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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삼목사

[김병삼목사]은혜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고전10:23-33)

작성자성경 벌레|작성시간23.06.26|조회수335 목록 댓글 0

은혜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고전1023-33)

성경본문:고린도전서10:23-33

23.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니니

24.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

25. 무릇 시장에서 파는 것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

26. 이는 땅과 거기 충만한 것이 주의 것임이라

27. 불신자 중 누가 너희를 청할 때에 너희가 가고자 하거든 너희 앞에 차려 놓은 것은 무엇이든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

28. 누가 너희에게 이것이 제물이라 말하거든 알게 한 자와 그 양심을 위하여 먹지 말라

29. 내가 말한 양심은 너희의 것이 아니요 남의 것이니 어찌하여 내 자유가 남의 양심으로 말미암아 판단을 받으리요

30. 만일 내가 감사함으로 참여하면 어찌하여 내가 감사하는 것에 대하여 비방을 받으리요

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32.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33.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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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에게는 두 가지 자유가 있습니다.

무엇인가를 할 수 있는 자유와 무언가를 하지 않을 수 있는 자유입니다.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죄를 지을 수 있는 자유와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자유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알기 전 죄 가운데 있을 때는 죄를 짓지 않을 자유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우리의 본성이 죄 가운데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죄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어 분별하게 되었고, 더는 죄의 노예가 아니라 자유함을 얻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자유를 육신의 기회로 삼지 말고, 그 자유로 서로서로 종노릇하라는 권면입니다.

 

고린도전서 8장부터 10장까지는 우상 제물에 대한 교훈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주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 안에서 우상 제물 역시 단순한 피조물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누리는 순간 우상 제물은 하찮은 것에 불과합니다.

전적으로 이 부분에 대하여 자유합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의 결론은 우상 제물을 먹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을 세우기 위해서입니다.

 

간혹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은 나 자신이 행하는 일이 잘못이 없다거나, 아무 거리낌이 없을 때입니다.

즉 우리가 행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사람들 앞에서 아무 잘못이 없다고 생각하는 당당함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덕을 세우는 일이 아니라면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미국에서 공부하는 아들에게 숙제가 있습니다. 병역문제를 해결하는 것이죠.

아버지로서 경험으로 말하면 젊은 시절 군목으로 가면 참 좋을 텐데 그럴 기회가 없습니다. 우리나라의 법이 한국에서 신학을 공부하지 않으면 시험 자격조차 없기 때문입니다.

지난여름 아들을 만나 이야기를 하다 미국에서 미군 군목으로 갈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왕 군 복무를 해야 한다면, 병역을 피하는 것이 아닌 이상 미군에서 군목생활을 한다면 목회에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했습니다.

병역을 피하고자 하는 일도 아니고, 목회자로서의 좋은 경험이 되리라고 여겼기에 떳떳한 일이라고 생각한 거죠.

그런데 한국 사람의 정서상 한국에서 목회하는 사람이 한국 군대가 아니라 미국 군대에서 복무한다는 것이 잘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생각하는 떳떳함이 다른 사람에게 유익이 되지 않을 수 있다는 거죠.

이런 때 어떤 결정을 해야 할까요?

제가 목회하면서 조금 당황스러웠던 때가 있습니다.

40대 초반에 제 머리를 걱정하던 분들이 머리 나기 프로젝트를 세워 약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저에게 머리카락이 있고 없고는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약을 먹는데, 정말 거짓말처럼 머리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약을 먹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한 성도의 마음이 상했습니다.

제가 설교하면서 자신이 가진 단점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당당하게 살라고 했는데, 그래서 제가 머리카락이 없음을 당당하게 생각하는 것 때문에 어느 날 은혜를 받았는데, 제가 약을 바르고 먹고 있다는 사실에 실족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순간부터 저는 약을 끊었습니다.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고, 저에게 선택할 자유가 있다면, 누군가에게 유익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누군가에게 유익이 된다는 것조차 늘 불완전합니다.

우리가 누군가의 유익을 위해 선택한 일이 또 누군가를 불편하게 할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적어도 우리가 결정하는 일들이 다른 사람을 배려하거나 유익을 생각하지 않는 일이어서는 안 됩니다.

