉으로 보면 전쟁 이야기, 군사 작전에 관한 이야기가 많습니다.
그러나 본질은 신앙 이야기입니다.
믿음과 구원, 구원받은 자의 생활, 영적 전쟁에 관한 귀한 말씀을 담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도 겉으로는 전쟁을 앞두고, 여리고 성을 정탐하여, 효과적으로 적을 공격하기 위한 준비 과정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본질은 구원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구원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
누가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등 구원에 관한 놀라운 진리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여호수아는 싯딤이란 곳에서 두 명의 정탐군을 여리고 성으로 보냅니다.
싯딤은 요단강 동쪽의 어느 곳,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습니다. 뜻은 ‘아카시아 나무들’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요단강가의 아카시아 나무들이 우거졌던 곳에서 몰래 두 명의 정탐꾼들을 보낸 것 같습니다.
여호수아가 열두 명이 아니라 두 명을 보낸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일전에 모세 시대에 열두 명을 보냈지만, 오히려 역효과가 났었습니다.
열두 명 중에 열 명이 부정적인 보고를 함으로써, 오히려 혼란을 가중시켰던 전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정탐꾼이 많은 것보다는 두 명이 가서 확실하게 보고 와서 긍정적으로 보고하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전쟁을 바로 앞두고, 철통같이 지키고 있는 여리고 성을 정탐하기 위해서 작은 규모의 정탐꾼이 더 유리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둘은 증인의 숫자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중요한 일을 위해서는 둘 씩 짝을 지어 보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전도를 위해 파송할 때 둘 씩 짝을 지어 보냈습니다.
초대 교회에서 선교사를 파송할 때도 둘 씩 보냈습니다.
바나바와 바울, 바울과 실라가 짝을 지어 나갔습니다.
두 명의 정탐꾼들은 여리고 성으로 잠입하여 들어가서 성벽에 위치한 기생 라합의 집에 유숙하게 됩니다.
어떤 학자들은 정탐꾼들이 기생 라합의 집에 유숙한 사실 때문에 라합이 창녀가 아니라 여관을 운영하던 비즈니스 우먼이라고 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기생(창녀)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라합을 창녀가 아니었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성경에서 라합을 미화하지 않는데 우리가 미화할 필요는 없습니다.
두 명의 정탐꾼이 여리고 성에 잠입했다는 정보가 곧 여리고 왕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왕이시여, 이스라엘 사람 중에 몇이 이 성을 탐지하러 들어왔나이다.”
왕은 경찰들을 라합에게 보내서 묻습니다.
“네게로 와서 네 집에 들어간 사람들을 끌어내라. 그들은 이 온 땅을 정탐하러 왔느니라.”
라합은 이미 두 정탐꾼들을 숨겨 놓고, 그들을 쫓는 경찰들에게 둘러 댔습니다.
“과연 그 사람들이 우리 집에 왔었지만, 저는 그들이 누군인지 알지 못하였고, 그들은 어두워져 성문을 닫을 때쯤 되어 나갔습니다. 저는 그들이 어디로 갔는지 모르지만 급히 따라가면 붙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라합은 이미 두 명의 정탐꾼들을 지붕 삼대 사이에 숨겨 주었던 것입니다.
오늘 날은 베옷을 거의 입지 않지만, 몇 십년 전까지만 해도 삼농사를 지었고, 삼대에서 나온 베로 베옷을 지어 입었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만해도 동네에서 삼 농사를 짓는 것을 본 기억이 있습니다.)
정탐꾼을 쫓던 경찰들이 나가자, 성문은 곧 닫혔습니다.
그 날 저녁에 라합은 지붕 위로 올라가서 정탐꾼들과 ‘지붕 위의 대화’를 하고 언약을 맺습니다.
‘곧 여리고 성이 함락될 터인데, 그 때에 자신과 가족들을 멸망시키지 말고 구원해 달라’고 요청하고 언약을 맺습니다.
라합은 우선 정탐꾼들에게 세 가지 중요한 증언을 합니다.
