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공동체- 성장과 성숙의 터전(갈 4장7)
성경본문:갈라디아서 4:7
7-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받을 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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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과 성숙의 장(場)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지하철을 타고 가다 한 정거장에 서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이 닫히지 않았습니다. 5분여를 기다렸는데도 문이 닫히지 않으니까, 궁금하여 이 사람이 밖을 내다보는 순간 문이 닫히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그 사람의 목이 문에 끼고 말았습니다. 얼마나 아팠겠습니까?
그런데 이 사람이 “하 하 하 하” 웃는 것입니다.
그 옆에 있던 사람이 도저히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아니 문에 목이 껴서 아플 텐데 뭐가 좋아서 웃습니까?”
그러자 그 사람이 대답합니다.
“글쎄, 나 말고 한 사람이 더 문에 목이 끼었어.”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어떤 어려움을 당해도 함께 하는 사람 때문에 위로를 받은 적이 없나요?
오늘 우리가 나누려는 꿈꾸는 교회의 사역은 성도들이 함께하는 사역입니다.
인간이 살아 있다는 것, 그리고 살아 있기 때문에 성숙하고 성장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압니다.
그런데 이러한 일이 개인적인 차원에서 잘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함께 할 때도 너무 큰 공동체 속에서는 친밀한 관계와 성숙의 훈련이 잘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셀(나무 공동체)은 바로 이 부분에서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유익을 줍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아들”이라는 말과 “유업”이라는 말입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이 권세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는 특권입니다.
오늘 이 예배 공동체에서 함께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사람이 형제자매로 동일한 특권을 가지게 되었다는 사실이지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종이라 하지 않으시고, 자녀로 삼아 주시는 순간, 모든 신앙의 공동체가 한 형제자매로 관계를 맺습니다.
우리는 신년 첫 주에 “온전한 예배”에 대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예배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표현하는 행위라는 정의를 드렸습니다.
예수님은 대 계명을 통해 마가복음 12장 30-31절에서 두 번째 큰 계명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또한, 말씀합니다.
첫째가 하나님이고 둘째가 이웃이라는 말은 “덜 중요한 계명”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가장 중요한 계명”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아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서 필연적으로 나타나야하는 행동의 양식이지요.
그렇습니다.
예배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루는 사역이라면 셀은 우리 삶에 대한 문제와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통해 성숙해가는 과정을 다루는 사역입니다.
셀(나무 공동체)의 관계 속에서, 서로 왜 사랑해야 하며,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를 배우게 됩니다.
셀(나무 공동체)이 우리에게 주는 가장 큰 유익 가운데 하나는 “소속감”을 준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identity”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어디에든 속하게 되어 있습니다.
인간에게서 가장 큰 욕구 중의 하나가 “소속감”입니다.
어디에 속하느냐는 그 사람에게 안정감을 줄 뿐 아니라, 그 사람의 identity를 분명히 하지요.
오늘 여기에 있는 모든 사람은 알게 모르게 많은 공동체에 소속되어 살아갑니다.
문제는 어디에 속하여 살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만나 교회는 분당에 이사를 와서 급성장한 교회입니다.
그러다 보니, 새신자들만 오는 것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 신앙생활을 하던 분들이 함께 한 식구가 되었습니다.
가끔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것을 보면 “우리 교회에서는…”이라는 말을 자주 사용합니다. 전에 다니던 교회를 이르는 말이지요.
그리고 그 교회에서 하던 관습이 만나 교회에서 다른 것 때문에 어려움을 겪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런 적응을 가장 빠르고 안전하게 해 주는 곳이 바로 ‘셀(나무 공동체)’입니다.
그곳에서 만나 교회의 관습을 익힐 수 있습니다.
함께 동일한 생활양식을 가진다는 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모든 사람은 그 소속된 공동체를 통하여 어떤 관습을 익혀 나갑니다.
그런 의미에서 셀(나무 공동체)은 하나님의 가족으로서의 관습을 익혀 나가는 현장입니다.
우리 교회의 셀(나무 공동체) 사역에 대한 이해를 돕도록 조금 더 설명을 해 보겠습니다.
요즘 많은 교회가 셀로 전환합니다.
어떤 교회에서는 “목장”이라는 이름으로, 어떤 교회에서는 “다락방”이라는 이름으로, 어떤 교회에서는 “밴드”라는 이름으로 교인들이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줍니다.
