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을 행하며 알게 되는 것(잠12장22)
성경본문: 잠언12:22
22-거짓 입술은 여호와께 미움을 받아도 진실하게 행하는 자는 그의 기뻐하심을 받느니라
22-The LORD detests lying lips, but he delights in men who are truthf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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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선경이 지은 [문득 묻다]라는 책을 보면 우리가 흔히 지날 수 있는 것에 대하여 흥미롭게 답하고 있습니다.
쉽게 지나갈 수 있는 것이지만, ‘밤송이에는 왜 가시가 있을까?’라는 질문에 대하여 아주 의미 있게 답을 하고 있습니다. 가시가 있는 이유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는 것이죠.
대부분 과실은 달콤한 향으로 동물들을 유혹합니다. 맛있게 먹고 씨를 뱉어 달라는 것이죠. 하지만 밤은 그 자체가 열매이자 씨앗이기 때문에 먹혀서는 종족 보존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시란 상대방을 공격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스스로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생을 살다가 가시 돋친 말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누군가를 해롭게 한다고 생각하면 된다는 것이죠.
야심한 시각에 짖는 개들은 소리를 크게 내어 무서운 적을 쫓아내려는 선제방어입니다.
겁이 많은 개가 오히려 더 크게 짖는 것이죠.
신기하게도 산 정상에 가면 나무들이 다 작습니다. 가시도 없습니다. 자신을 방어하지 않습니다.
그곳에는 맹수나 자신을 헤치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단지 나비와 새들이 날아다닐 뿐입니다.
우리가 자연을 보면서 배우는 지혜입니다.
인자하다는 것은 적어도 삶의 경지에서 나오는 부드러움이라는 것, 우리의 삶에 아직도 가시가 있다는 것은, 자신의 상처를 제어할 힘이 없기에 방어기제로 날카롭게 솟아 있다는 것, 그래서 내가 아픈 것을 감추기 위해 누군가를 아프게 한다는 것을 말입니다.
잠언 말씀은 우리가 가장 보편적으로 알 수 있는 하나님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치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우리가 학교에서 공부하는 과정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글을 읽는 것을 배우며 문학과 비평을 배우듯이, 덧셈과 뺄셈을 배우며 숫자의 기본 원리를 배우다 고등 수학으로 가듯이.
마치 우리의 신앙이 자란다는 것은 일반적인 하나님의 성품에서 시작해, 특별한 상황에서 우리를 만나주시는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럼 가장 기초적이고 일반적인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무엇이며, 우리가 깨닫게 되는 하나님의 성품은 무엇일까요?
오늘은 본문 말씀에 기초해, “거짓을 미워하시는 하나님! 그리고 ”진실히 행하는 자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을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언젠가 주일 설교를 하며 매우 당황스러웠던 때를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아마도 2부 설교를 막 예화로 시작했을 때였습니다.
그때까지 설교 원고를 볼 일이 별로 없었습니다.
본래 미리 설교를 준비하는 스타일이고, 몇 번이고 원고를 보고 올라오기 때문이죠.
하지만 아무리 원고를 숙지하고 올라와도 다 외울 수는 없는 일이고, 원고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설교자에게는 안심되죠.
그런데 예화를 막 마치고 본론으로 들어가려고 원고를 들추어 보는 순간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습니다.
1부 설교를 했던, 준비된 원고가 아니었기 때문이죠.
순간 제 머릿속에는 어떻게 이 상황을 수습할 것인가에 대한 여러 가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그냥 끝까지 밀고 갈 수도 있습니다.
설교를 잘 못 하고 헤매는 일이 늘 있는 일이기에 사람들이 모를 수도 있습니다.
무엇보다 원고를 제대로 준비하지 못한 불성실함이 교인들에게 드러나는 것이 싫기도 했습니다.
