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dical Life(급진적인 삶)(빌1장27-30)
성경본문:빌립보서 1:27-30
27.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이는 내가 너희에게 가 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한 마음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
28. 무슨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이것이 그들에게는 멸망의 증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증거니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라
29.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
30. 너희에게도 그와 같은 싸움이 있으니 너희가 내 안에서 본 바요 이제도 내 안에서 듣는 바니라.
===================================================================================
본문의 말씀을 메시지 성경에서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여러분의 행동은 한결같아야 합니다. 한 비전을 품고 한마음으로 굳게 서서, 사람들이 메시지, 곧 복된 소식을 신뢰하도록 분투하십시오. …
이 삶에는 그리스도를 신뢰하며 사는 것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해 받는 고난도 있습니다.
고난은 신뢰만큼이나 값진 선물입니다.
여러분은 내가 어떤 싸움을 싸워 왔는지 보았고, 지금도 이 편지로 계속 소식을 듣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똑같은 싸움을 지금 하고 있습니다.
다음은 장용호의 [건축가 세계에서 인생을 배우다]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세상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있고,세상이 두려워하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고 세상이 두려워하는 사람의 특징은 세 가지다.
첫째, 꿈이 있는 사람
둘째, 돈, 명예, 권력을 좇지 않는 사람
셋째, 자기의 꿈을 위해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다.
급진적 크리스천의 삶은 무엇일까요?
한 마디로 이야기한다면 오늘 본문 27절에 나와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는 것” 그것이 가장 본질적인 것 아닐까요?
그러면 우리에게 이런 질문이 생깁니다.
“복음에 합당하다는 것이 무엇인가요?”
본문 28절에서는 “대적하는 자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 29절에서는 “그를 믿을 뿐 아니라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과연 이것이 그동안 여러분이 꿈꿔왔던 그리스도인의 삶인가요?
데이비드 플랫의 [래디컬]이라는 책에 보면 존 패튼이라는 한 인물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는 요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인물이다. 그는 스코틀랜드에서 한창 성장하고 있던 교회를 10년 넘게 섬기던 목회자였다. 하나님은 그에게 복음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는 식인종들이 우글거리는 뉴헤브리디스 군도에 가서 복음을 전하라는 부담을 주셨다.
패튼은 특별한 한 섬으로 들어가고 싶어 했다. 20년 전에 두 선교사가 상륙했다가 잡아먹힌 곳이었다. 당연히 선배 선교사들의 전철을 밟지 말라는 주위의 만류가 빗발쳤다.
패튼은 이렇게 적었다.
“마음씨 좋은 한 노신사는 나를 붙들고는 소리 내어 우셨다. ‘식인종이 살고 있다니까요! 목사님도 잡아먹을 거라고요!’”
존 패튼은 노인에게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딕슨 씨, 머잖아 선생님도 가지고 있던 것을 모두 남겨 둔 채 무덤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거기서는 벌레들이 주검을 뜯어먹겠지요. 주님만을 섬기다 죽는다면 벌레가 먹든 식인종이 먹든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마지막 때가 되면 선생님처럼 저도, 그리스도처럼 깨끗한 몸으로 부활하게 될 겁니다.”
노인은 눈물을 닦고 방을 나가면서 이렇게 외쳤다.
“그렇다면 더 이상 할 말이 없습니다.”
서른세 살 때, 존 패튼은 아내와 함께 뉴헤브리디스 군도로 들어갔다. 도착한 지 얼마 뒤에 아내와 갓난아이는 세상을 떠났다. 패튼은 맨손으로 땅을 파헤쳐서 그들의 시신을 묻었다.
그 뒤로도 생명을 위협하는 일들이 끝없이 벌어졌다.
하지만 몇 년의 시간이 지나자, 뉴헤브리디스에 사는 수많은 식인종이 그리스도가 주시는 평안을 알게 되었고 오스트레일리아와 스코틀랜드를 비롯한 많은 서방세계가 복음 전도에 대한 도전을 받게 되었다.
사도 바울이 빌립보에 있는 교인들에게 편지했을 때,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라는 말은 “하늘나라의 시민으로 합당하게 살라.”라는 뜻으로 다르게 표현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시민’이라는 말에 주목해 보겠습니다.
한때 우리나라 사람들이 미국에 이민을 가서 시민권을 따려고 애썼던 적이 있습니다.
미국 시민으로 살면 혜택을 볼 수 있는 것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시민이 되기 위해서는 시험도 봐야 하고 법도 지켜야 합니다. 찾을 수 있는 권리만 있는 것이 아니고 해야 할 의무도 있죠.
