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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삼목사

[김병삼목사]건강한 자존감이 있는가(신 8:17-18)

작성자성경 벌레|작성시간23.08.24|조회수237 목록 댓글 0

건강한 자존감이 있는가(817-18)

성경본문: 신명기 8:17-18

17 그러나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말할 것이라

18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력을 주셨음이라.

이같이 하심은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오늘과 같이 이루려 하심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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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바라보기

우리가 잘 아는 유승준 씨는 가수로 성공한 사람이고, 한순간의 모든 것을 잃은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가 한 번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그 성공이 다 내 능력에서 나온 건 줄 알았어요. 다 제가 잘나서 이룬 건 줄 알았습니다."

[빛과 먹선 이야기]에 보면 아주 재미있는 비유가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요술램프에 나오는 '지니'가 있습니다. 그에게는 세 가지 소원을 이루어주는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는 가끔 지니가 능력이 있다고 착각합니다. 그 소원의 소유자는 지니가 아니라 그 램프의 주인입니다.

나에게 능력이 있지만, 그 능력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아야 합니다.

능력의 근원을 아는 사람을 성경은 '청지기'라 부릅니다.

 

자신의 능력을 안다는 것, 다시 말해 자신의 힘이 아닌 하나님의 힘이라는 것은 스스로 비참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새로운 자존감을 만들어 줍니다.

나 스스로 능력보다는 더 큰 능력을 주시는 하나님이 나의 주인임을 인정할 때, 청지기의 능력은 한없이 많아지지 않겠습니까?

 

[신명기]는 하나님의 눈으로 이스라엘의 역사를 바라보는 책입니다. 신학적인 용어로 '신명기적 역사관'이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하는 과정에서 깨닫게 된 것이 있습니다. 광야에서 고난의 과정도 하나님의 손길이었고, 가나안에 들어가게 된 것도 하나님의 역사하셨음을 고백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나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말할 것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력을 주셨음이라. 이같이 하심은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오늘과 같이 이루려 하심이니라"

 

우리가 시시때때로 유혹을 받는 것이 있습니다. 인생이 잘 풀릴 때 말입니다. 내 능력으로 되는 줄 알고 자만하는 것이죠. 아무리 요술램프의 지니가 능력이 있어도 그 능력은 주인을 위해서 쓰인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건강한 자존감'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단순히 자신을 비하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능력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끊임없이 이런 말이 등장합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오늘 본문에 보니까, 신명기적 관점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키셔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하신 것은 "네 조상에게 맹세하신 하나님의 언약" 때문이라는 말입니다.

, 우리 인간의 노력과 능력 때문이 아니라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어가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착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내가 가진 능력으로 우리 인생의 파도를 이길 수 있다고요?

우리는 얼마 전 일본을 휩쓸고 간 쓰나미 앞에서 인간이 얼마나 무능력한지를 보았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인생의 파도가 사라지는 줄 착각합니다.

하지만, 인생에서 파도는 절대 사라지지 않습니다. 단지 우리는 파도 타는 법을 배워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자존감은 나의 능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능력을 주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며 하나씩 배워나가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착각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러나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말할 것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력을 주셨음이라. 이같이 하심은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오늘과 같이 이루려 하심이니라."

그들이 자신이 가진 것을 가지고 자랑할 때,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너희가 가진 것을 주신 분이 누구 신지, 그 재물을 얻게 하신 능력을 주신 분이 누구 신지를 기억하라고 말입니다.

 

사도 바울이 하나님을 만나고 나서 깨닫게 된 것이 있습니다.

먼저는 하나님의 은혜였고, 그 은혜 앞에서 자신을 보게 된 것입니다. 이전에 깨닫지 못했던 것을, 아주 예민하게 보게 된 것이지요.

로마서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로마서 721-25절입니다.

21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22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23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여러분이 아는 것처럼 이러한 사도 바울의 고백이 그를 비참하게 만든 것이 아니라 그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 갑니다.

그의 육신의 사람이 죄 성과 연약함을 보게 되니, 하나님을 의지하게 됩니다.