그 짧은 순간, 저는 마음속에서 이 상황을 교인들에게 이야기하고 시작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실수를 감추기보다는, 실수를 인정하는 것이 마음이 편하리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잘못된 원고를 가지고 왔다고 고백하는 순간 갑자기 마음이 편해졌습니다.
지금부터는 실수를 감추려고 애를 쓰지 않아도 되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이제부터 실수가 당연하게 여겨지는 순간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예배를 마치고 난 후, 저는 어떤 교인으로부터 이런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자기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설교를 그렇게 긴장하고 잘 들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언제 실수할까 걱정 반 기대 반으로 끝까지 들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제가 준비한 중요한 내용, 중요한 개념을 놓쳤습니다.
그러나 어쩌면 제가 하려 했던 많은 말보다, 설교의 핵심이 더 잘 전달되었으리라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사실 정직이란 시작하기가 힘들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자신을 드러내기 시작하면, 그때까지 생각하지 못했던 ‘진실함의 능력’이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정직은 참 어려운 일입니다.
대개 정직하지 못한 이유는 자신의 약함과 단점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서라면, 정직은 자신의 모든 것을 드러내야 하기 때문이죠.
정직의 가장 큰 장점은 삶이 교정되고, 점점 나아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작은 정직 이후에 저에게는 새로운 습관이 생겼습니다.
설교를 마치고 난 후 다음 예배시간이 기다리고 있을 때, 강단에 원고를 그대로 놓고 내려오는 것이죠. 혹시라도 실수하지 않기 위해서 말입니다.
진실은 하나님을 닮는 것
하나님을 아는 지식 가운데 하나는 우리가 ‘선’을 행하며 하나님을 알게 되고, 하나님을 인정하게 되고, 그렇게 되므로 하나님을 닮아간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곳에 하나님의 성품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통해 또 하나의 분명한 하나님의 성품을 발견하게 되는데, 하나님은 거짓을 미워하시고 진실을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잠언 12장 22절입니다.
“거짓 입술은 여호와께 미움을 받아도 진실하게 행하는 자는 그의 기뻐하심을 받느니라”
이와 같은 맥락에서, 또 하나의 하나님의 형상을 닮는 것이 바로 ‘진실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먼저 진실이란 말의 뜻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국어사전에 보면, “양심에 비추어 거짓이 없는 사실” 혹은 “실제 그대로의 것”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저는 이것이 올바른 해석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나름대로 이렇게도 해석을 해보았습니다.
“‘참된 것(眞)’이 ‘열매로(實)’로 구체화하는 것이다.”라고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신실하다”, “진실하다”고 표현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속성 때문입니다.
민수기 23장 19절에 보면,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인생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하지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하지 않으시랴”라고 말씀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은 현실화되어 나타나는 것, 말씀의 씨를 뿌렸으면 열매로 돌아오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거짓말을 하지 않으신다.”는 말속에는,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은 늘 현실로 이루어진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속성, 말한 것을 이루고야 마는, 거짓이 없는, 이러한 하나님의 모습을 닮아가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신다고 지혜자는 말합니다.
즉 하나님의 속성이 진실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닮은 자, 진실히 행하는 자를 기뻐하신다는 것을 지혜자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제가 [우리가 꿈꾸는 교회]라는 책을 내면서 서문에 실었던 글입니다.
바로 하나님도 이런 마음이겠지요.
저에게는 아들이 하나 있습니다. 이 아이가 장래의 희망이 “목사”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얼마나 마음이 좋은지 모르겠습니다.
나와 같은 자녀가 하나 생긴다는 것은 모든 부모의 기쁨일 것입니다. 저는 그 아들이 커 가는 모습을 볼 때마다, 그 어린 시절이 얼마나 저와 흡사한지 놀랄 때가 많이 있습니다.
목회자의 자녀로 학창시절을 보내면서, 가장 듣기 싫었던 말이 “너 목사 아들이 왜 그래”라는 친구들의 비아냥거림이었습니다.