법을 지키며 세금을 내는 것이 그리 마뜩잖아도 그 나라가 유지되기 위해 해야 합니다. 어떤 면에서 보면 ‘희생’이라고 할 수 있지만, 희생보다는 보상이 큰 것이기도 하지요. 그 나라가 그 나라의 시민을 보호하고 지켜주니 말입니다.
사실 제가 오늘 제목을 ‘Radical Life"라고 잡았지만, 무엇이 래디컬인가요?
제가 2023년을 시작하며 내린 정의는 어떤 특별한 삶이 아니라, 우리가 믿는 바를 사는 것이 래디컬이라는 정의를 내렸습니다.
우리가 하늘나라의 백성임을 믿는 것이 아니라 그 나라의 백성이 되었기 때문에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한다면 우리의 삶이 무척 래디컬해질 것이라는 말이죠.
조금 더 ‘시민’이라는 말을 생각해 보죠.
시민권을 유지하기 위해 해야 하는 일은 단순히 경제적인 활동뿐만이 아닙니다.
‘그 나라에 머무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특별히 나라의 명을 받고 파송되기 전에는, 개인적인 이득을 위해 나갈 경우에는 반드시 돌아와서 채워야 하는 기간도 필요합니다.
만일 누군가 ‘시민’이라고 하면서 특권만 누리고 의무를 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얼마나 얄밉겠습니까?
시민권을 얻었다고 하지만 아직 이전 국가에 머무는 것이 아닐까요?
우리가 하늘나라의 시민이라고 하면, 마찬가지로 우리가 속해있었던 나라의 국적을 포기해야 합니다. 삶의 방식을 바꿔야 합니다.
하늘나라의 성장과 번영에 이바지해야 합니다.
마땅히 법을 지키고, 물질적 헌신도 해야 합니다. 하늘나라의 시민으로 산다는 것은 우리의 힘이 아닌,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하늘 시민의 책임을 다하는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많은 사람이 하늘나라의 시민이 되었지만, 하늘나라의 시민으로 살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늘 우리를 ‘군사’로 비유하기도 했죠.
아마도 시민보다는 훨씬 더 와 닿는 비유인 듯합니다. 오늘 본문 29~30절을 보세요.
29.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
30. 너희에게도 그와 같은 싸움이 있으니 너희가 내 안에서 본 바요 이제도 내 안에서 듣는 바니라.
군사의 우선순위는 자신의 만족이나 가쁨을 찾지 않습니다.
자기를 부르신 이를 위해 최선의 삶을 사는 것이죠.
어떻게 시간을 보낼지, 어떤 일에 우선순위를 둘지를 물을 필요도 없습니다.
군대에서 복무하는 순간에는 자신의 모든 권리를 온전히 내려놓습니다.
단지 위에서 배치하는 대로 갑니다. 주는 대로 옷을 입습니다. 부대의 특성에 맞는 훈련을 받을 뿐입니다.
훈련과 전쟁은 고난의 시간이기도 합니다.
불림을 받은 이유가 전쟁에 승리하기 위함이기 때문에 마땅히 싸움을 합니다. 이 부르심을 알 때 우리의 삶이 얼마나 진지해지겠습니까?
Radical = ‘합당한 삶이다’
리처드 스턴스의 [구멍 난 복음]이후에 두 번째 책 [끝나지 않은 복음]에서 ‘하늘 시민’으로서의 합당한 삶에 대하여 이야기합니다.
그에게 합당한 삶이란 제자와 결신자를 구별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래디컬하지 못한 이유는 결신자로 살지만, 제자로 살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죠.
☞ 첫 번째는 삶에서 하나님의 다스리심에 복종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0장 39절에 보면,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다스리심에 복종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우리의 인생을 우리 뜻 대신 하나님의 뜻으로 채우면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평생을 살아가면서 그리스도를 닮기 위해 헌신하는 삶을 의미합니다.
그분이 우리 삶의 주인으로 인식되는 순간, 어떻게 이전의 삶과 같은 삶을 살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의지와 욕망이 지배하던 삶에서 그분이 우리의 의지를 다스리기 시작할 때 필연적으로 일어나는 변화가 무엇일까요?
그분의 다스리심에 복종한다는 것은 우리가 존경하는 어떤 위인을 바라보며 영향을 받는다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그분의 다스리심은 우리 삶에 목적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흔히 착각하는 것은 우리가 짜 놓은 인생의 각본에 단지 예수 그리스도를 덧붙이려는 시도입니다.