이 증언은 여호수아가 보낸 정탐꾼들이 꼭들어야 했던 말씀이요, 여호수아에게 전해 주어야 할 증언이었습니다.
여호수아2:9-10절을 보세요.
“말하되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 우리가 너희를 심히 두려워하고 이 땅 주님들이 다 너희 앞에서 간담이 녹나니 이는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홍해 물을 마르게 하신 일과 너희가 요단 저쪽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에게 행한 일 곧 그들을 전멸시킨 일을 우리가 들었음이니라”
(1) 첫째로, 라합은 여호와께서 이 땅을 이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셨음을 자신은 알고 있다고 했습니다.
(2) 둘째로, 라합은 자신을 포함한 온 가나안 사람들이 이스라엘 사람들 때문에 떨고 있다는 것입니다.
(3) 셋째로, 라합은 가나안 사람들이 두려워 떨고 있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출애굽 이후에 이스라엘 사람들을 위해 어떻게 행하셨는지를 알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홍해 바다 물을 마르게 하신 것과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에게 행하신 일을 들어서 알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라합은 정탐꾼들에게 이 세 가지를 증언하면서 동시에, 하나님께 대한 신앙 고백도 했습니다. 이 고백은 라합이 처음 한 고백은 아니지만, 기생 라합의 믿음을 가늠해 볼 수 있는 고백입니다.
수2:11절을 보세요.
“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로 말미암아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위로는 하늘에서도 아래로는 땅에서도 하나님이시니라”
라합의 증언에 의하면 가나안 사람들이 두려워 떨게 된 것은 엄밀히 말하면 이스라엘 사람들 때문이 아니라 그들과 함께 하시는 여호와 하나님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믿는 자들에겐 사랑의 아버지가 되지만 세상 사람들에겐 가장 두려운 존재가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악한 사탄이 가장 두려워하는 존재는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또한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죽음조차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가장 안전합니다.
지난 주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우리가 세상을 두려워하는 경우가 있지만, 반대로 세상이 우리 믿는 사람들을 더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세상이 우리를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가나안 사람들이 바로 이스라엘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두려워했던 것과 같은 것입니다.
라합은 이제 정탐꾼들에게 자신이 그들에게 은혜(헤세드)를 베풀었으니, 그들도 자기와 자기 부모와 가족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달라고 요청합니다.
본문에서는 이 <헤세드>라는 단어를 ‘선대’라는 단어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수2:12-13절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청하노니 내가 너희를 선대하였은즉 너희도 내 아버지의 집을 선대하도록 여호와로 내게 맹세하고 내게 증표를 내라. 그리고 나의 부모와 나의 남녀 형제와 그들에게 속한 모든 사람을 살려 주어 우리 목숨을 죽음에서 건져내라.”
이 요구를 간략하게 줄여서 표현하면, “자기 가족들을 은혜로 구원해 달라”는 요청입니다.
이 요청에 대해 정탐꾼들은 이 일을 누설하지만 않으면 반드시 멸망 당하지 않게 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수2:14절입니다. “그 사람들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우리의 이 일을 누설하지 아니하면 우리의 목숨으로 너희를 대신할 것이요,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이 땅을 주실 때에는 인자하고 진실하게 너희를 대우하리라”
여러분, 기생 라합의 요구는 죄에 빠진 인류의 요구를 대변하고 있습니다.
정탐꾼의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 은혜에 의한 구원을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1) 구원에 대한 열망
모든 인류의 공통된 열망입니다.
죄에 빠져 스스로 구원받을 길이 없는 인간은 누구나 구원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태국 치앙라이의 동굴에 갇힌 소년들 12명과 코치 1명 13명이 보름 째 동굴에 갇혀 구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2018년6월 23일에 동굴 관광 중에 물이 갑자기 불어나서 갇히게 되었습니다.
발견된 지점은 입구에서 5km 안쪽입니다.
현재 4명이 구조되고 나머지는 아직도 갇혀 있습니다.