저희 교회는 처음부터 이런 공동체를 추구하며 모인 교회가 아닙니다.
즉 셀로 교회 구조를 바꾸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시 설명해서 셀 교회가 된다는 것은 모든 교회의 구성원이 소그룹 중심의 작은 교회를 이룬다는 것입니다.
교회의 사역과 활동이 셀을 단위로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나 교회는 예배 중심의 교회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러 모인 사람들의 공동체가 되는 것이 기본입니다.
그럼에도, 왜 작은 공동체를 강조하는가?
예배로 모인 공동체를 건강하게 성장시킬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공동체에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는 이렇게 정의합니다.
“작은 공동체(나무가 살아 있는)가 있는 교회”
즉, 예배의 공동체로 모인 사람이 나무 공동체를 통하여 건강한 성장과 성숙을 이루는 교회, 이것이 만나 교회가 추구하는 사역의 기본입니다.
나무 공동체에는 예배와 훈련과 섬김이 살아 있는 구체적인 장소입니다.
어떤 사람은 예배를 건물과 동일시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배는 건물적인 의미가 아니라 믿음의 공동체를 의미합니다.
만나 교회가 추구하는 사역의 핵심인 예배가 매일의 삶을 하나님께 구별하여 드리는 것이라고 정의할 때, 작은 공동체의 모임은 이 사역의 핵심을 이루는 아주 중요한 매개체가 됩니다.
지난번 릭 워렌 컨퍼런스에서 들은 이야기입니다.
<새들백 교회>는 예배와 교회가 장소와 건물에 있는 것이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 교회 건물을 소유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1만 명의 교인이 모일 때까지, 13년 동안 교회 건물이 없이 79번을 옮겨 다니며 예배를 드렸다고 합니다.
그래서 광고시간이 되면 다음 주에는 어디에서 모일까 하는 것이 아주 중요한 관심이었다지요.
릭 워렌 목사님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 덕분에 우리 교회에는 똑똑한 사람만 남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교회를 찾아오지 못하는 사람은 모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미국적인 상황이고, 교회에 우호적인 분위기에서 장소를 빌릴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교회와 예배란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들이 모인 장소에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며, 그 모임을 통하여 거룩한 삶의 공동체를 이루어가게 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꿈꾸는 사역은 작은 공동체를 통한 예배의 역동성이 매일 반복되고, 그 모임을 통한 삶의 변화를 경험하는 장소가 됩니다.
나무 공동체의 중요성은 바로 “삶의 변화”라는 면에서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감리교의 창시자인 웨슬리는 “성화”의 교리를 발전시켰는데, 웨슬리는 “믿음을 통한 ‘칭의’에서 나아가 삶 속에서 실천을 통한 ‘성화’로 구원이 완성된다.”라고 했습니다.
몇 해 전 한국에서 열렸던 WMC 총회에서는 다음과 같은 교리를 가톨릭과 루터교 그리고 감리교가 공동으로 동의하게 된 내용입니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자유로운 선물이며, 이는 선행을 통해서가 아니라 은총과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해 오는 것이다. 그러나 성령께서 주시는 은총은 인간에게 선행할 힘을 주시고 또 그렇게 하도록 부르신다.”라는 것입니다.
이 교리를 다루는 이유는 작은 공동체 사역과 아주 연관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저의 개인적인 견해로는 예배를 통하여 공동체로 모인 사람들이 하나님의 “Lordship”을 인정하고 자신들의 “Sonship”을 확증 받습니다.
이 순간 우리는 믿음의 세계로 들어갑니다. 로마서 10장 10절을 보세요.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빌립보서 2장 11절입니다.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신앙의 역설이 여기에 있습니다.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자신의 삶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이런 고백은 스스로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자신의 삶에서 선택한 자만이 할 수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주되심’을 인정하는 순간, 우리가 그분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누리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나무 공동체’는 여러분의 삶에서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인정하도록 도와줄 것입니다.
예배 공동체로서뿐 아니라 삶의 공동체에서 주님을 고백하게 할 것입니다.
예배자의 삶이 생활로 이어지는 것이 바로 나무 공동체를 통해서입니다.
나무 공동체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드러나는 현장이다.