우리의 계획에 그분을 집어넣고 일주일에 한 번 예배를 드리고, 가끔 기도하고, 성경을 보면서 단지 의무를 다한 것으로 만족하려는 태도 말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께 합한 삶을 산다는 것은, 현재 우리가 가진 모든 것, 우리의 관계, 삶의 계획 모두를 그분의 발아래 놓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존 스토트의 책 [기독교의 기본진리]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이 땅에서의 순례 여정의 끝이 가까워 오는 지금, 내 생각이 어디까지 이르렀는지 여러분과 나누고자 한다. 그것은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 그리스도처럼 되기를 바라신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다.
☞두 번째는 하나님의 가치가 다스리는 공동체를 형성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장 46~47절에 보면 초대교회에서 성령을 받고 하나님의 공동체를 형성한 사람들의 삶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한 나라가 도, 시, 구, 동 등으로 공동체를 구성하는 것처럼,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구성 원리를 따라야 합니다.
즉 예수님을 믿는 이들이 모여 예배하고 훈련하고 섬기는 체제를 갖추는 것입니다.
크리스천 공동체는 하나님 말씀의 진리를 따라 그분의 통치 아래 살려고 애쓰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이 세상에서 래디컬한 공동체의 삶을 살 수밖에 없죠.
예수님은 이 땅에서 믿는 자들이 살아가야 하는 공동체의 비전을 주셨습니다.
가장 결정적인 것이 지난해 20주 동안 함께 묵상했던 산상수훈 말씀을 통해 드러납니다.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그리고 우리가 사는 이 사회에 대한 혁신적인 반응입니다.
인간이 세운 나라에서는 성공한 사람들을 축복할 때,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박해받는 자들을 축복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일원이 된다는 것은, 세상의 시기와 복수, 갈등, 분노, 정욕의 세상에서 바보같이 자신의 것을 내어놓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른뺨을 때리면 왼쪽도 돌려대고, 누군가 오 리를 가자고 하면 십 리를 가고, 속옷을 달라 하면 겉옷까지 주라는 이해할 수 없는 세상, 그리고 보물을 세상에 쌓아두지 말고 하늘나라에 쌓아두라는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을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해하지 못할 세상에서 살아가며 걱정하고 염려할까 봐, 걱정과 염려는 이방의 것이라고, 그리고 그의 나라와 의를 위해 살면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책임지시리라 말씀하십니다.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마 7:12)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마7:24~25)
이제 우리가 하나님의 진리에 기초를 둔 전혀 다른 공동체를 형성하며 그분의 다스림을 받기 시작할 때, 세상이 이해할 수 없는 래디컬한 삶이 시작됩니다.
☞세 번째는 하나님의 대사로 세상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 20절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새로운 공동체의 성경적인 나라는 온전히 하나님의 개입에 있습니다.
죄악 된 세상에 선지자들을 보내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심으로 말미암아 성소와 지성소를 막던 휘장이 갈라지며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세상으로 나가 하나님의 대사가 되어 그 관계를 회복해야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왜 이 세상을 떠나셨습니까?
바로 우리가 세상으로 들어가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도록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이유는 선한 일을 행하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결신자로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계획 속에 뛰어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계획은 늘 이 세상에 있습니다.
에베소서 2장 8~10절의 말씀을 유심히 보세요.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래디컬한 삶의 핵심!
리처드 스턴스는 월드비전 기부자들을 위한 모임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하나님이 가장 바라시는 것은 우리가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가장 바라시는 것은 우리가 가난한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들을 사랑한다면 그들을 도울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를 보면 사람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에게 치유의 대상이 아니라 늘 사랑의 대상이었습니다.
그 사랑 때문에 안타까운 마음으로 말씀을 전하셨고, 그 사랑 때문에 사람들을 고치시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죠.
요한복음 13장 34절의 말씀이 예수님의 사역을 가장 간명하게 요약하는 말이 될 수도 있을 듯합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오늘 본문을 보면 ‘싸움’이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말씀을 묵상하는 중에 사랑과 싸움이 참 안 어울리는 말처럼 보이지만, 사랑하기 때문에 싸울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런 말이 이해가 될까요?
“사랑하기 때문에 싸운다!”
“29.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
30. 너희에게도 그와 같은 싸움이 있으니 너희가 내 안에서 본 바요 이제도 내 안에서 듣는 바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이유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고, 싸움도 있습니다!
사랑을 우리가 관념적 단어로 이해할 때 아무런 영향이 없습니다.