그런데 문득, 제 아들이 같은 이유로 고민하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아린 마음이 느껴졌지만, 같은 고민을 하는 아들이 너무나 사랑스러웠습니다.
저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닮아 가는 기쁨이 있듯이 하나님의 교회가 하나님의 마음을 닮아 가는 기쁨 말입니다.
닮아 가는 과정이 때로 힘이 들고, 가슴 아린 일들도 있겠지만, 하나의 열매를 맺는 것은 참으로 보람이 있는 일일 것입니다.
저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참석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닮아가는 것 말입니다.
‘진실함으로’ 우리 교회가 하나님을 닮아 가는 꿈을 꿉니다. 진실함으로 이 세상을 놀라게 하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능력을 발휘하는 꿈 말입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과 우리가 아는 하나님의 모습이 우리에게서 나타난다는 것, 그리고 세상이 우리를 보면서 하나님을 알게 된다는 것이 참 놀라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은 치료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갈라진 것을 화합하고 싸매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성품이 있는 곳에 화평과 사랑과 하나 됨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거짓 입술은 여호와께 미움을 받아도…”라고 말씀합니다.
왜 거짓을 하나님이 미워하실까요?
거짓의 특징은 분열이기 때문입니다. 거짓이 들어가면 하나님과 우리 사이가 갈라집니다. 해결되지 않는 거짓은 또 다른 거짓을 낳기 때문입니다.
거짓이 쌓여가며 하나님과의 간격이 점점 멀어집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 역시 거짓은 상처와 깨어짐을 낳습니다.
사실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많은 미움과 분열이 거짓된 말로 시작되는 것이 아닌가요?
제가 목회하는 동안 가장 무서운 일은 거짓을 옮기는 입술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거짓을 전하는 사람들의 패턴이 아주 일정합니다.
“누가 그러는데….” 진실하지 못한 이야기를 전하는 가장 쉬운 일은 누군가의 이름을 빌려서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말하는 입술에 대하여 책임지라고 하십니다. 그 만큼 말하는 것이 무서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 말을 들으시기 때문입니다.
누구의 말로 숨기고 가장한다고 해서 그 책임이 면해지는 것도 아닙니다.
거짓은 의도적인 것도 있지만,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을 추측으로 말하는 것 역이 무서운 일입니다.
사실, 거짓은 우리의 상상 속에서 만들어집니다. ‘상상’은 거짓을 만드는 ‘공장’입니다. 우리가 흔히 ‘소설을 쓴다!’고 하는데, 소설을 쓰다 보면 어디까지 갈지 모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거짓 입술은 여호와께 미움을 받는다”라고 되어 있는데, 본래 원어의 뜻에 의하면 “속을 뒤틀어 역겹게 한다”는 영어로는 “detest”라는 뜻입니다.
거짓을 하나님께서 이렇게 역겹게 생각하시는 이유는, 거짓에 의해 사랑하는 자녀들이 상처를 입기 때문입니다.
“거짓 입술”이란 말이 무엇일까요?
우리는 자기중심적인 판단, 혹은 양심이라는 것이 얼마나 불완전한지를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판단으로 다른 사람에 관하여 이야기할 때, 얼마든지 거짓이 될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라는 책을 쓴 유명한 일본의 작가 나쓰메 소세키의 일화를 소개합니다.
일본의 소설가 나쓰메 소세키는 도쿄 대학에서 영문학을 강의했다. 하루는 그가 강의하고 있는데, 한 학생이 주머니에 손을 넣고 앉아 있었다.
그 모습은 약간은 불손한 태도로 비치기에 충분했다. 게다가 소세키는 매우 세심하고 예민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 꼴을 보고 그냥 수업할 수 없었다. 그는 수업을 시작하기 전에 그 학생에게 말했다.
“자네, 주머니에서 손을 빼게.”
그리고 소세키는 강의를 시작했다.
그러나 그 학생은 여전히 주머니에서 손을 빼지 않고 있었다.