존 오터버그가 쓴 [Love Beyond Reason]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우리말로는 [누더기 하나님]으로 번역이 되었는데, 이성을 초월한 하나님의 사랑을 이야기합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결코 이성적이거나 이해가 가능한 사랑이 아닙니다.
우리가 흔히 쓰는 ‘Eros’라는 사랑은 무언가 보상이 따르는 사랑의 영역입니다. 즉 이유가 있다는 말이지요.
에로스라는 사랑의 시각에서 보십시오.
길거리에 다니는 사람들이 아기에 대한 관심을 보이는 것은 평범한 아이보다는 예쁘게 생긴 아이라는 것이지요.
우리가 동화 속에서 생각하는 신데렐라를 향한 왕자의 사랑 역시 외적으로 풍기는 옷차림과 외모에 빠졌다는 것을 부인하지 못합니다.
누가 뭐라 해도 보상의 유익이 없으면 일어나지 않는 사랑의 영역입니다.
이렇게 지극히 이유가 있고, 설명 가능한 사랑만이 이 땅 위에 존재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삭막하고 무서운 세상을 우리가 살게 될 것인가를 말입니다.
특히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모습을 본다면 이러한 사랑의 이유 앞에서 누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상처받고 찢긴, 혹은 죄로 말미암아 심하게 얼룩진 우리의 모습을 하나님께서는 사랑스럽게 바라보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Agape’라고 표현하지요. 이성을 넘어선 사랑이 바로 이것입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얼마 전에 미국에 사는 조카가 낳은 아이가 한국에 돌아왔습니다. 오랜만에 집안에 아기가 생긴 것이지요. 저에게 “할아버지”라고 하는데, 온 식구가 그 조그만 아이 하나를 놓고 기쁘게 하려고 애를 씁니다.
이 아이의 외할머니가 교회 현관에서 저를 만났는데, “현표, 예쁘죠, 잘 생겼죠.”라는데, 솔직하게 말해서 사랑스럽기는 하지만, 예쁘거나 잘 생기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아이를 향한 사랑의 눈길은 외모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생명과 가치에 있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지요.
우리 아이들은 사람들이 “아빠 닮았네!”라는 말을 제일 싫어합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아빠를 좋아합니다. 바로 아빠이기 때문이지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가장 명확하게 드러난 순간은 우리를 아름답게 창조하셨을 때가 아니라 우리가 죄로 말미암아 얼룩진 상태에서 사랑스럽지 못할 때였다는 것을 아십니까?
사도 바울은 이렇게 로마서 5장 6-8절에서 말씀하지요.
“6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7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믿음의 공동체가 모인 곳은 바로 이 하나님의 사랑이 드러나는 현장입니다.
누더기 같은 우리를 사랑하시며 이성을 넘어서는 사랑을 보여주신 하나님의 사랑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 하나님을 사랑하는 고백은 바로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 공동체에 하시는 말씀이 무엇일까요?
“나를 사랑한다면, 내가 사랑하는 누더기 같은 인간들을 사랑해다오!”
마태복음 25장 40절의 말씀이 이해가 되시나요?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성경에 예수님을 찾아왔던 많은 사람은 상처를 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각이 그렇게 곱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향한 사랑을 보여주시므로,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 주셨고, 우리의 공동체가 어떤 관심과 사랑을 보여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주셨습니다.
그런 생각을 해보셨나요?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아니 이 땅 위에 있는 많은 보잘것없는 ‘누더기’ 같은 인생을 위해 돌아가셨다는 것이 얼마나 큰 비극인가요?
그러나 동시에 그런 우리를 위해 하나님께서 목숨을 버리실 정도로 우리를 소중하게 여기셨다는 생각을 해보셨나요?
하나님은 우리 모두 사랑하시고 기뻐하십니다.
여기에 있는 누구도 이 하나님의 사랑에서 제외될 자가 없습니다.
시편 17편 8절에 보면 하나님의 사랑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나를 눈동자 같이 지키시고 주의 날개 그늘 아래 감추사”
‘눈동자같이’라는 말이 어떤 뜻인지 아십니까?
“as the apple of the eye”(나의 가장 소중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눈동자 속에 들어 있는 사과처럼, 하나님의 눈동자 속에 늘 들어 있는 아들과 딸처럼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셀(나무 공동체)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인정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향해 동일한 사랑을 가지고 만나는 장소입니다.