은혜 받은 자의 신앙적인 삶의 태도가 바로 오늘 본문 23~24절의 말씀입니다.

23.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니니

24.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

 

양심을 위하여

당시 고린도에는 두 가지 종류의 고기를 판매했던 것 같습니다.

하나는 팔기 위해 잡은 고기와 일단 우상의 제물로 드려진 고기를 시장에 가지고 나온 것입니다.

사도 바울에게는 그 어떤 것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땅에 있는 모든 것은 주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교도들이 아무리 제사를 드린 것이라 해도 주님께 속한 것임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모든 것을 창조하셨기에 모든 것의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25~26절입니다.

25. 무릇 시장에서 파는 것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

26. 이는 땅과 거기 충만한 것이 주의 것임이라

그러므로 시장에서 사는 고기들에 대하여 굳이 이 고기가 무슨 고기인지 물을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안다는 것과 정서적으로 받아들이는 것 사이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우상에게 드려진 고기를 먹는 것이 썩 기분 좋은 일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죄가 아닌데 괜히 양심에 꺼려지는 일이 없도록 자유함을 누리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죄의 문제가 아니고 양심의 문제이니, 하나님께서 주신 자유를 누리라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주신 것으로 알고 감사함으로 받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누군가 여러분에게 이것을 이야기함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먹지 말라는 것입니다.

28절 말씀입니다.

누가 너희에게 이것이 제물이라 말하거든 알게 한자와 그 양심을 위하여 먹지 말라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어야 했던 것처럼, 양심을 위하여 그것을 알게 한 사람이 있다면 먹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당시 있었던 상황을 또 상상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사람이 사는 세상이 다 그렇듯이 함께 식사할 일이 많았을 것입니다.

때로는 믿는 이들이 모여서, 혹은 가족들이나 친구들이 함께 말입니다.

 

그런데 같은 기독교인들끼리면 문제가 없는데, 당시에는 소수의 크리스천이 살아가면서 많은 믿지 않는 사람 가운데 자신의 신앙이 무엇인지를 증명해야 하는 일이 많았고, 또한 믿는 이들을 시험하는 일들도 많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누군가의 집에 초청을 받았을 때, 묻지 않고 그냥 먹으면 아무 문제가 없는데, 초청한 사람이 말합니다. “이 음식은 우상에게 드려진 것입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경우가 있을 듯합니다.

하나는 아무 생각 없이 말한 경우요, 또 하나는 의도를 가지고 말한 것이죠.

그들은 크리스천들이 우상을 숭배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을 믿는다고 아는데, 이 음식을 먹는지 먹지 않는지 궁금한 것입니다.

 

우상을 숭배하는 자들에게 이 음식은 단순한 음식이 아니라, 제물에 드려지는 순간 우상을 숭배하는 것이기 때문이죠.

바로 이런 경우가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양심을 판단 받는 경우입니다.

오늘 본문 29~30절에서는 이렇게 말하지요.

29. 내가 말한 양심은 너희의 것이 아니요 남의 것이니 어찌하여 내 자유가 남의 양심으로 말미암아 판단을 받으리요

30. 만일 내가 감사함으로 참여하면 어찌하여 내가 감사하는 것에 대하여 비방을 받으리요

 

이러한 상황이 되면 양심이 더는 우리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를 지켜보는 사람의 문제가 됩니다.

우리는 자유하고, 우리의 양심에는 아무 문제가 없는데, 상대방의 양심으로 판단을 받는 상황이 되죠.

그러니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이 자존심 상하게 믿지 않는 자들의 양심의 판단을 받지 말라는 것입니다. 아니 판단 받을 상황을 만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하며 먹을 수 있는 음식이고, 하나님께 기도하며 영광을 돌리는 순간인데 왜 그 일로 인하여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비방을 받느냐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묵상하며 제가 느낀 것은 성도들의 자존심이라는 차원의 문제였습니다.

사실 우리가 술을 먹고 안 먹고는 구원에 관계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우리에게 술을 먹이면서 반응을 보고 우리를 시험합니다.