여러분, 캄캄한 동굴, 스스로 빠져 나올 수 없는 상태에서 얼마나 애타게 구조를 기다리고 있겠습니까?
모두 안전하게 구출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이 소년들의 상태가 바로 저와 여러분, 모든 인류의 영적 상태인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salvation, 소테리아)는 결코 가벼운 개념이 아닙니다.
영원히 죽을 수 밖에 없는 상태에서 건짐 받는 것입니다.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입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호화호식을 누려도 구원받지 못하면 가장 불행한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6장의 거지와 나사로 이야기를 들어서 아실 것입니다.
부자는 이 세상에서는 남부러울 것 없는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죽어서 지옥에서 고통을 겪게 된 것입니다. 고통 중에 아브라함에게 호소하는 말을 했습니다.
“아브라함이여,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나사로를 보내서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서 내 혀를 시원하게 하도록 하여 주십시오. 나는 이 불 속에서 몹시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새번역)
구원의 문제는 모든 인간의 공통적인 문제입니다.
사람들은 표현은 하지 못한다고 해도, “기생 라합처럼 구원을 열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2) 정탐꾼들은 라합에게 언약했습니다.
“네가 우리의 이 일을 누설하지 아니하면 우리의 목숨으로 너희를 대신할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정말로 우리의 구원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대신한 분이 있는데, 그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죄 없으신 분이신데, 우리 죄인들을 대신해서 실제로 목숨까지 십자가에서 내어 주셨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은 3중의 의미가 있습니다.
죄로부터의 구원이요, 죽음으로부터의 구원이요, 심판과 영원한 지옥으로부터의 구원입니다.
이 구원은 결코 인간 스스로 이룰 수 없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만약 인간이 스스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면 구원이란 단어를 쓸 필요도 없습니다.
구원이란 단어 자체가 스스로 구원받을 수 없는 상태에서 구원 받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지는 않았지만, 여호수아2: 15-21절에 보면, 라합이 두 정탐꾼들을 성벽에 줄을 통해 탈출 시켜 주면서 나눈 대화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대화 속에서 다시 한 번 구원의 방법에 대해 예표하고 있습니다.
라합이 말합니다.
“두렵건대 뒤 쫓는 자들에게 발각될 수도 있으니, 사흘 동안 산에 숨어 있다가 뒤쫓는 자들이 돌아간 후에 갈 길을 가세요.”
그러자 정탐꾼들이 이스라엘 군대가 여리고 성을 공격할 때 어떻게 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는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가르쳐주었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 들어올 때에 우리를 달아 내린 창문에 붉은 줄을 매고 네 부모와 형제와 네 아버지의 가족을 다 네 집에 모으라. 누구든지 네 집 문을 나가서 거리로 가면 그의 피가 그의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우리는 허물이 없으리라. 그러나 누구든지 너와 함께 집에 있는 자에게 손을 대면 그의 피는 우리 머리로 돌아오게 될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반드시 집 창문에 붉을 줄을 매달아 놓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는 ‘누구든지 구원을 받고자 하는 사람은 그 집 안에 머물러야 한다’는 것입니다.
집 밖으로 나가서 돌아다니다가 죽임을 당하면 본인 책임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출애굽 때의 유월절의 유래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으십니까?
유월절 때엔 장자의 죽음의 재앙을 피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양의 피를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고, 그 집 안에 머물러야 했습니다.
그러면 여호와의 천사가 그 피를 보고 건너 뛰겠다고 하였습니다.
출12:13, “내가 애굽 땅을 칠 때에 그 피가 너희가 사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는 표적이 될지라.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
라합의 집 창문에 매달아 놓은 붉은 줄은 유월절 어린 양의 피와 마찬 가지로 ‘그리스도의 보혈’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인간의 죄와 허물을 깨끗하게 씻어주시고, 구속해 주시는 것은 그 어떤 인간의 행위도 아니고 오직 어린 양 그리스도의 보혈인 것입니다.