소세키는 다시 한 번 그에게 주의를 주었다. 그런데도 그 학생은 여전히 손을 빼지 않고 안절부절못하는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학생, 내 강의를 들으려면 제발 주머니에서 손을 빼 주게. 자네가 손을 빼지 않으면 나는 신경이 쓰여서 더 이상 강의를 할 수 없을 것 같네만.”
하지만 그렇게 말했는데도 그 학생은 손을 빼지 않은 것이었다.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된 소세키는 당장 강의를 그치고 책을 챙겨서 문을 향해 걸어갔다. 그러자 그 학생이 벌떡 일어나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교수님, 저는 한쪽 팔이 없습니다….”
그 말에 소세키는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한 충격에 휩싸였다.
자신의 예민한 성격 때문에 한 사람의 아픔을 전혀 돌아보지 못했던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해보십시오.
사실 우리가 거짓을 말한다고 할 때, 그것이 거짓인 것을 알면 얼마든지 피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는 말을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문제입니다.
우리는 진실을 말하는 것 같으나, 실상은 거짓이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가 정의롭다고 생각하고, 옳다고 생각하는 말이 진실이 아니기에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것입니다.
실제 우리가 교회에서, 우리의 형제, 자매들에 대한 많은 판단 말입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평가하면서 내렸던 생각이 얼마나 진실할까요?
우리가 얼마나 그 사람들의 사정을 이해하면서 판단을 했을까요?
“저 사람은 돈을 쓰지 않는 구두쇠야, 베풀 줄을 몰라”라고 했을 때, 그 사람이 어떤 사정에 처했는지를 얼마나 고려해 보았나요?
“저 사람은 남을 위해 시간을 낼 줄 모른다고, 너무나 이기적인 사람이야”라고 판단했을 때, 얼마나 그 사람의 가정을 생각해 보았나요?
“저 사람은 왜 마음을 열지 않지?”라고 판단했을 때, 그 사람이 지금까지 겪었던 상처가 어떠했으리라고 생각해 보았나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로마서 11장 33절에 있는 말씀을 보세요.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지혜서 기자도 여기저기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의 부요함’을 이야기합니다. ‘부요함’이란 충분히 차고 넘쳐서 나누어 줄 수 있다는 말입니다. 조금 전에 지적했던 것처럼 ‘거짓’은 의도적인 것뿐 아니라, 우리가 가진 부족함으로 인해 올 수도 있습니다.
‘실수’는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본래 ‘실수’라는 말이 바둑과 장기에서 나온 말이죠. 잘못 돌을 두었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수를 다 읽을 수 없는 사람들에게서 나오는 당연한 실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을 대할 때, “지혜와 명철을 구해야 합니다.”
진실을 말하는 입술이 되기 위해서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우리 자신의 판단이 불완전함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판단을 구해야 합니다.
야고보서 1장 5절입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우리가 실수할 수밖에 없는 존재이고, 우리가 가진 지식의 한계가 분명하다는 것은 ‘절망’이 아니라 ‘현실’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부족함을 채워주시는 분이라는 것이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무엇인가요?
우리의 부족한 지혜를 채워주시는 분, 아니, 우리가 지혜를 구할 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이런 찬양이 있지요?
오늘 집을 나서기 전 기도했나요?
오늘 받을 은총 위해 기도했나요?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하면 거짓을 멀리하고, 진실한 말을 할 수 있는지 구체적인 방법을 찾아보려 합니다.
구체적인 제안들
지혜서에는 아주 직선적이고도 간결하게 진실을 말하는 방법을 말하고 있습니다. 진실은 사람들을 당황하게 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에는 너무나 거짓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실할 때, 하나님이 기뻐하실 뿐 아니라 세상을 변화시키는 능력을 발휘하게 됩니다.
때로 우리는 거짓을 모르는 정직한 어린아이 때문에 당혹스러울 때가 많이 있습니다.