그런 상황이라면 우리가 자존심을 지켜야 합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판단 받을 일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믿지 않는 이들이 우리의 양심을 시험하는 때가 있습니다.

우리의 정직을 시험하는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자유함의 관점에서 할 수 있는 일일지 모르지만, 그들의 양심으로 우리를 시험하는 경우가 있다면 절대로 믿지 않는 이들에게 판단 받을 만한 일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구원의 상관관계

말씀을 묵상하던 중에 그런 깨달음이 왔습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구원이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는 모든 일은 사람들에게 구원을 받게 하는 역사를 이루리라는 것 말입니다.

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32.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33.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하라.“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단어가 하나 있습니다. 거치는 자라는 말입니다. 영어 성경에는 ‘stumble’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데, ‘넘어지게 한다라는 의미입니다.

 

유진 피터슨은 이 부분을 풀어쓰면서 여러분만큼 자유롭지 못한 사람들의 감정을 상하게 하지 마십시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이러한 일들을 통하여 단순한 감정이나 거침이 결국은 그 사람이 구원을 받는 데 방해가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2313절에서 하셨던 말씀이 생각납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제가 지난 6월 국민일보 바이블 시론에 실었던 글의 일부를 소개합니다.

기독교인이란 사람들은

지난 주간 미국 오하이오 데이튼에 소재한 UTS(United Theological Seminary) 신학교에서 한국과 미국의 신학자와 목사들이 함께하는 컨퍼런스가 있었다.

현재 기독교가 직면한 위기를 진단하고 미래를 준비하자는 취지였다.

드류 신학대학원에 있는 레너드 스윗(Leonerd Sweet) 교수의 강연이 참 인상적이었다. 참석자들에게 스마트 폰이나 컴퓨터를 켜 놓고 구글 검색을 시행하라고 했다:

“Why are Christians so(왜 기독교인들은 그렇게)?”라는 검색어였다.

 

바로 다음과 같은 문장들이 화면에 떴다:

기독교인들은 왜 이렇게 바보 같은가’(stupid), ‘비판적인가’(judgmental), ‘비열한가’(mean), ‘증오에 차 있는가’(hateful), ‘무지한가’(ignorant), ‘관용이 없는가’(intolerant), ‘거들먹거리는가’(fat). ‘귀찮게 하는가’(annoying), ‘잘 속아 넘어가는가’(gullible).”

 

세상에서 기독교인들이 어떻게 인식되고 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예였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세상 사람에게 교회를 다니라고 말하는 것이 이들에게 얼마나 황당한 일이겠는가?

강의가 끝난 후 네이버에 같은 문장을 넣고 검색을 했다.

제일 먼저 나온 문장은 왜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가?였다.

 

이 문장은 2011년 출간된 김진 목사의 책 제목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현대의 기독교는 예수의 종교라기보다는 예수에 관한 종교로 변질되었다고 말한다.

예수의 신앙이 사라진 교회가 세상의 비난과 조롱거리가 되었다는 말이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기독교가 본래성을 잃어버리고 변질된 증거는 무엇인가?

그동안 교회 안에서 행한 수많은 세미나는 좋은 리더를 만들고 커다란 교회를 만드는 방법들이었다.

그런데 정작 예수님은 우리에게 리더가 되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어떻게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를지, 그리고 어떻게 세상에서 빛과 소금이 될지를 가르치셨을 뿐이다.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진짜 교회에 필요한 세미나는 ‘leadership’이 아니라 followership에 관한 것이 아닐까? 진정한 리더가 필요하다면 예수님을 신실하게 따르는 사람이 리더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동안 교회에서는 예수를 믿고 사는 법을 가르쳤다.

 

어떻게 하면 우리 인생의 문제가 해결되고, 어떻게 하면 부자가 되고, 어떻게 하면 성공하는지. 그런데 정작 예수님은 우리에게 사는 법’(come and live)을 말씀하시기보다 죽는 법’(come and die)을 말씀하시지 않았는가?

참 재미있는 것은 교회가 가장 즐겨 쓰던 용어 중의 하나가 제일’(first)이라는 단어라는 것이다.