 

니키 검불[인생의 의문점들]이라는 책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도 들으면서 답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한 젊은 경찰이 런던 북부에 있는 헨든 경찰 대학에서 마지막 시험을 치르고 있었다.

당신이 런던 외곽을 순찰하고 있는데 근처에 있는 주유소가 폭발했다. 조사를 해보니 인도에는 구멍이 생겼고 옆에는 차가 뒤집힌 채로 널브러져 있다. 차 안에서는 강한 알코올 냄새가 나고 있다. 차 안의 두 사람 모두 - 남자와 여자 - 는 상처를 입었다.

그 여자는 지금 멀리 미국에 나가 있는 당신 구역의 경위의 아내이며, 당신은 그녀를 알고 있다. 오토바이를 몰고 지나가던 사람이 멈추어 서서 당신을 도와주겠다고 하는데, 당신은 그가 무장 강도 용의자로 수배 중인 사람임을 알아본다.

갑자기 근처 집에서 한 남자가 뛰어나오며 자기 아내가 임신 중인데 폭발의 충격으로 곧 출산하려 한다고 외친다. 또 다른 사람이 도움을 청하고 있는데, 그는 폭발로 인해 가까이 있는 수로 속에 빠졌으며 수영을 할 줄 모른다.

정신 보건법 조항들을 염두에 두고, 어떤 행동을 취할 것인지 간략하게 써라.”

그 경찰은 잠시 생각한 후, 펜을 들어 이렇게 썼다.

제복을 벗고 군중 속에 섞이겠다.”

 

혹시 여러분은 어떤 대답을 쓰셨나요?

그 사람의 대답이 충분히 이해가 가지 않으시나요?

그냥 보이지 않는 누구인가라면 고민하지 않아도 될 일을, 제복을 입고 사명이 있기 때문에 고민해야 하는 순간이 찾아옵니다.

 

크리스천으로서 크리스천 제복을 벗고 군중 속에 섞이는 것이 더 쉬울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크리스천인데 그 정체성을 버린다고 행복하겠습니까?

경찰이 제복을 벗고 군중 속에 숨어 버린다고 그의 책임을 면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자신을 보아야 합니다.

명확하게 두 가지 문제에 직면합니다.

하나는, 어떤 상황에든 우리가 답해야 하는 때가 온다는 것, 다른 하나는, 어떤 상황도 우리의 힘으로 완벽하게 해결할 수 있는 일들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것.

이러한 사실이 우리로 하여금 절망감을 심어주고, 우리의 자존감을 앗아갑니까?

아니지요.

하나님의 관점에서 우리를 보는 것입니다.

건강한 자존감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확실하게 구분하는 것입니다.

 

건강한 자존감

하나님의 능력을 인정하면 우리가 초라해지지 않겠습니까?

아닙니다. 이것이 신앙의 역설입니다.

우리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인정하면 정말 이상한 자존감이 생깁니다. 왜냐하면, 어떤 인간도 자신의 능력을 갖추고 건강한 자존감을 가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어떤 인간도 자신에 대하여 절대로 만족하지 못하도록 하나님이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신앙의 법칙입니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인간은 절대로 만족하지 못하고, 만족하지 못하는 인간은 절대로 감사하지 못하고, 감사하지 못하는 인간은 절대로 행복하지 못하며, 행복하지 못한 인간의 자존감은 무너져 내리게 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을 기억하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제 그 능력 앞에서 시편 기자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시편 13914절을 보세요.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심히 기묘하심이라. 주께서 하시는 일이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

 

가끔 저는 설교할 때, 이렇게 묻습니다.

"자신이 잘 났다고 생각하는 사람 손들어 보세요."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드물거니와 손을 드는 것도 좀처럼 쑥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잘났다?" 누구와 비교한다면 이 세상에 누가 모든 면에서 잘났다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사람들은 참 이상하지요. 자신들이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나은 것에 행복감을 느끼기보다는 못한 것에 대한 열등감을 오래오래 간직하며 산다는 것입니다.