그러므로 그 속에 속한 모든 사람이 하나님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들임을 인정하며 함께 하는 공동체입니다.
그 사랑 가운데서 우리는 가장 건강하고 성숙해가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꿈꾸는 교회에 주시는 가장 큰 도전은 이 나무 공동체를 어떻게 아름답게 성장시킬 것이냐 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만나 교회는 단순히 연령 중심이나 지역중심의 공동체가 아니라 다양한 셀(나무 공동체)을 통하여 필요한 사랑을 나눌 수 있는 공동체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여러분이 이 공동체에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identity를 찾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나무 공동체 만들기
어떤 공동체든지 그 모임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헌신이 필요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세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종이 아닌 아들로 삼아 주셨습니다.
우리 믿음의 가족을 한 공동체로 불러 주셨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가족은 때로 누군가의 희생이 요구될 때, 누군가의 사랑이 요구될 때, 누군가의 용서가 요구될 때가 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런 용서와 사랑, 그리고 희생을 가로막는 가장 중요한 장애 요인이 “교만”이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교만은 사람들 사이에 벽을 쌓지만, 겸손은 다리를 놓는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여러분이 누군가를 사랑할 수 없고, 용서할 수 없는 이유는 그 사람에 대한 여러분의 판단 때문이 아닌가요?
저는 BTD 영성 훈련에서 이런 질문을 합니다.
“여러분이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그려보세요. 여러분이 미워하는 사람의 얼굴을 그려보세요. 그러면 분명히 이유가 있다는 것을 알 것입니다.”
그 이유란 바로 여러분의 판단이라는 것이지요.
매년 교회에서 직분자들을 선정할 때, 장로님을 뽑을 때 이런 말을 듣습니다.
“목사님! 그 사람은 안 됩니다.”
그런데 참 놀라운 일은 “그 사람은 꼭 돼야 합니다.”라고 하는 대상과 동일한 인물일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누군가를 판단하는 그 판단이 얼마나 무서운 교만인지 아십니까?
하나님은 가능성을 가지고 계시고, 하나님은 그 사람을 용서하시고, 하나님은 그 사람을 사랑하시는데 여러분이 그럴 수 없다면 말입니다.
얼마 전에 “밀양”이라는 영화를 보았습니다.
주인공 전도연의 아들을 유괴하여 죽인 범인을 용서하기 위해 신앙의 힘으로 극복해 가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교회에 나가 기도를 하고 치유를 받으며 교도소를 찾아가기로 합니다.
“용서하기 위해서…”
그런데 막상 그 범인을 용서하려고 만났을 때 걷잡을 수 없는 분노에 휩싸이게 됩니다.
“이미 그 사람이 감옥에서 예수를 영접하고 하나님의 용서를 받았다고 하는데…”
어떻게 내가 용서하지 않는데 용서받을 수 있느냐고, 어떻게 그렇게 편안할 수 있느냐고. 그래서 결국, 그녀는 신앙을 버립니다.
자신의 용서는 가치가 있지만, 하나님의 용서는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이지요.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이 바로 그런 사람들은 아닌가요?
여러분은 아십니까?
교만은 우리의 영적 성장과 변화의 삶을 살아가는데 가장 큰 장애 요소라는 것을.
아니 교만이 무서운 것은 그것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대적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을 나의 판단으로 사랑하지 못한다는 것이 얼마나 오만한 모습일까요?
하나님이 하시겠다는데, 내가 할 수 없다고 고집을 부린다면 얼마나 교만한 모습일까요?
아름다운 공동체는 내가 먼저 용서받은 것 때문에 죄인들을 바라보는 교만, 나의 판단이 아니라 나를 용서하신 하나님께서 다른 모든 사람도 사랑하시고 용서하신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늘 자신의 연약함과 죄성을 인정하는 자만이 겸손하며, 그것을 인정하는 자만이 다른 사람들을 하나님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겸손할 수 있을까요?
우리의 약점을 인정하면 겸손해집니다.
교만은 우리의 약점과 연약함을 숨기려는 부정적인 표현의 수단입니다.
먼저 자신에 대하여 생각해 볼까요?
몇 주 전 한 청년이 신학대학원을 가기 위해 저에게 면담을 요청했습니다.
대학원 시험을 보려는데, 요구 조건 중의 하나가 “세례받은 지 4년 이상”이라는 규정입니다.