벧전1:18-19절입니다.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구속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은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
여러분, 우리 죄인이 죄에서 구속 받는 것은 혈통으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유대인들은 오해해서 혈통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고 생각하는데, 성경을 깊이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처음부터 하나님은 언약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지, 혈통으로 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출애굽 때에, 혈통적으로 유대인들만 출애굽하여 하나님의 백성으로 된 것이 아닙니다.
유대인들과 여러 잡족이 함께 탈출하여 언약 백성이 되었습니다.
출12:37-38, “이스라엘 자손이 라암셋을 떠나서 속곳에 이르니 유아 외에 보행하는 장정이 육십만 가량이요 수많은 잡족과 양과 소와 심히 많은 가축이 그들과 함께 하였으며”
혈통적으로 유대인들만 출애굽하여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이 아닙니다.
유월절 때에도 하나님께서 혈통을 보고 구속하신 것이 아니라 오직 양의 피를 보고 그 집을 건너 뛰었습니다.
혈통이 아닌 시내산에서 언약을 통해 언약 백성이 된 것입니다.
기생 라합은 유대인이 아니라 이방인이었습니다.
그러나 당당히 구원을 받았으며, 나중에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도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인간이 죄에서 구원받은 것을 무슨 율법의 행위로 되는 것도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분명히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3:20)
기생 라합의 직업을 보세요.
도덕적으로 결코 의롭게 될 수 없는 사람,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보혈로 깨끗하게 되고, 성령으로 거듭날 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그 유명한 구절인 요한복음1:12-13절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지 분명하게 말했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의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인간이 의롭게 되고, 죄에서 용서를 받는 것은 혈통이나 인간의 행위로 되는 것이 아니라 은혜로 되는 것이고, 오직 믿음으로 되는 것입니다. 아멘.
기생 라합이 구원받은 것은 그의 혈통이나 도덕 때문이 아니라 행함이 있는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라합의 믿음을 아브라함의 믿음처럼 귀한 믿음이라고 칭찬하고 있습니다.
히11:31,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하지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하지 아니하였도다.”
야고보 사도도 라합의 믿음을 칭찬하였습니다.
약2:25,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들을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기생 라합은 혈통적으로 자랑할 것이 없고, 도덕적으로도 자랑할 것이 없었지만,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정탐꾼들과의 언약을 믿었습니다.
창문에 붉은 줄을 매달고, 가족들과 부모 형제들을 그 집 안에 머물게 함으로써, 환난 날에 그들을 구원하였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구원을 말할 때, 꼭 개인적인 구원만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성경에서는 개인 구원뿐 아니라 가족 구원에 대해도 많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당대의 의인 노아를 구원하실 때, 그의 여덟 식구도 함께 구원해 주셨습니다.
롯을 소돔에서 구원할 때도 그의 가족들과 함께 구원해 주셨습니다.
본문에서도 기생 라합 뿐 아니라 그의 식구들, 아버지와 형제 자매들을 다 구원해 주셨습니다.
사도행전에 10장에서, 고넬료의 가정을 구원해 주셨고, 사도행전16장에서는 빌립보 감옥의 간수를 구원하실 때, 그의 식구들도 함께 구원해 주셨습니다.
구원의 교리에 대해 생각할 때, 잘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인간의 구원이 왜 행위나 도덕으로 이루어지지 않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행위로 구원 받는 것이 더 정의롭고 더 타당해 보입니다.
어떤 목사님(민경설목사)이 어떤 유명한 변호사와 나눈 이야기입니다.
그 변호사는 원래 교회에 잘 다녔었는데 얼마 전부터 교회에 나가지 않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이유를 묻자,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25년간 검사 생활을 하며 수많은 범죄자를 다루었는데, 그들 중에 기독교인들이 아주 많았습니다. 단순히 교회에 출석하는 교인도 아니고, 교회 중직을 맡은 사람들이나 심지어 목회자들도 있었습니다. 기독교인이라면 어떻게 그럴 수 있겠습니까?”
혹독하게 비판하는 그 변호사에게 그 목사님은 말했다고 합니다.