제가 목회자 세미나를 하면서 제일 곤혹스러울 때가 그렇습니다. 아무리 이야기를 하고, 강의를 해도 "목사님은 부모를 잘 만났으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부모를 잘 만났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 부모를 주신 분이 누구입니까?

오늘 우리가 있는 이 환경들은 누가 만들어 주신 것입니까?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작품이라는 것을 인정할 때, 다른 태도가 나오지 않겠습니까?

 

이 신앙에서 좀 더 나은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나오는 것이지요.

시편 13914절에서 시편 기자가 시인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자신이 잘났다고요?"

아닙니다. 단지 하나님이 자신을 "심히 기묘하게 지으셨다!"라는 고백입니다.

이것이 건강한 자존감입니다.

 

제가 St. Petersberg의 에르미타주 박물관에 갔을 때입니다. 많은 그림을 시대별 장르별로 보는데 아무리 설명을 해도 좋아 보이지 않는 그림들이 있습니다. 앙리 마티즈의 그림의 원색적인 모습, 원근감을 파괴하나 그림들, 또한 피카소의 그림.

저는 피카소를 추상파 작가라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그가 보고 느낀 대로 그린 인상파라는 설명을 들었습니다. 피카소를 인정하는 것은 그가 느낀 것을 위대하다고 인정할 때 가치가 있습니다.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그의 그림은 가치가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건강한 자존감은 누구와의 비교가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그렇게 지으신 것에 대한 인정입니다. 하나님의 작품으로서의 나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때 건강한 자존감이 생기고, 우리에게 펼쳐지는 세상을 하나님이 행하시는 그대로, 있는 그대로 바라보게 됩니다.

이것을 인정하지 못하면 세상이 꼬이게 보입니다.

누군가가 나를 모함하는 듯합니다. 누군가 속닥거리면 나에 대하여 부정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 같습니다.

 

제가 학창시절 참 좋아했던 시인이 있습니다.

특히 윤동주 [서시]를 좋아했는데요. 지금 보니 그가 참 신앙의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의 신앙의 양심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던 것 같습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 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전에는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이제는 잎 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의 삶을 바라보게 됩니다. 전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느끼는 죄들이 나에게 아주 예민하게 다가옵니다. 마치 더러운 곳에서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는 것입니다.

 

그런 경험이 있으시지요?

문틈으로 들어오는 햇볕에 뿌연 방의 먼지가 보이는 것 말입니다. 그 빛이 아니었더라면 결코 미세한 먼지가 보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빛이 아니었다면, 결코 볼 수 없었을 우리의 양심이 보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지 않았다면 결코 볼 수 없었을 우리의 적나라한 모습이 드러납니다.

그런데 그것이 절망으로 우리를 이끄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이끄시는 새로운 하나님의 능력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면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두 가지 측면이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우리가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013절을 보세요.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다음은 [빛과 먹선 이야기]에 나오는 그림입니다..

"고난을 이겨내려고 애쓰지 마세요.

그냥 잘 버티고 있으세요.

당신이 잘 버티고 있으면 고난은 자신의 때에

당신을 스쳐 지나갈 것입니다."

 

참 멋진 이야기이지요?

우리가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던 때, 정말 내가 무능해서 하찮게 여겨지고, 오히려 세상에 없었던 것이 좋았을 것으로 생각하던 때가 있지 않았나요?

그러나 우리는 지금 모든 것이 지나간 지금을 살지 않으신가요?

예레미야 2910-11절을 보세요.

10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바벨론에서 칠십 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돌보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성취하여 너희를 이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11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여러분이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시절을 지나가고 있다 해도 이스라엘 백성이 겪었던 70년의 포로생활보다 더한가요?

이제 바닥까지 내려왔다면 올라갈 일만 남지 않으셨나요?

여러분이 가장 힘들다고 생각하는 때가 절망이 아니요, 여러분의 삶의 재앙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오히려 우리에게 소망을 주시는 분이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앨리스터 맥 그래스라는 사람이 참 멋진 이야기를 했습니다.