벌써 오래된 일인데, 소망교회 곽선희 목사님의 설교 테이프를 들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하루는 목사님이 심방을 갔습니다.
예배를 드리려고 하자, 엄마가 아들에게 말했습니다. 그냥 “성경책을 가져오겠니?” 했으면 좋았을걸, 잘난 척하느라고 “엄마가 늘 보는 책 있지?”라고 했더니, 아이가 가져온 것은 백화점 쇼핑 목록이었다는 말입니다.
정직한 아이 때문에 일어난 당황스러움입니다.
이런 이야기도 있을 법합니다.
동네에서 전철을 타러 가기 위해 마을버스를 탔다. 몇 정거장 가다 보니 어떤 꼬마 둘과 엄마가 마을버스를 탔다. 좀 가다 보니 꼬마가 떠들기 시작했다.
엄마가 아이를 타일렀다. “얘, 엄마가 어떤 사람을 제일 싫어한다고 했지?”
그러자 꼬마가 대답했다.
“아빠”
많은 교인이 목회자가 심방을 가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아이들이 어떻게 돌출 발언을 할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심방을 가면, 아이들하고 같이 예배를 드리려고 하지 않습니다.
“예배드리는 동안 방에 들어가 있어”라고 하는 집은 조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결국, 무언가 진실이 드러난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조금 더 깊이 생각해 보면, 이렇게 진실이 드러날 때, 놀라는 이유는 늘 우리가 진실을 가리고 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진실이 드러날 때 세상을 당혹스럽게 하는 것입니다.
특히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는 진실함을 대할 때, 사람들은 당황할 뿐 아니라 감동을 하기도 합니다.
이상합니다. 교회에서 보면, 가장 잘못을 시인하지 않는 사람이 목사, 장로, 권사, 집사의 순인 것 같습니다.
우리는 쉽게 직분이 낮은 사람은 신앙의 연조가 짧으니까 언제나 잘못을 저지를 수 있고, 그 잘못을 시인해도 별로 흠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실상 제 모습을 보면, 목사이기 때문에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 것도 아니고, 죄를 짓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단지 목사이기 때문에 같은 잘못과 죄를 드러내는 것이 두려울 따름이지요.
그러다 보니까, 이중적인 삶을 살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드러내지 못하므로 어둠이 점차로 숨어버리고 감당할 수 없는 단계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아마도 저를 포함한 많은 직분 자도 같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사실은 직분이 높을수록, 진실하게 자신의 죄를 고백할 내용이 늘어가는 것이 정상입니다. 왜냐하면, 죄에 대한 기준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일반인보다는 죄에 대하여 훨씬 민감해지기 때문입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사람들은 직분 자들이 혹은 신앙의 연조가 높은 분들이 죄를 짓지 않은 것에 은혜를 받는 것보다, 그분들이 죄를 고백하는 것을 바라보면서 감동을 합니다.
결국, 숨기는 것보다는 진실하게 드러내는 것이 감동적인 삶을 사는 비결이라는 말이지요.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거짓된 삶을 드러내는 용기보다, 거짓을 드러낼 것이 없는 진실한 삶을 사는 것이 지혜로운 자의 삶이겠지요.
진실한 것이 좋은 것을 압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진실을 말하는 사람이 될까요?
1) 거짓말을 적게 하라! - 자신에 대한 훈련
거짓으로 인한 말의 죄를 덜 짓고 싶으면, 말을 덜 하면 된다고 제안합니다.
잠언 10장 19절입니다.
“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하기 어려우나 그 입술을 제어하는 자는 지혜가 있느니라”
사실 우리가 경험하는 것이지만, 말을 많이 하고 나면 꼭 후회할 일이 생깁니다. 말을 적게 할수록 과장도 적게 합니다. 말을 적게 할수록 후회할 말을 하지 않게 됩니다. 말이 적을수록 못 지킬 약속도 적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지혜서는 아주 친절하게 말을 적게 할 방법도 알려주고 있습니다.