“거듭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우리가 다 죄인이므로 예수님의 공로를 힘입어서 죄 사함을 받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전도를 하다 보면 그 변호사와 같은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이 꽤 많습니다.
그들의 논리대로 하면, 구원은 행위나 도덕으로 이뤄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비판하는 사람도 하나님 보시기에는 죄인이라는 것을, 스스로는 구원받을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생명의 삶, 2018년 7월호, P.59. 민경설, 죄 사함의 비결)
자신도 모르게 자신은 의롭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도 은혜가 아니면 구원받을 수 없는 죄인임을 잊고 있는 것입니다. 예외는 없습니다.
‘구원과 행위, 또는 도덕의 관계’를 굳이 따지자면, 도덕이나 선행은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구원의 열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거듭난 사람, 이미 구원을 받은 사람은 구원의 열매로써, 선행과 도덕적인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도덕으로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니지만 구원받은 사람은 선한 행위의 열매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열매는 결코 무시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구원받은 백성들은 반드시 좋은 행위의 열매를 맺기를 바라셨습니다.
이사야 5장에 보면, 포도원의 노래가 나옵니다.
그 노래를 풀어서 설명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하나님은 포도원을 만들고, 땅을 파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갖다 심었다는 것입니다.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랬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포도원은 좋은 포도가 아니라 들포도를 맺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이 노래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이 정의와 공의를 잊어버리고 거짓과 포학, 불의를 맺게 된 것을 한탄하시는 노래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좋은 선행의 열매도 맺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은 인간의 어떤 행위 때문에 받는 것은 아닙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받는 것이요, 믿음으로 받는 것임을 우리는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생각해 보려고 하는 질문은 “그리스도인이 구원을 받은 후에 그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는가?요한복음5:25절 말씀이 무효가 될 수 있는가?” 라는 것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결론부터 얘기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얻은 구원을 잃어버리지 않습니다.
만약 우리가 우리의 능력으로 구원을 받았다면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구원을 선물로 주셨고, 주님께서 우리를 붙들고 계신다면, 결코 구원을 잃어버릴 수 없습니다.
요한복음10:28-29,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그들을 주신 내 아버지는 만물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인간의 손이 하나님을 잡고 있다면 놓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강한 손이 우리를 붙잡고 계신 한, 놓칠 일은 없습니다.
우리가 무슨 자격이 있어서 구원을 받았다면, 그 자격 조건이 없어질 때,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구원을 받았다면 결코 받은 구원을 잃어버릴 염려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생 라합이 믿음으로 구원받은 이야기, 그녀가 예수님의 족보에 들어간 이야기는 우리 부족하기 짝이 없는 이방인들에게는 큰 위로가 되는 소식인 것입니다.
여호수아 2장에서 정탐꾼 이야기와 기생 라합의 이야기를 길게 기록하고 있는 것은 중요한 구원의 진리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결코 혈통이나 도덕, 행위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은혜로, 믿음으로 받는 것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라합은 이방 여인이요, 창녀였지만 구원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얻은 것도 마찬 가지입니다.
예수님을 믿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을 잊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늘 기억하고 감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무슨 자격이 있어서 구원을 받았다면 잃어버릴 수 있겠지만, 하나님의 자비로 받았다면, 결코 잃어버릴 염려가 없는 것입니다.
기생 라합과 그의 식구들이 붉은 줄이 매여 있는 집 안에 거하는 한, 여리고 성이 함락될 때, 함께 멸망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첫 유월절 때에 어린 양의 피가 발라져 있는 집 안에 머무는 한 안전한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예수 안에 거하기만 하면 안전한 것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요5:24)
사도 바울은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했습니다.(롬8:1-2)
그러므로 은혜로 구원 받은 사람은 이제 이 구원의 기쁜 소식을 널리 전파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처럼, 이 은혜의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는 생명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이 말씀을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늘 구원의 은혜에 대해 감사하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널리 전파하는 자들이 다 되시길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