"의심은 믿음의 또 다른 얼굴이며, 회의는 확신의 또 다른 이름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우리는 새로운 일들을 보게 됩니다.

혹시 여러분은 뜻대로 되지 않는 인생 때문에 실망하십니까?

아니면 인생은 내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기뻐하십니까?

똑같은 것 같지만, 완전히 다른 두 생각이 우리의 인생을 완전하게 바꿔놓을 수 있다는 것이 놀랍지 않습니까?

오늘 여러분은 어떤 생각을 하시며 자신의 모습을 보고 계시나요?

 

이제 여러분이 그렇게 불평하던 인생의 고난과 좁은 길을 보는 다른 시각이 존재합니다.

참 멋진 이야기입니다.

우리의 인생이 "좁은 길"로 느껴지십니까? 당연하지요. 당신만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만들어주신 길이 어떻게 넓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참 재미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등산을 하다 보면 좁고 험한 길이 지름길일 경우가 많습니다. 그 길이 너무 험하므로, 너무나 버거우므로 돌아가는 길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때로 우리의 인생을 돌아가야 할 때도 있지만, 아무리 좁고 험해도 그 길로 가야 할 때가 있습니다.

 

바로 당신의 길은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이기에 험하다고 생각해 보지 않으셨나요?

당신의 길이 어둡다면, 아무도 가 본 길이 아니기 때문이 불이 들어와 있지 않을 것입니다로. 그래서 조금은 더 어둡고 삭막하게 여겨질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님께서 여러분을 인도하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령님이 우리의 길이 되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보혜사 성령님은 우리를 돕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은 늘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면 우리가 연약해서 참 다행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연약해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을 때, 우리는 돕는 손길을 경험하게 됩니다.

 

믿음의 사람 다윗의 위대함은 그가 늘 어려움을 당할 때였습니다.

그는 인생의 극한 어려움을 당하며 돕는 손길을 경험합니다.

사무엘 상 221-2절을 보세요.

"그러므로 다윗이 그 곳을 떠나 아둘람 굴로 도망하매 그의 형제와 아버지의 온 집이 듣고 그리로 내려가서 그에게 이르렀고 환난 당한 모든 자와 빚진 모든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다 그에게로 모였고 그는 그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는데 그와 함께 한 자가 사백 명 가량이었더라."

 

연약해서 다행입니다.

다윗은 그의 인생의 가장 험하고 연약한 시절에, 믿음의 동역자를 만납니다.

당신이 연약해서 참 다행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연약해서 참 다행입니다. 하나님이 능력을 체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연약해서 참 다행입니다. 이제 하나님이 일하실 때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연약해서 참 다행입니다. 당신을 돕는 좋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연약해서 참 다행입니다.

 

요즘 쓰는 말로 "미친 자존감"이 마구 생기지 않나요?

당신이 연약해서 참 다행입니다. 무엇이 연약한지, 그래서 하나님이 어떻게 당신의 삶에서 개입하고 계시는지를 고백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김춘수 님""이라는 시에 나오는 대목입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우리의 가장 건강한 자존감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시고, 우리의 이름을 불러주셨습니다. 이는 건강함에서 나오는 우리의 행위를 "사역"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연약해서 다행입니다.

그래서 그저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아갈 뿐입니다.

에베소서 210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우리는 종종 우리의 이름을 불러주는 이가 없을 때 견딜 수 없습니다.

우리의 존재감이 느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아무리 부인을 해도 성경은 우리에게 계속해서 말씀하십니다.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의 목적이 있다고 말입니다.

그것도 '선한 일'을 위해 우리를 지으셨노라고, 그래서 우리가 그렇게 살아야 하는 이유가 있노라고 말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견딜 수 없는 심연의 고독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아무도 우리를 알아주지 않고 도와주지 않는 곳에서 망망대해에 홀로 떠있는 것 같은 외로움이 엄습해 오기도 합니다.