잠언 15장 28절입니다.
“의인의 마음은 대답할 말을 깊이 생각하여도 악인의 입은 악을 쏟느니라”
말을 조심스럽게 삼가는 사람과 뭐든 마음에 있는 대로 입 밖으로 내뱉는 사람 중, 누가 진실한 쪽의 말을 하리라고 생각합니까?
컴퓨터로 작업하다 보면, 철자 검색기능이 있습니다. 틀린 것에는 빨간색 줄이 그어집니다. 그러면 다시 그 글을 확인해야 합니다.
잠언은 바로 우리가 하는 말 중에서 거짓말 검증 기능을 갖춰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사람은 말을 하기 전, 이 말이 꼭 필요한 말인지, 지금 하려는 말은 진실 된 것인지를 꼭 생각해야 합니다.
2) 자신을 드러내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사실 진실해진다는 것은 끊임없이 자신을 드러내는 훈련입니다. 자신을 드러낸다는 것은 용기가 필요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에게는 늘 자신의 약점을 숨기려는 본능이 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3장 10절입니다.
“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아담이 범죄 했을 때, 제일 처음으로 한 행동이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숨은 것입니다.
인간들이 옷을 처음으로 입기 시작한 것 역시, 창세기 3장 7절에 보면, 부끄러움을 가리려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화장하게 된 역사를 아십니까?
화장을 가장 먼저 시작한 사람들은 고대 이집트 여인들이었다고 합니다.
자기 매력을 한층 돋보이게 하려는 의도에서 천연두가 유행하던 중세에는 마마 자국을 감추기 위해 화장을 진하게 했습니다.
서커스단의 분장사는 사람들을 웃기기 위해 피에로 화장을 합니다.
아프리카나 뉴기니 원주민들은 전쟁할 때 무섭게 보이려고 화장을 합니다.
화장하는 경우들은 저마다 다릅니다.
하지만 그 이유를 따져보면 결국 남을 속이기 위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화장을 잘하면 얼굴의 결점도 감춰지고 더 아름답게 보입니다.
다만 그 형태가 다를 뿐이지, 남자 여자 가릴 것 없이 사람들은 여러 가지 모양으로 화장합니다.
학벌, 가문, 출신 지역, 돈, 명예 등 여러 가지 다양한 화장 도구들을 사용합니다. 그것으로 자기의 본성을 가리고 남 앞에서 멋진 사람으로 내보이고자 합니다.
그러나 얼굴에서 화장이 지워질 때 추한 모습이 하나씩 드러납니다.
지워진 자국에서 차츰 드러나는 본래의 얼굴이 곱기는 어렵습니다. 이 세상에 살면서 우리는 얼마든지 화장을 하며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잘못된 화장은 언젠가 지워지게 마련이고, 이 땅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해도 하늘나라에서는 모든 것이 지워질 것입니다.
자꾸 자신을 드러내려 하지 않는 이유, 감추려는 이유는,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 자신을 드러내면, 아름다운 것보다 추한 모습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추한 부분이, 더러운 상처가 드러나야 치유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가끔 영화에서 보지만, 어떤 사람이 총에 맞거나, 화살에 맞으면, 제일 먼저 하는 행동이 옷을 찢는 것입니다.
상처 부위가 드러나게 합니다. 그래야 치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죄가 아무리 무섭고 더러울지라도 드러내라고 하십니다.
이사야 1장 18절입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희게 되리라”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감추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가지고 와서 나와 얘기해 보자고 말씀합니다. 영어로는 “come now, let us reason together”
한번 ‘감추지 말고 논리적으로 따져보자’라고 말씀합니다. 아무리 그 죄가 클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지리라, 즉 용서하여 주시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결국, 하나님 앞에 서면 모든 것이 드러납니다. 감추었다 드러나면 더욱 창피할 것입니다. 더욱 흉측한 모습을 드러내게 될 것입니다. 자신을 드러내면, 치유가 가능합니다. 고쳐질 수 있습니다. 자신을 드러내면 이해를 구할 수 있습니다. 화장은 하면 할수록 짙어집니다.