어느 지역을 가든, 교파와 관계없이 제일 교회가 참 많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처음 된 자는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는 처음이 되리라고 말씀하셨는데, 한 번도 마지막 교회’(last church)라는 간판을 본 적이 없다.

 

이쯤 되면 교회가 예수님의 가르침과 한참 멀리 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땅에서 우리가 크리스천으로 산다고 할 때 예수의 종교본질적 가르침으로 돌아오지 않는다면 세상의 조롱거리가 되는 것이 하등 이상할 이유가 없다.

세상이 우리보다 우리를 더 잘 알지 않을까.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이 세상의 사람들을 구원으로 인도해야 하는데, 오히려 구원의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걸림돌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릴 때 나타나는 현상들입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지만 전혀 믿는 것 같지 않은 모습 말입니다.

 

가장 불행한 것이 예수를 믿는 우리 때문에 누군가 하나님을 믿는 데 방해가 되는 일들이 아닐까요?

하나님께 영광되고 사람들에게 덕이 된다는 것을 실제적인 우리의 삶에서 적용해 볼까요? 참 유치한 문제 같지만, 한국교회 초기에 술과 담배, 도박의 문제는 아주 중요한 논란거리가 되었습니다.

사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삶의 변화를 의미할 때, 당시 조선의 병폐인 술과 담배와 놀음을 금하는 것은 실제적인 삶에 유익을 주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삶의 변화야말로 덕을 세우는 일이었습니다.

 

사실 우리의 삶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덕을 세운다고 할 때는 여러 가지 적용 가능한 것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결혼생활과 아이들을 양육하는 가정생활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직장생활에서 우리가 누군가에게 유익을 끼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지난 6월 마포지방에서 집회를 인도할 때였습니다.

설교를 마치고 차를 마시며 담소를 하는 중에 군대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그런데 한 분이 저와 같은 부대 출신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그 부대 이야기를 하면서 첫 마디가 그 새끼였습니다.

자신이 신학교를 졸업하고 군 생활을 하는 중에 예수 믿는 사람으로부터 받은 학대를 이야기하기 시작했습니다.

얼마나 자신을 힘들게 하는지, 사람들에게 덕이 되지 않는지를 말입니다.

그 덕을 통해 사람들이 하나님께 대한 관심을 가지고, 그 관심이 복음을 접하게 하는 것이죠.

 

사도 바울의 신앙과 신학에는 일관성 있는 원칙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918절 이하에서는 자신이 가진 권리를 다 쓰지 않고 절제하며 자신의 자유를 속박한 것은 유대인과 헬라인을 구원하기 위해서였다고 말합니다.

로마서 151절에서는 강한 자는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에서 이런저런 이유로,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일들로 인해 누군가를 힘들게 할 수 있습니다.

 

사실 모순, 충돌, 갈등의 이유를 보면 서로가 마땅한 일을 한다고 하는 자신감과 확신 때문이기도 합니다.

 

우리 정치사를 보면서 끊임없는 갈등의 이유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가치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의 고질적인 문제는 진보와 보수와의 갈등입니다.

그런데 자신들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서 국민이 희생되어야 합니다.

국민을 위해 선출된 사람들이 자신들이 생각하는 옳은 일을 하며 가장 중요한 것을 잃어버리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 부분에서 신실한 크리스천들이 같은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

자신들의 신실함을 지키기 위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릴 뿐 아니라 믿지 않는 사람들이 구원받는데 걸림돌이 되어 버린 것이죠.

그래서 오늘 사도 바울이 가진 윤리관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첫째로, 사도 바울의 윤리관은 비 계율적입니다.

이렇게 하고 저렇게 하거나, 먹을 수 있거나 먹을 수 없는 것의 문제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어떤 행동이 계율에 의해 규정되는 것보다 더 성숙한 윤리적 기준이 있다는 것이죠.