그러나 사랑을 실천적 언어로 이해한다면 손과 발이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리처드 스턴스의 책에서 소개된 아들 피트의 설교입니다.
“영적 보디빌더들”이라는 제목입니다.
보디빌더라고 하면, 울퉁불퉁한 근육과 번쩍거리는 건강한 피부색이 떠오릅니다.
이 사람들은 근육을 키우는 데 평생을 바칩니다.
어떤 보디빌더가 인터뷰한 내용을 들어보니 그 사람은 하루에 열여덟 끼를 먹는다고 합니다.
대단하지요! 이 사람은 세상에서 ‘가장 힘센’ 사람으로 보이기 위해 건강과 돈, 에너지, 시간까지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쏟아 붓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보디빌더들이 이렇게 사는 이유가 궁금해지지 않나요?
저도 그 답을 찾으려고 무척이나 애를 썼습니다.
이 사람들은 운동선수가 아닙니다.
또 ‘세상에서 가장 힘센 사나이’ 선발대회에서 하듯이, 근육을 이용하여 트럭을 끌어당기거나 자동차를 들어 올리는 것도 아닙니다.
교도관도, 소방수나 구조대원도 아닙니다.
이 사람들은 그저 수영 팬티 한 장 걸치고 무대를 활보하며 꽝꽝 대는 힙합 음악에 맞춰 근육을 과시할 뿐입니다.
다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지요.
이 얼마나 막대한 힘의 낭비요, 시간과 노력의 낭비입니까.
그렇죠?
사랑한다고 생각한다고 사랑이 아니듯, 우리가 성경지식을 쌓고 성경공부를 한다고 크리스천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닙니다.
마치 테니스 규칙을 잘 안다고 프로선수가 되는 것이 아닌 것처럼 말입니다.
야고보서 1장 22절입니다.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래디컬한 삶은 우리에게 만연해 있는 이분법적 사고를 뛰어넘는 것입니다.
이분법적인 삶이란 종교생활과 신앙생활을 구분하지 못하는 모호함에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이 교회 와서 예배드리는 것을 보면서 ‘종교생활’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죠.
이렇게 물을 수 있습니다.
“너 종교가 뭐지?”
“나? 기독교. 일요일에는 교회 가.”
이 대화에서 무엇을 깨닫게 되나요?
종교생활이란 시간과 공간을 정해놓고 살아간다는 것이죠.
예배를 드리는 날과 예배들 드리는 공간이 정해져 있습니다.
마치 다른 종교에서 절에서 예불하는 시간이 있듯이 말입니다.
그렇게 사람들은 종교적 행위를 마치면 다시 세속으로 돌아옵니다.
그런 의미에서 신부들과 스님들은 자신들이 결혼하지 않는 것으로 기독교와는 다른 종교적 차이를 두려고 합니다.
하지만 진정한 신앙생활이란 우리의 삶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삶이 종교이고, 그가 신봉하는 종교가 삶이 될 때 우리는 ‘신앙생활’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목사와 평신도의 구별도, 주일과 평일도 차이가 나서는 안 되는 것이죠.
사실 우리가 예배 모드와 일상의 모드를 구별해 놓으면 편리할 때가 많습니다.
교회에서는 예배를 드리는 사람으로, 일터로 돌아오면 일하는 사람으로 바뀌면 어떤 갈등도 겪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계속해서 하는 이야기이지만, ‘radical’ 하다는 것은 ‘본질’에 충실하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구별 모드로 살아가는 것은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진정한 신앙생활이란, 우리가 예배하는 날이 그렇지 않은 날에 침투해 영적으로 점령해 나가는 것입니다.
주님을 만난 거룩함의 체험이 일상으로 번져 나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종교개혁의 정신이었습니다.
종교 개혁은 일터에서 구별해 놓았던 예배의 시간을 더는 구별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일터에서 하는 우리의 모든 행위가 예배가 되도록 하자는 것입니다.
우리가 일하는 일터에서 열심히 일해야지 교회의 일을 가지고 와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처럼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는 일이 하나님의 마음으로 성실하게 이루어져 가도록 해야 합니다.
급진적 생각!
크리스천은 매 순간 삶에서 예배드려야 합니다.
학생은 공부로 예배합니다.
직장인은 일하며 예배합니다.
주부는 가정에서 예배합니다.
예배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생각한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라는 의미입니다.
아무리 성적을 올리는 방법이 있어도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면 하지 않는 것입니다.
아무리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이 있어도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면 안 하는 것입니다.
오늘 당신에게서 래디컬한 삶을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여기에 대답할 때, 우리는 비로소 크리스천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