한번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담대하게 나타날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은 그것을 숨기려고 점점 더 짙은 화장을 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힘들지만, 자신을 드러내는 훈련이야말로 우리가 진실하게 살 수 있는 밑거름이 될 것입니다.
3) 진실을 말하라! - 상대방을 대할 때
너무 쉽게 들립니까? 그러나 분명한 것은 진실하게 살기 위해서는 진실한 말을 하면 됩니다.
진실한 말이 요구되는 상황일 때, 자신에게 돌아올 대가가 아무리 엄청난 것이라도 이를 생각하지 않고 주저 없이, 숨김없이 진실을 밝힐 수 있겠는가?
우리에게 주는 아주 커다란 도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실 저는 목회자로서 사람들이 반드시 들어야 하는 입바른 진실을 말하는 쪽에서 주저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말을 할 때 일어날 파장이 싫기 때문입니다.
괜한 풍파를 일으킬까 봐 걱정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저를 포함한 많은 사람이 진실을 택하기보다는 평화를 택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지혜자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잠언 3장 3절입니다.
“인자와 진리가 네게서 떠나지 말게 하고 그것을 네 목에 매며 네 마음 판에 새기라”
“언제든지 진리가 네게서 떠날 수 있으므로 아예 목에 매어서 다른 사람도 볼 수 있게 할 것이며, 네가 잊어버리지 않도록 마음에 늘 새기라”는 말씀입니다. 진리만을 생각하면 진리만을 말하게 되어 있습니다.
저는 당구를 처음 배우고 나서 우리나라에 그렇게 당구장이 많은 줄 몰랐습니다.
저는 목사가 되어 목회하면서 어느 곳에 가든지 교회가 눈에 들어옵니다. 바로 마음속에 품고 있는 것이 드러난다는 말입니다.
저는 진리에 관한 한 기독교인들이 표준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세상 사람이 우리를 보면서 진리의 기준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우리가 진리를 말할 때, 한 영혼을 구원하게 될 것이며, 우리가 진리를 행하는 사람이 될 때, 사람들은 우리에게 감동하게 될 것입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볼까요?
저는 개업하는 사람들, 음식점에 있는 사람들을 심방하면서 늘 조심스러웠습니다.
그분이 투자한 것을 아직 뽑지 못했는데, 손해를 보는 상황에서 어떻게 십일조를 하라고 말할 수 있으며, 매상을 많이 올려야 하는 주일에 어떻게 주일을 성수하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저는 늘 그 사람들을 이해하는 목사가 되려고 노력을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께서 저를 깨닫게 하신 것은, 우리가 가진 신앙과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우리의 이해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순종의 관계를 맺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에는 ‘계약’이라는 말이 많이 등장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계약 백성이라는 말이지요. 그런데 하나님과의 계약이란, 동등하거나 조건적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우리가 무엇을 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우리에게 조건을 제시하셨고, 그것을 따를 것이냐 말 것이냐 만이 우리에게 달렸습니다.
그러므로 순종의 관계에 들어가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과 관계없는 사람이 됩니다.
진리는 변하지 않는 진리입니다.
진리 앞에 진실해야 합니다.
진실하신 하나님 앞에 진리를 가지고 진실하게 서야 합니다.
우리의 삶에 진실함이 드러나기 시작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기뻐하신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이 진실함 때문에 우리가 아파할 때, 하나님이 함께 아파하십니다.
하나님이 아파하실 때, 그것은 절대로 아픔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거기에는 회복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손길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손길이 닿으면 기적이 일어나게 됩니다.
기적이 일어나면, 세상이 놀라게 될 것이며, 때로 감동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지혜로 사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진실한 자의 모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