 

둘째로, 사도 바울의 윤리는 비의식적입니다. 당시 유대인이든 헬라인이든 자신들이 섬기고 있던 신과 종교제도에 따라 의식 자체를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유대인에게 할례가 중요했듯이, 헬라인들에게는 제사가 중요했던 것이죠. 그래서 그들이 하나님을 믿게 된 후에도 자꾸 의식을 만들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에게 신앙의 성숙이란 의식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우리의 의식속에 가둘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인격적이시기 때문이죠. 인격은 제도와 의식보다 훨씬 더 성숙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셋째로, 사도 바울의 윤리관은 비 금욕적입니다. 당시의 시대상과도 무관하지 않습니다. 이원론적인 세계관에서 육적인 것은 죄로 규정하게 되면 우리에게 주신 것을 축복으로 누리지 못하고 자꾸 거부하게 되어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 악한 것을 자주 경험합니다. 그러나 이 악들이 하나님께서 악하게 만드시거나, 악한 것을 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을 우리가 선용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다고 말합니다. 우상에게 드려진 제물도 우리가 감사함으로 받고, 먹을 수 있는 것입니다. 단지 그것이 잘못 사용되었기 때문입니다.

 

성숙한 신앙은 우리를 금욕적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금욕에서부터 자유하게 합니다. 금욕하므로 하나님과 가까워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즐기며 사랑하며 우리에게 주어진 것을 선용하는 것이 참다운 신앙입니다.

그리고 31절에 사도 바울의 윤리관의 기본이 되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그리고 그러한 윤리관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는,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것이 최고의 기쁨이 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고 난 후에, 그 은혜 가운데 사는 삶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삶을 사는 것이라는 고백입니다.

, 한 사람이라도 구원받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으로 사는 것이 윤리의 핵심입니다.

이것이 율법적 윤리 아닌 은혜의 윤리가 되는 것이죠.

이제 하나님의 영광과 구원의 문제, 그리고 우리 삶의 기준이 이해가 되는 것입니다.

33절입니다.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하라.”

많은 사람의 유익을 유하여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이유가 있습니다.

사람들을 기쁘게 한다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게 한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압니다.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악한 일을 행하여 사람들의 욕망을 충족시켜주는 기쁨이 아니라,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기쁨과 유익을 준다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가지고 설교를 준비하며 묵상하던 중 하나님께서 주셨던 생각입니다.

은혜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사랑이 먼저다!'라는 주제로 변화산이 끝났습니다. 벌써 10년 넘게 1년에 두 번씩 특별새벽기도회를 인도해 왔습니다. 이번처럼 말씀을 전하기 힘들었던 때가 없는 듯합니다.

 

무엇보다 사랑이라는 주제가 너무나 힘들었습니다.

첫날 새벽에는 지난밤 긴장으로 잠을 못 자고 새벽에야 수면제를 먹고 잤는데, 새벽에 일어나 설교하고 나올 때까지의 시간이 기억 속에 없습니다.

아마도 덜 깬 상태에서 지나갔던 모양입니다. 그렇게 준비를 하는데도 5번째 말씀에서는 중간에 맥을 놓치고 말았습니다.

정말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더군요. 등골에서 진땀이 나더니 또르르흐르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렇게 당황해하는 저의 눈에 한 성도의 모습이 들어왔습니다.

저의 당황과는 별개로 눈물을 주르르 흘리며 말씀을 듣는 모습 말입니다.

, 말씀은 나의 준비나 완전함과는 별개의 문제구나! 그저 하나님의 말씀은 준비된 자에게 역사하시는구나!”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은혜를 실감합니다.

그 은혜는 나의 준비로 일하시는 분이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을 실감하게 했습니다.

하지만 치열하게 준비하지 않았다면 이런 은혜가 가슴에 와 닿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도 합니다.

 

치열함 그것이 하나님이 일하시는 통로인 듯합니다. 나의 노력이 아닌, 나의 치열함을 뚫고 역사하시는 그 손길 말입니다.

무엇이든 관대한 것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 아무리 해도 통과할 수 없는 하나님의 기준을 통과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은혜가 아닐까요?

하나님의 은혜를 가로막는 최대의 적은 게으름이 아닐까? 라는 생각도 합니다.

우리의 노력으로 일하시는 것은 아니지만, 게으름 가운데는 임하시지 않는 분이 진리의 영이라는 생각도 합니다.