그런데 이 학생은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지만, 1년 반 밖에는 되지 않았습니다.
물었습니다. “그런데 무엇을 나와 상담하려고 하지?”
“목사님 기간을 어떻게 조절할 방법이 없을까요?”
다시 물었습니다. “신학을 공부하는 시작부터 자신의 약점을 숨기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너를 어떻게 쓰시겠니?”
그리고 저의 경험을 이야기했습니다.
저는 유학시절, 교단에서 진급하는 연급을 5년 동안 머물러야 했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공부하는 동안 풀타임으로 목회를 하지 않으면 진급하지 못한다는 규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저에게 말합니다.
“관행으로 다 하니까 그냥 진급해도 됩니다.”
저는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저는 목회를 5년만 할 것이 아니라 평생을 할 것입니다. 5년을 위해 하나님이 예비하실 미래를 포기할 수 없지요.”
자, 생각해 보십시오.
자신의 단점을 숨기려고 하면 그것이 교만입니다.
자신보다 더한 것을 내세우려고 자신을 포장하는 것은 교만입니다.
과대 포장된 자신의 모습으로 상대방을 보면 결코 겸손한 모습이 나오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의 나됨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손길을 기대하는 사람만이 겸손하게 상대방을 바라봅니다.
나의 약함을 인정하고 나면 상대방의 약점을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혹시 여러분은 공동체에서 여러분을 짜증나게 하는 사람이 있음을 경험하십니까?
여러분은 그 사람들을 참아 줄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여러분이 가장 참지 못하는 그 사람이, 참고 인내해야 하는 사람임을 인정하십니까?
그 사람이야말로 여러분의 끊임없는 섬김과 사랑이 필요한 사람입니다.
그 사람을 통해 여러분의 인격이 성숙하여 가고 있음을 아십니까?
화낼 만한 사람에게 화를 내고, 여러분을 인내하지 못하게 하는 사람에게 참지 못한다면, 하나님의 공동체는 아닐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가족이란, 얼마나 똑똑하고, 능력이 많으냐, 혹은 아름다우냐가 기준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가족은 가족이기 때문에 받아드려지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자녀로서의 유업을 주시기로 하신 그 순간부터 가족이 된 것입니다.
어느 교회의 일입니다.
그 교회에서 목장을 시작하면서 목자를 세우고 사람들로 하여금 그 아래에 자신의 이름을 적도록 했습니다.
원하는 셀에 가서 목장을 이루도록 말입니다.
상상해 보십시오. 그것이 잘 되었겠습니까?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가서 가정을 이루기를 원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아무도 찾아가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혹시 [괴물]이라는 영화를 보셨나요?
정말 잘난 것 하나 없는, 모든 사람이 결점투성이인 가정이, 가족의 한 사람을 위해 목숨을 걸고 괴물과 싸우는 모습을 말입니다.
그 영화는 가족 됨의 의미를 생각하게 합니다.
모자람과 결점이 결코 가족을 만들어 가는데 장애가 될 수 없음을 보여 주지요.
겸손은 상대방에 대한 이해에서 출발합니다.
상대방을 이해하지 못하면 공격적이 됩니다.
상대방에 대한 공감이 없으며 무례한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이해하지 않고 상대방을 높여주거나 배려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에 있는 교인들에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빌립보서 2장 3-4절에서 사도 바울이 권면하는 것을 들으십시오.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
요즘 읽은 책 중에 한상복 씨가 쓴 [배려]라는 책이 있습니다.
지극히 이기적이었던 똑똑한 한 엘리트 사원이 상대방을 배려하는 것을 배우며 행복한 공동체를 이루는 이야기입니다.
이 책에서는 배려의 세 가지 조건을 이야기합니다.
먼저 행복의 조건으로 스스로를 위한 배려가 필요합니다.
‘자신에게 솔직하라!’
즐거움을 위한 조건으로는 너와 나를 위한 배려가 필요합니다.
‘상대방의 관점으로 보라!’
성공의 조건으로서 모두를 위한 배려가 필요합니다.
‘통찰력을 가져라!’
그렇습니다.
지극히 이기적인 공동체, 자신에게 솔직하지 않으며 남을 배려하지 않는 공동체는 행복할 수 없습니다.
아름다운 나무 공동체를 위한 원칙이 있습니다.