 

아무도 이해해주지 않는 고난 가운데서 혼자 숨죽여 울어야 할 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때 우리의 자존감이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건강하게 세워지는 우리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믿음의 사람 다윗이 그의 자존감이 여지없이 무너졌을 순간에 이런 고백을 하고 믿음을 지켰습니다. 아니 자신을 지켰습니다.

시편 13913절입니다. 주께서 내 내장을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만드셨나이다"

 

누구도 내 아픔의 눈물을 이해하지 못할 때, 그 누구도 나의 슬픔의 눈물을 닦아줄 수 없을 때 소리 없이 다가오시는 분이 있습니다.

아무도 나를 눈여겨보지 않을 때 변치 않는 특별한 사랑으로 다가오시는 분이 있습니다.

그리고 깨닫는 것이 있습니다.

", 그분이 나를 지으셨구나!"

"그분이 나를 알고 계시는구나!"

", 내 이름을 불러 주시는구나!"

"그래! 그런 존재구나!"

 

제가 개인적으로 아주 좋아하는 찬양 중의 하나인데 토미 워커라는 찬양 사역자가 작사 작곡한 <내 이름 아시죠>라는 찬양입니다.

최근에는 그 찬양을 듣고 전 세계에서 보낸 치유와 회복의 간증을 모아 <내 이름 아시죠 / He Knows My Name이라는 책을 냈습니다.

 

그 책 가운데 찰리의 점심식사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찰리는 태어날 때부터 심장에 큰 구멍이 두 개나 뚫려 있는 선천적인 문제를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의사는 마지막으로 찰리를 안아주고 작별인사를 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수많은 중보자의 기도로 생명을 구했습니다.

 

찰리는 태어난 지 두 달 만에 첫 번째 심장 수술을 받았습니다. 세 살 때 수술을 두 번이나 더 받았습니다. 그 후에도 심장 박동을 조절하기 위해 세 차례나 수술을 받았습니다. 수없이 병원을 드나들며 정성껏 치료한 결과 찰리는 힘은 들었지만, 비교적 건강하게 자랐습니다.

그런데 13살 되던 어느 날 강아지를 좇아가다 넘어지는 바람에 심장박동에 이상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병원으로 옮겨진지 15분 만에 하늘나라로 갔습니다.

그때 가족들의 충격은 너무나 컸습니다. 밀려오는 슬픔과 고통으로 숨조차 쉴 수 없었습니다.

 

찰리의 장례식장에 부른 찬양이 바로 나를 지으신 주님이었습니다.

 

나를 지으신 주님 내 안에 계셔

처음부터 내 삶은 그의 손에 있었죠

내 이름 아시죠. 내 모든 생각도

내 흐르는 눈물 그가 닦아 주셨죠

 

그는 내 아버지 난 그의 소유

내가 어딜 가든지 날 떠나지 않죠

내 이름 아시죠 내 모든 생각도

아바라 부를 때 그가 들으시죠

 

비록 찰리13년의 짧은 생을 살다가 하늘나라에 갔지만, 하나님은 그를 향한 분명한 계획을 세우고 계셨습니다. 당시에는 왜 하나님께서 이런 아픔과 고통을 찰리와 가족에게 안겨주시는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찰리의 아픔과 고통을 통해서 더 큰 역사를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찰리가 세상에 있는 동안 매일 점심식사를 싸주어야 했습니다. 찰리가 천국에 간 후 하나님께서는 찰리의 부모에게 날마다 찰리에게 싸주어야 했을 점심을 굶주린 어린이들에게 먹이는 일을 시작하게 하셨습니다.

그것이 오늘의 찰리의 점심식사라는 긍휼사역으로 이어져 매일 12곳에서 약 1천 명의 어린이들에게 점심을 제공하는 사역으로 발전했습니다.

얼마를 살다 죽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우리를 지으신 삶에 대한 자존감이 있느냐의 문제입니다. 이 땅 위에 정말 좋은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사람들인가요?

나를 창조하시고, 나를 인도하시는 분명한 자존감이 살아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살아가야 하는 이유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연약함을 자랑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묵묵히 살아야 하는 목적이 있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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