어쩌면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우리가 더 생각하지 않고, 더 고민하지 않고 살아가려는 것이 은혜를 잊어버린 사람의 모습은 아닐까요?

하나님께서 우리의 부족함에도 언제나 찾아오셔서 선한 일을 행하신다면, 그 누군가에게도 같은 하나님의 은혜가 적용되어야 하는 것은 아닌가요?

 

우리가 은혜 속에서 산다는 것은, 나의 삶의 유익이 다른 사람의 유익으로 바뀔 때라는 생각이 듭니다. 내가 할 수 있고 누릴 수 있다는 특권 때문에 다른 누군가를 힘들게 하거나 실족하지 않게 하도록 말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시간을 잘 지키고 살아가는 것이 참 중요한 덕목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이 시간을 지키지 못함을 헤아릴 수 있는 것이 더 큰 덕이 아닐까요? 비난 보다는 헤아리는 마음 말입니다.

 

사도 바울이 모든 사람에게 스스로 종이 되었다는 말은, 자신의 유익을 위해 다른 사람을 억누르는 주도권을 행사하지 않겠다는 말이 아닐까요?

그것이 능히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임에도 말입니다.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필립 얀시가 쓴 [하나님, 은혜가 사라졌어요]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이 사마리아의 한 우물가에서 죄 많은 여인과 대화하는 장면이 내게 특별한 의미로 다가온 적이 있었다.

캐나다 토론토에 있는 헨리 나우웬의 집에서 그와 함께 하루를 보냈다.

그는 샌프란시스코의 한 에이즈 병원에서 죽음을 앞둔 환자들을 문병하며 일주일을 보내고 막 집으로 돌아온 상태였다. 그가 말했다.

저는 사제입니다. 제 직무의 일부로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줍니다.

그리고 젊은 에이즈 환자들에게 혹시 제게 할 말이 없는지 질문하며 병동을 돌아다녔습니다.”

그는 그 후로 자신의 기도 제목이 바뀌었다고 말했다.

그는 난잡한 성행위와 온갖 중독증, 자기 파괴적인 행동에 관한 환자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들에게서 단 한 번도 해소된 적이 없는 사랑을 향한 갈증의 단서들을 포착했다.

그때부터 그는 이렇게 기도했다고 한다.

하나님, 제가 다른 사람들을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악한 사람들이 아닌 목말라하는 사람들로 여기게 도우소서.

그리고 하나님의 생수’(Living Water, 4:10)를 그들에게 내밀 수 있는 용기와 그들을 가련히 여기는 마음을 제게 허락하소서. 오직 하나님의 생수만이 그들의 타는 목마름을 해소해줄 수 있습니다!”

 

내 신앙을 조롱하는 불쾌한 회의주의자들이나 내 심기를 건드리는 행동을 하는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그의 이 기도를 상기한다.

그리고 내가 그런 사람들을 무턱대고 비난하거나 자기방어의 털을 곤두세우지 않게 지켜달라고 하나님께 구한다.

그들을 목마른 사람들로 여기게 하소서. 그들에게 생수를 건넬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가르쳐주소서!”

 

은혜는 우리의 지적요소를 충족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지식의 욕구로 행하고, 판단하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능히 비판하고 조롱할 수 있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바라보는 마음입니다.

자신의 판단이 중지되고 하나님의 마음이 보이는 것.

오늘의 말씀을 메시지 성경으로 마감하려 합니다.

29~33절 말씀입니다.

이처럼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나는 속 좁은 사람들이 하는 말에 마음 졸이며 신경 쓰지 않겠습니다.

그러니 남들이 여러분을 두고 뭐라고 말하든지, 신경 쓰지 말고 마음껏 드십시오. 결국 여러분이 음식을 먹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지 사람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 먹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마음을 다하여 자유롭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십시오. 그러나 여러분의 자유를 지각없이 행사하지는 마십시오.

여러분만큼 자유롭지 못한 사람들의 감정을 상하게 하지 마십시오. 나는 이 모든 문제에서 모든 사람의 기분을 헤아리려고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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