1. 공동체는 함께 갑니다.
우리의 삶은 늘 함께합니다. 지체 하나하나가 건강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잘 아는 <Titanic 호>는 아주 많은 자부심으로 만들어진 배입니다.
지금까지의 많은 배가 침몰하며 불행을 경험했지만, <타이타닉>은 절대로 침몰하지 않도록 만들어졌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동안에 만들어졌던 배들은 선체가 통으로 되어 있었으나 <타이타닉>은 칸칸이 막이 되어 있어서 한곳이 뚫려도 다른 곳까지 물이 들어오지 않을 것이며 절대로 침몰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 배는 인류 최대의 참사로 기억될 만큼 철저하게 파괴되고 말았습니다.
이런 가정을 해보겠습니다.
두 사람이 배를 타고 갑니다. 호수 한가운데서 한 사람이 자가 자리에 드릴을 가지고 구멍을 뚫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내 자리에만 구멍을 뚫으니까 염려하지 마!”
그런데 정말 염려하지 않아도 될까요?
죄는 절대로 혼자 짓지 않습니다.
공동체 한 사람이 죄를 지으면 그 영향력이 확산됩니다.
셀(나무 공동체)은 한 사람의 영향력으로 망가지는 것이 아니라 망가지고, 죄의 가능성에 있는 사람을 붙잡아 주므로 건강한 공동체를 이루어 가기 위함입니다.
셀(나무 공동체)은 서로가 서로에게 의지하며, 서로에게 영향을 준다는 믿음에서 출발합니다.
전도서 4장 9-11절입니다.
“9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저희가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
10 혹시 저희가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
11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려니와 한 사람이면 어찌 따뜻하라”
2. 공동체에는 비밀이 있습니다.
교회 안의 공동체가 깨어지는 가장 큰 적은 비밀이 지켜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가족 안에서는 모든 슬픔과 고통, 부끄러움이 드러나야 합니다.
그리고 그 아픔을 소중하게 여기고 치유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아픔이 험담으로 떠돌아다니기 시작한다면 많은 상처와 균열이 발행합니다.
잠언 16장 28절입니다.
“패려한 자는 다툼을 일으키고 말쟁이는 친한 벗을 이간하느니라”
여러분이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소문을 싫어하신다. 특히 ‘기도제목인데’라는 말로 떠도는 이야기들을 가장 싫어하신다.”
소문은 악한 사람들 사이에서, 그리고 그 대상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에게서 퍼집니다.
당신이 지체를 사랑한다면 그 소문을 막고 보호하고 싶은 마음이 들어야 합니다.
3. 자주 만나야 합니다.
만남은 자주 그리고 정기적으로 만나는 것을 통하여 열매를 맺습니다.
히브리서 10장 25절의 말씀을 보세요.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만남은 습관입니다.
말세의 때가 가까워져 오면 더욱 만남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만남을 통해 우리가 성장하며 그리스도에게 가까이 가기 때문입니다.
공동체를 위한 만남은 내가 가고 싶은 때에만 가는 편리함이나 이기적인 것에 근거해서는 안 됩니다.
셀(나무 공동체)을 하는 여러분에게 분명히 있어야 하는 확신은 “나의 영적인 성장을 위해 건강하나 공동체가 필요하다.”라는 것입니다.
아주 구체적이고 실제로 여러분의 삶을 분석해 보십시오.
여러분의 삶에서 어떤 모임에 시간을 투자하는지, 그리고 그 모임으로 말미암아 어떤 영적인 유익을 얻는지.
우리 교회가 이번에 리모델링을 하면서 가장 신경을 쓴 것이 교회 안에서 성도들이 모일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하는 일이었습니다.
사도행전 2장에 나오는 초대교회 공동체가 모범적일 수 있었던 것은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이 모이기를 힘썼다.”라는 것입니다.
때로 여러분이 모임을 위하여 여러분의 독단적인 생각, 여러분의 시간 계획을 포기하며 희생해야 할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여러분의 이러한 희생보다 얻는 유익이 훨씬 크리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꿈꾸는 사역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불림을 받은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며 성숙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들을 쓰시고자 할 때 언제든지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성숙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 됨과 성도들의 형제자매 됨을 경험해 보지 못한 어떤 사람도 우리 나무 공동체에서 사랑하고 사랑받는 일이 일어나는 공동체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